#1. Crank In
*본 작품 속 인물, 기관, 사건, 배경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허구임을 밝힙니다.
약속 장소는 회사와 멀지 않은 레스토랑이었다. 우윤은 먼지가 낀 버스 창 위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아직도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조금 눌린 머리를 매만지던 그는 급하게 하차 벨을 눌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막 파란불이 켜진 건널목을 건넜다. 그리고 제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을 살피며 마스크를 조금 더 올렸다. 약속 장소는 길을 건너 한 블록 앞. 멀리 보이는 건물 입구엔 구름 떼 같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때, 급히 걷던 윤은 어깨에 닿는 큰 충격과 함께 멈춰 섰다.
“헐, 죄송해요!”
윤은 아릿한 어깨를 쓸며 제게 사과하는 학생을 보았다. “야, 빨리 와!” 윤을 밀치고도 정신없이 내달리던 학생들은 곧 인파 사이에 합류했다. 뭔데 저래? 윤은 못마땅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슛 들어가겠습니다!”
건물 앞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긴 머리를 한 여자 하나. 이쪽 편을 보고 선 남자 하나. 사람들은 가운데 선 두 사람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있었다. 아까의 학생들을 포함하여.
“액션!”
이게 웬 시장통이야. 눈을 가늘게 뜬 우윤은 촬영진이 설치해 둔 라인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레스토랑은 2층이었다. 곧장 엘리베이터로 간 그는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숫자 표시기엔 ‘점검’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일이 꼬이는 게 한두 번이냐마는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렸다.
작게 한숨 쉰 그가 비상구 문을 열어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윤은 푸른빛이 도는 내부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정갈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약간 헐떡이는 그에게 미소 지었다. 작게 목례한 그는 유리문을 보며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마스크를 벗었다. 직원들은 까만 마스크가 사라진 얼굴을 보고 서로 놀란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는 한여름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싸맨 워스트 드레서였지만 얼굴만큼은 출중했다. 얇은 쌍꺼풀이 자리한 큰 눈이 내부를 살피다 다시 직원에게로 붙었다.
“혹시 혼자 오신 분 계신가요?”
“아뇨, 다 두 분 이상이십니다.”
다행이었다. 차라리 상대가 늦는 편이 마음 편했다. 윤은 직원이 안내하는 좌석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점심부터 와인을 마시는 테이블들이 많았다. 개중 한 남성의 눈길이 오랫동안 그를 훑었으나 윤은 모른 척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테이블에 있는 메뉴판을 열어 읽어 나갔다. 상대도 식전주를 원할 수도 있었다.
모스카토…… 스푸만테, 군트럼 로열 블루. 이게 다 뭔 소리야?
얼굴을 찡그린 윤이 작은 설명문을 일일이 정독했다. 약속 시간에서 10분이 지났을 즘 누군가 테이블을 두드리곤 자리에 앉았다. 윤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늦었죠. ……입니다.”
“아, 예…….”
미안하지만 남자의 이름은 듣자마자 까먹었다. 입술에 있는 피어싱 모양이 대체 뭔지 살펴보느라. 저게 뭘까? 물에 불린 곰팡이 같기도 하고. 양아치는 딱 질색인데. 남자의 새빨간 머리가 푸른 벽과 대비되어 눈이 아팠다.
“성함이?”
“우윤입니다.”
상대는 짐을 정리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 오메가 같으시네. 베타 여성분이라 들었는데.”
“…….”
“실례가 안 된다면, 여성분은 맞으신…….”
“남성이거든요?”
실례가 아니긴. 굉장한 실례였다. 부탁을 받고 나온 소개팅 자리만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편견을 드러내는 사람은 기피했을 것이다. 불쑥 나온 윤의 성질머리에 테이블 위는 짧은 침묵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잘못은 우윤에게 있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그는 작은 헛기침 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속이고 나와서 죄송합니다. 베타 여성 최현 씨가 급한 약속이 생겨서요. 아무래도 당일 파투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대타로나마 찾아뵙게 됐습니다.”
“아……. 굉장히 예쁘셔서 뭐. 괜찮습니다.”
거짓말은 아닌지 남자의 눈은 오히려 반짝거렸다. 소개팅 상대가 양성애자라는 정보는 받았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윤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다듬고 “일단 무얼 드실 거냐.” 물었다. 이어 빨간 머리가 메뉴를 고르고 윤이 웨이터를 불렀다. 식사와 식전주를 시키자 남자의 입이 한껏 벌어졌다. 주당인 듯했다.
메뉴가 나오는 동안 남자는 질문 폭격을 이었다. ‘연애 스타일’로 시작된 질문은 어느새 ‘원하는 결혼 시기’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갔다.
“뭐……. 잘 맞는 사람 생기면…….”
윤은 남자의 질문에 그의 어깨 부근만 쳐다보며 얼버무렸다. 그리고 웨이터가 무알콜 와인을 따라 주자마자 잔을 입으로 직행시켰다. 상대는 윤을 빤히 바라보며 와인을 삼켰다. 그 시선이 얼마나 따가운지 윤은 견디다 못해 창밖을 바라봤다. 1층은 여전히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차라리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상대도 윤이 보는 방향을 따라 눈알을 굴렸다.
“푸웁!”
“…….”
남자의 턱을 타고 빨간 물이 흘렀다. 윤은 볼에 튄 와인을 냅킨으로 천천히 닦아 냈다.
“이컹건이잖아…….”
여전히 창문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남자가 입에 술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때, 아까 시켰던 메뉴가 테이블 위로 나왔다. 윤은 그 장면을 못 본 척하며 포크를 들었다. 괜히 예의 차리겠다고 냅킨 같은 걸 챙겨 주고 싶지도 않았다.
“대단한 사람인가.”
윤은 혼잣말하며 파스타를 포크로 둥그렇게 말았다. 아직 오후 업무가 남았으니 밥을 먹고 들어가야 했다. 상대는 알아서 입가를 닦더니 팔을 휘둘렀다.
“이청건이요, 이청건. 모르면 간첩인데? 이번에 해외 시상식에서도 상 탔는데? <이불 속> 안 봤어요? 와 씨, 실물 미쳤네.”
“…….”
이불 속이라니. 문란한 영화는 아닌지 의심되었다. 남자는 창에 들러붙은 채 손만 뻗어 찍은 파스타를 입에 대충 욱여넣었다. 윤 또한 파스타를 한 입 먹으며 바깥을 다시 보았다.
촬영은 잠시 휴식에 들어간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촬영 중이었던 여자가 남색 머리 남자의 어깨를 치며 웃고 있었다. ‘이청건’으로 보이는 남색 머리는 내리쬐는 햇볕에 손차양을 만든 채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높다란 콧대가 만드는 그림자를 보던 윤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파스타를 마구 씹던 남자가 빈 포크로 윤을 가리켰다.
“연예계 쪽에 관심이 없나 봐요? 신기하네.”
윤은 대답 없이 파스타를 최대한 많이 입안으로 넣었다.
“음, 이러면 오히려 좋은가? 반대가 끌린다는 말도 있잖아요.”
와인을 물처럼 들이켠 남자는 다시 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두 볼이 빵빵해진 윤은 파스타를 억지로 씹어 목구멍 안으로 넘기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그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가시게요?”
윤은 일어선 채로 입을 닦다가 테이블 위로 냅킨을 던졌다.
“아뇨. 회사요. 계산은 하고 갈게요. 이청건인지 뭔지 구경 잘 하고 가시고요.”
“……예?”
남자는 미련 없이 가 버리는 윤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피어싱을 스친 파스타 한 가닥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상대는 정말 윤이 가는 거라 생각하지 못하는지 눈만 끔벅였다.
계산을 마친 윤은 칼 같은 걸음으로 레스토랑 문을 나섰다. 알파만 쓰레긴 줄 알았더니 베타도 복불복이라니. 윤의 몸속에서 인간에 대한 혐오가 꿈틀거렸다. 그는 이 정도면 충분히 예의 있는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이딴 알바는 두 번 다시 안 하리라 다짐했다.
점심시간 10분을 넘겨 회사로 돌아가니 평소엔 업무에 관심도 없던 바지 사장이 나와 있었다. 근래 출근 빈도가 늘었다 싶었는데 걸려도 하필 오늘이라니. 윤은 1시간 내내 이어지는 개소리를 듣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퀭한 얼굴로 의자에 앉는 윤을 보며 맞은편에 있던 최현이 손을 뻗었다. 똑똑. 윤은 가림막을 두드리는 최현을 바라보았다. 난감한 듯 눈웃음 지은 그녀가 허리까지 오는 생머리를 넘기며 속삭였다.
“대타 고마워요. 식사비 고려해서 5만 원 추가. 15만 원 입금했어요.”
“네, 감사해요.”
윤은 포토샵을 열며 영혼 없이 중얼댔다. 그래 봐야 식사비 독박값, 아니면 알파 변형 알약 세 알 값밖에 안 되었다. 명백한 손해다.
“어떡해, 윤 씨 안색 봐.”
윤을 살피던 소라가 옆에 앉은 최현을 홱 돌아보았다.
“현 씨는 친구도 많으면서 왜 윤 씨를 대타로 써요.”
“아니 뭐, 갑자기 일이 생길 줄 알았나요…….”
“내가 결과 안 좋을 줄 알았다니까. 원래 인연은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진짜예요. 진짜.”
소라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윤은 제 편이 생긴 김에 말을 얹었다.
“그 사람 소개해 준 분이랑 인연 끊는 게 어때요.”
“울 엄마 친군데.”
“…….”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최현이 혀를 찼다.
“그렇게 별로였어요? 미안해서 어째.”
윤은 대답 대신 한숨만 작게 쉬었다.
그때 사장이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업무로 돌아간 셋이 마우스를 놀렸다.
사장은 곧 소라의 뒤로 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윤은 소라의 단발 사이를 파고든 퉁퉁한 손가락을 흘끔 바라보았다. 모니터를 가리키며 설명하던 사장이 이내 허리를 폈다. 그러다 대각선에 앉은 윤과 눈이 마주치면 남자는 미간을 좁혔다.
“뭐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윤은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하여튼 싱거워 가지고…….”
중얼대던 사장이 멀어졌다. 윤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업무에 정신을 집중했다. 오늘만은 야근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이틀 후가 마감인 프로젝트 파일을 서둘러 작업했다. 일주일가량 시간이 남은 일까지 미리 처리했다.
쉬지 않고 집중하던 윤이 결국 의자 위로 늘어졌다. 마침 사장실에서 나온 사장이 전화를 받으며 복도 너머 화장실을 가고 있었다. 사장을 흘끔 쳐다보던 윤이 이번에는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오후 6시였다. 거지같은 하루에 실낱같은 위안이다. 윤은 뒤도 안 돌아보고 컴퓨터를 종료했다.
“먼저 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윤에 최현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튀죠, 같이.”
“좋습니다.”
“수고해요. 소라 씨. 난 먼저 갑니다아~!”
“완전 부럽다.”
죽는 소리를 내는 소라 뒤로 최현이 신나게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검은 블레이저를 챙겨 입은 윤이 그 위로 검은 메신저 백을 걸쳤다. 그는 유리문을 열고 나가는 최현을 뒤따르려다 잠시 멈칫했다. 자신까지 나가면 사무실에는 사장과 소라만이 남는다. 불안한 시선으로 화장실이 있는 쪽을 바라보던 윤이 마우스를 움직이는 소라를 돌아보았다.
“소라 씨도 일찍 가요.”
“우와……. 저 걱정해 주는 거예요? 윤 씨가 웬일이야.”
소라가 눈썹을 팔자로 좁히며 말했다. 윤은 어색한 얼굴로 가방끈을 살짝 잡았다.
“그냥, 요새 계속 야근이었잖아요.”
소라가 작게 웃었다.
“알았어요. 사장님이 시키신 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 걱정 말고 얼른 가요.”
아까 전에 소라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던 게 이 일인 듯했다.
“네. 먼저 가 볼게요.”
“좋은 주말 되시고요!”
작게 눈인사한 윤이 유리문을 젖혀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저 멀리서 엘리베이터를 잡고 손짓하는 최현에게 가볍게 뛰어갔다. 곧 회색 문이 닫히고 5층을 가리키던 숫자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여름의 지열이 훅 끼쳐 왔다. 땀이 잘 나지 않는 편이었지만 니트에 파묻힌 몸만큼은 열기에 익어 갔다. 그는 사무실 건너편에서 6시 30분 도착 예정인 버스를 기다렸다. 양발을 의미 없이 까딱이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의 시선이 와 닿았다. 윤은 기민하게 그 시선을 눈치채곤 팔짱을 끼며 다른 쪽을 보았다. 오늘 같은 더운 여름에 폴라 티를 입었기에 따라붙는 시선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다 문득 5층 사무실을 올려다봤다. 몇 초를 가만히. 그 순간 5층 불이 전부 꺼졌다. 윤은 다시 1층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러나 사장도, 소라도 나오지 않았다.
마침 버스가 도착하며 윤의 시야를 막았다. 치이익. 빨간 문이 아코디언처럼 젖혀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앞문 계단을 바라보며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안 타요?”
윤이 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기사 아저씨가 크게 소리 냈다. 윤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뭐야.” 하고 작게 중얼대다 문을 닫고 출발했다. 검은 매연이 윤의 몸을 와락 덮쳤다. 그 순간 윤은 신호등이 깜빡이는 건널목 위를 달렸다. 클랙슨 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윤은 건물 문을 젖히며 경비 아저씨에게 사원증을 빠르게 보였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서둘러 간 그가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아무리 알파라지만, 사장은 유부남이잖아. 뭘 걱정하는 거야. 그러나 스스로를 달래는 목소리가 확신 없이 흐릿했다. 6층에서 오래 머무는 숫자에 초조하게 서 있던 그는 비상구로 뛰어 올라갔다. 가방 속을 휘저어 병마개를 뽑아낸 윤이 쏟아지는 알약 중 하나를 잡아 입에 넣고 씹었다.
5층에 다다르자 묵직한 비상구 문을 젖히고 사무실 앞까지 뛰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지만, 유리문은 역시 잠겨 있었다. 그는 사원증을 들어 센서에 찍었다. 그리고 자동문이 젖혀지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억지로 열며 들어갔다. 오후의 푸른 불빛이 잠잠히 번진 내부는 소름이 끼칠 만큼 조용했다.
그때 창고 쪽에서 무언가 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던 윤의 고개가 돌아갔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계속 눈치를 줬잖아. 너도 아는 거 아니었어?”
익숙한 목소리 뒤로 걸걸한 목소리가 섞였다. 소라의 짧은 비명에 윤의 어깨가 들썩였다. 수없이 상상해 왔던 장면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겁탈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소라였지만.
뿌옇게 겹치는 시선에 얼굴을 털어 낸 윤은 우선 벽에 붙은 스위치를 한 번에 켰다. 순식간에 전체 점등이 된 내부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시에 실랑이하던 소리가 뚝 멈췄다. 그는 슬라이딩 도어 버튼을 눌러 창고 문을 열었다. 안쪽은 쓰러진 물건으로 어지러웠다. 그사이에서 소라를 벽에 가둔 사장이 뒤를 돌았다.
“씨발, 뭐야?”
“무슨 짓이에요, 지금?”
“윤 씨……!”
어깨를 잡은 사장의 손힘이 느슨해진 틈에 소라가 몸을 비틀어 윤에게로 뛰어갔다. 윤은 휘청거리는 그녀를 잡아 부축했다. 뒤에서 두 사람을 노려보던 사장이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헛숨을 터뜨렸다.
묘한 향이 내부에 진동하고 있었다. 노상 방뇨. 썩은 풀. 오래된 음식물 냄새. 온갖 역겨운 냄새가 윤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분명 알파의 러트 페로몬이었다. 이렇게 되면 알파 약을 먹고 온 게 외려 역효과였다. 힘이 더 생기기는커녕 상극인 페로몬에 숨이 막혔다.
“뭔데 방해를 하냐고, 이 썅……!”
이성을 잃은 사장이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졌다. 윤은 소라가 맞지 않도록 그녀를 잡아당겼다. 순간 발목에서 아릿한 통증이 스쳤으나 윤은 곧바로 스위치를 더듬어 창고 문을 열었다.
“소라 씨, 나가요 빨리.”
“그럼 윤 씨는…….”
“괜찮을 거예요. 우선 나가서 경찰을 불러요.”
잠시 시간을 벌 참이었다. 윤의 속삭임에 소라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둘의 얘기를 듣지 못한 듯 남자는 피곤한 기색으로 손을 까닥였다.
“우윤. 너 이리 좀 와 봐라.”
그는 발음이 점차 불분명해졌다. 알파의 발정기인 러트 사이클은 약이 없으면 막기 힘들었다. 남자는 분명 이성을 잃어 뒷일을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일 것이다.
“당신 이러는 거 내가 목격자예요. 러트 때는 집에 박혀야 정상이고요. 억제제는 있어요? 약 없이 돌아다니면 가중 처벌되는 건 알고…….”
“너 오메가였냐?”
윤의 말을 끊은 남자는 의아한 얼굴로 코를 킁킁대며 걸음을 옮겼다.
“풀 향도 아니고…… 과일 향도 아닌 게. 그새 오메가랑 뒹굴기라도 한 거냐?”
베타인 윤에게서 오메가 향이 날 리 없다. 러트를 맞아 남자의 예민해진 후각이 두려움에 흘러나왔을 인공 알파 페로몬을 느낀 것이다.
윤은 목 티를 코 앞까지 끌어 올리며 철제 선반 뒤로 몸을 숨겼다. 가구로 어질러진 따분한 창고에서 처음으로 불안감이 들었다.
“얌전한 놈이 더한다더니.”
윤은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던 알파는 돌연 팔을 뻗어 윤의 턱을 틀어쥐었다. “이 새끼들이 뒤에서 잘도 놀아나고 있었네.” 이를 가는 사장에 윤은 헛숨을 흘렸다. 사장은 소라와 자신의 사이를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을 네가 키운 거야.”
제게 잘못을 떠넘기는 목소리를 듣던 윤은 곧 사장의 바지춤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깨닫고는 말했다.
“……짐승 새끼.”
“……지금 뭐라 그랬어.”
“짐승 새끼라고 이 개새끼야.”
눈을 홉뜨는 윤의 기세에 사장이 멍청한 얼굴을 했다. 잠시 넋을 놓던 남자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순식간에 윤을 밀어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동시에 윤이 잡고 있던 철제 선반이 큰 소리로 넘어지며 물건을 쏟았다.
그 와중에도 사장은 폴라 티를 무자비하게 들춰 그의 상체에 손을 넣었다. 이거 놔……! 안색이 새파래진 채 양손을 휘젓던 윤이 쏟아진 물건 하나를 가까스로 집었다. 그리고 윤은 그 무거운 물체를 알파의 뒤통수로 힘껏 내리쳤다. 알파는 억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윤은 남자의 골반을 발로 밀치며 일어섰다.
“저…… 이씨…….”
숨을 몰아쉬던 윤은 내려간 가방을 끌어 올리며 걸어가 창고 버튼을 세게 눌렀다. 사무실 밖으로 정신없이 나가 위층에서 오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흐트러진 채 서 있는 윤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윤은 고개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닫혀 가는 문 사이로 머리를 잡고 창고를 나서는 사장이 보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출발하자마자 회색 문 위로 엉망이 된 가짜 알파 하나가 비쳤다. 그리고 동승자 하나가 코를 틀어막았다. 사장의 페로몬 향을 맡은 게 분명했다.
건물을 도망치듯 빠져나간 윤이 마침 출발하려는 버스를 잡아타는 순간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소라가 넣은 신고일 것이다. 윤은 1인용 좌석에 쏟아지듯 앉아 의자 등으로 고개를 젖혔다. 긴장이 풀리면서 그제야 몸 구석구석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회사 앞에 경찰차가 섬과 동시에 버스가 출발했다. 윤은 힘 빠진 손으로 뻑뻑한 창문을 열었다. 유독 욱신대는 손바닥을 보니 피가 흥건했다. 철제 선반이 넘어졌을 때 튀어나온 못에 찢긴 듯했다. 세찬 바람이 들어와 역겨운 페로몬 향을 흩어 냈다.
“……개 같은 알파 새끼들.”
윤은 다른 일은 몰라도 이런 일들엔 기민했다. 어린 시절부터 오메가로 오해를 받아 봉변을 당할 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장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해 먼저 집으로 향했다면 어떤 결과가 생겼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다행스러움 뒤에 제가 백수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따라붙었지만, 당장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는 바지 위로 핏물을 닦아 내곤 창 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달동네로 돌아온 그는 계단을 밟다 말고 걸음을 멈춰 섰다. 높다랗게 이어진 돌계단을 올려다보던 그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평소라면 한두 명이 다닐까 말까 하던 계단 위가 온갖 촬영 장비와 촬영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이 더 많이 북적이는 맨 위쪽의 윤의 집 근처가 촬영지인 듯했다.
윤은 질린다는 얼굴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흐트러져 있는 옷을 여미고 가방을 뒤졌다. 그러나 그 안엔 뚜껑이 열려 흩어진 알파 약만 가득하고 마스크가 없었다. 그는 최대한 반대쪽 건물에 몸을 붙여 계단을 올랐다.
중간쯤까지 오르자 촬영지인 건물 옥상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내려왔는지 계단엔 아까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장비가 늘어진 것을 곁눈질하던 윤은 순간 제 앞을 막아서는 사람에 흠칫 놀라며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근처 사세요?”
윤은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를 올려다봤다. 목이 꺾이듯 넘어갔다. 키 되게 크네, 가 순간적으로 든 감상이었다. 다음으로 본 것은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남색 머리. 어딘가 낯익은 얼굴.
몇 초 후 윤은 그를 알아보았다. 본의 아니게 소개팅 자리를 파투 놓아 준 배우였다. 점심때의 일을 떠올리던 윤은 말없이 그를 비켜 걸었다. 땅으로 꺼질 것 같은 피로가 느껴졌다.
저기. 뒤에서 다시 윤을 불러 세우려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냉정하다시피 계단을 오르는 윤을 따라가며 말했다.
“저기……. 전데.”
“…….”
“그, 이청건인데.”
결국 윤은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보자 남자가 두 계단 아래 멈춰 서 있었다.
“그런데요.”
“……네?”
“용건이 뭔데요.”
“아, 그게.”
볼을 긁던 그가 민망하게 웃음 지었다. 남자의 볼 위로 보조개가 슬쩍 패었다. 사나운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글서글한 웃음이었다.
“혹시 나 보면, 하고 싶은 얘기 없어요?”
“…….”
“있잖아요. 그. 다들 하시는……. 아.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뒷머리를 쓸던 남자는 대답을 종용하듯 눈 크기를 살짝 키웠다. 윤은 피곤한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볼 안쪽을 씹었다. 삐딱한 시선으로 남자를 훑기를 잠시, 윤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연예인이 이러고 다녀도 돼요?”
“네?”
윤은 조금 커진 상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귀찮은 사건에 더 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유명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피해야 했다. 두 계단 아래 있으니 이제야 키가 엇비슷한 남자를 하잘것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쪽도 내가 좋냐고요.”
“……네?”
남자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윤은 부러 불쾌한 기색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맞든 아니든 다른 사람 알아보시죠. 난 처음 보는 사람하고 할 얘기 없으니…….”
하얀 손이 부드럽게 잡혀 내려간 것은 그때였다. 윤은 제 손을 응시하는 남자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피 엄청나요. 깊게 찢어진 것 같은데…….”
창고에서의 일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였다. 반사적으로 남자의 팔을 뿌리친 윤이 중심을 잃고 되레 휘청거렸다. 그리고 허공을 디딜 뻔한 몸을 청건이 재빨리 붙잡았다.
눈을 꾹 감았다 뜬 윤은 상대의 가슴 위를 짚은 제 손을 멍하니 보았다. 묘한 침묵 뒤에 황급히 손을 뗀 윤이 뒷걸음쳤다.
“벼, 변태 새끼.”
곧바로 뒤돌아 뛰어가는 윤을 멍하니 보던 청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똑같은 표정의 카메라맨과 눈이 마주쳤다.
“저보고 지금 변태라 그랬…….”
“…….”
편집, 해야겠죠?
그렇겠죠.
둘은 어색하게 마주 끄덕였다.
다시 뒤로 돌았을 때 손에서 피가 철철 흐르던 남자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청건은 손에 흥건히 묻은 핏물을 보며 다른 손에 든 종이를 조금 구겼다. 프린트된 글씨가 저무는 햇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MISSION! 지나가는 시민 두 명에게 ‘잘생겼어요’ 소리 듣기!」
* * *
- 이제 윤 씨 못 봐서 어떡하지.
“가끔 연락해요. 너무 자주는 말고요.”
윤의 대답에 핸드폰 너머에서 소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라면 금전적 접점이 끝나자마자 연락도 끊겨야 마땅하거늘, 소라와는 어쩐지 전우애라도 생긴 듯했다.
윤은 죽은 듯 자고 일어난 후 경찰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었다. 러트가 진행 중이던 알파는 현장에서 잡혀 구속 수사 되었다. 사장은 ‘심신 미약’과 ‘동의하에 이뤄진 행위’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썼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목격자는 소라와 우윤, 그리고 최현이 확보한 사무실 CCTV까지 셋이었다. 그 일로 백수가 된 머릿수도 셋이었지만.
윤은 소라와의 통화가 끝난 후 옥상으로 나갔다. 그로부터는 벌써 2주가 지났다. 러트 사이클로 인한 강간 미수라면, 징역형을 받기까지의 기간이 대폭 축소된다. 증거가 많은 지금에야 이렇게 일사천리라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려야 할지. 마음이 후련하기는커녕 껄끄러웠다.
구름이 가득 깔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윤은 옥상의 난간 위로 팔을 걸쳤다. 팔을 뻗어 이제 막 실밥을 푼 손바닥을 뚱하니 보았다. 손목 상처뿐만 아니라 이제는 손바닥에다가도 흉측한 흉터를 달았다니.
“가관이네.”
그는 햇살에 데워진 스테인리스 가드 위로 힘없이 볼을 기댔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순간 멈추었다.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포근한 여름 냄새가 아닌 담배 냄새가 폐 속으로 달려든 탓이었다.
윤은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보았다. 1층에 있는 벽돌 재떨이 안에서 연기들이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뭐야, 진짜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윤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옥상에 올라온 남자는 살짝 놀란 얼굴로 윤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쥔 담배 끝에서 회색 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맞죠. 어제 그분.”
이청건이잖아. 윤은 미간을 좁혔다.
“와, 이게 다 뭐예요?”
청건은 이어 현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루미늄 문 위에 다닥다닥 붙은 부적 앞을 기웃댔다.
윤은 두 손을 몸 쪽으로 끌어당겨 주먹 쥐었다. 혹시 모를 전투를 위한 자세였다. 쭈뼛대는 걸음이 남색 머리 쪽으로 가까워졌다. 분명히 그날 달동네를 뱅뱅 돌다가 주변이 한산해졌을 때가 돼서야 집에 들어왔었다. 그 개고생을 했는데, 어떻게…….
“지금 남의 집 스토킹 한 거예요?”
청건은 기겁하는 윤에 어이없는 듯 웃다가 담배를 빨아들였다. 가볍게 내뱉은 담배 연기가 바람에 실려 휘휘 돌았다.
“그, 저번부터 자꾸 저한테 이상한 타이틀을 붙이시는데.”
“스토킹을 스토킹이라 하지 뭐라 하겠…….”
콜록, 콜록. 윤은 말을 하다 말고 기침을 터뜨렸다. 세 보폭 앞에서 맡은 담배 연기가 역했다.
“아, 비흡연자예요?”
얼굴 앞에서 손을 휘젓는 윤에 청건은 평상 옆 빈 콩기름 통에 꽁초를 던졌다. 두 손을 털던 남자의 내리깐 눈이 다시 윤에게로 붙었다.
“신고하기 전에 알아서 나가 주세요.”
“……제가 그렇게 관상이 안 좋아요?”
청건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쓸었다.
“제 집을 알고 계시니 오해할 수밖에요.”
“그야…….”
윤의 왼 손목으로 시선을 내렸던 청건이 어색하게 옥탑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끔 촬영 대기하면서 남는 시간에 여기 와서 좀 피워요. 하늘을 본 건데, 그쪽 손도 보여서요.”
혀로 입술을 축인 청건은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뭐. 모른 척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 본 상처는 다 나았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오지랖이 있는 편은 아닌데…….”
“…….”
“솔직히 좀 억울하지 않겠어요? ‘잘생겼다’ 소리는 바라지도 않아요. 근데 멀쩡한 사람한테 변태니 스토커니…….”
순간 청건은 자신을 잡아당기는 힘에 한 발짝 끌려갔다. 건너편 옥상에서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윤은 현관문을 열고 남자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발에 힘을 실으며 꿈쩍 않는 청건이 눈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괜찮아요? 변태 스토커를 이렇게 막 들여도.”
“버티지 말고 일단 좀, 와요.”
윤이 작게 부탁하자 그제야 청건이 힘을 빼고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청건이 윤에게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며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시그널인데요?”
윤은 그가 더 농담을 뱉기 전에 얼른 손을 뗐다. 시그널은 무슨, 집 안 꼴에 놀라 두 번 다시 오지 못하게 만들려는 마음이 반, 누군가 연예인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해 제 집을 인식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마음이 반이었다.
“얼굴 팔리기 싫어서요.”
“저는 상관없는데.”
“제가 상관있어요. 전 일반인이거든요?”
오가는 말 뒤로 알루미늄 문이 저절로 철컥 닫혔다. 그 순간 윤은 둘의 가까운 거리를 의식하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할게요.” 남자는 뒤따라 들어오며 작게 예의를 차렸다. 그리고 작은 감탄사를 냈다. 윤은 집 안을 두리번대는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청건은 머리 위 새끼줄에 잔뜩 묶인 부적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역시, 범상치가 않으시네.”
“…….”
“혹시 취미가 퇴마예요?”
남자는 피 같은 붉은 물감이 흐르는 알파(α) 문양 족자를 살피다가 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본업이 퇴마사신가?’ 흥미로운 눈이 제게 닿아 오자 윤은 당황스러웠다.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안 무서우신가 봐요.”
윤의 실망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건은 작게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오히려 영감을 얻죠. 전 특색 있는 사람들 좋아해요. 여름에 폴라 티 입거나, 집에 이런 걸 모으는 사람 같은?”
이청건은 손바닥으로 장식장을 가리켰다. 장식장 위엔 처키를 닮은 각종 저주 인형과 무당이 쓸 법한 무령, 두꺼운 서적들, 묵주와 청색 향로 등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종교가 뭐예요?”
“알아서 뭐 하시게요.”
“혹시나 짬뽕이면……. 제가 경기 쪽에 좋은 병원 알거든요.”
“……무교거든요.”
결국 윤은 제 종교관을 실토했다. 남자는 한껏 자신을 경계 중임에도 해 줄 대답은 다 해 주는 윤의 모습이 우스운지 입꼬리를 올렸다.
연예인이니 대단하게 미친 짓을 하진 않겠지 싶어 난생처음 집에 사람을 들였지만, 윤은 더 이상의 침입을 허락하기 싫었다. 거기다 이 남자 또한 알파일 수도 있었다.
윤은 남자를 내보낼 생각으로 현관 쪽으로 걸었다. 우선 지켜보는 눈이 없는지 주변을 정찰할 생각이었다. 벗었던 운동화를 다시 구겨 신는데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네, 아예. 근처입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짧은 전화를 끊은 청건이 불쑥 다가오더니 윤보다 먼저 구두를 신었다. 그러곤 직접 현관문을 열어 슬쩍 밖을 내다보았다.
“맞은편에 사람 없네요. 시간이 촉박해서 이만 가 볼게요. 변태 스토커 해명은 다음에 또 하고요.”
“아니요. 그냥.”
해명은 필요 없다 말하기도 전에 청건은 씩 웃곤 나가 버렸다. 그가 가볍게 닫고 간 알루미늄 문 위로 5중 잠금장치가 찰랑이며 흔들렸다.
……뭐지 저 사람.
확실히 이상한 놈들의 양상과는 조금 달랐다. 당최 무슨 생각인지 알기는 힘들지만, 성가신 사람임은 확실했다. 윤은 고개를 젓다 운동화를 날리듯 벗었다.
* * *
“민선 씨, 오디오 물리지 않게 여유 두고.”
“네, 알겠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윤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더듬었다. 액정 위로 큰 기본 폰트가 떴다.
「월요일 오전 7시 22분」
그는 핸드폰을 던져두고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어디다 촬영 고지를 해 놓긴 한 건가. 열불이 났지만 38분 후 알람이 울릴 걸 생각하면 그렇게 이르지는 않은 기상 시간이었다.
“액션!”
화를 가라앉히고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가 베개 옆에 둔 안경을 집어 썼다.
그리고 팔을 뻗어 침대 옆 창문을 열었다. 두 건물 떨어진 초록색 옥상엔 역시나 익숙한 남색 머리가 있었다. 그가 맞은편 여자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고, 그녀는 가차 없이 그 팔을 뿌리쳤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좀 더 내밀었지만 그들의 대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볼을 긁적이며 싸우는 그들을 보던 윤이 갑자기 창문을 쾅 닫았다. 청건이 상대를 끌어안고 키스를 시작한 탓이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무리 연기라도 강제 추행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상을 쓴 윤이 덮고 있던 이불을 내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 후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한참 기다리다가 8시 40분이 돼서야 밖으로 나왔다. 출근은 9시. 돌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그의 갈색 머리가 폴싹폴싹 바람에 흔들렸다.
잡지 촬영 어시에서 생각도 못 한 웹 디자이너를 거친 윤은 이젠 DVD 방 사흘 차 직원이었다. 젊을 때 인생을 표류하는 거야 누구나 똑같긴 한데, 유독 저만 바다에서 점점 멀어져 강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윤은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스로 9시 출근 시간에 세이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첫 손님들이 진열대에서 영화 하나를 골라 내밀었다. DVD를 받아 든 윤은 순간 몸을 굳혔다. 이청건이 여자의 목을 잡고 렌즈를 태울 듯 노려보고 있었다. 영화 제목은, <혀 설>.
……이 사람은 찍는 영화마다 제목이 왜 이래?
윤은 인상을 찡그리며 스캐너로 바코드를 찍었다. 팔짱 낀 손님들은 윤이 내미는 물건을 받자마자 6번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처럼 넓은 가죽 소파가 있는 방이었다. 이곳에서 윤이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손님 응대 및 매장 청결 관리(정사 뒤처리 포함). 아무래도 청결 관리가 힘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 촬영 공부에 쏟을 시간이 많아 전 직장보다는 좋기야 했다. 월급의 25%가 줄어든 것만 빼면. 윤은 다시금 마우스를 움직여 강의를 틀었다. 딱딱 소리가 나는 고물 컴퓨터가 힘겹게 돌아갔다.
손님을 스물다섯 팀 정도 받았을까, 시계는 어느덧 저녁 8시를 가리켰다. 윤은 종일 보던 영상을 멈추고 뿔테 안경을 벗었다. 곧 있어 매장에 남아 있던 한 팀이 방에서 나왔다. 시간을 늘려 가며 종일 있던 6번 방이었다. 그들은 카운터에 오늘 하루 종일 보았을 DVD 하나를 내려놓았다. <혀 설>. 윤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바코드를 찍어 반납 처리를 마쳤다.
“수고하세요.”
“예, 안녕히 가세요.”
방을 정리하고 온 윤은 진열대에 이청건의 작품을 꽂았다. 손끝이 느리게 케이스를 훑으며 떨어졌다. 퇴근 시간까지 45분여가 남은 시계를 보다 자리로 돌아갔다. 망설이던 윤의 손끝이 패드 위를 천천히 쓸었다. 강의 영상이 꺼지고 검색창이 열렸다.
「이청건 정보」
다섯 글자 검색에 각종 자료가 죽 늘어섰다. 온갖 시상식 사진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자 ‘동영상’란이 나왔다. 그리고 「한 번에 알아보는 이청건 입덕 가이드. 참고로 출구는 막혔는데 나갈 자신 있으면 들어오시길」이란 제목이 맨 위에 보였다. 다소 건방진 출사표였다. 더 찾아보기도 귀찮아 윤은 그 영상을 눌렀다.
영상 제작자는 ‘국민 첫사랑’, ‘국민 카푸치노 남’ 등 각종 별명을 늘어놓더니 ‘천만 관객 주연’을 밥 먹듯이 해서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는 칭찬을 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잘나서 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영상을 끄려던 순간 새로운 정보가 떴다. ‘베타 킬러’. 그의 열 번째 열애설 상대마저 베타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화면을 빤히 보던 윤은 영상을 축소해 다른 창을 켜 검색했다.
「이청건 열애설」
그의 마지막 연애 인정 날짜는 두 달 전이었다. 아직도 사귀는 건지 아닌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때 영상 제작자가 말했다.
- 다음 연애 소식이 뜨면 자연스럽게 애인이 교체되는 형식이라죠?
윤은 팔짱을 끼며 의자에 기대었다. 알파라면 이색적인 행보인지라 조금 흥미로워졌다. 보통은 오메가에 환장을 했기에 남자는 베타일 가능성이 컸다. 추측과 동시에 목소리가 나왔다.
- 또 데뷔한 지 올해로 12년 차인 이청건은 세계 인구 영쩜영영영영영일에 해당하는 초특급 희귀 형질 ‘우성 알파’라지요!
화면에 찍히는 빨간 도장에 윤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세상에. 어쩐지 기운이 이상하더라니. 알파를 혐오하는 윤에겐 기피 대상 0순위인 사람이었다. 평범하고 행복하게만 살고 싶다는 목표에 반하는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고개를 젓던 윤이 힘 빠진 손가락을 툭툭 놀려 검색했다.
「이청건 나이」
만 27세.
윤과 고작 두 살 차이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배우였다. 더더욱 피해야 할 이유가 명백해졌다. 둘은 살아온 궤가 너무도 달랐고, 지금 역시 윤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집안은 또 얼마나 대단할까? 역시 타고난 뒷배가 든든해야 성공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 그는 무려 열아홉 살에 경쟁률 대박, ‘I 대’ 연영과에 입학한 자수성가형 연예인입니다!
자수성가? 윤은 다시금 검색창에 손을 놀렸다.
「이청건 출신」
그러자 그가 연초를 태우는 화보를 섬네일로 한 게시 글이 보였다. 제목은, 「이청건의 숨겨진 반전 과거.」 윤은 홀린 듯 그 제목을 클릭했다.
옆 사람에게 기대 웃다가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이청건. 만화 주제곡에 맞춰 춤추다가 패널 뒤로 숨는 이청건. 고령의 배우 생일 케이크를 직접 나르는 이청건. 각종 매체에서 긁어 온 움짤 밑엔 온갖 칭찬이 나열되어 있었다.
윤이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블로거의 필력이 매력 있어 그런지 글을 정독하느라 마우스 휠이 느리게 내려갔다.
「만 20세 무렵, 지편성 감독의 영화 <김미> 출연을 계기로 각종 시상식을 휩쓸며 스타덤에 오른 이청건은 고아 출신으로서…….」
끝내 윤의 얼굴도, 내려가던 마우스 휠도 굳었다. 뒷배가 있을 것이란 예상도 틀렸다. 이청건은 특례 입학도 아니었고, 부모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단숨에 무력해진 그는 모든 화면을 닫아 버렸다.
이청건과 우윤은 시작점이 같았다.
* * *
윤은 여느 때와 같이 출근을 위해 옥탑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 유독 쿵쿵거린다 싶더니 눈앞에 파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그들의 목적지는 바로 코앞이었다. 비었던 1층 집에 누군가 이사를 온 모양이었다. 알파면 골치 아파지는데. 윤은 거주자를 확인해 보기 위해 활짝 열린 문 안쪽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집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없었다. 운에 맡길 수밖에 없구나, 생각하며 뒤도는데 큰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윗집이신가? 안녕하세요!”
윤은 지나치게 활달한 목소리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정형화 된 대답에도 여자는 초록색 생머리를 고무줄로 묶으며 깊게 눈웃음 지었다. 여자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그녀가 직원에게 짐 놓을 자리를 알려 주는 동안 윤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꼭 떡 돌리러 갈게요!”
“아뇨. 그럴 필요…….”
그녀는 윤이 말을 잇기도 전에 커다란 파란 박스를 번쩍 들고 집으로 쑥 들어갔다. 윤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상대는 안중에도 없이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게 요즘 트렌드인 것 같았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그녀가 제 옥탑 문을 볼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 됐다. 빨갛고 노란 수십 장의 부적을 보고도 반갑게 인사해 오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 극소수엔 이청건이 포함되었지만.
윤은 오랜만에 생각난 이름을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사 온 사람이 이청건처럼 덩치 큰 남자는 아니라 다행이긴 했다. 하지만 왠지 그 둘이 같은 부류일 거란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타인에 대한 적개심이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에게 접근하는 부류.
그는 소름이 오르는 팔뚝을 쓱쓱 쓸어내렸다.
* * *
퇴근길 버스 안, 윤은 정류장에서 몇 번이고 마주쳤었던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비니를 쓴 남자가 그제야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어코 함께 버스를 잡아탄 모양새가 수상쩍었다. 역시나 남자는 얼마 안 있어 오뚝이 인형처럼 다시 윤을 바라봤다.
윤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기댄 몸을 일으켰다. 가방을 뒤적여 금세 파란 약 하나를 꺼내 먹고 하차 벨을 눌렀다. 하루 9만 원 벌고 약으로 5만 원 차감이라니, 한숨이 나왔다.
버스 앞 유리창으로 다음 정류장이 보였다. 뒷문 앞에 선 윤은 후드 집업 모자를 뒤집어쓰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비니를 쓴 남자가 바로 뒤로 따라붙었다. 카드를 찍으면 상대 또한 카드를 찍었다. 뒷문이 열리자마자 윤이 내렸고, 남자 역시 내렸다.
윤은 제집과 먼 번화가 위를 걷다가 인파 속으로 파묻혔다. 아무런 의지가 없는 것처럼 걷다가 스치는 가게 유리창으로 뒤를 확인했다. 남자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윤은 크로스로 멘 가방을 뒤로 돌렸다. 유리창 위로 비치는 둘 사이로 몇몇 사람들이 끼어들었다.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윤은 발로 바닥을 세차게 밀며 달리기 시작했다. 뒤편에서도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레 벌어진 추격전에 사람들의 시선이 족족 붙었다.
두 정거장을 훌쩍 넘는 거리 동안 둘은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집까지는 이제 한 정거장이 채 안 남았다. 턱 끝까지 찬 숨에 피가 섞였을 것 같다. 점점 줄어드는 사람들의 머릿수에 식은땀이 났다. 멈춰서 인근 경찰서를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엉망인 머릿속에 단 하나 떠오른 것은 ‘집’뿐이었다.
네 개의 발소리가 시끄럽게 겹쳤다. 결국 윤은 집으로 가는 맨 밑 계단을 밟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무 계단을 채 오르지 못하고 발목을 접질렸다. 아윽. 휘청거리던 윤의 어깨가 잡혀 돌아갔다. 씨팔. 존나 빠르네. 남자가 비니를 벗으며 욕했다.
“놔……!”
어깨를 비틀었지만, 그는 센 힘으로 윤을 몰았다. 일순간 남자의 팔이 꺾인 것은 그때다. 어어윽! 남자가 두 다리를 학처럼 꼬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는 사람이에요?”
윤은 묵직한 침을 삼켜 내며 비니를 잡은 남자를 바라봤다. 혀 설. 이청건. 우성 알파. 고아. 영쩜영영……영영. 쓸어 모았던 정보가 하나씩 떠올랐다. 어지러운 시야를 느끼며 무릎을 짚었다. 목 밖으로 안도의 숨이 쏟아졌다.
아파파파파, 놔놔놔놔. 호들갑을 떠는 남자는 불붙은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다.
“술래잡기 중인 거면 관여 안 하고.”
청건이 말했다. 윤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청건은 지체 없이 다른 손으로 놈의 구레나룻을 붙잡았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따라와.”
“아아아 죄송해, 죄송, 아아!”
“경찰서 직송을 안 당해 봐서 이 모양이지.”
“……그냥!”
그때 윤이 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사과받고 끝내죠.”
“…….”
윤의 말에 청건의 힘이 느슨해지자 남자가 계단을 황급히 내려갔다. 청건이 곧바로 그의 정수리 털을 휘어잡았다.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이유가 뭔데요?”
“……귀찮아서요.”
청건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말이 돼요? 나 다 봤어요. 저쪽에서 이쪽까지 죽기 살기로 뛰어오는 거.”
윤이 침묵하자 비니를 쥔 손을 허우적거리던 남자가 소리 질렀다.
“이청건 아녜요? 연예인이 이래도 돼? 사람 머리를 막, 손목을 막 이렇게 해도.”
“조용히 안 해?”
청건의 낮은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언성을 높인 것이 아님에도 놈의 입이 대번에 다물렸다.
윤은 좀 전의 커다란 비명을 떠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혹여나 이 사태를 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일이 커지는 건 질색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사건으로 또 번지는 것이 부지기수라.
그런 윤의 얼굴을 살피던 청건이 잡고 있던 머리를 놓았다. 별 힘도 안 쓴 얼굴인데 크게 휘청거리던 비니가 무릎을 꿇었다. 놈은 돌계단에 부딪친 정강이를 쥐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다 난데없이 기침을 터뜨렸다.
윤이 가쁘게 쉬던 숨을 멈추며 청건을 바라보았다. 숲이 떠오르는 상쾌한 향이 났다. 알파의 페로몬이다.
“들었지. 사과해, 지금.”
“쿨럭……. 죄…… 해요.”
“큰 소리로.”
“죄송……합니다.”
청건의 크지 않은 명령에도 남자는 꼬리를 내렸다. 페로몬을 끼칠 상대를 특정했다면 비니는 목이 졸리는 기분일 것이다.
“머리털 몇 개 뽑은 나랑, 야밤에 무고한 사람 쫓아온 너랑. 죄질이 내가 클까, 네가 클까?”
“…….”
“대답.”
청건이 구둣발로 남자의 신발을 가볍게 쳤다. 남자는 슬랩스틱을 하는 것처럼 두 계단을 미끄러졌다.
“제, 제가 큰 것 같습니다.”
“근처에 얼쩡거리기만 해. 또 보이면 그땐.”
청건이 구둣발을 움직이자 몸을 움찔 떤 남자가 사족 보행으로 후진했다.
“죄송, 수고, 수고하십시오.”
둘에게서 멀어진 남자는 구사일생한 사람처럼 일어나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급하게 내려가느라 발목이 삐끗했는지 끝내는 절뚝이며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던 윤은 결국 계단 위로 주저앉았다.
“객관적으로 저게 스토커지 제가 스토커는 아니지 않겠어요?”
“……그런 걸로 하시든가요.”
윤은 힘없이 대꾸했다. 말끝에 기침이 작게 터져 나왔다. 주변에만 있었음에도 확실히 우성 알파의 향은 속을 맵게 만들었다. 담배 연기보다도 더.
기침하는 윤을 잠시 바라보던 청건이 까먹은 게 생각난 듯 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아, 미안해요. 금방 없애 줄게요.”
저러면 향이 날아가기라도 하나, 싶었지만 확실히 숨쉬기가 점점 편해졌다. 윤은 누그러지는 마음을 느끼며 손을 털었다.
“알파가 쓸모 있을 때가 다 있네요.”
“모르시는구나. 꽤 다용도인데.”
맞받아치는 말엔 헛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곧 얼굴이 찡그려졌다. 다리를 조금 움직이자마자 발목이 확 욱신거렸다.
청건이 제 정장 바지를 조금 끌어 올리며 윤의 앞에 앉았다.
“다쳤어요?”
윤은 제 다리로 다가오는 손에 발을 뒤로 움직였다. 그러자 청건이 손을 멈칫했다. 도와준 사람한테 너무 과민 반응인가. 어색하게 목덜미를 만지는 윤을 올려다본 그가 발목을 가리켰다.
“병원 안 가도 되겠어요?”
“네, 뭐. 베인 것도 아니고.”
청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은 저녁이 되자 더 짙어진 남자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청건의 외까풀 눈 사이로 작은 주름이 져 있었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했다.
“……근데, 여긴 또 웬일이에요?”
침묵을 참다못한 윤이 물었다. 그제야 청건이 시선을 올렸다.
“근처에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왔죠.”
겸사겸사 나를 보러? 윤이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자 청건이 덧붙였다.
“해명할 거 남았잖아요. 억울해서 잠이 와야 말이지.”
“…….”
“근데 오늘은 좀 자겠다. 누구 덕에.”
아까 그 남자 덕에 변태 스토커 신세를 면했다는 소리일 테다. 몸을 일으킨 청건이 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윤은 스스로 계단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크게 휘청이는 바람에 곧 팔뚝을 붙잡혔지만. 윤은 그를 흘끗 보고는 잡힌 팔을 빼내었다.
“참 볼수록 뚝심 있는 스타일이시네.”
“……혹시 오늘 일, 보상 바라세요?”
윤의 물음에 청건의 눈이 살짝 작아졌다.
“안 바라길 바라시는 것 같은데.”
“그런 적 없는데요.”
윤은 정곡을 찔려 어색하게 헛숨을 내쉬었다. 그가 금전적인 요구를 바란다면 통장이 금세 빌 것이 뻔했다. 청건은 윤의 생각을 눈치챈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손을 한 번 저어 보였다. 보상은 됐으니 가 보라는 뜻인 듯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윤이 몸을 돌리려다 말고 멈춰 섰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남자는 미안하단 말을 잘도 뱉던데. 하지만 윤은 그런 게 어색했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이런 식의 표현들이.
“고마운 거 아니까 가세요.”
“…….”
또 정곡. 윤은 어쩐지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그리고 머뭇대던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어 걸음 걷다가 삐끗한 윤을 청건이 부축했다.
“…….”
“은근히 손 많이 가는 스타일이고. 그렇죠?”
점점 아파 오는 발목에 윤은 입술만 깨물었다. 청건은 허락 없이 그의 허리를 안고 팔을 어깨에 두르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결국 고집을 내려 둔 윤은 청건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절뚝이며 올라갔다.
고군분투 끝에 옥탑 위로 올라온 윤은 도어 록 키패드를 손바닥으로 쿵쿵 두드려 작동시켰다. 얼마 전부터 상태가 이상해 두드리듯이 눌러야 인식이 됐다. #05050505*. 생일을 연달아 누르니 문이 열렸다. 윤은 청건이 부러 다른 쪽을 봐 주는 걸 보다가 문을 젖혔다.
윤은 바로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지금이 말하기에 적기인 것 같았다. 저번에, 소개팅 파투 내 줘서. 알파 머리털도 뽑아 줘서. 저 긴 계단을 지나 여기까지 부축해 줘서…….
“……고마워요.”
가까운 곳에서 청건의 눈길이 느껴지자 윤이 얼른 덧붙였다.
“돈 많이 버는 분이니까 금전적인 보상은 안 바라시는 걸로 알게요.”
“…….”
“가세요, 다른 일 보러.”
윤은 얼굴에 와 닿는 시선을 피해 한 발짝을 디뎠다. 예상과 다르게 청건의 발이 동시에 앞으로 갔다. 윤이 그를 올려다봤다.
“셀프 치료는 좀 외로울걸요.”
말을 마치자마자 청건이 몸을 숙였다. 얼떨떨한 얼굴의 윤을 세워 두고 발목을 하나씩 잡아 신발을 벗겼다. 그리고 회색 문을 꽉 닫았다. 이어 신발을 벗는 청건을 멍하니 보니 그가 말했다.
“도울 거면 끝까지 해야죠. 저 해명 다 된 거 아니었어요?”
……그렇기야 한데.
윤은 일전에 청건이 제집에 왔던 것을 생각하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뭐가 문제이겠나. 혼자 치료하면 온갖 생각에 휩쓸려 우울해질 거야 뻔했다. 청건은 가방을 내려 두는 윤을 침대까지 부축했다.
“냉동실 좀 열어 볼게요.”
윤은 청건의 뒤통수를 보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보일 듯 말 듯. 청건은 지퍼 백에 얼음을 담고 수건까지 세트로 챙겼다. 윤은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가 저를 치료하겠다고 집을 휘젓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그리고 제가 알파 약을 먹고도 무력한 베타라는 사실이 조금 더 깊숙이 와닿았다.
청건은 윤의 발치에 앉아 수건으로 얼음을 감싸며 말했다.
“알파인 것 같던데. 향 맡는 거 보니까.”
윤은 대수롭지 않게 제 발목을 손으로 받치고 냉찜질을 시작하는 그를 바라봤다. 애초에 오메가라고 오해를 하지 않는 모습이 의외였다. 스물여섯 내내 겪은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었으니까.
“네, 맞아요. 알파.”
윤은 나름 뻔뻔하게 대답했으나 눈은 어색하게 굴러갔다. 거짓말엔 소질이 없었다.
“그런데도 알파가 싫어요? 저런 걸 모을 만큼?”
윤은 그가 눈짓하는 수집품들을 보다 시선을 내렸다.
“네.”
“이유가 뭔데요.”
“알고 있으면 이렇게 살고 있진 않겠죠.”
이건 진심이었다.
“이상하긴 하네.”
청건이 미스터리를 수긍했다. 알파인데 알파가 꼬인다, 로 알고 있을 테지만. 향도 없는 베타인데 알파가 꼬인다는 진실과 어찌 보면 일맥상통한 말이었다.
“핸드폰 어딨어요?”
윤은 문득 물어 오는 말에 무심코 가방을 보았다. 그러자 청건이 눈치 좋게 몸을 기울여 한 팔로 가방을 끌어왔다. 냉찜질을 유지하며 핸드폰을 찾아낸 그가 화면을 두드렸다.
“안 잠겨 있네요?”
“귀찮아서요.”
“저도 그래요.”
청건은 정말 공감하는지 시원하게 웃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예쁘게 웃을 일인가? 윤은 이래서 잘생긴 사람 조심하란 말이 있는 거구나, 순간 그 말을 납득하는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그가 화면을 두드리는 걸 가만히 보다 발끝을 움직여 보았다. 공기가 좀 어색한 것 같았다.
청건이 윤에게 핸드폰을 조금 흔들어 보이다 가방 위로 내려 두었다. 슬쩍 보인 저장명은 담백하게 ‘이청건’이었다.
“연락하면 받아요. 냉찜질 필요할 땐 먼저 연락하고.”
“네?”
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전우애를 느끼는 소라와 최현 말고는 제 개인 핸드폰에 다른 사람의 연락처를 넣는 게 처음이었다. 남자는 단단히 쌓아 올린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허무는 능력이 있었다. 누구한테나 이러나?
“오지랖이 넓으신 것 같은데요.”
“그렇지도 않아요. 친구도 몇 없고요.”
윤은 믿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친구는 제일 많았다.
“전 친구 필요 없는데요.”
“제가 필요해서요.”
어쩐지 말하는 것마다 블로킹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청건은 윤의 발목에 집중하며 얼음을 댄 위치를 바꾸었다. 윤은 새로 느껴지는 차가움에 발끝을 오므렸다.
“혹시 내가 불쌍한가?”
윤은 혼잣말처럼 물었다. 청건이 그런 그에게 눈을 맞췄다.
“솔직한 게 좋아요?”
“아니요.”
윤은 곧바로 대답했다. 놀리려 했던 건지 청건의 얼굴이 묘해졌다.
“적당한 거짓말은 건강한 관계에 좋으니까.”
대충 내뱉는 말에 청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건강한 관계. 작게 속삭이면서.
“그런 관계, 얼마나 돼요?”
“건강한 관계요? 없는데요. 살다 보면 만나야 하는 사이를 말한 거예요.”
매번 알파라 속여야 덜 참견하니까. 윤은 뒷말을 삼켰다.
“그럼 애인도 없었어요?”
청건은 무심하게 질문했다. 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심장이 쿡 뛰었다. 자존심이 좀 상했다.
“없었을 것 같이 생겼나 봐요.”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건데.”
윤의 날 선 반응에 청건이 작게 웃었다. 왠지 그 웃음이 그의 잘난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의문의 1패다. 근데 뭐, 그게 대단한 자랑이라고. 공개 연애만 열 번이라니 몇 달에 한 번 꼴로 애인을 갈아 치웠을 게 뻔하지 않은가. 장난처럼.
“말 편하게 해요. 반말도 좋고.”
“연장자한텐 말 안 놔요.”
“음. 역시.”
청건이 수긍했다. 뒷말은 ‘고집 있으시네’일 것이 뻔했다. 윤은 잡힌 발목을 흘끗 내려다보곤 벽시계를 보았다.
“이제 된 것 같은데요.”
“20분은 채워야죠.”
“10분이나 지났는데.”
“10분이나 남았네요.”
윤은 인상을 살포시 찡그렸다.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창과 방패의 대화 같았다.
“혼자 살아요?”
“……네.”
“저도 아침까진 혼자예요.”
“네?”
“한, 7시까지?”
청건의 말에 윤의 머릿속이 난잡해졌다. 무슨 수작이지? 그 후엔 애인을 보러 간다는 건가. 아니면 하룻밤 애인이 되어 달라는 건가. “같이 나갈까요?” 하고 에둘러 잠자리를 요청하는 것과 비슷한 계략인가?
청건이 생각에 잠긴 윤을 흘끔 올려다봤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요.”
청건이 입을 살짝 내밀었다. 고개를 숙이니 오리 주둥이처럼 보였다.
“의심이 쉽게 풀리진 않겠죠.”
그는 양손의 역할을 바꾸며 혼잣말했다. 다시 발목을 틀어쥐는 손바닥이 차가워서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끌어 올렸다고 생각한 신뢰가 다시 바닥을 쳤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문란한 의도로 물은 게 아닌지 조금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무슨 소리였지, 그럼? 머리가 굳은 것 같았다. 몇 정거장을 미친놈처럼 달려와서 그런가.
청건은 테두리가 까진 원형 시계를 올려다보곤 말했다.
“발목 움직여 봐요.”
그의 말에 윤은 살짝 다친 발목을 늘렸다.
“괜찮아요?”
“네.”
“병원까진 안 가도 되겠네요.”
“네.”
“3분 남았어요. 혼자 할 수 있겠죠?”
“…….”
윤은 대답하려다 말고 입술을 붙였다. 입속에 ‘네.’가 갇혔다. 진작 혼자 할 수는 있었는데.
청건이 얼음 팩과 수건을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마주 보던 시선이 높아졌다.
“가 볼게요. 또 얼쩡거리는 놈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
“경찰서가 우선이긴 하지만 차선책으로요. 가까이에 있으면 올게요.”
인사 대신 웃은 청건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를 올려다보던 윤이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손을 뻗어 검은 와이셔츠를 잡았다.
‘너 미쳤니?’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윤은 딱 붙었던 입술을 떼었다. 문란한 의도로 물은 게 아니었다면.
“……다음 일정은, 몇 시까지 가면 되는데요?”
청건이 웃음기를 띤 채 대답했다.
“9시요.”
“그럼, 넉넉하게 6시까지……만.”
윤이 뒷말을 줄이며 눈알을 굴렸다. 이게 맞나? 아무리 큰일을 연달아 당해 무서워도 그렇지, 알파 방패막이로 알파를 쓰는 게 말이나 되는가.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좋아요. 보초 지원할게요.”
청건이 뒷말을 마무리했다. 부탁받은 입장에서 지원이라니. 배려심일까.
“고마……요.”
윤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까 그 변태처럼 목소리를 씹었다. 어색하게 코끝을 훔치는 중에 손목이 붙잡혔다.
“앉아요.”
네? 그리고 되물을 틈 없이 원래 자리로 끌려갔다. 청건은 그렇게 나머지 3분을 채웠다.
* * *
생각해 보면 누군가와 함께 한집에서 잠드는 게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청건은 작은 2인용 소파에 긴 몸을 뉘었고, 윤은 원래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112를 띄워 놓은 핸드폰을 꼭 껴안고 눈을 감았다.
짹짹, 짹.
새소리에 반짝 눈이 떠졌다. 윤은 가슴팍을 더듬었다. 그러다 이내 몸을 비틀어 침대를, 바닥을 바라봤다. 핸드폰은 장판 위에 있었다. 비몽사몽 핸드폰을 쥐고 고개를 들자 아까까지 소파 위에 있었던 이청건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간 거지? 시계는 6시를 가리킨 채다. 마치 꿈을 꾼 듯 흔적이 없었다. 얼음은 모두 녹아 사라졌고 수건은 가지런히 빨래 바구니 안에 담겨 있을 뿐.
윤은 몸을 일으켜 앉아 화면을 눌렀다. 연락처 안에 들어가 보니 ‘이청건’이 보였다. 그제야 그는 두 팔을 허벅지 위로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게 맞는 건가. 생각하면 누군가 대답했다. 맞겠냐?
도통 저 자신이 이해가 안 됐다. 집 안에 알파를, 그것도 우성을 들이는 건 정말이지 미친 짓이었다. 알파를 피해 온 10년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적과의 동침이란 비이성적인 일을 견인한 것이겠으나…….
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급한 일이 생겨서 인사 못 하고 가요. 보초 선 값은 떡 한 팩으로 대신할게요. 다음에 봐요.]
……떡? 내용을 읽은 윤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엔 혼자 살게 된 지 7년여 만에 풀어 둔 현관문 5중 잠금장치가 보였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고개를 젖히던 윤이 순간 귀신이라도 본 듯 벌떡 일어났다.
“……뭐야?”
천장을 살피던 윤이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알파를 피해 여기저기 이사 다녀도 늘 같은 자리에 매달려 있던 새끼줄이 사라져 있었다.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간 윤은 마침 옥탑으로 올라오던 초록 머리 여자와 마주쳤다.
“어? 나와 계시네요?”
멍한 얼굴의 윤을 훑던 그녀가 품에 든 박스를 윤에게 안겨 주었다. 묵직한 무게에 뒤로 밀려난 윤이 겨우 중심을 잡았다.
“이게 다…… 뭐예요?”
“이사 떡이요.”
초록 여자는 스크래치 난 눈썹을 들썩이다 방긋 웃었다.
“다 돌리긴 그렇고, 같은 건물 쓰는 기념으로 우리 이웃님에게만 드리는 거예요. 영광이죠?”
“아…….”
반쯤 열린 박스 안으로 시루떡이 보였다. 정말 갓 찐 걸 배송 받은 건지 뜨끈뜨끈했다. 감사를 해야 하나. 우성 알파와 사라진 부적, 초록 머리 등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와중 여자가 덧붙였다.
“이새미예요. 이웃님은 성함이?”
“우윤입니다.”
“이름 예쁘네에.”
윤은 그녀의 호감 표시에도 대수롭지 않게 박스나 한번 고쳐 들었다.
“이름도 알았겠다, 말 편하게 할까요? 난 반말이 좋은데.”
“괜찮습니다. 전 존대가 편해서.”
“음. 그럼 슬슬 하죠, 뭐.”
이새미가 입술을 조금 내밀며 아쉬운 티를 냈다. 확실히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게 이청건과 비슷해 보였다. 새미는 무지개 스팽글 집업 주머니에 두 손을 넣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탄성을 냈다.
“아 맞아, 아까 이청건이 불쑥 튀어나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건너 건너 아는 사이거든요. 스물여덟에 노망난 줄. 자꾸 궁금해하길래 떡 하나 주고 보냈어요.”
“아, 네…….”
쉽게 볼 수 없는 사람과 아는 사이라니, 윤은 순간적으로 의문이 일었으나 더 깊게 묻진 않았다. 몇 다리 걸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사실 이들에게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새미가 몸을 낮추며 조용히 물었다.
“근데, 두 사람 사귄 진 얼마나 됐어요?”
미끄러지는 박스를 고쳐 든 윤은 기겁하는 얼굴로 뒷걸음쳤다.
“안 사귀는데요. 완전 남이에요.”
“여기서 내려오던데?”
“아니라니까요.”
윤이 코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손을 저어 가며 부정하고 싶은데 두 손이 떡에 결박당해 불편했다. 새미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 얼굴로 팔짱 끼며 물러났다.
“그래요, 뭐. 그런가 보죠.”
“안 믿으시는 거죠.”
“아, 뭐 믿어요.”
윤이 미간을 좁혔다.
“왜 안 믿으시는 거죠? 어디서 괜히 이상한 말 하고 그러시면 안 돼요. 진짜 아니니까. 절대, 절대 아니니까.”
윤이 거듭 부정했다. 눈꼬리를 살포시 접던 새미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떡 배 터지게 드시고, 다음에 또 만나면 셋이서 술이나 해요.”
“저는 술을 할 정도로 그 사람이랑…… 저기요.”
윤은 홱 사라지는 초록색 뒤통수를 보며 어이없이 눈을 깜박였다. 저는 그 사람이랑 가깝지가, 아니,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다고요. 그런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다고. 못다 한 뒷말에 속이 꽉 막혔다. 이놈의 떡을 좀 내려 두고 가슴을 마구 치고 싶었다.
윤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았다. 팔꿈치로 손잡이를 당기려던 그는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고개가 쓱 기울어졌다. 뭔가 달라졌는데, 싶던 게 3초. 윤은 곧이어 헛숨을 터뜨렸다. 알루미늄 문 위도 마찬가지였다. 심신 안정용 부적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그때 주머니 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윤은 결국 이새미가 준 떡을 옥상에 턱 하니 내려 두었다.
[맞다. 얘기를 안 했네요. 부적값은 다음에 갚을게요. 불쾌했다면 피해 보상도 해 드릴 테니까 청구해요.]
……믿어선 안 될 사람인 것 같다. 그의 의도가 어쨌든 이렇게 물러지면 안 됐다. 지금까지 위험한 상황에 크게 휩쓸리지 않았던 것도 조심성이 큰 성격 덕이었다. 어젠 페로몬에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게 분명하다. 냉찜질이고 보초고 충분히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을.
윤은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이청건의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