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Frame In
나는 당신을 좋아하진 않지만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자는 제안. 그러나 그 전략은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났다.
윤은 입술이 주먹만 한 악마에게 쫓기다가 놈이 휘두른 삼지창에 목이 잘리고서야 잠에서 깼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고스란히 받는 윤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그는 수마에 잠긴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욕실에서 나는 물줄기 소리가 귓속을 서서히 채웠다.
새벽, 편의점에서 사 온 9V짜리 배터리로 방전된 도어 록을 심폐 소생했다. 그대로 청건을 평상에 두고 도망치려던 윤은 백번 고민 끝에 결국 그를 부축해 침대에 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이건 꿈이야.’를 5백 번쯤 외쳤는데 눈을 뜨니 아침이다. 청건이 있어야 할 침대에 눕혀진 채로.
윤은 여전히 비몽사몽 중인 몸을 일으켰다. 이청건이 나오기 전에 도망가야 했다. 한 발로 뛰며 양말을 신고 집업과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현관문을 붙잡았을 때 덜컥 욕실 문이 열렸다.
미처 정리하지 못해 머리 한쪽이 빼죽 튀어나온 윤은 새벽에 막 키스를 나눈 알파를 천천히 돌아봤다.
인사를, 해야 하나? 안녕. 안녕하세요? 그럴 사인가? 그럴 타이밍인가?
“일어났어요?”
하지만 인사는 반나체인 이청건이 먼저였다. 아주 자연스러운 톤이었다.
“……네.”
윤은 어색하게 문고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치 않게 잘 잡힌 상체 근육을 보게 된 윤이 침을 꼴깍 삼켜 냈다. 젖은 머리를 털던 청건은 조용히 웃었다. 수건을 내려 둔 그가 자연스레 윤의 새 반팔을 꺼내 입었다.
“데려다줄까요?”
“금방인데요, 뭐.”
윤이 서둘러 대꾸했다. 청건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보아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
머리가 아팠다. 어쩐지 윤은 자신의 보금자리가 덫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어제 안주를 챙겨 먹지 않아서인지 배 속도 꼬였다. 한때는 소주 너덧 병에도 멀쩡했던 것 같은데,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때 넋 놓은 얼굴 위로 청건이 팔을 뻗었다. 윤은 이마에 닿는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열나는 거 같은데.”
욱신욱신, 후끈후끈. 확실히 어제 하체에 몰리던 감각처럼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윤은 황급히 뒷걸음쳤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갈게요.”
그리고 청건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얼른 집을 빠져나왔다.
윤은 자기 자신이 괴물이라도 된 것 같았다. 평생을 피해 오던 알파에게 비정상적인 욕정을 느끼다니.
사실 우윤은 꾸준히 문을 두드려 오는 객을 문전 박대하는 사람은 못 됐다. 1년 내내 말을 붙이던 소라에게만큼은 거부감이 없듯, 강압적인 모습 하나 없는 청건만의 접근 방식에 현혹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기민하게 세우던 경계심이, 확실하게 선을 긋던 단호함이 모조리 사라진 것 같아 억울했다.
DVD 방에 와서도 몸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손님이 내미는 DVD가 아지랑이 피듯 흔들거렸다. 온종일 뜨끈뜨끈한 찜기에 들어앉은 듯 몸이 더웠다.
그런 와중에도 어제의 행위가 문득문득 생각났다. 자신의 위로 올라타던 이청건. 눈꼬리. 볼. 코끝. 입술로 이어지던 일련의 키스들. 이성을 뒤로하고 섞이던 두 혀. 공포심을 느끼던 와중에 발정이 난 것처럼 그를 끌어당기는…….
그 이후 이어지는 문란한 전개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에 가득한 식은땀을 훔쳤다. 쓸데없이 오감을 동원한 상상력이 야속했다.
알파를 보면 생기던 신체적 증상이 최근 청건을 볼 때마다 심해진다 싶었다. 그리고 어제는 그 정점을 찍었다. 어찌나 쿵쾅거리던지 심장이 박살 나 버린 줄만 알았다. 어릴 때 말고는 난 적 없던 열 감기까지 걸렸다. 우성 알파와의 접촉은 생각 이상으로 부작용이 대단했다. 아무리 자유가 걸린 일이라도 이런 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었다. 하루빨리 끝을 내야 했다. 한번 맛본 자유는 너무 커서, 더 늦게 된다면 이청건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기 싫어질 것 같았다.
윤은 정신 차리기 위해 양 볼을 손바닥으로 찹찹 때렸다. 정수기에서 찬물을 가득 받아 목구멍으로 쏟아부었다. 이제 3시간만 더 일하면 퇴근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불쑥 떠올랐다. 이청건은, 갔을까? 아니, 집에서 나가 달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아직 있으려나. 그럼 집엔 언제 들어가는 게 좋지? 혹시 오늘도 다른 사람을 만나러 나갔을까. 이번엔 누구를 만나고 있을까.
그때 왼편에서 도어 벨이 딸랑였다.
“어서 오세요.”
기계적으로 인사 후 출입문을 바라본 윤이 그대로 몸을 굳혔다.
저게 무슨……?
눈앞에 희한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윤은 유리문에 낀 인형 탈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마도 회색…… 개인 것 같았다. 도와줘야 하나 싶었지만 혹시나 미친놈일까 머뭇댔다. 얼굴이 눌린 인형은 결국 뒤로 나갔다가 큰 키를 굽혀 가며 문을 통과했다.
다시 들어온 그 사람은 앞주머니에 손을 넣어 휘젓더니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구깃구깃한 종이를 윤을 향해 펼쳤다.
「일일 이벤트 직원입니다. 매장 일은 저한테 맡겨 주세요.」
인형 탈 이벤트라니. 고전적인 이벤트였다. 이런 이벤트가 손님 유치에 과연 도움이 될까. 어쩐지 사장님의 판단 미스인 것 같았지만, 뭐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예.” 하고 떨떠름하게 끄덕인 윤은 그를 경계하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윤이 앉자마자 회색 개는 주변을 두리번대더니 어지럽혀진 물건의 각을 딱딱 잡기 시작했다. 청소함도 찾아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더니 아직 청소 전인 모든 방을 들락날락하며 모두 치웠다.
커피를 훌훌 타서 홀짝이던 윤은 제가 일급을 날로 먹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어느새 로비로 돌아온 남자는 카운터 앞에서 아까 전 보여 줬던 종이를 꺼내 매직으로 무언가를 쓱쓱 쓰더니 윤에게 내밀었다.
「일일 이벤트 직원입니다. 매장 일은 저한테 맡겨 주세요. 쓰레기봉투 좀 더 주실래요?」
일을 찾아다니는 스타일인 듯했다. 윤은 비품 보관함을 열어 새 봉투를 내밀었다. 그가 다시 몸을 돌릴 무렵, 윤은 개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마실 것 좀 타 드릴까요?”
윤이 말을 거는 건 예상 밖이었는지 그는 뒤로 돌더니 한 손을 휙휙 저었다.
“혹시…… 말을 못 해요?”
윤은 혹시나 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개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내가 눈치가 없었네. 그냥 말하기 싫은 거구나. 하긴 하루 볼 사이에 이것저것 챙기는 것도 유난이었다. 윤은 이청건의 오지랖이 제게 옮겨 왔나 싶어 코웃음 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 윤이 할 일을 모조리 처리한 개는 대기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 얇은 장갑으로 된 회색 손과 두툼한 신발을 꼼지락대는 모습이 퍽 귀여웠지만 윤은 애써 고개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서 오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윤과 달리 개는 멀뚱히 손님을 보았다. 그러다 제 본분을 자각한 듯 뒤늦게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벗겨질 뻔한 모자를 잡아 눌렀다.
손님은 이전에 온 적 있던 알파 오메가 커플이었다. 알파에게 안긴 오메가가 큰 탄성을 냈다. 휘청이는 걸음으로 개에게 바짝 다가가더니 회색 손을 꽉 쥐었다. 흥미로운 눈이 회색 머리통을 훑었다.
“뭐야, 이 귀여운 건? 이벤트예요?”
“네. 그렇다네요.”
윤이 심드렁히 대답했다. 윤은 벽에 전시된 DVD를 오래 고르지도 않고 가져오는 알파에게 손을 내밀며 그들을 확인했다. 작은 남자가 개 인형을 여기저기 주무르고 있었다. 성추행에 가까운 터치였다. 개는 남자에 의해 구석으로 밀리며 뒤로 돌아간 몸통을 바로잡았다. 막무가내인 손님에 진땀을 빼는 듯했다.
윤에게서 방 카드를 받은 알파는 빈 콘돔 박스를 구겨 카운터로 휙 던졌다. 윤의 눈썹이 조금 찡그려졌다. 이런 대우야 익숙했지만, 그것보다.
카운터를 돌아 나온 윤에 알파의 시선이 붙었다. 그러나 윤은 알파를 홱 지나쳐 오메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오메가의 어깨를 잡아당겨 회색 개와의 사이를 벌렸다.
“죄송하지만, 탈 안에 사람 있거든요.”
이벤트 직원은 만져지는 게 기분 나빴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도 있었을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용된 입장에서 그런 행동이 쉬울 리 없다. 게다가 이 상황은 윤이 살면서 지겹게 당해 온 일이라 용납이 안 됐다.
오메가는 천천히 눈을 끔벅이다 말했다.
“이게 너희 일이잖아. 뭐가 문제야?”
그 대답에 윤의 얼굴이 급속도로 구겨졌다. 참다못한 윤이 오메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동시에 그들 사이로 회색 팔이 뻗어졌다.
“그만. 괜찮아요.”
그는 인형 탈 속에서 말했다.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빠르게 깜박이던 윤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입이 살짝 벌어진 윤과 회색 허스키가 서로를 응시했다. 윤은 제 앞을 가로막은 팔을 낚아채 장갑을 벗겨 냈다. 하. 낮은 숨이 터져 나왔다. 눈에 익은 손이었다.
“또 시비 터냐? 작작 하고 이리 와. 나 급해.”
“자기는 왜 내 편을 한 번을 안 들어 주냐?”
“아 좀……. 쌈닭도 아니고.”
어깨를 붙잡힌 오메가가 지정된 9번 방으로 끌려갔다. 날 선 눈으로 둘을 훑던 오메가는 마침내 홱 돌아 알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은 주변이 조용해지자 서둘러 인형에게 팔짱을 끼곤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큰 대가리를 벗겨 내자 남색 머리가 부스스 흩어졌다.
“……저기요.”
“서프라이즈.”
얼결에 정체를 들킨 청건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윤이 어이없는 얼굴로 탈을 내려 두었다.
“여긴 왜 왔어요? 그것도 이 꼴로…….”
“보고 싶어서요.”
“…….”
“그리고, 그냥 오면 화낼 것 같아서.”
말문이 턱 막힌 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궁금했어요. 일하는 윤 씨는 어떤가.”
“…….”
“씩씩하게 잘하네요. 생각보다 더.”
약간 젖어 있는 그의 이마와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만히 바라보던 윤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2시간 더 기다려야 돼요. 괜찮겠어요?”
청건이 어깨를 들썩여 보이곤 소파에 앉았다.
“오늘은 시간 많아요.”
곧 출입문의 벨이 딸랑, 울렸다. 가 봐요. 머무적대던 윤은 청건의 말에 결국 뒤돌아 방을 나섰다.
대체 저런 옷은 또 어디서 난 걸까. 여러모로 대단했다. 베타 하나 보겠다고 저런 꼴도 마다하지 않고 와서 청소까지 도맡다니. 윤은 손님이 내민 DVD 바코드를 찍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들킬까 봐 말도 없이 일만 하던 청건의 분주한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간 탓이다. 그러나 웃음을 인지하자마자 얼굴을 굳힌 윤이 로봇처럼 카드를 건넸다.
“11번 방입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는 3명의 사람을 보다 청건이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 사람이 팔자에도 없는 짓 하는 걸 보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차라리 잘됐다. 결심한 김에 바로 말할 수 있을 테니.
가만히 메마른 입술을 물어뜯던 윤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 * *
자갈을 밟던 소리가 완전히 멈추었다. 청건 쪽으론 긴 돌담이, 윤 쪽으론 우거진 숲이 펼쳐져 있었다.
시동을 끈 청건은 벨트를 풀었다. 윤은 차에 탄 지 얼마 안 되고부터 곯아떨어져 있었다. 에어컨 바람에 갈색 앞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다 왔는데.”
그가 중얼댔다. 그러나 조용한 내부에선 색색대는 숨소리만 울렸다. 청건은 미동도 없이 잠든 윤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유독 도드라진 붉은 입술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쉰 청건이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었다. 외곽에 위치한 차 안으로 평화로운 산새 소리가 들어왔다.
오랜 시간 입으로 숨을 골라내던 청건이 다시금 윤에게로 고개 돌렸다. 그는 천천히 팔을 뻗었다. 잠든 머리 위에 닿은 손끝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손가락 사이사이 햇살을 머금은 듯한 머리칼이 감겨들었다.
선잠에 들었던 윤의 눈이 천천히 들렸다. 은은한 불빛에 물든 청건의 얼굴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윤은 잠결에 그의 입술로 붙는 시선을 감출 수 없었다.
“어제 싫었던 건 아니죠.”
“…….”
“술은 약해도, 필름은 안 끊기는 편인데.”
윤은 점차 정신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청건이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귓가에 작은 둥둥거림이 울렸다. 차 안이 지나치게 고요해 제 심장 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이어지는 말은 뭘까. 그러니 가을에 만나는 건 확정이다? 둘의 관계를 다시 정의해 보자?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을 잇고 있는데, 청건이 윤의 벨트를 톡 눌러 /풀었다. 긴장한 윤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내려도 돼요. 사람 없어요.”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혼자 남게 된 윤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그를 뒤따라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곳이 어딘지를 알려 주는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청건의 곁으로 가자 담이 옴폭 팬 곳에 위치한 철제문이 보였다. 방문객이 잘 오지 않는 곳인지 낡아 보였다. 청건이 문을 가볍게 밀자 음산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윤은 왠지 모를 괴기스러움을 느끼며 청건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먼저 갈까요?”
그가 물었다. 윤은 고민 끝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 주는 청건에 윤은 멋쩍게 머리를 쓸었다. 벌써 이청건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아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젖기 전에 끊어 내면 괜찮을 것이다.
돌담 안은 고요했다. 커다란 석조 건물 옆엔 오래된 나무들과 식물들이 죽은 화단이 줄지어 서 있었다. 건물을 돌아 뒤로 들어가자 바닥에 늘어놓은 건축 자재와 텅 빈 페인트 통, 그리고 그 뒤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보였다. 후문으로 보였다.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청건을 따라 건물 안으로 오자 글씨가 다 지워진 열차 시간표가 보였다. 그렇게 로비를 지나 유리문을 여니 역사가 펼쳐졌다. 이어지는 짧은 계단 아래로 선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승강장 위에 선 청건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주변을 관찰했다. 그의 옆에 조금 떨어져 선 윤이 건물 위에 있는 한옥 지붕과 역명판을 올려다보았다. 앞부분은 풍화되어 지워져 있었으나 ‘천면’이라는 글자는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폐역사인 듯싶었다.
“처음 여기 온 날을 아직도 기억해요.”
청건이 정면을 본 채 말했다.
“같이 오고 싶었어요.”
“…….”
“여기가 내 시작과 끝이거든요.”
청건이 천천히 윤을 돌아보았다. 마침 큰 바람이 불었다. 오래된 시멘트 냄새가 날아오고, 숲의 나뭇잎들이 사그락사그락 마찰했다. 그러나 윤은 커다란 바람 속에서 더위를 느꼈다. 새벽의 열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것처럼.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던 윤은 몇 걸음을 걷다가 선로 위로 뛰어내렸다.
“조심해요.”
청건은 자갈을 밟으며 다리를 휘청인 윤에게 당부했다. 윤은 그의 걱정하는 목소리를 귓속에 담으며 도드라진 선로를 한쪽 발로 꾹 밟았다.
“……내가 헷갈렸어요.”
그를 등진 윤이 작게 말문을 열었다.
“같이 오래 있어도 괜찮길래, 키스도 가능할 줄 알았어요.”
“…….”
“근데 아니었어요. 두근거리고, 땀나고, 열은 펄펄 나고. 똑같았어요.”
거기다 발기를 하는 불상사도 있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건 예외 증상이었다. 그러니까, 공포의 정점을 넘어 생긴 일시적인 오류일 것이다. 윤은 운동화 끝을 움직여 자갈 안을 파헤쳤다. 청건은 말없이 바닥을 향해 숙인 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윤은 고개를 올려 대답 없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청건이 생각하는 바를 읽어 내기는 어려웠다.
“날 너무 특별하게 대우해 주지 마요.”
“…….”
“이런 소중한 곳은, 아껴 뒀다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와요.”
더 상처 주기 싫으니까 그냥, 알아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당신이 내 문을 자꾸 두드려서 매정하게 몰아내는 게 쉽지 않다고. 그래도 그 이상은 할 수 없다고. 절대로.
윤은 종일 떠오르는 키스와 함께, 내내 생각해 보았다. 이 사람과의 끝은 어떨까. 더럽고 추할까. 아무렇지도 않을까. 후련할까.
청건은 계단을 밟아 윤이 있는 선로로 내려왔다. 별다른 표정 없이 자갈을 밟으며 걸어왔다. 윤은 그가 다가올수록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긴장감에 호흡을 골랐다. 마침내 두어 걸음을 남기고 선 그가 윤과 눈을 마주쳐 왔다.
“나 기다리는 거 잘해요.”
“…….”
“계속 모른 척해 줄 수 있는데.”
“대체, 뭘 모른 척해 주겠다는 건데요.”
“알잖아요.”
윤은 목이 조여들었다. 청건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뿌리치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한 번 더 해 보죠.”
“……뭘…….”
그리고 청건이 다시 걸음을 옮겨 왔다. 그에게 고정되었던 윤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흩어졌다. 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알파를 피해 뒷걸음쳤다. 자갈을 밟으며 물러서던 그는 다시 레일을 밟으며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단숨에 큰 보폭을 걸어온 청건이 윤의 팔을 붙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윤이 청건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이 윤의 뺨을 힘주지 않고 감쌌다. 스치듯이 얹어진 손끝에도 윤의 심장이 자르르 반응했다.
“무서우면 밀어내요.”
청건은 곧이어 입술을 가볍게 부딪쳐 왔다. 감지 않은 두 눈이 가까이서 서로를 담았다. 윤의 변화를 확인하려는 듯 잠시 멈춰 있던 청건이 곧이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윤의 목 뒤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쉴 새 없이 깜박이던 눈꺼풀이 꽉 닫히고, 윤은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두 팔을 움직여 청건을 움켜쥐었다.
취기 오른 농밀한 키스가 아니었다. 어제처럼 혀를 섞는 일도 없었다. 다만 진득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마다 윤이 몸을 움찔거렸다. 어질어질한 정신 사이로 익숙한 욕정이 들끓었다. 공포의 정점이 너무도 쉽게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때 바람에 실린 우거진 숲 냄새가 진하게 스쳤다. 당장 청건이 뱉어 내고 있을 페로몬이 이런 향일까, 생각이 들 즈음 윤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청건의 손을 꽉 붙잡아 내리자 이어지던 키스가 끝났다. 형편없는 힘에도 밀려나 준 청건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 역시 약간은 상기된 얼굴이었다. 물론 지금 제 감정과는 많이 다를 테지만.
“무서웠어요?”
청건은 조용히 물어 왔다. 윤은 통증이라 생각될 만큼 묵직하게 뛰는 가슴을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곤 불에 타는 듯 뜨거운 입술을 깨물었다.
날씨가 계속 흐리더니 머리 위로 드디어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말없이 있던 청건은 윤의 얼굴에 머물던 시선을 내렸다. 윤은 그의 시선이 어디에 닿았는지를 깨닫고는 손거스러미를 뜯던 행동을 멈추었다. 그때야 청건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까지 할게요.”
“…….”
“정문에 있어요. 택시 불러 줄 테니까.”
잠시 뒷걸음치던 청건은 이내 뒤돌아 계단을 올랐다. 윤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곧 무거운 추에 당겨지듯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청건은 분명 화가 난 게 아니다.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다. 단지 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뿐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청건의 모습을 보던 윤이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그와의 끝은 추하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다만 공허했다. 곧 조용하던 폐역사 위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윤은 방금 전까지 더웠던 몸이 급속도로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 * *
어김없이 아침이 밝았다. 창밖으론 여전히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청건이 사 준 침대 위에 누운 윤은 그가 부적을 떼어 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 후, 품에 안고 잠들었던 <러브 리프 1화>를 머리맡으로 치웠다. 다른 일을 할 의욕이 없던 윤은 밤새 침대에 누운 채 대본집을 두 번 정독했었다.
쿨럭. 쿨럭. 윤은 잔기침을 잇다가 드디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를 맞은 탓에 몸살이 온 것 같았다.
그는 청건의 잔재에 둘러싸인 집 안을 힘없이 걸었다. 아직 빨지 못한 옷들, 언제 다 갚을지 감도 안 잡히는 가구들, 노트북, 자신은 쓰지도 않는 후추 그라인더, 치즈 그레이터 등의 요리 도구. 등등. 다 가지고 가라 할까 싶었지만 차라리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그저 성가신 물건이 됐을 테니까.
잘 접어 둔 청건의 옷이 발에 걸렸지만 휘저어 떨쳐 내고 화장실로 향했다.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마치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밸브를 잠갔다. 거울 위로 청건이 쓰던 수건이 보였다. 윤은 그곳에 얼굴을 대충 눌러 닦은 후 빨래 바구니에 수건을 던졌다.
냉장고에 있는 삼각 김밥으로 대충 식사를 하고 청건이 사 둔 종합 감기약을 삼켰다. 그리고 청건이 사 두었던 마지막 생수를 마셨다. 짐을 챙긴 그는 청건이 입었을 땐 거의 정강이까지 오던 바지를 마지막으로 꿰입고 밖으로 나갔다.
윤은 나가자마자 장우산을 폈다. 뒤집어쓴 모자가 답답했지만 적응해야 했다. 다시 성 안에 갇힐 준비를 해야 했다. 청건이 버린 알파 약을 다시 구하려면 불법적인 루트밖에 없었기에 의식적으로 외출을 자제하고 몸을 사리는 수밖에 없었다.
빈 택시가 길가에 서 있지만 알파 기사일지 모르니 버스를 탔다. 1인용 좌석에 앉아 창 위에 사선으로 그려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가게에 도착하니 사장님이 계셨다. 전화로 통보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윤은 고민하지 않고 일을 그만두겠다 말했다. 청건이 머물렀던 곳은 집으로도 충분했다. 일하는 곳에서마저 이청건이 불쑥불쑥 떠오르면 성가실 것 같았다. 사장님은 아쉬워했지만 피죽도 못 먹은 듯한 윤에 이유를 묻지 않고 오늘까지만 힘을 써 달라 말했다. 12시간 근무는 지루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온 마지막이라 그런지 퍽 아쉬웠다.
막 룸에서 나온 커플이 결제를 마쳤다. 그들이 나가고, 마지막 팀이 있는 4번 방의 불투명한 유리창 밖으로 스크린 빛이 일렁였다. 더 정리할 것이 없나 살피던 중, 아직 반납 처리를 하지 않은 DVD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청건의 영화 <혀 설>이었다. 손님들이 자주 찾는 영화인지라, 은근히 내용이 궁금했었다. 표지의 청건과 눈이 마주친 윤은 DVD 갑을 쓱 끌어왔다. 입구를 잡아 뜯고 중앙 돌출부를 눌러 CD를 빼냈다.
윤은 몇 분 만에 백수가 됐다. 기술이 필요치 않은 직업이라 자신의 다음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대체자가 수백만 명에 가까울 이청건은 우윤을 과연 몇 분 만에 기억에서 지워 버렸을까?
윤은 CD를 손가락에 끼우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마감 시간이라 새 손님이 들어오지 않을 테니 출입문에 붙은 커튼을 쳤다. 남아 있는 손님을 위해 문은 잠그지 않고 카운터와 가장 가까운 6번 방으로 들어갔다.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하자 자동으로 룸의 밝기가 낮아졌다. 몇 센티를 남기고 문을 닫은 윤은 소파 끝에 앉아 긴 쿠션을 당겨 왔다.
영화 속 이청건은 방음이 엉망인 벽 하나를 두고 옆집 여자의 신음을 듣는다. 숨을 깊이 고르던 그는 곧 앞섶을 풀어 헤치고 자위를 했다. 꽃무늬 벽지에 머리를 박고 낮은 목소리로 앓았다. 턱 아래로 땀이 한 방울 흐른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들뜬 얼굴로 콧잔등을 찡그렸다.
윤은 스크린을 채운 청건의 옆얼굴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아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음에도 지독하게 외설적이었다.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신음하던 이청건의 표정이 꼭 저랬을까, 잠시 궁금했다.
마침내 청건은 절정에 다다랐다. 벽을 쓸고 내려간 남색 머리는 한참을 그렇게 멈춰 있다. 그리고 여전히 옅게 들려오는 옆집 여자의 신음. 침도 삼키지 못하고 장면에 몰입하던 윤은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면 속 청건과 함께 어깨를 들썩였다. 뒤를 바라봤으나 불투명한 유리문 밖엔 아무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청건이 급하게 지퍼를 올리며 싱크대에서 두 손을 벅벅 문대었다. 양쪽 창문을 전부 열어젖힌 청건이 땀을 닦아 올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혀 설>에서 명망 있는 교수이자 옆집 여자의 스토커로 살았다. 또 심각한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었다. 지금과 엇비슷한 머리 스타일을 했으나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 근육을 세밀하게 쓰며 미세한 감정까지 표현하는 남자가 낯설었다. 옆자리에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그림도 이질적이었다. 우윤이 아닌 다른 이에게 목을 매는 이청건. 윤은 쿠션을 더욱 끌어안았다.
선정적일 줄 알았던 영화는 알고 보니 스릴러물이었다.
청건은 비 오는 날 우산 아래 숨어 그 여자의 약혼자를 미행했다. 골목을 들어가는 남자에게 순간적으로 달려들어 칼로 수십 번 찌르는 눈빛은 말 그대로 살이 떨렸다. 극 중 ‘이현완’의 다른 인격은 그녀의 주변을 도는 사람을 무차별하게 살해했다. 살인 현장에서 증거를 남기지 않지만 그들의 혀를 모아 수집한다. 그녀와 잠시라도 말을 섞은 죄 많은 혀를.
그렇게 주변 인물이 하나둘 죽어 가는 탓에 망가진 그녀의 일상으로 부드럽게 파고 들어가 위로하는 다정한 이청건. 여자는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를 잃을까 전전긍긍했다.
일자로 뻗은 눈매가 미소를 지을 때마다 부드럽게 휘었다. 윤은 그제야 자신이 알던 청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일상을 파고드는 다정한 인격은, 자신을 보던 때와 같은 눈빛을 했다.
- 무서울 것 없어. 그냥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는 거지. 네 바람대로.
윤의 얼굴 위로 바다의 파란빛이 스몄다. 윤은 기계의 소리를 높였다. 청혼 장면이었다. 청건은 결혼에 트라우마를 가진 그녀를 보듬었다. 손끝을 떠는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죽은 약혼자가 선물한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결국 의심 없이 청건을 안고 키스했다. 청건은 펜션의 문을 열자마자 그녀의 옷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럿의 혀를 묻은 땅 위에서 섹스 했다.
러닝 타임의 112분 중 90분여가 지날 즈음이었다. 닫아 놓은 문밖에서 손님들의 수다 소리가 들렸다. 정사 신에 몰입하던 윤이 서둘러 일어나 플레이어를 종료했다.
“여기에 두고 갈게요.”
마지막 손님들은 커튼을 걷고, 문을 열고, 다시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안녕히 가세요. 윤은 그들에게 닿지도 않는 인사를 끝으로 소파에 앉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윤은 한숨을 내쉬며 쿠션을 움켜쥐었다.
또, 섰다.
* * *
도대체 그 영화는 왜 봐선.
마지막으로 청소한 것들을 담은 쓰레기봉투에 제 ‘썩은 물’이 포함되어 있을 줄 꿈에서는 알았을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청건이 사 준 세탁기에 입었던 옷들을 모조리 빨았다. 아, 이 망할 놈의 물건들을 다 버릴 수도 없고. 윤은 침대에 앉아 둘둘 돌아가는 세탁기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집 지분 90%를 차지한 것도 모자라 정신의 90%를 차지한 우성 알파는 정말이지 지독했다.
다음 날 윤은 여전히 절망적인 얼굴로 버스에서 내렸다. 비가 그친 하늘은 회색도 푸른색도 아닌 채 멈춰 있었다. 오늘 커피숍에서 소라와 약속이 있었는데 이른 시간이라 조금 시간이 떴다. 그동안 식사를 하기로 결정한 윤은 커피숍 근처 아무 한식집이나 들어갔다. 그리고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주문한다며 별표가 쳐진 점심 특선을 시켰다.
테이블 위로 떡갈비 정식이 차려진 순간 윤은 마시던 물을 뱉을 뻔했다. 떡갈비 집이었어? 그냥 도망갈까 싶었지만 억지로 정식을 해치웠다. 사실 오기가 생겼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네가 먼저 죽나 내가 먼저 죽나.
식사를 끝낸 윤은 결국 약국을 들렀다. 어쩐지 먼저 죽는 건 자신일 것 같았다. 딸기 맛 추잉 소화제를 와작와작 씹으며 약속 장소인 커피숍으로 향했다.
그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빵이 진열된 매대를 휘청휘청 스쳤다. 약속 시간이 얼추 다 되어 갔기에 그는 미리 소라가 좋아한다는 몽블랑과 딸기 스무디 두 잔을 시켰다. 직원에게 벨을 건네받고 퀭한 얼굴로 뒤로 도는 순간 윤은 손목을 턱 하니 잡혀 1층 구석으로 끌려갔다. 울렁거리는 속에 잠깐 눈앞이 하얘졌다가 돌아왔다.
“여긴 무슨 일이야, 애기야? 설마, 바라암?”
윤은 얼떨떨한 얼굴로 범인을 쳐다봤다. 오늘은 형광색에 가까운 분홍 머리. 이새미였다. 윤이 눈을 일자로 만들며 그녀에게 대꾸했다.
“뭔 소리예요.”
“아무리 그래도 소개팅은 아니지 않나? 남친 두고.”
“…….”
머리털 하나만 뽑아도 되나. 새미는 뚱하니 선 우윤을 빤히 들여다보다 발그레한 그의 목덜미를 짚어 보았다.
“어머. 너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
“……그냥 감기예요.”
윤이 대충 대답하며 그녀의 손을 치워 냈지만 새미는 그를 2층 구석진 자리로 끌고 올라갔다. 새미는 첩보 작전을 맡은 사람처럼 주변을 휙 경계했다. 얼굴 옆으로 무지개색 네일이 붙은 손을 세우며 의자에 앉았다. 윤이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테이블에 벨을 내려 두었다. 그녀는 청색 토트백을 테이블 위에 놓고 그 안에서 흰색 버킷 해트를 꺼내 핑크색 머리 위로 덮어썼다.
“뭐 하는 거예요?”
“여기 내 열혈 팬이 한 분이라도 있으면 곤란해지거든. 카페가 순식간에 뒤집어져. 아닌 것 같지? 진짜다. 시민분들을 위한 배려랄까.”
“……이미 들켜도 한참 전에 들켰겠는데요.”
이렇게 튀는 사람이 세상에 또 존재할까 싶었다. 이목구비 주장이 대단한 청건은 패션이라도 정갈하지, 이새미는 오늘따라 더 공작새 같았다.
“아가. 오늘 진짜 무슨 일로 나왔어?”
“그놈의 아가 소리 좀 그만하면 알려 드릴게요.”
“그래, 동생. 누구 만나러 왔냐고오. 누나 궁금해.”
윤이 정면의 통유리를 보며 귀찮은 투로 말했다.
“그냥 아는 사람요.”
“아, 난 또 네가 선배한테 삐져서 확 소개팅 잡았는 줄 알았잖아.”
새미가 손을 공중에서 한 번 휘두르곤 다리를 꼬았다. 윤은 새미의 말을 곱씹다가 입을 열었다.
“삐졌다고요?”
그 물음에 새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냐는 듯한 얼굴로.
“걔 베타 파티 간 걸로 저기압이었던 거 아냐?”
“…….”
윤은 어디선가 들어 본 단어를 곱씹었다. 뜻을 해석하고 있자 새미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청건이 말 안 했어?”
새미가 상황 파악을 하는 동안 윤은 ‘베타 파티’의 어원이 연예계에서 비롯됐음을 상기했다. 잡지사에 다닐 때 알파 상사 한 명이 그를 본떠 ‘오메가 파티’를 거하게 즐겼다고 제 문란함을 떠벌린 적이 있었다.
윤은 서둘러 핸드폰을 들어 검색했다. 베타 파티. 그러자 수없이 많은 정보가 나왔다. 톱급 베타 연예인들의 친목 모임. 2년 전부터 알파를 끼워 노는 분위기로 변모하는 중이라는 기사도 보였다. 같이 화면을 들여다보던 새미는 진동 벨이 울리자 슬그머니 일어나 1층으로 갔다.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모임인지라 몇 장 없는 사진은 하나같이 건배 사진이었다. 팬들은 손 모양으로 새 멤버가 된 알파를 전부 추측해 냈다. ‘하민호’, ‘천요석’. 그리고…….
윤은 기사 제목으로 뜬 「‘베타 파티’ 새 합류 멤버는 이청건?」을 보자마자 SNS를 찾아 열었다. 잡지사에서 만들라는 요청에 따라 가입해 놓고는 줄곧 유령 상태로 있던 계정이 떴다.
“말 안 하고 간 이유가 있겠지. 있을 거야.”
어느새 다시 온 새미가 슬쩍 쟁반을 밀어 주며 윤의 옆에 앉았다. 선배가 막, 막 나쁜 의도로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음? 새미는 꾸준히 그를 달래었으나 어쩐지 조금만 더 귀찮게 하면 카페를 반으로 접어 버릴 듯한 윤의 살벌함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윤이 입을 악다물며 엄지를 훅훅 올리는 것을 본 새미가 눈치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베타 파티라는 게 별 게 아니란 말이 있어. 베타들이 연예계에선 워낙 스폰 받고 올라왔다는 이미지가 심하니까. 일종의 베타 기 살려 모임이지.”
“…….”
“막 약 빨고 문란하게 아랫도리 까고 그러는 곳이 아니라, 아니 상상해 봐. 쉬는 날에 동물 보호소 가는 게 인생의 낙이라는 선비 중의 선비 이청건이 가당키나 한 일이니?”
그러나 윤은 새미의 일장 연설에도 대꾸 없이 한 장의 사진을 조용히 내밀 뿐이었다. 사진을 뜯어보던 새미가 입술을 일자로 늘렸다. 술은 좀…… 먹나 보네. 담배도 좀, 피우나 보네. 새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누군가. 그 옆에 플래시가 터져 빨간 눈을 한 이청건. 술도 약한 사람이 들고 있는 건 위스키 잔. 단추가 세 개나 풀어져 있는 셔츠. 모르긴 몰라도 사진이 요란하게 흔들려 찍힌 것으로 보아, 누구라도 광란의 밤이 아닌가 의심케 하는 한 장이었다.
윤은 휴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가슴 안쪽이 화끈거렸다. 어째선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청건이 우윤의 대체재를 찾기까지의 시간은 단 이틀이었다. 몇 분이 아니라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또 선배가 워낙 베타 친구가 많으니까……. 제가 이청건이라도 되는 양 아직도 변명을 줄줄 잇는 공작새의 말은 저 멀리 흩어졌다.
윤은 청건의 SNS를 찾아 들어갔다. 눈에 불을 켜고 최근 사진을 다 뒤져 보았다. 게시 글은 없었지만 빨간 원 안에 방금 본 그 사진이 있었다. 그들은 최초로 베타 파티 새 멤버를 대놓고 공개했다.
어쩐지 윤은 자기 보란 듯이 올린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생겼다. 자의식 과잉이래도 할 말 없었다. 그래도 타이밍이 너무한 거 아닌가? 다른 놈들이랑은 다르게 담백하게, 멋있게, 쿨 하게 떠나서 사람 심란하게 만들어 놓고. 언제는 뭐. 평생 옆에 있어 줄 것처럼 입에 발린 말은 다 하더니. 며칠 내로 꼬셔서 유럽 가기 전에 고백이라도 할 것처럼 굴더니. 얼씬대는 알파는 다 혼내 줄 기세로 나를 달랬으면서. 이현완의 다른 인격처럼 내 빈 공간을 자꾸만, 자꾸만 찔러서 나를 혼란스럽게 흔들어 놓고.
‘저, 며칠 후에 유럽 가요.’
‘…….’
‘언제 다시 오게 될지는, 저도 몰라요.’
윤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윤 씨!”
그 순간 둘은 발랄한 목소리가 넘어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 단발에 흰 원피스, 가죽 부츠 차림인 소라가 어느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Bloody hell. 새미는 그녀를 보며 멍한 얼굴로 속삭였다.
“오랜만이네요.”
윤은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새미는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버킷 해트를 내렸다. 그러곤 벌떡 일어나 소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미의 얼굴은 막대기로 민 반죽처럼 순식간에 매끈해졌다.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소라는 제게 내밀어진 화려한 손을 보다 어색하게 그녀와 악수했다.
“저는 모델 겸 배우 이새미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둘은 무슨 사이신지.”
“아, 저희는 전 직장 동료예요.”
“어머, 그러시구나. 그 이상으로 발전할 사이는 아니신 거고.”
“그렇……죠?”
새미는 얼른 제 옆자리로 소라를 끌어당겨 앉혔다. 얼결에 자리에 앉은 소라는 새미가 주는 딸기 스무디를 받아 들었다.
“우리 윤이가 굉장한 미인분이랑 약속이 있었구나. 그런데 어쩌지.”
새미가 몹시 안타깝다는 얼굴로 윤과 소라를 번갈아 보았다. 입꼬리는 내려갔는데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윤이가 너무너무너-무 급한 일이 생겼대요.”
그러더니 윤을 돌아보며 계단을 향해 눈알을 굴렸다. 계속 가던 길 가라는 듯. 그녀의 사인을 멍하니 보던 윤이 뒤늦게 깨닫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라 씨. 정말 미안한데, 우리 다음에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이 여자, 이상해 보여도 나름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이 여자라니. 속삭이는 새미를 무시한 윤이 소라를 보며 초조한 손끝을 오므렸다.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소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급한 일이면 얼른 가 보셔야죠.”
“죄송해요. 제가 다음에 설명할게요. 제대로 밥도 사고요. 그리고 이 사람 알파니까 꼭 몸조심하고요.”
“하하. 얘가 말을 자꾸 이상하게 하네.”
윤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저 진짜 누나 믿어요. 뭔 일 나면 누나고 뭐고 없습니다.”
새미는 그의 협박에 헛웃음을 지었다.
“누나 소릴 이제야 듣네. 얼른 가 보기나 하세요. 나 모범 알파야, 몰라?”
윤이 잠시 머뭇대자 새미가 그의 허리를 밀며 “걱정하지 말고 가 봐.” 덧붙였다. 마침내 윤은 둘에게 눈인사를 하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택시를 불러 곧장 집으로 가는 동안 윤은 모자를 다시 쓰는 것도, 기사의 형질을 확인하는 것도 까먹었다. 돌계단을 뛰어 올라가 집에서 짐을 챙기고 내려오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손에 든 핸드폰을 새로 고침 했다.
윤은 자신을 기다려 주던 택시에 다시 올라탔다.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
“저…….”
윤은 말을 못 하고 입술을 벙긋대기만 했다. 거기가 어디지? 어느새 머릿속이 초토화됐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움직이려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 화면 위로 새미의 연락이 연달아 떴다.
[급하긴급한가보다]
[주소도모르면서]
[공주문화관근처같아]
[숙소위주로가봐]
[소개팅보답]
[파이팅!]
한 번에 모든 내용을 넣지 않는 비효율적인 문자 습관을 가만히 보던 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 봐야 할 범위는 이 정도면 대폭 축소된 셈이었다. 목적지를 말한 윤은 새미에게 짧게 감사를 전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윤은 대답할 것이다. 자존심 상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잊는 데 이틀이라니. 목적은? 산 채로 포획. 하지만 남남이 된 마당에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가? 하는 물음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윤도 알지 못하니까.
달리는 차 안에서 윤은 그의 차기작 대본집 <러브 리프 1화>를 꽉 움켜쥐었다. 흰 종이는 청건이 필요하대도 버려 달라고 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채였다. 하지만 그를 만났을 때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널 보러 온 게 아니라, 이걸 주러 왔다고.
공주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2시간 반 후였다. 윤은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그들이 갈 만한 프라이빗 한 장소를 리스트 업 했다. 기사님은 문자로 전송받은 건물들 주변을 쉬지 않고 돌고 있었다. 느린 속도로 운행해 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님이 크게 하품을 하곤 말했다.
“언제까지 돌아. 뭐 돈 떼먹은 놈이라도 찾아요?”
따지고 보면 돈 떼먹은 사람은 자신이라 윤은 괜스레 속이 찔렸다.
“……그것보다 더한 거요.”
차라리 돈이 낫지. 우윤은 자존심을 떼먹혔다.
“혹시 장기? 난 그런 일에 휘말리는 거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 미리 말해, 그런 거면.”
기사님은 반 진담이 담긴 말을 건네며 유턴을 준비했다.
“걱정 마세요. 불법적인 일은 아니니까.”
윤은 관계가 끝나자마자 문란한 파티에 참석한 이청건의 행태를 불법은 아닐지언정 도리는 아니라고 봤다. 아니, 적어도 둘이 ‘형 동생’ 사이 정도는 됐다면 도리까진 안 가도 의리가 없었다. 의리가.
근데 또 몰랐다. 불법적인 약을 신나게 빨고 있을지도.
“지금부터 딱 1시간만 더하고 저녁밥 좀 먹읍시다. 밥은 먹고 해야지 사람이. 그렇게 급하면 될 일도 망쳐.”
윤은 그 시간 동안 청건이 바깥에 나오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확답을 못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님이 그 모습을 백미러로 흘끔 보며 혀를 쯧 찼다.
“바람난 남친 잡는구먼?”
“아뇨, 아니에요.”
윤이 서둘러 부정했다. 자신의 형질을 오메가로 특정하고 ‘남친’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뱉는 것 같았다. 윤은 약간 불편해졌지만 기사님이 악의가 없음을 알았기에 그저 입을 다물고 바깥을 응시했다.
“바람난 것들은 가망이 없어. 진작 진작 버려야지 그쪽이 뭐가 아쉬워서.”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비슷한 상황이긴 했다. 평생 베타 하나만 바라보리라 다짐한 사람처럼 돈을 펑펑 써 대고 치댈 땐 언제고 홀랑 제 삶 찾아간 남자를 보러 온 거니까. 유럽으로 홀랑 사라져 버리기 전에.
시간은 잘도 흘렀다. 기사님이 말한 밥때가 30분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윤은 문손잡이 위에서 손가락을 초조하게 움직였다. 눈만 보이도록 창문을 열어 두고 바깥을 기민하게 주시하였다. 정말 바람난 애인이라도 잡으러 온 것 같아 기분이 썩 유쾌하진 못했다. 애써 시트에 편하게 기대었으나 조금씩 다리가 떨렸다. 손으로 잡아 뜯어 놨던 입술이 따끔거렸다.
“……어.”
윤은 순간 몸을 똑바로 세우며 문고리를 붙잡았다.
“뭐야, 찾았어?”
“네. 그런 것 같아요. 근처에 세워 주세요.”
지루함에 녹아내렸던 기사님 또한 다시 신경을 곤두세운 채 바로 근처에 차를 댔다. 기사님이 시동과 내부의 불빛을 끄니 더욱 긴장감이 감돌았다. 둘은 현장 급습이라도 할 기세인 형사처럼 숨을 죽였다.
장소는 윤이 찾아 둔 리스트 중 한 곳이었다. 야외까지 연결된 별채 기와 숙소라 바깥에 서넛이 모여 담배를 태우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름 가린다고 각자 어두운 옷을 챙겨 입은 모양인데, 얼굴이 보이는 이상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오라였다.
윤은 아까 연예 뉴스에서 본 낯익은 얼굴들 사이로 우뚝 선 남색 머리를 바라보았다. 다들 너구리 굴에 갇혀 있는데 청건만 양손에 이온 음료와 딸기 우유를 하나씩 든 채였다. 우유를 마시다 살짝 비틀대는 모습을 보니 또 주량을 넘긴 듯했다.
“딱 봐도 연예인들이네. 저 중에 내 님이 있나?”
기사님이 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대며 관찰하고 있는데 그들은 별다른 행동이 없었다. 다들 조용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윤은 창문을 끝까지 내려 대화 내용을 들으려 애썼다. 그러나 도로를 끼고 떨어져 있어 들릴 리가 만무했다.
가까이 가 볼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청건의 차가 그들 앞으로 섰다. 시동을 켜 둔 차에선 밤톨 머리 남자가 내렸다. 그는 곧장 무리로 다가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려서 덮칠까, 싶던 순간이었다. 윤이 열린 창을 한 손으로 턱 붙잡았다. 한 여자가 청건의 팔을 붙잡고 대뜸 볼에 입을 맞춘 순간이었다.
“……미친 건가?”
윤이 넋을 놓은 채 중얼댔다. 기사님도 동의하는지 혀를 끌끌 찼다. 택시 손잡이를 부술 듯 쥔 탓에 뒷문이 달칵 열렸다. 문이 열린 참에 현장 급습 후 이청건 포획, 알파 베타 척살을 순식간에 계획했으나 아무래도 한발 늦은 것 같았다. 다 마신 딸기 우유 팩을 꽉 눌러 접은 청건이 곧바로 차에 올랐다. 차는 금세 문제의 장소를 떠나 버렸다. 아무것도 못 하고 시간만 낭비한 우윤을 놔두고.
윤은 허탈한 얼굴로 온몸에 힘을 풀었다. 인터넷으로 청건의 소식을 찾아보았지만 더 이상의 내용은 올라오지 않았다.
“문 닫어.”
“……네.”
열린 뒷문을 닫으니 그 순간 제 처지가 확 실감됐다. 현타 그 이상의 감정이었다. <혀 설>의 베드 신을 보며 자위를 했을 때만큼 커다란 상실감이었다.
“밥이나 먹을텨?”
기사님이 물었다. 벌써 시동을 거는 기사님에 윤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택시가 다시 달동네에 도착한 때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이게 맞나. 윤은 하루를 통째로 날린 것이 언짢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자신보다도 더 고생한 사람은 기사님이었다. 원래보다 더 많은 금액을 입금하니 그는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완고한 윤의 태도에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음 아프게 하는 것들은 봐주지 말고 조져 놓으라고. 그렇게 아무한테 볼따구를 내주는 게 말이야 뭐야?”
그는 계속해서 청건과 윤을 싸운 연인쯤으로 착각했으나 윤은 딱히 변명하지 않았다. 내내 자신의 기분을 살펴 준 친절한 기사님이었으므로.
곧 택시가 떠났다. 한참 계단을 오르던 윤은 아까의 뜀박질 탓인지 무거워진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촬영지와 옥탑이 한 눈에 보였다.
택시에서 내릴 무렵에야 기사님이 알파 형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윤은 줄곧 번식에 주목적을 둔 알파들을 증오했다. 그러나 일부. 아주 일부의 알파는 그 공식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직접 한 경험으로.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은 달랐다. 검증된 알파는 이제야 두 명이었지만.
‘안녕하세요. 혹시 근처 사세요?’
그 첫 번째는, 이청건이었다.
‘하늘 좀 보려 했더니 그쪽 손이 먼저 보여서요.’
사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원하던 끝이 온 것뿐이다. 그러나 후련하지가 않았다. 남이 둘 사이를 헤어진 연인으로 착각할 만큼 미련스러웠다.
‘객관적으로 저게 스토커지 제가 스토커는 아니지 않겠어요?’
어째서일까.
윤은 지금껏 했던 두 번의 연애가 생각났다. 끝이 왔음에 후련했고, 미련이 남지 않았던.
비밀을 품고 있는 이상 안정적인 연애는 불가능했다. 집에 할머님이 주무시고 계셔서. 어머니가 사람 들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서. 아버지가 엄하셔서. 작은 거짓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럴듯한 변명을 짜내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상대에게 더 주지 못해 끝내 이별을 통보받는 것. 피크라고 할 것도 없이 쉽게 시작해서 미적지근하게 끝나 버리는 것. 그게 우윤의 연애였다.
‘가 볼게요. 또 얼쩡거리는 놈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가까이에 있으면 올게요.’
그런데 이청건은 왜일까.
잔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돌처럼 너무 극적인 사람이라? 애초에 자신이 알파를 피해 다닌다는 걸 들키고 시작한 최초의 사람이라? 조용히, 세상에 스며들어 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서? 나는 그래서 아쉬운가?
핸드폰을 꽉 쥐고 있는 윤의 머리 위로 가로등이 전기를 튀겼다. 깜박깜박. 그러다가 툭, 소리를 내며 퓨즈가 터졌다.
컴컴해진 계단에 서 있던 윤은 대본집을 꽉 끌어안고 뒤를 돌았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한 그의 갈색 머리는 조급한 만큼 빠르게 흔들렸다.
이청건은 왜 이렇게 산더미 같은가. 어떤 말이 오더라도 이 물음에 적합한 답이 아니었다. 전부 거짓말 같았고, 모두 핑계거리 같았다. 당신을 좋아하게 됐다는 말. 그 말 외에는 그 무엇도 답이 될 수 없었다.
* * *
‘베타 파티’ 주최자 민정의 계획하에 2박으로 구성된 여행은 막 첫 번째 오후를 지나는 중이었다.
오전부터 지금까지 별채에 딸린 풀장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미친 듯 수영을 해 대던 청건 외 6명은 이제 바다에 온 기분을 내겠다며 해산물을 잔뜩 요리해 좌식 테이블 비닐 위에 깔아 두었다. 수준급의 요리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인지 맛을 볼 때마다 탄성이 터졌다. 이 또한 깊은 생각에 잠긴 청건은 제외였지만.
‘컷 오케이.’
그날이었다. 윤을 처음 본 날.
커다란 목소리 뒤로 배우들이 모니터 앞으로 모였다. 감정 소모가 많은 신이라 청건은 방금의 연기를 확인하면서도 턱 끝에서 땀이 떨어졌다.
감독과 배우들이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끄덕이자 촬영장 곳곳에서 힘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달리기처럼 진행되던 촬영이 막바지에 달하니 지친 기색들이 역력했다.
누군가 건네는 손수건으로 땀을 대충 닦아 낸 청건이 촬영장 옆 벤치에 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머리를 쓸어 올리던 그는 순간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이 닿은 곳에서 무언가에 놀란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바닥에 널브러진 자전거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넘어진 여자가 땅을 짚었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온통 까맣게 입은 남자만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표정인 남자는 여자를 일으키고 자전거를 세워 주었다. 그리고 감사 인사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도착한 버스에 뛰어올랐다.
그편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청건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가벼운 나뭇잎들이 바람에 따라 휘날렸다. 푸른 나뭇잎들이 날아오는 걸 보던 청건이 오른손을 뻗어 주먹 쥐었다. 손을 펼쳐 보면 나뭇잎 하나가 잡혀 있었다. 잎은 바람에 들썩이다 다시 허공으로 날아갔다.
첫인상은, 바른 사람이었다.
‘용건이 뭔데요. 다른 사람 알아보시죠.’
‘그쪽도 내가 좋냐고요.’
두 번째 본 날엔, 그의 해피엔드가 궁금해졌다. 그의 피가 묻은 손을 찬물로 닦아 내며 든 생각이었다.
윤은 상처가 많은지 예민하고 방어적이었다. 고집도 있고, 웃는 모습은 쉬이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숨지 않았다.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남을 도왔고, 마땅히 잘못된 일엔 화를 내었고, 독립적이었다. 도통 기대지를 않는 만큼 더 욕심이 생겼다. 제 손을 타게 만들고 싶었다. 가끔은 힘을 빼고 기대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셔츠 자락을 잡아당기던 하얀 손이 반가웠다. 답답함을 핑계로 이름을 알려 주거나, 의심을 하면서도 믿어 보고 싶어 집 초대에 응하는 등 경계심을 허무는 순간이 사랑스러웠다.
사실 그와 깊은 사이가 되기로 결심했었다면 더 섬세한 전략을 세워야 마땅했다.
청건은 오래전 보았던 영화 속 주인공이 그랬듯, 대부호가 경마장 2번 말에 크게 베팅할 수 있도록 그가 경마장까지 가는 길마다 숫자 2를 은연중에 깔아 놓는 등의 은밀한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또는 인맥을 동원하여 우윤과 자신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을 내 윤에게까지 닿게 하는 등 필요하다면 미친 짓도 각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윤은 예민하게 다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청건은 티 나는 전략 없이,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그를 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대혁의 승리였다. 의도적으로 꼬시는 내공이 바닥이라 윤에게 능숙하게 들이대지 못한 이유도 있을 테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그가 알파를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청건은 적정선에서 물러났다. 오랫동안 알파로 인해 힘들어해 온 그를 설득하는 행동들이 외려 반감을 사거나 불쾌한 기분을 더 부추길까 걱정이 되었다.
친구들의 닦달에 해물 수프와 옥수수를 깨작거리던 청건은 그 후 2차로 벌어진 술 찌질이들의 음주 파티에서 빈 컵만 굴리며 혼탁한 눈을 깜박였다. 개중 그나마 술을 좋아하는 송이가 청건의 빈 위스키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술 몇 모금에 전신이 불그죽죽해진 하민호가 넋 놓은 청건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결국 술을 마시기도 전에 식탁 위로 엎어지려는 청건의 뒷덜미를 민정이 낚아채 세웠다.
“남는 건 뭐다? 사진이다.”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은 베타는 넷, 알파는 셋이었다. 하나같이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들이었다. 데뷔 전부터 친구인 사이도 있었고, 사촌 지간도 있었으며 민정과 청건처럼 오래된 동료인 경우도 있었다. 그동안은 두셋씩 뭉치다가 처음으로 일곱이 모인 자리였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놀아. 오랜만에 봤는데 물 흐려서 미안하다.”
“흐린 건 아나 보네. 흙탕물 됐어, 지금.”
“우리 불쌍한 청건이.”
사과를 하는 청건에게 요석이 괜히 면박을 주고, 감수성 풍부한 연수는 장난 반으로 울먹였다. 송이가 위스키 잔을 빙빙 돌리다 말했다.
“설마 상대가 남자 아니야? 이렇게까지 힘들 이유가 뭐야.”
그에 세희가 맞장구쳤다. 어머. 혹시 오메가 아닐까?
그들은 자신들끼리 결론을 내고는 수다에 불을 붙였다. 그동안 민정은 전원이 나간 제 핸드폰을 바닥에 두고 청건의 것을 들어 시범 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플래시가 터지며 청건의 얼굴이 찍혔다. 마침내 필터를 고른 민정이 모두에게 잔을 모을 것을 권했다.
청춘은 바로 지금이라며 소리를 꽥꽥 지르던 민정이 일곱의 술잔을 찍었다. 사진을 같이 찍지 않으면 혼이 나갈 때까지 괴롭히는 탓에 모두 순순히 동조한 후 술을 홀짝였다.
그러던 중 촬영을 끝낸 민정이 손에 쥔 청건의 핸드폰을 제 것이라 착각하여 청건의 계정에 사진 하나를 올렸다. 사진을 두 장 선택한 것도 알지 못했다. 과일 맥주 한 캔 추가에 결국 만취를 한 탓이었다.
“이거 청건이 거 아니냐?”
민정이 만지는 핸드폰 화면을 함께 보던 요석이 말했다. 눈을 게슴츠레 떴던 민정이 화들짝 놀라 턱을 쩍 벌렸다.
“그래. 네가 사고를 안 치면 임민정이 아니지.”
요석이 그녀의 머리를 마구 흩트렸다. 청건이 핸드폰을 가져가 보곤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잘됐어. 뭐 숨길 게 있다고.”
원래 연예계는 다른 형질끼리 모이면 파장이 컸다. 하지만 동종업계 모임 그 이상은 아닌 만남을 굳이 쉬쉬할 필요는 없었다.
울상을 짓던 민정이 여전히 차분한 청건을 바라보더니 다시 핸드폰을 가져갔다.
“킁, 나 남친한테 잠깐 문자만 할게.”
제 실수를 반성하며 조용히 문자 창만 뒤적이던 민정은 유독 눈에 띄는 글에 뿌연 시선을 고정했다.
카드 승인…… 승인 일시, 누적 금액…….
“너 돈을 왜 이렇게 많이 썼냐?”
그에 궁금한지 민호도 몸을 쭉 빼고는 청건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6천 2백?”
민호가 소리를 지르자 시선이 쏠렸다. 대단한 수입을 자랑하는 그들에겐 큰돈이 아니었지만 청건의 지출이 6천 2백이라면 말이 달랐다.
“집도 겨우 사더니. 혹시 차 바꿨어?”
“아니. 누구 뭐 좀 사 주느라…….”
“어머머.”
“세상에.”
호구라느니, 연애할 때 이랬어야 정상이라느니, 이번에야말로 임자를 만났다느니 수다스러운 동갑내기 사이에서 청건은 침묵하며 위스키를 뒤늦게 한 모금 마셨다. 사실 현금을 포함하면 그보다 한참 많기야 했다. 요석은 풀이 죽어 있는 청건의 머리를 쓱쓱 쓸어 주었다.
곧 대화 주제가 바뀌자 청건은 마음 편히 슬라이드 통창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풀장 앞 선 베드에 앉아 위스키 잔을 유리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해가 저무는 오후의 하늘 아래에서 답답한 속을 애써 갈무리했다.
잠깐 눈을 붙일까 했으나, 피곤함이 극에 달했을지언정 우윤을 떠올리는 머리는 셔터를 내리는 법이 없었다. 화가 나면 들려주던 반말이 그리웠고, 한 프레임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두 번의 키스가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아무것도 안 해도 마음을 주는 사람들로 넘쳐나던 세계가 뒤집어진 것 같았다. 다른 이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 왔기에 무심히 지나쳤던 이들에게 사과라도 해야 할 성싶었다.
청건은 가만히 눈을 감고 윤의 집에서 지냈던 날을 떠올렸다.
윤이 베어 준 베개 끝을 만지작대다 눈을 떴었다. 한참 부스럭대던 윤은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고, 시간은 새벽 6시 10분이었다.
침대 위에 조용히 상체를 기댄 청건은 제 두 손에 턱을 대고 한참 동안 윤을 관찰했다. 새벽빛에 물든 코를 검지로 톡 두드리자 콧잔등을 찡그리던 윤은 곧 규칙적으로 숨을 골랐다.
청건은 윤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천천히 매만졌다. 꼭 다문 입술 위에 키스하고 싶었다. 애써 시선을 내린 청건은 키스 대신에 그의 왼팔을 끌어와 상처가 남은 손목과 손바닥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등까지 꼼꼼히 뜯어보던 청건은 결국 그 위로 짧게 키스했다.
혹시라도 그가 깼을까 침을 삼켜 내며 살짝 눈치를 보았다. 윤은 여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회상을 마친 청건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윤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청건은 제 커리어에 영향을 주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관계를 좋아했었다. 어떤 관계든 물처럼 흘려보내는 게 안전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그가 좋아졌을까.
청건이 풀장으로 나온 지 30분은 되었을까. 야외로 슬그머니 나온 알파 둘이 주변에 있는 선 베드를 하나씩 차지했다. 청건의 한쪽 눈이 슬쩍 들렸다. 요석과 민호였다. 들고 온 담뱃갑은 열 생각이 없고 입만 다시고 있는 걸 보니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다.
“물 더 흐려도 되니까 걱정 좀 덜어라.”
천요석이 지포 라이터를 칙칙 돌리다 말했다. 그러나 통 고민을 공유하지 않는 입 무거운 청건은 팔짱을 낀 채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우리 일엔 두 팔 걷고 나서면서 우린 도와줄 틈을 안 주냐.”
“……서운하냐.”
“당근이지.”
입을 비죽 내밀던 민호가 선 베드에 벌렁 기대며 말했다.
”애인이랑 틀어져도 멀쩡하던 놈이 많-이 변했다.
“아서라. 예비 형수님이 목석같던 놈을 드디어 사람 만든 거니까.”
그들의 푸념 섞인 대화에 청건이 힘없이 코웃음을 지었다.
“헛소리할 거면 가라.”
청건이 하늘만 한없이 보고 있자 결국 민호는 담배를 하나 물고 불을 붙였다. 옆에서 담배를 물고 기다리는 요석에게도 라이터를 들이밀었다. 차례로 뱉어 낸 연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다 청건을 와락 덮쳤다. 청건은 콧속을 파고드는 연기에 손을 휘젓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테이블에 둔 위스키를 원샷 하곤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야겠다.”
요석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너 진짜 금연 성공했어?”
“응.”
금연에도 우윤이 영향을 끼쳤느냐 묻는 것이었다. 청건은 그 물음이 뜻하는 바를 알았지만 말을 줄이곤 발을 옮겼다.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빤 요석이 옆머리를 긁다가 민호에게 눈짓했다.
“그냥 가려나 본데.”
“아무래도.”
둘은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청건을 따라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청건은 빌려 입었던 옷을 벗고 제 와이셔츠를 걸쳐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요주의 인물 가신단다.”
요석이 공표하자 자리에 엎어져 있던 그들이 하나같이 청건을 바라봤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야유와 회유에 청건이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 요석의 어깨를 쳤다.
“좀. 조용히 갈라니까.”
그러면서도 외투를 집는 청건을 보며 요석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언제 또 모일 줄 알고.”
“미안하다. 머리가 복잡해서. 개인적으로라도 조만간 보자.”
멀리서 크로칸슈를 목구멍까지 넣고 씹던 세희가 청건을 보며 웅얼거렸다.
“빵 즘 먹고 가. 맛있어.”
후식으로 빵을 몇 개나 집어 먹은 건지 대식가인 연수와 세희 주변이 난장판이었다. 머리가 부스스한 세희에게 청건은 대충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너 많이 먹어라. 간다.”
“어야.”
“가. 연락해.”
그들은 다시 음식에 집중하느라 정수리만 보여 주며 대꾸했다. 청건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몸을 틀었다. 충전기가 있는 구석에서 남자 친구와의 전화에 전념하던 민정이 얼른 통화를 끊고 청건에게 다가왔다.
“윤 씨한테 가게?”
청건이 식탁에 널브러진 짐을 보스턴백에 하나하나 챙기며 고개를 저었다.
“못 가 이제.”
“왜?”
“끝났으니까.”
“뭐?! 그냥 냉전 아니었어?”
민정이 크게 되묻자 짐을 챙기던 청건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숨을 깊이 내쉰 청건은 마지막으로 챙긴 짐을 끝으로 지퍼를 닫았다.
“알아 가는 단계는, 한번 틀어지면 기회가 없더라.”
다 털어놓지 않고 어느 정도만 인정했을 뿐인데 마음이 심해로 가라앉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집어 든 그가 재킷을 팔에 걸치고 가방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냉장고에서 딸기 우유를 챙긴 후 밖으로 나섰다. 어미 새를 따르듯 그를 쫓아 줄줄이 나오는 셋은 청건 보다 더 죽상이었다.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청건은 결국 바람이 새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제 일처럼 입술을 비틀고 있던 민정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 또 있겠지. 너 좋다는 사람 많잖아.”
그 말에 침묵하던 청건이 작게 고개 저었다.
“못 해 이제.”
“…….”
“자꾸 해 오는 고백이 귀찮아서, 가끔 외로워서, 뒤탈 없는 사람이라……,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거 이제 그만하고 싶어.”
청건의 말에 민정의 눈이 점차 작아졌다. 얘 진짜 진지하네. 혼잣말을 읊조리던 그녀가 입술을 내밀며 침묵했다. 청건은 딸기 음료를 몇 모금 마시고는 말을 꺼냈다.
“……기억하지. 내가 서울 오고도 한참 날 세우고 살던 거. 그 사람도 그랬어.”
“…….”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세상엔 의지할 만한 곳이 꽤 많다고, 처음엔 그냥 알려 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유가 너무 많아졌어. 정해진 틀에만 맞춰 살 것 같은데 가끔 허술한 것도 좋고. 비밀이면서 다 들키는 것도 좋고. 겁은 많으면서 웬만큼 귀찮게 굴면 곁을 내주는 것도 좋고.”
청건의 긴 고백이 생각에 잠긴 세 사람의 사이를 떠돌았다. 그들 머리 위로 어슴푸레 저녁이 깔렸다.
낭만이 과하네. 민정이 먼저 침묵을 깼다. 청건이 머쓱한 얼굴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웃기다.”
누가 웃기대. 웃길 것도 없다. 요석과 민호가 그를 두둔했다. 입맛만 쩝, 다신 민정이 중얼댔다.
“뭐…… 응원할게.”
“……나한테 뭐 뜯어 갔냐?”
청건이 웬일로 순순히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민정을 의심스레 보는 척했다.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자 청건이 소리 없이 웃었다.
“고맙다.”
청건의 짧은 답을 끝으로 그들의 앞에 종영이 모는 차가 부드럽게 섰다. 차에서 내린 종영이 꾸벅 인사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편안하게 즐기셨습니까?”
퍽 웨이터 같은 물음에 요석이 웃음을 지으며 종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잘 지냈어요?”
요석이 묻자 종영이 눈썹을 팔자로 떨어뜨렸다.
“사실 형님이 요새 제정신이 아니시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라니…….”
청건이 그 말에 맥없이 반박하자 요석이 물었다.
“얘 다음 활동까지 쉴 시간 별로 없죠?”
그러자 종영은 남은 딸기 우유를 들이마시는 청건을 바라봤다.
“예, 곧 화보 촬영으로 유럽 가십니다. 갔다 오면 시간이 약간 빌 수도 있지만…….”
종영이 말을 얼버무렸다. 돌아온 후에는 다음 달 개봉 예정인 영화의 무대 인사와 현재 출연을 논의 중인 대형 영화에 대한 미팅이 있었지만 그 전까지는 일정이 비어 휴식이 가능했다. 다만, 지인들에게 이 일정을 들키면 청건이 오롯이 쉴 수 없을까 봐 눈치를 보는 것이다.
“아. 약속 미리 잡자는 건 아니고. 얘 좀 푹 쉬게 묶어 두시는 게 좋겠다고요.”
종영의 고민을 눈치챈 요석이 그를 안심시켰다.
“얘들이 그것도 이해 못 해 줄까.”
“이해 못 할 뻔했는데, 사연이 절절해서 봐주는 거야.”
민호의 퉁명스러운 말에 청건이 씩 웃었다. 요석과 민호의 머리를 마구 흩트린 청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손길을 피하며 뒷걸음쳤다.
“간다.”
“잠깐, 잠깐.”
그 순간, 민정이 대뜸 청건의 팔을 붙잡았다.
“우윤 씨가 좋아하는 옷 스타일이 뭐야? 인상착의 대 봐.”
“뭐?”
뜬금없는 물음에 청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또 뭔 짓을 하려고…….”
“내가 장난은 잘 쳐도 그동안 헛짓한 적 있냐?”
청건이 그 말에 인상을 작게 찌푸리며 그녀가 흘끔대는 곳으로 몸을 비틀자 민정이 그의 몸을 똑바로 돌렸다.
“내가 맞춰 볼까?”
“…….”
“고양이 상. 검은 폴라. 검은 후드. 완전 길쭉한 손가락. 맞지, 맞지?”
그녀는 들뜬 채 속삭이며 어깨를 부딪쳐 왔다. 청건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아냐?”
“아니 뭐.”
“변명 잘 해. 10년 우정 10초 만에 끝나기 싫으면.”
“질투는. 야, 내 별명이 뭐야. 매의 눈깔 아니냐. 작품을 고르는 매서운 눈깔!”
“…….”
“또, 한 시력 한다 이거지.”
청건은 의문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싱글대는 그녀를 바라봤다. 곧이어 청건의 어깨를 꽉 붙잡은 그녀가 폴짝 뛰듯이 다가와 그의 볼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청건이 기겁을 하며 딸기 우유 팩을 구겼다.
“야이, 씨. 미쳤어?”
“민, 민정 씨!”
“야, 술 많이 마셨냐?”
“단단히 취했네. 끌어내.”
나머지 셋도 질색을 했다. 요석은 방금 청건의 절절한 고백을 다 들어 놓고는 미친 짓을 하는 민정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었다.
“걸핏하면 취했대. 아니거든!”
뒷덜미를 잡힌 채 민정이 반항하자 요석과 민호가 결국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넌 나한테 고마워하는 날이 올 거야.” 그녀는 끌려가는 중에도 청건을 향해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곱게 미쳐야지. 쟤가…….”
민정을 향해 이를 갈던 청건은 상심한 저를 달래는 종영에 의해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힘없이 보스턴백을 내려 두고 문을 닫았다. 백미러로 청건을 살피며 눈치를 보던 종영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민정 씨가 많이 취하신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소름 가라앉히고 있으니까 언급 금지야.”
“옙.”
종영은 얼른 벨트를 매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휴지를 뜯어 볼을 닦아 내던 청건도 이내 벨트를 찼다. 하여튼 복잡한 머리 더 시끄럽게 하는 덴 저 녀석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고마워 죽겠네. 청건의 실소 뒤로 종영의 운전이 시작됐다.
* * *
혹시나 해서 간 청건의 집엔 불이 켜져 있었다. 충동적으로 집을 찾아온 패기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입술만 씹던 윤은 초인종 위로 손을 갖다 대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공주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것도, 종일 청건의 생각에 파묻혔던 것도 단 하나의 사실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만, 고백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이가 틀어진 지금에 와서…….
마음을 늦게 깨달은 제가 야속했다. 그는 초인종을 누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열심히 시뮬레이션 했다. 끝난 사이에 왜 온 거냔 소리를 들으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대본집을 꽉 틀어쥔 윤은 아까 본 장면을 되풀이했다. 화려하게 생긴 긴 생머리의 여자가, 이청건의 볼 위에 키스하는 모습.
그때 거실 창을 덮은 얇은 커튼 너머로 청건의 실루엣이 보였다. 순간 훅 심장이 내려앉았다. 마른세수를 한 윤은 떨리는 손을 다시 들었다. 이미 청건이 다 들쑤셔 놓은 마음은 컨트롤 가능 범위 밖에 있었다. 초인종 버튼을 비껴간 손이 곧바로 인식 센서로 향했다. 엄지를 대고 누르니 정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미 끝난 사이라면, 무단 침입인가? 이렇게 되면 초반에 청건을 스토커로 오해하던 때와 상황이 뒤바뀌게 될 수 있었다.
윤은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말끔하게 관리된 정원을 가로질렀다. 불안할 때마다 찾던 파란 병이 그리웠다. 다만 그보다 더 그리운 것은 따로 있었다. 현관 앞에 도착한 윤은 부들대는 손끝으로 도어 록을 쓸었다. 뒷일은 이제 모르겠다.
99999999. 띠리릭-. 짧은 도어 록 해제음을 듣던 그가 결연하게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쿵쿵쿵. 심장은 감당 못 할 만치 떨렸다. 처음 키스를 나눈 옥탑에서처럼. 윤은 뒤에서 찰칵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쿵쿵. 쿵쿵. 쿵쿵.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열차가 몸 안을 가로지르는 것만 같았다.
영화 속의 낯선 이청건. 모르는 여자에게 키스를 받는 이청건. 자신은 모를 목적지에 도착해 파티를 즐기는 이청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윤을 좋아하던 이청건. 함부로 부적을 떼고, 약을 버려 가며 자신을 챙기고, 제게 와인과 소주 향이 섞인 키스를 하는 이청건이 훨씬 좋았다.
거실 소파에 청건이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옆모습은 조금 지친 것 같기도,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남색 생머리. 견고히 닫혀 있는 눈꺼풀. 직선으로 내려간 속눈썹. 군더더기 없는 민낯. 마지막으로 시선이 붙은 곳은 물기 없이 마른 입술이었다. 가볍게 물면 속살이 부드럽게 들려 나오던 입술.
“……형.”
작은 목소리에 청건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윤은 전신을 관통하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그를 마주 봤다. 눈을 마주친 둘 사이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윤은 그리웠던 저 얼굴을 핥아 보고 싶다는 미친 생각을 하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
청건의 뒤로 보이는 알전구가 포근한 빛을 냈다. 고작 그 빛에도 눈이 시렸다. 윤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다음 대사를 더듬었다.
“아마, 내일도 보고 싶을 거예요.”
“…….”
“내가 아홉 번을 더 그랬던 것처럼.”
종일 청건의 생각만 떠오르는 것은 천국임과 동시에 지옥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태풍의 눈에 머물던 윤은 고작 그가 사라진 이틀 만에 중심을 잃고 세찬 바람 속으로 휩쓸렸다.
윤은 조용한 주변에 가슴 안쪽이 따가웠다. 오랜 고요를 깨고 청건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조명을 등진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고백하는 거예요, 지금?”
가까이에 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윤은 잔뜩 긴장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러브 리프>의 1화, 주인공 초연의 고백 신이었다. 초연은 죽음 이후 신으로부터 10일의 유예 기간을 받는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 줄 사람을 찾아야 했고, 그녀는 그 여정의 첫날,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다.
“초연으로서?”
“……우윤으로서요.”
윤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젠 숨길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바로 앞에 선 청건의 표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식은땀이 났다. 이젠 자신의 모든 것이 성가신 걸까. 이틀 전이었다면, 나도 보고 싶었다고 바로 말해 주지 않았을까. 내가 예쁘다 했으면서, 이젠 내가 보기도 싫은가? 마음속에서 처량한 물음이 들끓었다.
“2화 내용도 미리 알고 싶어서요.”
“…….”
“방영일까지 못 기다릴 것 같아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윤은 자책했다. 나체가 된 것처럼 부끄러웠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청건의 눈치를 보는 빈도가 늘어났다. 폐역사를 빠져나가던 청건은, 거기서 정말 모든 걸 포기한 걸까. 물살을 거스를 각오를 하고 온 것이 다 소용없는 일이었을까.
엉켜 버린 머리로 다음 말을 골라내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네?”
“또 뭐 때문에 왔는데요?”
청건이 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문득 그의 눈 안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는 걸 발견했다. 윤은 입을 벙긋대며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어서 그를 설득하지 않으면, 저 조그만 불씨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형이라…… 불러 보고 싶어서요.”
“또?”
작게 속삭인 청건은 손을 뻗어 윤의 허리를 살짝 끌어당겼다. 윤은 살짝 휘청이며 그의 발끝을 밟았다. 흔들리는 눈을 청건의 입술에 고정했다. 봄꽃이 피어오르는 듯 점차 올라가는 청건의 입꼬리가 꿈만 같았다.
“……밖에서…… 같이 밥도 먹고 싶고. 반말도 듣고 싶고, 보조개도 다시 보고 싶고…….”
청건의 입술이 윤의 목 티 위로 가볍게 붙었다 떨어졌다. 옷 위로 하는 키스일 뿐인데, 긴장한 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늘 그랬듯 땀방울이 솟고, 열이 났다. 완전히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청건이 이제 원래와 같이 다정하게 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문 윤은 손에 쥐고 있던 대본집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뜨렸다.
“좋아해서요.”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밖에 답이 없어요.”
“…….”
“형도, 아직 내가 좋아요?”
윤이 애타는 눈으로 청건을 응시했다. 손을 들어 그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사는 내내 누구 때문에 불행했는데. 평생을 알파에 휘둘려 살아 놓고, 피하려고 그렇게 갖은 애를 써 놓고,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죄악감은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윤을 괴롭혔다. 그러나 윤은 그 감정을 묵살하고 싶었다. 유난스러운 놈, 예민한 놈, 부모 없는 불쌍한 놈, 함부로 대해도 되는 연약한 놈. 이따위 하잘것없는 말로 윤을 정의하였던 알파들과 이청건은 분명히 달랐다. 과거를 보듬듯 손목을 어루만지고, 조그만 자극에도 부서질까 사과하고, 솔직했고,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의 우윤을 바랐다. 그래서 그는 알파가 아니었다. 그냥 이청건이었다.
청건은 숨을 깊이 내쉬다 윤의 목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계속 좋아했어요. 나는 포기한 적 없어.”
“…….”
청건은 윤의 허리를 더욱 끌어안으며 고개를 비볐다. 윤은 청건의 옆얼굴에 손끝을 대었다. 선로 위에서 그가 그랬듯이, 차마 만지기가 아깝고, 깨어질까 두려운 마음으로. 스치듯이 그를 만졌다. 이런 마음이었다니.
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살갗이 찌르르 떨렸다. 청건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나 모른 척 그만하고 싶어.”
“…….”
“허락해 줘, 윤아.”
‘모른 척해 줄게요.’
청건은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호감일 리 없다고 부정하던 자신의 진짜 마음을. 윤은 더 이상 파도치는 마음을 참아 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몸과 이성은 언젠가부터 한 팀이 아니었다. 청건과 가까이 붙어 있게 된 것만으로 전신이 저릿저릿했다.
윤은 조금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청건의 허리를 성마르게 끌어당겼다. 맞닿아 오는 아래가 마찬가지로 부풀어 있었다.
“……자위했어요. 형 나오는 영화 보면서.”
“…….”
“난 진짜 망했어.”
윤은 청건의 얼굴을 양손 안에 가두며 입술을 포개었다. 자연히 발뒤꿈치가 들리며 무게가 청건에게 실렸다. 하늘을 향해 빨갛게 터져 버린 신호탄을 본 양, 청건은 지체 없이 윤의 후드를 젖혔다. 윤은 금세 상황이 역전된 키스를 받아 내며 뒷걸음쳤다.
바닥으로 떨어진 집업과 대본집이 둘의 발에 밟혔다. 청건은 자신의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고 벗으며 윤의 혀를 빨아 당겼다. 고개를 비틀며 윤을 탐하는 그의 맨등이 꿈틀거렸다. 청건의 목에 매달리듯 키스를 이어 가던 윤이 통창에 등을 부딪쳤다. 평상에서 했던 키스는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에선 두 번의 자위와 두 번의 키스, <혀 설>의 정사 신이 난잡하게 떠돌아다녔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로 벅찬 숨이 터졌다. 청건은 그 틈에 윤의 상의를 전부 벗겼다. 그리고 곧바로 부푼 중심을 손으로 쓸어 왔다. 바지 위로 느껴지는 압력에 윤이 한쪽 눈을 살포시 찡그렸다.
윤은 젖은 숨을 내쉬며 커튼 위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를 바라보던 청건이 흥분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침실로 갈까?”
흥분이 섞인 청건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더욱 낮았다. 윤은 다른 이들에게만 들려주던 반말을 듣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께가 지글지글 끓었다.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청건의 배 위로 손을 뻗었다. 이전에 그의 몸을 본 후로 줄곧 만지고 싶었다. 윤은 검지 끝으로 근육 사이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여기서 할래요.”
“…….”
“형이 여길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났으면 좋겠어요.”
“……이미 넘치게 그래.”
청건은 이내 손을 움직여 그의 바지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윤은 갑작스러운 강한 자극에 숨을 잠시 참았다가 뱉어 냈다. 청건이 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속옷 위를 문지르자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다시금 입을 맞춰 왔다. 그 와중에도 아래를 매만지는 손길에 윤의 어깨가 약하게 떨렸다. 입술이 짧게 부딪치고 떨어지기를 여러 번. 윤은 아쉬운 마음에 청건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그의 입술을 빈틈없이 물었다. 커튼을 걷어 낸 유리창 앞일지라도 당장 그와 몸을 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청건은 윤의 목선을 따라 키스하며 몸을 굽혔다. 가슴 사이를 따라 얇은 피부를 빨던 입술이 결국 유륜에 닿았다. 이를 세워 짧게 깨무는 애무에 윤의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속옷 위를 만지는 손에 속도가 붙자 바지가 자꾸만 걸렸다. 청건은 거추장스러운 윤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잠깐 떨어진 손에도 윤은 재촉하듯 그의 팔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더 세게 해 주세요…… 형.”
창문 위에 늘어지듯 기대어 선 윤이 녹진한 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발기한 성기는 조금 내려간 속옷 밖으로 반쯤 나와 있었다.
흐트러진 윤을 천천히 관찰하던 청건이 손을 뻗어 윤의 귀두를 훑었다. 그는 움찔 떠는 윤을 살피다 액으로 젖은 제 손을 한 번 쥐어 보았다. 진득하게 늘어나는 흰 액을 보며 아랫입술을 축이던 청건이 고개를 들었다. 윤이 보았던 모습 중 가장 사나운 얼굴이었다.
“……해 보고 싶은 게 생겼어.”
이내 청건은 윤의 손목을 붙잡아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의 얼굴에는 급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흥분에 젖은 윤이 넘어질까 보폭을 빠르게 하진 않았다. 윤은 앞서 걷는 청건의 단단한 등 근육에 몸을 묻고 싶었다. 남자가, 게다가 알파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흥분하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방금까지 자신을 만지느라 젖은 손바닥이 제 손목을 쥐고 있다는 사실에 등줄기가 아찔해졌다.
청건이 그를 이끈 곳은 침실이었다. 짙은 푸른색 침대를 훑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윤이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청건은 그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그의 뒤에 붙어 아무렇지도 않게 목덜미를 깨물었다. 목을 방어하듯 감싸 쥔 윤이 이제는 제 날개 뼈 부근을 잘근대는 청건에 의해 앞으로 밀려갔다.
“도대체, 이런 게 집에 왜 있어요?”
청건은 윤의 양어깨를 잡고 벽 한쪽을 가득 채운 거울 앞에 세웠다. 침실이 대칭으로 하나 더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거울 앞에서 윤은 터질 듯 부푼 제 성기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낯 뜨거워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자, 청건이 그의 볼 위로 키스해 정면을 보도록 했다.
결국 둘은 거울을 통해 눈을 마주쳤다. 윤의 시선에 맞춰 몸을 약간 숙이고 있던 청건이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윤은 덫에 걸려든 사냥감처럼 숨을 참았다. 평소 호선을 그리던 부드러운 눈매가 오늘따라 야하기 그지없었다. 친절한 이청건, 맨바닥도 마다하지 않고 누워 우윤을 지키려 들던 이청건. 가끔은 어린애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던 이청건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오늘은 다른 용도로 써 보고 싶어.”
그러나 목소리만은 언제나 그랬듯 귀를 녹일 듯 감미로웠다.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말은 지금까지는 이런 용도로 써 본 적 없다는 소리로 들렸으니까. 고민을 끝낸 것을 알아차린 건지, 청건이 윤의 검은 속옷을 허벅지까지 단숨에 내렸다.
고환과 발기한 기둥을 매만지고는 음모까지 손가락으로 진득하게 쓸어 올린 청건이 거울로 눈을 마주친 채 윤의 어깨를 붉은 혀로 핥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우성 알파의 색기에 잡아먹힌다는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를 통감했다. 주도권은 이미 자신이 전부 쥐고 있으면서도, 청건은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성기 주변만 매만지며 윤을 애태우고 있었다.
윤은 알파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 걸 알면서도, 당장 그가 제 맨살을 터질 만큼 쥐고 흔들어 줬으면 하는 욕망이 일었다. 그가 빨갛게 부푼 음경을 검지로 가볍게 훑자 윤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청건의 손을 쥐었다. 거울에 비치는 생경하고 야한 광경을 애써 무시하며 그의 손을 자신의 성기로 직접 옮겨 감싸 쥐도록 했다. 제가 페로몬에 홀린 오메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빨리…… 만져 줘요.”
머뭇대며 뱉은 말에 청건은 고개를 돌려 그의 입꼬리에 짧게 키스했다. 그러곤 손에 쥔 성기를 강하게 쓸기 시작했다. 윤은 탁 터져 나오는 신음에 입술을 깨물며 청건의 어깨 위로 고개를 젖혔다. 윤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탱하던 청건이 분홍빛 유두를 함께 문질렀다.
“아……. 으, 흣……!”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채 마주하는 거울은 난생 본 적 없던 광경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윤은 제 열이 오른 얼굴을 관찰하는 남자에 온몸이 화끈거렸다. 표정도 감정도 숨길 곳이 없어 괴로울 만큼 부끄러웠다.
“가학, 성애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윤은 신음을 참으며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닌데.”
“아닌 게, 읏, 아닌데…….”
성기 끝으로 진득한 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반박하는 윤에 청건이 낮게 웃었다. 그러곤 움찔움찔 흔들리는 머리 위로 입을 맞추었다. 윤은 어쩐지 그의 보기 좋던 미소마저 오늘따라 음험해 보였다. 하지만 그 낯선 모습은 흥분을 배로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풀어진 윤의 눈이 한계를 알리듯 찡긋거렸다. 청건은 비음을 흘리는 윤을 거울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윤은 거울을 두 손으로 짚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 오해받은 김에.”
윤에게 속삭인 청건이 쥐어짜듯 기둥을 잡더니, 손바닥에 힘을 주며 엄지로 요도를 틀어막았다. 사정이 막힌 탓에 윤의 하체가 티 나게 덜덜 떨렸다.
“아읏, 으…… 손, 손 떼요.”
“계속 오해할 거예요?”
“아니요. 아뇨.”
윤이 서둘러 도리질 쳤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한 다리에 겨우 힘을 주며 거울을 꽉 붙들었다.
“음…….”
“제발, 흐으. 제발요…….”
윤의 애원에 입꼬리를 올린 청건은 붉어진 기둥을 반대쪽 손으로 문지르다가 막았던 요도를 긁어내리듯 풀어 주었다. 윤은 깊은숨을 내쉬며 두 눈을 꽉 감았다. 뱃가죽이 첫 오르가슴보다 한 템포 느리게 경련했다. 울컥울컥 터지는 아래의 감각이 여느 때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기묘한 사정감에 머릿속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수치심도 뭣도 아닌, 과한 성욕으로.
여운이 지나고 윤은 천천히 거울을 마주했다. 마주한 제 눈엔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깊은 욕망이 스며 있었다.
청건은 거울에 잔뜩 튄 흔적 뒤로 눈가가 새빨개진 윤을 보며 물었다.
“혹시 무서웠어요?”
목소리엔 때늦은 걱정이 묻어났다. 사디스트 흉내를 내던 방금의 일도 일이지만, 아마도 폐역사에서 한 질문의 연장일 것이다. 무서웠을 리가. 머리를 채운 것은 오로지 욕정뿐이었는 것을. 청건에게 더욱 가학적으로 비틀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윤은 거울에서 손을 떼어 내고 젖은 속옷을 벗었다. 그러곤 몸을 돌려 청건을 마주 보며 힘 빠진 몸을 거울에 기대었다.
“이제 알아요. 무서운 감정 아니라는 거.”
그 대답에 소리 없이 웃던 청건이 윤의 코끝에 입 맞췄다.
살짝 내린 시선에 청건의 부푼 정장 바지가 걸렸다. 윤은 거울에서 등을 떼어 내곤 청건의 어깨를 뒤로 밀며 그를 침대에 앉혔다. 청건은 순순히 리드를 따르며 윤을 올려다봤다.
“근데 왜 계속 반말 안 해 줘요? 또 이성 돌아왔다 이거예요?”
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청건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윤 씨도 계속 형이라 불러 줄 거예요? 그러면 계속하고.”
“나랑 거래하자고?”
“네.”
“……그러지 뭐. 형.”
윤은 제 대답에 씩 웃는 청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지퍼 안으로 손을 넣었다. 발기한 성기가 속옷 위로 잡혔다.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쩔 수 없이 드는 긴장감에 허리가 빳빳해졌다. 청건이라면 여태 사력을 다해 피했던 알파와의 섹스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도완 다르게 몸이 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청건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윤은 멍한 얼굴로 그의 하체를 따라가다가 청건을 올려다보았다.
“씻겨 줄게.”
“……네?”
청건에게 팔이 잡힌 윤이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났다. 욕실에서 할 생각인가? 윤은 부끄러움과 미약한 공포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제 허리를 밀며 침실을 벗어나는 청건에 의해 어색하게 앞서 걸었다.
욕실 문을 열어 준 청건이 불을 켰다. 윤은 쭈뼛대며 안으로 들어가 슬리퍼를 신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만하게요?”
그 말에 청건은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더 하고 싶어?”
청건의 물음에 윤이 입을 달싹였다. 현재 드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하고는 싶은데. 물론 그렇긴 한데…….
안도감이 스치는 윤의 얼굴을 살핀 청건이 작게 웃음을 짓다 하얀 볼을 손등으로 쓸었다.
“너 다칠까 봐 그러지. 지금 집에 젤이 없거든.”
그리고 샤워기를 튼 그는 물 온도를 확인하고는 윤의 발부터 천천히 물로 적셔 주었다. 윤은 욕실 슬리퍼를 꾹 밟으며 그의 의중을 살폈다. 젤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닌 듯한데.
“우리 윤이가.”
“…….”
“나를 조금 더 믿을 수 있을 때. 그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의 말에 윤이 볼 안을 깨물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윤의 허벅지 위까지 천천히 올라왔다.
“미안해하지 마. 나 기다리는 거 잘한다 그랬잖아.”
지나치게 고조되었던 흥분감이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안개처럼 고요히 내려앉았다. 청건이 자신의 망설임을 다 간파했다는 사실에 윤은 미안한 감정이 울컥 올랐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건 고마움이었다.
샤워 젤을 짠 청건이 어느덧 물로 촉촉해진 윤의 목 뒤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윤은 등 뒤를 미끄럽게 지나는 손길에 입 안쪽을 꾹 깨물었다. 이내 앞으로 이동한 거품 가득한 손이 어깨 부근에서 움직이다가 가슴 쪽으로 내려오자 윤은 살짝 몸을 뒤로 물렸다.
“제가, 할게요.”
이대로 아래까지 다 그의 손에 맡긴다면 기다리는 거 잘한다는 남자 앞에서 어떤 추태를 부릴지 몰랐다. 그의 배려에 아까 전까지 망설이던 마음이 물렁해진 탓이었다.
청건은 순순히 샤워기를 넘겨주었다. 윤은 그에게 키스를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몸을 돌렸다. 아래를 닦아 낼 땐 뒤에 선 그를 흘끔 봤지만, 청건은 등을 돌린 채였다. 그는 물에 조금 젖은 바지를 벗어 욕실 밖으로 내놓았다.
그 순간 윤은 목덜미가 뻣뻣이 굳는 것을 느꼈다. 아까 느꼈던 공포심과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완전히 나신인 청건을 처음 보아서 그랬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그림 같은 뒤태를 잠시 훑던 윤은 몸을 돌리는 청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윤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 샤워 젤을 짰다. 발기한 그의 아래를 직접 본 적 없었던 윤은 침을 꿀꺽 삼키곤 시선을 내렸다. 큰 흉통을 따라 내려가던 눈길은 이내 그의 성기로 도달했다.
“…….”
윤은 장대하게 서 있는 성기를 본 채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청건은 허공을 향해 뻗어 나가는 물줄기와 윤을 번갈아 보았다.
“……왜?”
“……우리 지금 무슨 사이죠?”
“애인.”
청건이 못을 박았다. 못만, 못만 박으면 좋겠는데. 윤은 제 몸에 다시 식은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재고해도 될까요?”
“아니, 안 되는데.”
만져 준 적도 없는데 핏줄까지 드러난 성기는 무겁게 까닥이기까지 했다. 자위하는 청건을 두고 천장만 째려보던 수원에서의 우윤은, 이렇게 될 제 앞날을 알고는 있었을까?
그의 해소를 도와주고는 싶지만, 정말 이젠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아니었다. 남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베타는 이 상황이 문득 초현실처럼 여겨졌다.
목덜미가 새빨개진 윤은 머리와 몸을 재빨리 씻어 내고 샤워기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잘, 잘 해결하고 나와요.”
얼른 뒤로 돌던 윤은 두 걸음도 못 가 팔뚝을 붙잡혔다.
“안 돼요. 저 아직 믿음이 부족해요.”
서둘러 말하는 목소리가 정말로 겁에 질려 있었다. 발발 떠는 젖은 고양이 같은 모습에 청건은 결국 소리 내 웃었다. 어색하게 그를 바라본 윤은 성기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붙들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샤워기를 원래 자리에 건 청건은 웃음기가 만연한 얼굴로 윤의 뒷머리를 쓸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뭔데요?”
다소 민망한 상황인지라 윤은 잠자리 관련이 아니라면 무엇일지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윤의 촉촉한 볼을 엄지로 쓰다듬던 청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같이 유럽 갈까?”
“…….”
“이런 상황에서 묻긴 그런데. 몇 시간 후가 비행이라서.”
이거 해결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거든. 청건이 제 아래를 슬쩍 눈짓하며 덧붙이는 말에 윤의 민망한 시선이 도르르 굴렀다.
유럽……이라. 지금 직업이 없으니 여행하기에는 적기였으나 몇 달간 타지에서 일하지 않고 생활하는 것도, 여행 경비로 통장을 텅텅 비우는 일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몇 달간 청건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보다 더욱 큰 문제였다. 차라리 모아 둔 돈이 다 사라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얼마나 있다가 오면 되는데요?”
반년일 시 한 달 정도 머물면 되지 않을까. 한 달 정도 질릴 만큼 붙어 있다 보면 조금은, 그와 떨어질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막 그를 좋아하는 걸 안 마당에 그와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은 마음까지 인정해야 한다니, 낯간지럽고 생소한 일이었으나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윤은 바로 결론에 도달했다.
“4박 5일……?”
“……뭐라고요?”
윤은 제 귀가 잘못되었나, 고개를 살짝 저었다. 4박? 청건을 마주 보니 그는 그릇 깨 먹은 개처럼 눈치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이마를 짚고 있다가 헛웃음 지었다. 아니, 잠깐.
“우리 집에서 잔 것도 유럽행으로 딜 한 거잖아요.”
“그게, 전략이랄까.”
“이건 계략이죠!”
윤은 억울함을 표했다. 이런 고약한 술수만 없었다면 청건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순간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윤은 억울함 반 다행인 마음 반, 짬뽕으로 뒤섞인 감정으로 숨을 고르다가 청건을 흘끔 보았다. 청건은 몽둥이 같은 아래를 가졌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이 울적하고 애처로운 얼굴로 윤의 어깨 부근을 보며 눈만 깜박였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윤은 조금 가여워 보이는 청건을 향해 눈을 흘기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5백 정도면 갈 수 있어요?”
청건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가 정말 개였다면 혓바닥이 턱까지 내려와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윤은 남색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뚱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미 속으로는 용서를 마친 상태였지만.
“돈은 신경 쓰지 마. 내가 가자 한 거니까. 한산할 시간이라 좌석도 있을 거고.”
“…….”
“어때?”
“위치는…….”
“파리.”
윤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였다. 하필이면 아델라이트의 고향이었다. 어떻게 매번 자신을 혹하게 만드는 조건만 들이미는지 모를 일이었다. 콩콩 뛰기 시작한 심장은 그의 소관 밖이었다.
윤은 괜스레 머리를 쓸어 넘기며 숨을 푹 내쉬었다. 5백만 원 그 이상이래도 이젠 별 상관이 없어졌다. 이미 마음은 비행기 한 좌석을 차지하고 하늘을 나는 중이었다.
“……여권 가져오면 되죠.”
한풀 꺾인 윤의 모습에 청건이 작게 웃다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꼬옥 쥐었다. 그리고 붕어처럼 올라온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이따 같이 갔다 오자. 1시간 안으로 나갈게.”
1시간이나?
윤은 동글동글한 입술을 오물대다가 대충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쪽쪽. 연달아 하는 두 번의 입맞춤엔 배시시 웃음이 터졌다. 마주 웃는 청건을 가까이서 보던 윤은 기분 좋게 떨리는 가슴이 파리 때문만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살짝 틀며 다가오는 잘생긴 얼굴에 홀린 듯 눈을 감던 윤은 청건의 어깨를 잡았다.
“……하고 나와요. 기다릴게요.”
이 기분으로 키스라도 했다간 사고 치는 건 금방이다. 그래. 천천히 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그를 온몸으로 사랑하는 순간에. 아무 망설임 없이.
청건을 밀어내고 도망치는 목덜미는 장미가 핀 듯 붉었다. 물기가 흥건한 발이 청건의 집 안 곳곳을 물들였다. 윤의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정욕과 소유욕이 한 스푼씩 섞인 기대감이 몽글몽글 일었다. 낯설지만 사랑스러운 마음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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