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Cliche (2/5)

#2. Cliche

지잉, 지잉-. 지잉-.

청건은 서서히 눈꺼풀을 들었다. 그리고 곁탁자 위에 있는 전자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잠에 든 지 막 5시간이 지난 시각이었다. 머리를 훑어 낸 그는 걸려 오는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내려 두었다.

“여보세요.”

푹 잠긴 목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 형. 저예요. 바빴어요?

“누구.”

- 아 혀엉, 저요. 성빈이요.

청건은 그제야 전화 상대를 깨닫곤 고개를 대강 끄덕였다. 상대는 볼 수 없었지만.

- 저 스케줄 비었는데.

상대가 말했다. 청건은 비몽사몽 중 생각에 잠겼다. 평소엔 스케줄 이동 시간에나 눈을 붙이는 게 전부였는데, 어떻게 5시간이나 잤을까. 알루미늄 문 위로 규칙 없이 붙여진 부적을 떼던 게 떠올랐다. 불면증 제압 부적이라도 건드린 걸까.

- 혹시 지금 집에 들러도 돼요?

전화 상대는 베타 남성이었다. 전 애인과 헤어진 지 3주도 안 되었는데 소문이 났는지, 청건에게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오늘은 좀 그래.”

- 왜요? 청건 씨도 스케줄 없잖아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몸을 돌려 누운 청건이 그의 유혹적인 호칭에도 불구하고 심드렁하게 팔짱을 꼈다.

“구상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어서.”

- 프로젝트? 형이 직접요?

곧이곧대로 ‘오랜만에 잠 좀 자려고’ 하고 말한다면 상대가 자존심 상해할 것 같아 대충 둘러댄 말이다. 청건은 제가 지어낸 말에 픽 웃음이 나왔다. 원래도 귀찮았던 연애 전초전이 이만큼 내키지 않은 적도 처음이었다.

“어. 다음에 볼까.”

그는 짧은 하품 끝에 몸을 일으켰다.

- 어쩌죠. 나 바로 앞인데.

청건은 휴대폰에서 넘어오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회상했다. 새벽빛 아래 본 잠든 얼굴은 가을 낙엽 같았다. 얇은 쌍꺼풀이 보였고, 피부가 비현실적으로 희었다.

- 청건 형?

그는 전체적으로 색채가 옅었다. 외양부터 성격까지 고양이를 닮은 그 남자를 볼 때마다 청건은 어쩐지 치즈 태비가 떠올랐다. 사람 손 타는 걸 싫어하고, 살짝 올라간 눈을 크게 뜨고 경계하는 모습 하며. 나른하지만 강단 있는 어투도.

청건은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부적값은 다음에 갚을게요. 불쾌했다면 피해 보상도 해 드릴 테니까 청구해요.]

마지막 문자엔 답이 없었다. 지금 이 화면을 며칠째 들여다보는지. 청건은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시다 핸드폰 전원을 껐다.

잠시 먼 곳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묵하던 청건은 다시 핸드폰 전원을 켰다. 그리고 메시지 입력 창을 눌러 두 엄지를 움직였다.

뭐 해요? 얼굴 한번 볼래요?

내가 한가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발목은 다 나았나 궁금해서.

연락은 왜 안 봐요? 바빠요?

보상은 안 필요해요? 부적이 조금 저렴한가?

계속 이러시면 다음번엔 내 마음대로 말 놓습니다…….

고개를 갸웃대던 그가 글씨를 다다닥 지웠다. 변명에서 회유를 거쳐 협박까지. 반대로 제가 이런 문자를 받게 될 걸 생각하면 상대는 곧바로 차단행이었다.

차단?

청건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니면 핸드폰이 무음이든가. 저번에 설정이 어떻게 돼 있었더라. 아니, 핸드폰이 고장 났나? 혹시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또 왔나? 그럼 어떡해. 가 봐야 하나?

청건이 문득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건조한 목에 미리 따라 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간이 촉박하긴 했지만 가는 길에 잠깐 들러야겠다고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거실에서 인터폰이 울렸다. 청건은 컵을 내려 두고 거실로 가 도어 뷰어를 확인했다. 성빈이었다. 그제야 전화 중에 통화를 꺼 버렸다는 걸 상기했다. 자동문을 열어 준 그가 뒷머리를 흩트리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대답이 없길래. 승낙인 줄 알고요.”

“못 들었네. 정신이 없어서.”

청건은 현관에서 머뭇대는 성빈을 보다 결국 손짓했다.

“들어와.”

떨어진 허락에 성빈이 들뜬 얼굴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청건을 따라 걸으며 복도 벽에 걸린 사진들을 휙 훑었다. 연기 나는 손가락, 노란 장미. 뒷짐 지며 작품을 보던 성빈이 그를 향해 웃음 지었다.

“또 봐도 좋다. 형은 역시 저랑 예술 취향이 같은가 봐요.”

그러곤 청건의 옆으로 폴짝 가서는 들고 온 가방에서 500mL짜리 병 우유를 꺼냈다.

“불면증 심하다 들었어요. 잘 때 꼭 필요하다면서요.”

청건은 그가 내미는 병을 받아 들었다. 비싼 선물보다 유용하긴 했다. 매니저들이 말해 줬을 리는 없으니 촬영장 스태프에게서 캐낸 게 분명했다.

“스토커네.”

“맞아요. 스토커.”

남자는 순순히 인정하곤 배시시 웃었다. 청건은 병을 흔들어 보이곤 잘 마실게, 말했다.

‘지금 남의 집 스토킹 한 거예요?’

목소리 하나를 떠올리며 병뚜껑을 따곤 입을 댔다. 단번에 마시려다가 자신을 바라보며 눈썹을 늘어뜨리는 베타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청건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상은 없어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니 바라는 상이 따로 있는 듯했다. 그러나 청건은 “고마워.”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치. 남자는 입을 비죽이면서도 몸을 꼬았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는 모양이, 무슨 수작인지는 빤했다. 꼬시려는 거지 뭐. 청건은 단숨에 들이켠 우유병을 잠그며 생각했다. 덕분에 오늘부터 이행해야 할 프로젝트명이 정해졌다. 치즈 태비 꼬시기.

자꾸 몸을 붙여 오는 베타에게 쏟을 정신이 없었다.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해야만 성공적인지 생각해 보느라. 최대한 성빈과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이려 노력했으나 그는 완곡한 거절에도 1시간이나 머물다 갔다. 그 때문에 옥탑으로 갈 시간이 증발했다.

매니저 대혁이 운전하는 밴에 실려 가던 청건이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배터리가 5%밖에 남지 않았다. 뒷좌석에서 충전하면 그만인 것을, 어째서 마음이 초조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덧 8월 초였다. 얼결에 한 동침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는 소리다. 사실 의도적으로 연락을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어쩐지 제가 ‘을’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 같아서. 지금도 생각이 조금 과한데, 그것만은 피하려고.

남은 배터리 4%.

청건은 떨던 다리를 멈추었다. 을이고 뭐고 배터리가 없다. 결국 더 이상의 고민을 멈추고 남자에게 전화를 넣었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전화를 건 지 3초도 안 지나 들려오는 답이었다. 그는 맥이 빠진 채 팔을 내렸다. 시도도 못 한 프로젝트가 무산 위기에 놓였다. 전화가 가자마자 끊었을 리는 없을 테니 확인 사살이었다. 무음도 뭣도 아닌, 차단.

청건이 3%로 줄어든 숫자를 보며 중얼댔다.

“……형, 나 오기 생겨.”

“하지 마.”

운전석에서 대혁이 받아쳤다.

“뭔 줄 알고.”

“뭐든 하지 마. 조용히 좀 살게.”

“내가 언젠 되게 사고 치고 다닌 것처럼 그러네.”

청건은 억울한 눈으로 백미러를 보았다. 대혁이 핸들을 꺾으며 물었다.

“근데 다 좋다고 들이대는데 네가 오기가 생길 이유가 뭐야? 누군데. 연예인?”

“연예인은 아니고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인데…….”

순간 청건의 입이 다물렸다. 그는 화면에 표시된 저장명 ‘우유’를 바라봤다.

“……이름이 뭐지.”

뭐? 대혁은 넋이 빠진 청건의 얼굴을 백미러로 보다 고개를 저었다. 답지 않게 왜 저래?

혼잣말 뒤로 심각해진 청건이 다시금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한참 볼 안쪽을 혀로 쓸며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던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넣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쫑. 너 오늘내일 스케줄 넉넉하다 그랬지.”

- 예, 그렇습니다.

“그럼 잠깐 부탁 좀 들어줄래?”

* * *

“어, 혹시 저 사람 아니야? 옷 시꺼먼.”

대혁이 고개를 옥상 밖으로 뺐다. 캠핑 의자 위에 늘어져 있던 청건이 순간 몸을 일으켰다. 촬영지 옥탑 난간에 붙어 있는 대혁의 허리춤을 잡아 뒤로 끌었다. 휘청이던 대혁이 다른 캠핑 의자에 앉았다.

“졸리면 좀 자고 있어.”

“왜 이래, 안 졸려.”

“아냐, 아까 하품했잖아. 형 졸려.”

대혁은 청건이 난간에 바짝 붙어 계단을 내려다보는 걸 보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청건의 바지춤을 슬쩍 보는 얼굴엔 수상쩍은 눈빛이 깔렸다. 저거 봐라. 얼굴도 제대로 못 보게 하네, 대혁이 중얼거렸다.

“반대편 건물로 갈 걸 그랬나. 여기선 그 사람 집이 안 보이는데.”

아…… 어두워서 뭐가 보여야지. 청건이 난간 손잡이를 잡고 몸을 낮추며 염탐을 하는 모습에 대혁이 혀를 찼다.

“굳-이 직관을 하시겠다고. 그럴 거면 직접 주지 인마.”

“뭐가 그럴 거면이야. 내가 뭐?”

“뭐 마려운 똥개 같은데 지금.”

청건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대혁은 그 틈에 그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알아챈 청건이 대혁의 배를 밀며 다시 의자에 앉혔다.

“아 왜? 나도 좀 보자.”

“형은 덩치가 커서 안 돼. 들켜.”

남성 평균 키 대혁은 189 장신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그래, 너 혼자 잘 놀아라. 코웃음 친 그는 이내 다리를 꼬며 핸드폰을 들었다. 한참 후 청건에게서 탄식하는 소리가 터졌다.

“왜, 어떻게 됐는데?”

대혁이 그 반응에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켰지만, 청건은 그 어깨를 꽉 누르며 본인 역시 옆 의자에 앉았다.

“버렸어.”

“네가 준 거를?”

청건이 맥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크하핫! 대혁에게서 과장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보통 아니네. 키다리 전법도 글러 먹었다.”

“…….”

“네가 싫나 보다.”

그 말에 대혁에게 사나운 눈길이 닿았다. 대혁이 청건의 등을 툭툭 치며 다음 라운드의 건승을 빌었다.

윤의 옥탑에 가져다 둔 선물은 2천 2백만 원짜리 가방이었다.

「시간 남아서 잠깐 들렀다 가요. 잘 써요.」

박스 위에 붙은 포스트잇의 내용은 간결했고, 부담스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누가 준 건지를 써 놓지 않아 착오가 있던 모양인가.

그 다음번 방문 때 청건은 단추 없는 분홍색 카디건(B 브랜드, 가격 43만)이 들은 박스 위에 ‘-이청건-’도 덧붙여 쓰고 왔다. 하지만 역시나 그 선물도 쓰레기장에 처박혔다. 뼈가 톡 불거진 얇은 흰 손이 의류 수거함에 쏙 들어갔다 나왔다.

그럴 리 없어. 청건은 다음 작전을 이행했다. 남자를 닮은 휘핑크림 향의 향수(V 브랜드, 25만)와 검은색 옷을 즐겨 입는 그를 위한 무난한 초록색 지갑(T 브랜드, 42만)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쓰레기장행이었다. 남자는 양손을 탁 털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 계단을 올랐다. 선물이 먹히지 않는 경우는 살면서 본 적이 없는데. 청건은 지금까지 겪은 사람들과 남자 사이의 괴리에 머리가 아팠다.

청건은 심각한 얼굴로 패착을 분석했다. 저렴한 걸 샀는데도, 왜지? 비싼 걸 싫어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러면 취향이 아닌가. 제집 테라스 테이블에서 머리를 쥐어뜯던 청건은 감은 눈을 탁, 들어 올렸다.

혹시 부적 때문인가.

그래, 그게 제일 유력하다. 그 생각을 왜 못 했을까. 그가 부적을 모으는 이유는 알파를 쫓기 위함이 분명했고, 청건은 당연하게 다음번 방패 역할도 해 주려 했다. 그렇다면 억지로 모으고 있을 부적과 수집품들을 누군가 먼저 치워 주면 그의 강박도 점점 줄진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과한 참견이었다. 그와 얼마나 가까워졌다고. 이게 바로 오지랖인가 싶었다. 청건도 처음인 감정이었다.

그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비며 열 번째 담뱃대를 꺼냈다. 벌써 마지막이라니. 열 개비로 맥시멈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하루 한 갑은 거뜬했는데, 조금은 고문 같기도 했다. 흰색 의자에 기댄 그는 볼을 홀쭉하게 만들었다가 연기를 풀썩 날려 보냈다. 오늘따라 되게 당기는데, 되게 맛없었다.

꼬시기는 무슨. 말 그대로 참혹한 실패였다. 종영이 감감무소식인 걸 보니 오늘도 망한 모양이었다. 청건은 불이 은은한 맞은편 주택을 바라보며 마지막 담배를 하염없이 태웠다. 망망대해 위 판자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징징 돌아갔다. 힘없이 팔을 뻗은 청건이 채팅방에 접속했다.

[이 배우님!]

[아니 청건 형님!]

[얼른 보셔야 합니다. 심상치 않습니다!] 오후 7:56

글에서 격양된 종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청건은 반신반의하며 동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남자가 옥탑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부터 시작이었다. 정말 종영의 말대로 심상치 않은 얼굴이었다. 이어 돌계단을 조금 내려가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청건의 손끝에 매달려 있던 담배에서 담뱃재가 툭 떨어졌다. 이내 청건은 담배를 짓이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면 속의 남자는 괴로운 듯 쥐고 있던 머리칼을 놓고 자신이 선물한 물건을 어루만졌다. 둘도 없는 보물을 대하듯, 물체의 굴곡을 따라 하얀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테라스를 서성이던 청건은 그 장면을 보며 흰색 난간을 꽉 쥐었다.

남자를 흔든 것은 카메라였다.

* * *

윤은 분홍색 포스트잇을 든 채 돌계단 위로 주저앉았다. 심각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다른 물건이었으면 고민 없이 쓰레기장행이겠지만 도저히 이건 그럴 수 없었다. 백지 선다형 위로 연필을 굴려 만점 맞은 셈이었다. 살면서 단 하나 탐했던 물건이 마른 두 손에 들려 있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프랑스 보쉬르센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아델. 그가 주로 쓴다는 카메라 기종이었다. 현재로선 청춘 몇 년을 갖다 바쳐야 겨우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던 윤이 포스트잇에 쓰인 정갈한 글씨체를 보았다.

「집에 카메라가 있던 게 생각나서. 취미가 같을 수도 있겠네요. -이청건-」

그가 자신에게 이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볼 것도 없는 동네에, 볼품없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이만한 돈과 감정을 소모하는지. 목적이 잠자리에 있다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굴어 봐야 당신한테 굴러떨어질 떡은 없다고. 나는 알파랑 엮일 마음 추호도 없고, 제 모습이 불쌍해 보여서 그러는 거면 걱정 덜어도 된다고. 괴롭힘에 순순히 당하기만 하면서 살던 적은 없으니까. 그러니 당신은 당신하고 어울리는 세계에서만 있으라고.

이마를 매만지고 있던 윤은 결국 핸드폰을 꺼냈다. 목록에 있는 번호를 차단 해제한 후 전화를 넣었다. 통화음이 세 번도 채 울리지 않은 때였다. 반대편에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윤은 괜스레 긴장하여 구부려 앉은 등을 폈다.

곧 건너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 화 많이 났어요?

윤은 제가 뱉어 버리려던 수십 가지 문장이 즉시 사라졌다. 화? 내가 화가 났던가……. 윤은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는 카메라를 꼭 매만졌다. 무슨 화요? 격 없이 궁금한 걸 묻기엔 지금까지 차단한 일이 무색해진다. 그렇다면 차라리 오해하게 두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윤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남의 집에 함부로 올라오는 거, 3년 강제 노역 형 받을 수도 있는 건 알아요?”

- 아뇨. 그건 몰랐어요…….

윤은 미간을 구겼다. 알고 있는 법 몇 개 더 읊어 주면서 겁주려던 마음이 푸시시 식었다. 어째서 잘못한 똥개처럼 구는지 모를 노릇이다. 상대방이 침묵을 잇자 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번에 신경 써 준 건 잘 알아요. 그런데, 괜한 사람한테 애쓰지 마요. 난 그쪽이랑 여기까지만 하고 싶어요.”

잠시 말이 없던 청건이 대꾸했다.

-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

- 우유 씨가 궁금하고 신경 쓰이다 보니까, 제가 선을 좀 넘은 것 같은데…….

청건은 줄줄 변명을 이었다. 남의 인생에 별 관심이 없는 윤은 의문이 일었다. 이 평범한 인생이 정말 궁금할 수도 있는 건가 싶다가, 그래. 비범한 삶을 사는 이청건이라면 오히려 그럴 수도 있겠다 납득했고, 다음 순간 이어지던 생각이 싹 멈추었다.

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우유란다. 우유. 제가 어릴 적 지겹게 듣던 별명이었다. 그러면 이 남자는 제 본명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알려 준 적도 없는데. 이를 물고 있던 윤이 낮게 읊조렸다.

“역시 맞았네. 스토커 새끼.”

얼마나 많은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공사를 쳤을까 싶었다.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서 특징을 캐내고. 필요할 때 있어 주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들였을지. 고작 잠자리 한 번 같이 할 생각으로.

대답은 필요 없었다. 윤은 화를 참는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다시 차단함에 그의 번호를 처넣어 버리고 화면을 껐다. 전화가 꺼진 달동네는 소름 끼칠 만큼 조용했다. 난 대체 무슨 답을 들으려고 전화를 한 거지? 그에게 음흉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 꼴밖에는 안 됐다.

차라리 다행인가. 수작질에 놀아나는 건 질색이었다. 낌새가 보이면 빠르게 잘라 내는 게 현명했다. 계단에 카메라를 내려 둔 윤이 몸을 일으켰다. 저 아래까지 내려가서 버리는 수고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수거를 해도 제가 해야지.

그는 1층 옆으로 난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난간을 쓸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 꼭대기에서 결국 걸음을 멈춘다. 윤의 두 발이 초록색 방수 페인트에 껌처럼 붙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델의 카메라였다. 이청건은 돈도 많을 텐데. 아예 모르는 사람이 계 탈 바에 그냥 저 정도는, 내가 가져가도…….

“……제발, 좀.”

그러나 스스로를 겁박하듯 으르렁댄 윤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가난에 추한 욕망까지 붙으면 답이 없었다. 구차한 삶은 이만하면 차고도 넘쳤다. 옥상을 가로지른 윤은 부적이 전부 사라진 문을 부술 듯 젖혔다.

* * *

“진짜, 재밌어.”

청건은 건물이 흔들리지 않는 게 이상할 만큼 쉴 새 없이 다리를 떨어 댔다. 열흘간 이청건 격동의 심리 변화를 전부 겪은 대혁은 묵묵히 스케줄을 정리해 공유 클라우드로 전송했다. 어, 재밌어. 청건은 핸드폰을 한참 삿대질하다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이번엔 부적이 아니었다. 도대체 거기서 스토커라 오해받을 만한 말이 뭐가 있었단 말인가? 웬만큼 어려운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았지만, 전개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쉽지 않을수록 승부욕이 도는 건 만국의 법칙이었다. 청건은 급기야 회전의자를 뱅뱅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끝이 반복적으로 대혁의 정강이를 스쳤다.

의자를 옆으로 끈 대혁이 멈추었던 필기를 이었다.

“한 번만 더해라.”

청건은 그제야 제 행동을 깨닫고 회전을 멈췄다. 끄이익. 목을 뒤로 푹 젖히자 의자가 괴로운 신음을 냈다. 고민에 휩싸여 있던 청건이 갑자기 상체를 세웠다.

“아니, 객관적으로 봐. 내가 스토커 상인가?”

“…….”

“맞아 아니야. 나 좀 봐 달라고. 응? 형 혹시 내 편 아니야?”

무시하려던 대혁이 결국 인위적인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봤다.

“나야 늘 청건이 편이지.”

그에 청건이 감동이라도 한 듯 입술을 물며 끄덕였다.

“그래. 내가 그런 말 들을 사람은 아니잖아?”

그치? 그치. 끄덕끄덕. 마주 끄덕이던 중에 대혁이 속삭였다.

“근데 지금은 네 편이 아니야. 이 식끼야.”

청건은 날아오는 만년필에 순발력 있게 의자를 끌었다.

“이놈의 회사 것들이 다 짜고 치나. 기껏 하루 쉬는 날에 스케줄 정리하는 거 안 보여? 왜 내 집까지 쳐들어와서 이 지랄이야? 나 좀 내버려 둬라 좀! 우유인지 뭔지 니너 혼자 알아서 하라고 좀!”

대혁이 급기야 A사 패드를 공중에 들자 청건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라면 머리에 구멍 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 거…… 간다, 가. 내가 언젠 되게 귀찮게 군 것처럼 그러네. 오랜만에 고민 좀 털어놀랬더니 친구들은 죄다 해외에 있고. 이러다 형 동생 억울해 죽으면 어쩔래.”

마찬가지로 쉬는 날인 청건은 오랜만에 입은 운동복 바지 주머니로 손을 구겨 넣었다. 너무해. 덩치에 안 맞게 칭얼대는 그를 흘긴 대혁이 만년필을 도로 주워 왔다. 대혁은 펜촉이 멀쩡한지 보다가 귀찮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혼자 머리를 싸맨들 뭐하냐. 당사자랑 대화를 해야 답이 나오든 하겠지.”

청건은 슬리퍼 바닥을 타일 위로 쓱쓱 쓸다가 뒷머리를 매만졌다.

“내가 그걸 모를까.”

“그럼 왜 이러고 계세요. 하던 대로 하시면 되지. 부딪쳐서 죽이든 밥이든 만드는 거.”

입을 다문 청건이 찡그린 눈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풍광이 좋은 10층 창문 밖에선 보랏빛 노을이 번졌다. 맨땅에 헤딩하면 사실 뭔들 얻어 내지 못할 건 없었다. 이청건은 패기 빼면 시체였으니까. 그런데 사람 마음이 어디 쉬운가. 친구는 필요 없다는 남자한테 들이대 봐야 반감만 사겠지. 게다가 데뷔하고 한 번도 저 마음에 안 든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는 청건은 이 문제가 제일 골치였다. 도무지 해결법을 몰라서.

“……종영이 오늘 영어 학원 쉰댔지.”

“애 좀 작작 괴롭혀라.”

일급이 2배로 늘어나는 마술은 종영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돈이 넘쳐 나는 이청건은 대혁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전화를 걸며 밖을 나섰다. 이대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잠시 후 바람처럼 달려온 종영은 청건의 어두운 초록색 차를 아파트 앞에 세웠다. 차에 올라탄 청건이 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안녕. 최근 주소로 바로 가자.”

“옙, 형님.”

유기 묘 봉사를 다니는 건 청건의 루틴 중 하나였다. 가끔 휴식이 필요할 때 일전에 가지 않았던 센터를 즉석에서 찾곤 했는데, 오늘은 센터를 고를 힘도 없었다.

종영이 운전을 시작했다. 밴보다 낮은 천장을 눈을 끔벅이며 바라보던 청건이 말했다.

“집에서 뭐 했어?”

“영화 봤지 말입니다.”

종영은 체질에 딱 맞았다던 군대 말투를 가끔 구사했다. 머리도 그에 맞게 빡빡. 청건은 또 짧게 친 것 같은 뒤통수를 보며 다시 물었다.

“무슨 영화?”

“그 있습니다. 시간을 계속 돌려서 같은 날을 살고 또 살고. 그러다 결혼도 하고.”

“아, 로맨스?”

“맞습니다.”

종영은 가는 내내 영화 내용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이미 아는 내용이었지만 청건은 그 말을 경청했다. 과거를 바꾼다라. 앞 좌석에서 여전히 조잘대는 종영 뒤로 청건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출생을 바꿀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었다. 그럼 어느 시점이 가장 효율적일까. 연예계 한 획을 긋겠다며 포부 넘치게 굴던 10대로 가 봤자 다시 그만한 열정이 생길 리 없고. 그러면 가까운 과거가 나을까.

‘연예인이 이러고 다녀도 돼요?’

계절을 역행하는 검은 폴라 티. 언뜻 예민하게 느껴질 올라간 눈꼬리. 그러나 맑고 깊은 초가을빛의 눈동자.

‘그쪽도 내가 좋냐고요.’

갈바람처럼 사늘한 목소리.

‘피 엄청나요. 깊게 찢어진 것 같은…….’

‘왜 함부로……!’

한 손에 들어오는 손목 위로 툭 불거진 창상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피가 흐르는 손바닥 아래 자살 흔적이 보였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를 선택해야 했다. 지금 이런 결과를 불러온 원인은 딱 그 지점에 있었다. 실타래가 꼬이기 시작한 순간.

“……형님!”

청건은 갑자기 커지는 종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진동이 느껴졌다. 청건은 조금 급한 몸짓으로 벨트를 늘려 핸드폰을 꺼내었다.

「성빈」

발신자는 이성빈인가 김성빈인가 하는 그 사람이었다. 가만히 화면을 보던 청건이 옆 좌석으로 핸드폰을 던졌다. 그리고 다른 쪽 주머니를 뒤적였다. 역시. 일전에 넣어 둔 담뱃갑이 잡혔다.

“쫑.”

“옙?”

“라이터 있어?”

“금연한다셨지 말입니다.”

“……그랬지.”

청건은 뼈를 때리는 말에 천천히 빈손을 빼냈다. 저를 믿고 함께 가는 동료 앞에서 두말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어제 담배 케이스와 지포 라이터를 책상 서랍에 전부 봉인해 뒀다. 열 개비도 성공했겠다 아예 끊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아 결정한 일이었다.

이참에 금연. 이참에 금연. 속으로 되풀이하던 청건이 빨간불이 되자마자 앞 좌석으로 팔을 뻗었다. 뒷골이 싸했다. 금단 현상을 얼른 당으로 메워야 했다.

“초콜릿 우유 좀 주라.”

종영은 조수석에 있던 가방을 뒤로 넘겨줬다. 보따리장수의 가방 속에서 초콜릿 우유 두 개가 튀어나왔다. 기특함에 피식 웃으며 종영의 따가운 머리를 쓱쓱 쓸었다.

청건은 순식간에 초콜릿 우유 두 팩을 다 먹고 만족스럽게 다리를 뻗었다. 열어 둔 창에 팔꿈치를 놓고 빈 우유 팩을 흔들다가 무심코 초록색 표지판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살인마라도 본 듯 얼굴이 굳었다.

“……쫑.”

“옙.”

“왜 차가 수현구로 가는 거 같지?”

“수현구 맞는데 말입니다.”

유기 묘 센터는 이곳과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청건은 서서히 시트에서 등을 떼었다.

“……수현구 어디.”

“촬영 장소요!”

종영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청건의 손아귀에서 빈 우유갑이 구겨졌다. 마음 정화하러 가는 길이 황천길로 향하는 길일 줄은 몰랐다. 그는 울상으로 말했다.

“야아, 내가 센터로 가자 그랬잖아! 거기로 찍으면 어떡해!”

“예에? 그런 말 없으셨는데요?”

“……내가 그랬어?”

“예!”

종영의 당당한 대답에 청건은 입을 점차 다물었다. 그리고 허망한 얼굴로 밤톨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을 안 했단 말이야?

‘안녕. 최근 주소로 바로 가자.’

‘옙, 형님.’

……말을 안 했네.

청건이 시트에 힘없이 기대자 종영이 눈을 도르르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는 자포자기한 채 중얼댔다.

“그래. 가던 길 가. 쭉.”

“옙.”

대답이 경쾌했다. 누구는 심장이 다 뛰는데 지금. 하지만 한참 온 마당에 차를 돌리는 건 좀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혼자 머리를 싸맨들 뭐하냐. 당사자랑 대화를 해야 답이 나오든 하겠지.’

그래. 결판을 내긴 해야 했다. 스토커로 오해받는 일은 정말이지 있어선 안 될 억울한 오명이었다. 사실 찾아간다 해서 밥은커녕 죽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청건은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아 버렸다.

* * *

윤은 인터넷에서 서울 외곽 부동산 매물을 샅샅이 찾아다녔다. 지금 집에서 DVD 방은 버스로 10분 정도의 거리라 더할 나위 없었지만, 요새로 선택한 달동네가 요새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건 큰 문제였다.

이제 월급의 80%는 통장을 스치고 지나가는지라, 거주에 큰돈을 쓰기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일상이 몽땅 뒤집히기 전에 도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매장 관리 중간중간 눈이 빠지게 매물을 뒤져 보아도 영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여긴 너무 산골이잖아. 월세가 괜찮으면 보증금이 문제고 가격이 감당 가능하면 위치가 문제였다.

의자에 푹 기댄 윤은 사람이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유리문 밖을 멍하니 보았다. 마지막 스토커가 사라진 지 보름이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청건이 자신과의 관계를 포기했음이 명백해졌다.

하지만 웬걸.

퇴근 후 텅 빈 촬영지를 지나던 윤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골목에 익숙한 실루엣이 있었다. 밥을 먹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는 남자의 머리색은, 남색이었다. 모르는 척 뒤로 돈 윤의 발에 청건이 놓은 듯한 봉투가 부스럭, 걸렸다. 청건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

깜박이는 주황빛 가로등이 둘의 얼굴에 고르게 쬐어졌다. 청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바닥에 놓인 봉투를 집어 들자 윤은 살짝 뒷걸음쳤다. 고개를 든 남자는 이른바 쉼표 머리나 포마드를 고수하던 이전과 달리 세팅하지 않은 차분한 머리였다. 몹시 낯설었다.

“안녕하세요?”

윤은 그것이 살면서 들은 것 중 최고로 어색한 인사라 생각했다. 겸연쩍게 드러난 보조개, 몸에 꽉 차는 흰 반팔 티와 진녹색 운동복 하의를 훑던 윤은 조용히 몸을 틀어 계단을 올랐다. 조금 거리가 벌어지자 천천히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려고 온 건 아닌데.”

“…….”

“제가 매니저한테 주소를 잘못 말해서.”

“…….”

“그동안 저는 잘 지냈는데.”

독백을 무시하던 윤은 순간 제 앞을 가로막는 장정에 놀라 멈추었다. 앞머리를 매만지던 청건이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그쪽은 잘…… 지냈어요?”

“…….”

늘 자신감과 호기심에 차 있던 남자의 눈이 어딘가 처진 느낌이었다. 아주 처음 봤을 때와는 인상이 확연히 달랐다. 분명 문란한 깡패처럼 생겼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동네를 빨빨 돌아다니는 강아지 같은 느낌이다. 윤은 제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곤 다시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금세 다시 앞이 가로막혔다.

“제가 잘못한 거 있으면 직접 알려 주시면 안 돼요?”

“…….”

“정말 미안한데 진짜 모르겠어서 그래요.”

윤은 저보다 높은 곳에 있는 청건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선 사과부터 하고 저자세로 들어오는 알파라니. 적응이 안 됐다.

“말하면 다 해명할게요. 빠짐없이.”

어딘가 간절한 눈으로부터 결국 고개를 돌린 윤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머리를 조이는 볼 캡을 벗어 내렸다.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엔 조금 지친 기운이 묻어났다. 침묵을 잇던 윤이 다시 그를 보았다. 초조한 듯 목울대를 움직이던 청건과 눈이 마주쳤다.

“제 이름이요.”

“……네?”

“제 이름은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해명해 봐요.”

할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아닌가. 시간이 많았으니 그 정도는 생각하고 왔으려나. 윤은 불신을 담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시선을 내린 청건은 기억을 더듬는 듯 짐짓 심각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저 얼굴. 윤은 그를 위아래로 훑다가 팔짱을 꼈다.

“제가…… 그쪽 이름을 어떻게 압니까?”

이어진 그의 대답이었다. 아, 뻔하네. 윤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가세요, 그냥.”

“잠깐만요. 지금 생각 중이에요.”

청건은 어깨를 스쳐 가는 윤의 팔을 조급하게 잡아당겼다. 윤이 다시 아래층 계단으로 툭 내려오자 넉넉한 폴라 티가 가볍게 흔들렸다. 청건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모른 척 진짜 잘하신다.”

“……힌트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윤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자길 알아볼 사람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야외에 서서 퀴즈 쇼나 하자는 소린가. 그러나 맞은편의 알파는 정말 억울한 얼굴이었다. 윤은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넘기는 알파의 전완근을 보다가 시선을 떼었다. 바쁜 와중에 운동도 꽤 하는 모양인데. 대체 이런 오해를 풀어서 어디에 쓰려 그러는 걸까. 시간도 없는 사람이.

“제가 어디 가서 머리 나쁘단 소리는 안 들어 봤는데, 이상하게 그쪽이 하는 소리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

“몰래카메라 찍는 거 아니면 말 좀 해 줘요, 제발.”

그의 말끝엔 약간의 애원조가 섞여 있었다. 배우는 배우였다. 모질게 굴려던 윤의 눈빛이 크게 누그러졌다. 가슴을 부풀리는 청건의 잘난 얼굴에 진심 어린 답답함이 한가득이라.

결국 윤은 한숨 쉬듯 말을 뱉었다.

“그때 제 이름 부르셨잖아요, 그쪽이.”

“……제가요?”

“네.”

이 이상의 힌트는 주기 싫었다. 별명까지 아는 마당에 힌트는 무슨 힌트. 청건은 허리를 짚으며 큰 손으로 앞머리를 꾹 쥐었다. 어쩐지 일인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윤은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불빛을 정통으로 받으니 처음 보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등 위엔 화면으론 보이지 않을 자잘한 흉터들이 있었다. 아문 지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아……!”

윤은 청건의 짧은 감탄에 황급히 초점을 옮겼다.

“우유? 그게 본명이에요? 김우유?”

“…….”

윤의 미간이 살포시 좁아 들었다. 청건이 재확인했다. “진짜?” 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수작이지?

“세상에, 이제 좀 알겠네.”

청건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저는…… 하도 뽀얗게 생기셔서 장난으로 불러 본 건데.”

“…….”

“이름 잘 어울리네요.”

청건은 진지했다. 진짜 김우유로 착각을 하는 건지. 저 말이 다 사실인지. 윤이 어정쩡하게 다리를 움직이다 계단을 올랐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거 굉장한 확률 아닌가……. 청건이 중얼대며 뒤를 따랐다.

“조금 오해는 있었지만, 오랜만에 봤는데…… 그냥 이렇게 가요?”

“그럼 뭘 더 해야 하나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한 윤이 옥탑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졸졸 쫓아 붙는 소리가 들렸다. 초록 바닥을 밟은 윤이 고개를 홱 돌렸다. 청건이 뻘쭘하게 멈춰 섰다.

“그만 따라와요.”

“…….”

우성 알파를 눈으로 제압한 베타가 문 앞으로 다가갔다. 키패드를 손바닥으로 쿵쿵 두드렸다. 역시나 쉽게는 열리지 않았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청건이 윤의 주먹 쥔 손을 가볍게 쥐고 밀어냈다.

“그렇게 때리면 멀쩡한 것도 고장 날 것 같은데.”

“…….”

청건은 검지 하나로 키패드 위를 가볍게 쓸었다. 화면이 하얗게 불빛을 냈다. 윤이 입꼬리를 올리는 그를 흘깃 보았다. 키패드도 형질 차별하나. 청건은 손바닥으로 패드를 가리키며 물러났다.

처음엔 다른 이들과 비슷한 놈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확실히 다른 알파들과는 접근 방식이 달랐다. 옥상까지는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신나서 올라왔으면서 정작 기회가 있을 땐 강압적으로 뭘 시도할 생각을 안 했다. 윤은 묘한 기분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그렇게 비밀번호를 누른 문을 조금 젖혔을 즘이었다.

“아, 맞다. 김우유 씨.”

윤은 기묘한 호칭을 들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제 품 안으로 내미는 갈색 봉투를 얼결에 받아 들었다.

“까먹을 뻔했네요.”

그를 살핀 윤은 천천히 봉투 입구를 벌려 내용물을 살폈다. 익숙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윤은 안쪽 입술을 꾹 깨물었다.

“쫑이라고, 우리 매니저가 찾아왔어요. 부적값으로 대신해 줄래요?”

카메라를 가만히 보던 윤이 눈을 새치름하게 올려 떴다.

“부적값 얼마나 한다고 그래요. 시장에서 1백 장 묶음으로 산 건데.”

“뭐…… 말도 안 하고 그런 거니까. 저는 사실 그것 때문에 화난 줄 알았거든요.”

뒷머리를 매만지던 청건이 입술을 꾹 붙여 물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그날, 덕분에 잘 잤어요. 보초 선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자 본 적이 기억이 없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잘 자네요.”

2인용 소파에서 잤던, 그날? 평소엔 얼마나 자기에 고작 몇 시간 잔 걸로. 게다가 윤은 뭐 별다른 걸 한 기억이 없었다. 저야말로 냉찜질받고 숙면을 한 것밖엔 없는데……. 윤은 뒤숭숭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다달이 10만 원씩 갚을게요. 그러면 될까요.”

그러자 청건이 얼른 고개 저었다.

“진짜 괜찮아요. 그냥 가져요.”

“빚지는 거 싫어해서요. 2천만 원일 테니까…… 일단 다달이 10만 원씩 드릴게요. 그 이상은 자금 사정상 무리라. 다음에 더 좋은 직장 구하면…….”

“김우유 씨.”

그의 이상한 개명에 멈칫한 윤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너무 지루하면 언제든지 회수하세요. 그간 낸 돈은 빌려 쓴 값으로 치면 되니까.”

청건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윤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봉투를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한테 갔을 수도 있었는데 기적처럼 여기 있는 걸 보니 이젠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고민을 끝낸 청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해요.”

대답을 들은 윤은 한층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작게 목례를 하곤 문고리를 잡았다. 동시에 청건의 손이 그 위를 덮었다. 반사적으로 날카로워진 윤의 눈길에 청건이 제 손을 스르륵 치웠다.

“……실수.”

“…….”

“저…… 해명된 거죠 우유 씨? 대답 듣고 가고 싶어서.”

청건이 대답 없는 윤의 시선에 맞춰 몸을 조금 숙였다.

“네? 김우유 씨.”

그리고 윤을 설득하듯 말꼬리를 끌었다. 성격도 좋았다. 방금까지 계속 오해나 받던 사람이. 습관적 애교인가. 그가 분개하는 전 애인들을 어떤 식으로 풀어 줬을지 조금은 상상이 됐다.

윤은 대강 고개를 끄덕여 주고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을 끽, 열다가 멈춘 윤은 잠깐 고민을 이었다. 그러다 얼핏 몸을 돌렸다. 다시 본 청건의 얼굴엔 옅은 웃음기가 번져있었다.

“……우윤이에요. 김우유가 아니라.”

“…….”

“거슬려서요.”

말을 끝내자마자 윤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철컥.

닫힌 문 뒤로 가만히 서 있던 청건은 침묵했다. 한참 후 그는 뒷걸음 몇 발자국에 평상까지 닿았다. 툭. 조용히 앉은 그는 천천히 평상 위로 드러누웠다. 그러곤 작게 중얼거렸다.

……알았다. 이름.

* * *

열일곱. 사춘기 학생들에겐 발현만큼 자극적인 주제가 없었다.

윤은 코를 틀어막은 오메가 짝과 교탁 위에 앉아 있는 갓 알파가 된 남자애 하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막 새 학기가 시작된 때였다. 이 ‘의식’은 알파들의 무리 형성을 위한 통과 의례였다. 교실 앞에 선 알파 중 하나가 복도 쪽 학생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문 잠가라.”

베타들은 그들의 명령에 모든 교실 문을 잠갔다. 교탁 바로 앞에 앉은 베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교탁 위 알파는 다리를 뻗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어디 가게?”

“……화장실.”

“꼴려서 가는 거 아니면, 조용히 앉아 있어.”

윤은 교탁 위 예비 무법자의 명찰을 살폈다.

「이원형」

윤은 기어코 마른기침을 터뜨리는 짝에 어깨를 굳혔다. 저들은 지금 이 교실을 썩은 페로몬 냄새로 물들였을 것이다. 윤은 흉통을 키워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당연하게도 베타인 그에겐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망설여졌지만, 짝의 등을 쓸어 주려 손을 들었을 때였다.

“우윤?”

윤은 제 이름이 불리는 것에 고개를 들었다.

“너 오메가 아니었냐?”

“……베탄데?”

“와……. 미친.”

“쟤가?”

알파들이 일제히 시끄러워졌다. 교실 안에서 고개를 파묻은 다섯은 오메가임이 확실했다. 그런데 굳이 자신을 거론하는 이유를 윤은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생겨서 오메가가 아닌 것도 웃기네.”

윤은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 교탁에서 뛰어내린 원형이 그의 쪽으로 걸어왔다.

“윤아.”

퍽 다정한 부름이었다. 윤은 중학교 때부터 친하던 친구 하나가 복도 쪽 좌석에서 이편을 긴장하며 보는 걸 깨달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작게 미소를 지을 때였다. 윤의 오른뺨으로 둔탁한 충격이 날아들었다. 윤은 바닥을 보며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어지러운 시선을 천천히 올려 원형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불렀으면 나를 봐야지.”

“…….”

원형이 옆자리 책상을 멀리 밀어내더니 윤의 책상 위로 걸터앉았다. 윤은 그가 넥타이를 당기는 힘에 맥없이 끌려갔다. 손 아래 잡힌 교복 바지가 구겨졌다.

“우리 윤이는 집도 가족도 없다며.”

“…….”

인위적으로 팔락이는 소리에 교탁을 보니, 알파 하나가 유인물을 흔들고 있었다.

“오메가가 되면, 제일 먼저 나한테 찾아와. 우리 집이 적어도 기초 수급자보단 잘 살겠지?”

“…….”

보육원 아이들은 웬만하면 기초 수급자 명단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학생 정보가 담긴 종이를 담임 자리에서 발견하곤 몰래 가져온 듯했다. 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건 처음이었다. 불이 다 꺼진 보육원 귀퉁이에서 손전등을 켜 놓고 밤새워 공부했다. 아무런 흠 없는 ‘보통’의 학생으로 살기 위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이라도, 들키지 않았어야 했는데.

“무서워할 것 없어. 단순한 거래잖아.”

돈과 오메가의 발현을 맞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새하얀 외양으로 오해를 받은 적은 많았다. 하지만 오메가 인자조차 없는 우윤이었다. 점점 졸려 오는 목에 옆 짝처럼 잔기침이 터졌다.

“난 지금 찌그러진 놈들보다 네가 제일 탐나거든. 어때. 1년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윤은 알파의 갈색 입술을 흔들리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말이 없는 윤에 원형이 비소 지으며 넥타이에서 손을 떼었다. 분명 승낙으로 안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순간 윤은 놈이 앉은 제 책상을 손으로 밀며 발에 걸리는 철제 다리를 당겼다. 순간적으로 넘어가는 책상과 함께 이원형이 바닥을 뒹굴었다. 윤은 큰 소리로 무너지는 물건들과 이원형의 신음, 집중된 시선을 뒤로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윤이 사는 보육원은 드센 놈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적자생존의 룰이 두드러지는. 멍청하게 굴면 식사가 줄었고, 하자 있는 옷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중학생 땐 친구들로부터 힘도 없는 게 성질만 살았단 소리를 종종 들었었다. 가족이 있다는 전제하에서는 매력적인 성격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독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는 소리를 지르는 학주를 뒤로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알파 발현 인자가 없다는 소리에 부모에게서 버려졌다. 이원형 무리의 관심을 독차지한 후론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 모조리 윤을 떠났다.

그 뒤로 윤은 어떤 마음도 주고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부러 모든 이에게 냉소적으로 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가까워져 봐야 각종 이유로 자신에게서 멀어질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텅 비어 버린 우윤은 달려도 달려도 몰아치는 악몽에 휩싸이는 느낌이었다. 발로 힘껏 디디는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컷, 소리와 함께 정신없이 이어지던 뜀박질의 속도가 줄었다. 서서히 제자리에 멈춘 청건은 쏟아지는 숨을 고르며 허리를 짚었다.

“어, 청건 씨 코피!”

촬영장 한쪽에서 스태프의 목소리가 울렸다. 청건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이 된 듯 분노에 싸여 있던 눈이 원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코를 막으니 손바닥 안에 순식간에 피가 고였다. 어머, 웬일이야. 아니 피가 왜 이렇게 많이 나! 한바탕 소란 사이로 여러 개의 손이 그의 주변으로 붙었다. 여기저기 닦을 것을 들고 온 모양이었으나 청건은 말없이 웃으며 대혁이 건넨 손수건을 받았다. 대혁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떡하냐, 이거. 스케줄을 줄일 수도 없고.”

“코피 가지고 뭘. 죄송합니다. 멎으면 바로 다시 갈게요.”

“그래요. 10분 정도 좀 쉬고 합시다. 우린 풀 샷 세팅 조금만 손보죠.”

감독은 잠시 망설였으나 청건의 의견에 따랐다. 배우 하나가 이슈가 터져 하차한 후였으므로 시간이 촉박했다. 1화 방영 날에 맞추어 초반부 촬영분을 전부 다시 찍으려니 출혈이 컸다.

피가 한번 나면 잘 멎지 않는 편이었으나 다행히도 현장의 조치로 금세 그쳤다. 하지만 이어지는 촬영에 평소 피로를 내색하지 않던 청건도 결국 무릎을 짚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체력 소모가 적은 신을 뒤로 미루고 청건은 떠밀리다시피 호텔로 향했다.

꽤 긴 휴식 시간을 받았다. 그는 큰 소파에 깊게 기대앉으며 고개를 젖혔다. 스트레스의 역치는 높은 편이었으나 불면만큼은 유독 힘들었다. 매일 두세 시간 자는 게 일상이었을 때가 더 나았다. 며칠 숙면을 하고 난 후 오히려 체계가 무너진 것 같았다.

청건은 핸드폰을 들었다. 메신저 속엔 별로 볼만한 연락이 없었다. 답장을 미룬 청건이 핸드폰을 뒤집어 뒀다. 그때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몸을 천천히 일으켜 문을 열면 고개를 쏙 내민 남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형.”

어느새 낯설어진 성빈이었다. 청건은 작게 한숨을 쉬곤 인사 없이 뒤돌았다. 그 시답지 않은 반응에 당황한 남자가 청건의 호텔 가운을 잡으며 잰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다들 형이랑 나랑 깊은 사이인 거 알고 있나 봐요. 길게 안 묻고 방 알려 주는 거 보니까. 현장에서 제 얘기하기라도 한 거예요? 나 감동했잖아요.”

하지만 그 말에도 청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아까의 소파에 앉은 청건이 반쯤 빈 잔에 와인을 채웠다.

“형 아까 코피 났었다면서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녜요? 아무리 그래도 쉴 틈이 있어야 될 텐데…….”

“김성빈.”

성빈은 와인을 한 번에 마시는 청건의 옆모습을 서운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최 씨라니까……. 중얼대는 그에게 청건의 날 선 눈빛이 가닿았다.

“……화났어요? 나는 그냥…… 요새 연락을 안 받길래 걱정돼서요.”

“연락을 안 했으면,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

청건이 잔을 내려 두며 하는 말은 고저가 없이 담백했지만, 남자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분명 연기일 것이다.

“왜…… 왜 그래요.”

“오느라 오래 걸렸겠네. 남는 방 잡아 줄 테니까 쉬다 가.”

“이 방도, 베드 큰데요.”

눈치를 보는 척하면서도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역시나. 청건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문지르자 남자가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올려다보는 눈이 간절했다.

“키스하고 싶어요.”

청건은 뒤바뀐 태도가 신기해 헛웃음을 지었다.

“……콘셉트가 바뀌었네. 막무가내로?”

“나랑 자고 나면 생각 달라질 거예요. 나 잘해요. 오메가 아니어도 잘할 수 있어요.”

남자의 도발을 가만히 듣던 청건은 그가 새로이 염색한 갈색 머리를 훑어보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지던 중, 청건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앞머리를 만졌다. 연락이 없는 지 보름이 넘었다. 손끝에서 바스락거리는 갈색이 어쩐지 금방 부서질 것 같았다.

남자는 청건의 기분이 나아진 줄 알고, 배시시 웃으며 가운이 덮인 허벅지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꿇었던 무릎을 조금 높이며 청건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접촉에 거부감이 없는 것을 확신한 남자가 고개를 트는 순간, 청건은 눈썹을 확 좁혔다. 성빈은 놀란 얼굴로 몸을 굳혔다. 불식간에 멱살을 휘어 잡힌 성빈이 청건의 가운을 움켜쥐었다.

“너, 오메가 약 먹었어?”

“…….”

어지러운 시선이 부딪쳤다. 오메가 특유의 과일 향이 코를 찔렀다. 베타에게선 나지 않아야 할 향이었다.

“……나가.”

“형……!”

남자는 몸을 일으키는 청건을 붙들고 늘어졌다. 쉽게 그 손길을 떨친 청건이 가져온 가방 안을 뒤졌다. 아주 깊숙한 곳에서 구겨진 담뱃갑이 나왔다.

“대체 나 언제까지 애태울 건데요?”

썩어 빠진 포도 향이 순식간에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

급하게 라이터를 찾았으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때 성빈이 청건을 힘껏 돌려세웠다. 깊은 한숨을 내쉰 청건이 침대 위로 가방을 내려 두며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급해도 오메가 흉내는 내지 말아 달라고 내가 부탁했어. 이미 한 번 그랬던 거 난 봐주기까지 했어.”

“…….”

“현장 방문도 안 하기로 약속했지. 기억해? 막무가내로 온다는 걸 내가 몇 번이나…….”

형. 남자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청건의 뿌리침에 남자가 휘청거렸다.

“그런데, 지금 네가 하는 짓이 뭐야.”

울먹이던 표정이 점차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형도 을 입장 돼 봐요, 그게 마음처럼 쉽나!”

“…….”

“다른 새끼랑 잤어요? 어떻게 나를 무시해?”

남자의 발악에 청건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일일이 옛날 일을 짚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커다란 규칙이 부서지자 청건은 안 그래도 내키지 않던 관계를 더 이을 생각이 사라졌다.

“그만하자.”

“……언젠 선비인 척하더니. 씨발.”

이성빈인지 김성빈인지는 3년 차 배우였다. 한참 선배한테 하는 말버릇으로만 보아도 그를 내칠 이유는 충분했다. 늦게나마 알게 됐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청건은 그가 오해를 하든 말든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그가 내는 진득하고 역겨운 향에 가슴이 꽉 당겨 왔다.

“나가, 김성빈. 숨 막히니까.”

“……재수 없는 새끼.”

그렇게 뒤돈 최성빈은 큰 소리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청건은 크게 호흡하며 방 안의 창문을 모두 젖혔다. 창틀을 짚고 고개 숙인 그는 코끝에 남은 오메가 향을 제 페로몬으로 희석했다.

하필 그 많은 과일 향 중에 포도 향일 건 또 뭐야.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린 그는 속절없이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발현 후 서울로 오던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모에게서 맡았던 향이 이 향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곳에 두고 왔던 또 다른 오메가가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자신이 본능적으로 오메가를 기피하게 된 이유는 딱 그 둘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그 역시 얼굴이 또렷하지 않았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이다.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 그는 핸드폰을 챙기고 침대 위 가방을 대충 치웠다. 매트리스 위로 풀썩 눕자 포근한 침구에 전신이 폭 감겨들었다. 푹신하게 출렁이던 매트리스가 곧 잠잠해졌다.

성빈은 이미지 메이킹이 잘된 남자였다. 탈 많은 연예계에서 저만큼 버틸 수 있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정상을 바라는 간절함이 있거나, 웬만한 일들엔 타격 입지 않는 멘탈을 가졌거나. 청건은 전자로 시작해서 자연히 후자를 얻었다. 저 애는 애초에 후자를 타고났고. 저 기세라면, 금방 괜찮아질 수 있을 거다.

그러고 보면 청건도 이 판에서 어언 12년째다. 그런데 유독, 정말 유독 피곤했다. 웬만한 일은 다 겪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의도치 않게 떠올린 과거 때문인지.

대자로 누운 청건은 우유병이 가득한 핸드폰 바탕 화면을 엄지로 쓸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옛날 일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또 어디서 어긋난 걸까.

청건은 할 수만 있다면 딱 보름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이왕이면 과거를 바꿀 기회를 좀 넉넉하게 받고 싶었다. 되풀이하느라 닳고 닳은 옛날 일은 차치하고, 그 남자가 ‘너 또 실수했다’고 짚어 주는 곳으로 한 번씩만 갔다 오게.

제 잘못을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모르겠는 거다. 제가 원하는 사람과 소통이 가뭄인 적은 정말이지 12년간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군 저렇게 안달을 내는데…….

이마를 긁던 청건이 깊은 한숨 뒤 연락처를 뒤적이더니 그나마 제일 가능성이 있는 놈에게 발신했다. 짧은 발신음 끝에 소리가 뚝 멎었다. 역시. 미소 지은 청건이 불쑥 말했다.

“천요석 나 고민 있어.”

- 뭐? 네가

요석이 되물었다. 청건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왜 다들 반응이 이러지? 난 고민 있으면 안 돼?”

- 아니, 그야 네가 티를 낸 적이 없으니까. 찔러도 놀려 먹을 떡밥 하나를 안 주시는데……. 뭔데 그래?

흥미가 돋긴 돋는 모양이었다. 그 말대로 고민을 들어줬으면 들어줬지, 내뱉지는 않는 청건이라, 어쩐지 조금 긴장됐다. 청건은 혹여 떨리는 숨이 들릴까 스피커폰을 하고 머리맡에 핸드폰을 놓았다.

“너는, 널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 먼저 연락해 봤어?”

- 뭐?!

천요석은 질문에 답하기는커녕 소리나 질렀다. 청건이 머쓱하게 옆머리를 긁었다.

“……없으면 그냥 끊자. 쉬어.”

- 아니 잠깐잠깐. 적응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냐. 누군데, 누구.

“있어.”

- 우리가 아는 사람?

“연예인은 아니고…….”

- 야…….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고 인마. 그냥 형 동생이나 할까 하는데…….”

- 세상에. 야…….

청건은 감탄만 뱉는 천요석에 헛웃음을 지었다. 고민을 얘기하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렇게 할 만한 건 못 됐지만, 속에서 끓는 물음을 어디다 놓을 곳이 없었으므로 청건은 다시금 입을 뗐다.

“그니까……. 요약하자면. 연락이 없으면 보통 애가 탈 거 아냐. 근데 그게 나한테 호감이 없으면, 전혀 먹히는 방법이 아니야?”

- 갑자기 웬 숙맥 흉내? 누구신지? 이청건 좀 다시 바꿔 주세요.

“……나 진지해.”

청건은 입술을 퉁 내밀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청건이 투정하자 요석은 잠시간 진지한 태도로 으음, 하고 앓다가 대답했다.

- 모르겠다, 난. 그런 형 동생 사이는 해 본 적 없어서.

“그런 형 동생 사이가 뭔데.”

- 썸 타는 형 동생.

“야, 진짜.”

- 보고 싶어?

요석이 불쑥 물었다. 청건의 눈이 한 번 깜박였다.

- 지금 보고 싶냐고. 그 사람.

“…….”

끊을까.

청건은 핸드폰을 끌어와 홈 버튼을 눌렀다.

- 한번 잘 생각해 봐. 내가 정의 내려 줄 수 있는 게 아니잖냐. 연애 카운슬러가 왜 이래.

그리고 요석의 말을 흘려들으며 쌓인 채팅방을 하나하나 눌러 보았다. 급하지 않은 연락. 좋은 누나. 뼈가 없는 얘기. 단순 찔러보기. 착한 후배.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 그리고 실시간으로, 대혁.

[자냐?]

나가기.

입장.

[안 자네]

[거거 뭐냐]

나가기.

입장.

[이따 촬영장 올 때]

나가기.

입장.

[송금 보내요. 100,000원을 받으세요!]

이어지지 않는 대화에 청건의 손이 멈추었다. ……웬 돈? 그때 대혁의 새 연락이 미리 보기로 공중에 떴다.

……그럼 이건?

발신자를 확인한 청건의 호흡이 잠시 멈췄다. 어둡던 얼굴이 서서히 필터를 갈아 끼우듯 환해졌다. 청건은 멈추었던 숨을 훅 터뜨리며 말했다.

“천요석.”

- 어.

“형질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될까.”

- 100 중에?

“응.”

알파와 알파. 환영받지 못하는 관계. 게다가 애초에 알파를 증오하는 우윤.

- 음, 90?

요석의 의견에 따르면, 가능성은 고작 10이었다. 그러나 청건은 남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친하다 한들 단지 타인의 의견 중 하나일 뿐이니. 역시 내담자 역할은 오래 할 게 못 됐다.

“들어줘서 고맙다.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청건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2백 개월 할부 중 1개월 치가 들어왔는데 가만히 있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우윤은 최초로 연락을 보내 놓고는 더 이상의 부가 설명이 없었다. 하다못해 입금했어요, 하나가 없다니. 덜렁 입금 문자만 들어온 게 딱 그의 성격을 대변했다.

고민하던 청건은 ‘우유’에게 반대로 20만 원을 입금했다. 애초에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하고도 추가 연락이 없으면 문제가 아주 컸다. 가능성이 10에서 1로 추락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외부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성격이라지만 그 가정을 하고 나니 조금은 초조해졌다.

청건은 숫자 표시가 사라지지 않는 채팅방을 보며 호텔 방을 서성였다.

“……금세 어딜 간 거야…….”

불쑥 흡연 욕구가 올랐다. 청건은 올라오는 금단 현상을 누르려 테이블 위 와인을 병째로 들고 마셨다. 이미 두 잔을 마신 상태라 후환이 두려웠지만.

창문 앞에 서서 복식 호흡 몇 번 하고 있으니 진동이 왔다. 어느새 뒷머리를 잡아 뜯고 있던 청건이 서둘러 핸드폰을 들었다.

[돈이 남아나시나 보네]

청건은 탄식하듯 숨을 뱉고는 왼눈을 찡그렸다. 금단 증상인지 숙취인지 머리가 찢어지게 아팠다. 이유 없이.

“……진짜 미치겠네.”

청건은 기묘한 두통을 느끼며 우윤에게 전화를 넣었다. 이 남자와의 두 번째 통화다. 방금까지 채팅을 친 사람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전화가 연결됐다. 멀리서 작게 헛기침을 한 윤은 스피커 앞에서 코를 훌쩍였다. 청건이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감기 걸렸어요?”

- 네니요.

“네?”

- ……네, 라고요.

통화 목소리는 맑은 물에 갠 물감처럼 포근하다. 천요석의 말이 마냥 군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이랑 하루 종일 통화하고 싶은 형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 이 돈은 또 뭐예요.

“밥은 먹었어요?”

- ……네.

“죽 사 갈까요?”

- 네……? 그 정돈 아닌데.

“뭐 먹었는데요?”

- 에너지바요.

에너지바로 에너지가 찰 리가 없었다. 시계를 확인한 청건이 재빨리 몸을 틀어 입을 옷을 추렸다.

“지금 집에 있죠?”

- 오려는 거 아니죠?

“아플 땐 혼자 있으면 안 되거든요.”

- 아니, 그럴 필요 없.

“시간 좀 걸릴 거예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메시지 보내 놔요.”

- 아니…….

청건은 거절을 듣기 전에 얼른 전화를 끊었다. 가운을 벗어 던지고 옷을 단숨에 꿰입었다. 대혁이 가져오라던 대본집을 들었다. 구두를 구겨 신고 호텔 복도로 나가자 마침 방으로 들어오는 대혁과 마주쳤다. 청건은 얼른 다가가 대혁의 가슴에 대본집과 룸 키를 밀어 넣곤 뒷걸음쳤다.

“변경 신 있으면 필기 좀 부탁해. 나 엄청 급한 일이 생겨서.”

“뭐? 뭔 소리야. 너 촬영 남았잖아.”

금세 엘리베이터 앞에 도달한 청건은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를 연달아 눌렀다.

“밴은 내가 가져갈게. 형은 종영이랑 같이 가면 되겠다.”

“아니 지금 뭔데?”

청건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밀어 넣었다.

“2회분 출연료 반납할 테니까 봐 달라고 좀 전해 줘. 너무너무 죄송하다고도. 어?”

“야 인마. 잠깐만……!”

“믿는다, 형!”

말끔하게 닫히는 은색 문 뒤로 달려오던 대혁이 사라졌다. 2회분 출연료라 함은 적어도 2억은 됐다. 그 정도면 어련히 급한 일인 줄 알고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솔직히 상관없었다. 지금 이해를 받을 여유가 없었다.

밴을 직접 모는 건 오랜만이었다. 청건은 최대한 속도를 뽑아 수현구로 달렸다. 머뭇대는 동안 우윤이 도망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제게 벽을 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반가운 이유가 뭘까. 겨우 한 줄짜리 채팅에 머리가 아픈 이유는. 예사롭지 않은 물건을 전부 버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고쳐 주고 싶은 이유는.

천요석이 옳았다. 틈만 나면 발톱을 세우는 동성의 알파가, 보고 싶어졌다.

* * *

윤은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주말 오전 8시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손님이 온다는 건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제 막 이름을 교환한 사이였지만 상대는 이청건이었다. 거절해도 올 게 뻔한 사람이라는 소리다.

윤은 급하게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대단히 신경 쓸 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성 알파한테 외적으로 아주 뒤질 수는 없었다. 거울 앞에서 막 깬 얼굴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던 윤이 손을 움직여 물을 틀었다.

9시. 10시. 11시. 더 가서 오후 1시. 지금까지 안 올 줄 알았으면 시계나 쳐다보며 주말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텐데. 딱히 다른 일을 대단하게 할 건 아니었지만 억울했다. 윤은 기다리다 못해 달동네 밑까지 뛰쳐나온 상태였다. 1시가 조금 넘으니 그제야 연예인이 타고 있을 법한 큰 차가 동네로 들어왔다.

청건이 하얀 밴에서 내리자마자 윤이 걸음을 옮겼다.

“뭐 하느라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기다렸다기보단…….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데. 그렇다고 또 다른 말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지루했겠다. 차 문을 닫은 청건은 미안한 듯 콧잔등을 조금 찡그렸다.

“지방 스케줄이었어서 시간이 좀 걸렸어요. 오랜만에 큰 차 모느라 긴장해서 연락할 생각을 못 했네요.”

“……5시간을 직접 운전했다고요?”

“거의 그런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청건은 운전석에서 내린 상황이었다. 정말 저 하나 보겠다고 그 먼 거리를 달려온 사람이 있다니. 따져 물으려던 윤은 괜히 제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지루한 걸로 따지면 상대가 배는 더했을 것이다.

“그럼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요. 미리 말을 하지…….”

“199개월 더 봐야 하는 사이잖아요. 정 없게 모른 척하긴 그래서.”

청건은 제 수고로움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난 모바일로만 볼 생각이었는데. 말문이 막힌 채 서 있던 윤은 제게 내밀어지는 것을 받아 들었다.

“지금은 증상 어때요?”

그가 건넨 것은 감기약을 종류별로 털어 온 듯한 약 봉투였다. 묵직한 봉투를 매만지던 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행이네. 밥은요.”

“아직요.”

청건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곤 윤에게 제안했다.

“몸 상태 괜찮으면 가까운 식당이라도 갈까요?”

그는 당장 차 문을 열 태세로 스마트 키를 들었다. 윤은 서둘러 청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 차로 같이 가겠다고요?”

“네.”

청건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눈이 둥그레진 채 입을 벌렸다.

“둘이 같이 밥 먹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밥이 왜요. 큰일이라도 나나?”

“나죠! 당연히요.”

윤이 기겁했다. 이청건은 제 유명세를 싹 잊은 사람 같았다. 누가 보면 윤 쪽이 유명인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정 그러면 집에 가서 작은 차로 바꿔 올 테니까…….”

“지금 작은 차가 문제예요? 이거나 써요.”

윤은 더 감당 안 될 말을 듣기 전에 챙겨 온 새 마스크를 내밀었다.

“쓰면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요?”

“……일단 써요.”

윤은 그의 손에 마스크를 더욱 밀어 넣었다. 소리 없이 웃은 청건은 반항 않고 그걸 착용했다.

“이렇게?”

마스크를 턱에 걸쳐 쓰고 있는 모습에 장난기가 묻어났다. 정색한 윤은 그의 코 위까지 직접 마스크를 씌웠다. 청건의 눈길이 똑바로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5시간을 달려왔다는데 문전 박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윤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밥은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가까운 놀이터나 가요.”

“네. 좋아요.”

청건은 고민도 없이 대꾸했다. 태평하게 앉아 담소나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별 방도가 없었다. 윤은 머뭇대다 앞장섰다.

둘은 달동네 맞은편 연립 주택에 딸린 낡은 놀이터로 향했다. 황량한 놀이터엔 오래된 그네 한 쌍과 시소가 있었다. 윤이 다소 헐렁해 보이는 그네에 앉자 청건도 그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선 벗어도 되죠.”

청건의 목소리가 고요한 놀이터를 깨웠다. 윤은 마스크를 가리키는 청건에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청건은 기다렸다는 듯 마스크를 내리고 발을 굴렀다. 다리가 길어 질질 끌리는데도 그네 타기에 잠깐 열중했다. 그를 흘끔 보던 윤도 몇 번 그네를 움직여 봤다. 끼익, 끼익. 사람이 없어 그런지 녹슨 쇳소리가 쓸데없이 운치 있었다.

청건은 이내 발을 죽 끌며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윤을 바라봤다.

“카메라는 잘 쓰고 있어요?”

“아직요. 찍을 기회가 없어서.”

윤은 말을 아끼며 양손을 꼼지락댔다. 손목에 걸린 봉투가 바스락댔다. 사실 찍지 못한다는 게 더 맞는 말이지만. 더는 사람을 찍지 못하게 됐을 때 들었던 무력감을 또 느끼긴 싫었다.

“HAK2보다 영상 촬영할 때 편할 거예요. 영화 제작에도 쓰이는 거라.”

윤은 집에 있는 오래된 카메라 모델을 알아본 청건이 뜻밖이었다.

“카메라를 잘 알아요?”

“조금요. 좋아하는 사진작가가 있다 보니까.”

이 사람도 좋아하는 작가가 있구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윤은 잠시 후 고개를 반짝 들었다. 제게 선물한 카메라가, 우연이 아니라면.

“혹시, 그 작가 이름이…….”

“아델 라이트요.”

“어!”

“윤 씨도 알아요?”

청건의 물음에 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윤의 반색에 청건의 눈 위로 색다른 빛이 돌았다. 윤이 고민을 거치지 않고 말했다.

“한국 전시에도 갔었어요. 그쪽은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 있어요?”

“전, <디어 블레이즈>요.”

“나도 그 작품 좋아하는데!”

윤은 그넷줄을 잡고 몸을 틀며 활짝 웃음 지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청건은 되레 표정이 굳었다. 자신도 모르게 배시시 웃던 윤이 청건의 반응에 점차 입꼬리를 내렸다. 어색함에 눈만 깜박였다.

“……왜요?”

청건은 그 물음에도 윤을 빤히 보고만 있더니 뒤늦게 입을 열었다.

“웃는 건 처음 봐서.”

“…….”

윤은 조금 당황하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다가도, 청건과 있을 땐 계속 오해만 하고 신경전만 벌였었던 게 생각났다.

“우리 집 놀러 올래요?”

“네?”

돌아간 시선은 금세 다시 청건에게 붙었다. 원인, 웃는 걸 처음 봐서. 결과. 집으로 가자? 윤은 대답을 못 하고 빳빳이 굳었다. 청건은 그 불신 가득한 얼굴을 보다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후회 안 할 텐데.”

“…….”

“그보단 아마…… 좋을 텐데.”

“……의심받는 게 취미신가 봐요?”

이제 막 좀 괜찮은 사람인가 싶었는데. 갸름해진 윤의 눈초리에 청건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어떤 말을 하든 의심할 거면서.”

그는 윤이 앉은 그네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약속하고 갈까요? 허튼짓 안 하기로.”

윤은 눈을 도르르 굴려 새끼손가락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확실히 윤에게 공사 치던 여타 알파처럼 불순한 눈빛은 아니었다. 정말로, 나한테 사심이 없나. 이런저런 회상을 하던 윤은 그가 도로에서 날린 5시간의 노동을 떠올렸다. 마음도 불편한데, 이렇게라도 갚으면 되겠다 싶어 윤은 마침내 그네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좋은 게 있을지, 한번 보죠.”

약간의 오기도 있었다. ‘허튼짓’에 겁먹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청건은 윤의 대답에 눈을 접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요, 갑시다.”

손가락을 마주 걸지도 않았는데 뭐가 만족스러운지. 싱글대는 그에 코웃음이 나왔다. 앞장서는 청건을 보던 윤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가끔은 모험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아마 그런 때이지 않을까. 이유는 모르나 윤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탄 밴은 고급 주택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윤은 세련되기 그지없는 단지 외관과 청건의 단층짜리 주택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그의 차를 인식한 개인 차고가 서서히 열렸다. 주차를 끝내자 잠시 후 시동이 꺼졌다.

윤은 제게로 다가오는 기척에 시트로 바짝 몸을 붙였다. 청건이 조수석 손잡이 안쪽을 몇 초간 누르자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도와주려고요.”

그는 굳어 버린 윤에게 덧붙였다. 광대가 살짝 씰룩이는 걸 보니 윤이 긴장하고 있는 걸 다 눈치챈 모양이었다. 윤은 이를 꾹 물다 얼른 차에서 벗어났다. 대문 앞으로 먼저 와 있으면 청건이 넓은 보폭으로 여유롭게 걸어왔다. 그는 지문 인식 장치를 잠시 조작하더니 말했다.

“여기에 엄지 올려 봐요.”

“네?”

난데없는 제안에 되묻자 청건이 괜찮다는 듯 다시 눈짓했다. 윤은 어쩔 수 없이 센서 위로 엄지를 올렸다. 그러자 전자음 뒤로 대문이 묵직하게 젖혀졌다.

“뭐예요?”

“숨을 곳 필요하면 오라고요. 그때처럼 옥탑으로 도망가면 더 위험하니까.”

청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먼저 정원을 걸어 들어갔다. 멍하니 서 있던 윤은 조금은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

“우성 알파 집으로 들어오는 게 아무래도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믿음에 달렸죠.”

“…….”

윤은 재수 없으리만치 믿음직한 미소를 짓는 청건을 보다가 고개 돌렸다. 최근 알파의 간섭이 잦아졌으니 어쩌면 정말 이 넓은 요새가 필요하게 될 수도. 머릿속에서는 시뮬레이션이 착실히 돌아갔다. 쫓기는 상황에 택시를 잡아타고, 이청건 집으로 온다면. 그러나 윤은 얼른 고개를 털어 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은 다 쓸데없는 짓인 걸 알면서. 제게 도움을 줄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안도감이 든 게 부끄러웠다.

사람들과 파티 하기에 알맞아 보이는 빈 수영장을 지나 계단을 올라간 청건은 현관문 도어 록에 손을 뻗었다. 99999999. 띠리릭. 사라진 키패드 위로 자물쇠 열림 표시가 떴다. 윤은 제가 비밀번호를 볼 수 있도록 몸을 열어 키패드를 두드리는 청건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없을 수도 있잖아요.”

“…….”

청건이 문을 젖히며 먼저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반대는 몰라도 청건은 확실히 윤을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집에 훔쳐 갈 금품이 없는 건지 뭔지. 아무한테나 이런 번호를 다 보여 주고. 머뭇대던 윤은 묘한 기분으로 그의 집 안에 발을 들였다. 어쩔 수 없이 긴장감이 올라왔다. 옷자락을 꾹 잡으며 청건을 돌아보면 그는 새 슬리퍼를 윤의 앞에 두었다. 윤은 천천히 운동화를 벗었다.

집 안에선 특정할 수 없는 과일 향이 넘실넘실 났다. 베리 향에 가까웠다. 냄새를 이리저리 맡아 봤으나 그 향 외엔 없었다.

“담배 냄새가 없네요.”

“금연 중이에요.”

꽁초 양을 보니 보통이 아니었는데. 골초가 그게 가능할까? 윤은 의아했다.

“끊기 쉽지가 않은데.”

“피웠던 것처럼 말하네요?”

“대학 군기가 뭣 같았어서요.”

정확히 말하면 윤을 꼬시다 실패한 알파의 자존심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중문을 지난 둘은 복도로 향했다. 청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군지 못돼 먹은 놈들이네.”

동생 괴롭히는 골목대장을 대신 죽사발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같은 알파 족속이거늘. 윤은 헛웃음 짓다 고개 돌렸다. 그리고, 벽에 가닿은 시선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

윤의 입 밖으로 멍한 탄성이 내뱉어졌다. 세상에.

“기분이 새롭네요.”

“…….”

“알아보는 방문자가 처음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디어 블레이즈(Dear, Blaze)였다. 사별한 남편의 손 사진. 그리고 갈라지는 그 끝에서 사라질 듯 피어오르는 연기.

“짝퉁……?”

넋 놓은 물음에 청건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퉁.”

“전시에 있던 그대로예요?”

“그럼요.”

윤은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만 만져 봐도…….”

“되죠.”

윤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헛웃음 지었다. 이런 방면으로 돈을 쓰는 건 백번 이해가 됐다. 이청건이 아델을 좋아한다는 말은 진짜였다. 윤은 매끈한 표면에 마른 손끝을 댔다. 물론 유리 액자 질감일 뿐이었지만, 인화지를 손에 담듯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사진이 닳아 없어지면 슬플 사람은 되레 우윤이었다. 금세 손을 떼어 낸 윤이 가만히 뒷짐을 졌다.

나무 벽 위로는 아델의 작품 한 점이 더 걸려 있었다. 절규하듯 일그러진 노란 장미. 꿈에서 본 환상이 깨어나면 녹아내리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제목은 아마, 일루젼(illusion).

“구경해요. 마실 거 줄게요.”

청건은 그의 감상을 배려하듯 먼저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은 그제야 그의 집 인테리어에 눈길이 갔다. 인테리어 콘셉트는 의외로 대리석이 아닌 원목이었다. 오두막을 떠오르게 만드는 포근한 집이었다.

윤은 후드 집업을 천천히 벗어 내려 팔에 걸치곤 주변을 둘러봤다. 사생활은 정말 신경도 안 쓰는지 커튼을 전부 걷어 둔 통창과 테라스.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 단층 주택이었으나 높은 천장 탓에 그 앞엔 나무 사다리까지 놓여 있었다. 흡사 작은 도서관 같았다. 윤이 살고 싶은 집의 표본이었다. 흔들의자와 체크 소파 등 각종 의자가 둥글게 놓인 거실로 천천히 걷던 윤이 말했다.

“텔레비전이 없네요.”

“네. 그쪽으론 취미가 없어서요. 배우가 하는 말치곤 이상하겠지만.”

특이하긴 했다. 연출은 아닌가 싶었으나, 학업 성적이 좋다던 걸로 미뤄 보면 책을 좋아하는 건 딱히 이질적인 일이 아니었다. 어쩐지 이전과는 또 다르게 보이는 남자를 살펴보던 중 눈이 딱 마주쳤다.

“직접 고를래요? 종류가 많은데.”

윤은 그의 제안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건이 선 냉장고 뒤로는 옅은 회색과 우드로 어우러진 주방이 펼쳐졌다. 이쪽의 격자 통창 밖으로는 숲이 보였다. 윤은 그가 열어 주는 냉장고 문 안에 종류별로 쌓인 우유와 개중 가장 많은 흰 우유를 멍하니 보았다.

“우유를 안 데워 먹으면 잠을 못 자서요.”

아직 묻지 않았는데 청건이 대답했다. 퍽 아이 같은 습관이었다. 윤은 그가 자신을 ‘우유’라고 별명 지은 이유도 이젠 알 것 같았다. 피부가 희니까. 본명과 관련한 것도 성희롱적 발언도 아닌 일차원적인 이유였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의심했던 것들이 청건의 집에 오니 대부분 녹아 사라졌다.

“……패스할게요. 흰 우유는 별로 안 좋아해서.”

“딸기는 어때요.”

“좋아요.”

곧장 나온 대답에 청건이 피식 웃었다. 윤은 그가 높은 곳에서 꺼내 주는 딸기 우유를 머쓱하게 받았다.

“윤 씨는 복잡하다가도 단순한 것 같아요.”

“욕이죠?”

“칭찬이에요.”

거짓말. 윤의 의심스러운 눈길에 청건은 냉장고를 닫을 뿐이었다. 그는 흰 우유 팩을 찢어 단숨에 들이켰다. 팩을 찢어 낸 윤은 딸기 우유를 천천히 마시며 청건을 훑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알파였다. 영상보다 활자를 좋아하는 연기자. 주당처럼 생겨서는 우유나 잔뜩 쟁여 놓고. 이상하게 인간적이고…….

“창작 욕구가 있는 것 같은데.”

청건이 빈 팩을 테이블에 두며 눈을 맞췄다. 윤은 뭐 훔쳐 먹다 들킨 사람처럼 어색하게 우유 팩을 내렸다. 청건에게서 시선을 떼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사진과였으니까요.”

“잘 어울리네요.”

“…….”

조금 듣기 좋은 말이었다. 처음 듣는 말이라 그런가. 사실 ‘김우유’도 잘 어울린다 말해 주는 이 사람이라면 사진과 아니고 다른 과래도 잘 어울렸다고 말해 줬을 것 같지만. 모두한테 친절할 테니까. 누구한테나 정 주고, 띄워 주고, 살갑게 굴고.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사진은 어쩌다 좋아하게 됐어요?”

청건이 생각에 잠긴 윤에게 물었다. 윤은 이어지던 생각에서 벗어나며 초점을 되돌렸다. 어쩌다? 어쩌다 좋아했더라. 윤의 여린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독학으로 명문대 사진과에 붙었었다. 지금도 그때도 가진 건 인내밖에 없었다. 머리는 평범한 편이었으나 남들이 놀 때 밤낮으로 공부를 하여 과 수석을 유지했다. 교수들은 선천적인 감각에 더해 공부 머리도 훌륭하다며 칭찬했지만 정작 윤은 자신이 천재도 아니고 범재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각종 공모전에 입상했을 때도, 시기 아닌 시기로 하는 말들을 흘려 넘겼다. 바닥이다시피 한 운이 노력 끝에 조금이나마 작용해 주었을 뿐이라 여겼다.

그는 좀 더 이전으로 올라가 처음 셔터를 누르던 날을 떠올렸다. 아마 열일곱이었을 것이다. 보육원을 떠나는 형에게 받은 값싼 카메라로 놀이터 위 아이들을 찍었다. 첫 피사체였다. 공중에 흩뿌린 흙이 굳는 그 순간, 윤은 전율을 느꼈었다.

일자로 다물렸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모르겠어요. 그냥 좋았어요. 이유 없이.”

“…….”

“내가 멈춘 세상이 순식간에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생생한 것 같기도 하고.”

“…….”

“마침 삶에 애착이 필요했던 때라, 딱 매달리기 좋은 취미였어요.”

열악한 환경에서 죽기 살기로 지켰던 꿈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진을 찍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날을 회상하던 눈이 청건에게로 붙었다. 윤은 제게 조용히 붙어 있는 시선에 자신이 한 말을 돌아보았다. 너무 과한 얘기였을까. 완전히 믿을 만한 사람도 아닌데. 이전보단 꽤나 믿을 만하긴 했지만…….

“……윤 씨.”

윤은 반쯤 남은 우유 팩을 꽉 쥐었다. 딱 8월의 날씨 같은, 낮고 온유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샐러드 먹고 갈래요?”

“…….”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윤은 어느 날 소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치킨 먹고 갈래요?’ 하는 솔깃한 제안에 상대의 집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고백을 받았더라는. 그 때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성을 뒤로할 만큼 굉장히 배가 고픈 상태였다. 공복으로 내내 이청건을 기다린 탓에.

괜찮으려나. 이청건의 신뢰도는, 숫자로 따지면 20. 아니, 30? 그래, 샐러드에 수면제를 타는 건 아닌지 잘 감시만 한다면.

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그래요.”

윤은 어쩐지 묘해진 기류를 벗어났다.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 책꽂이 반대편에 놓인 레코드판 진열대로 걸었다. 뿌옇게 바랜 종이로 보아 멋으로 놓은 건 아닌 듯했다. 그리고 옆엔 통기타도 놓여 있었다. 예술, 문학, 노래. 그는 예술 쪽으로 관심이 지대해 보였고, 사진을 제외한 예술에는 문외한인 윤은 청건이 신기했다.

“부챗살 하나, 갈릭 치킨 하나. 어때요?”

“괜찮네요.”

솔직히 아무거나 입에 구겨 넣고 배나 채우면 그만이었다. 엘피판을 슬쩍 쓸던 그는 천장에 매달린 노란 조명과 온갖 뜨개질 쿠션을 구경했다. 주문을 마친 청건이 윤 쪽으로 걸어왔다.

“편하게 앉아요.”

청건이 먼저 소파에 앉자 윤은 그 맞은편인 노란 체크무늬 천을 두른 소파에 앉았다. 짐을 내려 둔 윤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양 무릎을 꼭 잡았다.

“맞다, 나 또 궁금한 거 있어요.”

“……뭔데요?”

알파 집에 배짱 좋게 들어와 놓고 긴장한 방문객과 달리 걱정이 없는 청건은 양 팔꿈치를 허벅지에 얹었다. 곧 편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 씨는 무슨 일 하는지.”

윤은 그의 깍지 낀 손을 잠시 바라보며 대답을 골랐다. 어쩐지 지금 근무하는 곳을 말하기가 꺼려졌다. 못난 직업이란 건 없으나, 앞에 있는 다재다능한 알파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인 듯싶어서. 조금만 빨리 만났었다면 좀 더 떳떳했을까.

윤은 소송 엔딩으로 끝난 지난 스타트업 직장, 그 이전에 다녔던 패션 잡지 회사를 떠올렸다. 신입생 때부터 내내 성실함을 유지한 윤을 눈여겨본 교수 덕에 입사하게 된 곳이었다. 늘 검게 입고 다니는 탓에 패션에 대한 갈망이 있어 그런지 일은 재밌었다. 연봉은 또래보다 월등히 높았고, 칭찬도 부지기수로 들었다.

‘너 그대로 가면 이 바닥 좁은 거 내가 실감하게 해 줄 수 있어!’

사표를 낼 생각은 결단코 없었던 곳이다. 편집장이 바지 지퍼를 내리기 전까지는. 사람을 찍지 못하게 된 것도 딱 그 무렵이었다. 힘들 때마다 잡았던 사진기가 우윤을 살게 했다. 그러나 이젠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전부 놓아 버리려던 그때를 떠올리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윤은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대답했다.

“DVD 방 알바요.”

“위치는요?”

“……수현구에 있어요.”

“아, 가깝네요. 일은 재밌어요?”

윤은 의외의 질문을 던지는 청건이 신기했다. 실컷 사진 얘기를 해 놓고 딴판인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묻지 않다니. 몸에 밴 친절이다. 그를 가만히 훑던 윤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사 뒤처리가 대부분인 일이라. 돈 벌려고 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요?”

“가성비 좋다고 형질인들 사이에서 소문이라도 난 모양이에요.”

청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다음에 놀러 갈게요.”

“오지 마세요.”

“왜요?”

방금 말했지 않은가? 정사 뒤처리 반이라고. 볼 것도 없는데……. 그러나 청건은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실망은 차라리 사진 일을 하지 않는다 했을 때 했어야 맞는 게 아닌가.

“……가게 시장통 만들 일 있어요?”

“조용히 갈게요. 마스크 쓰고.”

“싫어요.”

“모자도 쓰고.”

윤이 대답 없이 미간을 좁히자 청건은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의자에 기대었다.

“그렇다면 뭐…….”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 청건은 윤의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를 천천히 훑었다. 얼굴에 오래 붙는 눈길에 윤은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왜요?”

“사진 일, 하고 싶어요?”

“……네?”

윤은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에 뒷골이 싸했다. 혹시, 스폰?

“어시로 천천히 시작해서.”

“아뇨. 제가 알아서 할 일이죠.”

칼 같은 두 번째 거절에 청건의 입이 머쓱하게 다물렸다. 윤은 날 세운 눈을 숨기지 않고 그의 표정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전 직장의 사장이나 전전 직장 편집장처럼 불결한 인상이 아니라는 게 외려 기분 나빠졌다. 사람이 과하게 선한 상이다. 의심하는 쪽이 다 미안할 정도로.

“여전히 제가 믿을 만한 놈은 아닌가 보네요.”

청건이 작게 중얼거렸다. 남색 머리를 살짝 흩트리는 손에 체념이 묻어났다.

스폰……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그를 빤히 살펴보던 윤은 긴장이 살그미 풀렸다. 괜스레 눈치를 보고 있으면 청건이 덧붙였다.

“사진 얘기할 때, 웃는 게 예뻐서 그랬어요.”

“…….”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흔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게 아쉬워서요.”

청건의 얼굴에선 정말, 한 톨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윤은 제가 한 과민 반응이 민망해 시선을 내렸다. 뭘 먹질 않으니 말라빠진 팔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몇몇은 눈이 뒤집힐 만큼 유혹적인 외모라 치켜세웠으나, 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색이 다 빠진 죽은 화분처럼 희고 연약하게 보일 뿐이었다. 대체 제 외모를 보며 어떻게 예쁘단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아, 외모가 아닐까? 고양이 사료를 챙기던 순수한 마음에서 오는 동정심? 그래. 이전에 청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정말 불쌍해 보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 윤은 그제야 청건의 의중을 납득했다.

“순수하게 동생을 돕고 싶은 마음. 맞아요?”

윤은 그의 마음이 동정심이기를 바라며 물었다.

“나보다 동생인가 보네요.”

“……뭐.”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아니요.”

윤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솔직하게 하는 말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동생인 걸 이제 알았는데 동생을 돕고 싶은 마음이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동정심보다는, 호감일 것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

“형까지만 하려고 노력할게요.”

청건의 말에 윤은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돌렸다.

잠시 조용한 기류에 갇혀 있던 끝에 초인종이 울렸다. 청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을 원격으로 연 후 배달원을 맞았다. 윤은 그 틈에 짐을 챙겨 일어났다. 청건이 현관을 닫고 몸을 돌리자 바로 앞에 윤이 있었다. 그러나 놀란 기색도 없는 청건이 그에게 막 받은 봉투를 내밀었다.

“가져가서 편하게 먹어요.”

“괜찮아요.”

“난 밥 다 먹고 왔으니까.”

윤은 그가 굳이 제 손에 쥐여 주는 샐러드 봉투를 천천히 움켜쥐었다. 5시간 긴장하며 운전했으면 지금 공복인 건 둘 다 매한가질 텐데. 하지만 윤은 말을 줄이고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었다. 청건의 말마따나 이곳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었으나 방도가 없었다. 불편한 게 맞으니까.

가 볼게요, 하는 말에 청건은 조심히 가요, 하고 대답했다. 다행히 데려다준다는 소리는 없었다. 윤은 한시름 놓으며 현관문을 열다가 멈칫했다. 제 손에 두 개나 들린 봉투를 잠깐 내려다봤다.

“……약…….”

“…….”

“……고마워요.”

긴 침묵 끝에 윤은 빠른 속도로 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얼른 현관을 나와 문을 닫았다.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의 목덜미가 어느덧 불그스름했다.

* * *

지이잉. 끼긱. 끼긱.

윤은 멈춰 버린 마우스를 움직였다. 노트북 화면에선 열정적으로 강의하던 선생님이 일그러진 얼굴로 굳어 있었다. 잠잠한 핸드폰을 슬쩍 바라보던 윤은 얼른 다시 시선을 거뒀다. 굳어 있던 교수님도 이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 ……피사체와의 교감만이 외부의 특성을 넘어 내부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것인데…….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스토커를 도망가게 만들고, 냉찜질에 보초까지 서고. 고작 감기 하나에 그 먼 거리를 달려와 이것저것 챙기고. 좋은 말만 쏟아 내고. 배우면서 연기를 하기는커녕 솔직하고. 밀어내도 다시 붙고, 버려도 다시 돌아오고…….

‘샐러드 먹고 갈래요?’

윤은 결국 사진 강의를 중지하고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199개월이나 엮여야 하는 남자가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났다. 그의 마음을 확실하게 파악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형까지만 한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았다. 학구열부터 사진에 대한 흥미까지 꽤나 겹치는 점이 많았으니까. ‘우성 알파’ 딱지만 떼고 보면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성 알파라는 점 그 자체였다. 윤은 양가감정에 오락가락했다. 알파가 짐승으로 돌변하는 게 순간인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짝사랑이든, 러트 사이클이 되었든. 그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려웠다.

잠시 후 가게로 들어온 손님은 이청건의 영화 <혀 설> DVD를 윤에게 내밀었다. 윤은 현자의 얼굴로 바코드를 찍었다. 알파면 알파답게 굴 것이지……. 사람 심란하게.

저녁 8시가 되자 윤은 퀭한 얼굴로 사장님을 맞았다. 사장님은 상태가 이상한 그에게 조기 퇴근을 명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힘없는 목소리를 끝으로 윤은 밖을 나섰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집까지 보행을 택했다. 한참 걷던 윤은 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것을 떠올리곤 처음 보는 편의점에 들어섰다.

초콜릿 딸기 에너지바. 딸기 우유. 성의 없이 두 개를 집어 카운터에 섰다. 느리게 계산을 마친 직원이 말했다.

“2천 7백 원입니다.”

윤은 어딘가 서늘한 기운에 시선을 들었다. 뒤늦게 제 얼굴에 고정된 모히칸 머리의 눈알을 깨달았다. 남자는 선뜩할 만치 뱀 상이었다.

가까스로 시선을 돌린 윤이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태닝 한 갈색 손이 그의 손을 진득하게 쓸며 카드를 가져갔다. 흥미로운 눈이 그의 몸을 구석구석 훑는 게 느껴졌다. 윤은 마스크도 약도 없이 나온 제 안일함을 뒤늦게 후회했다.

윤은 남자가 집게손에 끼워 내미는 블랙 카드를 낚아채듯 집었다. 새로 들어오는 덩치 큰 손님을 피한 그는 볼 캡을 꺼내 쓰며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아스팔트에 남은 지열이 뭉근히 끼쳐 왔다. 불쾌한 기분으로 걷던 윤은 아무 정류장에나 앉았다. 그리고 물기가 있는 딸기 우유를 얼른 뜯어 들이켰다. 위로 바짝 쳐든 목울대가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윤은 순식간에 다 마신 음료를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어째서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딱 하나밖에 없는지. 윤은 한탄스러운 기분으로 우유갑을 구기고 마른세수했다.

그 순간 짧은 클랙슨이 울렸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윤의 시선이 사선으로 들렸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밴에서 가볍게 내린 청건이 제 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와. 우연히 마주쳤네.”

우연이라기엔 청건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되레 혼자만 놀란 윤은 옆자리에 앉는 그의 눈을 피하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왜 하필 마주쳐도 지금일까. 방금의 일로 아직 불안한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채였다.

“나 봐요.”

청건이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윤은 여전히 갈무리하지 못한 겁먹은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식은땀이 왜 이렇게 나요.”

방금까진 싱글거리던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윤은 제 얼굴을 타고 땀이 흐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훔쳐 내는 청건에 침을 꿀꺽 삼켜 냈다. 왜 이런 순간에 자꾸 그를 마주하는 걸까.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보이는 게 수치스러웠다.

“또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이 정류장, 집으로 가는 방향 아니잖아요.”

윤은 청건의 예리한 시선을 피하며 가방끈을 잡았다.

“누가 그랬어요?”

청건이 집요하게 물었다. 윤은 저를 걱정스럽게 보는 남자에게 작게 답했다.

“말하면요. 때려 주기라도 하게요?”

“그래 본 적은 없지만…… 여차하면요.”

정말 형 노릇이라도 하려나 보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킨다, 냉랭하게 굴고 싶었으나 청건 앞에선 그런 모습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으니 말해 봐야 허세인 줄로만 알 것이었다. 윤은 단지 제 손으로 식은땀을 훔쳐 내 집업 위로 성의 없이 닦았다. 불쾌한 상황에서 벗어났으니 곧 재게 뛰는 심장도 가라앉을 것이다.

윤은 잠깐의 고민 끝에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바쁜 거 아니었어요?”

“그렇긴 한데, 시간이야 만들면 되니까요.”

“돈으로 시간도 사시나.”

“비슷해요.”

청건은 옅게 웃었다.

아, 이거다. 윤은 그의 진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조물주가 정성 들여 그린 듯한 이목구비. 잘난 척 한 번을 한 적 없는데 잘난 것투성이인 존재하며, 여유로운 태도. 종일 이런 것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놨었다. 얼마나 큰 호감을 가졌는지 모르나, 그 마음을 숨기지도 않고 자신의 사적 영역을 마구 침범하는 최초의 알파. 사람을 이렇게 머리 아프게 만들어 놓고 잠적하더니, 또 불쑥 나타나는 모양새가 어쩐지 얄미웠다.

“야 저기 봐. 이청건 아니야?”

“헉, 진짜네?”

“어떡해. 말 걸어 볼까?”

그때 멀리서 들뜬 목소리가 건너왔다. 그들은 곧 의자 끝에 걸터앉은 청건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만 갈게요.”

윤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건이 일어난 것도 동시였다.

“이 차 선팅 진한 거 알죠.”

“알아서 갈게요. 이제 괜찮으니까.”

윤이 한 발짝 걸음을 비꼈다. 하지만 청건도 뒷걸음쳐 길을 막았다.

“데려다주고 싶은데. 차가 별로면 걸어서 갈까요?”

“…….”

”오순도순 좋겠다. 사진도 선명하게 찍히고.”

불편하든 아니든 일단 차에 타라는 소리였다. 윤은 난감함에 입술만 축였다. 남자는 제가 혼자 집에 가는 선택지를 애초에 주지 않았다.

청건은 윤이 든 빈 딸기 우유 팩을 눈짓했다.

“차에 딸기 우유도 있어요.”

“…….”

“유명한 카페에서 사 왔는데.”

“…….”

“방금 사서 되게 시원한데.”

윤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굶주린 고양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어, 연사 찍힌다.”

겁주는 청건에 윤은 결국 밴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를 흘겼다.

“가끔 비겁한 건 알아요?”

“더 좋은 말도 있잖아요.”

전략. 청건이 씩 웃으며 열린 문으로 윤의 등을 밀었다. 윤은 작게 헛웃음 치며 차 위로 올랐다.

윤이 밴으로 올라타자 운전석에 있던 조폭 같은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홱 돌리더니 팔을 뻗었다.

“반갑습니다. 청건이 매니저 서대혁입니다.”

좌석 간격이 넓은 탓에 윤은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일어나 대혁의 손을 맞붙잡았다.

“안녕하세요. 우윤입니다.”

“어유, 이렇게 직접 뵈니까 확실히 알겠네, 응? 묘오한 매력이 있어요. 저놈이 저거 나한텐 한 번을 안 보여 주려고 아주.”

“형, 좀.”

손을 놔주지 않는 대혁에 엉거주춤 있던 윤은 청건이 손을 대신 빼 주자 그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대혁이 낄낄 장난스럽게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좌불안석인 윤을 눈치챈 청건이 얼른 딸기 우유병을 내밀었다. 멀뚱히 그걸 보던 윤이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이거 때문에 탄 거 아니거든요.”

“그럼 나 때문에 탄 게 되는데 괜찮겠어요?”

“…….”

“전 하나 먹었어요. 저 형은 단 거 질색하고. 자.”

윤은 그가 쥐여 주는 시원한 우유병을 꼭 쥐었다.

“이청건은 광대 내리고 우윤 씨는 벨트 맵니다.”

대혁이 막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윤은 말투는 다정하나 어딘가 위협적인 목소리에 기계적으로 벨트를 찼다.

“내 광대가 뭐.”

“모른 척은. 한라산 뺨치는구먼.”

청건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윤은 두 사람의 막역한 대화와 처음 듣는 청건의 반말을 곱씹으며 우유병을 매만졌다. 잠시 조용한 운전이 이어지던 중 청건이 작게 물어 왔다.

“저녁 스케줄이 어떻게 돼요?”

“씻고 자야죠.”

담백한 대답에 청건은 낮게 웃었다. 윤은 그의 옆모습을 대충 훑다가 되물었다.

“그쪽은요?”

“저도 뭐 없어요. 밥 먹고 씻고 자려고요.”

윤은 그의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엔 어떤 스케줄이 있었나 살짝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들을 태운 차가 동네에 도착했다. 청건이 먼저 내려 윤 쪽의 문을 열어 주었다. 윤은 대혁과 짧게 인사하곤 차에서 내렸다.

“들어가요.”

예상과 달리 청건은 계단을 같이 올라가지 않았다. 윤은 의외의 상황에 고개를 어색하게 끄덕였다. 또 고맙다 말해야 할까. 윤은 잠깐 고민했으나 어렵지 않게 결정을 내렸다.

“태워 줘서 고마워요.”

“조심히 가요.”

입꼬리를 올린 청건이 손을 짧게 들었다 내렸다. 그러곤 곧바로 차에 올라탔고, 윤이 미처 첫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떠났다. 스케줄이 없는 모양인데 더 귀찮게 구는 일이 없다니. 며칠 전 고백 비슷한 걸 한 사람치고는 심하게 깔끔한 태도였다.

윤은 애매한 기분으로 계단을 올랐다. 거짓말 따위는 한 적 없는 이청건은 정말 ‘형 까지만 하려고 노력’하려는 모양이었다.

긴 계단을 반절쯤 올라 숨을 한번 고르던 윤은 제 뒤를 따르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여느 스토커처럼 발소리를 숨기지 않는 걸 보니 달동네 거주자인 것 같았다. 윤은 점점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를 무시하고 다시 앞서 걸었다. 하지만 성큼성큼 다가오던 발소리가 등 뒤에서 뚝 멈추었다. 설마. 윤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윤의 양어깨로 두 손이 철썩 올라왔다.

“아악!”

“아악!”

그들은 엇비슷하게 새된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동네에 둘의 가쁜 숨이 울렸다.

“왜 그렇게 놀라요!”

“놀라게 하니까 놀라죠!”

윤은 성을 내며 아랫집 여자를 흘겼다. 역시 제멋대로네. 그녀를 흘기던 윤이 뒤돌아 계단을 쿵쿵 밟아 올랐다. 이새미가 폴짝대며 옆으로 따라붙었다.

“아이! 삐졌어요? 미안, 미안. 이렇게 놀랄 줄 알았나.”

“그냥 조용히 갑시다.”

“거 까칠하긴. 한집 사는 사이에 내외는 금! 물!”

윤은 어깨동무를 휙 해 오는 초록 머리의 팔을 밀어냈다. 176을 웃도는 윤의 키와 비슷한 새미는 크게 밀리지도 않고 입만 삐죽 내밀었다. 윤이 그 얼굴에 대고 매정하게 말했다.

“형질이 어떻게 되세요? 전 통성명보다 그게 우선이라.”

“아, 오메가시구나. 걱정 마요. 알파라고 아무한테나 집적거리지 않으니까. 내가 또 약도 꼬박꼬박 잘 먹고…….”

새미는 묻지도 않은 정보를 쏟아 냈다. 괜히 물어봤다. 만날 때마다 썩 달갑지 않더라니 역시나 알파였다. 윤은 조잘대는 새미를 멀찍이 피해 걸었다. 새미가 뒤처질세라 종종종 쫓아왔다. 공작새 흉내를 내는 참새 같았다.

“맞다. 청건이 술 잘 못한다는데,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순 있을라나.”

윤은 난데없는 청건의 소식에 새미를 흘끗 바라보았다.

“밥 먹고 씻고 잔다는데요.”

“응? 청건이가요?”

“네.”

근데 웬 ‘청건이’. 윤은 이전보다 무언가 가까워진 호칭에 미간을 좁혔다.

“밥을 먹긴 하겠죠? 술집에서.”

윤은 새미의 말에 그가 급하게 떠난 이유를 깨달았다. 술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약속이 있다는 걸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설마. 술자리의 의도가…….

“종방연에 주연이 빠지면 쓰나.”

……문란한 건 아니고.

새미의 대답에 떠오르려던 의심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그러나 공적 모임을 굳이 숨긴 이유가 궁금했다.

새미는 생각에 빠져 있는 윤을 살피곤 말했다.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요. 청건이가 괜히 걱정할까 봐 말 안 한 거 같으니까. 거기 오메가가 좀 많아?”

어느새 집 앞에 다다른 윤이 우뚝 멈추었다.

“……오메가가 얼마나, 많다는데요?”

“뭐, 주조연, 촬영진 싹 통틀어 80퍼?”

윤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침묵했다. 꽤 많은데. 이청건이 베타 애인을 사귀어 온 행보야 공공연했지만, 몰래 사귀었던 오메가 연인이 없다는 보장은 없었다.

새미는 심각한 얼굴의 윤을 보다 피식 웃었다.

“질투가 심해서 말을 안 한 모양이네.”

윤은 정색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심각해? 누가 보면 주식 폭락한 줄 알겠어요.”

“…….”

그것도 맞긴 한데. 그녀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윤이 문득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속속들이 다 알아요? 둘이 종일 통화라도 하는 모양이에요.”

“왜요. 또 질투 나요?”

“…….”

역공격을 하려다 실패한 윤이 도끼눈을 떴다.

“아유. 알겠어요, 알겠어. 눈으로 사람 찢겠네. 우윤 씨 단! 순! 궁금증 얼른 풀어 줄게요?”

새미는 철부지 동생을 달래듯 그의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별건 아니고. 내가 선배한테 조언 구할게 좀 있어서 종종 연락해요. 난 모델 일 하는데 이번에 드라마 캐스팅됐거든.”

윤은 그녀가 모델이든 바퀴벌레든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풀린 의구심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술 좀 마셔 달랬는데 타이밍도 구리지. 종방연 간다더라고요. 오메가가 너무 많아서 싫다더니 역시 뺄 수는 없었나 봐요.”

“……오메가가 왜 싫다는데요?”

“그건 나야 모르죠? 썸 타는 윤 씨가 물어봐요.”

윤은 더 이상 말 섞기를 포기하고 계단을 올랐다. 새미가 2층으로 가는 난간을 잡고 윤을 올려다봤다.

“근데, 내가 먼저 반말하면 반말해 줄 거예요? 나 존댓말 싫은데.”

“…….”

“에이, 그냥 내가 물꼬 튼다! 그럼 너도 억울해서 하겠지, 뭐.”

갑자기 시작된 반말에 걸음을 멈추자 새미는 쏜살같이 뒤돌아 올라왔던 돌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난 아무래도 술 좀 적셔야겠다. 잘 들어가 동생! cheerio!”

윤은 펄렁이며 멀어지는 초록색 머리카락을 보다가 자포자기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반말이야 문제 될 건 없었지만 기가 빨렸다. 안 그래도 안 좋은 체력이 급격하게 쇠락하는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윤은 샤워를 끝내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종방연……. 누수가 있어 천장이 노랗게 얼룩덜룩한 것을 보면서 눈을 깜박였다. 매트리스 밖으로 뻗어 나온 다리가 고요하게 달랑였다.

* * *

「과체중 - 정상. 해당 사항 없음.

고혈압 - 정상. 해당 사항 없음.

고지혈증 - 정상. 해당 사항 없음.

이하 혈액 검사 심혈관계 소화기계 호흡기계 검사부터 CT 검사까지 특이 소견 없음.」

규칙적인 운동과 체계적인 식단 관리로 인해 청건의 몸 상태는 고장 난 곳 없이 아주 멀쩡했다.

청건은 검사 결과가 적힌 종이를 대충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평소라면 검사지를 회사 측에 곧바로 넘겼을 테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왜인지는 뻔했다. 신체적으로 문제가 생겼단 말이라도 듣고 싶은 거다. 보통 연애를 의무적으로 또는 적적해서 시작한 경우가 태반이라, 이런 유의 호감이 익숙지 않았다. 이례적인 일이다. 연기가 아닌 일에 흥미가 식지 않는 것은.

매일 연락을 망설이는 을의 입장에선 다소 건방진 상상이었지만, 윤을 꽁꽁 감싼 목 폴라를 벗겨 보는 게 최근 청건의 가장 큰 소원이었다. 알파에게서 겪은 부정적인 일들로 겹겹이 쌓여 있을 그의 예민함을 한 꺼풀 내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옷을 벗게 한 후에는?

얄따랗게 뻗어 있는 손가락과 각진 손목뼈를 떠올리던 청건은 절로 그려지는 유려한 몸 선을 떠올리다 조금 고개를 털어 냈다. 헛기침하던 그는 타이밍 좋게 제게 몸을 비비는 고양이 막이를 투박하게 쓰다듬었다. 유기 묘 센터에서 유일하게 사람을 따르는 아이였다.

고양이는 애완동물로 육종되었다지만 애초에 인간과는 상극이었다. 독립성도 야생성도 강한지라 쉽사리 욕심을 낼 수도 없다. 심기를 거스르면 언제든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윤처럼.

생각을 덜기 위해 온 곳에서 주구장창 생각이 쏟아졌다. 보고 싶은 마음이 꼭대기까지 쌓였다. 괜히 건강의 이상으로 탓을 돌려 보려 했으나 분명한 호감이었다.

어제 청건은 오며 가며 인사만 하던 모델에게 고백을 받았다. 오는 이 가는 이 막지 않던 전에야 웬만한 인성을 갖췄다면 곧바로 연애를 시작했겠지만, 이젠 그러지 못했다. 공들이고 싶은 상대가 생겨서.

청건은 막이를 마지막으로 만져 주고 일어나 벗어 둔 블레이저를 집어 들었다. 멀리서 청건만을 응시하던 직원들이 순식간에 그의 쪽으로 몰렸다.

“더 있다 가시지……!”

“음료라도 더 만들어 드릴까요?”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편하게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우, 너무 오랜만에 오셨는데 아쉬워서 어떡해요.”

“또 오면 되죠, 이모.”

잠시 인사를 나누고 나가는 청건의 뒤로 직원들이 모였다. 어때. 듣던 대로 완벽하지. 조각인 줄 알았어요. 나도 그게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잖아. 근데 맞아. 조각. 성격은 또 어떻고……. 그들의 아련한 얼굴이 닫히는 자동문 뒤로 사라졌다.

청건이 대기 중인 밴으로 돌아갔다. 카페테라스에 있던 종영이 청건을 발견하곤 얼른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시트에 몸을 묻은 청건은 서둘러 시동을 거는 종영에게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해. 스케줄도 끝났는데.”

“옙.”

종영은 빙글 웃으며 자갈돌 위를 바작바작 밟아 후진했다.

“근데 형님, 웬일로 개인 스케줄에 절 데려오셨습니까?”

“이 기분으로 운전하다간 차 뒤집힐 것 같아서…….”

종영은 백미러로 보이는 복잡해 보이는 청건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동네를 거의 빠져나갈 때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수현구 안 가십니까? 시간이 많이 남는데.”

“아무래도 가는 게 낫나?”

잠깐 시트에서 몸을 뗀 청건이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됐어. 나보다 더 복잡할 텐데.”

윤에게 호감을 내비치곤 대수롭지 않은 듯 샐러드나 내밀던 순간이 떠올랐다. 청건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괜히 티는 내 가지고. 초짜처럼.

종영은 부담스러울까 윤에게 연락하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그를 흘끗 보다가 물었다.

“잠깐 드라이브 어떠십니까?”

“그러지 뭐.”

청건은 입만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또 볼 수 있을까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그는 하남에서 시작해 강동과 송파를 내달리는 차에 멍하니 실려 갔다. 눈치채지 못한 새에 멈춘 차는 수현구에 있었다. 한참 후 깨달은 청건은 감격한 듯 종영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문을 열었다.

우연히 만나는 것을 가정하기 위해 무작정 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장소는 이전에 유추해 둔 수현구 DVD 방과 윤의 집 사이에 있는 한적한 도로였다. 홀짝 게임이었다. 윤이 퇴근 후 걸어간다면 마주칠 테고, 버스를 탄다면 쫑.

첫날 결과는 쫑이었다.

그 후 습관적으로 청건은 그 도로 위에 있었다. 머리가 아플 때도. 3시간 자던 잠을 1시간 잤을 때도. 촬영 중 몇 시간 여유가 생길 때도. 촬영지가 서울일 때면. 주변에 있는 카페에서 차가운 딸기 우유를 꼭 하나씩 사서 그곳에 있었다.

‘태워 줘서 고마워요.’

마침내 만난 윤은 제가 준 딸기 우유를 손에 꼭 쥔 채였다. 언젠가 낯간지러워하던 감사 인사를 이젠 여유롭게 전하는 그의 갈색 머리가 약한 바람에 살랑였다. 청건은 그 머리칼을 쓰다듬어 보고 싶은 마음을 짧은 손 인사로 대신했다.

밴에 타자마자 문을 빠르게 닫은 청건은 시트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등골이 칼에 베이듯 따가웠다. 생전 처음 겪는 통증이었다. 이게 뭐라고 감은 눈이 떨리는 것을 본 대혁은 무언가 못마땅한지 고개를 설설 젓곤 종방연 장소로 차를 몰았다.

하필 기다리다 겨우 만난 게 약속 있는 날일까.

과장 하나도 없이 청건은 근 10년 중 가장 우울했다. 그러나 꽃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라 참을 만은 했다.

* * *

떠들썩한 종방연의 3차는 주연 배우 ‘하정’의 어머님이 하시는 편백 찜 집을 통째로 빌려 이루어지고 있었다.

청건의 대각선에 앉은 조감독이 막 초록색 소주병에 숟가락을 끼우고 일어나 기가 막히게 트로트를 뽑기 시작했다. 족히 40명은 넘는 이들이 그 장면에 환호성을 내거나 폭소를 터뜨렸다.

이 소란 안에서 가장 분위기를 즐겨야 마땅할 주연 이청건은 동태 눈깔인 채 늘어진 배추를 젓가락으로 죽죽 찢어 내고 있었다. 그의 잔은 동료들이 주는 술로 다시 채워졌다. 청건은 통산 열 잔째인 술잔을 위장으로 들이부었다. 주량인 소주 세 잔은 진즉 넘은 상황이었다.

그는 잔을 내려 두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러나 눈이 가물거렸다. 청건은 옆 사람 어깨를 꾹 눌렀다.

“이거 ‘우유’ 맞아?”

“네. 우유 맞아요.”

옆자리 후배도 고개를 이리저리 휘청대는 걸 보니 영 믿음직스럽진 못했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다. 청건은 동료의 말을 믿고 우유의 번호로 발신했다.

“질투 나네. 대체 형을 이렇게까지 취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고요. 설마 우유예요?”

“뭐? 우유? 확 마셔 버릴까.”

청건을 몰래 흠모하던 이들은 ‘우유’ 한 마디에 그의 주변에 앉아 농지거리를 했다. 그러나 청건은 그들에겐 관심도 주지 않고 발신음을 들으며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안개가 낀 듯한 머릿속에서 할 말을 골라내려 애썼다.

밤이 늦었는데, 밥은 챙겨 먹었냐.

자는데 혹시 깨웠냐.

여기 편백 찜 집 맛이 괜찮다. 다음에 같이 올까?

넌 왜 그렇게 날……. 왜 날 이렇게…….

청건은 끊어지는 화면을 허망하게 보았다. 분명 몇 초 안에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뜬 것이 아니니 차단일 리는 없다. 그러나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재발신 했다.

아아, 미치겠네. 청건은 좌식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어 머리를 감쌌다. 떠오르는 수십 마디 중 반절은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될 말들이었다. 어둑어둑한 머리는 음흉한 말들을 정제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우윤한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디까지 허용해 줄까.

“나…… 이런 거 어려운 적 없었는데.”

혼잣말하던 청건은 팔꿈치가 휘청, 아래로 떨어지면 다시 테이블 위로 쾅 박아 고정했다. 술에 취해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펴는 손이 살짝 떨렸다. 왜 이렇게 몸에 피가 안 통하냐.

오랜 발신음 끝에 상대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 여보세요.

쿵!

벌떡 허리를 편 청건이 식탁에 무릎을 박았다. 그는 으윽, 신음하며 몸을 구겼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눈을 번쩍 뜨며 청건의 안위를 살폈다. 형 괜찮아요? 야, 괜찮아? 선배 괜찮아요?

- 뭐예요……?

청건은 짝사랑 트리오와 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픔을 견뎌 냈다. 작은 소란에 저 멀리서도 시선이 족족 꽂혔다. 이청건을 노리는 하이에나는 한둘이 아닌 듯 보였다.

그는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우윤은 분명 막 깨어난 목소리였다. 그래, 아까 봤는데 또 피할 리는 없잖아. 진정하자, 좀. 윤이는 증발할 리가 없다고…….

“자고 있었어? 미안해…….”

- 예……?

의아한 물음이 넘어왔다. 그러나 청건은 벌어지고 있는 오류를 깨닫지 못했다. 단지 급격하게 내부 온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 와이셔츠 위 단추를 하나 더 풀었을 뿐.

놀랄 때면 순하게 둥글려지는 눈매, 살짝 처진 벽돌색 입술. 올곧은 걸음과 검고 처연한 분위기. 보고 있지 않으나 앞에 있는 듯했다.

“그래도 보고 싶어.”

- …….

“넌 나한테 이런 적 없어?”

나만 네가 보고 싶은 건지 궁금해. 난 바라는 거 없는데. 그냥 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그대로 보여 주면 되는데…….”

청건은 주변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을 알지 못했다.

- ……술 많이 마셨어요?

윤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렁거렸다. 전신에 불이 난 것처럼 덥고, 배 속이 끓고, 반대로 등골이 서늘했다. 왜 이러지. 그는 두통이 들끓는 이마를 붙들었다. 아래턱이 조금씩 떨렸다.

“……윤아.”

네가 싫어해서 담배도 끊었어. 나는 너한테…….

“칭찬받고 싶어……. 나 좀 예뻐해 줘.”

너한테 난, 뻔한 알파 중에 한 명인 거 알아. 네가 무슨 각오로 날 피하는지도 알아.

“네가 괴로울 거 알아. 아는데…….”

처음은 신경 쓰였고, 그 다음엔 오기가 들었고. 지금은 그냥 그날처럼.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 …….

“보고 싶어. 윤아.”

이상하게 멈춰지지가 않아. 네 손목의 흉터 때문인지, 바스러질 것 같은 외모 때문인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는 모르겠지만, 알고 싶어. 보고 싶어. 동질감인지, 반했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좋아졌는지 솔직히 난 상관없어.

이청건은 대선배에게도 제 주장을 부드럽게 피력할 줄 알았다. 힘들이지 않고 상대 감정을 읽고 다룰 줄도 알았다. 하지만 우윤이 어려웠다. 단 한 번도 사랑에 있어 속도가 어긋난 적이 없었다. 앞에서 힘껏 끌어 주는 상대를 따라가면 됐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만큼 앞서 온 제 뒤에 멀리 서 있을 뿐인 상대에 속이 탔다.

윤의 침묵에 청건은 머리를 헤집으며 몸을 굽혔다.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윤의 대답에 집중한 것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주변이 우주 속과 같이 고요해졌다는 걸. 지금 청건은 마흔네 명 앞에서 공개 고백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윤이 몰라야 할 텐데. 이청건은 이 와중에도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됐다.

- ……어디예요.

고개를 식탁에 거의 처박고 있던 청건이 충혈된 눈을 서서히 떴다. 술 마시는데 여념이 없는 몇 명을 제외한 몇 십 쌍의 눈이 멍하니 고개를 드는 청건을 따라 위로 움직였다.

“……어?”

- 지금 어디냐고요.

“……수원…….”

윤은 청건의 대답에 다시 침묵했다. 잠시 후 실바람 같은 한숨. 이어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상세 주소 찍어요.

……윤아. 청건이 멍하니 뱉은 이름 뒤로 대답은 없었다. 통화가 끝난 화면을 넋 놓고 보던 청건이 홀린 듯 회식 장소를 공유했다. 그를 보던 사람들은 팔꿈치로 양옆의 사람을 밀며 속닥였다.

“청건 씨, 나 자존심 상한다. 상대 배우 앞에 놓고 이러기 있어?”

여배우의 능청스러운 말을 시작으로 조금씩 소음이 끼어들었다.

청건 씨도 절절매기도 하는구나.

나 진짜 귀한 경험했다.

이야, 우리 이 배우 용기 있네!

짝사랑이 끝난 셋 중 한 명은 입술을 꽉 깨물고, 한 명은 자작하고, 한 명은 자리를 벗어났다. 룸은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돌아갔고 사람들은 곧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청건의 사적인 대화를 라이브로 본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가 애인을 바꾸는 것은 딱히 큰 이슈가 아니었다.

멍하니 식탁을 보던 청건은 파도처럼 몰려드는 열기를 느꼈다. 작게 헛구역질을 하던 그는 휘청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 내장이 뒤틀리고 있었다.

* * *

윤은 옷을 껴입고 계단을 마구 내려가 택시 정류장으로 뛰었다. 급하게 팔을 뻗는 몸짓에 머리 위로 살짝 걸쳐져 있던 후드 모자가 벗겨졌다. 윤은 차에 올라탐과 동시에 말했다.

“기사님, 수원으로 빨리 가 주세요.”

뽀득뽀득 깨무는 입술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그는 택시 기사의 형질이 알파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초조한 시선이 창밖을 향해 있었다.

선선해진 새벽에도 윤은 속이 부글거렸다. 옆에 알파를 노리는 오메가가 한 트럭일 텐데, 도대체 성인이 과음을 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게다가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을 우성 알파가 뭐 그렇게 힘든 일이 있다고.

그쪽은 아직도 술 군기를 놓지 못한 건지. 추파받는 게 즐거운 이청건이 조절을 못 한 건지. 윤은 뭐가 됐든 두 눈으로 그 장면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기사의 흘끔대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우윤을 실은 택시는 39분 후 이청건이 보낸 주소에 도착했다. 윤은 돈을 내자마자 밖으로 튀어 나갔지만 근처에 세워진 택시는 한참 아쉬운 듯 주변을 맴돌았다.

윤은 가게 입구를 찾아 빠르게 걸어갔다. 회식은 끝물인지 야외 주차장엔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딱 룸 잡기 좋은 시간일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무리와 몸을 못 가누는 몇 명을 지나친 윤은 은은한 주황 조명이 밝혀진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반지하에 위치한 자동문을 여니 어둑한 실내가 드러났다. 내부는 찬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카운터에 있던 직원은 딱 보아도 처음 온 듯 주변을 과하게 두리번대는 윤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전체 예약이 잡혀 있어서요.”

“아, 식사할 건 아니고요. 안에 있는 사람 좀 데려가려는데요.”

“혹시 매니저분이신가요?”

“아뇨, 매니저는 아니고요…….”

“배부해 드린 전자 표는 없으신 거죠?”

“네.”

그녀는 짧은 통신 후 보안을 위한 절차라며 일행임을 증명할 수 있는 표식을 요청했다. 윤은 생각 못 한 상황에 난감하게 서 있다가 이내 청건에게 전화를 넣었다. 하지만 세 번의 전화에도 신호음만 줄줄이 이어졌다. 주변 사람이 받아 줄 만도 한데. 그는 초조한 얼굴로 안내음이 나오는 전화를 내렸다. 시끌벅적한 룸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꽐라가 된 이청건을 벌써 누군가 실어 나른 건 아닐까? 사실 그럴 가능성도 다분했다. 오는 동안 시간이 꽤 소요되었으니.

윤은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면서 직원에게 말했다.

“이청건 지인인데요. 그 사람이 많이 취해서…… 여기로 불러 주시기만 하면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만 외부인 출입을 막아 달라고 부탁받은 사안이라서요.”

그녀의 대답에 윤은 한숨을 쉬며 뒷머리를 매만졌다. 보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던 남자와 자신 사이에 널따란 간극이 생겨 버린 것 같았다.

결국 윤은 다섯 번째 불통인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온 김에 화장실만 잠깐 들를게요.”

“네, 화장실은 왼쪽 복도로 가시면 되니 편하게 들르세요.”

“……네.”

사실 화장실이 오른쪽의 룸과 가깝다면 직원이 보지 않을 때 침입을 노려 볼 생각이었지만 그것도 틀려먹었다. 잠깐 머뭇대던 윤은 착잡한 얼굴로 왼쪽 복도로 향했다. 그냥 밖으로 나가 버리면 애초에 지인이라 말한 것도 거짓말로 볼 것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틀거리며 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윤은 여기까지 온 제 선택을 깊이 후회하며 검은 문을 밀었다. 세면대에서 물을 세게 틀어 손을 마구 씻은 그가 곧 있어 손잡이를 퍽 내리쳤다.

젖은 손으로 세면대를 짚고 있던 윤이 잠잠한 핸드폰을 꺼내었다.

“대체 뭘 하는 거야…….”

너무 무턱대고 왔다는 사실이 이제야 인지되었다. 보고 싶다고 날름 뛰어온 놈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오묘한 기분이 되었다. 와서 업어 가 달라 부탁한 것도 아닌데, 왜 다 큰 남자 뒤치다꺼리를 하러……. 아, 증거 잡으러 온 거지. 난데없이 자던 중에 불려 나와 정신이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근데 증거를 잡기엔 너무 편백 찜 집인데. 그는 복잡한 머리로 서서 세면대를 불안하게 두드리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지잉. 징……. 지잉…….

수화음 너머 화장실을 크게 울리는 진동음 하나가 있었다. 핸드폰을 귀에서 뗀 윤이 눈을 굴렸다. 거울 속의 닫힌 칸으로 시선이 닿았다. 그는 천천히 엄지를 움직여 화면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장실 안은 곧바로 적막이 흘렀다.

망설이던 윤은 닫힌 문 앞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 순간 한 차례 문이 덜컥였다.

“윽, 아…….”

낮은 숨소리에 솜털이 바짝 섰다.

“이청건 씨……?”

상대는 답이 없었다. 앓는 듯한 숨소리는 여전히 이어졌지만. 속을 게워 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윤은 작은 틈이 나 있는 문 사이로 손을 천천히 넣었다. 이청건이 아니라면 어쩌나 싶었으나 만취한 사람이니 그렇게까지 얼굴 붉힐 일은 없을 것이다.

힘을 주어 문을 밀자 끼익, 젖혀지던 문이 물체에 걸려 멈추었다. 침을 꼴깍 삼킨 윤이 그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청…….”

예상대로 마주친 얼굴은 익숙한 것이었다. 흐린 초점과 나른하게 뜬 그의 눈은 평소와 아주, 아주 달랐지만…….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는 청건을 마주 볼 뿐이었는데 윤은, 고개를 내리지 않아도 현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단숨에 인지했다. 그러나 눈은 착실하게 아래를 향했다. 저보다 한층 짙은 색의 살덩이. 눈앞에 반짝 섬광이 치는 듯했다. 윤은 눈을 마구 깜빡이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엇……!”

팔이 당겨진 것은 동시였다. 맥없이 칸 안으로 딸려 온 윤이 센 힘에 밀려 등을 부딪쳤다. 얼얼한 등에 그는 인상을 찡그린 채 청건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옆에만 있어 줘…….”

“…….”

죽어 가는 사람처럼 읊조린 청건은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윤의 어깨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깨를 움츠린 윤의 전신으로 와르르 소름이 돋아났다. 자신의 골반께에 천천히 부딪치기 시작한 감각은 분명 자위하는 이청건의 손이었다.

그때 화장실 입구 문이 덜컥 소리와 함께 열렸다. 윤은 떨리는 손을 들어 칸의 문고리를 잠갔다.

세면대 물이 틀어짐과 동시에 귓가로 쏟아지는 깊은 숨에 전신이 울컥 달아올랐다. 목덜미가 뜨거워진 윤은 고개를 젖혀 필사적으로 벽을 보았다. 주먹을 틀어쥐면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눌렀다.

애초에 여긴 왜 왔어?

윤은 자문했으나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아무도 이곳에 오길 부추긴 사람이 없어 더 미칠 노릇이었다. 이 사람이 술에 취해 길에서 자든 오메가랑 원나잇을 하든 상관 않고 잠이나 더 잤어야 했다.

결국 윤은 제 등을 꽉 쥐는 손아귀 힘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 * *

거울 속 우윤은 집에서 입었던 검은 반팔 티 차림이었다. 그는 물을 세게 튼 세면대 속으로 집업을 처박고 비비고 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빨아 먹힌 텅 빈 눈으로. 이를 악물어 볼록 튀어나온 양 볼에 분노가 득시글득시글 끓는 듯했다.

청건은 그의 몇 발자국 뒤에서 양손을 공수하듯 붙잡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 와중에 청건은 가끔씩 그의 하얀 팔을 훔쳐봤다. 평소 뭘 먹질 않아 거의 일자에 가까운 팔뚝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화장실 문이 덜컥 열렸다. 막 들어온 지편성 감독을 확인한 청건이 우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 여기 있었네요? 한참 안 보여서 간 줄 알았네.”

“하하…….”

“근데 뭐 하시나? 벌서는 것도 아니고.”

편성은 큰 물소리의 진원지를 흘끔 보았다. 청건이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벌서는 거 맞아요.”

“……저분한테?”

감독도 숨죽여 물었다. 부글부글 끓는 우윤의 살기가 이곳까지 느껴지는 탓이었다. 청건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해 줄진 모르겠지만 빌어 보려고요.”

“아까 그 주인공이 저분이구먼?”

“……맞아요.”

감독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배낭을 고쳐 들곤 휘청대며 소변기로 다가갔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지편성은 벌써 청건과 세 작품을 함께한 감독이었다. 그는 청건을 특별히 여겼다. 스치기만 해도 돈이 되는 배우일 뿐 아니라 형질을 내세워 자존심을 세우는 법이 없어서. 또 많은 사람을 거쳐 왔음에도 큰 이슈 없이 깔끔했다. 그만큼 뒤탈 없는 연애를 즐겼다. 늘 잘못은 상대에게 있었는데, 청건이 절절매는 건 처음이었다. 대체 어떤 사고를 쳤기에……. 중얼대던 감독은 지퍼를 직 올리곤 윤과 두 칸 떨어진 세면대로 가 손을 씻으며 그를 훑었다. 이번엔 베타가 아닌 것 같은데…….

술에 절여진 지편성 감독은 윤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는 게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유추하지 못한 채 남자의 외양에 감탄했다. 날씬하고 비율 좋은 몸과 눈에 띄는 이목구비가 확실히 보통 마스크는 아니었다. 이청건이 잡혀 살 만도 하다 생각하며 손을 툴툴 털었다.

“애 좀 써야 쓰겠어요.”

그는 청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나갔다. 팔을 휘적이는 지 감독 뒤로 문이 닫혔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고민하던 청건은 이내 윤에게 다가갔다. 레버를 잠그니 순식간에 적막이 흘렀다. 청건은 후드를 꽉 쥔 손을 잡아당겨 살폈다. 손이 조금 불어 있었다.

“이건 제가 버릴게요.”

“됐어요. 빨아 입으면…….”

윤이 말리기도 전에 청건은 물먹은 후드를 비틀어 짜고 손에 쥐었다.

“옷은 필요한 만큼 사 줄게요.”

“또 돈으로 해결하시게요?”

“이게 내가 아는 최선이라 그래요.”

“…….”

둘은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침묵했다. 입을 달싹이던 윤이 눈을 감았다 뜨곤 청건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 술을 퍼마셨어요? 사이클 때 러트 약은 왜 안 가지고 나왔는데요. 누굴 얼마나 꼬실 생각으로…….”

“잘못했어요.”

높아지던 윤의 언성이 대번에 끊겼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청건이 눈만 도르르 굴려 윤을 쳐다봤다. 취기가 남아 살짝 흐린 눈빛이었다. 말을 고르는 입술이 조금 떨렸다.

“분명 사이클이 아닌데, 앞당겨졌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

“변명은 하고 싶지 않은데…….”

청건은 뒷머리를 쥐어뜯듯 쓸어내리다 말을 이었다.

“화 풀릴 때까지 뭐든 할게요. 매일 사과받고 싶다면 그렇게 하고, 술 마시지 말라면 입에도 안 댈게요.”

“…….”

“계속 볼 수 있게만 해 줘요.”

커다란 화장실을 울리는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러나 불안감이 여실히 묻어났다. 평소보다 한껏 처진 눈매를 보던 윤은 긴 한숨 끝에 입을 열었다.

“다 됐고, 당장은 보기 싫으면요.”

“집까지만 데려다줄게요.”

청건이 곧바로 대답했다. 냉랭한 시선에 입술을 꾹 다물어야 했지만. 이만큼 떨렸던 적이 살면서 얼마나 됐나 싶다. 은은한 조명 아래 선명한 그림자를 품은 얼굴이 예뻤다. 그러나 그의 외모에 감탄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청건은 고개를 살짝 털곤 결연한 눈으로 윤을 보았다.

“당장 용서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근데 밤이 너무 늦어서…… 딱, 집까지만.”

“…….”

“계단 아래까지만……?”

“…….”

“근처…… 편의점까지만……?”

“…….”

“못 믿겠으면 대혁 형도 같이.”

“일단 나가죠.”

“예.”

청건은 젖은 옷을 들고 가선 화장실 문을 젖혔다. 가시죠. 한층 높아진 예의와 공손한 손짓은 덤이었다. 윤은 살포시 눈썹을 찡그렸지만 결국 앞장서서 화장실을 나섰다. 검은 반팔을 입은 윤의 매끈한 뒤태가 순식간에 시야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러트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이다. 청건은 제 팔뚝을 세게 꼬집었다. 정신 차리자, 좀.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청건과 윤을 번갈아 보았다. 청건은 어색하게 마주 웃는 둘을 보다 조금 성급히 입을 열었다.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요. 짐 가지고 나올 테니까.”

윤은 떨떠름한 모습이었지만 그 말을 따랐다. 청건은 둘을 떼어 놓고서야 마음 편히 룸을 들렀다 나왔다.

이내 둘은 가로등이 환한 인도 아래 나란히 섰다. 밤바람이 꽤 차가워진 게 느껴졌다. 젖은 후드를 돌바닥에 내려 둔 청건이 제 카디건을 벗어 윤에게 내밀었다.

“안 추운데요.”

“좀 추운 거 같은데.”

“그럼 그쪽 입어요.”

“아니, 제가 춥다는 게 아니라…….”

잠시 고민하던 청건이 그의 어깨에 카디건을 둘렀다. 사실 아까 음식점 주변에서부터 윤의 맨살을 가리는 일이 시급했다. 사방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경계심을 느꼈었다. 왜 겨울옷을 여름에 입는지 1백 번 1천 번 이해가 됐다.

“……떨어져요. 술 냄새 나요.”

퉁명스러운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사라졌다 드러났다 하는 장면마저 자극적이었다. 청건은 윤에게서 한 발 떨어지곤 애써 다른 쪽으로 고개 돌렸다. 떨리는 한숨이 공중에 퍼졌다. 진짜 미쳤나 보다.

얼마 안 있어 주변에 있던 대혁이 밴을 끌고 왔다. 둘 앞에 차가 멈춰 서자 청건이 뒷문을 열곤 어색하게 손짓했다.

“타요.”

윤은 머뭇거리던 몸을 차 안으로 들였다. 이만하면 정말 많이 참아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청건은 제가 전화로 했던 말들이 문득 떠올라 인상을 찡그리며 차에 탔다. 윤과 관련해서는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듯했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은 적막했다. 창문에 비친 실루엣을 종종 흘깃대던 청건은 마침내 굳어 있던 입술을 뗐다. 그 순간 청건의 품으로 툭 하니 카디건이 넘어왔다.

“생각해 보니까, 이거 아까 자ㅇ…….”

“…….”

윤은 하려던 말을 멈추곤 대혁의 눈치를 봤다. 자위할 때 입었던 거라 입기 싫다고, 말하려던 모양이었다. 청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입은 거라, 좀 그렇죠.”

“……네.”

그리고 한차례 또 침묵이 흘렀다. 차가 덜컹대는 대로 흔들리던 청건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어떻게, 수원까지 왔어요?”

그를 본 순간부터 참았던 질문이었다. 윤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안 그래도 얼굴 팔린 사람인데, 술주정 부리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날지도 모르잖아요.”

청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꽤 설득력을 가진 문장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남과 엮이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윤이 새벽 시간인데도 마다하지 않고 한달음에 온 것엔 분명 이유가 있다.

청건은 적당한 말을 골라냈다.

“마땅한 보답을 못 해서 면목이 없네요.”

“그러게요. 썩은 물이나 끼얹고.”

“……아무리 그래도 썩은 물은…….”

“……그거 말한 거 아니고요. 상황 말이에요. 상황.”

윤은 헛숨을 쉬다가 창문을 열었다. 청건은 공허하게 입꼬리를 늘리며 고개를 숙였다. 대혁은 이상한 기류를 알아채곤 백미러를 흘끔 바라봤다.

길이 좁아 들었다. 이대로라면 윤의 집이 머지않았다. 청건은 술독 오른 머리를 굴렸다. 가뜩이나 어렵게 본 사람인데 대뜸 성욕이나 푼 미친놈으로 남을 생각은 없었다.

“……나인 줄은 알았어요?”

“……네?”

그때 창을 보던 윤에게서 질문이 넘어왔다. 윤과 어떻게 헤어질지, 마무리를 고민하던 청건은 그 말을 곧바로 입력받진 못했다.

“그 순간에, 나인 줄은 알았냐고.”

윤은 재차 물으며 청건과 눈을 마주쳤다. 똑바르게 대답하지 않는다면 당장 이곳에서 관계를 정리하리라 결심한 듯 단호한 눈으로.

“……당연하죠.”

“어떻게 증명할래요?”

청건은 윤의 옅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제 머리에나 있을 증명을 어떻게 해 내야 할지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때 멀쩡히 운행되던 차가 급정거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다 왔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손님.”

대혁이 고장 난 NPC처럼 말하며 인자하게 웃었다. 가만히 대혁을 바라보던 윤은 “감사합니다.” 작게 말하곤 차에서 내려 버렸다.

툭.

닫힌 문을 멍하니 보던 청건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형이…… 눈치가 있으면 한 바퀴 더 돌아 주든가 해야 될 거 아냐.”

“나 여친이랑 헤어졌다. 청건아.”

“…….”

말도 안 돼. 그 5년 된 여친분? 언젠 결혼까지 생각했다면서. 청건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거랑 그 일이 무슨 상관…….

“누가 잘되는 꼴이 존나 보기가 싫어!”

대혁은 울먹였다. 난데없는 상황에 청건은 힘이 빠진 얼굴로 시트에 기대었다.

“근데 그 화풀이를 왜 나한테 해. 지금 나도 죽겠어.”

“죽긴 뭘 죽어 널린 게 알판데. 나는 우성 오메가님을 잃었어!”

“우윤이 널렸다고? 어디에 널렸는데, 어디. 어딘지 주소 좀 찍어 봐.”

천국이 따로 없겠네. 그의 중얼거림에 대혁이 벨트를 풀곤 청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뭔데. 저 남자가 뭐 그렇게 대단한데. 너 어차피 로케이션 가면 다 쫑이야. 지금 내 꼴을 봐라. 어? 고작 두 달 장거리 했다고 이 지경이 났는데!”

청건은 대혁의 설득에 이렇다 할 반박도 못 하고 아랫입술을 축였다. 이미 선택한 차기작은 미국 올 로케 얘기가 나오는 중이었다. 만에 하나 연애라도 하게 되면 초장부터 톱니가 어긋날 것은 자명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마음이 바뀌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내 상황은 또 다를지도 모르지.”

청건이 자신감 없이 말했다. 대혁이 의심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너 고백은 해 봤냐?”

그 서툰 말들이 고백일 리는 없었다. 야속한 취중 진담일 뿐. 그러나 생생했다. 청건은 사건을 되풀이하다 허벅지 위에 놓인 회색 카디건을 꽉 쥐었다.

“안 그래도 심란하다.”

“저 사람은 너 안 좋아해.”

“형은 눈치도 없어?”

“그건 네 생각이고.”

대혁이 정곡을 찔렀다.

“내 보기에 너희 쉽지 않아. 알파를 또 무지하게 싫어한다며. 그게 어디 쉽게 바뀌는 취향이디?”

“…….”

사실 대혁의 조언은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빠져 나가는 수준이었다. 마음을 굳힌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뤄 내야만 했으니까. 단지 맞은 뼈가 심하게 아플 뿐. 투지가 꺾인 청건은 시트에 파묻힌 채 팔짱을 꼈다.

“아니, 내가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동생이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끙끙 앓는데 내가 미친놈이냐? 반대를 왜 하겠냐고. 나도 응원하고 싶지. 마음이야. 그런데 머리가 아니래.”

“…….”

“감정에 놀아나지 말라며. 휘둘릴 게 없어서 사랑에 휘둘리냐며. 나의 깊은 사랑에 초치던 이청건이는 뒤진 거야?”

대혁은 조수석 헤드를 붙잡고 애원조로 말했다. 왜 갑자기 신념을 바꾸니. 어? 청건아. 대혁의 눈엔 막냇동생을 보는 듯한 걱정뿐이었다. 가족보다도 더 유난스러운 사이였고, 청건도 제가 상처 입지 않길 바라는 그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청건은 피곤한 기색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저 사람 놓치면 나 죽어. 형.”

“오버 떨지 말고.”

“안 그래도 쪽잠 자던 거, 나 이제 하루에 1시간 자. 우윤이랑 아예 끝나면 나 그마저도 못 잘 거 같아. 결과적으로 잠 못 자서 죽어.”

“……지랄이다. 진짜.”

“어떻게 끝나든 다 내가 겪어. 이제 형보고 방패 해 달라고 안 할게.”

“야, 인마. 누가 그런 것 때문에…….”

“나 열여섯 이청건 아니야, 형.”

청건이 말했다. 그 말에 대혁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나조차도 못 지키던 어린애 아니라고.”

“…….”

“형도 내가, 누굴 지켜 줄 수 있을 정도로 자라기를 바랐잖아.”

“…….”

“이젠 그럴 수 있을 거 같단 말이야.”

잠시일 뿐이라도.

청건은 간절한 얼굴로 대혁을 바라보았다. 대혁은 서서히 그 얼굴에 동화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마침내 에휴, 하고 한숨을 쏟아 내며 운전석에 도로 기대었다.

“모르겠다, 씨. 네 인생인데 망하든 말든 알아서 해라.”

그러자마자 청건은 몸을 일으켰다. 대혁이 가져온 병을 낚아채고 차 문 손잡이를 붙들었다. 대혁은 제 말이 끝나자마자 총알같이 사라지려는 청건을 향해 서둘러 큰 소리를 냈다.

“너, 이번에 파리 스케줄 가기 전엔 정신 차리는 거야! 엉?”

“어. 연락할게 형!”

잘 발효된 반죽처럼 광대를 부풀린 청건이 문을 열자마자 훌쩍 내렸다. 뭔가 허전한 기분에 뒤를 돌아본 대혁은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뒷자리를 마주했다.

아, 거…… 쯧.

청건은 의류 수거함에 무언가를 쑥 넣더니 막 계단을 두 칸씩 오르고 있었다. 대혁이 한숨을 쉬며 차에서 내렸다.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자빠졌어…… 쯧.”

중얼대던 대혁의 얼굴 위로 자포자기한 듯한 웃음이 스쳤다. 쾅. 밴 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쾅쾅쾅.

청건은 빠르게 옥탑을 올라 집 문을 두드렸다. 적은 힘에도 알루미늄 문은 시끄럽게 흔들렸다. 잔소리하는 아저씨도 처리했겠다, 큰 산 하나를 넘은 기분이었다.

“윤 씨. 잠깐만 문 좀 열어 줘요.”

윤이 달가워할 리는 없었지만 청건은 떨리는 숨을 고르며 두어 번 더 윤을 불렀다.

- 시끄러워요. 혼자 있게 좀 가요.

평상시처럼 말하는 목소리가 바깥으로 작게 들려왔다. 청건은 그 목소리를 더 잘 듣고자 문에 가까이 다가서서 말했다.

“아까 못 한 대답할게요.”

- 거기서 해요.

“증명을 어떻게 얼굴 안 보고 해요.”

- 대충 하라고요.

청건은 이상하게 윤 앞에서만 굳어 버리는 머리를 문 위에 툭 부딪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인 줄 알았다 한들 증명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머리뼈를 열어 뇌를 보여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 윤의 심기를 더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대로 돌아가기는 죽기보다 아쉬웠다. 진짜 맛이 가긴 갔구나 싶다. 목 놓아 자신의 비정상을 알리던 대혁의 심정이 조금 이해는 갔다. 살면서 이렇게 매달려 본 일은 결단코 없었으니까.

‘저 사람은 너 안 좋아해.’

아니, 내가 알아. 힘들 것도 알고, 최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정작 당사자는 눈치채지도 못했지만, 내가 알아. 내가 알잖아.

“……저, 며칠 후에 유럽 가요.”

- …….

“언제 다시 오게 될지는, 저도 몰라요.”

옥탑 위가 잠잠해졌다. 청건은 마른침을 삼켜 냈다. 반응 없는 문 뒤가 몹시 궁금해 속이 타들어 갔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이런 거짓말쯤이야.

그 순간 문 위에 대고 있던 이마에서 진동이 일었다. 집 안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느낌이 났다. 청건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뒷걸음치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익. 낡은 문소리 뒤로 둘의 시선이 부딪쳤다. 입술을 말아 문 윤의 얼굴은 미묘했다. 울려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이 동한 것도 아니고. 사실 그보다 더 표현하기 어려운 얼굴을 한 것은 청건이었지만.

“……증명이 필요하면, 그 안에 할게요.”

“…….”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주면 안 돼요? 술 마시고 혼자 있으면,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자는데……. 윤 씨 옆에선 잠이 잘…… 오던데.”

윤은 표정이 없었다. 청건은 조급해졌다.

“평상에서 자도 너무 괜찮아요. 요새 날씨가 워낙 좋으니까. 바람도 솔솔 불고. 해 뜨는 것도 좋아하고.”

횡설수설 뇌까리는 말을 스스로도 인지할 수 없었다. 그저 예쁘게 숨을 쉬기만 하던 윤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내가 가라 해도 안 갈 거죠.”

청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박에 1천만 원 달래도 안 갈 거죠.”

“1억도 줄 수 있어요.”

“……또 이상한 짓 하면요.”

청건은 서둘러 유리병을 보이곤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든 보라색 알약 두 개를 생으로 삼켜 냈다. 각진 알약이 목을 쓸고 내려가는 감각에 그는 인상을 찡그리다 말을 이었다.

“절대 실수 안 해요.”

“…….”

윤은 보라색 약통과 청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몸을 돌렸다. 청건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활짝 열려 있는 문을 보며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집 안에 발을 들였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우윤이 흠잡을 곳 없이 예쁘게 웃던 그때처럼.

“구두 약속도 약속이에요. 헛짓하면 돈 최대로 뜯어 갈 거예요.”

“네.”

청건은 그의 경고에도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볼을 잡아 누르곤 작게 헛기침했다.

“그 이전 일은 기억해요?”

윤이 어지럽혀진 짐을 대충 정리하며 물었다. 청건은 가슴 어딘가가 풍족하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점점 확신이 들었다.

“그럼요. 보고 싶다고.”

“……기억은 하네요.”

“당연하죠.”

“그럼 반말한 것도 기억나겠네.”

청건은 차마 충동을 참지 못했던 아까를 생각하다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기분 나빴어요?”

“별로요. 아랫집도 놨는데.”

“뭐라고요?”

청건이 거의 소리를 지르자 윤이 그를 돌아봤다. 작게 헛기침한 청건이 되물었다.

“언제부터요?”

“얼마 안 됐어요.”

“와, 쟤 그렇게 안 봤는데.”

청건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리를 짚었다. 윤은 그 반응을 보며 짧게 헛웃음 지었다.

“반말이 별거예요?”

“별거죠. 우린 놓지도 못했는데.”

“…….”

“나보다 이새미랑 더 가까운 건 아니죠.”

청건은 그 순간 날아오는 수건을 민첩하게 받아 들었다.

“씻기나 하세요. 술 냄새에, 모르긴 몰라도 그…….”

윤이 말을 줄이며 대충 손짓하자 청건이 수건을 꼭 쥐며 카디건을 내려 두었다.

“얼른 씻을게요.”

“네. 저도 씻어야 되거든요.”

수건을 목에 걸친 청건이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 멍하니 있던 윤이 순식간에 단추 하나가 남아 버리자 기겁하며 뒤로 돌았다.

“들어가서 벗어요, 좀.”

“아, 아 네.”

청건은 욕실로 들어가며 몰래 파안했다.

그는 러트 억제제 덕에 뜨겁게 끓던 몸이 서서히 식는 것을 느꼈으나,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얼음장 같은 물을 틀었다. 그 후 샤워를 마치자 욕실 문 사이로 얇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속옷은 새 거예요.”

검은색 반팔과 검은 조거 팬츠, 검은 속옷 세트를 받아 든 청건이 입술을 깨물었다. 귀엽다. 우윤은 사실 고양이를 가장한 여우가 아닐까.

문을 닫은 청건은 옷에 코를 박고 크게 호흡했다. 무향이 이렇게나 좋았다. 찬물 샤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소용돌이치는 열기를 느꼈다. 그는 촉촉한 몸 위로 윤의 옷을 꿰어 입었다. 잠을 잔 적도, 해장을 한 적도 없는데 얼굴은 활짝 개어 있었다.

청건은 살면서 눈치 좋단 소리를 몇 번을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는 확실했다. 이것은 저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다. 우윤은 이청건을 좋아하고 있다. 그러니, 자각시켜야 한다.

성급히 시작된 고난도의 미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침내 그는 자가 진단을 마쳤다. 검진 결과 홀림 상태 위중. 중증이었다.

* * *

침대에 누운 윤은 얇은 이불을 꼭 쥐었다. 오만 감정이 교차했다. 이 상황을 적과의 동침 시즌2라 명해야 할까.

혹여 실수 한 번을 더 하면 1천이든 1억이든 다 뜯어먹고 팔자 펼 생각으로 이청건을 받아들였다. 잘못을 뉘우치겠다며 방바닥행을 자처한 청건은 베개도 이불도 없이 등을 보이며 누워 있었다. 9부 같이 보이는 윤의 바지를 껴입은 채, 불평 하나 없이.

대체 멀쩡한 집 놔두고 왜 사서 고생을 할까. 윤은 고아 도련님의 의중을 알 수 없다가도 곧 납득했다. 나를 좋아하니까.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면 저것보다 더 미친 짓도 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간의 스토커들을 보았을 때.

이청건은 그저 드러누울 곳이 필요했던 건 아닌지 속 편하게 잠이 들었다. 졸지에 술 취한 알파를 거둬 준 우윤은 새벽 6시가 넘도록 잠에 들지 못했지만.

동이 터 가고 있었다. 죽은 것처럼 자던 청건이 드디어 천장을 보며 바로 누웠다. 윤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그를 살폈다. 옅은 빛에 물든 얼굴이 입체적이고도 부드러웠다. 땅바닥에서 아무런 잠꼬대 없이 잘 자는 남자가 신기했다. 자신은 이렇게 푹신한 곳에서도 잡생각이 끊이질 않는데.

증명이라. 이제는 좋아하는 감정을 눈치 보지 않고 다 쏟아 내겠다는 선전포고였을까. 솔직히 저인 줄 모르고 자위를 했던들 무슨 상관일까. 남남인 사이에.

잠든 알파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윤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미친 짓을 해서 그렇지, 불신과 신뢰를 두고 저울질해 보자면 확실히 신뢰로 기울어 있기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렇게 무방비한 상황에 러트까지 겹쳤는데도 아무 짓도 안하고 잠이나 자는 걸 보면. 저게 다 전략의 일종인지 뭔지 윤은 알 수 없었지만.

옷장 안에 두었던 여분의 베개를 가져온 윤이 살그머니 청건의 머리맡에 가 무릎을 굽혔다. 그의 윤기 나는 머리를 받치고 베개를 끼워 넣었다. 작게 몸을 뒤척이는 청건에 윤이 양손을 공중에 든 채 빳빳이 굳어 버렸다. 그러나 청건은 금세 조용해졌다.

……내가 보살이지.

윤은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공중에 들어 이청건 배를 밟으려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불 속으로 팩 숨은 윤은 그제야 속 편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 꼭끼오! 꼭꼬! 꼭꼬! 꼭……!

알람을 끈 윤은 퀭한 눈을 깜박였다. 오전 8시였다. 주말인데 알람 시간을 바꿔 놓지 않아 참사가 일어났다. 그는 비몽사몽 중에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가만히 비비고 있다 바닥을 보니 이청건이 없었다. 그가 벴던 베개는 침대 위로 올라와 있었다.

곧 화장실로 향하던 윤은 그제야 활짝 열린 현관문을 발견했다. 멀리 초록 옥탑 끝에 선 청건이 난간 위에 기대어 있는 게 보였다. 이전의 윤처럼 두 팔을 쭉 뻗고 늘어진 모습이 꼭 보송하게 말리는 중인 빨랫감 같았다. 알람도 없이 일어난 걸 보니 자기는 잠을 잘 잔 모양이었다.

윤은 뻗친 머리를 매만지다 뒤를 돌았다. 어차피 잠에서 깬 이상 다시 잠에 들기는 글렀다.

욕실 거울엔 약간 부은 채 뚱하게 서 있는 우윤이 있었다. 얼굴을 살피던 윤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비볐다. 평소라면 연한 갈색빛을 띠는 입술이 붉게 변해 있었다. 밤새 못다 푼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면서 잔 건가 싶었으나 그런 기억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잠은 잘 자곤 했는데.

윤은 곧 의아한 얼굴을 거두곤 세수를 했다. 꿈속에 둥둥 뜬 기분으로 어제 일을 회상했다.

‘보고 싶어. 윤아.’

‘칭찬받고 싶어. 나 좀 예뻐해 줘.’

일련의 과정이 순서 없이 섞였다. 이청건은 감당 안 되는 말만 잘도 골라 했다. 윤은 폼 클렌징을 죽 짜곤 통을 내려놓았다. 우성임에도 저만큼 자존심 세우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온갖 핑계를 대며 몸부터 들이대던 알파들과는 접근 방식도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타인에게 닳도록 썼을 멘트가 아닐지 의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윤은 도대체가 이청건과 제 사이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알파라고 거짓말을 치고 다니는 베타는 비빌 구석도 없는 사람이었다. 타고난 형질부터 현재의 사정까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인 삶이었다. 고저, 명암, 견원. 반대되는 건 다 갖다 대도 모자랄 만큼 상극이었다.

‘……옆에만 있어 줘…….’

얼굴에 거품을 마구 내던 윤이 행동을 뚝 멈추었다. 몇 시간 전에 들은 묵직한 신음이 귓전에 윙윙 이어졌다. 물이 솨아아 떨어지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굳어 있던 윤은 문득 거울과 눈을 마주치곤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다시 얼굴 위로 물을 끼얹자 거품이 들어간 눈이 따가웠다.

밖으로 나간 윤은 수건이 없어 물을 뚝뚝 흘렸다. 어제 청건이 쓴 수건이 마지막이었다.

얼굴을 닦길 포기한 그가 옷장을 뒤적여 폴라 티를 꺼내다가 멈추었다. 다시 티를 내려 두는 몸짓엔 체념이 담겨 있었다. 그냥 반팔인 채 있어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만하면 볼꼴 못 볼꼴 다 보았고, 저를 덮치려면 진즉에 덮쳤을 거란 속 편한 확신이 들었다.

활짝 열린 현관문 밖에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똑바로 서서 하늘을 보는 청건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차례 부는 바람에 욕실 문이 조금 큰 소리로 닫혔다. 그 소리에 청건은 뒤를 돌았다. 약간 놀란 채 있는 윤을 확인한 그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마주친 눈을 곧바로 거두기 힘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굉장한 미남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이목구비와 그림 같은 몸 선은 초록색 옥탑을 화보 배경지로 만들었다. 양감이 두드러진 몸에 걸쳐진 제 옷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것 같았다. 어떤 장신구 없이도, 꽤…….

윤은 눈을 비볐다. 몇 시간 못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청건이 금세 현관 가까이 다가왔다. “잘 잤어요?” 현관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는 커다란 손을 보니 또 다른 것들이 생각났다. 자신의 날개 뼈를 꽉 붙잡아 당기던 힘. 화장실 문을 잠가 버리던 제 빌어먹을 손. 도망갈 퇴로를 스스로 없애 버리다니. 윤은 자기 발보다 작은 슬리퍼를 벗는 청건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원망이 누굴 향해야 옳은지 알 수 없었다.

“주말엔 뭐 해요?

“……빨래요.”

“빨래?”

윤이 대충 대답해 버리자 청건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윤이 빨래 통을 끌자 청건이 대신 들었다.

“얹혀사는 김에 이 정도는 내가 할게요.”

“빨래할 수 있어요?”

“당연하죠.”

청건은 곧 작은 빌트인 세탁기 앞에서 큰 몸을 접어 가며 빨래를 넣었다. 윤은 식탁 위에 천천히 걸터앉아 그 모습을 보았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자랐을 법한 이청건은 줄곧 자취를 해 왔을 테다. 제가 가진 편견이 꽤 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윤은 제 속옷이 그의 손에 쥐어질 때 잠시 움찔했다. 청건은 그를 기민하게 알아채곤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속옷을 분류하는 모습을 보자면 조금 억울했다. 괜히 자신만 어제 일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아 결국 감시를 끊고 뒤를 돌았다.

그 후로 청건은 한참 핸드폰을 들여다볼 뿐 별말이 없었다. 뭘 하는 거지. 이제는 가만히 있는데도 신경이 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청건이 조용히 계획하던 사건은 정오가 넘어가자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각종 식재료와 주방 용품, 이청건이 며칠간 머물기 위해 주문한 운동복, 속옷, 파자마 등 온갖 생필품들이 그 신호탄이었다.

‘주말에도 슝슝 배송’인지 뭔지를 이용했다는 짧은 변명 끝에 커다란 박스들이 줄줄이 옥탑으로 도착했다. 짧은 양해를 구한 그는 장식장 위 수집품들을 한데 모아 밖으로 빼냈다. 윤은 얼결에 그의 계획에 동참하면서 집 안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걸 멍하니 지켜봐야 했다.

옥색 선풍기는 벽걸이형 에어컨으로. 체리색 침대, 꽃무늬 비키니 옷장, 누레진 냉장고는 모조리 고급스러운 하얀색 가구로 뒤바뀌었다. 그뿐인가. 욕실의 무너져 가는 타일과 촌스러운 벽지, 바닥재까지. 완전한 대공사가 이루어졌다. 여기저기서 온 업자들 덕에 집 안은 이사 날보다도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반항해 봐야 소용없는 짓임을 알게 된 윤은 몇 번의 타박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윤은 청건이 제게 쥐여 준 새 노트북을 들고 평상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청건은 자신이 집주인인 양 윤이 씌워 준 마스크 하나만 덜렁 믿고 사람들 사이를 직접 헤집고 다녔다. 돈 벌어서 쓸 데가 어지간히도 없나 보다. 윤은 어이없이 웃으며 노트북 터치 패드를 문질렀다. 돈이 좋긴 좋았다. 미친 속도의 노트북에선 온갖 사진 프로그램이 다 돌아갔다.

상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두 발을 꼼지락대며 한참 몰입해 있으면 모든 사람이 빠져나가고 마지막 택배가 도착했다. 물체를 뜯고 조립하던 청건이 한참 집 안에 있더니, 어느 순간 윤의 앞으로 와선 쭈쭈바를 내밀었다. 윤은 평상에 함께 앉는 청건을 대충 쳐다보며 꼭지를 땄다.

“다 끝났어요?”

“네. 아, 속 시원하다.”

청건은 평상에 드러누우며 소다 맛 쭈쭈바를 깨물었다. 누가 보면 고대하던 자기 집 리모델링 날인 줄 알겠다. 윤이 허벅지에 두었던 노트북을 제 뒤로 내려 두었다.

“이제 인정해요. 오지랖이 태평양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데…….”

청건은 말꼬리를 늘렸다. 윤은 두 다리를 끌어안으며 거의 해가 져 가는 하늘을 보았다. 자신에게만 유일하게 오지랖을 부리는 거라면 조금 덜 거슬릴 것 같았다.

“미안한데 공짜는 아니에요.”

“누가 안 갚는대요. 보고 싶은 사람 빚쟁이 만드니까 좋아요?”

“네, 좋아요.”

청건이 능청스레 대꾸했다. 윤은 어이없이 고개 저었다. 몸을 일으킨 청건이 평상을 손으로 짚으며 몸을 편하게 지탱했다.

“나한테 줘야 될 게 있어요. 돈 대신.”

윤은 진지해진 청건의 말투에 어쩐지 조금 긴장이 되었다. 결국 하늘을 보던 그대로 물었다.

“……뭔데요.”

“반말이요.”

“네?”

윤이 의아한 얼굴을 돌렸다.

“이제야 봐 주네.”

청건이 씩 웃음 지었다. 노을에 반사된 얼굴이 멀끔하게 빛났다. 음, 오늘 돈이 꽤 들었어요. 현금으로 갚으려면 할부가 3백 개월로 늘겠는데. 청건이 눈을 얇게 뜨며 재촉했다. 윤은 난감한 기색으로 그를 훑었다. 생각해 보면 반말은 몇 년간 할 일이 없었다. 야, 라고 하면 되는 건가. 하지만 그건 영 이상했다. 윤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데요.”

“하고 싶은 대로.”

……어려운데.

윤은 쭈쭈바를 빠는 청건을 가만히 보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쭈쭈바 맛있다.”

대충 말을 던지고 저도 파란색 아이스크림을 쪽 빨았다. 청건이 들바람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굽혔다.

“그게 뭐예요?”

“반말이요.”

“아, 윤 씨는 반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구나. 색다르네.”

“저도 색다르네요.”

청건은 아예 관람 모드로 전환하려는지 윤 쪽으로 몸을 틀었다.

“또 해 봐요. 다른 것도.”

“아 뭘 또 해요.”

“잉, 한 번 더.”

뭐? 윤은 기겁하며 미간을 좁혔다. 눈썹을 팔자로 내린 이청건이 한 번 더 몸을 치댔다.

“……하지 마.”

“또.”

당황한 윤이 눈을 깜박이며 입술을 축였다.

“뭘 더 어쩌라고…….”

“청건아, 하고.”

“…….”

“아니면 형, 하고.”

청건의 예시에 윤은 한층 편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그러나 쉽사리 입술이 떼어지진 않았다.

“청…….”

청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한글을 떼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눈이 빛났다.

“……청건아.”

“…….”

도리어 형, 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청건아, 는 일회성인 것을 알았기에 부담 없이 내뱉은 윤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쭈쭈바를 양손으로 주물렀다. 몸이 후끈 더워졌다. 곧바로 놀려 먹을 것 같던 이청건은 말이 없었다. 윤은 청건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 옷을 한 번 펄럭이더니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반응이 영 별론데요.”

퉁명스러운 말에도 청건은 말없이 발갛게 지는 노을을 응시할 뿐이었다. 윤은 입술을 조금 내밀며 현관문이 활짝 열린 집 안을 보았다. 다 죽어 가던 조명을 간 덕에, 또 하얀 가구들 덕에 안이 환했다.

“물어볼 게 있어요.”

청건이 뒤늦게 말을 꺼냈다. 윤이 그를 돌아보았다. 청건은 다 먹은 아이스크림을 내리며 윤을 마주 봤다.

“만약, 우리한테 1백 화까지 있어요.”

“…….”

“그럼 우리는 지금 몇 화쯤에 있어요?”

처음 들어 보는 질문이었다. 배우의 예시는 이렇게 낯선가. 윤은 생각 끝에 입술을 뗐다.

“전 그쪽이랑 같이 드라마 찍을 생각 없는데요.”

“조연으로도 나오기 싫어요?”

“네.”

망설임 없는 대답 후에 윤은 고민에 들어갔다. 1백 화 찍고 해산인가? 다 찍으면, ‘수고하셨습니다.’ 인사하고, 종방연 하고. 술 먹고. 그렇게 끝?

둘은 선선한 바람 속에서 각자의 고요 속에 빠졌다.

곱씹을수록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1백 화를 신뢰도로 치환한다면. 아마 못해도 40은 될 것 같았다. 그 정도 후한 점수는 동료애가 생긴 회사 사람이 아닌 이상 받기 어려운 점수였다. 그러나 윤은 또 다른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날 왜 좋아해요?”

잠시 조용한 기류가 흘렀다. 종일 품고 있던 의문을 물었으나 윤은 곧바로 후회스러워졌다. 괜한 질문이었다. 함께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쩌면 희망 고문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청건이 정말로,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거라면.

“……집중해 봐요.”

청건이 허공의 한 점을 가만히 보며 말했다. 윤은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괜히 긴장이 됐다. 그가 보는 점이 어디인지 살폈다.

“내 페로몬 향, 무슨 향으로 느껴져요?”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침을 몰래 삼킨 윤이 최대한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숲 향이요.”

“숲 향이 나요?”

“네.”

“……아무 향도 안 냈는데.”

윤은 당황한 채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망했다. 눈치 더럽게 빠른 이청건의 역공이었다. 이전에 맡았던 향이라 어렵지 않게 대답했지만, 이런 꼼수를 쓸 줄은 몰랐다. 보기 좋게 당한 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내렸다.

“참…… 대단하시네요. 칭찬해 드려요?”

“칭찬해 줄래요?”

청건은 심란한 사람 앞에서 눈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윤은 한층 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냥, 아까 정리하다 봤거든요. 파란 약.”

“…….”

“마음대로 알아내서 미안해요.”

청건은 늘 마음이 상하기 전에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사과해 왔다. 윤은 기분이 괜찮아짐과 동시에 오묘해졌다.

“난 베타가 좋아요.”

청건이 말했다.

“그냥, 알고 있으라고요.”

무슨…… ‘그냥’ 알고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닌데.

“오메가는 싫고요?”

“네.”

“……가만 보면 별종 같아요. 배우면서 주변 눈치 안 보는 것도 그렇고.”

“그런가요.”

“너무요.”

윤은 남은 쭈쭈바를 먹었다. 빈 통을 툭툭 튕기고 있으면 청건이 자연스레 수거해 갔다.

“있는 그대로 사는 게 꿈이라.”

윤이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매번 다른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던 베타가 듣기엔 제법 찔리는 말이었다.

몸을 일으킨 청건이 역광으로 서서 물었다.

“영화 보러 갈래요?”

윤은 차게 물기가 남은 손을 꼭 쥐고 있다가 일어섰다. 반말 다음의 미션이었다. 리모델링값 상환의 일종일 테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청건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도 마찬가지로 차가웠다.

계단 아래엔 종영이라는 매니저가 가져다준 청건의 진녹색 차가 있었다. 여전히 잡혀 있던 손목은 청건이 조수석 문을 열면서 자연스레 놓였다. 윤은 잠시 머뭇대다 차에 올랐다. 제가 탈 쪽의 문을 누군가 열어 준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곧 운전석에 오른 청건이 실내 온도를 적절히 조절하며 벨트를 맸다. 행여 그가 벨트까지 매어 줄까 윤도 얼른 벨트를 착용했다.

“로맨스 좋아해요? 아니면 액션?”

“둘 다 잘 안 봐요.”

“로맨스 좋네요.”

청건은 바로 대답하며 운전을 시작했다. 윤의 어이없는 시선에 바람이 새듯 웃으며.

천천히 운전해 가던 차는 머지않아 자동차 극장에 도착했다. 있는 그대로 산다는 청건의 말에 마음 한 구석이 울려 차까지 따라 탔지만, 내심 사람 북적이는 영화관으로 갈까 봐 긴장했던 윤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7시 입장 이후 가장 먼저 온 둘의 차가 극장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서울 외곽인 수현구 근처에 위치한 곳이라 차가 아주 드물게 주변을 채워 갔다. 아무래도 배짱이 부족한 우윤은 제가 나가겠다는 청건을 말리고는 직접 스낵바에서 팝콘과 음료를 사 왔다.

시작된 영화는 최근 개봉된 영화 중 가장 유명한 로맨스 영화였다. 푸르스름한 화면 빛이 둘의 얼굴을 은은히 비추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성은 끊김 없이 이어졌고, 차 앞 유리는 없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깨끗했으나 윤은 이상하게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감도는 조용한 기운을 깨려 중간중간 팝콘을 큰 소리로 씹었다. 그러나 영화 중간에 시작된 베드 신에 잘 움직이던 턱이 굳어 버렸다.

차라리 영화관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중 청건의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잠깐 고민하던 청건이 난감하게 윤을 보았다.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네, 받으세요.”

윤이 대수롭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가 전화를 받자 베드 신 때문에 바싹 긴장했던 몸이 녹아내렸다. 남은 팝콘을 먹으며 괜히 차내를 살피던 윤이 그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네, 거기 있을 겁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흘러나오는 청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딱딱했다. 제게는 자주 짓던 웃음이 없으니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업무 얘기를 할 때는 칼 같은 타입인 걸까. 아니면 하고 있던 일을 방해받는 게 싫은 것일지도.

그는 용건만을 간단히 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윤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팝콘 더 사 올까요?”

“괜찮아요.”

이청건은 곧바로 원래의 따뜻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윤은 정면을 응시한 채였다. 어떤 모습이 진짜일까. 제게 하는 게 평소 모습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122분의 러닝 타임은 생각 외로 금세 지나 버렸다. 극장이 잠시 어두워지자 차가 하나둘 빠져나갔다.

“영화 괜찮았어요?”

“네. 뭐.”

윤은 짧게 대꾸하며 빈 음료 통을 매만졌다. 청건은 바로 시동을 걸지 않고 그런 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곤해요? 아니면, 기분이 별로예요?”

별로라기보다는 싱숭생숭한 것에 가까웠다. 그가 제게 하던 크고 작은 배려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윤은 여전히 헷갈리고 있었다. 40화 정도 온 사람한테는 원래 이렇게 다정한 사람인가. 다른 사람한테도 이만큼은 하는지 궁금했다.

“아까 통화하던 사람이랑은, 1백 화 중에 몇 화쯤 갔는데요?”

망설이던 윤이 물었다.

“그 사람이랑 1백 화를 왜 찍어요?”

청건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나랑은 왜 찍는데요?”

“좋아하니까요.”

당연하게 나온 대답이었다. 스크린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의해 청건의 얼굴이 희게 물들었다. 윤은 옆머리를 긁적였다. 괜히 물었네. 더워지는 차 내부에 창문을 끝까지 연 윤이 조금 급하게 벨트를 맸다.

“집으로 가죠.”

가만히 있다가 입꼬리를 늘린 청건은 별말 없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극장을 빠져나온 그는 파란불이 켜진 도로를 가로지르며 말했다.

“모른 척해 줄게요.”

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싶지 않았다. 더 깊게 생각하면 어쩐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기에.

* * *

일요일. 윤은 원래의 계획대로 정오에 눈을 떴다.

알람을 끈 윤이 눈을 천천히 깜박이다 주변을 보았다. 일이 있다더니 오전에 나갔는지 청건이 집에 없었다. 대신 식탁 위엔 무언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집에서 나는 포근포근한 냄새를 맡으며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며 식탁으로 가 덮개를 열어 보니 노란 스프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엔 흰 종이가 놓여 있었다.

「단호박 우유 스프예요. 먹고 쉬고 있어요.」

윤은 그릇을 들어 향을 맡았다. 식어 있었지만 여전히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 입맛이 돌았다. 얼른 샤워를 마치고 온 윤이 스프 한 수저를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요리까지 잘하면 반칙 아닌가. 차이가 나도 한참 먼 곳에 서 계신 우성 알파에 기분이 미묘했다. 반대로 숟가락을 든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평소라면 먹지 않는 식사를 두둑이 마친 윤은 가방을 고쳐 들며 옥탑으로 나왔다. 애매모호한 기분과는 다르게 날씨만은 끝내줬다. 화창한 하늘 아래 그의 흰 목이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8월 말. 그가 입은 검은 긴 팔 티는 스물 이후 7년 만에 제 날씨를 찾아갔다.

윤은 20만 원짜리 분신과 같던 카메라를 오랜만에 목에 매고 계단을 내려갔다. 쉬고 있으라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는 게 흡사 청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누굴 만나는지 모를 이청건은 잘만 밖을 돌아다니는데, 자신이라고 그러지 못하리란 법 없었다.

윤은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며 근처 정류장에 앉았다. 확실히 목이 허전하긴 했다. 윤은 이내 오랜만에 잡는 사진기의 전원을 켜 보았다. 가끔 충전을 해 놓은 덕에 배터리가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사실 알파일지 모를 사람을 프레임에 담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여전히 그럴 것이 뻔했지만, 사물과 자연이라면 무리 없이 촬영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문제는 목적지를 정해 두지 않은 것이었다.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는 동안 운동화 속 마른 발가락이 꼼질거렸다. 들뜬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문득 손이 멈춘 곳은 「이청건 촬영 장소」라는 제목의 포스팅이었다. 사람이 끝도 없이 줄을 서 있는 사진이 이어졌다. 옥색과 붉은색이 섞인 오래된 간판. 연식 있는 레코드판과 낡은 책. 낡은 거리. 심장이 뛰었다. 명소인 곳은 한 번도 갈 생각을 안 해 왔던 탓이었다.

도착 장소와 이용할 버스 번호를 확인한 그는 한참 후 버스가 서자마자 망설임 없이 차에 올랐다. 앉기도 전에 출발하는 버스에서 중심을 잡으며 걷던 윤은 2인용 좌석에 앉았다. 조금 열린 창에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마음을 흔들었다.

윤은 서촌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카메라를 쥐었다. 근 1년 반 만에 처음 하는 야외 촬영. 사람들을 피해 찍은 첫 피사체는 가장 따사로운 시각의 구름이었다.

목을 덮는 옷을 입지 않아서인지 몸이 가벼웠다. 오늘따라 원하지도 않는 관심을 주는 알파도 없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사진을 찍던 윤은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결과물들을 확인하던 중 걸음을 멈추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포스팅에서 본 음식점이 보였다. 점심시간이 지나 사진과 같이 긴 줄은 아니었으나 다섯 팀 정도가 일렬로 서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어느새 허전한 배에 윤은 결국 걸음을 옮겼다. 단호박 스프는 이미 소화가 된 후였다.

윤은 줄의 맨 뒤로 가서 섰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들뜬 얼굴이었다. 그들의 입에선 심심치 않게 ‘이청건’ 석 자가 흘러나왔다. 불과 몇 시간 전 화장실에서 일어났었던 러트 참사를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다음 팀 모실게요! 한 분이세요?”

30분여를 서 있었을까, 드디어 윤의 차례가 왔다. 윤이 매장으로 들어서자 몇몇 시선이 붙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금세 거두어졌다. 윤은 의아함을 느끼며 빈자리에 앉았다. 미리 찾아본 메뉴 하나를 시키고 가방을 벗자 카운터 위에 붙은 청건의 사인이 보였다. 사인 밑으로 덧붙여진 ‘행복하세요!’란 멘트가 어쩐지 이청건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흘려 쓴 글씨마저 정갈하고 어른스러웠다.

떡갈비가 테이블 위로 나옴과 동시에 그의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낸 윤은 액정에 뜬 ‘이청건’을 보며 괜스레 주변 눈치를 보았다. 전화를 받은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 일어났어요?

“네.”

전화 너머 들리는 청건의 목소리가 어딘가 색달랐다. 윤은 이어폰 줄을 찾아 끼우고 볼륨을 높였다.

- 밖이에요?

“네. 잠깐 나왔어요.”

이청건 얘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죄를 짓는 것 같기도 하고.

- 같이 밖에서 밥이나 먹을까요?

“아니요?”

윤이 조금 큰 소리로 대꾸하자 주변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청건이 낮게 웃는 것을 보니 장난이었던 게 분명했다. 윤은 떡갈비를 죽 찢어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 이미 먹고 있나 보네.

“들려요?”

- 네. 메뉴가 뭐예요?

바로 대답하기가 낯부끄러웠다. ‘드라마에서 이청건이 먹었던 음식’을 일부러 먹으러 온 것이라고 오해할 듯해서.

“그냥 밥이죠, 뭐. 지나가다 아무 데나 들어왔어요.”

“아이 씨, 여기 맞다니까 이청건 앉은데! 넌 내 말이 다 구라 같냐?”

윤은 막 들어온 테이블에서 쩌렁쩌렁 내뱉는 목소리에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그 말을 선명히 들은 것은 그뿐만이 아닌지 전화 너머도 조용했다.

“……모른 척하세요. 우연히 촬영 장소랑 겹쳤을 뿐이에요.”

- 알았어요.

청건은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은 쪽팔린 마음에 숟가락으로 밥을 마구 휘적거리다 크게 떠 먹었다.

- 오늘 외출은 어때요?

“……어떤 점에서요?”

- 성가신 게 줄었을 것 같은데.

윤은 그의 말에 음식을 씹던 것을 뚝 멈추었다. 오늘 종일 느꼈던 감상이 청건의 입에서 나온 것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 그날 러트 때문에, 영향이 있을 거 같았어요.

……세상에.

윤은 팔뚝을 타고 자르르 끼쳐 오는 소름에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 두었다.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알파로 인해 고생했다. 수없이 답을 찾으려 노력했는데, 바로 눈앞에 정답이 있었던 것이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열성 알파들의 인지 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베타인 윤은 눈치챌 수 없었지만 그때 묻어난 페로몬이 주변에 있는 다른 알파들에게 위협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오늘 그가 느꼈던 자유로움은 다 그곳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해방으로 가는 정답은, 윤이 그토록 피하던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윤은 얼마 먹지도 못한 음식을 더는 집어 먹지 못했다.

* * *

주변으로 무심히 갈라져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 우윤. 그토록 꿈꿔 왔던 장면이었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러나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청건이 옆에 있으면, 우윤은 보호받을 수 있다. 이 문장은 사실 엄청난 모순이었다. 알파 그림자만 봐도 혐오감을 느끼던 우윤에게 필요한 알파라니.

편의점 파라솔 밑에 앉은 윤은 얼굴에서 표정이 싹 빠져나간 채 딸기 우유를 빨대로 빨았다.

그는 세상을 향해 반항을 하듯 검은 반발 티 차림으로 지나가는 건장한 남성들을 가자미눈으로 훑었다. 윤의 살벌한 시선에 도리어 지나가는 이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 역할을 맡은 우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다리를 꼬았다. 이게 자유인가. 처음으로 우성 알파의 삶을 꽁무니나마 따라간 것 같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쭈릅 쭙. 바닥이 빈 우유갑을 흔들던 그는 편의점 앞 세 개의 쓰레기통에 빈 갑과 빨대를 따로 골인시켰다.

저녁 8시가 다 된 시각. 아까의 충격적인 통화 이후 줄곧 이청건의 쓸모와 앞으로의 관계 방향성에 대해 머리털이 빠질 정도로 고민해 보았는데 아직 답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찌 됐든 이 지긋지긋한 삶도 어렴풋 끝이 보였다. 적어도 며칠에 한 번씩은 이청건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는 일이었지만.

윤은 복잡한 머리에 끙 앓으며 보라색 플라스틱 의자 위로 늘어졌다. 젖혀진 그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거꾸로 흐트러진 갈색 머리가 초가을 바람에 살랑였다.

얼마나 오래 한량 흉내를 냈을까,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뭐야, 이거 이청건 차 아니야아?”

윤의 늘어진 몸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청건이 왔다고? 윤은 몸을 기울여 코너 밖을 보았다. 어느새 편의점 주변에 청건의 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조수석 유리창에 얼굴을 들이미는 새미도 있었다. 그녀는 술에 잔뜩 취한 모양새였다.

“이새미?”

막 편의점에서 나온 청건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윤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보라색 의자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작은 소란에 둘의 시선이 붙었다.

“어머? 윗집 동생도 있었네! 나 빼고 어디서 데이트하고 온 거야아.”

새미는 청건에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그를 끌고 윤에게까지 들러붙어 왔다. 의자를 세우던 윤은 휘청이며 그녀에게 딸려 갔다. 은발로 염색한 긴 히피 펌이 둘의 눈앞에서 펄럭였다.

“정신없어요.”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윤은 그녀의 덥수룩한 머리를 치워 내었다.

“야, 안 되겠다. 오늘 2차 해야 돼. 기다려! 술 사 올게!”

“뭐? 나 술 안 마셔.”

노란 추리닝 차림의 이새미는 청건의 거절을 무시하고 편의점으로 홀랑 뛰어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둘은 그제야 눈을 마주쳤다.

“조금만 마실게요.”

청건은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먼저 말했다.

“러트 아니잖아요. 마음대로 드세요.”

청건이 윤의 허락에 입을 꾹 물었다. 즐기는 편도 아니라서요. 청건은 중얼거리다 종이봉투 하나와 비닐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오는 길에 이것저것 사 봤어요.”

“뭔데요?”

윤은 쭈뼛대며 내용물을 들여다보았다. 분식점 음식과 고급 베이커리에서 사 온 듯한 딸기 마카롱, 딸기 타르트, 딸기 롤 케이크 등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딸기에 미친 사람은 아닌데.”

“그나마 먹는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지. 윤은 청건을 흘끗 살폈다. 살뜰하게 자신을 챙기는 모습이, 꽤 봐 줄 만했다.

어느새 생각이 삼천포로 빠진 윤이 고개를 살짝 털고는 이번에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눈짓했다.

“뭐예요 그건?”

“대본요.”

그가 윤에게 보여 준 흰 종이 위엔 <러브 리프 1화>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차기작의 대본집인 듯했다. 윤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급하게 끊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청건이 물어 왔다. 윤은 뒷머리를 잠시 긁적이다 대충 둘러대었다.

“아뇨. 그냥…… 좀 낯선 기분이라.”

이청건 당신과 연애해야 할 장면이 불쑥 떠올라 불에 덴 듯 전화를 끊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건은 더 묻지 않으려는지 입술을 말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윤은 보도블록을 지그시 밟으며 딴청 피웠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는 기로. 그 기점인 것은 확실했다.

그때 한 커플이 큰 소리를 내며 코너를 돌아왔다. 고개를 번쩍 든 윤이 청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옆으로 가까이 마주 선 둘은 커플이 지나갈 때까지 침묵했다. 곧 그들이 사라지자 윤은 냉장고를 짚고 있던 청건과 눈이 마주쳤다. 가까이서 스친 청건에게선 고급스럽고 은은한 우드 향이 났다.

깜빡 정신을 차린 윤이 옆으로 몸을 비켜섰다.

“단호박, 스프, 맛있었어요.”

묻지도 않은 말을 하곤 입술을 깨물었다. 지나치게 그를 의식하는 발언이었다. 윤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상황이 꼬이고 있다는 걸 느끼며 속으로 탄식했다.

“다행이네요.”

청건이 냉장고에 가볍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 또한 모르는 척을 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윤은 아랫집 여자가 들어간 편의점 유리문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연스럽게 좀 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큰소리로 일갈하고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까 전 식당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화장실 대참사 때도 생각지 못했던 그때의 상상이 분명 그의 고장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아까 윤은 키스하는 상상만으로 사귈 상대를 판가름할 수 있다는 말을 떠올렸었다. 그게 떡갈비를 통째로 버려야 했던 이유였다. 그니까, 이청건이랑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는 거다. 미친놈처럼.

혼자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렀을 때 새미가 유리문을 활짝 젖히며 등장했다. 가자 가자. 그녀는 둘에게 팔짱을 끼며 계단 쪽으로 이끌었다. 한참 새미의 수다를 들으며 가만히 걷던 청건이 어느 순간 윤의 팔에 감긴 그녀의 팔을 슬그머니 떼어 냈다.

“어머머? 이거 봐라, 어?”

새미가 과민 반응을 하며 날뛰었다. 윤은 또 그 입에서 무슨 농담이 나올지 몰라 팔이 풀린 김에 먼저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조용히 티격태격하는 둘 때문에 뒤통수가 계속 간지러웠다. 욕을 하는 건지, 작전을 짜는 건지. 예상보다 훨씬, 친한 건지. 어느 방면이든 마음에 들진 않았다.

먼저 옥탑 앞에 도착한 윤은 아직 계단을 오르는 둘을 돌아봤다. 청건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웃는 새미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청건은 이전에 몇 번 보여 줬던 보조개라든가 눈웃음을 새미 앞에선 보여 주지 않았다. 이쪽에선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곤조곤 얘기만 이었을 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윤을 발견한 새미가 계단을 와다닥 뛰어 올라왔다.

“어유, 기다려쪄요. 우리 애기?”

새미가 열쇠를 꺼내 1층 문을 얼른 열었다. 청건이 못마땅한 투로 말을 꺼냈다.

“너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되냐.”

“들어와!”

그녀는 청건의 타박을 뒤로하고 집 안으로 사라졌다. 청건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여전히 생각에 잠긴 윤의 등을 살짝 밀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상체를 움찔 떤 윤이 황급히 내부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컵 씻은 게 없네. 그냥 한 병씩 붙잡고 마시자.”

“언젠 귀빈 대접해 주겠다며. 하여튼.”

청건과 윤은 갈색 접이식 식탁에 마주 앉았다. 새미가 술 반절은 식탁에 두고 반은 냉장고에 넣는 동안 윤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갈색에 가까운 장판. 조명을 받아 오색으로 빛나는 자개장롱. 연식을 알 수 없는 뻐꾸기시계. 이전 집주인의 물건을 그대로 쓰는 듯했다. 확실히 집 꾸미기엔 관심이 없는 듯하여 미미한 동질감이 들었다.

새미는 각종 크래커를 접시 하나에 몽땅 까서 오더니 윤의 허벅지를 발끝으로 툭 쳤다.

“애인끼리 붙어 앉아야지! 빨리 저리 가. 훠이.”

자꾸 뭔 소리야……. 윤이 청건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만 있자 새미가 답답한 듯 그의 팔을 마구 끌어당겼다. 계속되는 재촉에 결국 윤은 청건의 옆자리로 갔다. 청건이 살짝 왼편으로 몸을 옮겨 주었다.

와인을 오프너로 따 낸 새미가 윤을 보며 물었다.

“윤이는 주량이 어떻게 되시나?”

“크게 취해 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어요.”

“나보다 말술 아니야?”

“설마요.”

그녀는 뚜껑을 따 낸 와인을 자신과 윤의 자리에 각각 한 병씩을 놓았다.

“주량은 오늘 알아보면 되겠다.”

“이걸 병째로 마시라고요?”

“웅.”

눈을 찡긋대며 웃던 새미는 윤이 뚱하니 있자 가져온 양푼에 소주와 토닉의 비율을 3:7로 섞었다. 그 그릇은 청건의 몫이 됐다.

“전투하자는 거 아니지?”

“어린이용으로 타 드렸잖아. 그냥 간단히 즐기자고.”

윤은 청건이 사 준 떡볶이와 튀김도 허락을 맡은 후 식탁 위로 늘어놓았다. 새미가 플라스틱 통에 깎아 넣어 뒀던 수박까지 올리자 전혀 조화롭지 않은 한 상이 차려졌다. 마치 셋이 음식으로 변해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잔 들어. 우리의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짐짓 비장한 새미의 말투에 둘은 마주 보며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곧 와인 두 병과 양푼 하나가 쨍 하고 맞부딪쳤다. 새미는 건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와인을 들이켰다. 둘은 그 모습을 보며 각자의 술을 두어 모금씩 들이켰다.

“내일 스케줄 있다며.”

청건의 말에 새미는 병을 내리며 입가를 쓱 닦았다. 순식간에 와인 반절이 날아가 있었다.

“말리지 마. 난 오늘 다짐했어. 내가 이 바닥에서 이청건 발끝까지는 올라갈 거라고.”

“또 최 감독이 괴롭혔구나.”

“그뿐이야? 애인이랑 아주 더럽게 헤어졌어. 인생 뭐 같다. 그지?”

“그 애는…… 차라리 잘됐어.”

청건은 짧게 혀를 차곤 말했다. 윤은 자신은 모르는 둘의 대화를 엿들으며 와인을 또 꼴깍꼴깍 마셨다.

“하여튼 다 뒤졌어. 내가 성공해서 보여 줄 거야. 나님은 너희가 무시할 사람이 아니었다고.”

“각오는 좋아. 그런데 오기만으론 부족할 수도 있어. 내가 그랬거든.”

청건이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크래커를 씹었다. 윤은 제 쪽으로 조금 접시를 당겨 주는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마디마디가 예쁘게 불거진 섬섬옥수. 손등 위에 아주 옅게 남은 작은 흉터들. 파랗게 팔뚝까지 솟아 나온 핏줄. 그 팔은 곧 청건의 턱 아래를 받쳤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새미가 묻자 윤이 훔쳐보던 옆얼굴이 천천히 돌았다. 정통으로 마주쳐 버린 시선에 윤의 눈꺼풀이 한 차례 떨렸다. 청건은 그런 윤을 잠시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예뻐하는 마음.”

“…….”

“……뭐, 너야 잘하겠지만.”

청건의 눈길은 깃털처럼 윤의 입술을 간지럽히고 사라졌다. 윤은 입술이 찌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와인병을 꼭 쥐었다.

이어 청건은 작은 포크로 수박을 찍어 윤에게 내밀었다. 윤은 의도치 않았을 청건의 행동에 정신을 못 차리고, ‘안 받고 뭐 하느냐’는 듯한 새미의 눈길을 보고서야 포크를 받아 들었다. 둘을 지켜보던 새미는 치즈 과자를 한 움큼 입에 넣고 씹으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꽃다발이라도 받은 듯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윤은 수박을 우적대며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또 곱씹었다. 그리고 판단하고 점수를 매겼다. 윤의 감각은 지금 빨간 머리와 했던 소개팅 때보다 몇십 배는 예민했다. 옆에 앉은 게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예정인 우성 알파라 그렇다. 평범한 삶을 위해서는 피해야 마땅할 유명인. 그러나 다른 방면으로 평범해지려면 놓지 않고 꼭 붙어 있어야 할. 그의 머릿속은 쏟아진 퍼즐처럼 어지러운 한편 미지의 기대감으로 점점 부풀었다.

너는, 내가, 야, 맞아. 괜찮아. 네가 아까워. 올 거야, 더 좋은 사람. 그만 마셔. 사고 치기 싫으면. 이새미. 또 그런다.

청건과 새미가 뱉은 단어가 앞뒤 없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청건은 그녀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한테는 취할 때만 하는 반말을.

윤은 타들어 가는 갈증에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빈 병을 테이블 위로 쿵 내려놓자 둘의 시선이 윤에게 붙었다. 청건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아니, 이걸 언제……. 이걸 다 마시면 어떡해요.”

걱정스러운 목소리. 1점 추가. 총점 41점.

“소주도 하나 주세요.”

새미는 윤의 제법 결연한 말투에 씩 웃고는 누런 냉장고로 갔다. 그녀가 자신과 윤의 자리에 소주 한 병씩을 놓자마자 윤은 소주 뚜껑을 땄다. 그 순간 청건의 큰 손이 소주병을 잡았다. 색이 짙은 손끝이 하얀 손등에 스쳤다.

“괜찮겠어요?”

윤은 햇살이 끼치는 듯 선명한 검은 동공과 짙은 살구빛 입술을 차례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청건이 어쩔 수 없이 팔을 물리자 윤은 공중에 병을 들고 말했다.

“건배.”

새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청건의 다리를 발로 밀었다. 청건이 얼결에 반이 넘게 남은 양푼을 쥐었다. 쨍. 드디어 동일한 술을 든 셋은 함께 술을 들이켰다. 동시에 눈이 찡그려지고, 청건이 가장 먼저 수박으로 손을 뻗었다.

“윤이 이거 몇 개?”

새미가 취한 정도를 확인하려는지 윤의 눈앞에서 긴 손가락을 흔들었다. 윤은 두 개면 두 개, 세 개면 세 개를 말하곤 당당한 얼굴로 수박을 가져가 먹었다.

너희 덕분에 혼자일 뻔했던 내 2차가 외롭지 않아. 새미는 히히 헤헤 웃음 짓다가 갑자기 숟가락을 가져왔다. 그녀가 식탁에 놓인 것들을 팔로 쫙 치우더니 가운데다 휜 숟가락 하나를 올려 두었다.

“미니 진실 게임?”

새미가 물었다. 청건은 어느덧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도 대강 고개를 끄덕이곤 소주를 한 입 마셨다. 새미는 망설임 없이 숟가락을 돌렸다. 윤은 휘청휘청 돌아가는 숟가락을 보며 드디어 결론지었다. 이 소주병까지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다면, 청건에게 제안을 한번 해 보기로. 대략 신뢰도 41점짜리 우성 알파한테. 당신의 이 배려가, 그때 그 반절짜리 고백이, 다 진심이라면 우리. 나는 당신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우리, 부담스럽지 않게…….

그때 숟가락 끝이 윤을 가리키며 멈추었다. 청건과 새미의 시선이 부딪쳤다. 새미가 질문을 양보하듯 턱짓했고, 청건은 생각에 잠긴 윤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질문.”

청건의 취기 묻은 목소리에 윤의 시선이 들렸다. 한여름을 닮은 따뜻한 눈빛. 1점 추가.

“가을에도 나랑 볼래?”

계약 연애, 해 볼래요? 윤이 준비하던 질문과 언뜻 비슷한 물음이었다.

* * *

술에 떡이 된 이청건은 힘 빠진 목소리로 웃었다. 늘어진 청건의 팔 한쪽을 윤에게 짐짝처럼 얹은 새미가 눈을 찡긋대며 물었다.

“너, 선배 좋아하지?”

윤은 제 어깨에 볼을 비비는 덩치 큰 알파를 고쳐 들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요.”

새미는 믿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이만 가라는 듯 휘황찬란한 네일을 휘저었다.

“그래도 너무 애태우진 마. 놓칠라.”

역시 제 말은 듣지도 않았다. 윤은 그녀의 퍽 시의적절한 조언을 모른 척하며 몸을 돌렸다.

“잘 먹고 가요.”

“오냐. 파이팅!”

그녀는 주먹을 상큼하게 흔들더니 미련 없이 문을 닫았다. 혼자서 3차 술자리를 준비하려는 게 분명했다. 뭐가 파이팅이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술에 잔뜩 취한 청건을 부축하며 계단을 올랐다.

윤은 10점 감점이 될 뻔한 등산을 끝으로 청건을 평상 위에 던지듯 눕혔다. 그는 으음, 하고 속 좋게 고개를 뒤척이는 청건의 옆에 털썩 앉았다.

‘가을에도 나랑 볼래?’

대답은 소주를 전부 마시는 걸로 대신했다. 청건은 눈썹 끝이 처져서는 그 후로 양푼을 전부 비워 냈다. 언젠 조금만 마시겠다더니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자 속이 좀 상했는지 그렇게 한 그릇을 다 마시고 죽어 버렸다. 하지만 도리어 증명이 된 셈이었다. 이청건은 우윤을 좋아하는 게 100% 맞다. 언제까지 갈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은 고개를 돌려 청건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청건이 이 보잘것없는 옥탑에서 짝사랑 때문에 속상해서 술도 막 마시고, 남자에게 관심도 없는 동성한테 고백 비슷한 것도 하고, 불순한 전략을 가진 그 상대한테 이용당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

“약 버렸어.”

그때 청건이 웅얼댔다. 깜짝 놀란 윤이 몸을 흠칫 떨며 되물었다. 네?

완전히 뻗은 줄로만 알았던 청건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인정하고 싶진 않으나,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특히나 매력적으로 빛나는 검은 눈이 윤을 사로잡았다.

“내가…… 파란 약 버렸어. 미안해.”

“…….”

윤은 자백과 사과를 함께 하는 청건에 헛웃음을 지었다. 반칙이었다. 그건 또 언제 버린 거래.

“왜 자꾸 남의 물건을 갖다 버려요? 구매 제한된 거라 올해는 또 구하지도 못하는데.”

화를 내야 마땅한데 어쩐지 윤의 목소리엔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지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제 삶도 아예 버려진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아서 더 그런지, 옆에 누운 이청건이 사실 인간 파란 약이라 그런지.

“우와…… 용서해 주는 거야?”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청건이 실눈을 뜬 채 씩 웃었다. 윤은 그 웃음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떼었다.

그는 운동화 밑창을 옥상 바닥에 번갈아 부딪쳤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이청건이 사 준 에어컨도 틀 날이 별로 남지 않았다. 초가을 밤의 풀벌레 소리가 듣기 좋았다. 5중 잠금에, 창문도 꽁꽁 닫고 살던 이전엔 쉬이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윤아.”

여름 끝자락에 청건의 목소리가 묻어났다. 윤은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곧 제 팔이 그에 의해 멀어져 가는 걸 멍하니 구경했다. 청건은 윤의 왼 손목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예뻐.”

느릿하게 감았다 뜨는 눈이 윤의 얼굴로 올라가 닿았다. 마른침을 삼킨 윤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예쁘다며 쫓는 발걸음들에 수없이 도망 다녔던 윤이다. 다른 알파들처럼 이청건도 고작 이 말밖에…….

“살아 있어 줘서.”

순간 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제야 느껴졌다. 단지 손목이 아닌, 흉터 위를 훑는 청건의 손길이.

“이제 안 아플 거야.”

“…….”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청건의 눈썰미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저렴한 화장품으로 가린 흉터를 알아보고도 죽으려 했던 용기로 살지 그랬느냐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쓰다듬던 얇은 손목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청건이 윤을 마주 보며 눕자, 윤도 힘을 빼고 그의 옆에 누웠다. 나른한 얼굴의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윤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그냥…… 처음부터.”

처음……. 윤은 그와 실제로 처음 만났던 이 동네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피가 흐르는 손을 보고, 마치 자신이 다치기라도 한 듯 심각하게 굴던 첫날의 이청건을. 부적을 떼고, 기껏 모아 둔 물건을 버리고, 비싼 약도 몰래 버리고. 그렇게 욕먹을 행동을 감수하고서도 자신을 바꾸려 드는 이유가 이거였다.

동정이든 호감이든, 이 마음이 진짜라면. 가을에도, 겨울에도 늘 이렇게 나를 좋아해 준다면. 우린 각자의 필요 안에서 좋은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알파를 두려워하더라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때 청건의 입술이 윤의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촉,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살짝 멀어진 고개에 동그랗게 커진 윤의 눈이 드러났다. 그와 키스하는 상상보다도 한층 더 생생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정신이 깜박깜박 흩어졌다. 윤이 말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자, 청건은 천천히 윤의 몸 위로 올라탔다.

이어서 청건의 입술은 윤의 눈꼬리에, 볼 위에, 코끝에 붙었다 떨어졌다. 천천히, 부드럽게.

윤의 가슴이 호흡을 가다듬느라 빠르게 움직였다. 청건은 코끝이 스치는 거리에서 말했다.

“미안해.”

“…….”

그리고 시작된 입맞춤에 윤은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시야가 아예 어두워지니 입술을 감쳐무는 촉감이 몇십 배로 생생해졌다. 와인 향. 소주 향. 수박 향. 모든 향이 몸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왔다.

두려움으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예고하듯 이곳저곳에 입 맞추지 않았더라면 숨이 멎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한 것보다는 할 만했다. 그보다, 꽤 괜찮은 편인 것 같았다. 윤은 떨리는 손을 청건의 어깨에 올렸다. 그를 당기는 힘에 둘의 입술이 더욱 가깝게 맞물렸다.

이용하자. 이용하는 거야.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윤의 혀와 청건의 혀가 진득이 섞였다. 윤은 가끔씩 호흡을 잊은 듯 입술을 살짝 떼고 헐떡였다. 미리 사과를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청건은 키스를 잘했다. 생각보다 더 많이. 가산점을 줘야 할까.

키스가 상상 이상으로 길어지는 중, 윤은 순간 감았던 눈을 황급히 떴다. 어느새 목덜미를 감았던 두 손을 풀어 청건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멀리 떨어진 입술 사이로 떨리는 숨을 연거푸 뱉어냈다. 눈이 반쯤 풀린 청건이 다시금 키스를 잇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러나 윤은 그를 세게 밀쳐 내며 평상에서 벗어났다.

뒷걸음치는 윤을 보며 숨을 고르던 청건은 평상 위로 천천히 누웠다. 그는 자극이 끝나자 잠이 오는지 눈꺼풀을 느리게 움직였다. 현관문에 기대 이마를 짚고 있던 윤이 몸을 돌려 도어 록을 두드렸다.

쿵쿵, 쿵. 쿵.

몇 번이나 힘을 실어 두드렸으나 키패드는 번호를 띄우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베타는 완전히 고장 난 문 위로 고개를 박았다. 열감이 쏠린 아래가 여실히 느껴졌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쿵쿵, 쿵쿵.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공포감이 온몸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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