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4. Dolly In (4/5)

#4. Dolly In

업무용으로 만들어 놓은 여권은 도장 하나 찍혀 있지 않은 새것이었다. 첫 여행지가 프랑스가 될 줄이야. 청건을 마구 끌어안아 칭찬해 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공항까지 운전을 맡은 대혁과 둘 사이에 가림막이라도 있었다면, 키스도 조금 해 줬을 텐데. 윤은 매만지던 여권을 가방 속으로 넣었다. 해 준다기보단, 역시 내가 하고 싶은 것에 가깝지만.

윤은 자신의 발을 톡, 치는 청건의 발을 보았다. 청건은 윤의 왼 손등을 제 허벅지 위에 놓더니, 손바닥 위에 검지로 글씨를 적었다.

「예뻐.」

윤은 눈가를 찡긋거렸다.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었다. 숨어 있던 성욕이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문득 생각했다. 내가 오메가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알파를 받아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에 그를 한가득 받아 내고, 별다른 제약 없이 만지고 싶을 때마다 몸을 맞댈 수 있을 거야. 청건 정도의 항공사 단골이라면 비행장 휴식 공간에서 큰 샤워장도 쓸 수 있을 거고. 그러면 비행기가 뜨기 전의 남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마구잡이로 퍼져 가는 생각이 확실히 저답지 않았다. 연기 연습용이라는-아직 의심스럽지만- 침실 통 거울에서 그 짓을 하고 나서 아무래도 뇌 회로가 회까닥 비틀린 것 같았다.

청건은 그 불순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윤의 무릎을 만지다가 조금씩 위쪽으로 압력을 가하며 쓰다듬었다. 이내 허벅지 안쪽을 지그시 쓰다듬는 감각에 윤은 시트를 꾹 쥐며 고개를 숙였다.

읏……. 낮은 숨소리는 대혁이 틀어 놓은 팝 음악에 먹혀들어 갔다. 여자 친구와 무사히 재회한 덕에, 대혁이 기분 좋게 뱉는 느긋한 허밍을 방패 삼은 청건이 작게 속삭였다.

“옷 잘 어울려.”

윤은 검은 셔츠 아래 연청색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곳에 가서 입을 옷은 전부 청건의 옷으로 챙겼다. 그래서인지 윤이 집에서 옷을 갈아입던 때부터 줄곧 시선을 떼지 못하던 청건은 기어코 윤에게 향하는 손을 막지 못했다.

청건이 여상하게 손끝을 움직일 때마다 윤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윤은 둘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고, 그를 멈추는 게 옳다고 소리치는 마음을 무시했다. 그는 이제 새끼손가락으로 중심부를 은근슬쩍 건드려 왔다. 시간이 갈수록 찰흙을 빚듯 농밀해지는 터치에 허벅지를 움찔대던 윤이 결국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만. 그만해요.”

“……응. 미안.”

청건이 짧게 숨을 내쉬며 손을 거둬 가 양손을 꾹 쥐었다. 윤 또한 정직하게 발기 직전이 된 몸을 심호흡으로 진정시켰다. 그러나 흘끔 본 이청건의 아랫도리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평소보다 양감이 뚜렷한 모습에 작게 헛기침했다. 아까 정말로 1시간을 채우고 화장실에서 나왔으면서 고작 옷을 다르게 입은 것만으로 또 눈이 돌아갈 수가 있는 건지.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가만히 보던 윤이 밖을 본 채 청건 쪽으로 몸만 기울여 말했다.

“딱 10초만 더 만져요.”

“고마워.”

윤이 선심 쓰듯 하는 말에 청건은 고민도 없이 손을 뻗었다.

“10, 9.”

윤은 작게 카운트를 시작했다. 청건은 반박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포기하곤 따뜻한 손을 움직여 윤의 셔츠 뒤쪽을 파고들었다. 그는 푹 팬 등골을 따라 손끝을 세워 올리더니 등 곳곳과 허리를 지분거렸다. 청건은 숨을 꾹 참고 있는 윤에게 속삭였다.

“카운트 왜 안 세?”

지금 그게 가능하겠……. 머릿속으로 대꾸하던 소리마저 사라졌다. 멈추지 않는 애무에 허리가 찌릿해지는 걸 느끼던 윤은 볼에 쪽, 와 닿고 떨어지는 입술에 소스라치며 청건을 돌아보았다. 소리가 분명 적나라했다.

“애인 좀 작작 괴롭혀. 이 배우.”

아니나 다를까 대혁의 목소리가 곧바로 넘어왔다. 그러나 청건은 “응.” 하고 성의 없이 대꾸하며 윤의 얼굴을 눈으로 꼼꼼히 훑을 뿐이었다. 놀라지도 않는 대혁을 보니 이미 청건과 윤의 관계는 다 알려진 모양이었다. 윤은 부끄러움에 햇살에 구워진 듯한 얼굴을 매만지다 허리를 다시 쓸어 오는 청건의 손을 떼어 내었다.

“고생깨나 하시겠어요. 저거 유난히 똥고집일 때가 있는데. 아무래도 윤 씨가 독점할 것 같네.”

아하하. 윤은 정직한 글자로 이루어진 웃음 끝에 입술을 꼭 다물었다. 대혁은 정숙한 우윤을 괴롭히는 야수 정도로 청건을 취급했으나 큰 착각이었다. 방금까지 오메가인 채 공항 샤워장에서의 야한 장면을 떠올린 건 우윤이었다. 호감을 인정하고 나니 제가 독점을 당하든 이청건이 고집이 있든 무슨 말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좋았지.

부끄러움에 폭삭 젖은 윤을 눈치챈 청건이 웃음을 참았다. 귀여워. 청건이 머리를 매만지며 속삭이자 윤은 얼른 이어폰을 찾아 양쪽 귀를 막았다. 차라리 일찍 들키길 천만다행이었다. 자칫하면 세울 뻔했다.

* * *

인천 공항. 매니저 둘은 청건의 주변에서 걷고 있었다. 짧은 스케줄이라 인파가 많이 몰리진 않을 거라 예측한 듯 경호 인력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어쩌다 거리가 벌어지고 나니 가까이 붙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윤은 경호 범위 내에서 훌쩍 떨어진 곳에서 캐리어를 끌며 조용히 걸었다. 4박 일정 동안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까딱하다간 모든 관계자가 청건과 자신의 관계를 알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파를 가로지르던 대열이 돌연 멈추었다. 모든 스태프가 동시에 앞을 흘끔댔다. 노래를 듣던 윤은 제 앞에서 우뚝 멈춘 스태프를 보다 이어폰을 빼내었다. 웅성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몸을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윤은 자신의 옆으로 불쑥 다가온 청건에 놀라 눈을 깜박였다. 턱 하니 잡힌 손목에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

“왜 여기 있어. 위험하게.”

“네?”

윤은 멍청히 되물으며 자신을 잡아끄는 그의 뒤를 황급히 따라붙었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뜨거웠다. 다닥다닥 붙는 이목에 부끄러움이 치솟은 탓이었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이곳에서 기자들의 셔터음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윤은 제 얼굴이 기사 전면에 뜰까 코끝에 걸쳐져 있던 마스크를 더욱 끌어 올렸다. 산책 중에 집에 들어가기 싫은 개 꼴로 청건에게 질질 끌려갔다. 내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스태프들을 전부 건너 앞쪽으로 이동하는 기분이란. 마스크로도 모자라 여권으로 눈을 가리고 걷자 그걸 본 청건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어쩐지 주먹이 쥐어졌다. 지켜 주는 건지 공개 처형을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비행기에 탑승한 윤은 청건과는 앞뒤로 떨어진 좌석에 앉게 됐다. 그래도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청건은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자꾸 내밀어 윤을 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청건의 목 베개를 제가 차지한 윤은 기내용 목 베개를 쓰는 청건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이왕 찾아온 자유를 즐기기로 했다.

작은 창밖으로 구름이 푹신푹신 깔린 것을 보니 마음이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 최근 청건과의 일들을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되풀이하고, 처음 타 본 비행기 좌석을 이리저리 찔러 보다가 핸드폰을 꺼내었다.

아까 눈 빼고 다 가린 사진이 설마 올라왔을까 궁금해 「이청건」을 쳐 보려던 손이 멈추었다. 검색창 밑 연예 뉴스 메인에 떡하니 청건의 소식이 떠 있었다. 여권과 마스크로 무장한 우윤이 곁다리로 찍혀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이청건이 유독 챙기는 스태프의 정체는, 새로운 매니저?」

사람들 반응이 두려워 제목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꺼 버렸다. 앞으로는 절대 눈에 띄는 짓을 하지 말아 달라고 청건에게 부탁-을 가장한 협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장시간의 비행이었다. 윤은 반은 설레고 반은 복잡한 마음으로 쪽잠을 잔 터라 비행 피로가 한가득 쌓인 채였다. 누구는 멀쩡하게 잘 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어째 우윤은 너덜너덜한 모양새였다.

청건이 윤이 풀어 헤친 셔츠를 이리저리 매만져 주었다. 멍하니 손길을 받던 윤이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양손을 떼어 냈다. 어리둥절한 청건에게 아까의 끔찍한 기사를 말해 주자 그는 그저 속 좋게 웃고는 다시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참나. 윤은 누가 연예인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공항에서 나와 개인 이동 차량으로 1시간 반을 걸려 시내에 도착한 그들은 촬영지 근처의 호텔로 흩어졌다. 현지 시각 오후 1시. 출발 시간 3시까지 그들에겐 2시간여의 시간이 주어졌다.

청건은 능숙하게 시차를 잘 맞춘 터라 컨디션이 좋았다. 윤은 차에서 잔 터라 몽롱한 눈으로 널따란 호텔 로비를 둘러보며 청건의 뒤에 서 있었다.

프런트에 붙어 선 청건은 불어를 근사하게 구사했다. 사실 영어만 조금 할 수 있는 윤은 그게 능숙한 불어인지도 구분이 불가했지만 그냥 그렇게 들렸다. 집-회사를 무한 반복하며 살던 자신과는 달리 이동할 일이 많았던 청건의 경험치는 확실히 굉장한 듯 보였다.

원래 이렇게 잘생겼었나. 윤은 긴 비행을 마친 후에도 훌륭한 외모의 청건을 몰래 훑었다. 그러다 이상하게 벅찬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고개 돌렸다.

곧 프런트 직원에게 시간을 달라 말한 청건이 난감한 듯 데스크를 두드렸다. 딴청을 피우던 윤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잘못됐어요?”

윤이 작게 속삭이자 청건이 그 존재를 까먹기라도 한 사람처럼 어어, 대꾸하며 시선을 붙였다. 오랜만의 눈 맞춤인 것 같았는데 청건은 고민을 하느라 금방 눈길을 거뒀다. 윤의 입술이 살짝 불퉁하게 나왔다 들어갔다.

“룸이 취소가 됐다는데 호텔 측에서 당장은 확인이 불가하다네.”

청건은 고민하며 혀로 입술을 축이다 윤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약간 흐트러진 갈색빛 앞머리를 차분히 정돈해 주었다.

“전달 오류 때문에 실수로 취소했을 가능성도 있긴 한데…… 그것보다 빈 룸이 없다네.”

조금 어두워진 목소리와는 다르게 손끝이 다정했다. 이마 위를 부드럽게 쓸고 가는 감촉에 윤의 눈이 여러 번 깜박였다.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는 사람.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내는 이청건이 좋았다.

청건이 곧 손을 내리며 제 표정을 확인하는 듯하자, 작게 목을 가다듬은 윤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뭘 고민해요. 우리 둘이 같은 방 쓰면 되는데.”

“어?”

그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사람처럼 놀라선 되물었다. 뭘까, 이 반응은.

“난 당연히 같이 쓸 줄 알았는데.”

“…….”

“형은 은근 밀어붙여야 할 때 손 떼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얼떨떨한 얼굴을 보아하니, 한방을 쓰는 것은 정말로 예정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청건은 머릿속에 전구가 켜진 사람처럼 몸을 돌리더니 아까 대화하던 직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윤은 마음이 좀 이상했다. 그가 다른 방을 쓸 생각을 했다는 게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싱숭생숭한 윤과는 다르게 청건의 표정은 아까와는 달리 활짝 피어 있었다. 윤의 캐리어를 대신 가져간 청건은 입매를 시원하게 올리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면 약속.”

가만히 손을 보기만 하는 윤에 청건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이내 두 개의 새끼손가락이 얽히자 청건이 말했다.

“밀어붙여도 도망가기 없기.”

“……누가 약속 내용을 손가락 걸고 나서 말해요.”

윤이 어이없이 웃자 청건이 등을 살짝 밀며 웃었다. 가자. 같은 방.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둘의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다. 룸 실종 사건과는 별개로 호텔 측과 얘기가 잘 되었는지 이르게 체크인을 시켜 준 덕에 곧바로 객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청건이 다 들어 준 덕에 짐을 내려 둘 것이 없어 윤은 곧바로 룸 창문에 붙었다. 정면의 에펠 탑 뷰에 파리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더블베드긴 해도 객실이 좀 좁지. 같이 올 줄 알았으면 미리 바꾸는 건데.”

방은 여섯 걸음 정도 크게 걸으면 끝나는 크기였다. 역시 사치하는 것에 흥미가 없는 청건다웠다. 하지만 이 사이즈의 룸이라도 청건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평생 이곳에 올 용기를 낼 수 없었을 수도 있었다.

“우리 집만 해서 별로 상관없는데요.”

사실이었다. 윤은 지금 기분으론 해먹에서 자든 돌바닥에서 자든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그와 붙어 있을 수 있어서 좋기만 한데. 마음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던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진 것이 신기했다. 직접은 아니더라도 속으론 솔직할 수 있어 좋았다. 윤은 몰래 입술을 씹어 웃음을 감추며 침대 위로 폴싹 앉았다.

원형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건물과 아이보리빛 소품으로 가득한 내부, 테이블 위에 놓인 웰컴 홀 케이크를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론 제가 앉은 침대로 시선이 붙었다.

……어쨌든 침대는 하나.

시트를 꾹 주무르던 그는 높은 침대 위에서 다리를 달랑거렸다. 짐을 대충 정리해 둔 청건은 냉장고에서 물을 두 병 꺼냈다. 하나를 따서 윤에게 내밀곤 자신도 곧 목을 젖혀 물을 콸콸 흘려 보냈다.

자연스럽게 저를 먼저 챙기는 청건을 가만히 보던 윤도 타는 목을 축였다. 몸에 밴 다정함은 선천적인 걸까, 후천적인 걸까? 다른 알파라면 ‘꼬시느라 고생이다.’ 정도로 꼬아 생각했겠지만 이제 청건의 행동만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졌다.

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모난 구석 없고, 똑똑하고. 이따금 두려움에 크게 휘청이는 저와는 달리 느긋하고 단단한 이청건은, 바깥에서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챙길까. 살뜰하게…….

콩깍지가 이어지던 중 윤의 표정이 바사삭 구겨졌다. 공주의 한옥 숙소 앞에서 목격했던 까치발이 떠올랐다. 청건의 볼에 뽀뽀를 하고 찰랑이며 멀어지던 긴 머리가!

윤은 물병을 든 손을 허벅지 위로 짜증스럽게 내렸다. 옆에 앉는 청건에 침대가 살짝 기울자 그를 홱 돌아보았다.

“왜 도끼눈을 하고 보십니까?”

청건은 장난스러운 존대와 함께 윤의 눈가를 톡 매만졌다. 윤은 손이 닿든 말든 청건의 눈을 뚱하니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별거 아니에요. 누가 프랑스식 인사를 한국에서도 했던 게 생각이 나서.”

“…….”

“아닌가. 비쥬(Bisou)가 아니라 그냥 냅다 입술 박치기였던가.”

윤은 말을 끝으로 이를 꽉 물었다. 여차하면 방 안의 모든 것을 불태울 표정이었다. 청건은 무슨 소린지 유추하는 얼굴로 있다가 아,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저기압인 옆모습을 가만히 훑던 청건은 웃음을 참으며 시트를 틀어잡은 하얀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

“윤아. 형 봐 봐.”

“안 봐도 될 거 같아요.”

“그때 그건…….”

청건이 말하던 중 멈추었다. 윤이 흘끔 보자 그는 씰룩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공주에…… 있었나 보네?”

“…….”

대형 사고다. 과한 솔직함이 화를 불렀다. 그가 깨물었던 몸 곳곳에 찌릿찌릿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대본집 주려고.”

윤은 부러 딱딱하게 말하곤 고개 돌려 물을 마셨다. 아, 망했다. 자책하는 얼굴이 구겨졌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만 하려 했던 질투까지 줄줄 새는 것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윤이 물병을 내리고 뚜껑을 여상하게 닫자 청건이 불쑥 말했다.

“한 번만 깨물어도 돼?”

“……어딜요.”

“볼이랑, 목이랑. 빨개서 딸기 같아.”

그냥 장난은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이 많았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지금은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다. 윤은 점차 몸을 붙여 오는 청건에 황급히 받아쳤다.

“말 피하는 거예요? 왜 변명을 하다 말아요.”

“아…… 그건.”

“이틀 만에 갈아탄 게 아니면 말해 봐요. 무슨 짓이었는지.”

깨무는 걸 포기한 청건은 미간을 좁힌 채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모르겠네. 뭔지…….”

……장난하나. 마음이 확 상해 버린 윤은 잡힌 손을 빼내고 일어났다. 잠깐, 잠깐. 청건은 서둘러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당겼다. 푹신한 침대에 다시 앉은 윤이 손목을 힘주어 비틀었으나 청건은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걔가 가끔 이상해도 의도 없이 그런 짓 할 애는 아니거든. 아마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야. 추측 좀 하게 시간을 줘.”

청건은 서둘러 윤을 달래고 인상을 푹 찡그리며 집중했다. 독수리……. 고마워해……. 청건은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아!” 하는 큰 소리는 바로 다음이었다.

“널 본 것 같은데?”

“저를요?”

“그때 바로 주변에 있었어? 걔가 네 인상착의를 바로 읊더라고.”

독수리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은편에서 청건을 보고 있기야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음침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워서, 급하게 다른 말을 골라냈다.

“그, 그거랑 별개로, 누가 막 입술을 들이대면 밀어내야 정상 아니에요? 힘도 세면서 그렇게 무력하게 볼을 내준 건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러자 청건이 억울한 얼굴로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윤아. 걔는 있잖아. 나랑 발가벗고 돌아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그럴 애거든?”

“아. 그래서 같이 발가벗고 돌아다니시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요.”

윤은 청건의 심리를 압박한 후 무사히 취조에서 빠져나왔다. 긴장한 몸에 일부러 힘을 풀고 청건이 이것저것 알아서 챙겨 넣었을 짐 가방을 열어 보았다. 평소 입던 옷과 다르게 색이 들어간 옷들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으니 청건이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게처럼 슬금슬금 옆으로 오더니 기어코 바로 옆에 들러붙어 책상다리를 했다.

윤이 흘끔 바라보자 “히히.” 하고 웃는 모습이 청건다우면서도 낯설었다. 눈치를 보던 그는 허벅지 위로 고개를 툭 기대어 눕고 눈을 굴리며 윤을 올려다보았다. 아, 미치겠네. 왜 이래. 윤은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입술을 꽉 깨물며 화난 표정을 유지했다.

“가서 할 거 해요.”

“이게 내 할 일이야.”

“뭐 하는 건데요.”

“뉘우치기.”

“…….”

선이 굵으면서도 온순한 얼굴에 정신 못 차리고 빠져들던 윤이 애써 시선을 올리고 짐을 빼내었다. 노트북. 어댑터. 충전 선. 안경…….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으면서 차례로 짐을 확인하던 윤의 행동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옷 더미 사이에 예상치 못한 물건이 있었다. 청건과 집에 가서 여권을 함께 찾은 것 말곤 그가 뭘 더 챙기든 신경 쓰지 않았다. 윤은 제 입술을 검지로 톡톡 매만지는 감촉에 정신을 차리곤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아델의 카메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외에서 책잡힐 짓을 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여태까지 열애설 없이 조용히 연애하는 법이 없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미안해.”

청건은 무릎에 고개를 비비며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자존심도 세우지 않고 풀 죽어 있는 청건의 모습에 제일 약한 윤은 분노 그래프가 풀썩 꺾여 바닥을 찍는 것을 느꼈다.

“조심해요. 나도 봤는데 파파라치가 그걸 못 볼 리가 없잖아요.”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중얼거리자 청건이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응. 알겠어.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

“음…… 걔는 임민정이라 하고, 베타야. 데뷔한 지 얼마 안 돼서 만났고, 도움받은 게 많아서 고마운 친구야.”

“…….”

“그러니까…… 칭찬하자는 게 아니라, 정보를 알아야, 혹시나 만날 일 있으면 누군지 알기 편하니까. ……못 미더우면 걔랑 만날 때 영상 통화를 할까? 아니면 아예 같이 갈래? 다들 애인 생겨도 유난스럽다 뭐다 눈치 안 줘. 뭘 하든 이해해 주니까…….”

청건은 입을 꾹 다문 윤의 모습에 결국 하던 말을 멈추었다.

“화…… 많이 났어?”

윤을 향해 묻는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좋아하는 프랑스에 오면서도 차마 카메라를 챙기지 못했는데, 윤은 그걸 당연하게 챙겨 준 청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와중이었다. 오해를 한 청건은 불안함이 담긴 눈으로 윤의 얼굴을 훑었다.

……귀여워. 윤은 손끝으로 제 이마를 매만졌다. 저보다 큰 남자에게 처음 드는 마음이 낯설었다. 전 직장 동료 최현이 그랬다. 귀여우면 게임 끝이라고. 귀엽다는 10살 연상에게 불도저처럼 들이대던 그녀의 마음이 1백 번 1천 번 이해가 갔다.

머리를 점령하는 불순한 욕구를 느끼며 입술을 축이던 윤이 몸을 일으켰다. 청건의 고개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같이 들렸다.

“왜……?”

“저도 해 보고 싶은 거 생겼어요.”

윤은 고민 없이 투명 테이블에 가 케이크를 가져왔다. 침대 위에 내려 둔 분홍색 케이크 위에는 작은 딸기가 세 알 박혀 있었다.

청건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윤은 딸기 꼭지를 입에 물었다. 초록색 이파리가 아삭 씹혔다. 그리고 조용히 청건의 입술로 다가갔다. 빨간 과육이 청건의 입술에 꼬옥 뭉개진다. 가까운 곳에서 청건의 눈이 점차 크게 뜨였다. 으음, 소리를 내면 청건이 눈을 깜박였다. 어서, 먹으라고요. 그러나 말할 입이 없었다.

윤은 인내심 있게 청건의 입술 사이에 딸기를 밀어 넣었다. 청건이 얼결에 몸통을 물면 윤은 물고 있던 곳을 쿡 씹어 이파리를 바닥으로 퐁, 뱉어 냈다.

“입으로 딸기 먹여 주기요.”

“…….”

윤은 딸기를 가만히 물고 있는 청건을 보다가 홱 고개 돌려 새 딸기를 집어 먹었다. 씨앗을 툭툭 터뜨리며 깨물자 청건도 아주 느리게 딸기를 씹었다. 둘이 번갈아 씨앗을 깨뜨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기는 거울 앞에 사람 세워 놓고 몸 빨개지는 거 다 구경했으면서……. 고작 이런 걸로. 수치심에 가까운 부끄러움이 뇌를 간지럽혔다. 줄곧 묵묵하게 딸기를 씹는 청건은 매트리스 어딘가를 응시 중이었다.

왜 아무 말이 없…….

그 순간 윤은 남은 딸기를 꿀떡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청건의 아래가 밴 안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청건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잠시 들었다 놓았다.

“가라앉힐게.”

“…….”

원래 형질인이랑 사귀면 다 이런가. 모르겠다. 시도 때도 없이 욕구가 오르는 게 정상인 건지. 윤은 까닥하다간 저도 반응이 올 것 같아 서둘러 다른 말을 짜내었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관광지를 가기는 조금 그렇고. 아까부터 배가 좀, 고픈 것 같기도 하네요. 밥이나 먹을까요.”

“……기내식 잘 먹던데.”

오늘따라 입맛이 돌아 나오는 기내식을 전부 먹었었다. 그건 또 언제 봤을까.

“……호텔 음식 먹어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 그럼. 가자.”

청건이 입으로 크게 숨을 내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윤은 제 눈앞에 위치한 그의 앞섶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곁눈으로 청건이 뻗은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까 찌그러진 강아지처럼 귀엽던 청건은 훌쩍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았다. 윤은 잡힌 손을 빼지 않고 어색하게 옆머리를 쓸었다.

“근데, 밥만 먹기엔 시간이 많이 남네.”

청건은 묻는 것도 혼잣말도 아닌 말을 하더니, 윤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남는 시간에 키스하면 딱 맞겠다.”

“…….”

스스로 답을 내린 그는, 천천히 따뜻한 입술을 포개어 왔다.

* * *

식사는 먹는 둥 마는 둥 20분도 안 걸려 다 해치웠다. 그리고 소화를 시킨다는 핑계로 룸으로 가 함께 침대에 있다가 코끝 손끝 쪽쪽대고 입술도 몇 번 더 맞췄다. 더 진해졌다간 스케줄에 문제가 생기니 엄청난 인내로 그 이상의 스킨십을 참아 냈다. 고삐가 풀린 것 같았다. 바글바글 끓어넘치는 마음이 이젠 무서울 지경이었다.

시간이 되자 모든 인원이 걸어서 트로카데로 주변으로 향했다. 청건이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때마다 윤은 의도적으로 그와 멀어졌다.

촬영 장비를 잔뜩 인 스태프들은 패션 위크 준비와 겹치지 않게 스케줄을 잘 짜 뒀다거나, 흐린 날이 오히려 오늘 콘셉트에 잘 맞는다는 등 서로 대화를 하느라 바빴다. 그들 중 몇은 청건의 친한 지인이라는 윤을 의심스럽게 보기도 했으나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은 윤을 환영해 주었다.

마침내 맨 뒤에 서게 된 윤은 목에 건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져 나간 틈에 처음 개시한 카메라에 사진을 몇 장 채웠다. 아델이 사는 나라. 그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기분이 좋았다. 옥탑에서 간신히 생계나 유지하며 살던 자신이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윤아, 앞에 봐.”

떨어진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윤이 걸음을 멈추자 바로 앞으로 세 대의 자전거가 지나갔다. 다른 블록에 선 청건이 제 쪽으로 오려는 듯 걸어오다가, 말을 거는 스태프에 의해 걸음을 멈추었다. 스태프에게 몸을 숙여 주는 그를 보던 윤은 카메라를 올렸다. 이국적인 거리와도 잘 어우러지는 남자가 작은 화면 안으로 서서히 들어온다. 투박한 워커와 가죽 바지. 팔에 들고 있는 베이지빛 코트. 흰 목 티 위로 착용한 두꺼운 은색 목걸이. 평소 스타일과 딴판이나 그에게 굉장히 잘 어울렸다. 새 옷을 입은 자신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셔터를 누르려던 검지가 허공에서 작게 떨린다. 침을 삼키며 카메라 몸체를 움켜쥐었다. 청건이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리자 윤은 카메라를 내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웃음을 머금고 청건을 향해 걸었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청건이 조금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집중하느라 가끔 위험할 것 같아. 야외 촬영할 땐 나 부르면 안 될까?”

그의 말에 윤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과보호는 사절인데요.”

사실 이보다 더 위험할 뻔한 상황이야 수두룩했지만. 윤은 정면으로 뜬 해를 바라보았다. 센 햇빛 때문인지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언젠가부터 자꾸만 생소한 두통이 느껴졌다.

그때 청건이 윤의 손등을 감쌌다. 잡은 손을 흔들며 걷는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윤은 주변 눈치를 보며 손을 빼내려 했으나, 청건은 도리어 깍지를 껴 왔다.

“위험하니까.”

“…….”

윤은 예쁘게 세팅 된 남색 머리를 바라보며 입안을 지그시 깨물었다. 장미 가시에 찔리듯 마주 잡은 손으로부터 따끔따끔한 감각이 퍼졌다. 정말이지 청건은 어디가 됐든, 누구와 함께하든 눈치를 보는 대상이 없었다.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이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미 가라앉은 화를 풀어 주려 눈치를 보던 청건과 지금 자신을 이끄는 청건 사이의 괴리에 기분이 묘해졌다.

윤은 맨 뒤에서 손을 잡고 걷는 자신들에게 시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숨죽여 걸었다. 그러던 중 윤의 보폭에 맞추어 걷던 청건이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손을 한 번 고쳐 잡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윤의 이마로 손을 얹었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열이 왜 이렇게 심하지?”

확실히 둘 사이를 들킬까 긴장하는 것뿐이라기엔 열이 심하긴 했다. 청건과 만날 때마다 조금씩 열이 있기는 했는데, 지금은 장대비에 몸을 푹 적셨던 폐역사 다음 날만큼 뜨거웠다. 그러나 청건이 제 몸처럼 인상을 써 가며 걱정하는 덕인지 윤은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놔두면 낫겠죠.”

“일단 촬영 전에 약 좀 사야겠는데.”

말리지 않으면 청건은 당장 약국으로 뛰어갈 기세였다. 윤은 풀어지려는 손을 더욱 꽉 붙잡았다.

“됐어요. 혹시 몰라서 감기약 챙겨 왔어요. 저녁에 들어가서 먹죠, 뭐. 잡생각 말고 촬영 생각만 해요.”

청건은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윤의 코끝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놓았다.

“잡생각 범주에 네가 왜 들어가.”

청건은 정말 심각한 모양이었으나 윤은 일행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멈춘 그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그냥 호텔에 들어가 있을래?”

“싫어요. 여기 와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아요.”

단호한 태도에 청건은 이내 힘을 풀고 윤이 이끄는 대로 딸려 왔다.

“더 아파지면 꼭 말해야 해.”

“빨리 가기나 해요. 주인공이 너무 뒤처졌잖아요.”

“대답 듣고.”

윤은 또다시 걸음을 멈추려는 청건을 당기며 대꾸했다.

“아, 알았어요. 빨리.”

“아프면 촬영 중이라도 사인 보내야 해. 뭐, 귀를 만진다든가.”

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충 대꾸했다. 예예.

“어? 제대로 대답하라니까.”

눈을 둥그렇게 뜨며 재촉하는 청건은 하여튼 유난스러웠다. 결국 윤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다고요.”

청건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깍지 낀 손을 만지작대더니, 잡은 손을 조금씩 휘두르며 걸었다. 대화 주제가 바뀔수록 점점 기분이 나아지는지 팔을 점점 크게 휘저었다. 윤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 과한 행동을 자제시켰다.

사람들과 다시 합류했을 땐 역시나 여기저기서 의문스러운 물음이 터져 나왔다. 사귀냐는 물음이야 공항에서부터 과장하여 수십 번은 들은 말이라 윤은 소리 없이 웃음 지으며 “그럴 리가요, 그냥 형 동생 사이예요.” 하고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청건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침묵을 고수했지만 윤의 의견이 그렇다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관계 밝히기를 종용하지는 않는 모습이라 다행이었다.

청건은 메이크업을 받는 와중에도 윤의 손끝을 붙잡고 있었다. 어찌 보면 엄마 손을 꼭 붙든 아이 같아서 머리를 한 번 헝클어 보고 싶었지만 윤은 애써 참으며 관심 없는 척 다른 곳에 시선을 주었다. 아까부터 손을 풀라치면 “지금 풀면 더 이상해지는 거 알지.” 하고 귀엽게 협박을 하여 벗어나길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꿀벌이 울고 갈 눈으로 내려다보고 또 올려다보는 게 몇 번째인지 셀 수가 없어 언제 또 사람들에게서 짓궂은 물음을 듣게 될지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급한 스케줄이 아닌지 다들 여유로웠다. 준비에 긴 시간이 소요된 촬영은 예정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촬영은 인적이 드문 거리를 옮겨 다니며 다양한 착장으로 진행되었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청건은 윤을 자꾸만 응시했다. 윤은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청건에게 대충 멀쩡하단 뜻으로 가슴 높이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그때마다 청건은 마음이 놓인 듯 미소 지었다.

이른 저녁쯤이 되어 마지막 촬영 장소에 도착하자 윤은 진이 빠진 채 분수대에 앉았다. 자신은 촬영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조금씩 주변 사진을 찍은 것만으로 에너지가 다 빠졌는데, 한나절 내내 터지는 셔터음에도 청건은 차분하게 포즈를 취할 뿐이었다. 프로페셔널 한 모습이 전문 모델 못지않았다.

직접 보는 촬영 현장이 생동감 있어 좋았고, 직접 보는 청건의 일하는 모습도 색달라 좋았다. 그가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자신을 대동했다는 사실에 뒤늦게 마음이 간질거렸다. 이렇게 되니 욕심이 생겨 그의 연기를 볼 수 있는 현장도 조금 궁금해졌다.

청건의 뒤로 에펠 탑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자 예상한 타이밍에 라이트 쇼가 시작됐다. 꽤 화려한 빛으로 수놓아지는 장면을 가만히 보던 윤이 카메라를 눈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빛을 내는 탑을 두 장, 그리고 자연스레 청건을 피사체로 잡았다.

하얀 난간 위에 팔을 기댄 채 사선으로 시선을 내린 청건. 연출한 젖은 머리가 비가 올 듯한 날씨에 잘 어우러졌다. 그는 코트와 스리피스, 캐주얼 한 복장을 지나 지금은 베이지빛이 도는 두툼한 카디건을 입은 채였다. 카푸치노 남이니, 첫사랑 상이니 포털에서 나돌던 별명이 이해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그런 표현으로는 청건을 다 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직접 겪은 청건은 그보다 다채한 사람이었다. 차분하지만 장난기도 있고, 성숙하고도 아이 같이 순수했다. 정중함 뒤엔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이 있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 어느 모양과도 예쁘게 맞아 들어갔다. 물처럼. 누구에게나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만, 정작 본인은 그 명성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 작은 바람에도 휘청이는 윤을 단단하게, 또 부드럽게 지탱했다.

그렇게 최악의 순간에도, 최초의 순간에도 이청건이 있었다.

그 순간 윤은, 새로운 피사체를 꼼꼼히 뜯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천천히 클로즈업한 그의 결점 없는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내리깐 눈은 온화했고 과하지 않은 표정은 완벽했다. 자신의 첫사랑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었나, 왜곡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입안에 가득 들어찬 케이크를 씹는 듯, 마음속으로 달큼한 것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감았던 눈을 뜬 청건이 조금씩 고개를 비튼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윤의 카메라로 붙었다. 올곧게 향하는 시선이 모니터를 꿰뚫고 윤에게 닿았다. 청건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반 셔터가 그런 청건을 명확하게 잡아냈다. 타닥, 타닥. 그의 주변을 무수히 떠다니는 빛처럼 윤의 가슴 안에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작은 셔터음과 동시에 나뭇가지 끝에 모인 큰 물방울이 카메라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윤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손에서 놓친 카메라가 가슴을 둥, 둥, 두드린다. 그곳으로부터 인 파장이 심장을 떨리게 했다.

윤은 급한 몸짓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가슴께에 몰렸던 열이 전신으로 마구 퍼져 나갔다. 마음속에서 부서진 무언가가 발아래 족족 밟히며 흩어지는 듯했다. 신념일까. 아니면 규칙? 정신을 갉아먹던 공포증?

한차례 가랑비가 내렸던 도시는 축축했다. 어느덧 멀리 떨어진 촬영지에선 박수 소리가 터졌다. 버스가 지나가길 기다리던 윤은 한 걸음씩 지르밟듯 도로를 건넜다. 그리고 인적이 드물어진 곳에서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하아…….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머릿속으로, 얼굴 위로 한 방울씩 스몄다.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아델의 예술이 너무도 부러웠다. 한계가 명백한 제 사진은 발전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드디어. 너무도 오랜만에 개인 카메라에 인물이 담겼다. 두려움 없이.

그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음속에서 쓸려 나간 것의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이곳이 분기점이 될 거라는 것은 명백했다.

그 순간 어깨를 채는 힘에 몸이 돌아갔다. 윤을 급히 쫓은 듯한 청건이 숨을 밭게 내쉬다 말했다.

“하…… 왜 불렀는데 대답도 없이……. 아파서 그러지. 어? 어디가 얼마나 아파.”

아까까지만 해도 그는 누구보다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윤의 얼굴을 양손으로 매만지며 재차 묻는 얼굴은, 어렵게 구한 보석이 깨어질까 염려하는 것만 같았다.

윤아. 업힐래? 응? 구급차 불러 줄까? 잠깐만 기다려 봐. 조금만 참으면…….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이 좋았다. 순간 윤은 가슴 안쪽부터 목 전체가 꽉 비틀리는 느낌이었다. 굵어지는 빗줄기와, 청건의 걱정 어린 손길을 받던 그는 울컥 목소리를 터뜨렸다.

“사랑해요.”

“…….”

쏟아지던 걱정을 멈춘 청건의 눈이 한 차례 흔들렸다. 윤은 처음 느끼는 감각에 떨리는 숨을 내쉬다 다시 속삭였다.

“나 어떡하지. 형이 너무 좋다.”

행동을 완전히 멈춘 청건이 한 차례 깊은숨을 내쉰다. 그는 윤의 머리를 손안에 가두며 떨리는 눈꺼풀을 꾹 감았다. 다시 천천히 뜬 눈은 비라도 흠뻑 맞은 듯 촉촉했다.

“……너 진짜, 자꾸 형 놀라게…….”

윤은 청건의 허리로 팔을 감으며 그에게 붙어 섰다. 그의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역사에서 맡았던 숲의 향이 다시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막 달려와 냉기가 돌던 청건의 품으로 윤의 열기가 서서히 옮겨붙었다. 청건은 뒤늦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윤의 머리를 손에 품고 마른 등을 안아 천천히 두드렸다.

“나는 연기에 소질이 없는 거 같아요.”

품속에 묻힌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청건이 윤의 머리칼을 헝클며 웃었다.

“나도 너한텐 그게 안 돼.”

청건의 대답에 윤도 미소 지었다. 마음의 밑바닥을 싹 털려 놓고 속 좋게도 웃음이 나오다니. 자신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만들어 버린 청건이 대단했다.

윤이 몸을 떼어 내자 청건이 시선을 낮추며 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윤의 목덜미를 짚어 열을 재는 손이 어느덧 윤의 몸만큼 뜨거웠다.

“여기서 키스하면 싫어?”

시도 때도 없는 정욕. 그걸 너무도 이해하는 윤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 저었다.

“짧게는 괜찮아요.”

그리고 청건은 윤의 대답을 듣자마자 입술을 맞대었다. 목덜미를 움켜잡으며 이끄는 키스에 윤의 고개가 살포시 꺾였다. 머릿속을 차갑게 적시는 빗물은 어느덧 얼굴을 타고 흐를 정도로 굵어져 있었다. 더워진 그의 손과 젖어 가는 윤의 목덜미가 미끄럽게 마찰했다. 틈 없이 맞물린 입술이 여러 번 움직였다. 분명 ‘짧게’와는 거리가 먼 키스였으나 윤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흐리게 뜬 시야로 청건의 조급한 움직임을 몰래 관찰했다.

그러나 윤이 그의 허리를 잡은 팔을 아예 목에 두르려는 순간, 청건이 입술을 떼어 냈다. 공중에 들린 윤의 혀가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청건은 흥분이 섞인 숨을 천천히 골랐다.

“……왜요?”

“더 하면 못 멈출 거 같아.”

……안 멈춰도 되는데. 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청건이 덧붙였다.

“회식 남았거든.”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청건은 흡사 부고를 알리는 사람 같았다. 윤은 장난을 담아 눈썹을 좁혔다.

“가기 싫어요.”

“가지 말까?”

괜한 어리광에 고민도 안 하고 청건이 대꾸했다. 한 명 있는 주인공이 불참할 수 있을 리 없건마는. 윤이 대답 없이 입꼬리를 올리자 청건도 아쉬운 듯 웃었다.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둘의 주위로 사람이 연이어 지나가고 있었다. 윤이 그에게서 몸을 조금 떼어 냈다. 혹여나 같이 온 이들이 보았을까 걱정이 올라올 즈음 청건이 젖은 손을 맞잡아 왔다.

“조금만 참고 또 하자.”

청건이 장난스럽게 말하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꽃처럼 피어나는 얼굴을 멀거니 보던 윤은 그의 턱 아래로 미끄러지는 빗물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를 스치고 떨어진 것들을 모조리 입으로 받아 먹고 싶었다. 매력 있게 팬 볼 위의 보조개에 혀를 대어 빨아 보고도 싶었다. 무언가 부서져 사라지고 투명하리만치 비어 버린 마음이 윤의 본능을 더욱 선명하게 비췄다.

“근데, 누가 이런 눈을 안 해야 말이지.”

청건이 윤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윤은 불순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반박을 할 새도 없이 청건이 막 불이 들어온 횡단보도를 걸었다. 꽉 잡은 손 탓에 얼결에 이끌린 윤이 그 뒤를 휘청이며 따라갔다. 도로가 끝나도 이어지는 청건의 큰 보폭에 열나는 머리가 쿵쿵 울렸다.

“천천히 가요.” 말해 봤자 청건은 “우윤이 사랑한대!” 크게 한 번 소리 치곤 흠뻑 젖은 도보를 가로질렀다. 젖은 남색 머리가 신난 강아지 귀처럼 흔들렸다.

“좀, 조용히 해요.”

윤이 소리를 낮추며 그를 타박하자 청건이 서서히 보폭을 줄이며 뒤로 걸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를 나무란 사람답지 않게 /얼굴에 웃음기가 묻어 있던 윤이 살짝 시선을 돌렸다. 어색하게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자 청건은 잡은 손을 흔들며 시선을 갈구했다.

그러나 윤은 꿋꿋이 다른 편을 보았다. 손을 맞잡은 둘을 바라보는 소수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별로 도망가거나 숨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을 보며 작게 웃음 짓곤 청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윤은, 이 남자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예뻤다.

이내 옆으로 다가선 청건이 윤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볼 위로 짧게 입 맞췄다. 그리고 드러나 있는 흰 목에 젖은 머리를 마구 비볐다. 저리 가요. 미소가 만연한 윤이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밀어냈다.

* * *

뒤풀이 장소는 운영한 지 1백 년이 넘었다는 미슐랭 레스토랑이었다. 컨디션을 이유로 빠진 몇을 빼고는 대부분이 참석해 같은 코스로 메뉴를 통일했다.

젖은 겉옷을 벗어 놓은 윤은 저편으로 떨어지게 된 청건을 흘끔 바라보았다. 옆자리에 앉은 감독과 얘기하던 청건은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수다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아 이쪽을 바라볼 여유가 없어 보였다.

윤의 테이블엔 그를 살갑게 대하던 촬영팀 몇과 파리에 오고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던 청건의 매니저 종영이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윤은 테이블 위로 접시를 올려 주는 웨이터에게 눈인사했다. 애피타이저로 푸아그라가 나온 접시였다. 포크는 들었으나 컨디션이 난조라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입에 넣고 질겅거리고 있자니 옆에 앉은 종영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십니까? 안 그래도 형님이 엄청 걱정하시던데.”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냥 컨디션 문제예요.”

다른 사람이라면 자세히 말을 늘리지 않겠지만 윤은 이유를 함께 덧붙여 주었다. 청건의 매니저였으니까. 그러나 종영은 걱정하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럼 더 신경 쓰이지 말입니다. 식욕도 없어 보이시고. 안 그래도 청건 형님이 근방에 병원을 찾아 놨는데, 그냥 편하게 말만 해 주시면…….”

“정말 괜찮아요, 이 정도는. 열 좀 나는 걸로 형이 오버 하는 거예요.”

종영은 청건을 닮아 눈치가 좋은 편인 듯했다. 그가 더 마음을 쓰지 않도록 윤은 최대한 접시에 있는 것을 긁어 먹었다. 완벽하게 안심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종영은 곧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접시를 비웠다.

맞은편 사람과 짧게 대화를 하던 종영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 혹시, 아까 두 분이…….”

종영은 주변 눈치를 보다 목소리를 아주 작게 줄였다.

“깍지를 끼고 오시던데. 혹시. 그. 두 분이 말입니다.”

말을 반복하는 종영은 난감한 눈치였다. 궁금하기는 한데 예상하던 답이 아니라면 실례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난감해하는 밤톨을 흥미롭게 보던 윤은 그 연예인에 그 매니저라 생각했다. 귀여운 면에서.

윤은 포크를 내려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어요.”

“역시!”

유레카 수준의 대발견이라도 한 듯 공중에 주먹을 쥐어 올린 종영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모이니 윤은 조용히 고개 돌렸다. 종영은 어색하게 주먹을 내리곤 나이프를 들었다 놨다 했다.

다행히 다음 코스 요리가 나오자 관심 어린 눈길이 한 번에 떨어져 나갔다. 종영은 기립 박수라도 치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기특하게도 입술을 꽉 깨물며 참아 내는 듯했다. 잠깐 몸을 사리던 종영이 다시금 얼굴을 붙여 왔다.

“저는 두 분이 오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형님이 이만큼 오랫동안 애쓰고 아끼던 사람이 없었어서요.”

윤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낯부끄러운 마음에 하얀 소스가 함께 나온 관자 요리를 포크로 쿡쿡 찔렀다.

“형님이 애인 된 분한테도 쌀쌀맞고 표현이 없어도, 이, 오래된 주변인들 증언이 진짜지 않습니까. 대혁 형이랑 제가 느끼기엔 완전 진국이십니다. 진국. 저희가 케어 하는 배우라 그러는 게 아니라.”

“…….”

“궁금한 거 있으시면 저한테 다 물어보셔도 됩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전부 다 알려 드릴 수 있지 말입니다.”

윤은 군대 말투가 섞인 종영의 묘한 말투와 내용을 곱씹다가 되물었다.

“……과거도 많이 아세요?”

“네. 꽤 압니다. 정확히 몇 년도로 갈까요?”

“연도별로 있어요?”

“형님이 워낙 숨김없이 말해 주셔서요. 아마 윤 씨한테도 다 말해 주지 않으셨을까요?”

윤은 그 말에 청건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마침 고개를 돌린 청건과 눈이 딱 마주쳤다. 청건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미소를 짓다 뽀뽀를 바라는 것처럼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뭐 하는 거야. 윤이 주변을 눈짓하며 과장해 눈썹을 좁히자 청건은 혼날 타이밍을 알고 꼬리를 내리듯 시선을 내렸다.

종영은 작게 헛웃음을 터뜨리는 윤과 웃음기 있는 얼굴로 이편을 흘긋 바라보는 청건을 뒤늦게 살폈다. 한발 늦어 좋은 구경을 하지 못한 종영이 다시 접시로 고개 돌리자 윤이 그에게 작게 말했다.

“궁금한 거 많아요. 형이 말했던 시작과 끝도 궁금하고. 나 말고 아끼던 사람은 얼마나 있었나 궁금하고. 마음 같아서는 이청건 연대기 파일 하나 만들어 달라 부탁하고 싶어요.”

확실히 청건은 주변인과 빠짐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종영도 종일 돌아다녀 피곤할 법도 한데, 매수라도 된 사람처럼 더 도움을 주지 못해 안달이라니.

“근데 괜찮아요. 사실 저는 형 과거를 들어 본 적이 없지만…….”

“예?”

종영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직 제가 종영 씨만큼 미덥지는 않은가 보죠.”

“…….”

“마음 같아선 거꾸로 매달고 다 불라고 하고 싶은데요. 이제 시작했으니까, 천천히 가 보려고요.”

“윤 씨…….”

종영은 자신이 조금 경솔하게 말한 건 아닌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윤은 그를 안심시키려 입꼬리를 올렸다.

“오면 좋겠어요. 형이 나한테 다 얘기해 주는 날이.”

“…….”

“언젠간 알게 되겠죠.”

윤은 연애 상대가 말하지 않는 개인사에는 사실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의 과거가 너무 궁금했다. 어쩌다 배우가 됐는지. 전 애인들과는 어쩌다 헤어졌는지.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뭐가 다르고 뭐가 같은지. 들어도 이득 없고 어쩌면 다칠 수 있는 얘기들까지 다.

“그런데, 종영 씨 말에 오류가 있어요.”

“……네? 오류요?”

윤은 입가를 닦아 낸 냅킨을 내려 두었다. 종영은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밤톨 머리를 부단히 굴리는 듯했다. 윤은 눈을 불안하게 움직이는 종영이 더 자책을 하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형이 상대한테 쌀쌀맞고, 표현이 서툴다는 거요.”

“…….”

“당황스러울 만큼 표현이 많고 다정해서. 사실 적응을 못 하고 있거든요.”

“예……? 말도 안 돼.”

종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적응이 안 되는 게 사실 그뿐이랴. 누군가 둑을 부숴 버린 듯 범람하는 자신의 각종 욕구를 알면 순수한 종영은 뒤로 넘어갈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진짠진 아직 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보는 이청건이 진짜인지, 전 애인들한테 했던 게 진짜인지.”

윤의 말에 멍하니 있던 종영이 이편을 보는 청건을 바라보았다. 청건은 앞자리 사람이 크게 제스처 하자 가려진 윤을 보려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이 진짜이지 않을까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종영에 윤 역시 마주 웃었다.

그 후 윤은 말을 걸어오는 스태프들과 간간이 대화를 나눴다. 괜한 억측으로 부담스러운 식사 자리가 될 수 있겠단 예상과는 다르게 모두 친절했다. 떨어진 입맛과 그들의 형질과는 별개로, 좋은 사람 옆에선 음식이 맛있어질 수 있다는 걸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슬슬 일어나는 분위기에 윤도 몸을 일으켰다. 그때 어깨를 잡는 감각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청건이 다가와 있었다. 예상에 없던 2차 제안을 받았단 말을 전하는 청건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역력했다. 하지만 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 있던 친절한 스태프들이 같이 가자고 윤을 종용하기도 했거니와 청건과 밖에서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저 하나 때문에 모임에 빠지면 입장이 곤란해질 것도 같았고.

밖은 여전히 우중충했다. 비가 계속해서 추적추적 내렸으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산을 쓰지 않았다. 윤도 다 젖은 마당에 궂은 날씨 같은 건 상관이 없었다.

청건과는 이동 내내 떨어졌다. 중간에 마주친 눈길엔 당장 키스하고 싶은 욕정이 보이는 것도 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벌써 몇몇은 둘의 사이를 알아채고 있는 듯했으니, 차라리 떨어져 있는 편이 나았다.

2차로 택한 바는 벽돌집 같은 아늑한 분위기였다. 모든 인원이 각각 맥주 혹은 칵테일을 골랐고, 안주도 가볍게 주문 후에 2층으로 올라갔다. 윤은 이번에야말로 청건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청건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2층에 발을 들이자마자 윤에게 가려던 청건은 팔을 잡혀 다른 테이블로 끌려갔다.

청건이 자리에 앉으며 제 옆으로 오라고 눈짓했지만, 윤은 작게 고개 저었다. 청건의 주변에 그를 호시탐탐 노리는 듯한 눈길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걸 가까이서 견딜 자신이 없었다. 애인에게 보내는 추파에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알아서 처리하라지, 뭐.

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돌렸다. 청건도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윤은 그와 다른 테이블 왼쪽으로 향했다. 반은 얘기 한 번 나눈 적 없던 스태프들이었다. 가볍게 목례하며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각종 안주와 윤이 시켰던 블러디 메리 칵테일이 테이블에 놓였다. 동시에 아까부터 윤을 노골적으로 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 그랬죠?”

가운데 테이블 하나를 놓고 각종 의자가 둥글게 놓여 있는 구조였는데, 윤에게 말을 건 남자는 둘 사이에 한 명의 사람을 놓고 떨어져 있었다. 얼굴이 눈에 익었다. 촬영 이동 시간마다 말을 걸고 싶은 것처럼 윤을 빤히 바라보았던 사람이었다.

윤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붙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우윤입니다.”

“아아.”

남자는 제가 먼저 물어 놓고 급격하게 흥미가 떨어진 사람처럼 반응했다. 윤은 묘하게 비틀린 미소를 짓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눈에 띄게 적대적이었다.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매니저들도 청건의 테이블에 모여 있어 가시방석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슨 칵테일이에요? 제가 칵테일을 잘 몰라서. 독특하네.”

남자는 윤이 잡은 잔 위에 꽂힌 토마토 가니시를 턱짓하며 물었다. 윤은 제 칵테일보다 남자가 더 독특한 마스크라 생각했지만. 윤은 남자를 대충 훑다가 대답했다.

“블러디 메리……라던가. 저도 칵테일엔 흥미가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윤은 대답 중에도 뚜렷하게 와 닿는 시선을 느꼈다. 남자는 그 말에도 살갑게 받아치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윤이 묻기 전엔 자신의 이름을 알아서 알려 줄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알고 싶은 정보도 아니었으니 윤은 신경을 끄고 칵테일을 홀짝였다. 성가신 타입인 듯했다.

토마토 주스처럼 걸쭉한 칵테일은 약간 달콤하다가 끝엔 맵싸한 향이 스쳤다. 묘한 맛에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남자는 윤이 잔을 입에서 떼자마자 다시 말을 걸었다.

“배우 해도 될 상인데? 그래서 청건 형이랑 각별하신가.”

형?

윤은 드디어 본론에 들어선 남자에게 대답 대신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형이라. 예민한 단어를 남자는 쉽게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자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 단어 하나를 붙잡고 고민했었는데.

남자는 둘 사이에 있는 스태프를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한껏 기울인 채였다.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니 마침 청건과 눈이 마주쳤다. 청건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 있었다. 구조 신호라도 보내 볼까 싶었지만, 청건은 그 나름대로 역경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옆에서 팔을 만지작거리며 웃는 여자에 인상을 짧게 찡그렸다 편 청건이 윤을 바라본 채 뭐라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희미한데, 말하는 내용이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윤은 몰래 미간을 좁혔다. 여러모로 불쾌한 기분이 가슴 밑바닥에서 일렁였다.

“저기요.”

그때 기어코 윤의 옆자리로 옮겨 온 남자가 불쑥 말했다. 윤이 기분이 상한 얼굴 그대로 그를 돌아봤다.

“청건 형 지금은 사귀는 사람 없는 걸로 아는데. 정말 그냥 친한 형 동생 맞죠?”

커다란 목소리에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조용히 술만 마시고 귀가할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파장이 꽤 커질 것 같았다.

“맞아요. 그냥 친한, 형 동생.”

자신도 모르게 ‘친한’에 힘을 주어 말한 윤은 시선을 돌리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희한하게 중독성이 있는 칵테일을 한 모금 더 삼켰다. 이름 그대로 피처럼 걸쭉한 것이 목구멍을 적셨다. 남자는 가득 찬 술을 물처럼 단숨에 들이켜더니 여유로운 몸짓으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뒀다.

“다행이다.”

피가 다 빠진 듯 보라색인 남자의 입술이 반짝거렸다.

“내가 먼저 찜했거든요.”

그가 덧붙였다. 윤은 그 말에 이를 살짝 악물었다.

“형제 격인 소속사에, 사내 연애 금지라 자중은 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 텐션을 없애기가 말처럼 쉽나. 그렇죠?”

“…….”

실소가 나올 뻔했다. 남자는 마치 청건과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현장도 볼 겸 사비 내고 견학 왔어요. 시야에 자주 걸려야 뭐든 될 테니까. 그런데 누구는…….”

남자는 빗물이 덜 마른 갈색 머리부터 시장에서 산 듯 소박한 신발을 못마땅하게 훑었다.

“여행 비용 전액을 이청건한테 기대서 왔다니까 속이 좀 쓰리긴 하더라고요.”

“…….”

“아, 누구처럼 돈이 없어서 쓰린 건 아니고.”

남자가 줄줄이 뱉어 내는 말에 주변인들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하나같이 남자가 ‘누구’라 지칭하는 사람이 윤인 것을 눈치챈 듯했다.

“어쨌든, 이 정도면 형도 내가 좀 더 신경 쓰이지 않을까요?”

새침한 목소리를 끝으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때 총대를 멘 누군가가 침묵하는 윤을 두둔했다.

“아서라, 이청건은 여자만 만나더라.”

“항상 포부가 당차서 보기 좋아, 현수 씨.”

그러자 남자를 불편해하던 사람들까지 하나둘 말을 얹었다. 에둘러 말리는 사람부터 혼혈인 그의 모국을 근거로 놀리는 말까지 다양하게 들렸지만 남자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매끈한 미소를 지으며 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청건 형이랑 친한, 동생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제가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요? 앞으로 더 많이, 텐션을 끌어 올릴 예정인데.”

윤은 이제 감출 수 없이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신경이 많이 거슬렸다. 이 남자는 제가 아까 청건에게 블러디 메리보다 진득한 입맞춤을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르고 있을 테니 한편으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윤은 반의반쯤 비운 잔을 흔들다 소파에 기대었다. 잔 손잡이를 꼭 쥔 손끝이 희게 변했다.

“……가망이라.”

“…….”

“아마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말씀하신 ‘텐션’이라는 게 노력으로만 얻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게 혼자서도 가능한 거였으면 저는 진작 표지연 씨랑 사귀었게요?”

윤은 인터넷 메인에서 본 아무 배우 이름을 갖다 대곤 담백하게 웃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윤의 반응에 작게 환호했다. 적의 있는 현수의 말을 맞받아치는 상황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이들은 다 같은 회사 사람도 아니었다. 현수라는 남자의 편이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윤의 예상은 적중했다. 스태프들은 역시 남자를 감쌀 생각이 없었다. 패기 좋은 20대 초로만 여기는 듯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현수의 무안함은 다들 안중에도 없는 걸 보니.

현수는 빈 잔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웃다가, 술을 더 시켜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윤은 계단을 찾아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소파에 기대 있던 몸을 세웠다. 의지할 곳이 필요해 기대 있었지만 남자의 후퇴에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계단을 내려간 현수는 코너를 도는 중에 윤을 매섭게 올려다보았다.

……오싹하네.

윤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볼이 푹 팬 외모가 섬뜩한 기분을 주는 데 한몫을 하는 듯했다. 얼른 다 마시고 일어나야겠다 싶어 잔을 입으로 가져왔다.

어떡해! 괜찮아요?

그 순간 뒤쪽 테이블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윤은 확연히 시끄러워진 말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다고 손을 들어 보이는 청건을 기어코 일으키는 여자가 보였다. 아무래도 청건에게 술을 엎은 것 같았다. 고의로.

무심코 자리에서 조금 일어났던 윤은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으며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 또한 저편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이상 눈에 띈다면 청건에게 민폐일 테니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를 도와줄 사람이야, 차고 넘쳤으니까.

착잡한 마음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마시고 잔을 내려 뒀다. 아무래도 먼저 자리를 뜨는 게 현명한 처사일 것 같았다. 모든 이가 청건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윤은 뒤쪽의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어깨 위로 세게 부딪치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몸 전체로 축축한 느낌이 확 퍼져 나갔다. 윤의 몸을 따라 구르던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크게 파열음을 냈다. 놀란 윤은 팔을 어정쩡하게 든 채 눈을 깜박였다. 청건이 스태프에게 빌려 입혀 준 트렌치코트가 완전히 젖어 버린 걸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현수였다.

“어떡해, 괜찮아요? 갑자기 일어나서 못 봤어요……!”

현수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의 냅킨을 찾아 걸었다. 윤은 질린다는 듯 작게 한숨 쉬었다. 저쪽 여자와 똑같은 멘트였다. 다분히 고의적이라고 봐야 옳았다. 술을 옮기는 중에 이쪽으로 손을 뻗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남자가 건네는 냅킨을 받아 든 윤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괜찮아요. 그러나 윤이 하는 말에도 현수는 불안한 기색으로 젖은 코트 소매를 끌어당겼다.

“밑에 화장실로 가요. 대충이라도 닦기는 해야죠. 설탕 든 거라 끈적할 텐데…….”

현수의 얼굴에 악의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계속 거절해 봐야 어차피 화장실은 들러야 할 것 같았으니 윤은 그가 힘을 주는 대로 그냥 좌석 밖으로 나왔다.

직원이 소리를 들었는지 어느새 주변으로 와서는 무어라 말하며 손짓했다. 보디랭귀지로 추측해 본 바 아마 엉망이 된 바닥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인 듯했다. 윤은 계단 쪽으로 손바닥을 뻗는 직원에게 면목 없이 목례하곤 자신을 잡아끄는 현수의 뒤를 따랐다.

뒤 테이블을 지나가야 해서 흘끔 시선을 주니 청건은 냅킨을 한가득 들이미는 여자의 팔에 붙들려 있는 채였다. 계단 난간을 잡을 즘 청건이 눈을 마주쳐 왔다. 윤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청건은 말을 거는 주변인들 탓에 윤에게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주의를 뺏겼다. 사람들에게 무어라 대답하는 청건을 마지막까지 바라보던 윤은 자신을 재촉하는 현수에 의해 높은 계단을 내려가는 것에 집중했다.

“Ou est toillette?(화장실은 어디에 있죠?)”

1층에 내려간 현수는 짧은 불어를 구사했다. 직원이 손짓하는 곳으로 자신의 소매를 끌고 가는 남자는 악력이 꽤나 셌다. 윤은 얼얼한 팔을 느끼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남녀, 형질 공용인 화장실은 막힌 칸이 단 하나뿐이었다. 보라색 타일의 화장실을 둘러보고 있자면 현수가 화장실 입구 문을 닫았다. 윤은 공중으로 세게 던져진 팔에 살짝 휘청였다.

“운이 좋네. 화장실이 밖에 있었으면 좀 더 스펙터클 했을 텐데.”

남자는 문을 닫자마자 안절부절못하던 표정을 싹 지웠다. 존대인지 반말인지 애매했지만 찡그린 얼굴로 봐선 반말인 듯 보였다.

현수가 젖은 옷에 손을 뻗으려 하자 윤은 자신이 먼저 옷을 벗어 세면대 속에 넣었다. 현수는 허공에 든 손을 내리며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그걸 아랑곳하지 않은 윤이 레버를 돌렸다. 수압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공중화장실에서 두 번째로 옷을 빨다니. 청건을 만난 후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고 생각했다.

“야.”

현수가 뒤에서 윤을 불렀다. 분명 한참 어려 보이는데, 매너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러나 윤은 대수롭지 않았다.

“네.”

그저 짧은 대답과 함께 코트가 짙어진 곳을 물 밑으로 들이밀었다.

“사람이 말하면 말하는 사람을 봐야지.”

현수의 말에 윤은 고개를 돌려 순순히 남자를 바라봤다. 이 패턴은 이원형과 비슷하고. 그러면 현수는 덜떨어진 놈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왜요. 그쪽이 직접 빨아 주시게요?”

“……하, 씨발.”

윤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는지 현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데 같잖은 싸움을 붙여 오니 가만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조금 눈치를 주면 한발 물러설 거란 생각은 착각이었다. 윤은 불식간에 어깨가 밀려 화장실 벽에 부딪쳤다.

“똑바로 말해 봐. 너 이청건한테 마음 있어?”

남자가 눈을 홉뜨며 물었다. 타일에 부딪쳐 아릿한 등을 느끼던 윤은 결국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혼혈이신 거 같은데. 욕은 한국어로 하는 걸 보니 여기 오래 계셨나 보네.”

“뭐?”

“근데 왜 존댓말을 모르지?”

윤의 반격에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곤 볼 안쪽을 혀로 쓸었다.

“이청건이 끼고 있다고 뭐라도 되는 것 같나 보네. 그렇게 스쳐 간 연놈이 한둘이 아닌 건 알아?”

“자기도 스쳐 갈 놈인 건 왜 모르는지…….”

혼잣말처럼 말한 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현수는 제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는지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꽤 잘 대드네.”

“내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현수는 윤의 어깨를 짚은 손을 떼어 윤이 입은 검은 셔츠 깃을 매만졌다.

“나약하게. 또…… 천하게?”

“…….”

“나한테만 말해 봐. 소문 안 낼게. 너 그 형한테 대 주고 왔지.”

윤은 그 말에 헛웃음이 툭 터졌다. 그게 현수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얼추 맞는 소리긴 했으니까. 어떤 의도로 물어봤는지는 잘 안다. 청건 측에게 스폰을 받는 갓 데뷔한 신인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쪽은 원래 좋아하는 사람을 하급 매물 취급하나 봐.”

“……뭐?”

윤은 참다 참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 셔츠 깃 위로 들러붙은 손등에 손톱을 꽉 박아 넣었다. 아! 씨발. 현수는 재빨리 뺀 손을 털어 냈다. 근래 들어 깎지 않아 답답했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나한테만 말해 봐. 이청건이 그렇게 문란하게 구는 놈으로 보여?”

“돌았나 이게.”

현수는 화가 치솟는지 입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알파는 다 상종하지 못할 놈들이라고.”

“…….”

“그런데, 난 이제 알파가 아니라 그냥 당신 같은 사람들이 싫어. 먼저 선을 넘어 놓고, 자기가 무슨 선을 밟았는지도 모르는 인간들.”

윤은 힘을 실어 말했다. 욕 한 번 하지 않았으나 빨간 머리는 히스테릭하게 표정을 비틀었다. 여차하면 뺨이라도 올려붙일 기세였다.

“이 씨발, 좋게 좋게 갈랬더니…….”

“남 협박할 시간에 계획을 좀 새로 짜 봐. 어떻게 하면 단 한 명이라도 널 좋아할 수 있을지. 뭐 그런 거.”

“…….”

“지금은 다 널 싫어하더라.”

입을 꽉 다문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뒤바뀌었다. 윤은 무표정으로 덧붙였다.

“이청건은 계획에서 빼고. 너도 예상했듯이, 내가 그 형 좋아하거든.”

코트가 걸쳐진 세면대에선 여전히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청건과 어떤 관계가 됐는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이 정도면 상대의 투지를 꺾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내내 숨겨 온 비밀이었으나 이번만은 참기 힘들었다. 청건을 좋아한다면서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참을 수 없었다.

“언제 그만큼 친해졌어?”

동시에 고개를 돌린 곳엔 청건이 서 있었다. 청건은 열린 문을 닫고는 그들 쪽으로 걸었다. 워커가 타일을 밟는 소리가 선명했다. 걸음을 멈춘 청건은 레버를 잠가 세면대 위로 쏟아지던 물을 멈췄다.

“형 질투 나게. 윤아.”

청건이 여상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현수는 당황한 듯 윤과 지나치게 가까웠던 몸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청건 형. 그게 아니라…… 바닥에 물기가 있어서요. 이분이 잡아 주셨네.”

현수는 젖은 코트를 타고 내린 물이 바닥을 적신 것을 보고는 기민하게 변명했다.

“감사해요.”

현수는 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윤은 어서 대답하라는 듯 종용하는 눈빛을 무시했다. 종일 돌아다닌 탓에 몸도 정신도 피곤했다. 그저 호텔 방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다. 저기 화보처럼 서 있는 이청건과 함께.

“1천만 원짜리 옷이 막 굴러다니네.”

청건은 안타까운 듯 혀를 차더니 젖은 코트를 들었다. 현수는 그의 말에 입을 막는 시늉을 하더니 한 걸음 앞으로 갔다.

“어떡해요. 제가 칵테일을 좀 쏟았는데. 저한테 번호 주시면 옷값 보내 드릴게요.”

청건은 그의 수작이 이어지는 동안 코트를 양손으로 비틀어 잔뜩 머금은 물을 짜 흘려 보냈다. 청건에게 가까이 다가간 현수의 발 위로 물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현수는 놀라며 뒷걸음쳤다. 청건은 그 상황을 보지 못한 건지 코트를 한 손에 쥐고 어깨에 멨던 가방을 내리며 윤에게 다가섰다.

“자, 가방 메자.”

윤은 제 메신저 백을 걸쳐 주는 청건을 올려다보았다. 곧 눈을 마주쳐 오는 청건의 얼굴엔 윤만 눈치챌 수 있는 장난기가 감돌았다. 청건은 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호텔 가야지. 나랑.”

청건의 말에 현수의 몸이 바짝 굳는 게 느껴졌다. 청건은 현수의 젖은 발도, 그가 걸어오는 말도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윤은 어쩐지 1백 년 묵은 체증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웃음을 지은 청건은 곧 몸을 돌리곤 윤을 끌어당겼다. 남자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걸어가 문고리를 돌리던 청건은 문득 행동을 멈추고 물어 왔다.

“근데 너 설마, 스태프분한테 반말한 거 아니지?”

청건이 인상을 찡그린 채 현수를 턱짓했다. 현수는 얼떨떨하게 청건을 올려다봤다. 스, 스태프분?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며. 청건의 눈에 들기 위해 사비로 프랑스에 왔다는 사람인데, 진짜든 아니든 제 얼굴도 모르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에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너무한다. 나한테도 화날 때만 해 주는 걸 스태프분한텐 벌써……. 너 이렇게 아무나 꼬시면 곤란해.”

청건은 짐짓 혼내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상황을 관전 중인 윤의 어깨를 잡아 현수를 향해 돌렸다.

“얘가요, 이렇게 딱 보이듯 지성미가 절절 흐르고, 흠집 하나 없는 진주처럼 순수하게 생겨 가지고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법을 안다니까요.”

청건은 ‘누구’ 들으라는 듯 하던 말을 끝으로 안타깝다는 듯 입꼬리를 내렸다.

“돈만 많아 봤자 뭘 해. 우윤한텐 씨알도 안 먹히는데.”

“…….”

눈꺼풀을 마구 깜박이던 현수는 차마 대꾸도 못 하고 입술을 잘근댔다. 날카롭게 생긴 이빨이 보라색 입술을 찢어 피를 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돈이 많으셔도 윤이한테 함부로 들이대지 마세요. 아무나 못 해. 마음만 다치지.”

청건은 방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보고, 현수가 아까 테이블에서 하던 말까지 일부 들었음이 분명했다. 너는 내게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남자가 꼬시는 상대를 자신이 아닌 윤으로 교묘히 바꾸는 술수까지.

하지만 능청스러운 연기력이 기특한 것은 둘째 치고, 윤은 청건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까 그의 허리춤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에게 눈치를 주자 청건이 윤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 문 쪽으로 먼저 보냈다.

“정 탐나면 줄부터 서요. 순서대로, 예의 있게. 응?”

윤은 이제 완전히 나가떨어진 듯한 현수를 뒤로하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윤을 뒤따라 나가던 청건은 문틀을 발로 밟았다가 한 걸음 후진했다. 이젠 청건에게까지 눈을 부릅뜨는 현수를 훑던 그는 잊은 게 있다는 투로 말했다.

“아. 그리고.”

“…….”

“환기를 좀 잘 시키셔야겠다. 멀리서도 오메가 냄새가 진동을 해서, 좀 역겹네. 그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청건은 완전히 말을 잃은 현수를 뒤로하고 나와 문을 부드럽게 닫았다. 폭력적이지 않았으나 명백하게 상대의 사기를 꺾는 모습이었다.

조금 떨어져 서서 청건을 바라보던 윤은 어쩐지 살이 떨렸다. 그는 처음으로 얼굴 위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윤을 보는 순간 그 표정은 와르르 흩어졌다.

청건은 말랑한 얼굴로 윤에게 다가서더니 대뜸 머리를 들이댔다.

“물리쳤어. 칭찬.”

“칭찬 되게 좋아하네.”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말한 윤이 저를 향해 숙인 남색 머리를 톡톡 쳐 주었다.

“됐어요?”

“둘만 있을 땐 더 진하게 해 줘.”

“봐서요.”

그 대답에 미소 짓던 청건은 윤의 뒷머리를 매만지며 1층 홀을 가로질렀다. 청건이 바의 문을 열어 윤을 먼저 밖으로 내보냈다. 그의 손에 밀려가던 윤이 뒤를 돌아봤다.

“말 안 하고 그냥 가도 돼요?”

“이미 했지. 데이트해야 해서 바쁘다고.”

데이트……. 분명 자신을 따라 나간 걸 사람들도 다 알 텐데. 현수 한 명이 눈치채는 것과 여럿이 아는 것은 달랐다. 윤이 걱정이 되어 걸음을 멈추자 청건이 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 데이트라고?”

“응. 아까 그분이 좀 과한 거 같길래. 눈치도 줄 겸.”

“…….”

“신경 쓸 거 없어.”

그분이라 함은, 청건에게 줄곧 대시하던 여자를 말하는 듯싶었다. 윤은 태연스러운 청건의 모습을 보다가 목덜미를 가만히 긁었다. 기분이 좋으면 안 되는데 좀 많이 좋았다. 숨을 크게 고른 윤은 이내 걱정을 내려 두고 젖은 거리를 밟았다.

둘은 그렇게 은은하게 빛이 깔린 유흥가를 걸었다. 주변은 어두웠지만, 확실히 청건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후미진 거리도 무섭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수와 있을 때도 청건이 올 가능성을 그렸다. 그 덕에 더 상황이 험악해지더라도 상관없다고 여기고 할 말을 다 해 버렸다.

그들 주변으로는 드물게 현지인들이 지나다녔다. 한참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지던 중 윤은 청건을 홱 하고 돌아봤다.

“다른 사람이랑 난 열애설도, 이런 식으로 굴어서 다 들켰나?”

상대를 지켜 주고, 대신 화를 내 주고. 안심시켜 주려고 주변인들한테 둘 사이를 반 공표하듯 하고. 윤의 물음에 청건이 피식 웃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은 자유지?”

“네, 그렇게 하세요. 알아서 질투할게요.”

사실 상대 쪽에서 그와 하는 연애를 일부러 드러내는 게 보통의 루트라는 걸 윤은 다 알고 있었지만, 괜히 토라진 척 보폭을 빨리했다. 그의 행동들이 너무 좋으니 막 장난을 걸고 싶었다. 가짜 화를 풀어 주려 제게 고개 붙이고 애교 부리는 것도 보고 싶었다.

그때 청건이 잡은 손을 당기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 힘에 몸이 휘청인 윤이 중심을 잡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로등 밑에 역광으로 놓인 얼굴은 어쩐지 웃음기가 싹 가셔 있었다.

“키스할래?”

“…….”

그는 답을 듣기도 전에 볼을 감싸며 가까이 다가왔다. 윤은 순식간에 긴장이 스민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제 그만 참아도 되잖아.”

간질간질한 기운이 윤의 등줄기를 훑었다. 청건도 역시 멀리서 시선이 오가던 아까부터 몸을 맞대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몸을 붙여 오는 청건에 허벅지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길 위를 흘긋 바라본 윤이 난감하게 입맛만 다셨다. 물론 당장이라도 그와 키스하고 싶었으나, 야외에서 사진이라도 찍히게 된다면 곤란했다.

그 순간 어딘가에 어깨가 세게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윤은 신음하며 어깨를 붙잡았다. 곧이어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Pardon.”

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동시에 청건은 몸을 부딪친 남자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윤이 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자, 홀린 듯 그들을 쫓아가던 청건이 멈추었다.

“하지 마요.”

“고의인 것 같아서……. 걱정 마. 문제 안 일으킬게.”

청건은 윤의 손을 잡아 내리고 다시 움직였지만, 윤이 서둘러 앞을 가로막았다.

“형이 현명하게 행동할 건 아는데요. 이번엔 그냥 참아요.”

“…….”

“사실 나부터가 이런 상황에 무력하게 있는 걸 싫어해요. 적대감은 지긋지긋하니까. 그래도 형이랑 있을 땐 자중하고 싶어요. 형은 연예인이잖아요. 나는 이제 형 애인이고.”

달래듯 말을 잇는 윤을 가만히 보던 청건은 둘을 돌아보며 웃는 덩치 큰 남자들을 살피다 결국 힘을 풀었다. 그래. 그러자. 윤에게 입꼬리를 올려 준 청건은 자신의 아래를 슬쩍 보곤 말했다.

“덕분에 죽긴 했네.”

윤은 그가 하는 말을 바로 알아채고는 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제 말마따나 아무리 애인이라지만 아직은 조금 낯 뜨거워서. 완전히 적응될 날이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러게요. 이딴 일에도 장점이 있네. 오늘은 편안하게 푹 자겠어요. 그렇죠?”

음-. 말꼬리를 늘리던 청건은 도망가듯 걷는 윤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깐 밀어붙여 달라 하지 않았나?”

“뭐가요, 놔요. 윽, 간지러워요……!”

곧이어 골목 위에선 때 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가로등과 도로 표지판, 가게의 입간판 등에 실컷 부딪치며 달리던 그들은 사람들을 아슬아슬 피할 때마다 여러 번의 ‘Pardon!’을 외쳐야만 했다.

마침내 턱 끝까지 찬 숨을 고르며 호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둘은 서로 마주 보지 않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지독하게 의식적인 침묵 속, 그들은 흉통을 번갈아 키우고 줄였다. 그리고 목적지에서 멈춘 기계가 열리자마자 둘은 복도를 내달려 호텔 방문을 열었다. 시합하듯 신발을 벗고 양손에 든 짐을 모조리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먼저 거리를 좁힌 것은 청건이었다. 그는 윤의 뒷머리를 감싸 당기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무게를 실은 키스에 벽으로 밀쳐진 윤이 그의 허리를 가득 껴안았다. 키스를 처음 하는 것처럼 코로도, 입으로도 갈무리하지 못한 숨이 잔뜩 흩어졌다.

바람에 흐트러진 남색 머리를 손끝으로 훑어 내리던 윤은 입속을 구석구석 헤집는 열 오른 혀에 아랫배를 움찔거렸다. 여전히 아픈 머리와 어깨보다도 더 강한 통증을 가슴 안쪽에서 느꼈다. 심장이 피를 울컥울컥 쥐어짜며 불규칙하게 내달렸다.

윤의 셔츠를 들춰 허리를 지분대던 청건이 곧바로 윤의 목을 빨아 올렸다. 크게 호흡하며 애무를 받아 내던 윤은 제 뒤가 움찔대는 걸 느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경험에 의거한 조건 반사였다.

웃음 짓느라 살랑살랑 움직이는 목울대를 혀로 쓸던 청건이 숨을 고르며 얼굴을 들었다. 열락이 담긴 두 쌍의 눈이 부딪쳤다. 고작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 잠깐 키스를 나눈 것만으로 전신이 따갑고 불에 덴 듯 아팠다. 온몸이 심장이라도 된 듯 여기저기서 맥박이 뛰었다.

“여유롭나 봐.”

청건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윤은 변명하지 않았다. 오해를 받은 김에 윤은 입꼬리를 더욱 끌어 올리며 그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가져다 댔다. 청건은 제 중심을 지그시 비비는 행동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비뚜름히 내렸다. 혀로 입술을 쓴 청건은 당장 윤에게 아래를 박아 넣고 싶은 얼굴이었다.

“콘돔은, 있어요?”

윤은 흥분을 숨기느라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지.”

“무슨 자신감으로 그걸 챙겨 왔대.”

“너 모르게 젤도 샀어.”

청건은 흥분이 머리끝까지 찼는지 농담을 하면서도 이제 웃음기 하나 없었다. 윤은 동굴 안처럼 낮은 목소리에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프런트에선 다른 방 쓸 것처럼 굴더니.”

“그건, 마지막 양심.”

지금은 없지만. 덧붙인 청건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섹스의 신호탄은 진작 터졌다. 그러나 윤은 청건의 어깨를 지그시 밀며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청건은 딸기같이 발개져서는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 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만하게?”

“으응, 아뇨.”

급하지 않은 양 머리를 쓸어 넘기는 윤의 입술은 둘의 침으로 반들거렸다.

“씻어야죠. 찝찝해요.”

윤이 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윤의 맨몸을 빤히 보던 청건은 공중에 들렸던 손을 주먹 쥐며 떨어뜨렸다.

“신종 고문법인가 보네.”

“네.”

픽 웃은 청건은 셔츠 위쪽 단추를 풀어내며 벽에 몸을 기댔다. 윤은 그를 놀리듯 멀리 돌아 걸어가선 욕실 등을 켰다.

“나 씻고, 형 씻고. 졸리면 난 먼저 잘 수도 있고.”

“아…… 제발. 윤아.”

청건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며 죽는 소리를 냈다. 몸을 맞댈 땐 늑대 같던 남자가 순식간에 비 맞은 강아지로 변모했다. 귀여워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사실 급한 건 윤도 마찬가지였다. 윤은 웃을 여유도 없이 욕실 문을 열었다.

“빨리 씻을게요.”

“아니, 이리 와. 씻지 마.”

윤은 투정을 부리는 그를 뒤로하고 욕실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슬리퍼를 밟자마자 움찔대며 멈추었다.

불투명해야 정상일 욕실이 사방팔방 투명해진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래서야 어떻게 마음 놓고 씻으라는 거지? 분명 샤워 도중에 침입을 받을 게 분명했다. 분명 아까도 화장실을 썼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도 이랬나?

윤은 넋을 놓고 청건을 돌아보았다. 청건은 조금 어색하게 어깨를 들썩이더니 “원래 그랬는데.” 하고 대꾸했다. 눈을 얇게 좁히던 윤이 뒷걸음쳐 욕실 밖으로 나왔다.

“거짓말.”

청건은 입꼬리를 올리며 테이블에 여유롭게 걸터앉았다. 전세 역전이었다.

“친밀해지기 딱 좋을 거 같아서. 씻고 나와. 기다릴게.”

“아…… 이러면 어떻게 씻어요.”

“원래 이런 호텔도 있잖아. 누드 욕실. 오션 뷰에 많지만. 여기 뷰도 좋으니까.”

제가 호텔을 몇 번 와 보지 않은 걸 알고 장난을 치는 건지. 윤은 그런 청건을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간 데는 분명 스위치가 있었는데. 어딨어요? 스위치.”

윤이 이곳저곳 살피다 청건을 돌아보니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요?”

“누구랑 갔는데.”

윤은 그제야 청건이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를 눈치채곤 어이없이 웃었다.

“질투할 시간에 씻는 게 낫지 않겠어요?”

“출장이었지?”

“예…… 뭐.”

윤이 얼버무리며 대꾸하자 청건이 허, 하고 웃었다.

삐졌나. 윤이 잠시 침묵하며 말을 골라냈다.

“그럼 그냥 코, 잠이나 자고 공항 라운지에서 씻을까요?”

청건은 입이 죽 나와서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알려 줘요.”

“샤워기 왼쪽에 스위치 있어.”

청건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윤은 고개를 끄덕이곤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어차피 나신을 보여 주게 될 거면서 엄한 곳에 힘 빼는 느낌이 있었지만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문을 닫은 윤은 스위치를 찾아 벽을 불투명하게 바꾸곤 바지를 벗어 수건걸이에 놓았다. 그리고 몸을 씻는 와중 욕실을 노크하는 소리를 들었다.

“윤아, 말할 거 있어.”

“으응, 금방 나가요.”

“들어갈게.”

윤은 맥없이 열리는 문을 보며 황당해졌다. 욕실 안으로 얼굴을 슬쩍 내민 청건이 씩 웃었다. 아니 왜 이놈의 호텔은 잠금장치가 없는 걸까. 윤은 뜨거워지는 목덜미를 느끼며 그를 흘겼다.

“뭐예요.”

“그…… 네 핸드폰이 없어져서.”

“네? 그럴 리가…….”

청건은 윤의 가방을 들고 욕실에 들어오더니 주머니를 뒤적이는 퍼포먼스를 했다. 윤은 ‘정말 없지!’ 말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청건의 의중이 그곳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착잡한 건 사실이었다. 아까 어깨를 부딪쳤던 그들 짓임이 분명했다. 스태프 중 한 사람이 유흥가에 상주하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더니.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거기 든 카드에 전 재산 있는데.”

“그건 정지시키면 되니까. 근데 핸드폰에 있는 정보가 문제네.”

“딱히 든 것도 없어요. 카메라 안 들고 갔을 때 찍은 사진들? ……생각해 보니 조금 아깝긴 하네요.”

“……센터에 연락하자.”

팔에 묻은 거품을 훔쳐 내던 윤은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가슴께를 훑던 청건과 천천히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가만히 윤을 응시하던 그는 가방을 밖으로 던지곤 욕실 문을 닫았다.

“내일.”

“…….”

“지금은 바쁘니까.”

윤은 청건이 걸어오는 대로 뒷걸음쳤다. 욕조 반대편 샤워 부스라 걸리는 것도 없이 벽까지 몰렸다. 촉촉한 몸이 타일 벽에 붙자마자 샤워기를 빼앗겼다. 샤워기를 위에 걸자 이젠 청건의 등 위로 물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그는 샤워와 섹스를 한 번에 해치울 생각인 듯했다. 청건은 침을 꿀꺽 삼켜 내는 윤의 목 위로 입술을 묻었다.

“잠깐…….”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전희가 이어졌다. 거침없이 깨물고 빨아들이는 통에 금세 하얀 살갗이 붉게 올라왔다. 어깨를 움츠리던 윤은 탕, 하는 큰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애무하는 데 집중한 청건이 손에 들었던 젤을 유리 받침 위로 올려 두면서 난 소리였다. 샤워할 시간을 번 게 아니라, 젤 찾을 시간을 벌어 준 게 되어 버린 셈이었다.

젤을 보곤 딱딱하게 경직한 윤이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러나 청건은 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둔부를 양손으로 쥐고 유두 위를 혀로 진득이 쓸었다. 으흑. 몰아치는 애무에 꼼짝없이 갇힌 윤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꾹 감았다.

흡사 다친 짐승과 같은 목소리가 청건의 목구멍에서 들끓었다. 시간을 끈 것이 기세를 꺾이게 하긴커녕 더욱 그를 애타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청건은 티 나게 떨리는 윤의 몸을 느끼곤 고개를 떼어 냈다.

“괜찮아. 긴장 풀어.”

긴장은 어떻게 푸는 건데요? 윤은 바보같이 되물을 뻔했지만 그가 걸친 옷들을 전부 벗으며 제게 시간을 준 탓에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청건은 밖까지 가지도 않고 옷을 대충 뒤로 던졌다. 그러곤 손을 뻗어 샤워 젤을 짰다. 당장 제 쪽으로 다가올까 긴장한 채 있던 윤은 청건이 곧 그의 몸 위로 젤을 비비는 것을 의아하게 보았다.

“나도 씻고 해야 되니까.”

청건은 피식 웃으며 샤워기 밑으로 들어갔다. 윤은 콩닥대는 가슴을 몰래 쓸어내렸다.

그다지 높지 않은 샤워기라 살짝 굽혀진 청건의 몸 근육이 더욱 두드러졌다. 윤은 바로 앞에서 고개를 젖히고 거품을 만드는 청건을 살폈다. 상체 앞쪽을 문지른 후 반쯤 선 성기를 쓸어내리는 모습에 윤은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봐선 안 될 것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욕실은 부끄러웠다.

그러나 윤은 이전보다 더욱 크기를 키우는 자신의 성기를 느꼈다. 청건을 몰래 훔쳐보는 사람이라도 된 듯했다. 복잡하게 엉킨 머리를 느끼며 욕실 벽에 편하게 기대 있으려 노력했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청건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뜨겁게 퍼지는 김 사이로 들리는 웃음소리가 색정적이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돌린 윤은 발끝과 엉덩이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제게 붙은 시선이 거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몸을 뚫어져라 보는 직선적인 시선에 오금이 저렸다.

청건은 마지막으로 샤워기 아래 젖은 얼굴을 쓸어내린 후 젤 통을 들어 손바닥에 한가득 짰다. 텅. 다시금 들리는 통과 유리가 충돌하는 소리에 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제게 가까이 붙어 곧바로 엉덩이를 쥐는 손길에 윤은 침을 꿀꺽 삼켜 냈다. 빳빳해진 제 아래를 슬쩍 보니 프리컴이 올라오고 있었다. 정말 그렇네. 눈앞에 진수성찬을 놓고 한참을 참았다 먹으니 더욱 짜릿할 수밖에 없었다. 윤은 알고 보면 제가 일부 미친 알파보다 더 변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난생처음으로 했다.

청건은 윤의 골 사이로 곧장 젤이 묻은 손을 비벼 왔다. 둔부를 힘 있게 벌렸던 오른손은 이제 둘의 성기를 함께 잡고 움직였다. 윤은 동시에 앞뒤를 마찰해 오는 감각에 그의 양팔을 붙들며 움츠렸다.

느리게 움직이는 두 손에 뜨거운 숨이 퍼졌다. 반대로 몸속은 오한이 들었다.

시작이다. 시작.

머릿속이 경보를 울렸다. 이 와중에 흡사 바윗덩이처럼 보이는 그의 근육들이 과하지 않게 아름다워 입술을 깨물었다. 흐응. 음. 신음을 참아 내는 윤의 목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청건은 제 팔을 움켜쥔 윤의 얇은 두 팔과 자신의 손 사이에서 비벼지는 색이 다른 성기, 윤의 입술을 차례로 살폈다. 그리고 꽉 깨물어 하얘진 윤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키스가 더 이어질 줄 알고 윤의 입술이 벌어지며 혀가 삐죽 나왔다.

청건은 윤의 풀린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소리 크게 내 줘.”

“아……!”

그리고 요청과 동시에 원하는 것을 얻어 갔다. 윤의 구멍으로는 당장이라도 손을 넣을 것 같은 압박감이, 귀두 위로는 미끈미끈한 엄지가 세게 둥글려졌다. 그리고 그 강도로 계속되는 애무에 윤은 청건의 두 팔 위에 놓인 손톱을 미끄러뜨렸다.

“아, 아, 흐윽.”

청건의 가슴 위로 머리를 묻으니 흐린 시야 속에 두 성기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더 짙은 색의 성기보다도 윤의 성기 위주로 압박하는 큰 손이 섹시했다. 흡사 꿈을 꾸는 듯했다. 욕실은 모락모락 퍼지는 김과 습한 숨이 한데 섞여 뿌옜다.

“갈, 후으, 갈 것 같……아요.”

청건은 그 소리에 양손을 떼고 샤워기를 껐다. 윤은 안달이 났다. 딱 맥시멈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는데. 윤은 젖은 머리를 넘기는 청건을 물기 어린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청건은 윤의 흐트러진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웃는 낯을 할 뿐이었다.

윤은 이제 알파의 인내심에 감복할 지경이었다. 청건과 반대로 제 머릿속만 더욱 야한 생각에 박차를 가하는 듯했다. 제게 넣은 상황에서도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 배 속이 후끈거렸다. 이제는 이런 애무만으로는 부족했다.

“왜 멈춰요…….”

윤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청건의 눈이 한 차례 빛났다. 그는 곧장 윤의 허리를 붙들어 욕실을 나섰다. 그 짧은 거리를 지나 침대에 눕혀지는 순간까지가 너무 길었다. 어떤 식으로든 좋으니 윤은 청건이 제게 더 큰 성감을 느끼게 해 줬으면 싶었다.

청건은 윤을 눕히고 그 위를 타고 올라오며 물었다.

“이제 좀 급해졌어?”

“네. 죽을 것 같아요.”

곧장 대꾸하니 청건이 윤의 턱 선을 따라 엄지를 미끄러뜨리며 웃었다. 등 뒤로 젖어 가는 침대를 느끼던 윤은 침대를 짚은 청건의 팔을 쓸어내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줘요.”

“…….”

“형이라면 날 부끄럽게 하든, 무섭게 하든 상관없을 것 같아요.”

“…….”

“아니, 이젠 상관없어요.”

윤은 확언했다. 청건이 제 눈을 빤히 보는 것을 느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입술 위를 혀로 축이는 청건은 여차하면 흐느낄 듯도 했다. 그러나 그는 콧잔등을 살짝 구기며 복받친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하더니, 윤을 붙잡아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그의 위로 올라앉게 된 윤은 제 엉덩이 아래에 딱딱하게 닿는 청건의 성기를 느꼈다. 매끈한 다리가 청건의 골반 양쪽으로 공평하게 벌어져 있었다.

청건이 가볍게 허리를 퉁겼다. 아. 윤은 공중에 두 손을 띄우며 놀라다가 청건의 배를 짚었다. 아직 사정하지 못해 그 짧은 자극마저 눈이 돌아갈 만큼 거대했다.

“나도 보여 줘.”

“……네?”

“자위했다며. 계속 상상했어.”

“…….”

“보고 싶어, 지금.”

청건은 씩 웃었다. 이때가 아니면 윤이 그 부끄러운 짓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간파한 것 같았다. 방금 울컥했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청건은 이제 흥미로운 빛을 띠며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윤은 제 음낭과 성기 밑을 부드럽게 쓰는 행위에 파르르, 떨었다.

“……알았어요.”

윤이 귀까지 붉게 물들이며 어색하게 손을 성기에 가져다 댔다. 텔레비전도 재미없다는 사람이 눈빛을 깊게 가라앉히며 윤의 행위에 무섭게 집중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를 힐끔 보던 윤이 천천히 손을 위아래로 왕복했다. 손을 오므려 만든 구멍 안으로 발갛게 물든 귀두가 마찰하며 찰박대는 소리를 냈다.

청건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베개를 두 개 겹쳐 베며 몸 각도를 조금 더 올렸다. 윤이 빤히 제 아래를 관찰하는 청건의 눈길을 느끼며 손을 빨리했다. 청건은 팔을 뻗어 흰 액이 톡톡 떨어지는 윤의 귀두 끝을 검지로 비볐다. 마치 아이가 처음 보는 물건을 건드려 보듯.

“읏, 으…….”

윤이 엉덩이를 수축하면 그 사이로 청건의 성기가 집혔다. 점점 높아지는 자극에 윤이 몸을 숙이자 청건의 팽팽한 성기가 엉덩이 골 사이를 스치며 튕겨 올랐다. 그 자극에 윤이 꿇은 무릎을 움찔 높였다.

청건은 곧장 그의 아래를 대신 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한 손으론 젤 입구를 무자비하게 뜯고 손가락 사이에 끼운 튜브를 꽉 눌렀다. 손 위에 젤이 쏟아지자마자 청건은 손을 둘러 윤의 구멍에 갖다 대고 문질렀다.

윤은 다시금 앞뒤로 무자비하게 끼쳐 오는 감각에 몸을 떨며 청건의 가슴을 짚었다. 청건은 욕실에서 충분히 푼 뒤쪽으로 지체 없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으흑……!”

“아프면 말해 줘.”

처음 느끼는 이물감에 이를 악물던 윤은 그의 두 손가락이 내벽을 깊이 찌르는 순간 정액을 쏟아 냈다. 그는 허벅지를 크게 움찔대며 청건의 위로 무너졌다. 아프다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 정도의 신음이 줄줄 쏟아졌다.

“안, 돼요. 움직이면…… 후으…….”

청건은 윤이 가까스로 낸 말에 행동을 멈췄다.

“……아파?”

윤은 감질나게 멈추어 버린 손가락에 스스로 움직이려던 하체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젤 때문에 통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아파서가 아니라, 너무 큰 자극 때문임을 설명할 길이 없어 입을 우물거렸다.

“응……?”

윤이 말이 없자 그는 내벽을 손끝으로 조금씩 비볐다. 그때마다 윤은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안심한 듯 조금 휘는 청건의 눈을 보던 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대답을 못 하니 눈치를 챈 게 분명했다.

“……안 아프게 해 주세요…….”

청건은 솔직하게 말을 꺼내는 윤을 끌어당겨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윤의 목덜미를 제 쪽으로 누르며 아래에 박혀 있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윤은 내부의 살결이 밀려왔다 빨려 나가는 기묘한 느낌에 결국 눈을 꽉 감았다.

“형……, 으읏…….”

“윤아. 나 못 참겠어.”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 청건의 목소리만은 뚜렷했다.

“조금 빨라도 나 미워하지 마.”

“흐윽, 아, 앗.”

“안 아프게 잘할게. 응?”

왕복을 멈추지 않고 답을 구하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끓었다. 철벅이며 드나드는 손에 몸을 떨던 윤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더 해 줘요. 조금 더 세게. 더 야하게.

제 대답에 눈이 돌아간 청건을 보고 싶었으나 윤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이곳저곳 움직이던 길쭉한 손가락이 한 지점을 세게 문질렀을 때 눈앞이 새하얗게 번진 탓이었다.

신음이 더욱 높아지자 청건은 한쪽 팔꿈치로 상체를 고정했다. 그러곤 더욱 힘을 주어 그곳만을 찔러 왔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윤은 계속해 수축하는 배 속을 느끼며 흐느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청건의 눈 안에 담긴 소유욕을 읽은 윤은 몸을 세워 청건의 입술을 찾았다. 멈추지 않는 추삽질에 그의 입술을 떨리는 이빨로 깨물었다.

만져 주지도 않은 윤의 아래가 다시 커진 것을 눈치챈 청건이 입술에 깊게 입을 맞추곤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경련하며 그의 위에 무너진 윤을 돌려 눕혔다. 청건이 위를 차지하며 리모컨으로 방을 점등하자 조금 찡그려 있던 윤의 미간이 펴졌다. 물기가 찬 시야 안으로 은은한 금빛 무드 등과 화이트 에펠이 아른거렸다.

청건은 콘돔을 찢어 착용 후 한계까지 부푼 그 위로 젤을 잔뜩 짜냈다. 몽롱한 윤의 얼굴 옆으로 팔을 짚고 젖은 눈 위로 짧게 키스했다.

“나만 보기 너무 아깝다. 다음엔 꼭 거울 두고 하자.”

윤은 힘이 빠진 채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기대되네요.”

소리 없이 웃던 청건이 코 위에 입을 맞췄다.

떨리는 숨을 고르던 윤은 곧 묵직하게 밀려 들어오는 청건에 숨을 들이켰다. 커다란 성기는 손과는 다르게 아주 느린 속도로 진입했으나 여전히 벅찬 느낌에 윤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흐윽, 형. 잠깐만…….”

윤이 목이 멘 채 부탁했지만 청건은 묵묵하게 단단한 기둥을 삽입해 왔다. 윤은 숨을 멈추고 청건의 등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손톱이 그의 등을 날카롭게 긁어내렸다. 그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맞아 들어가는 기계처럼 아주 느리지만, 정속도로 뒤를 꿰뚫었다.

윤의 젖혀진 목이 짧게 경련했다. 흰 베개 위로 갈색 머리가 흐트러지는 광경을 청건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뿌리 끝까지 성기를 넣은 채 숨을 골랐다.

“쉬…… 숨 쉬어.”

청건은 윤이 베고 있는 베개를 바닥으로 치워 냈다. 이어서 윤의 귓가에 쪽, 쪽 입 맞췄다. 윤은 그제야 빳빳하게 굳은 제 몸을 의식하곤 서서히 멈춘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서서히 굳은 근육이 풀려 갈 무렵이었다.

“으응읏……!”

커다란 성기가 빠져나가는 것에 소스라친 윤은 입술을 덜덜 떨었다. 이어서 그는 뿌리 끝까지 성기를 쑤셔 넣었다. 쾅. 쾅. 쾅. 지천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윤은 전신으로 번지는 천둥 같은 감각에 창백해진 채 그의 팔을 긁어내렸다.

바들바들 떨리던 양손이 청건에 의해 머리 위로 고정됐다. 동시에 청건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삽입은 거칠게 이어졌다. 아까의 부탁을 겁도 없이 승낙한 것에 대한 대가였다.

얇은 두 다리는 청건의 허벅지를 겨우 밟고 있다가, 그의 둔부 위에서 흔들리다가, 끝내는 허리를 애타게 감쌌다. 아까 찾았던 지점을 계속해서 건드리고 가는 추삽질에 발끝이 잔뜩 곱았다.

“윽, 하앗, 아!”

“하아…….”

윤은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 번의 허리 짓에 성기 전체를 넣었다 빼기도, 느끼는 지점을 정확하게 찌를 수 있게 반만 삽입하기도 했다.

지레 겁먹었던 섹스는 점차 형용하기 힘든 열락으로 물들어 갔다.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는 와중 단 하나의 불만이 스쳤다. 너무 능숙해. 너무.

“안 돼…… 죽을, 으흑, 죽을 거, 같아…….”

분한 마음에 그를 밀어내려 어깨를 할퀴었으나 되레 청건을 재촉하는 일밖엔 안 됐다. 더욱 몰아붙이는 속도에 윤의 하체가 공중에 들렸다. 청건이 한쪽 발을 침대에 단단히 고정해 움직이자 더 자극적으로 내벽이 쓸렸다.

절정에 다가올수록 윤은 감기는 눈을 겨우 떠 그와 눈을 맞추었다. 모순적인 행동이었다.

능숙해서 좋은 거지, 너. 더 죽겠다는 거지.

윤은 속에서 올라오는 물음에 입꼬리를 올렸다. 새로 알게 된 나는 왜 이렇게 변태 같을까. 저조차도 몰랐던 이 비밀은 청건이 없었으면 죽을 때까지도 알지 못했을 테다.

윤이 흔들리는 와중 혀를 빼내자 청건은 눈치 좋게 키스를 시작했다.

너무 좋아, 형.

윤은 아득한 정신 사이로 고백했다. 청건은 산들바람 같은 웃음을 흘렸다. 나도 사랑해. 그리고 그렇게 대답했다. 윤은 제 귓불을 깨물어 오는 청건을 느끼며 사정했다.

숨을 고르던 청건은 기절 직전인 윤을 살피다 옆자리에 누웠다. 윤은 불에 덴 듯 뜨겁던 성기가 빠져나갔음에도 여전한 삽입감에 뱃가죽을 경련했다.

숨을 한참 갈무리하던 윤이 제 머리를 만지작대는 청건을 돌아보았다.

“형은 못 했잖아요.”

“응. 더 해도 돼?”

……더? 어, 그건…….

사정을 두 번이나 한 탓에 당장은 엄두가 안 났다. 그 물음에 티 나게 머뭇대자 청건은 피식 웃으며 윤의 허리를 안았다. 과즙을 쥐어짜듯 양팔로 몸을 꽈악 안아 오는 청건에 윤이 짧게 기침했다.

그는 이갈이를 하는 강아지처럼 윤의 목 옆을 잘근대며 깨물었다. 윤은 행위를 끝내자마자 애교를 부리는 청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귀여워요.”

“내가?”

청건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물렸다. 윤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귀여워요.”

“아아, 그렇구나.”

청건은 씩 웃으며 윤의 말에 수긍했다. 윤이 마주 끄덕이자 청건도 다시 상냥하게 끄덕끄덕.

눈을 깜빡하는 다음 순간 윤은 그의 배 위에 앉혀진 채였다. 기시감이 들었다.

“한 번 더 하자. 귀엽게.”

“…….”

윤은 사아아, 소름이 이는 전신을 느꼈다. 그제야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 제 주둥이를 탓하며 입술을 말았다.

“응?”

“지금으은…… 좀…….”

렉 걸린 노트북처럼 말을 끌자 청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콘돔을 빼 바닥에 던졌다. “응. 지금은 좀.”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동의했다. 윤은 선득한 기운을 감지했다.

“좀이라니까?”

“응. 좀.”

그는 언제 뜯었는지 모를 콘돔을 끼고 언제 쥐었는지 모를 젤을 짰다. 윤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좀이 뭔지 몰라요?”

“좀…… 난감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는 무서운 소리와 함께 윤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받쳐 높이 올렸다.

“손, 손으로 해 줄게요. 아니면 입…… 으읏……!”

윤의 말에도 그는 꽉 쥐어 벌린 엉덩이를 빳빳한 성기에 천천히 꽂아 내릴 뿐이었다. 아무리 방금 빼내었다지만, 커다란 몽둥이가 몸을 뚫는 감각이 익숙해질 리 없었다. 윤이 허벅지 안쪽을 바들대며 허공에 들린 양손을 어쩔 줄 모르자 청건이 윤의 두 손을 한 손으로 지탱했다.

겨우 반절쯤 들어왔을 무렵 그는 허리를 올려붙였다. 후으, 아! 윤은 청건의 손을 동아줄처럼 틀어쥐었다. 윤은 절대 거절할 수 없게끔 자신을 몰고 가는 청건을 풀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 쌀 예정인데요.”

“음, 두 번만 더하면 딱 좋을 거 같아.”

“……제가 죽었으면 좋겠는 건 아니죠.”

“비슷해.”

“윽! 아흐…… 혀엉…….”

윤의 원망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알파를 죽어라 피해 다니다가, 하필 정착한 곳이 우성일 것은 뭐란 말인가. 세상 제일 절망하는 이성과는 달리, 거대한 이물을 삼킨 내벽은 다시 시작된 섹스를 반기듯 부드럽게 조여들었다.

* * *

잠이 들려는 윤을 데려가 샤워시키다가 한 번 더. 젖은 머리를 말리다가 한 번 더. 그렇게 첫날밤은 윤이 더 이상 쏟아 낼 것이 없을 무렵에야 끝이 났다. 무려 하루 세 번의 샤워를 끝내고 뽀얀 김과 함께 밖을 나서자 그의 뒤를 졸졸 따르던 청건이 힘없는 윤을 덥석 안아 침대 위로 내려 주었다.

청건이 입술을 쪽 맞대자 윤이 도끼눈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진짜 더 안 해요. 아니, 못 해 진짜. 더 하면 형 죽고 나 죽어.”

“응. 절대 안 해.”

이청건은 미안하기는 한지 슬그머니 드라이기를 집어 윤의 옆에 앉았다.

“자제 못 해서 미안해.”

“1백 번 더 미안하다고 하세요.”

“알았어. 미안해.”

수건 든 손으로 윤의 젖은 머리를 말려 주던 청건이 민망하게 웃으며 드라이기를 가동했다. 윤은 그의 손길이 목을 매만지다 또 농밀해지는 것은 아닌지 피곤한 와중에도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뒷머리를 매만지는 감각에 점차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끔벅였다. 점차 만족스러운 가오리 얼굴이 되어 가던 윤이 청건의 품 안으로 폭삭 기대었다. 청건은 그의 무게를 가볍게 견뎌 내며 머리를 계속 말려 주었다. 그러다 목 뒤로 쪽, 쪽, 입술을 댔다. 퍼뜩 정신 차린 윤이 급하게 어깨를 틀었다.

“아, 형.”

“진짜 안 할 거야…… 예뻐서 그래.”

의심스러운 이청건을 멀리 밀어낼 힘조차 없었다. 그를 감당하느라 여기저기 짚던 팔다리가 가만히만 있어도 후들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그의 품에 늘어지자 청건이 낮게 웃었다. 뭘 좋다고 웃어. 윤이 입을 죽 내밀었으나 얼굴엔 결국 미소가 감돌았다.

꿈에서나 그리던 에펠 뷰. 고급스러운 과일 향 바디 워시. 누군가가 처음 말려 주는 머리. 갑작스러운 여행에 처음 입어 본 청건의 옷. 남남이 아닌 연인으로서의 관계. 그의 반말. 그의 체취. 나를 사랑하는, 완벽한 알파. 전부 마음에 들었다.

이내 드라이기를 끈 청건이 노곤해진 윤을 침대 위로 눕혔다. 바로 옆에 누워 코끝을 톡, 입술을 톡 매만지던 손이 마침내 윤의 가슴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윤은 무거운 눈꺼풀을 감은 채 옆으로 돌아누워 청건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가만히 매만져 주었다. 그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윤은 다시 눈을 뜬다. 조명을 담은 청건의 눈이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마주 보지 않을 때에도 줄곧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생길 줄은 몰랐다.

더 깊어진 호기심이 들끓었다. 지금 형은 무슨 생각을 할까. 연인이 된 나는 그에게 어떤 느낌이었을까. 저를 이렇게 만든 남자에게 경외감이 들었다. 생소한 감정에 입술을 꼭 물고 있던 윤이 고민 끝에 물었다.

“형은 날 얼마나 좋아해요?”

그동안 유치하다 여겼던 질문을 제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줄곧 묻고 싶었다.

“많이.”

“다른 말로는요?”

“왜, 마음에 안 들어?”

다른 말이라고 해 봐야 사랑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우습게도 확신을 원했다. 윤은 청건의 혈색 좋은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난 쉽게 대답한 말 아닌데.”

“나도 쉽게 물은 말 아닌데.”

둘은 익숙한 대화 흐름에 웃음을 흘렸다.

“제대로 잡아 주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어요.”

“놓치면 찾으러 갈게.”

“어디로 갈 줄 알고요?”

“그게 어디든지 찾을 수 있어.”

“못 찾을걸요.”

윤의 단언에 청건은 뽀송뽀송한 볼을 쿡 찔렀다.

“이러면 나 오기 생기는데. 내가 널 왜 못 찾아. 네 향이 다 여기 있는데.”

청건이 제 코를 톡 두드리며 하는 말에 윤은 작게 코웃음 쳤다. 알파가 오메가 향이나 십 리 밖에서도 맡겠지, 베타인 제 향을 맡을 리는 없으니까.

“오메가한테나 먹힐 대사네요.”

“그런가…….”

청건은 윤을 꽉 끌어당겨 제 몸 위로 올렸다. 목에 얼굴을 파묻고 윤의 체향을 들이쉬던 청건이 이내 고개를 떼고 씩 웃는다. 달래 주는 것이다. 윤의 말들이 불안에 의거한 것임을 다 알고서.

“가을에도 보게 됐네요, 우리.”

“음, 같이 첫눈도 보고 스케이트도 타려면 겨울에도 봐야 돼.”

청건의 대답에 윤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청건의 쇄골께를 검지로 살살 긁으며 말을 골랐다.

“저는 봄 날씨가 더 좋던데.”

“나도 좋아해. 그럼 우리 꽃 보러 많이 다녀야겠는데.”

“괜찮네요. 그럼 형은 피서는 어디로 가요? 전 바다 가 본 적 없는데.”

“진짜? 그럼 여름엔 윤이랑 바다 가야겠다.”

바로바로 맞장구를 치는 청건에 결국 웃음이 윤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청건은 하도 윤에게 비비적대느라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로 웃더니, 윤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잘 부탁해. 앞으로도.”

“……저도요. 형.”

1백 화. 그가 장난처럼 말했던 말이 생각났다. 신뢰도로 치환하지 않은, 오로지 둘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가정한 1백 화.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어디쯤 왔을까.

윤은 따뜻한 청건의 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규칙적으로 닿아 오는 청건의 토닥임에 금방 정신이 몽글몽글 흩어졌다.

깊은 가을이 와도 이청건은 여전했으면 좋겠다. 장난처럼 약속한 1년보다 더 보고 싶은데. 윤은 천천히 깜박이던 눈꺼풀을 내렸다. 형만은 날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청건은 듣지 못할 소원을 빌면서.

* * *

침대에 누운 윤은 벽에 붙은 시계를 보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정오였다. 늦게 잠이 든 것 치고는 빠른 기상이었다. 열어 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그림 같았다. 하루 새에 먹구름이 완전히 가셔 쾌청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행하기에 최적인 날씨와 달리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분명 평소처럼 숨을 들이쉬고 있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마음 같아선 기지개라도 시원하게 켜고 싶었으나 그럴 힘조차 없었다.

바짝 마른입을 느끼던 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곁탁자엔 가득 따라져 있는 물과 종합 감기약이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붙은 포스트잇을 발견하곤 손을 뻗었다.

「수프 사 놨으니까 먹고 약도 꼭 먹어. 촬영 끝나는 대로 일찍 올게. 이따 봐.」

어른스러운 글씨가 어느덧 눈에 익었다. 힘없이 웃던 윤은 그가 가져다 둔 물을 반 잔 정도 마셨다. 사 놓았다는 수프는 테이블 위에 잘 싸인 채 놓여 있었다.

탁자를 짚고 일어난 윤은 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잠시 시야가 점멸했다가 돌아왔다. 뜨거운 숨을 내쉬며 눈을 깊이 감았다 뜬 그는 겨우 테이블로 걸어갔다. 고작 이 거리를 왔다고 기력을 전부 소진한 것 같았다. 의자에 쓰러지듯 앉은 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마지막 날인데. 최악이네.

머리뿐만 아니라 내장 곳곳에 미열이 끓고 있었다. 게다가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굳이 되짚어 보지 않아도 원인이야 뻔했지만…….

가지런히 놓인 숟가락을 든 윤은 조금씩 수프를 떠먹었다. 청건이 당부한 대로 그릇을 거의 비우고 약까지 먹었다.

입맛이 땅을 친 와중에도 딸기가 가득 박힌 케이크가 당겼다. 핸드폰이 없어 사 와 달라 부탁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다시 침대에 파묻힌 윤은 병든 닭처럼 꾸벅이다가 결국 쓰러지듯 잠들었다.

청건이 돌아온 것은 2시 반 무렵이었다. 윤은 이마를 짚어 보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왔어요?”

잠긴 목소리로 말하자 청건이 눈 크기를 키웠다.

“미안. 더 자.”

그러곤 이미 배까지 덮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더운데……. 그러나 윤은 그가 해 주는 대로 내버려 두곤 묵직한 눈을 깜박였다. 청건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윤의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었다.

“다행히 나아졌네. 응급차 부르려던 걸 누가 하지 말라고 말려서 내내 걱정했어. 하여튼 아플 때도 고집은.”

“내가 말렸다고요?”

“기억 안 나?”

생각에 잠겼던 윤은 어느덧 흐릿해졌던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앞으로 그러면 무시해요. 그건 그냥 어릴 때 습관이니까.”

“어릴 때 습관?”

청건이 되물었다. 윤은 시계를 흘끔 올려다보곤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청건의 부축을 받으며 헤드에 기대앉자 확실히 아까보다는 나아진 몸이 느껴졌다.

“보육원에서 지냈을 때 병원을 싫어했었거든요.”

“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청건은 작은 목소리로 반응했다. 윤은 지금이 딱 적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때가. 직접 보지도 못한 그때를 그려 보듯 조용해진 그에게 윤이 덧붙였다.

“우린 아프면 병원으로 갔어요. 진짜 병원이 아니라, 건물 2층에 있는 방이요.”

“…….”

“아파도 우린 최대한 오랫동안 참았어요. 견디다가 정말 못 참을 정도가 돼서야 원장한테 말을 했어요.”

청건은 그다지 대단한 얘기가 아님에도 눈을 빛내었다. 윤은 작게 미소 짓다가 말을 이었다.

“‘병원’에선 노란 액체가 담긴 주사를 놔 줬는데, 우린 그게 쥐 오줌인 줄 알았거든요.”

청건이 그 말에 작게 바람을 새며 웃었다.

“무의식에 남았나 보다.”

“그럴 거예요. 병원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은 그것밖에 없어요. 저 몸살 걸렸을 때 그거 맞고 반나절이나 울었거든요. 머리가 깨질 정도로.”

“억울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윤에 청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윤의 귓불을 매만졌다.

“효과는 좋더라고요. 억울하게.”

“비타민 아니었을까?”

“그랬을 거예요. 밥이 늘 부실해서 힘이 없었는데, 그거 한 번에 며칠은 괜찮아지더라고요.”

“네가 왜 이렇게 말랐는지 좀 알겠네.”

“응. 못 먹고 커서요.”

윤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청건의 웃는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청건은 가만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가 윤의 손을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슬프라고 한 얘기 아닌데.”

“그냥. 네 얘기 듣고 싶었는데. 좋아서.”

청건은 윤의 가족 구성원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관심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직접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 준 모양이었다.

“더 들려주면 안 돼? 어릴 때 이불에 실수한 것도 좋으니까.”

“어, 여섯 살에 한 번 그랬었어요. 거기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무서웠던 때라. 엄청나게 혼나고 이불 빨았었는데.”

더욱 묘해지는 청건의 얼굴을 보던 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를 흘겼다. 괜히 신나서 얘기했더니 반응이 영 아니었다.

“좋긴 무슨……. 정떨어지는 것 같은데.”

괜히 말했어. 윤은 제 입을 늘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청건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문질렀다.

“……윤아.”

낮은 부름에 윤은 내렸던 시선을 흘끔 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입술 위로 몰캉한 감각이 깊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몸을 천천히 뒤로 물린 청건의 얼굴 위에 고요한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왜 지금 키스를 하고 난리예요.”

윤은 머쓱함에 중얼댔다. 미소를 짓던 청건이 양팔을 벌렸다.

“안아 줘.”

“…….”

그는 윤이 팔을 슬쩍 공중으로 들자 허리를 꽉 쥐어짜듯 안아 왔다. 윤은 얼결에 청건의 등을 토닥였다. 말만 ‘안아 달라’지, 안기는 쪽은 늘 윤이었다. 윤은 가슴 위에 꾹 와 닿는 청건의 머리를 쓰다듬고 귓가도 가만히 매만졌다.

“너무 좋다. 윤아.”

“…….”

“나한테 다 보여 주는 네가 너무 좋아. 네 몸도, 향도 좋아. 그냥 다 씹어 먹고 싶어.”

윤은 청건의 솔직한 표현이 지금 가장 적절한 말임을 통감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청건의 머리 위로 입술을 파묻고 속삭였다. 나도 형 씹어 먹고 싶어요.

이렇게까지 의무적이지 않은 사랑은 또 처음이라고 느꼈다. 뜨거운 내장이 지나치게 간지러웠다.

조금 긴 침묵이 흘렀다. 그대로 멈춰 굳어 버린 건가 싶던 청건이 갑작스럽게 옷 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검은 티셔츠 안으로 얼굴을 들이민 청건이 윤의 허리를 붙잡아 침대로 눕혔다.

“으앗, 형……!”

배 위로 쪽쪽 적나라한 소리를 내며 입 맞추는 행위에 윤은 살짝 무서워졌다. 아무리 서로 씹어 먹고 싶어도 더 이상의 섹스는 무리였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정말 타국의 응급차에 실려 가는 수가 있었다.

청건은 급기야 티를 쭉 들어 올리고 상체의 살을 이곳저곳 물어 왔다. 그의 어깨를 잡고 안절부절못하던 윤이 서둘러 말했다.

“오, 오늘 촬영 잘 했어요?”

“이따 알려 줄게.”

청건의 정수리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윤은 조급해졌다.

“얼굴 보여 줘요. 얼굴 보고 싶어요.”

“이따 봐. 시간 많아.”

청건은 하찮은 방해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듯 완고했다. 안 그래도 상태가 심각할 붉은 목 위로 또 이를 세웠다.

“저 목 티 없어요!”

“나한테 있어.”

“안 돼요, 형. 잠깐……. 나도, 나도 형 옛날 얘기 듣고 싶어요……!”

미끈한 목선을 따라 키스하던 청건이 이내 윤과 눈을 맞췄다.

“……내 얘기?”

이목을 돌리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윤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얘기.”

청건은 접었던 팔을 펴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윤과 얼굴이 가까워지자 자연스레 입술이 붙었다. 윤은 맥락 없이 키스해 오는 청건에 긴장했으나 그의 움직임에 부드럽게 응했다. 한참 후 입술을 뗀 청건은 “그래. 다음에 해 줄게.” 하는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다.

청건이 어물쩍 넘어간 대화 주제가 다른 것이었다면 그러려니 싶었겠지만, 줄곧 궁금했던 것이라 윤은 마음 한편이 이상했다. 일부러 피한 건가? 아니면…….

청건은 침대 옆에 두었던 쇼핑백 세 개를 집어 윤의 옆에 올려 두었다.

“자, 선물 사 왔어.”

“……선물이요?”

“응. 촬영지 주변에 명품관이 잘 돼 있더라.”

그러나 그 소리에도 윤은 달갑지 않았다.

“물 쓰듯 하는 소비 습관은 언제 고칠 거예요?”

“그러게. 근데 어떡해. 뭘 자꾸 사 주고 싶은 마음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데.”

청건이 윤의 티를 가지런히 정리해 주곤 쇼핑백에서 꺼낸 흰 덩어리를 슬쩍 내밀었다. “그럼 형 말고 그걸 누가 컨트롤해요.” 윤은 그가 내미는 더스트 백을 받으며 중얼댔다. 그리고 얼른 열어 보라는 듯 눈짓하는 청건을 향해 덧붙였다.

“돈 다 쓰고 나 원망하지나 마요. 노후 대책은 돼 있어요?”

“평생 너 밥 사 주고 옷 사 줄 돈은 차고 넘치네요.”

“……평생은 어디서 나온 계산법이에요?”

막 1년짜리 연애를 약속한 마당에 아무렇지 않게 평생을 언급하다니. 윤이 비판 아닌 비판을 하자 청건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며 말했다.

“얼른 봐 주라. 그래도 사귀고 첫 선물인데…….”

“……뭔지만 볼게요.”

그제야 더스트 백을 여는 윤에 청건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말랑거리는 물건을 꺼내 보니 지금 딱 입으면 좋을 법한 아이보리 색 브이넥 니트가 나왔다. 니트를 펼쳐 보자 브랜드 로고가 어느 곳에도 찍혀 있지 않아 윤은 그제야 편안하게 얼굴이 폈다.

“나도 오늘부로 막 쓰는 건 자중해 볼게. 이것도 그렇게 비싼 거 아냐. 그냥…….”

“10만 원?”

“……어……?”

“비싼 브랜드 아니죠? 그럼 마음에 들어요.”

“어어. 맞아. 10만 원…… 언저리?”

청건은 가격이 생각나지 않는지 말을 얼버무렸다. 윤은 사이즈가 잘 맞을 듯한 옷을 앞뒤로 돌려 보았다.

“형이 안목은 좋아요.”

“……그럼. 나 작품 고르는 능력 수맥 봉 뺨친단 칭찬 많이 들었거든. 애인도 고르고 보니 대박이잖아. 우윤이라니, 그치?”

청건은 없는 말 있는 말을 다 뱉으며 니트에 있던 가격표를 슬쩍 떼어 내 숨겼다.

“입어 보자.”

윤은 자연스레 제 티셔츠를 올리는 몸짓에 응했다.

“말 그대로 첫 선물이니까 받는 거예요. 더는 안 받아요.”

“팔.”

윤이 두 팔을 공중에 들자 청건이 옷을 마저 벗겼다.

“옷은 예외로 두자. 밝은 옷 많이 사 주고 싶단 말이야.”

니트를 입히고 윤의 머리를 빗겨 준 청건이 몸을 비스듬히 물렸다. 위아래로 윤을 관찰하던 그는 대상이라도 탄 듯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윤은 괜히 머쓱해져 옷을 죽 늘려 보았다.

“완전 네 옷인데.”

“……진짜요?”

“거울 볼래?”

윤은 그가 내미는 손을 슬며시 잡았다. 노곤하게 퍼진 몸을 끌어내는 청건을 따라 바닥에 발을 디뎠다. 다행히 죽을 것 같던 어지러움이 많이 가신 것 같았다. 섹스의 여파로 인한 아래의 욱신거림은 그대로였지만.

욕실 문을 젖힌 그가 자신의 앞으로 윤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윤이 정면에 붙은 큰 거울을 보게 한 청건은 욕실 불을 탁, 하고 켰다.

“…….”

“어때. 예쁘지.”

청건이 양어깨를 잡은 채 속삭였다. “오버 한 거 아니잖아. 그렇지.” 그의 질문에도 윤은 아무 말 못 하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 청건은 거울을 통해 바라보던 시선을 윤의 옆얼굴로 내렸다.

“……별로야?”

“…….”

“……이상해?”

윤은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머뭇댔다. 입을 열면 유난스럽게 울렁이는 목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쉰 윤이 청건을 고개 돌려 올려다봤다.

“……내 눈엔 엄청 예쁜데. 우리 객관적으로 사람들한테 물어볼까? 근데, 안 어울린다고 하는 사람 한 명도 없을걸.”

그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청건은 ‘다음엔 사 오지 말라’는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하는지 윤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가격 때문이면……. 생각해 봐. 과소비가 아니야 이건. 길 돌아다니다가 검은색 아닌 옷만 보면 전부 다 눈에 들어오는데 어떡해. 죄다 살 뻔했는데 그중에 고르고 골라서 세 벌만 골랐으면, 과소비는…… 아니지 않나……?”

이어지는 청건의 변명에 윤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눈만 도르르 굴렸다. 싫어서 그런 거 아닌데. 고민하던 윤은 청건의 블레이저를 살짝 잡아당겼다.

“같이 나갈까요? 이거 입고요.”

“……어?”

“교복 이후로 하얀 옷은 처음 입어 봤어요.”

“…….”

“예쁘다는 말이에요.”

윤은 브이넥 니트를 살짝 들추며 웃었다. 청건이 자신을 멍하니 보고만 있자 윤이 그의 몸을 손으로 살짝 밀며 “네?” 물었다.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의 굳었던 입매가 서서히 호선을 그렸다. 안심한 듯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청건에 웃음이 나왔다.

청건은 당장 윤의 손을 붙잡고 가더니 캐리어를 뒤졌다. 안 그래도 봐 둔 데가 있었다고. 솔직히 가지 못했으면 조금 아쉬웠을 것 같다며 뒤늦게 말하는 청건은 역시 귀여웠다.

잠시 후 청건은 옷까지 다 입혀 놓고 윤의 열을 다시 재 보더니 외출을 재고하자 했다. 그러나 되레 윤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금 아프고 말지 싶었다. 안 그래도 짧은 첫 여행을 호텔에만 머무른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둘은 오후 3시 무렵이 되어 밖을 나왔다. 1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라 도보 이동을 택했다. 파란 차양과 빨간색 2층 버스, 이국적인 흰 건물들, 카페가 많은 골목과 고양이, 청동 동상과 하늘에 한가득 떠 있는 뭉게구름을 스쳤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윤의 몸은 물을 죄 집어삼킨 플로랄 폼처럼 묵직하고, 손난로를 두른 것처럼 후끈거렸다. 하지만 낯선 곳을 자유롭게 걷고 있는 지금, 청건과 함께일 수 있다는 것에 아픔도 잊을 정도로 행복했다. 천둥 번개가 무섭게 치고 폭우가 쏟아져도 행복했을 거라 장담했다.

도착지인 건물을 목전에 둔 윤은 바람에 흐트러지는 갈색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따금씩 걸음을 멈출 때마다 청건은 그런 윤을 오래 관찰했다. 제게 닿은 시선을 또 깨달은 윤은 그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왜요. 예뻐요?”

“……안 되겠다.”

청건의 나직한 속삭임 뒤로, 윤은 횡단보도의 파란불을 보고도 이름 모를 건물 사이로 끌려가야 했다. 곧바로 입을 맞대 오는 청건에 윤은 놀란 눈으로 그의 뒤편에 놓인 인도를 흘끔거렸다. 그런 윤은 깨달았는지 청건은 짙어지는 키스 중에도 잠시 입술을 떼었다.

“괜찮아.”

다시금 맞닿는 입술에 윤은 그의 재킷을 쥐며 눈을 꼭 감았다. 가벼운 키스로 끝나지 않을 것은 예감했지만, 온몸이 풀릴 때까지 키스를 해 본 건 또 처음이었다. 컨디션 난조가 한몫을 했을 진귀한 경험이었다. 키스 중 무너지려는 윤의 허리를 지탱해 준 청건이 이마를 맞댄 채 웃었다.

한참 후 골목을 나온 윤은 뜨거운 숨을 갈무리하며 청건을 보았다. 잘 뻗은 이마와 콧대, 방금 키스를 나누어 촉촉한 입술 위로 나뭇잎 그늘이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윤은 그 순간에 그에게 다시 입을 맞출 뻔했으나 꾹 참아 냈다. 아는 이가 있을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던 키스가 조금 아쉬워지려 했다.

윤은 청건이 이끄는 대로 낯선 건물에 발을 디뎠다. 박물관인가, 싶을 정도로 꽤 커다란 건물은 입구에서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다들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기에 잔잔한 음악 소리가 더 선명했다.

“Bonjour.”

“Bonjour. Avez-vous réservé?”

청건은 짧은 대화를 끝으로 직원이 건네는 브로슈어를 받아 들었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좋은 향이 났다. 과일 향과 싱그러운 꽃, 풀 향이 합쳐진. 듣기로는 베르가모트 향이랬다.

윤은 자신의 등을 천천히 밀며 걷는 청건에 의해 앞으로 걸어가면서 종이 위로 적힌 문구를 읽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불어로 된 앞 페이지였다. 중간중간 읽을 만한 문구들이 시야에 박혔다.

파리에서 열리는 행사 기간. 딱 오늘이 끝이었다. 그다음 마구잡이로 눈에 들어온 단어들은 익숙한 것들이었다. Exhibitions. festival. Louis, Victoire, Adélaïde, 그리고…….

“……아델?”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글씨를 뚫어져라 보던 윤이 대답을 종용하듯 청건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척을 하려는지 다른 곳을 보는 청건의 허리를 찌르자, 반은 뿌듯하고 반은 머쓱한 웃음을 짓던 그가 윤의 귓가로 입을 가까이 했다.

“맞아, 아델.”

여전히 믿질 못하겠다는 듯 브로슈어를 연이어 넘기던 윤이 두 팔을 툭 떨어트렸다. 아까 키스를 했을 무렵부터 휘몰아치던 열이 다시금 훅 끼쳐 왔다. 다시 지끈거리는 전신의 통증은 마냥 아파서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소리라도 치고 싶은 흥분감을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형.”

“천천히 즐기다 가자.”

윤은 청건의 웃는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초록 넝쿨과 샐먼 핑크빛 장미가 가득 매달린 높다란 아치형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시의 규모는 서울에서 열렸던 것보다 훨씬 컸다. 흑백 사진의 대가인 작가와 소시민만을 담는 작가의 작품을 지나면, 윤은 담아낼 수 없던 ‘사람’과 ‘무의식’을 주제로 한 사진가 아델의 작품이 펼쳐졌다. 꿈속인 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현지에서 열린 아델의 전시를 직접 보고 있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윤이 작품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는 동안 청건은 그의 모습을 핸드폰에 담았다. 윤이 다시 한번 더 전시장을 돌자고 제안한 덕에 청건은 그제야 작품을 구경할 수 있었다.

“형은 무슨 작품이 제일 좋았어요?”

청건은 전시장을 나오며 묻는 윤에게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난 이거.”

무표정일 땐 매서워 보이기까지 하는 눈매가 유독 동글동글해져 있는 윤의 측면 사진이었다. 배꼽 근처에서 두 손을 꼭 맞잡고 작품을 관람 중인 제 사진을 확인한 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뭘 보고 다닌 거예요?”

청건은 머쓱하게 웃더니 고개를 돌려 그에게 대답했다.

“너. 이럴 기회가 많이 없잖아.”

아델의 전시회를 보는 걸 ‘기회’라 부른다면 백번 공감할 수 있다지만, 도대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게 왜 기회라는 건지. 그러나 전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청건은 가까운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고 결제를 하는 동안에도 찍어 놓은 윤의 사진을 자꾸만 확대해 보기를 반복했다.

전시장과 멀지 않은 정원을 걷던 둘은 인공 호수 앞 초록색 의자를 차지했다. 청건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의자를 윤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도저히 뭘 먹을 수 없을 것 같던 윤은 청건이 골라 준 딸기 타르트만은 먹을 수 있었다. 청건은 뜨거운 라테와 바나나 빵을 다 먹고는 손을 털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핸드폰을 꺼내 수십 장 찍은 윤의 사진을 재탕하자 윤이 결국 헛웃음을 지었다.

“만족해요?”

“응. 완전. 이거 배경 화면 해도 돼?”

“대신 사람들한테 들키지 말고요.”

“배경 화면은 들키려고 하는 건데…….”

“……마음대로 해요.”

“진짜? 무르기 없다.”

예에. 대충 대꾸를 해 버린 윤은 들뜬 청건이 핸드폰 화면부터 지인들이 보는 프로필 사진까지 죄다 제 사진으로 바꾸는 걸 보며 기겁했다. 결국 잠깐의 실랑이 끝에 옆모습이었던 프로필 사진은 윤의 뒷모습으로 대체되었다. 살다 살다 이런 연예인을 다 보고. 윤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더 안 유명해질게. 너 부담스럽지 않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농담이죠?”

“아니?”

청건은 또 진심이었다. 윤은 멍해졌다. 도대체 자신이 그에게 어느 정도로 큰 존재이기에. 당황스러워 뺨을 긁적인 윤이 어색하게 말했다.

“……일이랑 저는 분리해야죠.”

“원래는 너무 그런 사람이었는데, 지금 공사 구분이 안 돼.”

말 그대로였다. 일과는 관련 없는 사람을 현장에 끌고 온 것만 봐도 그랬다. 청건을 빤히 바라보던 윤은 결국 그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형은 진짜 솔직하다.”

“좋으니까. 좋으면 그만이니까.”

“…….”

좋으면 그만. 윤은 소리 없이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저무는 오후의 햇빛은 여전히 둘의 자리에 풍성한 나무 그늘을 만들어 냈다. 윤은 타르트가 사라진 빵 포장지를 꼼지락대며 쪽지 모양으로 접다가 입을 열었다.

“전시회 데려갈 생각은 어떻게 했어요?”

“기특하지.”

“네……, 조금요.”

그러자 청건은 윤이 접은 빵 봉투를 톡 풀어 버렸다.

“진짜 조금?”

“조금, 많이? 미디엄 레어 정도?”

“거짓말.”

“맞아요, 거짓말.”

윤은 순순히 인정하고는 그에게 기댄 채 눈만 움직여 청건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엄청 좋아요.”

“…….”

“꿈 같아요. 평생 이 시간에 있고 싶을 만큼.”

한 톨의 숨김도 없이 솔직하게 군 윤은 풀린 포장지를 부스럭댔다. 좋으면 그만이라면서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방금 한 말을 되풀이하는 윤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건은 그의 왼손을 끌어와 제 허벅지 위로 올렸다. 그러곤 자신이 끼고 있던 시계를 풀어 윤의 손목 위로 채워 주었다.

“약속할게.”

“…….”

“언젠가 같은 시간에, 여기에 또 있자.”

이건, 보증서 같은 거야. 청건이 덧붙였다.

언젠가 같은 시간. 내년일 수도, 내후년일 수도 있는 시간에. 그의 말을 가만히 곱씹던 윤이 서서히 몸을 바로 했다. 그가 제게 둘러 준 시계는 몇 천만 원을 호가한다는 브랜드였다. 청건이 이걸 차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을 위해 새 시계를 찬 듯했다.

“……그렇게 말하면 돌려줄 수가 없잖아요.”

“그래. 나 좋자고 하는 거야. 족쇄거든 그거.”

윤은 복잡한 얼굴로 시계를 내려다봤다. 시곗줄과 케이스는 은빛이 났고, 다이얼 부분은 미묘한 붉은빛이 돌았다. 분침 끝에 매달린 작은 동그라미는 다이아몬드 같았는데 빛의 방향이 바뀌자 지구 모양임이 드러났다.

청건은 검지로 시계를 가리켰다.

“태양 위로 지구가 도는 거야. 내가 네 주위를 도는 거지.”

“…….”

“내가 바빠서 옆에 없을 때도, 애인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소리야.”

윤은 지구가 움직이는 모습을 조용히 관찰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시계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윤을 보는 청건은 폭풍 전야라 생각하는 건지 왼 다리를 슬슬 떨기 시작했다. 프러포즈 뺨치게 대단한 말을 했으니 불안하긴 한 모양이었다. 제 의자를 통해 전해지는 떨림에 결국 윤은 웃음을 흘렸다. 조금 더 참아 보려 했는데 안 되겠다. 청건은 그 웃음소리에 흔들던 다리를 뚝 멈추며 눈치 보던 표정을 풀었다.

“와. 성공이다.”

“칭찬한 적 없는데.”

“지금 네 표정이 완벽한 화답이야.”

윤은 어색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청건이 줬던 선물들을 의류 수거함에 버린 전적이 있는지라 더욱 거절이 어려웠다.

“여태껏 나한테 준 거 모으면 전세는 했겠어요.”

그 말에 작게 웃던 청건이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바로 했다.

“안 그래도 말하려 했는데…….”

윤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늘리는 청건을 홱 돌아보았다.

“설마 집까지 사 준다고요? 싫어요!”

“아니, 아니. 따로는 살면 안 되지.”

그는 기함하는 윤을 달래려 한 손을 저었지만, 윤은 의문이 전혀 풀리질 않았다. 따로 산단 말이 여기서 왜 나와?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가던 중, 윤은 해답을 냈다. 동시에 청건의 입에선 생각한 것과 같은 내용이 흘러나왔다.

“너랑 같이 살고 싶어.”

그가 윤의 왼손을 쥐어 왔다. 혀로 입술 위를 쓸어 내는 청건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금방 생각하고 뱉은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언제부터? 윤은 당장 그제부터 사귀기 시작한 사이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 이전의 소개팅보다 더 급박한 전개라 생각했다.

……너무 이르지 않나?

청건의 내리깐 눈꺼풀을 바라보던 윤은 정면의 잔잔한 인공 호수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청건의 집에서 살게 되면 벌어질 일들을 순식간에 떠올려 보았다.

앞으로 전혀 필요 없게 될 알파 약. 제 계절을 찾아갈 터틀넥 니트. 사 오지 말라 해도 계속해서 늘어나게 될 선물들. 완전히 사라지게 될 불안증…….

“솔직히 밤마다 좀 무서워. 아무리 자연 친화적으로 만들어 놨어도 집이 좀 커야지. 나는 원래 그렇게 큰 데선 잘 못 자. 그래서 사람 사는 집처럼 막 어질러 놓을 애인이 필요해.”

“……그런 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충분히 하겠는데요.”

어딘가 부루퉁하게 나온 대답에 청건이 곧바로 말했다.

“애인을 아무나 해?”

“조금 공만 들이면 대체 인력이 충분히 생기잖아요. 같이 살다가 나가리 되면 기분 안 좋을 것 같아요.”

청건은 그 소리에 입술을 깨물며 못마땅하게 침을 삼켰다.

“왜 대체될 생각을 해. 대체할 수나 있대? 누가 그래. 내가 혼내 줄게.”

“제가 그래요. 영원한 관계는 없잖아요. 다경험자가 그것도 몰라요?”

“야아.”

청건은 으름장을 놓듯 목소리를 울리며 손을 꾹 쥐어 왔다. 오버 해서 심술을 부린 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끝을 생각하는 건 습관 같은 일이었다. 어떤 일로든 한쪽이 떠나는 결말은 당연했다. 특히나 친구가 아닌 연인 관계엔 그 유효 기간이 더욱 명확했다.

그러나 이미 그와 함께 사는 것을 생각해 버린 머리는 단점을 쉽사리 떠올리지 못했다.

“영원할 것처럼 서로 구속하는 관계, 나도 싫어했어.”

“…….”

“그런데 너랑은 붙어 있어야 숨통이 트일 것 같단 말이야.”

청건이 말했다. 단점을 생각하기를 멈춘 윤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허락할 때까지 또 들이대면 되니까.”

윤은 포기와 포부를 동시에 말하는 청건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동거해 봤죠.”

“……질투? 추궁?”

“둘 다죠.”

윤은 샐쭉하게 대꾸하곤 몸을 일으켰다. 청건은 엉덩이를 탁 털어 내고 뒤도는 윤을 올려다보다가 짐을 주섬주섬 챙기곤 자신도 몸을 일으켰다. 몇 발자국 앞서 간 윤에게 빠르게 다가간 청건이 말했다.

“해 봤다 한들 너랑 비교가 안 될 텐데 왜. 뭐가 질투 나.”

“해 봤다는 거예요, 안 해 봤다는 거예요.”

“안 해 봤어. 의심되면 검색해 봐. 나도 모르는 정보가 인터넷에 다 써 있어.”

“…….”

“그러니까 난 너한테 거짓말 못 해. 형 믿어.”

“……오빠 믿어 형 믿어 만큼 신뢰도 바닥인 말도 없죠.”

아아. 윤아. 청건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비벼 왔다. 윤이 머리를 밀어내어도 청건은 힘으로 버텼다.

“같이 살아 주세요.”

“싫은데요.”

윤이 이제는 위로 올라가 제 정수리를 쿡쿡 찌르는 청건의 턱을 손바닥으로 들어 버리고 앞서 걸었다. 그러자 청건이 양팔로 윤의 어깨를 안으며 뒤로 바짝 붙었다. 땅 위에 직직 끌리는 그의 워커가 윤의 운동화 뒤축을 자꾸만 밟았다.

“아직도 나 신뢰도 바닥이야? 응? 아니지?”

“…….”

“윤아.”

“…….”

“윤아.”

“…….”

”윤아. 전시회도 봤는데 뽀뽀 한 번만.”

“동거를 목적으로 보여 준 건진 몰랐는데요.”

“아니 그건, 겸사겸사…….”

근처에 일이 있어 겸사겸사 왔다는 이전의 청건이 떠올랐다. 이것도 핑계네. 윤은 그의 꼼수에 말려들지 않았다.

“일단, 우리 택시 불러요. 열이 너무 심해요.”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청건은 그 말에 걸음을 우뚝 세웠다. 얼른 윤의 앞에 다리를 굽혀 앉은 청건이 공중에 손을 까닥였다.

“업혀. 이럴 게 아니라 진짜 병원 좀 가서…….”

그러나 윤은 그의 주머니에 손을 쑥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약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돼요.”

윤은 비밀번호가 없는 핸드폰 화면을 열어 청건에게 내밀었다. 자요. 택시 불러요. 그러나 불안한 얼굴로 일어난 청건은 윤의 이마를 짚을 뿐이었다. 윤은 그의 손목을 재빨리 붙잡아 내렸다.

“괜찮다니까요.”

“왜, 신뢰도 바닥은 걱정도 하면 안 되냐. 진짜 속 타 죽겠다. 그냥 병원 한 번 가 보면 되는 걸…….”

“형. 그만.”

윤은 단호하게 청건의 걱정을 저지했다. 청건은 마음처럼 안 움직여 주는 윤에 속이 상하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픈 거, 형이랑 스킨십…… 하고 나면 늘 그랬어요. 그러니까 시간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

“……아…….”

굳이 얘기하지 않으려던 걸 말하게 된 윤이 머쓱하게 옆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그리고, 다 좋은데요. 형이 준 물건에 파묻혀서 살 자신은 없어요. 그래서 동거는 더더욱이요. 지금도 솔직히 힘들어요.”

그 말에 청건은 추측을 하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왜.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생각해 봐요. 형이 하루 만에 뒤바꾼 옥탑에, 카메라에 노트북에. 이젠 여행비에, 시계에 옷까지…….”

윤은 한 번 크게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나한테 남는 게 너무 많아요. 형이 없을 때면 온전히 나로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고요. 온통 형이라 숨이 막혀요.”

“……윤아. 왜 좋아하는 사이에 숨이 막혀.”

청건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어떤 식으로 그를 납득을 시켜야 할지. 윤은 입 안쪽을 혀로 쓸었다. 그가 화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파 향 맡으면 좋아 죽겠는데 숨 막힌다는 오메가들처럼요. 비슷해요.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알아요.”

핸드폰을 다시 내밀자 청건이 손으로 그 위를 덮었다. 그리고 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너무 좋아해서. 더 좋아질까 봐 그렇다는 거잖아. 맞아?”

물론 그 역시 맞는 얘기였다. 윤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입술을 깨물었다. 청건은 그제야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윤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해 주는 것들이 너무 부담스러우면 줄여 볼게. 그런데 이 이유면 동거를 못 할 이유가 뭐야. 연애도 시작이 어렵지, 우리 계속 잘할 수 있을 것 같잖아. 그러니까 같이 사는 것도…….”

“그렇게 말처럼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같이 살 방법을 강구해 보자.”

“아니, 결론이 그게 아니잖아요.”

“그럼 뭔데?”

윤은 그의 말에 말문이 막힌 채 숨을 골랐다.

“몰라요.”

한 발 뒷걸음치자, 청건은 재빨리 도망가려는 팔을 낚아챘다.

“좋아하니까 좋아했잖아. 섹스 하고 싶으니까 섹스 했고. 같이 살자니까 같이 살고 싶었잖아.”

“…….”

“쉽게 봐 윤아. 내가 도와줄게. 두려워하던 게 사실은, 맞닥뜨리면 별 게 아닌 게 많아.”

“…….”

“사실 그렇게 따지면 불안한 건 내가 더 할 거야. 네가 못 보는 것뿐이지.”

핀트가 엇나가 있었다. 꾹꾹 마음을 눌러 내던 윤은 결국 눈을 꽉 감았다 뜨곤 쏟아 내듯 말했다.

“헤어지는 게 무서워서 그래요.”

청건은 그 말에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아, 쪽팔려서 얘기하지 않으려 했는데. 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하는 건 이제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아니…… 해 보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휩쓸려 가고 있는데요. 그래도 그건 같이 떠안는 거지. 헤어지는 건요? 그건 대부분이 통보잖아요.”

“……윤아.”

“어차피 끝날 테니까. 모든 관계의 끝은 헤어짐이니까. 게다가 형은 나한테 받은 게 마음밖에 없어서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을 테지만요. 나는요.”

“…….”

“나는, 형이랑 끝난 줄 알았을 때, 그때 통감했어요. 아, 나한테만 이청건이 산더미구나. 그 사람은 내가 한 움큼도 남지 않았을 텐데 나만 형 물건에 온통 둘러싸여서…….”

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을 내뱉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날이 생각났다. 폐역사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이청건. 다 끝난 마당에 흰 집 안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공주로 내달리던 등신 같은 자신.

윤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어지럼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기민하게 눈치챈 청건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윤은 뜨거운 한숨을 천천히 내쉬다가, 주변의 가로등으로 걸었다. 자신이 깨어질까 염려하는 듯한 청건의 손길을 느끼며 가로등에 몸을 기대어 섰다.

청건은 차마 더 병원에 가자는 소리도 못 하고, 난감한 듯 뒷머리를 매만지다가 골반에 손을 얹었다.

주변 사람들은 여유롭게 벤치에 앉아 있거나 천천히 자전거를 몰고 갔다. 청건의 남색 머리가 바람에 살랑이며 들썩였다. 윤은 이 와중에도 그를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런 자신에게 치가 떨려 멀리 자리한 호수를 빤히 응시했다.

한참 후 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육원에선 아무한테도 정을 주면 안 돼요.”

“…….”

“몇 달 간격으로 애들이 입양돼 나가거든요.”

윤은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평범하게 애정을 주고받는 게 너무 힘이 든 이유. 이런 사적인 얘기는 아무에게도 들려준 적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관계에 빚지고 정 주는 게 잘 안 돼요.”

“…….”

“별로면, 내쳐도 돼요. 서로 다른 속도를 견디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다들 그래서 나가떨어졌고, 형도 다르지 않을 거예요.”

“…….”

“……형을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무슨 소린지 알아.”

청건은 물꼬를 터 버린 윤의 부정적인 생각을 가로막았다. 그는 바람에 살랑이는 앞머리와 떨리는 밤색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난 괜찮아.”

“…….”

“아무리 오래 걸려도, 결국 나한테 올 거잖아.”

가로등에 몸을 기대지 않았더라면, 주저앉지 않았을까. 윤은 그의 단호한 확신에 가슴이 묵직하게 아팠다. 여느 알파들처럼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자신을 어떻게 해 보려 수를 쓰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처럼 올곧은 눈. 몸이 떨리도록 감미로운 낮은 성음. 기대지 않으려 하는 자신을 줄곧 의지하고 싶게 만드는 성품.

“예전 일 되풀이할 필요 없어. 네 문제는 없으니까.”

“…….”

“내가 신뢰를 덜 준거야.”

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듯. 청건은 입술을 말아 무는 윤에 숨을 한 번 들이켜곤 말했다.

“난 너 아프면 걱정할 거야.”

“…….”

“실망하든 말든 기대도 할 거고. 좋아한다고 1백 번 1천 번 말하고 사랑도 할 거야. 헤어져 달라고 애원을 해도 안 헤어져 줄 거고.”

“…….”

“너야말로 무서우면 내쳐.”

청건은 담담하게 고했다.

윤은 열이 몰린 눈가를 깜박였다. 내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 한 말을 청건의 입에서 다시 들으니 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윤은 누군가와 더 이상 깊은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었다. 청건이 이만큼 거대하게 밀려오기 전까지는.

왜 날 좋아하느냐는 물음은 이제 부질없었다. 들어 봐야 청건의 마음도 제 마음과 같을 것이다. 그 많은 걸 어떻게 일일이 세. 나열하다 밤도 샐 수 있었다. 대신 눈을 마주치면 다 들을 수 있었다. 줄줄이 입 밖으로 늘어놓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았다.

“맹세라도 할까?”

윤은 볼 안쪽을 지그시 한 번 깨물고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맹세요?”

청건이 윤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짙고 매끈한 입술에 시선을 빼앗길 때쯤, 그가 손가락을 차례차례 얽어 왔다.

“느리다고 재촉 안 하고, 포기하지도 않겠다고.”

“……어디에 맹세할 건데요?”

“스틱스 강에.”

윤은 결국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전지전능한 신도 어쩌지 못하는 저승의 강에 대고 맹세를 하는 인간이라니.

“어기면 어떻게 되는진 알죠?”

“추방당하겠지. 너한테.”

청건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풀며 고개를 슬쩍 저었다.

“아, 생각만 해도 무서워. 어기나 봐라.”

청건은 지긋지긋한 목 티와 알파 약, 평생에 걸쳐 시달린 저주로부터 자꾸만 윤을 해방시켰다. 애인이라는 타이틀로 묶인 지 고작 이틀. 그러나 겁을 먹을 거리가 벌써 한 움큼도 남아 있질 않았다. 내보이는 족족 이청건이 다 가져가 버려서.

윤은 그의 어깨로 고개를 툭 떨구었다. 알게 모르게 긴장한 전신이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심장으로부터 힘겹게 펌프질 되는 피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다시는 그와의 끝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업어 줘요…….”

청건은 그 제안이 못내 좋은지 피식 웃다가 아까처럼 뒤돌아 무릎을 꿇었다. 윤은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숨 막힐 정도로 안아 버렸다. 양 허벅지를 단단히 받친 청건이 가볍게 일어섰다.

윤은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앞이 핑 돌아 눈을 꽉 내리감았다.

“빨리 가면 안 돼요.”

또 주체를 못 하고 뛸까 봐 윤이 미리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흠칫 몸을 굳힌 청건이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윤은 호수를 응시하는 사람들, 제 쪽을 흘끔 바라보는 사람들, 그 누구를 봐도 여느 때보다 안전한 느낌이었다. 더 이상 남들을 신경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단지 청건의 목에 코를 묻고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예쁜 냄새가 났다. 포근한 햇빛에 달궈진 듯한 여름 냄새. 누군가 큰 망치로 머리를 두드리는 것 같았으나 기분만은 좋았다. 청건의 몸 위에 뜨끈뜨끈 녹아내리는 제 몸을 평생토록 걸쳐 두고 싶을 만큼.

하지만 나른하던 평화는 금세 깨져 버렸다. 청건이 슬슬 속도를 높이더니 거리 위를 뛰기 시작했다. 아, 좀 뛰지 말라고요. 윤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도 기분이 좋은지 1백 년 만에 산책 나온 개처럼 팔랑거리는 통에 사람들의 눈길이 한가득 쏠렸다. 뱅글뱅글 도는 청건에 그의 몸을 더 꽉 껴안은 윤은 맥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출. 꽃과 나무. 별 무리. 비둘기 떼. 역사 밖. 구름. 오래된 간판. 골목 벽의 낙서와 노을.

의지할 곳 없는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게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그의 차례가 왔을까.

더 사랑하게 되면 어쩌지. 감당이 안 될 것만 같았다.

* * *

귀국하고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윤은 손목에 건 편의점 봉투를 달랑거리며 걷다가 익숙한 차종이 보이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달동네 계단 밑으로 막 주차를 마친 차 안에서 청건이 내렸다.

문을 닫은 그는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었다. 윤은 속절없이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놔두며 그를 바라본 채 뒤로 걸어 계단 쪽으로 갔다. 청건은 차를 잠그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그런 윤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밖에 있었네?”

“잠깐 볼일이 있어서. 형은 염색했네요?”

“응. 괜찮아?”

청건은 어색한지 손을 들어 검은색 머리를 쓸다가 웃었다. 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더욱 진하게 다듬어진 어른의 얼굴 같았다. 반대로 소년 같은 웃음은 언제 봐도 매력적이었다.

“예쁘네요.”

“진짜?”

“네. 머리가요.”

곧 계단 앞에 다다른 윤이 몸을 돌려 먼저 계단을 밟아 올랐다. 청건의 옆에 있으면 자꾸 숨겨진 장난기가 드러났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청건은 그런 윤을 뒤따라 계단을 오르다가 그의 허리를 간질였다. 윤은 기겁하며 계단 옆 매끈한 경사로로 얼른 도망쳤다. 계속 간지럼을 태우며 그를 몰아가던 청건은 곧 윤이 벽돌집에 몸을 부딪치자 괴롭힘을 멈추었다.

윤은 난데없는 공격에 목 끝까지 찬 숨을 고르다가 자신의 앞에 선 청건의 팔을 꼬집었다. 청건은 아프지도 않은지 씩 웃기만 했다.

“진짜 이청건으로 돌아왔잖아.”

“…….”

“그러니까 자세히 봐. 나도 예쁜지.”

파리에서 돌아온 첫날, 청건은 같은 번호로 새 핸드폰을 개통해 주었다.

일이 바쁠 땐 연락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청건은 꼭 몇 시간에 한 번씩이라도 촬영 현장 사진이나 동영상을 채팅방에 업로드 했다. 또 밤이 늦더라도 하루에 한 번은 통화를 했다. 식성과 습관, 다녔던 학교와 회사 이야기. 이전엔 몰랐던 윤의 얘기를 묻고 또 들었다. 윤을 이루는 모든 것을 그는 특별하게 여겼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길게는 몇 시간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되레 먼저 잠이 드는 쪽은 윤이었다. 전화를 켜 놓거나, 영상 통화를 켜 놓은 채로.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더 그런가.

윤은 제게 다가온 청건의 머리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 보았다.

“예쁜 듯도 하고…….”

애매하게 말꼬리를 늘리니 삐진 척을 하려는지 청건이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윤은 살짝 뒤꿈치를 들어 그 입술 위로 짧게 키스했다. 놀란 듯 입술을 말아 물던 청건이 윤에게 몸을 조금 더 붙여 왔다. 윤은 정장 차림인 청건을 훑다가 그가 왼팔에 든 재킷을 조금 당기며 말했다.

“멋있는 듯도 하고?”

청건은 그 말에 파스스 웃음이 새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차기작 착수 전까진 같이 있겠다면서, 마지막으로 본 게 한 달 전이네요. 얼굴 까먹을 뻔했어요.”

“으음, 한 달이나 됐구나.”

청건은 윤의 뒷머리를 아이를 어르듯 쓰다듬더니 볼 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윤은 순식간에 화르르 지져지는 듯한 볼을 매만지다 청건의 검은 타이 끝을 만지작거렸다. 키스하고 싶다.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머리 위에서 청건이 작게 웃었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어보고 싶긴 한데……. 골라 봐.”

윤은 고개를 들어 장난기 묻은 청건의 표정을 살폈다.

“뭘요?”

윤은 청건이 선물한 또 다른 옷인 연분홍빛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청건은 윤이 그 옷을 입고 있는 게 못내 마음에 드는지 잘 잠가 놓은 카디건의 맨 위쪽 단추를 한 손으로 툭 풀었다.

“대화부터, 키스부터?”

“이미 답을 정해 놓은 것 같은데.”

“그래도 허락이 없으면 참아 보려고.”

윤은 청건을 새초롬하게 흘기다가 셔츠 깃을 집게손으로 살짝 쥐었다 놓았다. 이렇게만 해도 못 참을 거면서.

역시 청건은 윤의 작은 도발에도 고요해진 눈으로 고개를 서서히 내렸다. 입꼬리를 올린 윤 또한 그의 몸짓에 응하듯 고개를 틀었다. 스칠 듯 말 듯 감질나는 거리에 그에게 완전히 안겨 들려던 순간이었다.

철커덕, 하는 알루미늄 문 소리에 윤은 급하게 그의 허리춤을 당겼다. 바로 옆 골목으로 뒷걸음치면 청건은 눈치 좋게 윤을 따랐다. 성인 남성 정도가 드나들 수 있는 골목 초입을 청건이 틀어막았다. 숨죽이던 윤은 청건의 어깨 너머로 지나가는 벽돌집 주인을 슬쩍 확인했다.

“야외는 좀 짜릿한데요.”

“그럼 실내로 갈까.”

양쪽 담을 손으로 짚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엔 익숙한 흥분감이 일고 있었다. 윤은 청건의 한쪽 어깨를 지그시 밀었다. 아쉬운 기색으로 길을 터 준 청건이 윤의 뒤를 따랐다. 뒷머리에 코를 묻어 오며 숨을 훅 들이마시던 청건은 이어서 윤의 목덜미를 앙, 씹어 왔다. 소름이 왈칵 돋은 윤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청건은 호랑이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며 윤을 뒤쫓았다. 둘은 왈츠라도 추듯 엎치락뒤치락 장난치며 옥탑을 올랐다. 윤은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듯 실실 웃다가 집 문을 열었다. 내부로 들어와 신발을 벗자마자 청건이 윤을 뒤에서 확 끌어안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계속 같이 있고 싶어. 다음엔 여행 길게 가자.”

윤은 제 뒤꿈치를 밟으며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청건을 느끼며 짐을 모두 내려 두었다.

“형이 바쁘지 않아야 말이죠.”

청건이 윤의 어깨 위로 턱을 꾹 누르다 입을 열었다.

“초연 역 캐스팅이 꼬여서 스케줄이 뜨긴 할 거야. 그러니까 조만간 한 달 정도…….”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여행을 한 달이나 가요?”

청건은 끄응, 소리를 내며 윤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뒷걸음쳤다. 으앗. 뒤로 끌려가던 윤이 침대에 앉은 그의 허벅지로 걸터앉았다.

“프랑스인도 한 달 바캉스 기간 갖는대. 응?”

청건은 윤의 몸을 오뚝이처럼 양옆으로 흔들었다. 윤은 물건이 수십 개로 갈라지는 시야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어지럼증이 습관처럼 붙어 있는 탓이었다.

“우린 프랑스인이 아닌데요. 그리고, 조만간 저도 일 구해야죠.”

현실적인 답변을 내놓자 청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평소 같으면 돈은 걱정 말고 실컷 놀자고 말했을 청건은 이제 윤이 싫어할 것 같은 말은 알아서 자제했다.

꾹 참는 청건이 보이는 듯해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윤은 기특한 청건의 머리를 쓱쓱 매만져 주곤 벨트처럼 제 몸을 감싼 양팔을 풀어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자마자 다시 손목을 잡혀 침대로 끌려갔다.

윤이 옆자리에 앉자마자 청건은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 달 정도만 어떻게 안 될까? 나랑 5백 년 산다며.”

“……제가요?”

“응.”

어제의 전화를 떠올려 보던 윤이 어이없이 웃었다.

“될 수 있으면 5백 년 살면 좋겠다고 했죠. 나는 너무 느린데 꿈을 이루기엔 1백 년은 너무 짧다고.”

“그러니까 그 5백 년은 당연히 나랑 살 거 아니야.”

“확신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죠.”

윤은 어깨를 들썩였다. 그 도발에 눈을 얇게 뜨던 청건이 윤의 앞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몸을 피하던 윤이 제 쪽으로 가까이 기울어진 청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살이 조금 빠졌는지 한층 날렵한 분위기였다. 이청건이라면 5백 년은 거뜬히 젊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5백 년 동안 마음이 변치 않을 것도 같다.

제게 지그시 닿아 오는 눈길에 윤은 속절없이 마음이 간지러웠다. 1년도 2년도 아닌 5백 년을 운운하는 이 남자가 정말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는구나, 싶어서.

실없이 이어지는 망상을 이내 털어 낸 윤이 몸을 일으켰다.

“뭐 좀 먹을래요?”

화제 전환엔 음식만 한 게 없다. 윤은 다시 붙잡히기 전에 얼른 냉장고로 향했다.

“안 먹어도 돼. 자려고 온 거라.”

“예?”

윤은 냉장고 문을 열다가 몸을 굳혔다. 청건을 슬쩍 돌아보면 그는 하품을 끝내곤 촉촉해진 눈을 깜박였다. 청건은 묘한 표정의 윤을 보며 “응?” 되물었다. 윤은 어색하게 고개를 저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하고 싶다. 당장.

윤은 청건과 있으면 늘 저답지 않게 날뛰는 세포를 가라앉히려 냉장고를 마구 뒤적였다. 그리고 맨 아래 칸에서 만만한 사과를 꺼냈다.

문을 닫고 뒤로 도는데 청건이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가까스로 청건을 무시하며 싱크대 옆으로 걸어간 윤이 과도를 꺼내었다.

“줘, 내가 할게.”

청건은 윤이 쥔 과도를 쏙 빼앗아 갔다. 먼저 사과를 씻은 그는 능숙하게 껍질을 깎아 나갔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껍질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청건이 물었다.

“그래서, 어디 갔다 왔어?”

“그냥, 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던 윤은 식탁에 둔 물을 따라 마셨다. 중대 발표를 앞둔 터라 그런지 긴장이 됐다.

“형이 좋아할 만한 거 하러요.”

“내가 좋아할 만한 거라…….”

죽죽 이어지던 껍질이 툭 끊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사과 깎기를 이어 가는 청건은 무언가 마음에 요동이 있던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 했어요?”

“아니, 아냐.”

청건이 어색하게 대답했고, 다음 사과 껍질은 정말 짧게 끊어졌다. 형도 나랑 자고 싶은가 보다. 고작 말 하나에 나처럼 생각이 음흉하게 튀는 걸 보니. 윤은 몰래 입꼬리를 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더 오해를 하기 전에 대답했다.

“부동산요.”

“부동산?”

“큰 집에 있다 보면 편해서 눌러살 게 뻔한데, 괜히 월세 나가는 게 싫어서. 이 집은 그냥 정리하려고요.”

“…….”

그는 행동을 문득 멈추었다. 다 깎지 않은 사과를 멍하니 보던 청건이 꺼내 둔 접시 위에 사과를 툭, 내려 두며 고개를 돌렸다. 윤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여상하게 말했다.

“설마 뭐, 몇 주만 동거하고 끝낼 생각이었어요?”

“…….”

“그럼 괜히 그랬나…….”

과도까지 툭 내려 둔 청건이 지체 없이 윤에게 걸어왔다. 윤은 제 팔을 잡아 일으키는 힘에 얼결에 딸려 일어났다. 얇은 허리를 잡아 올린 청건은 순식간에 윤을 식탁 위에 앉혔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일을 치를 눈을 하며 몸을 기울였다. 윤은 불길이 이는 듯한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손을 뒤로하여 식탁을 짚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입술을 가까이에 둔 청건이 말했다.

“평생이야.”

“…….”

“몇 주 아니고, 평생.”

청건은 어쩐지 눈시울이 붉었다. 윤을 뚫어져라 보는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윤은 괜스레 벅차는 마음에 시선을 살짝 내렸다. 이게 뭐라고 이만큼 감동을 하는 걸까. 오라 했으니 갈 뿐인데…….

“좋아해. 윤아.”

“…….”

뜨겁게 열이 나는 얼굴 위로 담백한 고백이 퍼졌다. 윤은 몸을 지탱하던 팔을 천천히 뻗었다. 청건은 윤이 자신의 목을 감으며 안겨 들자 과즙이 묻은 손으로 윤의 등을 꽉 껴안았다. 청건이 머리 위로 깊게 입을 맞추자 윤이 중얼댔다.

“최종 목표 이뤘다.”

“그게 뭔데?”

“내 집 마련이요.”

청건은 윤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의 머리카락을 비볐다.

윤은 아까 먹은 해열제가 하등 소용이 없는 몸을 느끼며 청건을 바라보았다. 단추 하나가 풀려 있는 청건의 셔츠를 살피다가 고개를 내렸다. 이를 이용해 두 번째 단추를 톡, 풀어냈다.

청건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그 행위를 내려다보았다. 윤의 눈 옆에서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느리게 요동했다. 지나치게 두근대는 가슴과, 반대로 슬로 모션처럼 느려진 숨결.

“좋아해요.”

그리고 신호탄. 이제 청건은 지체 없이 입술을 맞대어 왔다. 그리웠던 만큼 급한 몸짓이 이어졌다.

윤은 목을 빨아들이는 감각에 청건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파리 이후로 처음 몸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이 윤을 더욱 안달 나게 만들었다. 한 달간 청건과의 섹스를 얼마나 수없이 상상해 왔었는지.

청건은 윤이 입고 있는 청바지를 벗겼다. 윤은 식탁 의자를 발끝으로 디디며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아예 속옷까지 단번에 끌어 내린 그는 성마른 몸짓으로 테이블 위에 윤을 눕혔다. 윤은 제게서 몸을 떼고 남은 셔츠 단추를 뜯을 듯 푸는 청건을 빤히 올려다보며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

“……진짜, 너는.”

청건은 수십 번 참았던 말을 터뜨리는 것처럼 깊은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질 듯 낮아진 목소리가 지나치게 섹시했다.

“윤아, 위험해.”

“맞아요. 여기서 하다간 떨어질 수도 있겠어요.”

“아니…… 그래. 내가 위험해. 내가…….”

중얼거리던 청건은 셔츠를 바닥으로 벗어 던지고는 정신을 빼놓는 키스를 이었다. 그동안 겪었던 전희부터 섹스까지의 과정 중에 가장 격렬했다. 그가 속을 헤집을 때마다 온몸이 멈추지 않고 떨릴 만큼.

사실은 청건의 집에 몰래 들어가 있으려던 게 원래 계획이었다. 타지에서 고생하던 청건이 집에 온 날에 기뻐할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러나 성급히 밝혀 버린 말에도 청건은 종일 예쁜 웃음을 보여 줬다.

띠디디디-. 띠디디디-. 

오전 8시의 부드러운 햇볕이 흰 침구 위를 감쌌다. 살짝 열린 창밖에서 새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윤은 연속적으로 울리는 전자음에 손을 더듬어 민트색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그는 끌어안은 베개를 멀리 치우며 기지개 켰다.

멍하니 누워 있다가 이내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적응 안 되는 아래의 통증에 잠깐 굳은 듯 있다가 숨을 후, 내쉬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깨자마자 허기가 심하게 밀려왔다. 케이크 있다고 그랬는데……. 언제인지 모를 시간에 청건이 잠든 자신을 깨워 케이크를 사 두었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형…….”

윤은 잠긴 목소리를 겨우 끄집어내 보았다. 그러나 청건은 대답이 없었다. 조금 큰 목소리로 한 번 더 그를 불렀지만 마찬가지였다. 어제 스쳐 가듯 케이크가 먹고 싶다 그랬었는데, 그 때문에 일이 있는데도 케이크를 사 놓고 다시 밖을 나간 듯했다.

몸을 일으키니 세상이 쪼개지는 것처럼 빙빙 돌았다. 침대 헤드를 붙잡고 선 그는 오랜 시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몸 구석구석 작은 폭죽을 터뜨리는 것처럼 찌릿했고, 용암이 흐르는 듯한 열감이 느껴졌다.

컨디션 난조, 혹은 격렬한 섹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베타의 연약한 몸, 따위로 정의하던 안일함은 갖다 버린 지 꽤 되었다.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오랜 기간 몸살로 앓아 본 적은 없었으니 분명한 적신호였다. 태어나 병원을 가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지만, 며칠 전 윤은 자발적으로 병원을 찾았다. 비타민을 쥐 오줌이라 생각할 나이는 이제 끝이 났으니.

겨우 멈춘 어지럼증에 한숨을 쉰 윤은 작은 탁자 위 쪽지를 들어 내용을 읽었다.

「죽이든 케이크든 입에 맞으면 뭐든 다 먹어. 알았지? 최대한 빨리 올게.」

병원을 갔다 왔다니 청건은 이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위아래 입는 잠옷 대신 그가 입힌 흰 셔츠 한 장이 그나마 밤새 들들 끓는 열기를 견디게 해 주었다.

청건이 적은 글씨를 가만히 매만지던 윤은 종이를 쪽지 모양으로 접어 손에 쥐었다. 머리를 짚으며 침실 맞은편 방으로 걸어갔다. 셔츠 밑으로 보이는 얇은 다리가 바닥을 휘청휘청 딛는 모양이 위태로웠다.

그가 들어간 방엔 냉장고와 침대를 빼고는 모두 옥탑에 있던 짐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윤은 책상 위에 놓인 메신저 백을 들어 앞 지퍼를 열었다. 그곳에 청건의 쪽지를 보관하고는 백 안에 든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역시나 방전이었다. 이제야 충전기에 핸드폰을 연결하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전원이 켜지기를 잠시 기다리는 동안 그는 화면을 초조하게 두드렸다. 어제 오후쯤 검사 결과가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전원이 켜지자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가 보였다. 윤은 살짝 땀이 밴 주먹을 쥐었다 펴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후 17:00

검사 결과 안내드립니다.

‘우윤’ 님 전체 검진 결과 ‘양호’입니다. 상세한 검진 결과 및 소견서는 우편으로 발송되었으니…….]

……양호? 그는 소견서에 대한 짧은 정보를 훑으며 엄지를 움직였다. 다행스러워야 하거늘 되레 찝찝한 마음이었다. 이젠 종합 감기약과 해열제, 또는 진통제를 하루 몇 번은 복용해야 일상생활이 가능한 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말간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갔다.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개 불길한 감각은 회피를 동반시킨다. 그래서, 배터리가 방전인 줄 뻔히 알면서 충전하지 못했다. 결과가 나왔을 것을 알면서도 이 방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는 재차 문자를 확인했다.

[……다만 혈액 내에서 발현 인자가 확인되었으므로 형질 병원 내원 후 정밀 검사가 필요합니다. 가택과 가까운 형질 병원 정보를 보내 드리오니 문의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번호로…….]

큰 병이 생겼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몇 번이고 문자를 다시 읽은 후에야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저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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