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Shallow Focus
청건은 키스를 피하는 윤을 집요하게 따라갔다. 침대 구석까지 몰린 윤의 손목을 한 손에 틀어쥔 그는 보던 중 가장 화가 난 얼굴이었다.
‘한 번만 더 피하면 키스로 안 끝나.’
윤은 그 협박에 겁먹은 양처럼 떨었다.
‘개새끼. 이기적인 새끼.’
뽀얀 필터라도 얹은 듯 유독 찹쌀떡 같은 윤은 청건을 향해 욕을 짓씹었다. 하지만 청건은 개의치 않고 그의 아랫입술을 진하게 빨아들였다. 모니터에 혀를 댄 것처럼 낯선 감촉이었다. 하지만 입속에 들어와 있는 게 우윤이라는 것만으로 청건은 만족했다.
‘우리 그만해요.’
청건은 다시금 생각나는 대사에 잠시 뗀 입술 사이로 ‘대체 왜 그랬어?’ 물었다. 난데없는 질문에 윤은 미간을 좁혔고, 청건은 그가 종알종알 변명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사실 원래부터 키스만으로 안 끝낼 생각이었기에 윤의 옷 속을 파고드는 손은 거침이 없었다.
언젠가 어떤 이유로 떨어질 날이 한 번쯤은 오는 게 아닐까 상상은 한 적 있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다. 이유를 아예 모른 채로 이 사달이 날 줄은 더 몰랐다.
윤은 생각이 깊어 한번 마음 굳힌 건 쉽게 바꾸지 않기 때문에 더 조급했다. 자신과 연애를 하기로 한 것도 얼마나 오래 숙고하여 결정한 것인지 알기 때문에 더. 누가, 무엇이 그를 벼랑으로 몰아갔기에. 도대체 어떤 이유가 겨우 붙잡아 놓은 우윤을 감히 몰아냈을까.
견고하게 굳은 마음을 깰 만한 자극. 청건은 그 빌어먹을 자극에 대하여 머리가 깨질 만큼 추측했다. 그리고 어렴풋이 확신했다. 제가 싫어서 떠났을 리는 없다고. 저를 지키려고 간 거면 납득이 가겠지만.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떠나기 전에 미리 세뇌를 시켜 놓았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지는 것만은 안 된다고 말해 놓을걸. 내가 질리고 싫어지든, 조폭한테 협박을 당하든, 네가 바람을 피우든, 죽을병에 걸리든 간에, 내 옆을 떠나겠다는 결심만은 안 된다고. 꿈에서조차도 바라지 말라고. 이렇게 따라올 거니까. 지구 반대편에 숨더라도 언젠간 찾을 테니까. 유리와 같은 무취의 입맞춤을 잇던 그는 윤의 손목을 매만지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손바닥에 감겨드는 창상을 보는 그와 윤이 번갈아 쉬는 숨이 금방의 키스로 뜨거웠다.
……하지만, 예외는 둘게. 내가 네 아픔의 기폭제가 된다면, 그때는 보내 줄게.
‘……그런데 왜 따라왔어.’
윤이 물었다. 생각이 들리기라도 한 듯. 청건은 고개를 들었다.
‘이 개새끼야. 네 말대로 아파서 왔는데. 다 너 때문에, 네가 지긋지긋해져서 왔는데 왜 찾아왔냐고. 왜.’
정말? 정말 그 말이 맞아? 청건은 윤의 두 손목을 재차 말아 쥐었다. 아파서 도망 온 거라면 기꺼이 놓아줄 것처럼 해 놓고. 결국은 놓지 못하겠어서. 후회할 게 뻔해서.
청건은 작게 실소했다. 우리는 온통 거짓말뿐이네.
그는 침대 위로 결박한 두 손을 짓누르며 고개를 틀었다. 흩어질 것처럼 희뿌연 목 위로 혀를 대며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리고, 암전.
띠디디디. 띠디디디-.
시간은 오전 11시 5분. 우윤이 떠난 후로부터 20일이 지난 날. 한 명이 살기엔 쓸데없이 큰 집의 침대 위에서 그는 눈을 떴다. 발기한 채로.
몽정이라니.
청건은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는 동안 화장실에서 속옷을 빨았다. 연기하고 연애하며 지긋지긋하게 하던 키스였다. 그러나 상대가 윤이라는 것만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하루에 2시간, 그마저도 악몽을 꾸는 게 대부분인 수면 시간마저 우윤에게 빼앗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바쁘게 지내지만 그리움은 극에 달한 모양이었다. 사실 가까운 사람들은 부쩍 말수가 줄어든 청건의 속사정을 다 눈치챈 모양이었지만.
청건은 쏟아지는 물 아래 헹군 속옷을 마지막으로 꽉 짜선 수건걸이에 던졌다. 축 처진 채 속옷을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비틀어진 정신을 다시 배열하기 위해 찬물로 샤워를 했다.
어떻게 순순히 잡혀 주는 법이 없을까. 연애 처음 하는 놈처럼 안달이 나선 하루에 몇 통씩 전화에 문자에. 그러나 그는 답장이 없었다. 윤은 대학 학점까지 관리해야 했던 미친 스케줄 때보다도 어렵고, 다루기 힘들었다. 물론 싫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고.
청건은 샤워기 레버를 잠그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유리 벽을 짚었다. 가끔씩 꿈은 커다란 힌트를 남긴다. 꿈속의 이청건은 추리했다. 우윤은 내가 싫어서 간 게 아니다. 나를 지키려고 간 거면 몰라도.
그는 당장 욕실을 나가 윤이 입었던 제 옷들을 껴입었다. 후드 집업 밑단을 탁 정리하니 익숙한 체향이 올라왔다. 달콤한 살내였다.
다년간의 사회생활은 청건에게 상대를 부드럽게 조져 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예상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핸드폰을 집어 든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1시간 후,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유리잔 위로 맺히는 물방울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보는 청건 앞에 아쉬운 놈이 앉았다. 채진은 노란색 클러치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남친이랑 맞춘 예물이니?”
그는 청건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눈짓하며 말했다. 윤에게 선물한 것과 같은 손목시계였다.
윤이 떠난 그날. 즉 김채진을 오랜만에 다시 본 날, 청건은 김채진이 꺼낸 ‘죽은 엄마’ 카드에도 침묵을 고수했다. 그 덕에 채진은 달궈지는 숯덩이같이 혼자 미친놈처럼 타오르다가 결국 제 화에 못 이겨 후퇴했었다. 제 딴에는 불만족스러운 재회였는지 전화를 넣자마자 달려온 모양이 우스웠다.
청건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가 수고롭게 낸 기사는 잘 봤어.”
“……그래?”
채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치더니 한쪽 팔뚝을 붙잡았다. 여유로운 척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은 청건의 가설에 확신을 더했다.
“네가 왜 우윤을 질투하는지는 잘 알겠어.”
“하, 뭐? 질투?”
순식간에 여유를 잃은 채진이 팔을 확 내리며 청건을 쏘아보았다. 이런 도발에도 쉽게 흔들리는 게 딱 그다웠다. 그는 곧 청건이 시켜 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쿨럭…… 야이 씹, 이게 뭐야?”
유리잔을 내팽개치듯 내려놓은 채진이 청건을 쏘아보았다. 그는 토악질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끔벅였다.
“알아서 시키라며.”
“미친 새끼…….”
청건은 제 앞에 놓인 에스프레소를 한입에 마시며 그를 살폈다. 샷 열 번 넣은 커피를 마신 김채진은 이를 갈았다.
“너 아냐? 너랑 예물 맞춘 새끼 곧 발현하는 거.”
“알지.”
청건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채진이 열심히 갈아 놓은 칼을 던졌는데 그걸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 든 모습이었다. 청건이 여유를 흉내 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진은 당황한 듯 몸을 들썩이다 재차 입을 열었다.
“오메가로 발현할 거야. 조만간일걸?”
독기에 차서 내뱉는 말에 청건은 눈썹을 들썩였다. 윤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선 역시나 얼굴에 한 톨의 혼란도 드러내지 않았다. 평온한 표정과는 달리 심장이 재게 뛰었지만, 그건 청건만이 아는 변화였다.
아무리 눈치가 좋다지만, 스물이 훌쩍 넘은 나이에 발현을 한다는 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 이만한 이유라면 겁먹은 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청건은 윤의 체향을 떠올리다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해 보면 그가 원하던 알파보다야 훨씬 잘 어울리는 형질이었다. 오메가인 우윤 또한 숨이 막히게 예쁠 것 같았다. 남자. 그리고 오메가. 기피하던 것의 집합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일인지.
아무런 타격이 없는 듯한 청건의 얼굴에 채진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왜 처웃고 난리야?”
청건은 꼰 다리를 가볍게 흔들며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다른 소식 물어 온 건 또 없어?”
채진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텔레비전 쇼라도 보는 듯 흥미로운 청건의 미소에 치를 떠는 듯했다.
“넌 씨발, 매번 반응이 왜 이따위야? 네 엄마 죽었다 했을 때도…….”
“네 엄마지 왜 내 엄마야.”
미소를 짓던 청건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위협적인 얼굴에 입을 다문 채진은 의자에 신경질적으로 기대며 누래 빠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청건은 몇 개월 전에 죽었다는 엄마, 남자 오메가인 유민혁과 똑 닮은 채진의 입꼬리가 파들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부형제인 청건과 엄마를 나눠 갖느니 마니 하며 혼자 견제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같은 처지끼리 정 없게.
유민혁의 소식은 솔직히 놀라웠지만, 사실 후련했다. 보통이 아닌 성질머리라 단명할 것이라 여겼던 추측보다야 훨씬 오래 살았다.
“아직도 유민혁이 네 세상인가 보네.”
“…….”
청건의 독백 같은 말에도 채진은 찌르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가만히 두나 봐, 내가.”
슬슬 이편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붙고 있었다. 김채진을 만난 목적은 이미 달성한 지 오래였다. 파파라치의 정체. 마침 기사가 뜬 날 떠난 우윤. 전혀 관계없는 윤에게 날을 세우는 김채진의 태도. 오메가 발현. 애초에 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김채진.
머릿속 퍼즐은 맞춰 볼 것도 없이 저 알아서 정렬되었다. 김채진은 유민혁이 죽은 후부터 무언가 큰일을 꾸미는 것이 분명했다. 그중 제1 목표는 이청건의 몰락일 것이다.
청건은 테이블 위에서 여유롭게 움직이던 손을 거두었다.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히 가라.”
짧은 말 뒤로 미련 없이 카페를 가로지르는 청건의 뒤에선 “야!” 하고 큰 소리가 터졌다. 청건은 윤이 그렇게 쓰기를 바라던 마스크를 그가 없는 지금에야 꼼꼼히 올려 썼다.
보고 싶다. 빨리.
그를 찾게 되면, 절대 속 썩일 일은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어쩔 수 없이 잠깐 그를 괴롭히긴 해야겠지만. 다신 도망갈 수 없게.
카페의 출입문을 열 무렵 다급하게 따라붙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옷깃을 잡아채는 느낌에 뒤돌아보자, 울먹이는 여성이 서 있다. 말은 못 거는데 옷은 애처롭게 붙잡는 모습이 영락없는 그의 팬이었다.
청건은 용기를 낸 자신의 팬에게 어느 때보다 예쁜 눈웃음을 지어 주고 밖을 나왔다. 입을 막은 그녀는 닫혀 가는 유리문 뒤에서 굳어 있다가 친구에게 돌아가며 발을 마구 굴렀다. 그 상황을 본 채진의 얼굴은 반대로 구겨졌다. 한없이 여유로운 청건의 모습이 꾸며진 것임을 모르는 탓이다.
청건은 건물 뒤편에 주차해 놓은 차 안에 몸을 실었다. 타자마자 참았던 숨이 조금 길게 터진다. 김채진 하나 속이는 거야 일도 아니나, 과거를 상기하는 건 언제나 유쾌하지 못했기에.
팔천면 시내의 <신전神殿>.
겉으로는 합법인 사이클 약 제조 시설을 표방하지만, 사실 알파 변형 알약을 불법 판매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사업이었다.
빚이 많았던 청건의 엄마 유민혁은 대부업자들에게 추천받아 신전의 브로커 자리를 얻었다.
일은 비교적 간단했다. 국내든 해외든, 알파 약이 필요한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약을 운반하면 됐다. 자신의 핏줄을 더 우월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이름난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주된 손님이었다.
그러나 빚을 거의 갚고도 쉽사리 신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함께 불법적인 돈벌이를 한 이상 신전과 유민혁은 같은 비밀을 품은 공범이었다.
회장과 시설의 관리자는 유민혁이 신전에서 한 브로커 일을 함구해 주는 대가로 더욱 큰돈을 요구했다. 아무리 브로커 일이 돈이 된다지만 신전이 제시한 금액은 터무니없었다.
민혁은 다른 구멍이 필요했고, 당시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던 이화건이 그의 표적이 되었다.
이화건은 종종 애인의 사이클 약 심부름을 들어주었다. 가끔씩 제조자인 민혁과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화건은 자신의 애인이 나이 많은 대기업 회장과 결혼식을 올린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리고 그날, 유민혁은 이화건을 꼬셔 얻어 낸 잠자리 한 번으로 이청건을 가졌다.
민혁은 청건을 어느 호적에도 올리지 않았다. 신전에서 일을 했던 제 이름이 꼬리표처럼 붙는 것보다 고아인 편이 깔끔했다. 이름뿐인 후견인 하나를 청건에게 붙이고, 그를 신전 주변의 지하실에 숨겨 길렀다.
그렇게 피임 기구를 흠집 내어 가진 이청건은 유민혁의 뜻대로 최고의 스타를 빼다 박은 모습으로 자랐다.
민혁은 돈을 악착같이 모아 청건의 인공 발현에 투자했다. 그 때문에 청건은 열성이 아닌 우성 알파로 발현할 수 있었다.
유민혁은 청건이 혹여 한눈을 팔 것을 대비해 늘 일이 끝나면 신전의 숙소에 있는 김채진이 아닌 청건을 찾아왔다. 그 탓에 10살에 우성 오메가로 발현한 김채진은 늘 민혁의 관심 밖처럼 보였다. 김채진은 유민혁의 사별한 남편이 남긴 유일한 선물인데도.
유민혁의 실수였다. 채진과 따로 살가운 이야기들을 나누지 않아도 자신의 모성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 것은.
청건은 김채진과 유민혁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열쇠가 될 일종의 ‘도구’일 뿐이었으나, 채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채진은 엄마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청건이 사는 지하실을 알아냈다.
청건은 언젠가 엄마가 떨어뜨리고 간 열쇠를 마루 속에서 빼냈다. 몰래 창살 밖으로 팔을 빼 지하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다 지하실이 있던 폐가의 마당에 앉아 있는 김채진과 마주했다. 12년 만에 서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그때부터 김채진은 종종 지하실을 찾아와 폭력을 일삼았다. 청건의 키는 진즉에 그 둘을 따라잡고도 남았지만, 폭력을 막을 재간은 없었다. 유민혁과 김채진은 꼭 청건이 알파 약을 맞아 썩은 걸레처럼 늘어져 있는 때를 골랐다.
그렇다고 신전을 찾아가 그 둘에게 똑같이 갚아 주는 것이 맞는가. 그건 또 아니었다. 청건은 계산을 잘했다. 엄마인 유민혁이 청건을 ‘위해’ 7년이 넘게 꼬박꼬박 맞히던 알파 약 덕에 정말 자신이 잘나가는 연예인이 된다면, 깨끗한 과거가 필요할 터였다. 그 생각 하나로 울컥울컥 올라오는 충동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늘 정상에 선 자신의 모습만을 그렸다. 그로써 민혁의 꿈은 곧 청건의 꿈이 되었다.
입술 주변의 피딱지를 매만지던 청건은 엄마가 일을 나가는 시간이 되자 조용히 지하실 문을 열었다. 그의 손엔 고등어 캔과 딱딱한 빵이 들려 있었다.
후문을 통해 조금 걸어가면 낡은 빌라촌의 쓰레기장이 나왔다. 민혁은 검정고시를 볼 교과서 말고는 어떤 지원도 해 주지 않았으므로 청건은 그곳에서 책을 주워다 읽었다.
그곳에서 세상을 배웠다. 그리고 뒤늦게 민혁이 제게 하는 짓들이 잘못된 것임을, 불법적인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약을 맞은 자신도 공범으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쓰레기장에선 가끔 음식물을 뒤지는 고양이를 볼 수 있었다. 그 아이를 만나는 날이면 챙겨 온 음식을 기쁘게 나눠 주었다. 그는 늘 혼자인 존재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누군가 꾀죄죄한 몰골로 책을 읽는 청건의 옆에 피우다 만 담배를 버리고 가면, 그는 그걸 몰래 주워 피워 봤다. 해가 거의 질 무렵이면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화단에 책을 묻어 두고 서둘러 지하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열여섯.
근래 열이 펄펄 끓던 몸 상태에 익숙해지던 차였다. 청건은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발현통에 정신없이 휩쓸렸다.
알파 약을 맞을 때마다 청건은 끔찍한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다. 이따금 조명에 매달린 밧줄에 목을 달랑대며 죽어 있는 자신이 보였다. 민혁이 얼굴을 뺀 몸 곳곳을 상처가 남지 않도록 기술 좋게 걷어찰 때면, 마침내 내장이 터져 죽은 자신의 시체도 보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청건은 천장에 매달린 시체와, 막 지하실로 들어오는 유민혁을 헐떡이며 응시했다. 민혁은 눈이 반쯤 감긴 채 몸을 떠는 청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파.’
죽어라 맞을 때도 엄살 한번 없던 청건이 읊조렸다. 민혁은 비소를 지으며 그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발현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듯 놀라지도 않았다.
청건은 폭설이 내리는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몸을 밀치는 손길에 맥없이 담 위에 기대었다. 언 땅을 디딘 맨발이 곱아들었다. 유민혁에게선 처음 맡는 썩은 포도 향이 났다.
’내가 맨날 말했던 거 뭐야. 읊어.’
민혁은 얼굴을 찡그리며 숨을 고르는 청건의 머리칼을 쥐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던 청건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화건을, 찾으라고…….’
수백 번을 들어 왔다. KS엔터 이화건을 찾아 유민혁의 아들이라 말하라.
‘또.’
‘셋 사이, 밝히지 않을 테니까…… 자리 잡을 때까지만 거둬 달라고…….’
‘잘하네, 우리 아들.’
민혁이 웃음을 지으며 청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청건은 흐린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했다.
드디어, 떠난다.
무심코 올라가려던 입꼬리는 발현의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졌다.
‘협박이든 뭘 하든 해서 그 사람 설득해. 어떻게든 성공해서 날 꺼내라고. 알았어?’
‘…….’
‘대답해야지, 아들.’
‘……네.’
성공. 청건 역시 뼈저리게 원하던 바였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성공해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게, 그게 네가 태어난 이유야.
청건은 그가 던진 가방을 쥐고 차가운 담을 짚으며 걸었다. 담을 따라가 후문을 지나면, 어느 순간부턴 흰 고양이가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느리게 이어진 걸음은 빌라촌의 쓰레기장에서 멈추었다. 얇은 옷 한 벌로는 엄동의 날씨를 견디기 어려웠다. 의류 수거함에서 목도리와 겉옷을 꺼내어 몸에 둘렀다.
청건은 지속적으로 칼에 베이는 듯한 통증을 뒤로하고 몸을 굽혔다. 자신의 다리에 붙어 오는 아이를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었다.
‘또 보자.’
고양이는 먼지에 덮인 흰색 몸뚱이를 다리에 몇 번 비비다 사라졌다.
청건은 계속해서 낯선 외부인들의 눈길을 피해 걸었다. 이제 떳떳하게 바깥을 돌아다녀도 되는 몸이었지만 그는 지나치게 사람들을 경계했다. 사람들 사이를 걷던 중 까무룩 기절을 할 뻔도 했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었다.
머릿속에 있는 약도를 떠올리며 사람이 드문 역사로 갔다. 그는 서울행 편도 기찻값만 가지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화건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 발현통을 멈추게 해 줄 약을 구할 수 있다 그랬다.
도착한 역의 반대편엔 단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청건은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치켜떴다. 쓰레기통을 꽉 쥔 그는 헛구역질 끝에 피가 섞인 침을 뱉어 냈다.
멀리서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역을 통과하는 기차였다. 맞은편에 선 남자는 청건을 향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철 덩어리가 빠르게 선로 위를 내달렸다. 속도를 줄이지 않는 기차를 보던 청건은 맞은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허공에 발을 디뎠고,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땅과 전신이 진동하던 그 죽음의 순간에, 청건은 다짐했다.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고. 그 둘이 아닌 자신을 구하는 데에 전력을 쏟을 것이라고.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나의 삶을 위함이라고.
그 후 며칠 밤낮으로 엔터 주변에서 잠을 잤다. 귀동냥으로 이화건의 집을 알아냈고, 마침내 발견한 화건의 집 앞에서 청건은 혼절했다.
하늘이 도운 것인지,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한 것은 화건이었다. 기계처럼 민혁의 말을 전하는 청건에도 화건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그는 드물게 총기로 가득 찬 청건을 애정으로 돌보았다. 청건은 무언가를 가르침받는 족족 자신의 방식대로 흡수했다. 화건은 약속대로 그의 데뷔를 도왔고, 청건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성장했다.
버티다 못한 유민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랑하는 김채진을 신전에 놔두고.
그러므로 김채진은 여전히 제 엄마의 희생 아닌 희생을 모르고 있었다. 또 청건을 민혁의 특별 대우를 받던 운 좋은 놈으로만 알 것이다.
회사 측과 청건의 일을 돕는 측근들에겐 두루뭉술하게나마 예전 일을 말해 놓아야 했다. 그래야 어떤 일이 생기든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윤에게는 이 일을 끝까지 감추려 했다. 타의로 벌어진 일이라지만, 자신의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걸 원치 않았다. 청건은 윤이 마음 놓고 숨을 수 있는 벙커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었지, 그의 연민과 보살핌을 받고 싶진 않았다. 오롯이 주기만 하고 싶었다. 짐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윤과의 관계를 형 동생으로 정의하고자 하던 무렵엔, 윤의 치유만을 목표로 삼았다. 화건이 그랬듯, 누군가가 건네주는 진심 어린 관심만으로 벼랑 끝에 선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PM 9:00」
자동차 센터페시아 위로 흰 글씨가 빛났다. 그는 습관처럼 메시지 함에 들어갔다.
[재밌기만 해도 되니까, 다치지만 말고…….]
망설임 끝에 메시지를 보낸 청건은 괴로운 얼굴로 목덜미를 쓸었다.
핸드폰을 조수석 시트에 놓은 청건은 글로브 박스 안을 헤집었다. 깊숙한 곳에서 찾은 약병에는 낡은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신경 안정제였다. 가장 바빴던 5년 전에 마지막으로 복용하였던.
‘멀리서도 오메가 냄새가 진동을 해서, 좀 역겹네.’
윤이 돌아오지 않으리라 결심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라면. 청건은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감으며 시트에 기대었다. 약병을 꽉 움켜쥐고 오랫동안 숨을 골랐다. 이렇게 유야무야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 없는 삶을 점차 익숙하게 여길 우윤을 생각하면, 다시 그 독방과 같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파묻힐 우윤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옥탑 화장실 안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양치를 하는 우윤. 제 눈치를 보느라 옷을 다 껴입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하는 우윤. 그가 몸을 닦아 내는 물소리를 들으며 뻐근해지는 아래를 야속하게 내려다보던 그때.
너를 얼마나 사랑하게 됐는지, 조금씩 다가오는 윤에게 전부 증명할 자신이 없어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던 그때.
그 평화롭고 어리석은 날을 한시 빨리 되찾아야 했다. 옷에 밴 냄새가 아닌, 직접 끌어안고 맡는 그의 살내가 그리웠다. 시간을 돌릴 기회가 생긴다면 그를 놓치는 실수 같은 건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텐데.
그를 돌보려던 관심이 사랑으로 뒤바뀐 이유가 설령 오메가의 페로몬 때문이었을지라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너를 돕고, 너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풍족하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청건은 감았던 눈을 떴다. 불안감에 여전히 숨이 떨렸지만 약병을 던지듯 놓고 시동을 걸었다.
몇 주간 고열에 시달렸던 윤이 생각났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울 발현을 혼자 견디게 둘 수는 없었다.
* * *
청건이 가고 딱 하루가 지났다.
침대에 누운 윤은 굉장한 속도로 느는 제 팔로워와-무려 13만 명- 날아오는 수천 개의 메시지 폭탄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시 전화가 걸려 오자 그는 무거운 손을 움직여 기계적으로 차단 버튼을 눌렀다. 행여 청건의 연락이 섞여 있진 않을까 충전 선을 24시간 꽂아 놓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복되는 단순 노동 끝에 윤은 핸드폰을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퉁퉁 튕기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충전 선에 달랑달랑 매달린 폰을 보던 윤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이 난리가 난 것은 윤뿐만이 아닐 테니 청건 역시 번호를 바꾸었을 터였다. 스케줄을 진행하려면 하루빨리 멀쩡한 핸드폰이 필요할 테니까. 만에 하나 아직 전 번호를 유지 중일 경우, 윤이 새 번호로 개통을 해 버린다면 이제 둘의 소통 창구는 완전히 사라진다는 소리였다. 지인을 통해서는 알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청건이 제 새 번호를 직접 주지 않는 이상 앞으로 연락을 끊자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았다. 지금까지 윤에게 썼던 돈 같은 건 그에게 중요치도 않은 문제일 테니.
윤은 한숨도 못 자 푸석한 얼굴을 쓸며 일어났다. 출근까지는 한참 시간이 남아 있었다. 활짝 열어 둔 창으로 다가가 창틀을 짚었다. 동이 트고.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넘어왔다. 멀리서 잔잔하게 치는 파도까지.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도 또 없었다. 이미 헤어진 사이에 왜 이렇게 생각이 복잡한지. 윤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뇌를 뜯어내고 싶다는 잔인한 생각을 했다.
늘어진 정신을 깨울 겸 찬물로 샤워를 했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쓸며 거울을 흘끗 보았다. 오랜만에 마주친 우윤은 희다 못해 푸른색인 얼음 같았다. 애써 고개 돌린 그는 조금이라도 자 보려고 침대에 들어가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지만 결국 퀭한 얼굴로 출근길에 올랐다.
몇 시간 후엔 현재의 카메라 렌즈를 깨 먹었다. 의뢰인1에게 보낼 완성본을 의뢰인2에게 보내 혼선을 빚었고, 출장 일정을 잘못 통보하여 이미 다른 고속 도로를 탄 현재로부터 인내의 한숨을 들어야 했다.
퇴근 1시간 전 녹초가 되어 돌아온 현재는 넋이 빠져 있는 윤에게 또 조기 퇴근을 명했다. 군말 없이 <부자 사진관>을 나선 윤은 힘없이 시내 슈퍼로 들어가 딸기 우유 한 팩을 집어 들었다. 계산대 앞에 서서 할머님이 단말기에 카드를 꽂는 걸 보던 그는 그녀의 뒤에 놓인 담배 진열대를 바라봤다.
“……저거, 얼마예요?”
윤은 빨간색 담뱃갑을 슬쩍 가리켰다. 윤이 가리킨 것을 말없이 꺼낸 그녀는 라이터 하나까지 동시에 계산을 마쳤다. 슈퍼 밖으로 나온 윤은 속전속결로 결제를 끝낸 담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요즘 담배 가격만…… 알려고 한 건데.
청건이 피우던 담배였다. 사실 가격만 알 거였으면 라이터를 함께 건네는 손길을 거절하면 그만이었던 것을. 핑계인 것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윤은 봉투 안으로 그것들을 넣고 터덜터덜 길을 걸었다.
대리점 주변을 한참 맴돌다 모텔로 향했다. 모텔 앞에 도착한 윤은 바로 옆 건물 계단 위에 털썩 앉았다. 아까 산 담뱃갑을 꺼내 천천히 돌리다가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꼴값이네…….”
이걸 사 와서 뭘 어떡하겠다는 걸까.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를 또다시 피우겠다는 건지 뭔지. 정작 청건은 금연에 성공했다는데.
하지만 청건의 페로몬 향도 알지 못한다는 억울함이 이걸 사게 만들었다. 발현 후기 증상으로 처음 맡아 본 향이 썩어 빠진 레몬 향이라는 게 뭐 같았다. 그러니 직접적으로 그와 맞닿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담배뿐이었다. 빌어먹을 머리통이 잔머리를 굴린 것이다. 살아 보겠다고.
침묵하던 윤은 이내 결심한 듯 포장지를 벗겨 냈다. 3주면 많이 참았다. 한 대 피웠다고 죽기야 하겠나. 딱 한 번, 딱 한 모금만.
하얀 담뱃대를 입에 문 윤이 새 라이터를 꺼내 달각였다. 바람이 세게 불어 라이터 불이 생겼다가도 자꾸 사라졌다. 그는 손으로 바람을 막은 후 라이터를 대고 다시 불을 붙였다.
그때 집중하고 있던 흰 담뱃대가 홱 하니 사라졌다. 이 양반 벌써 퇴근했네. 장난기라면 이새미에 뒤지지 않는 선현재의 짓이 분명했다. 인상을 찡그린 윤이 고개를 들자 범인은 반으로 꺾은 담배를 건물 앞 쓰레기통에 던지고 웃었다.
“좋은 저녁이네.”
“……허억.”
뒤늦게 상황 파악한 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몸을 일으켰다.
“서울 간 거 아니었어요?!”
소리를 치는 윤에 청건은 웃음을 참는 듯도 했다. 놀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때에 맞지 않는 감미로운 저녁 인사가 귓전을 징징 맴돌았다.
“오션 뷰에서 투숙 중인데?”
짙은 숲 색 볼 캡을 눌러쓴 청건은 윤의 검은 후드 집업과 검은 트레이닝 복 바지를 입은 채였다. 살짝 길이가 짧은 바지까지 단숨에 훑어보던 윤이 멍하니 눈을 끔벅거렸다.
오션 뷰. 오션 뷰라 함은,
윤이 머무는 방 호수를 아는 이상 204호와 같은 라인에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입이 벌어졌다. 그는 막 잠에서 깬 듯 작게 하품하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분명히 간다고 그랬잖아. 잘 지내라 그래 놓고…….”
윤은 황당함과 안도가 섞여 꽉 메어 버린 목소리를 내었다.
“많이 화났어?”
청건이 윤의 코끝을 톡 두드렸다. 윤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놀라서인지 태어나 몇 번 흘려 보지도 못한 눈물을 또 쏟을 뻔했다. 눈가가 마를 수 있게 바람이 다시 불었으면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사위는 잠잠했다.
“어젠 너무 졸려서 뭘 할 기력이 없더라고. 처음엔 무턱대고 찾느라 며칠을 차에서 잤는지 모르겠어.”
청건은 바다 냄새를 맡으려는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다행히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아서. 이참에 누구 속 좀 태워 보려고.”
“…….”
청건은 윤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씩 웃었다. 무슨 시간이 남았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다행히 휴식을 잘 취하기는 한 건지 약간 눈이 부어 있음에도 어제보다 안색이 한결 밝아 보였다.
“하루 동안 잘 지냈지?”
청건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웃음을 살짝 참는 듯한 모습에 입술만 깨물던 윤이 이내 그를 지나쳐 걸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디 가?” 청건이 뒤에서 묻든 말든 일단 쏜살같이 자리를 벗어났다.
쪽팔려…….
일단 부끄러움을 없애는 게 우선이었다. 헤어진 주제에 세상 끝난 사람처럼 그가 피우던 담배를 물었다니. 그리고 그걸 당사자한테 들키기까지. 여태 그를 속이기 위해 했던 모든 난리가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빠르게 걷던 걸음이 덜컥 멈춘 것은 그때였다. 손에 쥐고 있던 게 휙 사라지는 느낌에 얼떨떨하게 고개를 올렸다.
“이건 압수.”
청건은 그걸 바지 주머니에 넣곤 지퍼를 잠갔다. 윤은 맥없이 빼앗긴 담배에 멍하니 빈손을 바라보았다.
“얼른 새 번호로 바꿔. 빨리 연락하고 싶어.”
청건의 말에 윤의 시선이 감출 새 없이 떨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고. 연락도 계속할 생각이었고.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평소엔 잘만 돌아가던 머리가 청건과의 일엔 백지가 되어 버렸다.
그때 가까운 모텔 유리문에서 손님이 나왔다. 커플이 내는 웃음소리에 정신이 들 무렵, 청건이 그의 팔을 잡아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청건의 입술이 귓가에 스치자 윤의 몸이 바짝 굳었다.
“어려울 거 없어.”
“…….”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지.”
낮은 귓속말에 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제 마음을 간파당한 것 같아 식은땀이 흘렀다.
사람들과의 간격이 벌어지자, 청건은 윤 쪽으로 살짝 몸을 숙여 모자 아래 감추었던 얼굴을 들었다. 윤의 갈색 눈동자를 빤히 내려다보던 청건이 하얀 볼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놀란 윤이 어깨를 떨자, 청건은 마스크를 쓰며 유유히 뒷걸음쳤다.
“산책 갈 건데. 같이 갈래?”
멍한 윤에게 물어봐야 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청건은 그 사실을 잘 아는지 그저 인사하듯 가볍게 웃곤 뒤돌아 걸을 뿐이었다.
윤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속수무책으로 말려 버렸다. 그에게 다가오는 뽀뽀도 안 막고 프랑스식 인사나 했다고 투정 부린 게 민망할 정도로.
청건의 침입이 반복된다면, 휩쓸리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윤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머리칼을 헝클였다.
* * *
<부자 사진관>은 스튜디오 촬영이 한창이었다.
실내엔 현재가 작동시키는 기계음이 가득했다. 그 장면을 보며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던 윤은 촬영 콘셉트가 적힌 종이로 힘없이 부채질을 했다. 열이 펄펄 끓는 이유야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넘쳐서 터지기 직전에 204호에 머물게 되면서 발현이 미루어졌는데, 꺼졌던 발현의 스위치를 청건이 날름 눌러 놓고 튀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언제 어디서 재앙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일을 하니 심상치 않음을 느낀 현재가 계속 휴식을 권했지만, 윤은 한사코 거절했다.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더 많은 잡념이 몰려올 것 같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청건이 ‘좋은 저녁이네.’ 인사하던 게 벌써 5일 전 일이었다. 그를 잊기 위해 견디는 사람을 뒤집어엎고는 또 감감무소식이었다.
윤은 출근 전, 프런트에 얼굴을 보이며 선 씨 아저씨께 “청건 형 몇 호에 묵어요?” 물었다. 그러면 아저씨에게선 “청건이? 방 빼고 서울 갔는데?”란 예측도 못 한 답이 돌아왔다.
발현도 발현이지만 청건 때문에 열이 올라 더운 건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안 될 것 같았는지, 더 큰 한 방을 위한 후퇴인지 뭔지 청건의 속내가 무엇인지 감이 안 잡혀서 일도 손에 안 잡혔다. 스튜디오 안에서 셔터 소리가 터질 때마다 윤의 머리도 함께 터졌다.
촬영을 끝낸 고객은 보정 전 사진을 보고도 만족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는 그 사람에게서 부각해야 할 매력을 사진에 잘 담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윤은 제게 후한 칭찬을 퍼붓는 현재야말로 더욱 유명해져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일정을 확인하니 전화로 진행하는 촬영 상담이 있었다. 아날로그파인 윤은 확인한 수첩을 소리 나게 닫았다. 그리고 손님을 배웅 후 구석진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현재는 어지럽게 늘어진 줄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다가 저기압인 윤을 흘끗 돌아보았다.
“너의 님이 떠나서 그러나?”
윤은 선량한 얼굴로 사람 정곡을 찌르는 현재를 향해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제 내 님 아니니까 그런 호칭은 자제해 주실래요? 속이 좀…… 울렁거려요.”
“뭐야. 너희 싸웠어?”
불을 끈다는 게 더 부채질한 모양인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의 현재가 윤 쪽으로 후다닥 다가왔다.
싸운 건 또 아닌데…… 이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윤은 열 감기약을 꺼내 물과 함께 비타민 먹듯 삼키곤 최대한 여상하게 말했다.
“인연이 아닌가 보죠.”
그러자 현재가 다급히 의자를 끌어다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청건 개 쩔게 생겼잖아. 그런 사람은 억지로라도 인연으로 엮어야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아쉽잖아. 성격도 좋던데.”
개 쩐다라. 윤은 개 쩌는 청건의 얼굴을 잠깐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저기서 경고하는 거 같아요. 인연이 아니니까 이쯤 하고 끝내라고.”
“…….”
“어차피 언젠가 끝날 거……. 더 정들기 전에 그만해야죠. 현실적으로 이게 맞으니까.”
우울함이 확연히 티 나는 목소리였다. 현재는 못마땅하게 입술을 내밀며 그런 윤을 빤히 보았다.
“너 이청건 엄청 좋아하는구나.”
윤은 대꾸하지 못하고 의자에 깊이 기대었다.
어디서 티가 났을까.
현재는 감기약 박스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는 윤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럼 비현실적으로는 어쩌고 싶은데?”
“…….”
윤은 동그란 눈의 현재를 마주 보았다.
……비현실적으로?
난생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윤은 갈매기가 떠다니는 듯한 그림이 그려진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비현실적으로는 뭐. 형질 구분 없이 마음이 가는 사람을 좋아하겠지. 눈에 띄는 밝은 옷을 마음껏 입고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언제 나를 떠나갈 지 걱정하지 않고 마음 맞는 아무하고나 친구를 먹고. 사람들의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누가 어디서 경고를 하든 말든,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라도 더 있고. 같이 손잡고. 사람 많은 길 위를 걷고. 같이 먹고 싶은 걸 먹으러 다니고…….
“현실하고 타협하면 너무 어른 같잖아. 인간은 원래 철이 안 드는데.”
“…….”
“한 번 사는 거 네 멋대로 살아. 누가 뭐래. 이청건도 네가 싫대? 다 정리했대?”
내가 보기엔 아니던데……. 저번만 해도 나한테……. 현재는 중얼거리다 말고 윤의 눈치를 보았다. 윤은 그가 하는 말들을 뒤로하고 애써 마우스를 움직였다.
“정리는 뭐……. 서서히 되겠죠. 지금이야 미련이 있겠지만……. 애초에 나는 현실주의자라 그렇게 못 해요. 나랑 청건 형은 그럴 수가 없고요.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윤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단어를 또 반복했다.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그가 마우스를 부지런히 놀려 기기의 사진을 전송받는 걸 보던 현재는 오지랖을 부린 건가, 눈치를 보는 얼굴로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래 뭐…… 연인 사이 일이 좀 복잡하냐. 삼자가 왈가왈부할 것도 아니고…….”
웅얼대던 현재는 곧 테이블을 두 손으로 탁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소리에 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기분이다. 오늘 1시간 일찍 퇴근. 그리고 저녁 쏜다. 소고기로.”
윤은 제 기분을 풀어 주려 애쓰는 듯한 현재에 소리 없이 웃었다.
“기분 따라 지갑 여는 타입이신가. 위험한데.”
“네가 내 지갑 사정까지 봐줄 필요는 없네요. 보정 몇 개만 끝내고 나가자.”
현재는 의자를 죽 끌어당겨 제자리에 놓더니 마우스를 잡기 전에 목을 스트레칭 했다. 곧 보정 작업할 것들을 깔끔히 정렬하는 현재를 바라보던 윤도 이내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래. 계속 생각해 봐야 뭘 하겠어. 다시 시작할 것처럼 굴더니 정신이 번쩍 들어 다 포기하고 떠났다면, 그건 그대로 또 적응해 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윤은 청건과 헤어진 것인지 아닌 것인지 확정하지 못한 채 퇴근 1시간 전까지 일에 몰두하려 애썼다. 아예 청건 쪽으론 신경을 차단한 듯 연기했다. 내일까지 차 있던 상담 전화를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끝내 놓았고, 일주일 후까지 넉넉히 줘도 될 보정본도 거의 다 작업을 마쳤다. 잡생각을 차단하는 데엔 일에 집중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으니.
하지만 퇴근할 무렵이 되니 아무래도 무리한 여파가 오는지 조금 어지러워서 현재에게 모텔행을 통보했다. 그러나 하나 있는 직원의 회식 불참을 봐줄 리 없는 현재는 “몸이 그럴 때는 단백질 보충을 잘 해 줘야 해.” 하며 윤을 막아섰다. 언제부터 이별엔 고기를 먹는 게 처방법이었느냐 따져도 소용없었다. 윤은 헬스에 미친 사장의 힘센 손아귀에 질질 끌려 트럭에 실렸다.
한바탕 고기를 먹고 나온 윤은 모텔로 돌아와 로비 소파에 앉았다. 현재는 따라오는 기척이 없으니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뒤돌며 물었다.
“안 올라가?”
윤은 비싼 고기를 먹은 건 둘째 치고 계단을 올라갈 힘도 없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 소파에 박혀 벽에 머리를 기대는 윤을 보던 현재가 혀를 쯧 차며 계단을 올라갔다.
에휴, 기껏 배불려 줬더니 말이야……. 하긴 뭐 내 돈도 아닌데. 현재의 중얼거림을 한 귀로 흘린 윤이 한참 멍하니 앉아 체력을 보충하는데 이번엔 선 씨 아저씨가 다가와 물었다. 피골이 상접한 이유가 이청건 때문이냐고. 윤은 괜찮다 대꾸만 할 뿐 말을 줄였다. 곧 발현할 예정이라 더 그래 보일 거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핏기 없는 그 얼굴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로 돌았다. 윤이 소파에 축 늘어졌던 몸을 세우며 슬슬 올라가 보려고 가방을 드니 갑자기 불쑥 다가온 아저씨가 테이블 위에 대접을 내려 두었다.
“……이게 뭐예요?”
“원래 몸이 그럴 때는 쌍화탕을 먹어야 돼. 천년 묵은 쇠약함이 싹 가시거든. 여기에 들어간 한방 재료만 20개가 넘어. 이게 저기, 이청…….”
아저씨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허공을 보며 입을 다셨다.
“아무튼, 다 마실 때까지 못 올라가는 줄 알고.”
“……네?”
윤은 홱 돌아 사라지는 아저씨와 제 몸만 한 흰 도자기 그릇을 번갈아 보았다. 고기 먹은 것도 얹힐 판인데 이 많은 걸 언제 다 마시고 갈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프런트 안에 들어간 아저씨가 어서 쭉 들이켜라는 듯 손짓했다. 눈치 보던 윤은 진갈색 액체가 가득 든 그릇을 들고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만족스러운 듯 엄지를 올리는 아저씨에게 어색하게 웃었다. 예상보다 달아서 맛이 좋았다.
눈을 굴리며 가만히 앉아 있던 윤은 결국 가방 속에 습관처럼 넣고 다니던 노트북을 꺼냈다. 이걸 다 마시고 가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으므로. 두 다리를 소파 위로 올린 그가 허벅지 위에 둔 노트북을 엄지로 한 번 쓸어 보았다.
다시금 코너에 몸을 푹 기댄 윤은 빤히 살피던 회색 노트북을 열어 젖혔다. 부팅이 다 되자 인터넷을 켜 커서를 검색창 위로 옮겼다.
「발현 직전 무력감.」
오늘따라 유독 몸이 축축 처지는 게, 검색을 안 하고는 못 배길 정도로 증상이 심각했다. 소고기와 쌍화탕이 정말로 한 몫을 해 주면 좋으련만.
엔터를 누르고 스크롤을 내렸다.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이별 후 무력감에 힘이 드시나요? 무력감 5가지 대처법」이란 제목의 게시 글이었다. 그냥 넘어가기엔 제 상황과 퍽 잘 맞아떨어지는지라 망설이다 게시 글을 클릭해 보았다.
자격증 따 보기. 깨끗한 식습관. 충분한 숙면. 새로운 운동. 원인을 명확하게 파악해 제거.
윤은 대처법을 대충 훑어보다 5번 ‘원인 제거’에서 스크롤을 멈추었다. 원인 제거라. 그럼 둘 중에 한 명을 죽이면 끝나나. 도움이 된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해결법이었다.
“……더 보고 싶다.”
윤은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다른 고민에서 이청건 생각으로 도약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무기력하게 있던 윤은 이내 동영상 사이트를 켜 보았다. 들어가자마자 일전에 제가 봤던 영상을 토대로 추천 영상을 띄워 주는 친절한 사이트는 보고 싶던 얼굴을 화면 가득 띄워 주었다.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다. 이어지는 섬네일을 훑어보자 다양한 스타일링의 청건을 구경할 수 있었다. 찍어 둔 사진 한 장 없는데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다는 게 유명인과 했던 연애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헤어진 사이보다 애인일 때 두드러지는 이점일 뿐이라, 더욱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켠 김에 아무거나 보고 나갈까 싶어 제목을 죽 훑었다. 그중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인간 뱀 이청건 후방 주의 키스 모음zip (닳겠네 닳겠어)>
제목 한 번 요란했다. 윤은 제목을 지어 업로드 한 사람과 한판 붙을 것 같은 얼굴이 됐지만 그의 손가락은 주인의 언짢음은 상관없다는 듯 동영상을 재생했다.
- 아무리 그래도……!
-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내 소관은 아니고.
- ……개 같은 새끼…….
상대와 말로 치고받고 싸우던 이청건은 돌연 그녀에게 입술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축축한 소리가 모텔 로비를 장악했다. 윤은 재빨리 노트북 소리를 줄였다. 도대체 싸우는 소리보다 침 소리를 더 크게 집어넣을 이유가 뭐야?
살색투성이인 화면을 보는 윤의 미간이 좁아 들어갔다. 둘은 눕지만 않았을 뿐 소파에 앉아 서로를 미친 듯이 맛보고 있었다. 섹스를 위한 관문을 무사 통과 중인 두 남녀의 스킨십이 15세 판정을 받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청건이 잘난 상판을 까고 있기까지 한데!
소리를 줄였는데도 이상하게도 타액이 오가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이 들 때쯤, 윤은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보고 있는 저 혓바닥은 분명 제 입을 헤집던 알파의 것이 확실했으니. 또한 1시간짜리 ‘모음zip’인지 뭔지 보다도 청건과 자신이 나눈 키스 시간이 훨씬 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입속으로 달큼하게 넘어오는 타액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잡아당기던 목덜미의 뜨겁고 부드러운 감촉도. 그가 퍼붓는 키스에 속절없이 부풀던 아래의 감각도 생생했다. 유독 몸을 맞댈 때면 거칠 것 없어지는 그의 행동에 심장이 자르르 떨리던 감각도. 더 세게 밀어붙여 줬으면 싶던 자신의 변태 같은 욕구도. 모두 어제 일 같았다.
영상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할수록 점차 윤의 입도 벌어졌다. 나한테도 저런 식으로 했었나? 정말 입안이 닳을 정도로 저렇게, 격렬하게…….
……했었다. 했던 거 같다. 고작 키스에 정신이 나갈 정도로 오래도 했었다. 턱이 뻐근할 정도로 서로의 입술을 움직여 가며…….
“키스 잘하네.”
“그러니까…….”
열받게.
저렇게 사방팔방 연습하고 실전에 써먹었으니 정신이 나갈 만도 하지. 영상을 볼 뿐인데 아직까지도 이렇게 생생할 정도로…….
“…….”
“…….”
이어지던 음란한 생각이 끊긴다. 그 순간 윤은 허리를 꼿꼿이 세움과 동시에 노트북을 세차게 닫았다. 키스 소리가 사라진 모텔 로비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뽀득, 하고 바로 옆에서 나는 가죽 소파 소리. 그리고,
“좋은 저녁.”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음성. 윤은 얼결에 쥐고 있던 마우스를 던져 버렸다.
“아!”
간지러운 왼쪽 귀를 부여잡던 윤이 짧은 비명을 지른 청건을 돌아보았다. 힘껏 던진 마우스에 머리를 제대로 맞은 건지 그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윤은 청건이 바닥을 뒹구는 마우스를 다시 손에 쥐여 줄 때까지 놀란 숨을 골랐다.
하필 이런 문란한 영상을 감상 중일 때 올 건 뭐냐고! 기가 막힌 타이밍과 때려죽일 ‘좋은 저녁’을 곱씹던 윤은 와르르 덮쳐 오는 쪽팔림에 마우스과 노트북을 가방에 욱여넣었다.
“번호 바꿨나 보네? 조용한 걸 보니까.”
청건은 혼자 바쁜 윤을 향해 테이블 위의 잠잠한 핸드폰을 턱짓하며 물었다. 윤은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이 부끄러운 상황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기에 청건은 보지도 않고 대접을 두 손으로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무려 20여 가지 한약재를 넣었다는데 아저씨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몸통만 한 쌍화탕을 꿀꺽꿀꺽 단숨에 마셔 버린 윤이 급하게 테이블 위로 그릇을 내려 두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 난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청건이 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거 안 가져가?”
윤은 제 핸드폰을 흔들거리는 청건을 보다가 다급하게 폰을 빼앗아 들고 뒤돌았다.
“단축키 1번 해 놨어. 급하면 바로 전화해.”
그건 또 어느새. 등 뒤에서 말하는 청건을 뒤로하고 마구 걷던 윤은 마침 로비로 폴짝 뛰어 내려오는 현재와 어깨를 부딪쳤다.
“아…….”
“어우, 괜찮아? 위험하게 왜 땅만 보고…… 엇!”
뒷걸음치는 윤을 잡아 준 현재가 갑자기 오른손을 팔랑대며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청건에게 하는 인사였다. 윤을 보던 현재는 갑자기 어깨동무를 해 왔다. 억지로 이끌려 다시 로비에 선 윤은 현재가 휙 던진 물체를 청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받는 걸 보았다.
“206호?”
“응. 방세는 진짜 필요 없어. 주지 마.”
“그런 게 어딨어. 이따 계좌 확인해.”
“윤이랑 방 같이 쓰면 무조건 무료로 해 줄 텐데. 저 형 가끔 보면 얄짤없다니까. 그치?”
현재가 둘 모두 들으라는 듯 크게 하는 소리에 윤이 어깨를 비틀었다. “놔요.” 속삭였지만 현재는 그의 어깨를 더욱 꽉 붙들고 청건에게로 걸었다.
“형 담배 펴?”
“아니, 끊었어. 윤이 덕분에.”
“와, 대단하네.”
둘이 주고받는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윤은 형들 사이에 끼어 놀림받는 막내라도 된 것 같아 인상을 찡그렸다. 현재는 선 씨 아저씨와 똑같은 포즈로 엄지를 척 들어 보이더니 윤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 청건에게로 직송했다. 청건이 오버 하며 “으쌰.” 하고 물건 받는 소리를 내더니 윤을 홱 돌려 어깨동무했다. 가까워진 얼굴이 부드럽게 웃었다.
현재가 담뱃갑을 꺼내며 유유히 모텔을 나가자마자 윤은 청건의 팔을 팔꿈치로 내렸다.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언젠 계속 있을 것처럼 그러더니 금세 방 뺐다 그러고. 사람 놀라게 아무 때나 불쑥불쑥.”
“미안해. 일이 생겨서 급하게 올라갔다 왔어. 그리고 사실 불쑥 온 건 아냐. 연락했었거든.”
“…….”
“화났어?”
쪽팔림에 괜스레 화를 낸 것이 무색하게 윤의 마음은 곧바로 소르르 녹아 내렸다. 어제 번호를 바꾸기 전에 연락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 수많은 연락 사이로 청건이 숨어 있었다면 어긋난 타이밍을 원망해야 할 뿐이었다. 하필 그 많은 시간 중에, 그런 야동 같은 걸 보고 있을 때…….
윤은 짧게 한숨을 쉬곤 로비 테이블로 돌아갔다. 청건이 끝을 낸 건지 아닌지 모른 채로 속을 끓이던 제가 한심했다.
이참에 빈 대접을 들고 프런트로 간 윤은 그릇을 내밀었다.
“잘 마셨습니다. 감사해요.”
“어야. 근데 이거 내가 감사를 받아도 되나 몰라?”
아저씨는 청건을 흘끗 보았다. 그러자 작게 웃은 청건이 아저씨에게 다가가 근황을 물었다. 무슨 모종의 거래가 있던 것도 아닐 테고 벌써 친해진 듯한 선 씨 아저씨와 청건을 신기하게 보던 윤은 곧 청건을 두고 뒤돌았다. 청건은 다시 계단을 향해 가는 윤을 보고는 곧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오는 발소리에 서둘러 계단을 올라간 윤이 204호 앞에 다다랐을 때, 방으로 따라올 듯했던 청건은 의외로 윤을 지나쳐 206호 앞에 섰다. 열쇠를 꽂는 청건을 가만히 보던 윤은 자신도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었다.
“내 연락 피하는 줄 알았는데.”
그때 청건이 말했다. 잠시 열쇠를 꽂던 손을 멈춘 윤은 입술을 한 번 축이곤 다시 키를 돌렸다.
“맞아요. 연락 피한 거. 이제 남남인 사이에 더 연락이 필요한가.”
다 들킬 거짓말이었지만, 말이라도 냉담하게 했다. 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서둘러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순탄히 넘어가 줄 줄 알았던 청건이 윤의 옆으로 다가섰다. 청건은 문고리를 잡은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왔다.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예요.”
인상을 쓰며 대꾸하자 청건이 고민하듯 고개를 살짝 틀었다.
“음…… 평소에 하던 말들?”
“…….”
평소라 함은, 연인이었던 시간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윤은 그보다도 청건의 안색이 신경 쓰였다. 잠을 또 못 잔 것 같은데. 습관적으로 걱정이 스치는 걸 뒤늦게 깨달은 윤이 가볍게 머리를 털어 내곤 잡힌 손을 빼내었다.
“헤어진 마당에 무슨 평소요.”
“헤어진 마당에 전 남친 키스 신은 왜 보고 있었어?”
“…….”
윤은 입을 꽉 다물고 문고리를 노려보았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대꾸도 못 하고 눈만 끔벅이고 있으니 청건이 이쯤 해 주겠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러곤 204호의 문을 대신 열어 주었다.
“들어가. 늦었는데 쉬어야지.”
“…….”
윤은 순순히 자신을 보내 주려는 청건의 태도에 멈칫했지만 이내 그의 눈치를 보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신발을 벗고 테이블 위에 짐을 내려 둘 때까지 문을 닫는 소리가 없었다. 결국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청건은 검은 운동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신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실내에 있었는지 겨울임에도 팔뚝을 접은 흰 반팔 티 차림이다. 티 아래로 드러난 근육이 잘 잡힌 팔은 언제 봐도 섹시……했다.
“왜요?”
낯 뜨거운 마음에 윤이 얼른 입을 뗐다. 전 남자 친구를 두고 욕정하다니. 영상의 부작용이 확실했다. 대꾸 없는 그에 어색하게 서 있자, 눈에 피곤이 들어찬 청건이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다음엔 좀 더 살갑게 볼까? 아니면 계속 이 상태로?”
문 안으로 침입하지 않은 채 물어 오는 그를 훑던 윤이 결국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차라리 앙숙은 어때요. 처음처럼.”
그러자 청건은 습, 하고 바람 먹는 소리를 내었다.
“좀 어렵네. 난 너랑 앙숙이었던 적이 없는데…….”
윤은 그 말에 침을 꿀꺽 삼켜 내었다. 그가 늘리는 말꼬리를 들으며 회상을 해 보니 정말 그랬다. 청건은 꾸준히 변태나 스토커라는 오해를 받았을지언정 저를 챙겨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바꾼 적이 없었다.
청건은 한 달간의 긴긴 전화 속에서 고백했다. 상처가 아문 손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옥탑을 올라왔을 때, 기침 한 번에 피우던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을 때, 정신없이 쫓기던 자신을 구하던 때. 단 한 번도 보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고.
그럼,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언제지.
윤은 부질없는 질문을 삼키고 청건을 바라보았다. 앙숙은커녕 자신을 싫어해 본 적도 없는 청건은 일생일대의 고민에 잠긴 듯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제안을 곱씹는 듯하던 그가 다시금 윤과 눈을 마주쳐 왔다.
“콜. 색다른 배역이네.”
“…….”
“또 보자.”
청건은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문을 닫았다.
……화…… 났나?
윤은 패기 넘치게 앙숙을 제안한 사람답지 않게 그가 마음 상할 게 신경 쓰였다.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주춤주춤 문 쪽으로 다가서서 귀를 기울였다. 다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질 않고 경쾌하게 계단 내려가는 소리만 들렸다.
또 어딜 가는 거야…….
그가 무슨 생각인 건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눈만 봐도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자부했던 때가 꿈만 같았다. 나 말고 다른 과녁이 넘쳐나서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다시 도망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아는 건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문 위에 기대 있던 윤은 로비에서의 상황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으며 문 위로 이마를 쿵쿵 박았다.
“아으 씨, 쪽팔려…….”
아무래도 야무진 도주 계획이 산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윤은 멍들 것 같은 이마를 느끼며 손잡이를 부여잡고 있다가 입고 있던 옷을 마구 벗어 던졌다. 하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청건이 선물해 준 연분홍색 카디건이었다. 청건은 이 또한 다 봤을 게 뻔했다.
단전에서부터 끓는 한숨을 뱉어 낸 윤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확 틀었다. 뜨거운 몸을 한시 빨리 차갑게 식혀야 제정신이 박힐 것 같았다. 탕약동이 과연 제게 약이 되어 줄지 독이 되어 줄지는 두고 봐야 알 듯했다.
* * *
물 사는 걸 까먹어 고속도로를 타고 오는 내내 신경이 거슬릴 만큼 갈증을 겪었다. 윤은 도착하자마자 뻐근한 목을 돌리며 <부자 사진관>과 가까운 슈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힘없는 인사 끝에 그는 곧장 음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윤의 시선은 순서대로 캔 커피, 알로에와 토마토 주스, 소주, 그리고 옆 칸으로 가선 각종 차와 생수를 훑었다. 별로 당기는 게 없었다.
오랫동안 냉장고 앞을 서성이던 윤은 결국 결정을 못 하고 뒤돌았다. 그냥 정수기 물이나 먹자,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곳엔 오픈형 매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엔 딸기 우유가 있었다. 마침 딱 하나! 윤은 생각할 틈도 없이 후다닥 가서 그걸 집었다. 완연하게 미소가 번진 얼굴은 사랑하는 연인을 보는 듯도 했다.
하지만 만족스럽게 몸을 돌린 그의 손에서 순식간에 딸기 우유가 증발했다.
“아직 계산 전?”
불쑥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틀 만에 다시 나타난 청건을 빤히 보던 윤은 손을 뻗어 그의 손에 들린 우유를 노렸다. 하지만 청건은 민첩하게 뒤돌아 걸었다.
사 주려는 건가. 앙숙 관계에 콜, 해 놓고는 역시 그럴 사람은 못 되는 것 같았다. 사 주고 생색내며 붙어 올 생각이라면 사절인데……. 그러나 윤은 주책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눌렀다. 너 표정 관리해. 지금 웃을 상황 아니야. 정신 차려. 속으로 몇 번이고 자신을 진정시키며 표정을 뚱하게 가다듬었다.
청건은 실내 평상 위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할머니 뒤 바구니에 5천 원을 넣었다.
“할머니. 돈 두고 가요.”
“오야.”
청건은 자신을 보지도 않고 대답한 할머니를 뒤로하고 먼저 슈퍼를 나섰다. 윤은 자신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가 버리는 청건을 보다 입술을 깨물며 그 뒤를 따랐다.
“아, 날씨 한번 조옿다.”
청건은 국밥 먹은 아저씨처럼 걸쭉한 소리로 말했다. 평상시 말투와 확연히 다른 것에 윤의 눈이 부자연스레 깜박여졌다. 그리고 청건은 목을 양쪽으로 꺾어 뚝뚝 소리를 내더니 우유 팩을 뜯어 입에 가져다 댔다.
윤은 제 입이 아닌 청건의 입으로 들어가는 딸기 우유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목울대를 꿀꺽꿀꺽 움직이던 청건이 크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리는 걸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 와중에 딸기 우유 CF라도 찍는 것 같은 옆태였다. 청건은 다시금 윤에게 고개 돌렸다.
“어, 아직 안 갔어?”
“……뭐 해요, 지금?”
“딸기 우유 먹는데?”
그는 눈이 있으면 보이지 않느냔 듯한 얼굴로 분홍색 팩을 흔들었다.
“……다 먹었어요?”
“어.”
아, 하나 남은 건데.
갑자기 이상해진 청건을 못마땅하게 보던 윤은 뒤늦게 오는 깨달음에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앙숙은 어때요. 처음처럼.’
‘콜. 색다른 배역이네.’
청건은 지금 연기에 돌입한 것이다. 그의 낯선 눈빛을 보던 윤은 마른 입술을 씹으며 허리를 짚었다. 놀아 보자는 거네, 지금. 며칠에 한 번씩 보는 것도 감질나는 와중에 딸기 우유까지 빼앗기니 억울했다. 안 그래도 청건을 볼 때마다 쪽팔리는 일이 생기는 것도 미치겠는데. 그러나 이번 임무는 잘하면 완전히 둘의 관계를 끝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윤은 이내 하나도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안색을 바꾸었다.
“피골이 상접해 보이시는데, 그나마 그거라도 잘 먹어서 다행이네요.”
그러곤 이모티콘으로 치자면 ‘^^*’에 버금가는 꽃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청건의 어깨를 일부러 스치고 지나갔다.
그를 지나쳐 걷던 윤은 순식간에 불안한 얼굴로 뒤바뀌었다. 잘한 건가? 뒤따라오는 소리가 없는 걸 보니 다행히 그는 더 이상 말 걸어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곧이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자 사진관> 도어 벨이 경쾌하게 울렸다. 그것은 앙숙을 자처한 두 사람의 경기 시작 벨이나 다름없었다.
그 일로 심란해져 가자미눈이 된 윤은 내내 모니터를 째려보느라 뻣뻣한 눈을 느끼며 안경을 벗었다.
“미안. 오늘은 먼저 가. 난 여친 퇴근 기다렸다가 가게.”
“언젠 데려다준 것처럼 말하시네요.”
그 말에 피식 웃은 현재는 아까부터 짜던 기념일 작전에 다시 몰두했다.
그 모습이 열정적이라 꽤 보기 좋았다. 오래된 연인인 두 사람의 관계는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다. 누군 한 달 만에 끝나고 웬 팔자에도 없는 앙숙 연기에 돌입했는데.
윤은 가방 안에 안경 통과 다른 짐을 부지런히 챙겨 넣었다. 그러곤 막 도착한 택배를 푸는 현재에게 인사하곤 먼저 사진관을 나왔다.
차가운 오후 바람에 송골송골 나던 땀이 식는 것 같았다. 가방을 고쳐 멘 윤은 마른 눈을 비비며 멀지 않은 상가 거리로 향했다.
발길이 향한 곳은 요새 1일 1케이크를 실현하게 만들어 준 개인 빵집이었다. 며칠 전 어쩌다 한 번 사 먹은 걸 계기로 퇴근길 윤의 방앗간이 되었다. 비정상적으로 딸기가 당기는 게 확실한 발현 전조 증상이라 조마조마한 감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이젠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딸기를 평소보다 몇 십 배는 맛있게 먹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 미각이 유독 딸기에만 민감해 혀 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랄까. 내장이 들들 끓는 거야 이젠 디폴트값이라 신경 쓰이지도 않았고.
손부채질을 하며 걷던 윤은 자동문을 지나 베이커리에 들어갔다. 직원과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케이크 진열대에 가서 허리를 숙인다. 생크림 케이크 위에 올라간 딸기 개수가 초콜릿 케이크에 있는 것보다 많았다. 생크림 케이크는 두 판이나 있었다. 넓은 내부에 손님은 자신을 포함 두 명뿐이다. 윤은 눈으로 그 케이크를 찜하고는 뒤돌아 쟁반과 집게를 들었다. 오늘은 딸기 잼이 가득 들은 빵 하나도 먹고 싶었다. 딸기 함량이 높은 빵이 있던 걸 전에 봐 두었는데……
지이잉-.
윤은 집게를 공중에 든 채 유리문이 열린 걸 힐끔 보았다. 들떴던 시선이 차갑게 굳은 건 그때였다. 누가 봐도 이청건인 남자에 고개가 빳빳이 굳는다.
이 시간에 여길 왜…….
윤은 자신도 모르게 직원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직원은 남은 빵들을 정렬하고 주변을 정돈하느라 아직 청건을 보지 못한 채였다. 청건은 조금 타이트해 보이는 윤의 검은 후드 티를 입은 채였다. 윤은 그가 눈, 코, 입만 보일 정도로 후드 끈을 당겨선 리본을 묶은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위로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언젠 마스크 좀 쓰고 나가래도 안 듣더니.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이젠 감추긴 감추는 모양인데 저게 눈에 더 띄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
윤은 그를 경계하며 케이크 진열대를 돌아보았다. 청건은 제가 저걸 집을 것을 모르는데다가, 케이크 재고도 안전하게 두 판이었으니 속으로 안심했다.
오늘은 안 빼앗겨.
하지만 윤은 조급한 마음을 숨겼다. 네 도발 따위는 하나도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로 느긋하게 매장을 돌며 빵을 집었다. 원래 딸기 잼 들은 것만 사려 했는데 생각이 많아서 이것저것 수북하게 집은 게 문제였지만, 다 먹지 못하면 선 씨 부자에게 나눠 주면 될 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쟁반을 꽉 채운 윤이 마침내 청건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청건은 이미 볼일이 끝났는지 아는 척도 안 하고 팔꿈치로 자동문 스위치를 눌러 나가는 중이었다.
……뭐야. 싱겁네.
하지만 싱거우면 또 그것대로 서운했다. 먹고 싶은 빵이 없나. 진짜 날 못 본 건가. 윤은 이것저것 추측하며 입술을 조금 내민 모양새로 계산대 위에 쟁반을 올려 두었다. 괜히 의식하느라 돈만 더 쓰게 됐다. 코로 한숨을 내쉰 윤이 카운터로 들어오는 직원을 보며 말했다.
“이거랑 딸기 케이크 하나도 부탁드려요.”
“아, 어쩌죠? 방금 케이크가 다 나가서요.”
“……네?”
윤은 눈을 멍하니 깜박이다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뒷걸음쳐 케이크 냉장고를 살폈다.
……정말이잖아.
윤은 입을 턱 벌리며 냉장고 곳곳을 훑었다. 그러나 그나마 2순위로 괜찮았던 초콜릿 케이크 하나까지 전멸해 버린 것에 무슨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설마 이청건이 다 사 갔어요?”
“어머. 맞죠. 이청건 씨? 대-박.”
직원은 빵을 계산하다 말고 턱을 내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인 받을거얼. 그녀의 죽는소리 뒤로 윤 또한 죽상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멀리 도로변에 주차한 차에 올라타려는 청건이 보였다. 큰 덩치에 케이크 세 판이 가려진 게 분명했다.
이를 부득 간 윤은 직원에게 잠깐 나갔다 와서 결제할게요, 말하고는 베이커리 입구로 뛰었다. 오늘 생딸기를 못 먹으면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무슨 이런 앙숙이 다 있어? 성인 사이의 앙숙이라기보다는 동생 먹을 거 가지고 놀려 먹으려는 장난기 많은 형의 수작질 같았다.
급하게 청건의 차까지 뛰어간 윤이 그가 짐 정리를 끝내고 운전석에 들어가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문을 양손으로 잡고 헐떡대자 청건의 무심한 시선이 와 닿았다.
“이건 양보 못 해요.”
“뭐, 딸기 케이크?”
“네.”
“슈퍼 있잖아. 가서 아예 생딸기를 사.”
윤이 딸기를 먹기 위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케이크를 사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윤은 청건의 대단한 추리력을 뒤로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철이 아니라 안 신선해요.”
“여기 있는 딸기는 뭐 다른가?”
잠시 침묵하던 윤이 다시 쏘아붙였다.
“다 먹기나 하겠어요, 그거?”
“나눠 주지 뭐. 아저씨랑 현재랑 매니저랑.”
그럴 거면 저도 나눠 줘요! 윤은 분에 찬 목소리를 내뱉고 싶었다. 한마디를 안 지는 앙숙 버전 이청건이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부지런히 앙숙 흉내를 낼 바에 그냥 서울로 가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왜 사람 마음을 이렇게 어지럽게 만들고 난리야! 윤은 제가 키우던 온순한 강아지가 때 아닌 사춘기를 맞은 것처럼 배신감이 들었다.
“최소 앙숙이고, 최대 이별일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이미 남남 아니었어?”
“…….”
말문이 막힌 윤은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이별이라니. 그러면 여전히 제 마음 속에선 이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소리와 같았다. 이길 수도 없는 상대를 이겨 먹겠다고 덤비다가 제 안에 있는 무의식을 마주해 버려 못 견디게 불편해졌다.
“말이,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그래? 그럼 나 좀 가게 문에서 손 좀 떼 줄래? 남남아.”
남, 남남이?
헛소리에 면역이 없는 윤은 턱을 비틀다가 어이없는 얼굴로 문에서 손을 떼었다. 분한 숨만 내쉬는 윤을 뒤로한 청건은 빙그레 웃고는 코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윤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뒷걸음쳤다.
휑하니 사라지는 차 뒤꽁무니를 보던 윤은 “하하…….” 하고 맥없이 웃었다. 딸기 꼭지 같은 진녹색 차는 오늘따라 냉정하게 생겨 먹었다. 윤은 한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남색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가 없는 남자였다. 제가 딸기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부터 남남은 개뿔 그를 너무너무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까지 가볍게 간파하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출장이 길어져 늦은 시간에 베이커리를 들른 자신을 어딘가에서 지켜본 것도 같았다. 안 그러면 이렇게 만나는 타이밍이 완벽하게 들어맞을 리가 없었다.
왜 저렇게 할 일 없는 사람처럼 구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 청건에겐 이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게 가장 큰 할 일이라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남남 말고 다시 정상적인 ‘남친’으로 돌아와 달라 부탁하기 전까지 그가 멈추지 않을 것을 윤은 잘 알았다. 청건은 마음먹은 일을 쉽사리 포기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게다가 땅끝까지 도망을 쳐 왔는데도 금세 잡혀 버린 것을 보면, 세상 어느 곳을 가도 다시 거처를 들키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에 그와의 사이를 마무리해야 했다. 아니면 이런 상황이 줄줄이 땅콩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윤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이고 패배자의 얼굴을 한 채 베이커리로 들어갔다. 케이크값보다 더 비싼 빵값을 지불한 그는 묵직한 봉투와 함께 어둠이 내린 길을 가로질렀다.
그래. 끝이 어디든, 끝까지 해 보자고.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딸기 즙에 물든 듯 불그스레했다.
* * *
회사를 다니면서도 지각 한 번 해 본 적 없던 윤은 9시 반을 훌쩍 넘겨서야 부랴부랴 모텔을 나섰다. 잠을 설친 탓이었다. 본의 아니게 모닝콜을 해 준 현재는 출장 일정이 촉박한 것을 고지해 주었을 뿐 윤을 다그치진 않았다.
아무리 돈을 받지 않고 있다지만 시간 약속을 어기는 건 윤 스스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사진관을 향해 가며 지난밤의 악몽을 떠올렸다. 침대 구석으로 자신을 밀고 가는 청건과, 강압적인 키스에 묵직해지던 아래.
이 나이에 몽정이라니.
윤은 아침부터 속옷을 빠느라 퉁퉁 분 손을 느끼며 가방을 고쳐 쥐었다. 슈퍼를 지나자 멀지 않은 곳에 사진관 건물이 보였다. 한적해야 정상일 곳이 시장통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왜인지 기시감이 든다. 시력 낮은 윤이 사진관 입구에 바글대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려 눈을 얇게 떴다.
“어쩐지. 보기 드물게 훤칠한 총각이다 싶더라니까?”
“그러니까. 나도 그래서 유심히 봤는데! 아이고, 글쎄 차서진인거야!”
가게 앞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박수를 치거나 호들갑을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윤이 점차 느려졌다. 차서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
“이름까지 기억해 주시네요?”
윤은 남자의 감탄 어린 목소리에 마침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청건의 목소리였다.
맞다. 차서진. ‘인간 뱀 이청건 후방주의 키스 모음zip’에서 본 청건의 극 중 이름이었다.
“내가 그걸 우리 집 똥개랑 같이 얼마나 챙겨 봤는데!”
“아니 이럴게 아니라, 사인 한 장만 해 줄 수는 없나? 아니, 두 장! 우리 손자 것까지.”
“나는 사진 찍어 주면 안 될까? 응?”
“그럼요. 다 해 드려야죠. 그런데 지금 종이가…….”
“내가 가져다줄까 형?”
“오, 땡큐.”
현재와 청건의 대화가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명확하게 들려왔다. 윤은 쏜살같이 옆 건물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이 상황은 명백한 반칙이었다. 그가 일터까지 침범할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피리 부는 남자도 아니고 저렇게 사람을 죄 끌어오면 어쩌자는 건지. 윤은 DVD 방보다 한층 난감해진 상황에 입술을 물었다. 앙숙 역할에 꽤나 몰입한 듯한 청건을 힐끔 훔쳐보다가 현재에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그러나 이전에도 방문을 덜컥 따 저를 청건에게 팔아넘긴 전적이 있는 현재가 또 제 위치를 알려 주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청건을 둘러싸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동안 윤은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한참 후 윤은 멍한 얼굴로 있다가 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놀라 서둘러 핸드폰 소리 구멍을 막았다.
화면에 뜬 글씨는 다름 아닌 ‘딸기 남친’이었다. 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1번에 저장을 해 두었다는 연락처의 호칭이 이 모양일 줄은 몰랐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벨 소리에 결국 수신 버튼을 누른 윤이 긴장한 얼굴로 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 어디야?
바깥은 아까보다 확실히 조용했다. 귀에서만 울려야 할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같이 울리는 걸 보니 청건은 윤이 숨은 건물 앞으로 자리를 옮긴 듯했다. 윤은 골목 안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 대답했다.
“집이요.”
빠앙-!
그때 바로 앞 도로에서 커다란 클랙슨이 울렸다. 윤은 고개를 홱 돌려 소음의 발원지를 째려보았다. 한적한 마을에서 듣기 힘든 소리가 기막힌 타이밍에 나다니. 윤은 조용해진 청건에 제 발이 저려 뒷머리를 긁적였다.
- 밖인가 보네.
“……네.”
윤은 이실직고하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 언제 와? 현재 형이 기다리는 것 같던데.
“오늘은 안 가려고요.”
- 그래도 돼?
“저는 깍두기라 뭐. 제가 안 가도 현재형은 잘할 거예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앙숙 코스프레엔 뻔뻔한 거짓말이 필요했다. 윤은 제법 자연스러워진 거짓말 끝에 덧붙였다.
“뭐, 형도 사진관 앞인가 봐요.”
- 응. 근처면 잠깐 얼굴 보고 가.
“앙숙 얼굴을 뭣하러요?”
속만 뒤집히지. 앙숙하고 키스하다가 몽정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아 괴로운데.
그때 핸드폰으로 진동이 왔다. 화면을 확인하니 현재였다.
[너 청건이 피하지? 뭐하면 출사 장소로 바로 넘어올래? 약도 줄게. <찾아오시는 길> : 10/13 G웨딩홀 2층 그랜드 홀…….]
윤은 쥐구멍을 마련해 주는 현재에 안도하며 핸드폰을 다시금 고쳐 잡았다.
- 그래 뭐. 나도 스케줄이나 가야겠네.
“…….”
가까운 곳에서 그가 기대었던 물체가 끼익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척을 해 주는지, 정말 모르는 건지. 청건이라면 전자일 가능성이 컸지만 뭐가 됐든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금세 포기해 버리니 오히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앙숙답게 충분히 더 괴롭힐 수도 있을 텐데. 사람 심란하게 만들려는 전략인가.
전화 너머 현재와 인사하는 청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이 아직 전화를 끊지 않은 걸 모르는 듯했다. 윤은 통화 볼륨을 높이며 청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오늘 아빠가 갈비찜 한다는데. 손이 커 가지고 10인분은 될걸. 형도 올래?
- 나도 가고 싶은데 시간이 애매해서 안 되겠네…….
바쁜 와중에 날 보겠다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온 걸까. 하등 얻어 갈 것 없는 앙숙 역할은 아무래도 못 해 먹겠다고, 항복 선언을 하러 왔거나. 아무래도 케이크 세 판이 너무 많아서 나눠 주러 왔다든가…….
윤은 이런저런 가정을 하며 건물 끝을 붙잡고 고개를 내밀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세워 둔 차로 걸어가는 그의 훤칠한 뒷모습이 보였다.
케이크는 안 보이는데.
윤은 얇게 뜬 눈으로 청건을 주시하며 그가 해야 했을 말이 무엇일지 부단히 떠올려 보았다. 그냥 잠깐 얼굴이라도 볼 걸 그랬나.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어쩌면 오랜만에 나쁜 감정 없이…….
- 할 말 있어?
그 순간 넘어오는 목소리에 윤은 어깨를 떨었다. 차 문을 열고 서 있는 청건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고개가 이편을 향해 있었지만 선글라스를 쓴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윤은 주춤대다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켜져 있는 줄 몰랐네요. 끊어요.”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끈 윤은 얼굴을 구기며 혀를 찼다. 어쩌다 보니 염탐한 꼴이 되어 버렸다. 잘못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두근대는 게 거슬렸다.
한참 후 슬그머니 얼굴을 내미니 청건의 차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제야 바깥으로 나온 윤은 사진관 쪽으로 가 유리문을 당겼다. 하지만 현재는 이미 출발한 듯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장비는 현재가 다 챙겼음이 분명하니 윤은 택시를 불러 몸을 실었다.
전주에 있는 웨딩 홀까지는 약 2시간여가 걸렸다. 정장 차림이던 청건의 근사한 몸태를 떠올리던 윤은 억지로 눈을 감아 1시간여를 잠에 할애했다.
전주에 도착한 그는 안 나가도 됐을 택시비를 잔뜩 지불하곤 차에서 내렸다. 그냥 현재랑 같이 왔어야 했나 조금 후회됐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현재가 부탁한 대로 트럭에서 건전지 세트를 찾은 후 웨딩 홀 정문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알파를 마주할까 회사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받아도 늘 핑계 대며 빠졌던 윤은 출사를 목적으로 처음 오게 된 결혼식장에 감개무량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충분히 느낄 새도 없이 와글와글한 사람들을 피해 가며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초입부터 현재가 큰 스튜디오를 빌려 찍었던 신랑 신부의 사진이 죽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엔 다른 지역에서 온 출사 팀도 있었다. 그 팀은 야외 촬영과 폐백을, 현재와 윤은 부모님 입장부터 신랑 신부의 입장, 퇴장과 전체 하객 사진을 담당했다.
식이 시작되면 동시에 촬영도 시작되었다. 촬영하는 현재 뒤로 보조 장비를 옮기던 윤은 묘한 기분에 잠겼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서 에너지를 얻는 자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외부 활동을 싫어했다기보다는 싫어해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가까웠으니,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다만 기회가 없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근 몇 주간 촬영을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던 순간들이 좋았고, 시간이 남으면 현재의 카메라로 풍경 사진을 찍는 일도 좋았다.
청건이 없었으면, 아예 도전할 생각조차 못 해 봤을 텐데. 무의식중에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윤은 금세 표정을 지워 냈다. 집중하자, 집중. 윤은 활기가 도는 분위기를 느끼며 마지막까지 실수 없이 돕겠노라 다짐했다.
어느덧 촬영의 막바지였다. 단체 사진 촬영 순서가 오자 식장은 한바탕 소란스러움에 휩싸였다. 하객들이 이리저리 의자를 끌고 몸을 일으키고 대화를 하느라 바쁜 와중, 윤은 장비들을 중앙으로 옮겼다.
현재가 잠시 관계자와 얘기를 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윤은 현재와 자신이 각각 찍은 사진을 비교해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플래시를 이용하기도 한 현재의 사진과 개인적인 스타일을 가미해 찍은 제 사진을 번갈아 보고 있으니 뒤에서 감상이 들려왔다.
“네 사진은 처음 보는 것 같네.”
시끌벅적한 와중 말을 건 목소리가 금세 흩어졌다. 사진 여러 번 보여 줬었는데. 저번에 보정본도 몇 번 봤으면서 무슨 소리래. 윤은 사진을 함께 보는 듯한 등 뒤의 현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윤은 어깨 옆에 떡하니 자리한 얼굴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뒤늦게 온몸에 소름이 끼쳐 버린 윤은 카메라를 잡은 팔을 홱 들었다. 청건은 윤이 공중에 든 팔을 한 손으로 저지했다. 또 때리려 그러지.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왜…… 여기…….”
윤이 말을 맺지 못하고 더듬자 청건은 실내에서 더 눈에 띄는 선글라스를 코끝에 걸치며 말했다.
“아까 허락받으려 했는데, 안 만나 주길래 그냥 와 버렸어.”
“…….”
“사진 진짜 잘 찍는다. 역시 소질이 있어. 잘 어울리고.”
청건이 뒷머리를 살짝 쓸어 오자 윤은 눈꺼풀을 한 차례 떨었다. 상황 파악을 하느라 멍하니 있던 윤은 청건이 턱에 걸친 마스크를 아예 벗어 내리자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낚아채고 걸었다. 정신없이 사람들을 피해 빠르게 걷는데, 역시나 넓은 보폭으로 편하게 끌려오는 청건만 여유로웠다. 작게 웃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저 때문에 벌어질 난리 통이 그려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윤은 비상구 문을 서둘러 열고 들어가선 문을 꽉 닫았다. 잡았던 큰 손을 놓으니 청건은 약간 어두워진 실내에 선글라스까지 벗어 내렸다.
“오랜만에 손잡으니까 좋다.”
청건은 낯 뜨거운 감상과 함께 선글라스를 정장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윤은 뛰듯이 걸어온 탓인지 심장이 과하게 두근댔다. 맨날 나만 마음 졸이지. 나만. 허리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르던 윤이 미간을 찌푸리자 청건이 조금은 주눅 든 얼굴을 했다.
“현재한텐 뭐라 하지 마. 내가 졸랐어. 보고 싶어서…….”
청건이 순순히 토로하자 윤은 슬쩍 풀어지려던 눈에 힘을 주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굴 거예요?”
“……아직도 딸기 못 먹어서 화났어?”
“장난치지 말고. 지금 형 존재 자체가 날……!”
날…… 날…….
윤은 속에서 일렁이는 수십 마디를 참아 내며 고개를 숙였다. 청건은 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을 그만둔 것인지 침묵을 유지했다. 자신을 찾고 있을 현재가 머릿속에 그려졌지만 당장 청건을 두고 나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꼭 이곳에서 둘의 관계를 매듭지어야겠다고 윤은 거듭 다짐했다.
“……내 존재가, 널 어떻게 만드는데?”
청건이 조용히 물어 왔다. 울림 있는 목소리와 서늘한 비상구의 냉기가 윤의 뼛속을 진동시켰다. 떨리는 눈으로 윤을 응시하던 청건의 구둣발이 한 걸음 다가왔다. 윤은 멋대로 쿵쿵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시선을 들었다. 올려다본 검은 눈동자는 평소처럼 너무도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윤은 더욱 가까워지는 청건에 회색 문 위에 몸을 바짝 기대었다. 가까이에 선 그가 뱉어 내는 숨이 안개처럼 얼굴 위로 퍼졌다.
……형의 존재는 나를. 나를…… 자꾸 이전으로 돌아가게 해.
둘의 신발 코가 맞닿는 순간엔 바보같이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윤은 언제든 도망칠 수 있게 비상구 손잡이를 붙잡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떨어져요. 사람들 와요.”
“말해 봐. 내 존재가 널 어떻게 만드는지.”
“…….”
“대답 안 하면 내 멋대로 생각할 거야.”
윤은 제 앞머리를 살짝 쓸어 오는 청건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문고리를 돌리려 힘을 주자 청건이 곧바로 눈치채고 손등을 덮어 왔다. 가슴을 뚫고 나올 듯 심장이 요동쳤다. 마음만 먹으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두꺼운 밧줄로 전신이 묶이기라도 한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청건의 큰 손이 자신의 얼굴을 감싸 올 때까지도.
윤은 속절없이 오늘 꾸었던 꿈을 떠올려야 했다. 흥분에 물든 눈으로 자신에게 키스해 오던 청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입맞춤에 안달하며 아래를 붙이던 자신.
제발 그만해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제 더는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토록 열망하던 입술이 한 뼘 앞에 있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실제로 저 입술이 닿기를 바랐다. 윤이 달아오른 침을 삼켜 내는 소리가 비상구를 적나라하게 울렸다.
그는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지금은 어떤 사이가 좋겠어?”
윤은 몽중에서 깨어난 듯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시선에 숨을 죽였다.
남이면 남. 연인이면 연인. 이대로 앙숙, 또는 더한 악연이라도 다 해 주겠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무슨 사이든 되어 줄 수 있으나, 반대로 윤이 원하지 않으면 기꺼이 끝내 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함부로 키스하지 않고 마지막 결정권을 쥐여 주는 청건에 윤은 순식간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볼 안쪽의 여린 살을 아프게 물었다. 목구멍을 가득 채웠으나 뱉어 내지를 못하는 ‘남남’, ‘끝’, ‘헤어짐’ 따위의 단어에 압사해 버릴 것 같았다.
제발, 우윤. 뭘 고민하는 거야.
윤은 떨리는 숨을 잠깐 참고는 청건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는 그 힘없는 몸짓에도 한 발 물러서 주었다. 손 위를 덮은 온기와 표피를 뜨겁게 달구던 숨이 멀어졌다. 그 탓에 윤의 사위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아요.”
윤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느끼며 속으로 되풀이했다. 이청건이 없는 게 원래 나의 삶이다. 절대 이 지옥으로 이청건을 끌어들이지 말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그래. 솔직히, 나도 너한테 못되게 구는 게 싫었어. 아무래도 앙숙은 적성에 안 맞나 봐.”
큼직하게 뻗은 눈이 다정하게 휘었다.
“원하면, 여기까지 할게.”
“…….”
윤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손끝까지 차게 굳어 버리는 몸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그 순간 한 층 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윤은 소란스러운 소음이 쏟아지는 위층을 멍하니 응시했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면 청건이 있음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걱정을 더 잇지 않아도 되었다. 윤의 불안함을 눈치챈 듯한 청건이 고민 없이 뒷걸음쳤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섞던 그는 그대로 뒤돌아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크지 않은 구둣발 소리가 윤의 귀청을 아프게 찢어 놓았다. 아래층을 돌아 사라진 청건에 결국 멀리 흐려지는 발소리만 남았다.
윤은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갈무리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더 시간을 끌 순 없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을 뒤로한 그는 서둘러 웨딩 홀 안으로 걸었다.
* * *
현재는 탕약동으로 실려 가는 내내 당장 죽을 사람처럼 핏기가 없는 윤을 돌아보았다. 아까 장비를 정리 중에 스쳤던 몸이 불덩이인 것을 기억한 것인지 그는 윤이 꽉 안고 있는 가방을 눈짓했다.
“약 있으면 먹어. 오늘은 2L 여섯 개들이 물 사 놨으니까.”
“……형은 중간이 없네요.”
겨우 짜낸 목소리로 그를 타박한 윤이 창밖을 보며 덧붙였다.
“이미 하루 복용량 초과해서 더 먹을 수도 없어요.”
뒷정리를 끝내고 잠깐 화장실에 간다던 윤은 머리가 폭삭 젖어 돌아왔었다. 여전히 물기로 축축한 머리를 창문 위에 기대고 있던 윤은 현재의 흘끔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창을 열었다.
모든 전의를 상실해 버린 듯한 윤의 모습에 혀를 차던 현재는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한숨 쉬었다.
“에후. 판 깔아 줬더니 뒤엎고 나오는 놈이 다 있냐.”
“무슨 판을 그렇게 깔아요. 자칫하다 촬영이 망할 뻔했는데.”
“망하긴. 선현재 님이 있는데.”
“혼자도 괜찮으면 저 장기 휴가 좀 낼게요.”
“안 되시거든요. 그럴 때 혼자 있으면 죽을 수도 있어. 쉬더라도 사진관 나와서 쉬어. 알았지. 꼭이다? 응? 어?”
거듭 묻던 현재는 팔을 뻗어 윤의 어깨를 잡고 흔들기까지 했다. 대답을 해 주기 전엔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 현재라 윤은 귀찮은 기색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현재는 그 맥없는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한지 핸들 위로 두 손을 얹고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에 윤에게서 작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걱정하지 마요. 사람 쉽게 안 죽더라고요.”
윤은 시트를 깊게 젖혔다. 저 유난스러운 걱정이 평소라면 달갑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나름 도움이 된다 생각했다. 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유독 현재가 편했다. 돈으로도 직급으로도, 하물며 형질로도 엮이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지.
“형.”
“응.”
“청건 형이랑 계속 연락할 거예요?”
“하면 나야 좋지?”
“……형은 진짜 누구 편이에요?”
“누구 편이긴. 너희 편이지. 편 가르기 하나.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야.”
“…….”
편 가르기뿐일까. 앙숙 놀이도 하고 딸기 뺏기 게임도 했다.
윤은 이제 완전히 끝난 사이인 청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장소를 알려 주는 게 어딨어요. 쪽잠 잘 거 아껴서 탕약까지 내려온 모양인데. 안 그래도 잠 잘 못 자서 스케줄 진행하려면 잠 푹 자야 하는데…….”
“얼씨구?”
헛숨을 뱉으며 핸들을 돌리는 현재가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했다. 이미 끝난 사이에 걱정하는 꼴이 우스워 보이겠지. 하지만 어쩌나. 걱정이 되는데 안 되는 척하는 건 청건 앞에서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젠 그마저도 할 일이 없겠지만.
“우리…… 진짜 끝났나 봐요.”
윤의 작은 목소리에 현재는 대꾸 없이 운전을 이었다. 윤은 청건의 손이 닿았던 손등을 꾹 누르며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숨죽이던 현재가 축축 처지는 분위기를 결국 견뎌 내지 못하고 소리 냈다.
“모르겠다. 나는 할 만큼 했어.”
그는 답답하다는 듯 창문을 내렸다.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둘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갑자기 부는 바람에 시린 눈을 꼭 감았다 뜬 윤은 불쑥 현재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하나만요.”
“안 돼! 웃기지 마.”
“네?”
곧바로 받아치는 현재에 윤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왜 안 되는데요? 나 어린애 아니라면서요.”
그러자 현재는 제가 더 당황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다 덧붙였다.
“몸이 그럴 때는 원래 담배 연기 근처에 얼씬도 하면 안 되는 거야.”
“내 몸이 어떤데요.”
“그런…… 뭐랄까. 열이 나는 상태.”
애매한 대답에 그를 위아래로 훑은 윤이 이내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팔짱 꼈다. 자신을 돕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여튼 선 씨 부자는 너무 자신을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조금이라도 자. 차라리 동승자가 자는 게 편해 난.”
윤은 그가 몇 번이고 권유하는 탓에 결국 눈을 감았다. 죽은 듯 자고 나면 괜찮아질까 기대하면서. 케이 팝 러버가 갑자기 태교 음악 같은 걸 틀기에 의아했지만, 그 덕에 금세 잠이 들었다.
* * *
문단속을 맡기고 약속을 나간 사장 뒤로 직원 하나가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로 기댄 얼굴은 마치 희게 연소된 재와 같았다. 현재는 일찍 퇴근하라 했지만 일찍 갈 이유가 없어 늦장을 부리다 보니 어느덧 4시가 넘어 있었다.
윤은 핸드폰 화면을 껐다 켰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만지작대던 핸드폰 위로 알람 하나가 떴다. 몸을 홱 일으킨 윤은 곧바로 새로 온 채팅을 눌러 보았다.
눈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닌 겹쳐 있는 한 쌍의 손이었다. 한 사람은 태닝을 하여 조금 어둡고, 한 사람은 밝은. 둘의 약지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비싸 보이는 바디 케어 세트가 기프티콘으로 올라왔다.
16:07 [잘못 보낸 것 같은데요.]
[고마워서]
[소라가고백받아줌]
[DEAD(천사)] 16:08
……뭐?
윤은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손 사진을 재차 바라보았다. 아직 완벽하게 검증되지 않은 알파 이새미와 착한 소라 씨의 조합이라니. 사진만 봤을 뿐인데 새미의 신난 기운이 이곳까지 느껴졌다.
말도 안 돼. 대체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윤은 저답지 않게 당장이라도 소라에게 전화를 걸어 진위 여부를 따져 보고 싶었지만 곧 흥분을 가라앉혔다. 자기 연애나 잘하고 그러면 모를까, 남의 연애에 괜한 오지랖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축하해요] 16:12
윤은 건조한 답장을 끝으로 다시금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누군 좋아서 죽는다는데, 입덧보다 최악이라는 발현 전조 증상에 시달릴 뿐인 우윤은 실제로 죽어 가는 것 같았다.
[공주도행복하셔]
[선배랑오래오래]
[걘너밖에없으니까] 16:13
공주 한 번 갔기로서니 자꾸 공주 타령이었다. 마침 현기증이 몰아치는 게 새미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자꾸 선배라고 했다가, 걔라고 했다가. 하나만 하지. 윤은 이 와중에도 청건의 대변인처럼 구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다.
그녀의 말을 곱씹던 윤은 점차 기분이 이상해졌다. 소식통이던 그녀의 정보가 왜 아직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청건의 입이 무거운 걸까, 이젠 정말 내 얘기하는 걸 그만두기로 한 걸까.
청건은 과거를 뺀 모든 사생활이 알려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독 자신과 관련한 것엔 입을 닫았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관계가 끝나 버렸다는 이 중대한 사실마저도 비밀에 부쳤으니까.
‘저는 두 분이 오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형님이 이만큼 오랫동안 애쓰고 아끼던 사람이 없었어서요.’
종영의 장담하는 목소리가 뭉글뭉글 떠올랐다.
“……열 명 넘게 만나는 동안 그런 사람 한 명이 없었을까요…….”
윤은 지난 대화를 맞받아치는 무의미한 짓을 하다가 입술을 짓씹었다.
많이 아끼고 애썼던 사람이 자신 이전에 한 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갔을까. 누가 추정치라도 말해 줬으면 좋겠다. 고작 한 달을 만난 자신은 열 명의 사람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의 순위에 있는지도.
‘놓치면 찾으러 갈게. 그게 어디든지 찾을 수 있어.’
애초부터 밀려나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다가오기만 하던 청건이, 마침내 손을 털고 나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사람을 잊는지도.
‘그럼 여름엔 윤이랑 바다 가야겠다.’
‘잘 부탁해. 앞으로도.’
영원할 것처럼 말하던 약속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가는지. 내가 며칠이면 그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는지.
[그런데너희]
[미국은언제쯤가?]
윤은 화면 위로 뜨는 미리 보기에 멈춰 있다가 다시 채팅방에 접속했다.
16:22 [무슨 미국이요]
[선배]
[올로케한다며] 16:22
……올 로케?
차기작의 초연 역 캐스팅이 꼬였다는 소리는 들었다. 지난 작품에 이어 이번까지 캐스팅 문제로 곤혹을 치르는 줄은 알았지만, 윤은 그가 차기작 촬영을 해외에서 한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32화가 넘는다는 <러브 리프>를 올 로케 촬영으로 한다면, 적어도 해외에서 1년은 머물러야 하는 게 아닌가? 새미가 언제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이 이렇게 꼬인 후에 결정이 난 일이라면 자신에겐 얘기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윤은 새미의 메시지를 다시 보며 볼 안쪽을 씹었다. 여전히 쓸데없이 질투가 들끓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6:23 [나 말고 다 아는 얘기예요?]
[인터넷뒤지면]
[대충은나오지?] 16:24
[몰랐구나……] 16:25
새미는 난감한 듯 말을 늘렸다. 윤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이마를 매만졌다. 사실 그녀가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 와 이런 사소한 일에 속상해하는 제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치미는 우울감은 사실 이 일이 사소하지 않다는 데에서 기인했다. 어쩌면 극악의 난이도라는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만약 이전부터 결정된 사안이었다면 제게는 일언반구 없었다는 사실이 자신을 쪼잔하게 만드는 듯했다.
이 말은 또 언제 해 줄 생각이었을까. 형한테 나는 뭐였지…….
윤은 고개를 젖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건이 얼마나 저를 아끼고 사랑했었는지 뻔히 알면서 불행 회로에 갇혀 버린 스스로가 싫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애썼다. 때늦은 감정을 곱씹는 게 다 부질없는 일인 걸 알면서도 왜 자꾸.
윤은 되뇌었다. 청건은 애초에 전유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과분한 사람인 걸 알면 혼자 추억 팔이나 하는 짓은 그만하자. 더 어울리는 사람한테 가는 것뿐이야. 끝난 사이 되풀이해서 뭐가 좋다고, 자꾸 들추지 말자. 등신 같이 혼자 서운해하는 것도 그만하고.
‘그런데, 종영 씨 말에 오류가 있어요. 형이 상대한테 쌀쌀맞고, 표현이 서툴다는 거요. 당황스러울 만큼 표현이 많고 다정해서. 사실 적응을 못 하고 있거든요.’
……다정함은 그만 잊고. 그만 꿈꾸고.
‘어느 쪽이 진짠진 아직 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보는 이청건이 진짜인지, 전 애인들한테 했던 게 진짜인지.’
‘……지금이 진짜이지 않을까요?’
“……짜증 나…….”
윤은 양 손바닥으로 뜨거운 눈가를 세게 비볐다. 머릿속에서 청건의 기억만 도려내는 방법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 사는 거 네 멋대로 살아. 누가 뭐래. 이청건도 네가 싫대? 다 정리했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청건이 날 잊는 데 며칠이 걸리는지, 이젠 아무도 말해 줄 사람이 없는데.
눈을 너무 세게 압박해 손을 떼어 내니 시야가 흔들흔들 겹쳤다. 물속에라도 풍덩 빠진 것처럼. 눈을 꽉 감아 버린 윤이 심호흡을 이었다. 기억 속의 현재가 사뭇 심각한 얼굴을 했다.
‘너 이청건 엄청 좋아하는구나.’
“씨발, 좀……!”
윤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 바퀴가 빠르게 미끄러져 벽에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누군가 지난 일들 중 청건과 관련한 것만 추출해 제게로 주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롯이 그와 지냈던 몇 달만이 제 세상의 전부였던 것처럼. 윤은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목소리에 휘둘리는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알파는 늘, 사랑이란 명목하에 자신을 망가뜨렸다. 그렇기에 그들과 똑같은 짓을 청건에게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오메가가 되었다는 걸 들키는 것은 저만 상처받고 끝나면 될 일이니 둘째 치더라도, 김채진은 매일 같이 청건에게 협박을 일삼을 텐데. 좋아한다는 이유로 놓아주어야 마땅할 상대를 붙잡고 있는 건 최악의 욕심이었다. 혹여 청건이 저를 좋아하는 마음이 여전하다고 해도.
생각을 지우기 힘든 이유야 뻔하다. 다른 사람들과 청건은 늘 달랐으니까. 언제나 편을 들어 주고, 응원해 주고, 구해 주고, 제 몸을 돌봐 주고, 오래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들어 주고.
그 모든 다정함이 이유였다. 알파에 의해 망가지던 우윤은 꼭 이청건에 의해서 붙었다. 그러니 쉽게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비틀린 사이를 자꾸만 원래 궤도로 돌려놓으려는 관성이 너무 거대했다.
처음 자유로워 봐서 그렇다. 숨겨 왔던 것들을 누군가에게 처음 털어놔 봐서. 근처에도 가기 싫던 알파를 좋아한 것도 처음이라. 이청건은 우윤에게 알파가 아니고, 그냥 이청건이었을 뿐이라서.
현재가 다시 물었다.
‘……그럼, 비현실적으로는 어쩌고 싶은데?’
그렇게 안 봤는데. 선현재.
“……진짜 잔인하네.”
윤은 결국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의자에 걸려 있던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작업물이 열려 있는 노트북과 현재가 놓고 간 열쇠를 뒤로한 그가 어지러이 놓인 장비들을 가로질러 걸었다.
서둘러 바깥으로 나간 윤의 뒤로 유리문이 평소와 같은 궤도를 그리며 닫혔다.
비현실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비현실적으로.
이어지는 뜀박질에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칠 뻔한 게 두 번. 부주의하게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뻔한 건 세 번.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기적이고 무모하고 등신 천치 같고. 그런 거 다 모르겠고 청건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됐다. 해 줄 말이 있었다.
모텔에 도착한 윤이 1층 유리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벨이 평소보다 요란하게 소리 내며 꼭대기에 부딪치자 선 씨 아저씨가 눈을 크게 떴다. 윤은 어이구 어이구,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저씨에게 불쑥 물었다.
“아저씨, 청건, 이청건……. 그 형 어딨어요? 아직, 206호예요?”
목 끝까지 찬 숨이 새된 소리를 나오게 했다. 헐떡이며 프런트 위로 주먹을 꽉 쥐자 아저씨가 냉장고로 가서는 물통을 꺼내었다.
“어휴, 왜 그렇게 급해? 숨 좀 돌리고. 응?”
윤은 빈 물컵에 물을 따라 내는 느긋한 몸짓을 보며 어쩔 줄 모르고 손만 휘저었다.
“아니요, 아니……. 제가 지금.”
“자, 마셔 마셔, 쭈우욱.”
윤은 프런트 너머 아저씨가 제게 물려 주는 컵에 입이 막힌 채 눈을 굴렸다. 쭉? 아저씨의 재촉에 윤은 떠밀리듯 물을 들이마시고 기침을 쿨럭쿨럭 내뱉었다.
“보자…… 내가 자리를 좀 오래 비워서 말이야.”
아저씨는 초조한 얼굴로 컵을 내려 두는 윤을 뒤로하고 열쇠 함을 느리게 뒤적거렸다.
“거기 있어요? 열쇠?”
윤의 눈치를 슬쩍 보며 입을 다시던 아저씨가 이내 손을 공중에 들었다. 그의 손끝에 달랑거리는 것은 206호의 열쇠였다.
“두고 갔네. 쪽지도 있어. 볼래?”
“목적지 같은 건 안 적혀 있어요?”
아저씨는 부스럭대며 펴지 않은 종이를 쥐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만…….”
윤은 아저씨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뒤로 돌아 모텔을 빠져나왔다. 분홍색 카디건을 꽉 쥔 윤은 탕약 거리를 뛰어다녔다. 모텔 주변과 사진관 주변, 슈퍼 인근과 베이커리 집을 연달아 들렀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베이커리 집 직원 또한 청건을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자동문을 열고 나온 윤은 허탈한 숨을 골랐다. 이 이상 탕약에서의 접점은 없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흘렀다.
그는 결국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떨리는 엄지로 1번을 눌렀다. 그러면 ‘딸기 남친’으로 저장된 11자리 번호로 자동 발신되었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잡아 귀에 대었다. 손이 떨려서 도저히 한 손으로는 들 수 없는 탓이었다.
발신음은 속이 터질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소득 없이 몇 번이나 전화가 끊어졌다. 윤은 이어지는 전자음 뒤로 음성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예요? 혹시 서울 갔어요? 어디든 내가 지금 찾아갈 테니까, 잠깐만 볼래요? 아니면 전화로도 괜찮으니까…… 듣는 대로 꼭 연락 줘요. 기다릴게요.
처음은 꽤나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온갖 가정에 휩싸인 채 서성이던 윤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그의 번호를 눌렀다.
형, 내가 싫어졌어도 한 번만요. 한 번만 목소리 들려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한 번만 나한테 시간을 줘요. 마지막으로요…….
결국 마지막이란 말에 목이 메어 금세 전화를 끊어야 했지만.
윤은 빵집으로 들어가려는 손님을 굼뜬 몸짓으로 피했다. 내쉬는 숨이 작게 떨렸다. 받아들이기 싫던 사실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마지막이 온 것이다. 지금껏 그를 잊은 척하고, 매정한 척 굴던 순간에도 자신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단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허공을 보며 서 있던 그는 누군가 손에 쥐여 주는 카디건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멀어지는 여자 뒤로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밟힌 카디건만이 남았다. 윤은 꽉 붙잡고 있던 카디건을 껴입었다. 다시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신에게는 벅차고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망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나에게 남은 것들은 내가 모두 감당할 테니까, 형은 계속해서 더 멀고 높은 곳으로 가기를 바랐다.
다만 남은 미련이라 불려도 괜찮으니 그와 헤어지기 전에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었다. 난 나에게 남은 당신의 다정함만으로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제발 형도 행복해 달라고. 모두 나의 잘못이니 문제를 형에게서 찾지 말고, 나 같은 사람은 금방 잊어 달라고. 형은 내가 처음으로 신뢰한 사람이었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이보다 큰 신뢰를 받길 바란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주 조금의 시간을 써서 윤을 살펴보았다. 눈 아래로 소리 없이 떨어지는 미련을 본 사람이 늘고 또 늘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스듬히 그를 감싼 카디건을 느끼며.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 * *
부릅뜬 눈 안에 익숙한 모텔 천장이 담겼다. 뒤늦게 멈추었던 숨이 터져 나왔다. 현실임을 인지한 윤은 눈을 내리감으며 얼굴을 쓸었다. 꿈에서 그는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휘감으려는 레몬 향을 피해 숲으로 숨어들었다. 청건의 향을 찾아 달렸으나 그의 향이 기억날 리 만무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는 허공에 발을 내딛자마자 암흑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윤은 온몸에 밴 식은땀을 느끼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젖은 머리끝에 맺혀 있는 물기가 그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 앞으로 갔다. 창밖 하늘이 보랏빛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살아온 이래 가장 최악이라 부를 만한 날에 보게 된 더럽게 예쁜 풍경이라니. 완벽하게 겨울로 접어든 날씨가 뜨겁게 젖어 있는 몸 위로 찬바람을 흘려보냈다.
창틀을 짚으니 손끝에 라이터와 담뱃갑이 걸렸다. 손에 걸리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결국 주머니에 넣고 뒤로 돈 윤이 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니 로비에 있던 현재가 공연히 왼손을 들었다.
“데이트는 잘 했어요?”
윤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아니, 쫑났어.”
“네?”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윤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근데 넌 눈두덩이 왜 그 모양이야?”
현재가 윤의 눈가를 턱짓하며 낄낄 웃었다. 윤은 그에게서 독하게 나는 술 냄새를 맡으며 만만치 않은 현재의 눈두덩이를 응시했다.
“형이 더 심한데요.”
머리까지 부스스한 현재는 울었다는 걸 숨길 수 없음을 애당초 알았는지 관자놀이만 박박 긁을 뿐이었다.
“이벤트 하는 사람 면전에 대고 헤어지자는데 안 울 사람이 있나. 너 알지. 내가 그거 한 달 동안 준비한 거. 그게 아까워서 그래, 그게.”
윤은 현재를 안 지 이제 막 한 달이 되었기에 그가 이벤트를 한 달이나 준비했는 줄은 몰랐으나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 내요.”
윤의 서툰 위로에 현재는 인위적인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이 와중에 다 먹었는지 쭈릅, 소리가 나는 커피 우유갑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속이 후련한 척 자신을 속이는 게 뻔히 보였다. 윤은 그게 꼭 자신 같아 선현재가 퍽 불쌍했다. 안타까워 눈썹을 좁힌 윤을 보며 어깨를 으쓱인 현재가 물어 왔다.
“넌 저녁 돼 가는데 어디 가? 밖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득실대는데.”
“형도 과보호 기질이 심해요.”
“형도라……. 이청건도 그랬나 보네.”
윤은 정곡을 찌르는 말에 현재를 불쌍하게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현재는 더 장난칠 힘도 없는지 소파에 목이 꺾이도록 기댔다. 침묵이 감도는 로비엔 속절없이 흐르는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울렸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7시 반이었다. 현재는 손으로 빙빙 돌리던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윤은 허벅지 위에 둔 두 손을 의미 없이 만지작댔다.
“사진관 문단속은 잘 했지.”
“네. 당연히…….”
멈춘 대답에 둘은 시선을 마주쳤다.
“안 했네.”
“……얼른 갔다 올게요.”
윤이 몸을 일으키자 현재가 대충 손을 내저었다.
“여긴 다 착해서 훔쳐 갈 사람도 없어. 누가 가져가면 공짜 직원 몇 달 더 부려 먹으면 되지 뭘.”
언젠 나쁜 사람이 득실댄다더니……. 현재의 태평한 소리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던 윤이 머쓱하게 머리를 문지르며 완전히 일어섰다.
“잠깐 산책만 끝내고 갈게요.”
윤이 주머니에 든 것들을 확인하며 몸을 돌리자 핸드폰을 보던 현재가 갑자기 손목을 낚아챘다.
“산책은 어디로 하게?”
“뭐, 대충 아무 데나 걷는 거죠.”
“바다나 가라, 너.”
“바다요?”
갑자기 반짝대는 현재의 눈에 윤은 그를 의심스럽다는 듯 위아래로 훑었다.
“뭐해? 산책 코스 추천해 주잖아. 얼른 가 봐, 우 직원.”
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이곤 로비를 지나갔다. 출입문 손잡이를 막 붙잡았을 때 뒤에서 불쑥 높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먹지 마, 짜샤!”
힘들긴 한가 보다. 갑자기 조증 비슷한 게 오는 걸 보니. 뭐 그렇게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저랬으니. 윤은 대충 손을 들어 보이고 문밖을 나섰다. “새벽 전엔 들어와야 해. 모텔 통금 시간이야!” 하는 현재를 무시하고 주머니에 두 손을 찔렀다. 통금은 무슨……. 그리고 누가 산책을 5시간이나 해. 못마땅했으나 안 그래도 힘든 사람이니 불평은 속으로 감추었다.
윤은 길바닥의 돌을 차며 바다 쪽으로 나아갔다. 겁먹지 마. 겁먹지 마. 방금 들었던 말이 귓가에 은은히 메아리쳤다. 어쩌면 지금 가장 필요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겨울바람이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만져 보지 않아도 온몸이 불덩이였고. 윤은 발현이 하루 이틀 새로 오게 될 것을 직감했다. 겁먹지 마. 겁먹지 마. 노랫말처럼 그 말을 되풀이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잠깐 사이에 노을이 짙어졌다. 오묘한 남색빛을 띠는 하늘을 따라 바다 근처로 갔다. 조금은 거센 파도를 보다가 회색 계단 위로 걸터앉았다. 고운 모래사장을 두 발로 밟았다. 처음 밟아 보는 모래사장은 생각과 달리 대단하지 않았다. 자신과는 달리 홀로 평온해 보여 재수 없어 보였을 뿐.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한 번 피우면 또 중독되려나. 불은 붙이지 못하고 숨만 들이마셨다 내쉬어 보던 윤은 필터를 한 번 씹어 보곤 라이터 불을 붙였다. 윤은 되풀이했다. 겁먹지 마. 누구는 헤어지고, 누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누구는 금연하고, 누구는 다시 흡연자가 되고. 희비 교차가 지겹게 난무하는 세상에 배짱이라도 있어야지. 혼자 남은 지금은 더더욱.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담배 꽁무니가 타들어 가는 순간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 올라갔다. 한계까지 커지는 눈, 기침 두 번. 윤은 계단 위로 툭 떨어진 담배 뒤로 몸을 일으켰다.
형.
허공에 뜬 속삭임은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인영에까지 가 닿지 않았다.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은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홀린 듯 걷기 시작한 윤은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을 거침없이 밟아 나아갔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모래 위에 던지고 걷는다. 한 팔에 재킷을 걸치고 바닷가를 따라 걷는 남자는, 익숙한 정장 차림이다.
“윽……!”
그 순간 빈 병을 밟고 넘어진 윤이 깊게 신음했다. 정강이에 부딪친 병을 신경질적으로 치운 그가 아픈 다리를 느끼며 인상을 썼다. 어떤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아무 데나 이런 걸……. 두 팔을 모래 위로 짚으며 눈물이 찔끔 올라온 얼굴을 들었다.
동시에 그의 앞으로 손이 내밀어졌다. 윤은 아주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제 팔을 잡아 일으켜 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어두운 데 나와 있어.
귀청을 공명하는 낮은 목소리. 기꺼이 몸을 굽혀 옷 위에 묻은 모래를 털어 주고, 흙을 짚은 두 손을 돌려 혹여 상처가 나진 않았을까 꼼꼼히 살피는 자상한 손길.
아픈 데 없어?
걱정스럽게 눈을 맞추는, 그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을 흑색의 눈동자.
“나도…….”
“…….”
“나도 끝내기 싫었어요.”
윤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꺼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엔 결국 청건의 얼굴을 바로 보지는 못했다.
“열이 나던 게, 내가 계속 괴로웠던 게 다, 다 내가 오메가가 될 거라는 예고였대요.”
“…….”
“형이 이 형질을 역겨워하는 거 알아요. 근데…… 언젠가 헤어진대도 매달리고 싶었어요. 이기적인 새끼라고 불려도 좋으니까, 나 괴롭힌 알파들처럼 똑같은 짓이라도 하고 싶었어요.”
형을 무턱대고 잡아 두고, 같이 절벽 아래로든 바닷속으로든 떨어지자 말하고 싶었어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계속 나를 연인으로 대해 줬으면 했어요.
윤은 속에서 끓어넘치는 마음을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었다. 대답 없는 청건이 여전히 자신의 팔을 잡은 걸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그 남자가 뭐라 하든, 사실 다 무시하고 싶었어요. 형을 위해서라면 보내 줘야 하는 거 아는데, 그걸 아는데 나는…… 아직도 포기를 못 하겠어요. 계속 형이 좋아서…….”
윤은 부드럽게 끌려가는 몸을 느끼며 입술 끝을 떨었다. 청건은 창백하게 질린 채 말을 늘어놓던 윤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그래. 다 알아.”
“…….”
“괜찮아.”
청건의 속삭임에 윤의 마른 목이 연달아 숨을 들이켰다. 오히려 저를 달래는 청건의 목소리는 꿈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도 어떻게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지, 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윤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셔츠를 틀어쥐었다. 귓바퀴에 깊은 입맞춤이 닿으면 결국 너른 어깨 위로 이마를 묻었다.
더 이상 쏟을 게 없는 눈동자가 감긴 눈꺼풀 뒤에서 불안하게 흔들렸다. 겁이 났다. 안고 있는 게 청건이 아닐까 봐. 다시 꿈에서 깨어 어느덧 익숙해진 모텔 천장을 올려다보고, 식은땀에 젖어 있는 자신을 느낄까 봐.
추운 날씨에 딱딱해진 머리칼을 따뜻하게 빗어 내려 주는 손길에도 윤은 불규칙한 숨을 골랐다. 미안해요. 형. 미안해. 자신이 쏟아 내는 말도 인지하지 못하고.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야.
부단히 자신을 달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윤은 그제야 저를 안고 있는 것이 정말 청건임을 알 수 있었다.
속절없이 드는 안도감 때문인지 힘이 빠져 버린 다리가 힘없이 꺾여 내렸다. 그러나 처음 느끼는 화마가 순식간에 그의 몸을 덮치는 순간, 윤은 알 수 있었다. 발현의 시작이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몸이 반대 형질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탓이다. 휘청이는 윤을 단단히 부축하던 청건이 등을 내주었다.
같이 있을게. 겁먹지 마.
청건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그는 윤의 변화를 알아챈 듯했다. 청건은 주변에 댄 차에 윤을 태웠다. 윤은 누구에게도 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청건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싫었다. 통증에 제대로 말을 꺼내지도 못했으나, 청건은 윤의 뜻대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윤은 그저 제 손을 잡아 주는 청건을 붙든 채 처음 느끼는 감각에 휩쓸리는 수밖에 없었다. 참을 수 없이 입 밖으로 신음이 터졌다. 찢어질 것 같기도, 무언가로 채워졌으면 싶기도 한 배를 쥐어짜듯 붙들며 애원했다. 제발. 제발.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면서도 자꾸만 애걸했다.
숲 향이 났다. 장대한 숲의 향.
두려운 것을 피해 숲속에 숨어든 우윤이 맡았던 그 향. 그 향은 지금 둘이 함께 있는 차내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진동하고 있었다.
어두운 폐역사 앞에 차가 멈추자마자 청건이 윤을 뒷좌석에 눕혔다. 시트를 짚은 채 턱을 꽉 악무는 청건의 얼굴이 흐리게나마 보였다. 가슴을 크게 들썩이던 윤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건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해 줘요. 아무렇게나…… 나 좀…….”
날 좀, 씹어 먹어 줘. 피가 터져도 좋으니까, 전부 난도질해도 좋으니까. 제발.
윤이 자신의 바람을 미처 다 내뱉기도 전이었다. 떨리는 두 입술이 결국 참는 걸 포기한 청건에게 먹혀 들어갔다. 서로를 뜯어 먹을 듯 달려든 둘은 눈을 감지 않은 채 키스했다. 질척한 살덩이가 그간의 인내를 대변하듯 난폭하게 맞붙었다.
윤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청건의 셔츠를 풀었다. 청건은 순식간에 윤의 하의를 앞 좌석으로 던지며 입술을 떼었다. 늘어지는 침이 끊길 새 없이 청건의 입술이 빳빳하게 선 돌기 위를 머금었다. 다른 쪽 손으론 쿠퍼액을 뚝뚝 흘리는 윤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그래,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맞붙고 싶었다. 거지 같은 장애물들을 뒤로하고 서로를 침범하기를 바랐다. 윤은 바들바들 떨리는 허벅지를 느끼며 급하게 손을 더듬었다. 지퍼를 풀어 청건의 아래를 쥔 윤은 마찬가지로 그의 것을 서툴게 쥐고 흔들었다.
청건의 깊은 목소리는 이전엔 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목이 끊겨 버린 짐승처럼 신음하며 고개를 젖힌 윤의 목 위에 코를 묻었다. 양껏 숨을 들이마시고, 또 힘주어 여린 살을 빨아 올려 붉은 자국을 냈다.
그가 만져 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윤은 전신을 떨며 정액을 쏟았다. 처음 느껴 보는 사정감에 입술 밖으로 침이 흘렀다. 색색으로 쪼개지는 시야를 느끼며 헐떡였다. 스스로 성기를 쥐어짜듯 만지던 청건이 땀이 맺힌 윤의 배 위로 사정했다. 몇 번이나 섹스를 이어야 만족하던 그는 짧은 시간 만에 사정을 하곤 땀이 흐르는 얼굴로 윤에게 키스했다.
윤은 제 아래에 감질나게 와 닿던 성기가 크기를 다시 키우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곧장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탄 윤은 자신의 구멍 아래로 핏줄이 선 청건의 성기를 비볐다.
“윤아, 잠깐…….”
“그냥 해 줘요. 안에 해도 괜찮으니까…….”
살면서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는데. 그러나 무책임하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을 만큼 강했던 육욕이 한차례 가시고 나니 부끄러움이 끼쳐 왔다. 청건은 그런 윤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움찔대는 둔부를 들어 올렸다. 윤에게서 확고한 결심을 읽은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알았어. 어떻게 되든, 다 책임질게.
그의 목소리에 윤은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망설임이 완전히 밀려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배 속은 아래를 가르고 밀려오는 거대한 살덩이를 단숨에 받아들였다. 청건은 신음을 쏟아 내는 새빨간 입술 위로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바깥의 여리고 하얀 가로등 빛이 시야를 어지럽게 파고들었다. 폐 속 깊이 들이닥치는 숲 향이 황홀했다. 그는 어딘가에 남아 있던 여름의 지열을 가져와 자신에게로 모두 쏟아 내는 것 같았다.
지옥일 줄 알았던 이곳에서, 비로소 윤은 완전해지는 기분이었다.
* * *
204호 키는 그로부터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반납됐다. 유감이지만 현재의 요청대로 윤이 자정 이전에 모텔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는 말이다.
<부자 사진관> 문단속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던 윤은 뒤늦게 현재에게 사죄를 구하러 갔지만 그는 멀쩡한 장비를 보여 주며 음흉하게 웃을 뿐이었다.
선 씨 부자는 청건에게 연기 강습을 받았는지 꽤나 연기력이 탄탄했다. 적어도 눈치 느린 우윤을 속일 정도는 되었다. 청건이 그들에게 언질을 주어 윤의 몸을 챙기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둘째 쳐도, 2층이 아닌 1층에서 짐을 빼 오는 청건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그는 헤어짐을 염두하기는커녕 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한발 물러나 윤의 발현을 지키려 했을 뿐이었다. 윤은 혀를 내둘렀다. 이청건은 계략, 아니, 전략가가 따로 없었다.
선 씨 아저씨는 그들이 서울로 떠나기 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반찬을 챙겨 주었다. 현재는 난데없이 맞이한 이별에 슬픔 반 기쁨 반으로 서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윤의 주변을 맴돌며 무거운 물건엔 손도 못 대게 하던 청건은 차 트렁크를 닫자마자 둘에게 안겨 오는 현재에 웃음을 터뜨렸다. 절대 자기를 잊지 말라고 새끼손가락을 걸어 휙휙 흔드는 현재를 달래고 차에 오른 윤은 아직도 얼얼한 손가락을 느끼며 시트에 기대었다. 있지도 않은 고향 집을 들렀다 가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윤은 청건이 운전 내내 끼고 있던 이어폰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귓속으로 쏙 끼어 보았다.
한 번만 목소리 들려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곧장 들리는 생경하고도 익숙한 목소리에 기겁을 하며 이어폰을 빼내었으나 청건은 어깨만 으쓱일 뿐 그 메시지를 절대 지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기가 변태는 아닌데, 울먹이는 우윤이 너무 귀한지라 심장이 아프다는 변태 같은 소리를 했다. 윤은 서울 집에 차를 세울 때까지도 이어폰을 끼고 있는 그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기계 거친 소리 말고 진짜 내 목소리를 들어요.
청건은 주차장을 나오는 중에도 눈을 흘기는 윤에게 쪽쪽 키스했다. 둘 다 짐을 가득 안고 있음에도 아랑곳 않고 자꾸 입술을 부딪쳐 오자 윤은 간지러운 마음에 집으로 먼저 뛰어 들어갔다. 곧장 그 뒤를 따르는 청건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둘의 장난치는 목소리가 널따란 주택을 가득 채웠다.
* * *
자리를 잡느라 정신없는 보름이 흘러갔다.
발현통을 동반한 첫 히트 사이클은 천국 같기도, 지옥 같기도 했다. 천국이라 함은, 베타일 때는 바라지도 않았던 만족스러운 성생활에 기반 한 것이었고, 지옥이라 함은…… 상상만 해도 욕부터 튀어나왔다.
항간에 들리는 오메가들의 평균 발현 기간은 이틀에서 사흘. 그러나 극우성 오메가의 발현통은 경이롭게도 10일이 지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다음 달부터 오는 히트 사이클도 일주일 안에 그치기나 하면 다행이라는 소리였다.
발현통을 감해 주는 약은 비싼 주제에 고통은 반절만 상쇄하고 멀미와 불면을 시도 때도 없이 일으켰다. 또 입맛이 뚝 떨어져 윤은 딸기만 주구장창 먹어야 했다.
침대에서 몇 시간을 뒤척이기만 하던 윤이 결국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잠결에도 가끔씩 윤의 배를 토닥여 주던 청건이 실눈을 뜨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잠이 안 와?”
“네.”
윤은 잔뜩 성이 난 채로 허공을 보며 대꾸했다. 고작 불면증 5일 차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니 윤을 향해 누워 있던 청건이 팔을 뻗었다.
“이리 와.”
윤이 울상으로 청건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가 산발이 된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자 억울함이 조금은 가셨다. 윤은 제 이마에 입술을 가만히 붙이고 있는 청건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며칠 못 자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형은 대체 어떻게 견딘 거예요?”
“말 그대로 일상이라, 피곤하고 말았지. 그나마 우성이라 버틴 것 같기도 하고…….”
데뷔를 하고 나서 하루 두세 시간 자는 게 일상이었다는 청건은 동거를 시작하고선 불면이 완전히 사라졌다. 여태 자지 못한 한을 다 풀어 버리려는 듯 하루에 평균 8시간은 꼭 잠에 할애했다.
요새는 일도 강박처럼 꽉꽉 잡아 두지 않았으므로 일 나간 지 반나절쯤 되면 날름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집에 오자마자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달려온 청건은 딸기를 우적대던 윤을 공중에 안아 곧장 침실로 가기 일쑤였다.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이야 뻔했다. 뭐, 이런 날이 길지 않을 것을 알기에 윤은 지금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아픈 것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오메가가 된 것도 모두.
“형 애태운 벌 받나 봐. 그럼 기꺼이 받지 뭐…….”
“습,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빨리 잠도 푹 자고 이것저것 잘 먹어야지.”
윤은 자신을 혼내듯 일자로 다문 얼굴을 보며 웃었다. 청건도 어느새 장난기를 거둔 얼굴로 윤의 머리 위에 제 머리를 대고 도리도리 비볐다.
네가 한 잘못은 하나도 없어. 이제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우린 우리만 있으면 되잖아.
청건은 겁이 들래야 들 수 없도록 매번 윤의 마음을 보듬었다. 혼자서는 결코 견딜 수 없었을 날들이 그렇게 하루 또 하루씩 이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을 거란 생각은 없었다. 윤은 티 내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고, 예상대로 둘의 재결합을 알게 된 김채진의 반격이 시작됐다. 김채진이 퍼뜨린 청건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악랄한 방식으로 짜깁기 되어 있었다. 윤이 직접 전해 들었던 청건의 과거와는 완전히 딴판인 모양으로.
연예계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미리 언질을 해 둔 덕에 소속사는 발 빠르게 고소 진행 공지를 올렸지만 일은 일파만파로 번진 후였다.
「정재계 연루, 검경의 골칫덩어리 ‘신전’과 이청건의 상관관계」라는 거창한 제목의 폭로 글은 솜씨 좋은 디자이너를 구한 건지 아주 그럴듯하게 편집한 자료와 증명들로 난무했다.
청건의 소속사는 이미 퍼져 버린 소문이 가라앉으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고, 실제로 그랬다.
청건과 협업하는 모든 회사와 개인은 김채진의 폭로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됐다. 개봉 예정이었던 영화는 이미 홍보에 예산을 잔뜩 쏟았으나 이번 일로 개봉 일정이 밀려 최소 몇 억 원에 달하는 손해가 날 것으로 추정됐다.
캐스팅 문제로 이미 한계까지 밀렸던 차기작 올 로케 일정은 이대로라면 주연 배우를 교체해야 할 위기였다. 물론 다른 이가 아닌 청건을 뜻했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용할 만한 범주를 벗어난 일이었으니.
가장 피해가 심한 것은 단연 청건이었다. 이번 루머는 김채진이 살아온 인생에 교묘하게 이청건의 이름을 바꿔 끼운 수준이라, 고작 종이 한 장으로 하는 루머 대응 수준이 아닌 대대적인 증명이 필요했다. 때문에 청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서에 드나들며 조사에 임해야 했다.
청건에 대한 여론은 확실하게 갈렸다. 교묘한 짜깁기라며 그를 두둔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혹자는 승승장구하던 이청건의 처참한 몰락이라며, 그가 다시 부상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단정 지었다.
안방 맞은편 방. 빔 프로젝터 위로 틀어진 영화를 보는 동안 윤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청건은 영화 중간부터 이렇다 말이 없었다. 유명세만큼 화력이 줄어들 기미가 없자 누구보다 굳세던 청건에게도 변화가 생긴 것인지.
자신을 대신해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지인들과 윤에게 거듭 말하던 청건이었다. 그러므로 지켜만 봐야 하는 윤의 입장에선 속이 탔다. 당장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지금으로선 그저 청건을 위로하고 싶었다.
스크린을 응시하던 윤이 슬쩍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눈을 감고 있는 청건을 살핀 윤은 입이 썼다. 살짝 해쓱해진 청건의 얼굴은 이 와중에도 조각처럼 말쑥했다.
둘의 만남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애당초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큰 파장이었다. 서로만을 필요로 하는 사이일 뿐임에도 견뎌야 할 것들이 많았다.
결국 윤은 결심한 얼굴로 청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청건은 머리를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눈을 깜박이며 윤을 올려다보았다. 은은한 빔 프로젝터 조명이 둘의 가라앉은 옆얼굴을 비추었다. 푸른빛을 받고 있는 청건을 보던 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피곤해요?”
“아니야. 계속 봐. 보고 싶었다며.”
틀어 놓은 영화는 공교롭게도 청건을 스타덤에 올린 <김미>였다. 윤은 제가 생각이 짧았음을 인지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주변엔 거의 다 마신 맥주 네 캔과 과자 봉지가 이리저리 놓여 있었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싱글대며 안줏거리를 가져오던 청건의 배려에 깜빡 속은 기분이었다.
“……힘들면, 나한텐 힘들다고 말해도 되는데…….”
윤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듯이 기어 들어갔다. 청건은 윤이 눈치를 보는 것을 알았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너는 네 일 생각해야지. 이런 데 힘쓸 거 없어. 어차피 시간 지나면…….”
윤은 청건이 말을 마치기 전에 그의 한 손을 꾹 붙잡았다.
청건은 늘 말했다.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져. 장담해. 그러나 말 그대로 시간이 지나야 괜찮아지는 것일 뿐이라, 당장 폭풍에 휩쓸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등 도움이 안 되었다.
“형 혼자 다 짊어지지 마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이라도 해 줘요. 솔직하게.”
“윤아.”
“이게 형의 전부잖아.”
윤이 울컥한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실 윤은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이 상황이 청건을 끝까지 밀어내지 못한 데에 대한 형벌로 느껴졌다.
“나한테 기대기라도 해. 힘들면 울기라도 해. 내 불행은 형이 다 가져가 놓고…….”
“…….”
”난 형한테 약점도 짐도 되기 싫어.”
“…….”
윤은 말없이 자신을 보다가 팔을 뻗어 머리를 매만져 오는 청건에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어른처럼 굴지 않아도 되니까 제발 속 시원히 울어 달라 부탁하면서, 되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제 쪽이었다. 미치겠다, 진짜. 청건 일이면 유독 감정이 널을 뛰고 때 아닌 설움에 휘말렸다.
“네가 나 대신 울어 주잖아. 매일.”
“…….”
윤은 결국 툭 떨어지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쳐 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으레 드는 생각이란 자신이 새로 시작한 일과, 청건의 일. 딱 둘뿐이었다. 우는 건 또 언제 들켰을까. 이래서야 청건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자신이 단단하다는 걸 보여 줄 수가 있겠냐고. 윤은 속으로 자책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잔잔히 웃는 얼굴에 마주 웃어 주려 입꼬리를 들었다. 얼굴이 떨리는 바람에 금세 무표정으로 되돌아가야 했지만.
빛이 새어 나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눈물을 삭이고 있노라면 청건이 느슨해진 손을 꽉 맞잡아 오는 느낌이 났다.
“윤아.”
“…….”
“나 좀 안아 줄래?”
윤은 청건의 부탁에 서서히 입매를 늘리며 웃었다. 청건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리는 윤을 꽉 끌어안으며 자신의 위로 앉혔다. 안아 달라 말하고는 외려 늘 윤을 안아 주었듯, 오늘 역시 같았다.
어느덧 새해가 왔다. 윤은 따뜻하고 너른 품을 파고들면 추운 겨울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청건은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 위에 기대어 깊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모든 게 괜찮아진 얼굴을 했다.
* * *
청건은 김채진을 처음 보았던 폐가의 마당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이곳은 정오의 해를 받고 있음에도 외로운 기운이 물씬 풍겼다. 어릴 때 느꼈던 음산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건은 버려진 이 공간에 오히려 연민을 느꼈다.
“진짜 꼭 이래야 되냐?”
대혁이 카키색 봄버 재킷에 손을 찔러 넣으며 물었다. 불과 열 발자국 앞에 있는 지하실 입구 쪽으로 돌을 찼다. 어휴 씨, 보기만 해도 부정 타. 청건의 딱한 과거를 향해 불만을 내뱉는 대혁에도 청건은 입꼬리를 올렸다. 저를 대신해서 화내 주고 울어 주는 주변인 덕인지, 이곳을 보고도 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제 철거되면 다신 알 수가 없다니까.”
“반박 자료만 철저하게 모으면 되는 걸 자꾸 똥고집이야.”
“윤이가 힘들어해서 빨리 끝내 주고 싶어. 더 얻을 수 있는 게 있을지 또 알아.”
“그래. 세기의 사랑이다.”
대혁의 빈정거림에 어깨를 들썩이던 청건은 곧바로 앞장서 지하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우으 씨, 에이 씨. 이딴 데에 애를 가둬 놔? 하여튼 미친 인간이…….”
뒤에서 호들갑을 떨며 따라오는 대혁에 남아 있는 마지막 겁마저 다 달아나는 것 같았다. 청건은 잠겨 있지 않은 문고리를 돌려 마침내 지하실의 문을 젖혔다.
얼추 번듯한 원룸처럼 꾸며 놓은 3평 방과 작은 화장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디디는 족족 마룻바닥은 힘겨운 신음을 쏟았고, 불에 탄 것처럼 뜯어져 흘러내리는 벽지와 천장의 깨진 조명, 금이 간 채 곰팡이가 잔뜩 낀 욕실 타일은 역시나 대혁의 분노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뭐 해, 얼른 찾아 인마.”
대혁은 뭐 좋은 게 있다고 현장 답사 온 사람처럼 이곳저곳 기웃대는 청건을 잡아 밀었다. 청건은 제 기억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곳에 이젠 전혀 감흥이 없는 마음이 신기할 뿐이었으나, 대혁이 정말 겁에 질린 것 같아 얼른 목적을 향해 움직였다.
청건은 다리를 접어 천천히 이동하며 마룻바닥을 손끝으로 쓸었다. 언뜻 매끈해 보이는 바닥은 손으로 쓸었을 때 각자의 결이 우둘투둘 느껴졌다.
그러던 중 익숙한 걸림이 느껴졌다. 자신이 한 방향으로 된 결을 십자로 가로지르며 손톱으로 조금씩 뜯어 놓았던 것. 청건은 그에 해당하는 널판을 끼익 들어냈다.
가장 먼저 발견한 열쇠는 이 지하실의 열쇠였다. 그 옆엔 마루 한 칸에 숨길 수 있는 크기인 작은 외국어 책 세 권이 있었고, 그 사이로 빼죽 튀어나온 종이가 보였다. 청건이 그 종이만을 빼내자 대혁이 얼른 고개를 들이밀었다.
「32-F실」
책을 한 장 찢어 손톱으로 새겨 둔 글씨가 아직 건재했다. 언젠가 통화하는 유민혁에게서 흘려들었던 것이었다. 신전에서 채진과 민혁이 머물던 기숙실의 번호였다. 총 4동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3은 동. 2는 층수. F는 그곳에 가 보면 티가 날 것이다.
“형도 같이 갈 거야?”
청건은 그 암호 같은 글씨를 맹하니 보고 있던 대혁에게 물었다. 자꾸만 갈 필요 없다 말리는 소리를 듣는 게 짜증이 나는지 대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반박할 준비를 하는 게 보였다. 역시 말려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청건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켰다.
“가자.”
그는 대혁과 색만 다른 까만 봄버 재킷 주머니에 종이를 접어 넣고 계단을 올라갔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대혁이 가볍게 밖으로 나가는 청건 뒤를 따랐다.
야, 같이 가아.
괜히 주변 눈치를 보며 무사히 지하실을 빠져나온 대혁은 곧 신전의 기숙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담 너머 기숙사는 폐가와 사정이 비슷했으면 비슷했지 더 나아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이 전혀 지나다니지 않는 기숙사라 관리자 또한 자리를 비웠다. 아무래도 신전의 빚쟁이 만들기 작전에 말려든 직원들이 저 스스로 선을 넘어 탈출을 노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도망갔다가 신상이라도 까이면 그대로 너 죽고 나 죽고 무기 징역행이 자명했으니.
둘은 조용한 주변을 느끼며 가볍게 담을 넘었다. 그리고 각각 5층 건물로 된 채 마주 보고 있는 네 채의 기숙사 앞마당으로 걸었다.
“저기가 3동이네, 저기.”
대혁이 가리킨 오른쪽 건물 꼭대기엔 거의 지워져 가는 흰 페인트로 ‘3’이 적혀 있었다. 청건은 쓰고 있는 검은 볼 캡을 한 번 정리하고 코 중앙으로 흘러내린 뿔테 안경을 추켜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노파심에 제 안경을 기부한 대혁은 하필 렌즈를 안 끼고 온 것에 꿍얼꿍얼 화를 내며 청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청건은 현재의 대혁이 짐짝과 다름없음에도 불평 없이 3동 유리문을 열었다. 사실 그도 처음 온 이곳에 적잖이 긴장을 느끼는 중이라 심적 안정이 필요했다. 그들은 조심조심 2층으로 올라 어렵지 않게 F실을 찾았다.
고요한 주변을 한번 둘러보던 대혁이 나서서 F실의 문고리를 돌려 여는 순간이었다. 소름 돋게 똑같은 시간에 문을 연 여자아이에 대혁은 “흐엑!”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정체를 들켜선 안 되는 청건을 뒤로 밀어 숨겼다.
“……누구세요?”
새카만 중단발 머리의 여자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저씨들은.”
어린아이에 유독 약한 청건이 변명을 시작하려 하자 대혁이 팔을 어깨 너머로 움직여 청건의 머리를 꽉 눌렀다.
“그래. 친구는 여기, 그러니까. 3동 2F실에 혹시 얼마나 머물렀니?”
“저요? 저는…….”
아이는 웬 덩치 큰 아저씨가 키 작은 아저씨 뒤에 숨는 걸 수상쩍게 훑다가 대답을 이었다.
“아빠랑 몇 개월 정도 여기서 있었는데요. 왜요?”
“어 그래. 그러면 여기가 애초에 다른 사람이 있던 곳이란 거지?”
“네. 전에 살던 아저씨는 자살했다 그랬는데.”
아이는 죽음을 언급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눈을 깜박였다. 잠시 말문이 막혀 입맛만 다시는 대혁의 뒤로 청건이 눈을 빠끔 내밀었다.
아이의 눈빛은 어쩐지 채진의 어린 시절과 비슷했다. 빚에 허덕이며 살았던 유민혁의 눈과도 비슷했고. 민혁은 가끔씩 신전에서 누군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혼잣말처럼 흘리곤 했었다. 그에겐 흔한 일이라, 감흥을 느끼지 못해 텅 빈 눈으로.
“그래. 맞아. 그 사람. 아저씨들이 그 사람이랑 친했었어.”
대혁은 이야기를 지어 내는 와중에도 조금 불쾌한 얼굴을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소린지 알겠다는 듯 옆으로 비켜서는 아이에 곧 표정이 풀렸다.
“고마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방으로 들어가는 대혁을 따르던 청건도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의 머리를 한 번 매만졌다.
둘이 방 안에 들어서자 아이가 문을 닫아 주었다. 바깥으로 뽀각뽀각 걸으며 사라지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며 침묵하던 그 둘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내렸다.
곧 쓸모를 다했다고 생각한 뿔테를 대혁에게 돌려준 청건은 천천히 그들의 보금자리를 둘러보았다.
허름한 건물 밖과는 다르게 누군가 자살을 한 방의 내부는 저렴하게나마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았다.
“다 뜯어고친 모양인데 뭘 찾을 게 있겠냐.”
대혁의 말에 청건이 목덜미를 긁었다. 그렇긴 한데.
청건은 혹시 몰라 흘러내린 이불보를 들추며 침대 밑을 살폈다. 내부가 어두워 핸드폰 플래시를 비추었지만 별 게 없었다. 배드민턴 채가 들은 주머니와 캐치볼을 위한 판, 야구공 모양의 공이 다였다.
대혁은 천으로 된 옷장을 직, 열어 옷을 하나하나 넘겨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청건은 아빠와 딸의 사진을 넣은 액자와 그 나이대 애들이 읽을 만한 역사 만화책 등이 놓인 책장을 살폈다.
섬유 탈취제를 괜히 건드려 보던 청건은 그러다 작은 램프가 놓여 있는 서랍장을 보곤 걸음을 옮겼다. 대혁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에게 다가왔다. 청건은 다리를 굽혀 앉으며 서랍장을 차례로 열었다.
벌레에 물릴 때 바르는 약. 위생 마스크. 엉킨 이어폰 줄. 박하 향 사탕 같은 잡동사니 사이를 뒤적여 보았다. 그러나 역시 저들의 짐일 뿐 유민혁에 관한 물품은 없었다.
폭이 깊은 두 번째 서랍에서 온갖 물건을 하나씩 들었다 놓던 대혁이 입을 열었다.
“에이, 야. 찾아봐야 빤스밖에 더 나오겠냐. 그걸 뭐. 증거로 내밀게?”
“좀 더 찾아봐. 생각 안 해 봤어? 금 바로 앞에 두고 곡괭이질 멈춘 사람이 얼마나 억울할지.”
“과몰입은. 금 있는 거 아는 우리나 아쉽지 그 사람이 뭘 안다고.”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는 거라고 투덜대던 대혁이 “에이, 너나 찾아라.” 하고 손을 털 때쯤이었다.
청건은 서랍장 바닥이 덜컥 올라가는 것에 몸을 굳혔다. 손끝에 걸린 것은 박스 뚜껑이었다. 뚜껑 앞을 들어 올리자 위에 놓였던 잡동사니가 뒤쪽으로 스르르 밀려 내려갔다. 눈을 똥그랗게 뜬 대혁의 앞으로 청건의 손이 천천히 박스 안으로 향했다.
이내 청건의 손 위에 놓인 물건을 가만히 보던 대혁이 청건의 너른 등짝을 철썩 쳤다.
“빤스보다 낫네!”
그걸 말이라고. 청건의 입이 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 * *
“윤아, 나 왔어!”
대혁에게 오랜만에 레스토랑 코스를 사 주고 오는 길이었다. 청건은 우윤 충전 시간이 한참 지나 속이 막 탔다. 현관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신발을 벗어 던지고 복도를 걸었다. 하나 이쯤 되면 종종걸음으로 마중 나오는 윤이었는데 거실을 지났음에도 집 안이 고요했다.
청건은 발에 밟히는 푹신한 감촉에 시선을 내렸다. 아무렇게나 벗어 둔 옷이 거실에 하나, 화장실 앞에 하나, 방 앞에 하나 놓여 있었다. 윤의 동선이 빤히 그려졌다. 집에 와서 방에 짐을 내려 두고 눈을 감은 채 화장실 앞으로 가면서 이리저리 허물을 벗어 놓았을 우윤. 웃음이 씩 지어졌다.
그는 그제야 불이 꺼진 침실을 보았다. 기척을 죽이고 걷다가 반쯤 닫혀 있는 침실 문을 천천히 열었다.
가장 힘들 첫 사이클에 보내느라 지친 와중에도 어시 일을 마치고 온 기특한 윤은 이불도 채 덮지 못하고 웅크려 있었다. 덜 마른 머리가 이마에 살짝 붙어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비에 젖은 물망초 같았다.
청건은 가져온 짐을 천천히 내려 두고 윤이 누운 곳을 피해 침대에 걸터앉았다. 쭉 뻗어 내려오다 동그랗게 굽어지는 코끝에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1센티를 앞두고 행동을 멈춘다. 대신 공중에서 손끝을 조금 움직였다. 너무 만지고 싶지만 제 양손을 마주 잡아 내리며 인내했다. 윤이 이렇게 세상모르고 잠에 든 걸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윤과 완전히 함께 살게 됐다는 생각을 가끔 할 때마다 청건은 마음이 벅찼다. 분명 엉망진창인 상황임에도 그랬다. 바깥의 소란을 잊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까.
한식을 먹을 땐 밥보다 반찬을 많이 먹고, 슬리퍼 없이 맨발로 다니는 걸 더 좋아하고, 꼭 입술을 깨문 채로 거울을 보는 등의 사소한 습관을 알게 되는 일도 좋았다. 누군가의 침입에 대비하듯 경직된 채 자던 그가 이제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자는 모습도 좋았다. 이런 모습을 알게 되는 건 청건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애초에 비밀번호도 없이 열려 있던 우윤을 알아챈 단 한 사람만의 특권.
“……형.”
윤의 손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청건은 잠기운이 묻은 하얀 얼굴로 초점을 재조정했다.
“미안, 깨웠어?”
“아니……. 잘 만큼 잤어요.”
윤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건이 부축했다. 유난스러움에 윤이 픽 웃으며 그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작게 하품한 윤은 자신을 보는 청건을 잠시 살피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아선 매사에 둔한 윤은 부쩍 눈치가 늘었다. 청건의 일에 있어서는 확실히 눈에 띄게 그랬다.
청건은 바닥에 놓은 물건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늘렸다. 안 그래도 최근 컨디션이 최악인 그에게 깨자마자 김채진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별일 아냐.”
“아닌 게 아닌데. 또 뭐 사 왔죠. 그래서 잘못한 강아지처럼…….”
“아니래도…… 그런 거.”
윤의 의미심장한 눈에도 청건은 말을 아꼈다. 관찰력은 올라갔지만 여전히 적중률은 미비한 윤이 귀여워 웃음을 흘렸다.
청건은 눈을 얇게 뜬 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입술을 짧게 부딪쳤다. 몇 번을 짧게 키스하다가 고개를 좀 더 깊이 돌리자 이미 그의 공격 패턴을 파악한 윤이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이 분위기라면 결코 짧은 스킨십으로는 끝나지 않을 걸 아는 게 분명했다. 청건은 윤의 코를 살짝 잡았다 놓았다.
“잠 못 잤으니까 봐주지 뭐.”
“참 착한 형이시네.”
“그냥 형 아니고 뭐였더라?”
“네네, 착한 애인이요.”
인심 쓴다는 듯 말한 윤이 청건의 턱을 가볍게 긁고는 폴짝 침대를 벗어났다. 높은 곳에서 잘도 휙 내려가 배시시 웃는 윤은 확실히 몸 상태가 나아진 듯 보였다. 저러면 금방 놓아준 게 아쉬운데. 청건은 콧잔등을 장난스럽게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딸기 칵테일 사 왔는데. 마실래?”
윤은 그 제안에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주당.”
청건이 윤의 엉덩이를 톡톡 치자 윤이 몸을 비틀며 달아났다. 바닥에 둔 칵테일을 들고 금세 그 뒤를 쫓아간 청건이 윤의 드러난 목덜미를 앙, 물었다.
이갈이 하듯 자꾸만 목을 깨무는 음흉한 머리를 밀어 버린 윤이 칵테일만 쏙 빼서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청건은 역삼각형의 칵테일 잔을 가져와 식탁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칵테일을 따는 청건에게 유리잔을 내밀고 입맛을 다시는 윤의 모습은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청건은 술을 따라 주려다 말고 병을 내려 두었다.
“자꾸 그러면 나 힘든데.”
“뭐가요?”
윤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자신이 잘못한 거라도 있나 돌아보는 듯 큰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깜찍한 행동은 역시나 의도한 게 아니었다. 심장이 또 아팠다.
“지나치게 귀엽지 말란 소리야.”
청건이 술을 따라 주며 그를 진정시키듯 말했다. 그러자 윤이 입술을 비죽이다 “변태.” 하고 속삭였다. 딱히 그런 쪽으론 아니었는데. 괜스레 마음이 찔린 청건이 술을 채운 잔을 들었다.
“자, 짠.”
두 잔이 부딪치자 윤은 기다렸다는 듯 한 잔을 원샷 했다. 자신도 조금씩 술을 마시며 윤을 보던 청건이 잔을 내려 두며 아쉬운 소리를 냈다.
“아, 건배사 있었는데.”
“뭔데요?”
“고생했다고. 몇 주간.”
칵테일이 입맛에 맞는지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시던 윤은 그 말에 식탁 위로 팔짱을 끼며 웃었다.
“발현 축하주네?”
“맞아.”
입술을 만족스럽게 붙이고 고개를 끄덕이던 윤은 스스로 새 잔을 채우며 중얼댔다.
“좀…… 고맙네.”
“물어보니까, 다달이 나아질 거래. 너무 걱정할 필요 없을 거 같아.”
윤은 걱정이 컸던 저를 달래듯 말하는 청건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가 식탁을 짚고 일어나 몸을 쭉 빼었다. 쪽, 닿는 입술. 다음은 검은 앞머리를 토닥이는 손길 두 번.
“예뻐.”
“…….”
그러자 청건은 실시간으로 전신에 불이 지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사람을 이만큼 홀려 놨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청건은 곧 경직된 몸을 풀곤 목덜미를 긁적였다.
“칭찬이 야하면 곤란한데.”
“그렇게 받아들이면 내가 더 곤란한데.”
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돌려 두 번째 잔을 꼴깍꼴깍 잘도 마셨다. 사람 이렇게 만들어 놓고 정작 본인은 여유로웠다. 멀거니 그를 보던 청건은 윤이 입술을 떼자마자 잔을 빼앗아 갔다. 김채진이고 뭐고 눈앞에 살아 숨 쉬는 딸기를 먼저 삼켜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작은 도발 하나에도 불이 붙는 걸 어쩌라는 말인지. 이럴 걸 예상하고 발현에 좋다는 약이며 음식을 잔뜩 사 온 참이니, 용서는 다음에 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청건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윤에게 다가가 키스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몸이 기울어지는 윤의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키스의 처음은 인공적인 딸기 칵테일의 향. 뒤따라오는 것은 진득하고 다디단, 정신이 아득해진 만큼 매혹적인 딸기 향이었다.
청건은 윤이 걸친 큰 셔츠를 금세 벗겨 내고 그를 공중에 안아 들었다. 엉덩이를 받쳐 안으면 따끈한 맨살이 손바닥 안에 부드럽게 감겼다. 금세 달아오르는 몸에 솔직하게 허리를 감아 오는 두 다리가 사랑스러웠다.
* * *
“갔다 올게.”
“응.”
작별 인사만 이미 세 번. 그러나 청건은 현관문을 열다 말고 다시 뒤로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윤은 여전히 중문을 잡은 채 시무룩하게 바닥을 보고 있었다. 하얀 목련 같은 얼굴 위로 걱정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웃음을 참던 청건은 결국 윤의 앞으로 다가가 눈을 맞추었다.
“진짜 금방 올게. 걱정하지 마.”
“사랑해요.”
……뭐라고? 청건은 하마터면 과장스러운 CF처럼 놀랄 뻔했다.
“이렇게…… 갑자기?”
자주 해 주지 않는 고백이었다. 이 귀한 걸 받아도 되는 건가. 감격스러운 마음에 코를 쓸고 있으면 윤은 또렷한 눈길을 마주치며 다시 말해 왔다.
“사랑해.”
두 번이나. 혀를 씹을 뻔한 청건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위험한 상황에 맨날 처하고 싶잖아.”
청건의 허튼소리에 윤은 결국 웃어 버린다. 나른한 웃음소리에 가슴을 크게 부풀렸던 청건이 한숨을 내쉬며 윤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금 힘을 주어 갈색 머리를 매만졌다.
“얼마나 사랑하는데?”
“비현실적으로요.”
“그건 또 뭐야? 완전 대단한 건가 보다.”
“맞아요. 대단한 거.”
“내가 그런 걸 받아도 돼?”
“네. 양껏 받아요. 어차피 줄 사람 형밖에 없어.”
앞에 ‘어차피’를 뺐으면 조금 더 로맨틱했을 텐데. 그러나 잘생긴 광대는 여전히 만족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너무 로맨틱했다면 겨우 잡은 약속을 또 미뤄야 했겠지. 우윤은 역시 아슬아슬한 매력이 있었다.
“반납 안 할 거야.”
“맘대로 해요.”
“사랑해.”
“사랑해요.”
세 번. 청건은 어지러운 마음으로 윤에게서 몸을 물렸다.
“나 이제 진짜 가. 잡지 마.”
“응.”
네 번째엔 남은 배우 생활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딸기를 들쳐 업을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윤은 거기에서 멈춰 주었다. 청건은 기특한 윤을 한 번 쓰다듬고는 바로 집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오니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진짜 사람이 속도 없이 이럴 수가 있나. 청건은 정신 차릴 겸 볼을 가볍게 치곤 집 앞에 세워진 차에 오른다.
시간 약속에 칼 같은 대혁은 1분 지체된 시간에 빨리도 나온다며 신경질을 냈다. 하여튼 이 형은 이빨이 다 빠져서도 종일 화만 낼 거야. 청건이 조수석에 앉으며 하는 말에 대혁은 잘생긴 이마 위로 꿀밤을 놓았다. 늦은 건 늦은 거지 인마. 네, 잘못했습니다 형님.
줄곧 아무렇지 않게 굴던 대혁은 도착지에 가까워지자 손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차내 여기저기를 만졌다. 또 자기가 대신해서 긴장을 해 주는 대혁에 청건은 반대로 몸이 풀렸다.
대혁의 마음이 어떨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청건보다 열 살이 많은 그는 줄곧 청건의 친부 노릇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친아버지인 이화건은 청건이 평소 상상했던 이미지와 달랐다. 매서운 눈초리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 다부져 보였지만, 사실 한없이 선하고 다정했다. 연인의 결혼을 깨닫고 홧김에 저지른 하룻밤으로 얻은 자식이 다 커서 왔음에도 매번 청건을 먼저 배려했다.
온몸이 피멍과 피딱지로 뒤덮여 있던 이청건의 열여섯. 화건은 일이 바쁜 자신 대신에 온종일 청건을 케어 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을 붙였다. 그게 대혁이었다. 타박상으로 전신이 형편없이 망가진 청건의 치료를 무사히 돕는 것. 그것이 대혁의 첫 임무였다.
화건은 집에 오는 날이면 꼭 청건의 연기 연습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청건은 연초 겨울에 그를 만나 연말 겨울에 드라마 주연 오디션에 합격했다. 화건의 입김이 없음에도 이룬 일이었다.
그날 새벽, 그 소식에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급히 돌아가던 화건은 청건이 좋아하는 팥빙수 집이 문을 닫아 아쉬워했다. 대신 24시 마트에서 빙수 기계와 재료들을 직접 사 와 몸만 한 그릇에 팥빙수를 해 주었다. 대혁을 포함한 셋은 사방팔방 물 자국을 만든 채 둘러앉아 푸짐한 빙수 그릇에 수저를 함께 찔러 넣었다.
청건이 열여덟이 되던 해 화건은 세상에 둘의 관계를 공개하려 했다. 그가 걱정이 되었지만 청건은 결국 기쁘게 수락했다. 곧잘 생글생글 웃는 청건의 머리를 쓰다듬은 화건은 다음 스케줄을 위해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당대 가장 인기 있는 배우 이화건이 고속 도로 추돌 사고로 즉사했음을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의 집에서 그 뉴스를 보던 청건은 그날로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을 없앴다.
대혁이 운전하던 차가 멈추었다.
품에 든 물건을 한 번 확인한 청건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대혁이 청건의 팔을 턱 하니 붙잡아 왔다.
“괜히 도발하지 마라.”
“뭐, 필요하면 해야겠지.”
청건의 대답에 대혁이 겁을 주듯 윗니를 보이더니, 이내 한숨을 탁 내쉬었다.
“그래. 치고받고 싸울 거면 차라리 이기고 와라.”
“네, 아부지.”
장난스럽게 대꾸한 청건이 머뭇대지 않고 문을 열었다. 차 문을 닫자마자 대혁이 창을 끝까지 내리며 목을 뺐다.
“주변에 있는다.”
“됐어, 가 그냥.”
“새끼. 다 큰 척하기는.”
청건이 부러 사춘기 온 애처럼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흔드니 대혁은 잔소리를 멈추고 차를 후진했다. 멀리 사라지는 대혁을 보며 청건은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는 대혁 덕분에 제 몫의 걱정이 싹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잘할 수 있겠다.
영하의 온도라 바람이 찼다. 청건은 캐멀색 코트 깃을 한 번 정돈하곤 캄캄한 농구 코트를 가로질렀다. 코트 너머 숲 앞으로 다가선 그는 서서 기다릴 생각 없이 바로 벤치에 걸터앉았다. 김채진은 고작 1분 늦을 인간이 아님을 벌써 파악한 그는 아예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대혁의 차에서 훔쳐 온 빼빼로를 아작아작 씹고 있던 청건은 약속 시간에서 30분이 지나서야 농구 코트 안으로 들어오는 김채진을 보며 대충 손을 들어 보였다. 김채진은 누가 보면 마실 나온 줄 알 정도로 걸음걸이가 느긋했다. 그래도 문자 하나에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어떤 일인지 궁금은 한 모양이었다. 아마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이라 판단하에 온 것이겠지. 과자 부스러기를 탁탁 털어 낸 청건이 이내 몸을 일으켰다.
청건에게 가까이 다가온 채진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양새가 퍽 우스웠다.
“누가 연예인인지 모르겠네.”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가 영 행동이 수상쩍다는 말은 생략했지만 채진은 그것만으로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뭐 이딴 데로 약속을 잡아. 한참 헤맸네.”
채진의 불평을 무시한 청건은 다 먹은 과자 봉투를 쪽지 모양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 행동을 눈으로 흘기던 채진이 코트를 여미며 청건의 뒤를 확인했다. 잠복 경찰이라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왜 이렇게 질질 끌어? 뒷산에 매장시키기라도 하게? 얼른 용건만 말해.”
줄 게 있으면 빨리 내놓고 꺼지라는 태도였다. 청건은 그냥 자리를 박차고 가 버릴까도 싶었지만, 큰일을 터뜨린 놈치고는 간이 콩알만 해 뵈는 김채진이 안타까워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집에나 있지 왜 나왔대.”
“어쩐지 마지막으로 보는 걸 수도 있겠다는 직감이 들어서 말이지.”
“이번 일로 둘 중 하난 날아갈 각오는 했나 보네.”
“당연하지. 주인공은 너야. 곧 있음 날아갈 텐데 좋겠다. 아, 이미 날아갔나?”
말꼬리를 올리며 조롱하는 말에도 청건은 타격 없이 웃었다. 그러자 채진이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담배 하나를 물었다.
속이 타는 모양이라 조금 기다려 줄까, 싶어 청건은 멀찍이 농구대나 쳐다보았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맡는 담배 연기에도 점점 속이 역해져 결국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행동에 채진은 “씨발, 유난은.” 하고 웃더니 다 피운 꽁초를 바닥으로 던졌다.
“자기는 맷집이 꽤나 세더라. 웬만한 놈은 진작 뒤졌을 텐데 여전히 빨아 주는 연놈들이 널린 걸 보니까.”
채진은 그 말을 끝으로 두 번째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말없이 어둠 속을 관찰하던 청건은 제 앞으로 스멀스멀 다가오는 연기를 후, 하고 짧은 입바람으로 흩어 내고는 말했다.
“넌 아직도 내가 싫냐?”
“두말하면 입 아프지 않겠니?”
채진은 어깨를 들썩이며 담뱃재를 공중에 튕겼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청건이 이내 코트 안을 뒤졌다. 그의 말마따나 용건이나 말하고 얼른 가야겠다 싶었다.
청건은 막 꺼낸 갈색 봉투를 채진의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얼결에 봉투를 받은 채진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뭐냐?”
“선물.”
“…….”
뭔 개수작인가 싶은 얼굴로 이를 물고 있던 채진이 봉투를 거꾸로 들어서 공중에 털었다. 바닥에 굴러떨어지고 날리는 물건들을 보며 청건은 헛숨을 쉬었다. 하여튼 저 성질머리. 제가 평생 간직할 물건인 건 모르고.
“……뭐야, 이게.”
채진은 제가 한 짓 때문에 수고스럽게 몸을 구부려 물건을 집은 후 일어났다. 그의 손엔 작은 수첩과, 민트색 천으로 된 아기 신발이 들려 있었다. 물건을 이리저리 살피던 채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청건이 찾은 박스는 새로운 거주자들도 미처 찾아내지 못할 만큼 서랍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다. 용도는 김채진의 물건을 보관하는 것이었다.
채진은 아기 신발에 놓인 자수, 유민혁과 김채진을 뜻할 ‘YMH, KCJ’라는 이니셜과 수첩 위에 ‘채진이 육아 일기’라 적어 둔 견출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채진의 얼굴을 채운 것은 당혹감. 그리고 우습게도 그리움이었다.
“선물이 썩 나쁘진 않지?”
“…….”
청건의 무겁지 않은 말에도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침묵할 뿐이었다.
우윤, 이청건, 김채진.
윤과 채진을 한데 엮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셋은 공통점이 있었다. 사랑이 부족했던 유년 시절. 그러니 김채진의 약점은 이것이었다. 유민혁과의 관계.
“그 사람, 너 빚더미에서 구해 내려고 별의별 짓을 다했어. 사랑도 없이 날 가지고, 알파 약을 사서 수년을 맞히고, 네 옆에 있고 싶었을 시간에 이 악물고 날 감시하고. 그렇게 만든 내가 변수가 될 줄은 몰랐겠지만.”
“…….”
채진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신발에 수놓인 자수를 쓸었다. 숨을 한 번 고르며 흙바닥을 구두 끝으로 쓱, 쓸던 청건은 가장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시작이 달랐어. 넌 사랑해서 가진 애니까. 난 재화 취급을 했어도 너한테만은 좋은 엄마이고 싶었을 거야.”
“…….”
“그러니까 이젠 좀 똑바로 봐. 날 알파로 키운 건 내가 아니라 널 위해서라고.”
이어지는 말을 듣던 채진은 불안한 듯 주변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벤치 위에 앉았다. 난생처음 알게 된 사실이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듯했다. 저 말 많은 김채진이 한마디를 안 받아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제 엄마가 죽기 전에 모진 말을 하는 실수를 하진 않았을지 추측하게 됐다.
“가끔 후회는 되더라. 나한테 사랑 한 번 안 주던 유민혁은 차치하고라도, 김채진은 거기서 빼 왔어야 했나.”
“…….”
“그 사람 밑에서 태어난 게 네 잘못도 아닐 텐데.”
청건은 결국 입술을 꽉 깨무는 채진을 훑다가 “아, 춥다.” 하고 괜스레 큰 소리를 냈다. 처음 말하는 속마음에 괜히 남부끄럽긴 했지만, 속이 후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둘 사이의 해묵은 오해가 단 몇 마디로 풀려 버리는 것엔 허탈함도 들었고.
끝내 더러운 신발을 가슴 위로 끌어안는 채진을 훑던 청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버티느라 고생했어.”
“…….”
“감방 면회 가서나 말하려 했는데, 그냥 지금 한다. 네 말대로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거였으면 해서. 뭐,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고.”
“…….”
“간다.”
청건은 고개를 푹 수그리며 어깨를 떨기 시작하는 채진을 마지막으로 보곤 미련 없이 뒤로 돌았다. 상대의 약점을 계산하고 온 것은 맞으나 예상보다 더한 동요에 머리를 긁적였다.
모놀로그 하기 힘드네.
작게 중얼댄 청건은 담뱃재가 날아와 붙었던 코트를 한 번 털고는 보폭을 크게 하며 걸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농구 코트를 지나 산책로를 향해 갔다. 멀리 익숙한 차종이 보였다. 먼저 가라니까. 고개 저으며 웃던 청건은 가볍게 뛰어 대혁의 차량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야!”
초조하게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대혁이 묵직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어우, 귀청 떨어지겠어.”
“다친 덴, 없어? 어?”
대수롭지 않은 듯 벨트를 차던 청건은 제 코트를 열었다 닫았다, 팔을 주물렀다가 앞머리를 들췄다가 난리를 치는 대혁에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만하고 출발이나 해 줘. 나 빨리 윤이 봐야 돼.”
“……아이고……. 참내.”
두 손을 떨어뜨린 대혁이 학을 떼는 표정으로 청건을 흘겼다. 그러다 결국엔 기어를 바꾸곤 양팔을 핸들 위에 걸쳤다.
“그래, 멀쩡히 살아서 온 게 어디냐.”
“하여튼 걱정이 과해. 형 동생 이제 어디 가서 얻어맞을 일 없다고.”
대혁은 그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엑셀을 밟았다.
“말조심해 인마. 나 PTSD 와.”
“반대가 정상아냐?”
웃긴 소리를 하는 대혁에 피식 웃은 청건은 불현듯 핸드폰을 꺼내었다. 방해가 될까 봐 꾹 참는 중인지, 윤은 아무런 연락을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동네를 돌아 속도를 높이는 차체를 느끼던 청건은 토독토독, 키패드를 누르기 시작했다.
[공주야, 1시간 내로 가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대혁의 차는 금세 잡힌 빨간불에 속도를 줄였다. 청건은 잠시 멈춰 선 차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면 차창 위로 훌쩍 자라 버린 이청건이 비쳤다.
오늘 일은 사실 배려가 아니었다. 이청건과 우윤을 위한 일이었지. 우습게도 김채진의 충족이 곧 둘의 행복이라. 앞으로 마음에 있던 짐을 덜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롯이 저 애에게 달렸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형 혼자 다 짊어지지 마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이라도 해 줘요. 솔직하게. ……나한테 기대기라도 해. 힘들면 울기라도 해.’
한때는 엉망이었지만, 돌아보니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알고 보면 겁 많고 외롭던 이청건은 어떻게든 살고 어떻게든 흘러서, 이렇게나 힘이 되어 주는 우윤에게 가 닿았으니까.
……예뻐 죽겠다.
차 출발과 함께 다시 화면을 내려다 본 청건은 썼던 글자를 지워 냈다.
[너무 보고 싶어.]
짧은 글을 전송한 청건은 힘겨운 얼굴로 고개를 젖혔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당장 그를 안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집까지는 너무 멀었다. 기분 탓인지 가는 동안 도로는 지독하게도 막혔다.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신호등이 가까워지면 빨간불을 틀어 버리는 것 같았다.
1시간 안에 겨우 단지 안으로 들어온 청건은 입구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에 대혁의 어깨를 다급히 두드렸다.
대혁은 단지 초입에서 팔짱을 끼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윤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청건은 자신들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윤에게 들키지 않게 살그머니 차에서 내렸다. 그런 청건을 보던 대혁이 피식 웃었다. 좋을 때다.
인사받을 생각도 없이 돌아가는 대혁의 차 앞으로 청건이 느린 걸음을 내디뎠다. 언제부터 밖에 서 있던 건지 추위를 많이 타는 윤은 코끝도 볼도 빨갰다. 당장 달려가 부서지도록 안고 싶은 걸 참아 낸 청건의 얼굴엔 웃음이 만연했다.
“윤아.”
작게 불렀으나 그는 제가 사 주었던 니트 위로 짧은 패딩과 목도리를 걸친 채 달을 응시할 뿐이었다. 청건은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자동으로 초점을 맞춘 렌즈가 윤의 피사체를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잡아냈다.
찰칵. 작은 기계음과 동시에 윤이 고개를 돌렸다. 청건을 본 윤의 얼굴이 부드럽게 피어났다. 그대로 다시 한 장 더. 윤은 청건의 앞으로 나비처럼 뛰어왔다. 청건은 팔을 벌려 그를 한 품에 안아 주었다.
“왜 나와 있었어. 안에 있지.”
“형이 보고 싶댔잖아요.”
“그래도 춥잖아…….”
청건은 몸을 떼어 윤이 두른 목도리를 더욱 꼼꼼히 매만졌다. 하지만 곧이어 매듭을 짓던 손길이 멈추고, 청건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서서히 멎었다.
목도리 끝을 들어 올린 그의 머릿속으로 모든 퍼즐이 흩어졌다. 그러고는 한꺼번에 재정렬 되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전의 한국, 처음으로 타국에서 진행하는 아델의 첫 해외 전시장이었다.
차분히 전시를 관람하던 청건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유민혁을 닮은 관람자의 옆모습에서 급히 뗀 시선이 허공을 돌았다. 순식간에 토기가 올라왔다. 그는 자신을 은근히 둘러싼 인파를 헤치고 비상구로 향했다.
시멘트 벽에 기대어 한참 숨을 고르던 청건은 희미하게 올라오는 흐느낌을 들었다. 흐린 시야를 갈무리한 그는 핸드 레일을 잡아 몸을 기울였다. 아래층이었다. 얽혀 드는 두 개의 인영이 보였다. 동시에 역겨운 향을 맡았다. 러트 사이클이다.
청건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간 후였다. 그에게 멱살이 잡혀 크게 휘청이던 알파가 다음 순간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괴물 같은 신음을 내던 남자가 땅을 기어 겨우 비상구를 벗어났다.
갑자기 풀어 낸 페로몬에 벅찬 숨을 몰아쉬는 청건의 아래, 등을 보이고 있는 여윈 남자는 양팔을 붙든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작은 창문이 열려져 있는 차가운 비상구에선 둘의 가쁜 입김이 흩어졌다.
청건은 떨리는 손으로 진녹색 목도리를 풀어냈다. 팔천면을 벗어나던 날, 마지막으로 마주친 김채진이 담배 끝으로 지져 놓았던 목도리. 전리품과 같은 것이었다. 과거를 되새기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채찍질하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것을 처음 보는 남자의 희고 긴 목 위에 둘렀다. 애증의 물건이 제 손을 떠나간 순간. 청건은 이유 모를 전율을 느꼈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청건은 눈을 훔쳐 내는 남자가 깊게 꾸벅이는 인사를 받으며 뒤로 돌았다. 여전한 흉통을 느끼며 대혁의 차로 돌아갔다. 깊게 숨을 내쉬며 방금의 전율을 떠올렸다. 심장이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웃음이 지어졌다.
그날, 서울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목도리 끝에 생긴 검은 자국을 매만지던 청건은 윤의 차가운 얼굴을 양손으로 쥐었다. 겨울 속에서 저를 기다리느라 더욱 뽀얘진 얼굴이 못내 예뻤다.
“우리, 이미 같이 봤었네. 첫눈.”
“응?”
청건은 눈을 동그랗게 떠 오는 윤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행복해지자. 우리. 속삭이는 청건에 윤은 물었다. 지금보다 더요? 청건은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응. 지금보다 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그가 더 많은 행복을 탐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윤은 청건의 품에 입술을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좋아요. 그리고 꽁꽁 언 눈을 접어 웃었다.
꽉 끌어안고 몸을 기울이며 장난치는 둘 사이로 한결 포근하게 느껴지는 겨울바람이 흘렀다.
* * *
발현의 저주는 끝이 났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한 윤은 청건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모바일로 뉴스 타이틀을 정독 중에 있었다. 채진과의 만남으로 인터넷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되도 않는 둘의 공범설에 힘없이 웃은 윤은 기계적으로 새로 고침을 반복했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이 깬 청건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는 윤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볕에 눈도 못 뜨고 윤의 손에 입술을 꾹 묻었다.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윤의 주의를 제게 돌린 청건이 포슬포슬 웃었다. 그런 청건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는 윤의 허벅지 위로 꾸물꾸물 기대어 왔다.
계속 그의 머리를 만지작대던 윤이 드디어 새로 뜬 뉴스를 확인했다. 화면을 훑던 엄지를 멈추고, 가슴을 한 번 부풀렸다. 참아 보려 했지만 결국엔 입꼬리가 활짝 휘었다. 윤은 저를 올려다보는 청건을 꽉 끌어안으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윤은 사건이 더 이상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청건이 사건을 유리하게 만들 것을 알고 있지만, 시간을 더 앞당겨야 청건을 포함한 모두가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둘에겐 김채진이 가지지 못한 것이 있었다. 힘들 때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고, 지탱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로뿐만 아니라, 청건에겐 유독 그런 사람이 많았다.
청건이 채진을 만나러 갔던 그날, 윤은 긴장한 기색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청건이 진작 주었던 지인들의 번호를 찾아 무작정 맨 위부터 눌렀었다.
- 애들한테 널 뭐라고 설명했다고? 다시 말해 봐. 소라도 들려주게.
청건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동안 새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노을 빛에 물든 포근한 거실을 보며 윤은 의자 위에 놓인 두 다리를 끌어안았다.
“‘청건 씨랑 잠깐 만날 건 아닌 사이’요. 됐어요?”
- 푸하학!
퉁명스러운 대꾸에 새미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놀려요. 그럼 뭐라고 설명하냐고요.”
- 아, 우리 리틀 프린세스 진짜 웃겨.
윤은 안 봐도 새미가 양쪽에 맺힌 눈물을 찍어 누르고 있을 게 눈앞에 환했다. 새미가 스피커폰을 켠 김에 ‘소라 씨 도망쳐요!’ 따위의 말을 외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사실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 다짜고짜 ‘이번에 이청건이랑 새로 사귀는 오메가 애인인데요.’ 말하는 것도 우스운 모양새였을 것이다.
우선 청건의 가까운 지인인 ‘우윤’이라 자신을 소개하고-청건에게 부디 도움이 되어 달라는 부탁- 사실 제 정체는 ‘청건과 잠깐 만날 건 아닌 사이’라며 연인임을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이 가장 담백하고 거짓 없는 루트라 생각했고, 다행히도 그의 지인들은 그 고백에 하나같이 좋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대다수에게 거절당할 수 있다고 예상한 것과 달리 모두가 '우윤' 두 글자를 듣자마자 반색을 표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우윤’이 보증 수표라도 되는 양 사칭의 가능성은 아예 배제한 듯 정중한 태도로 윤을 대해 준 것은 물론, 어려운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끝에 둘의 관계 발전에 대해 축하 인사를 덧붙여 주기까지 했다.
- 그거야, 선배가 죽상으로 기어 다닐 때나, 머리에 꽃 꽂은 놈처럼 실실댈 때, 들들 볶으면 결국 실토하는 이름이 죄다 ‘우윤’이었기 때문이지. 넌 모르겠지만 너 이미 우리 사이에서 유명 인사야. 몇 사람 사이에서만 도는 비밀이지만.
“아…….”
윤은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청건을 조금은 의외라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제 얘기는 입도 뻥긋 안 하는 줄 알고 괜히 서운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다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다 와 가요, 누나?”
- 엉. 몇 분 후에 도착해.
“알았어요.”
곧 전화를 끊은 윤은 세팅한 테이블을 다시 정돈하고 요리를 잇는 청건의 뒤로 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금방 온대요, 하는 소리에 청건은 팬 위로 스테이크를 올렸다.
“위험하니까 가서 앉아 있어.”
“싫어요. 안고 있을래요.”
지극 정성이라는 새미 말대로 청건은 한결같이 윤을 보호하려 들었다. 윤이 아예 청건의 배 위로 깍지를 끼자 청건은 “안 되는데…….” 중얼대면서도 윤의 손을 꼼지락 만져 왔다. 자신도 떨어지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청건은 “튀겨져도 같이 튀겨질래.” 하는 윤의 말에 어깨를 들썩이다 고개를 돌려 짧게 입 맞췄다.
식탁에 막 모든 음식의 세팅을 마쳤을 즘 초인종이 울렸다. 윤이 달려가 문을 열어 주자 소라가 딸기 케이크를 쭉 내밀며 웃었다. 현관에 서서 소라와 정신없이 밀린 얘기를 하자 새미는 내 애인 그만 보고 와인에나 집중하라며 비싼 와인 두 병을 안겼다.
넷이 처음으로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동안 새미야말로 소라를 유난스럽게 챙겼다. 윤은 청건이 제게 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노력하는 새미의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판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번거롭고 힘든 일일 텐데도 목소리를 내 준 지인들 덕이었다.
청건의 결백에 힘을 보탠 이들은 모두 인망가로 알려진 터라 그보다 훌륭한 방증이 없었다. 윤이 한때 탐탁지 않게 보았던 ‘베타 파티’ 지인들이 단연 주축이었다. 발 벗고 나선 뽀뽀 빌런 임민정은 이제 윤에겐 두말할 나위 없이 고마운 사람이었다.
결국 조사에 비협조적이던 김채진의 태도 역시 180도 뒤바뀌었다. 청건을 몰락시키기 위해 탄생한 증거들은 그의 자백 자료로 쓰이며, 청건의 루머는 마침표를 찍었다.
채진의 자료는 불법적인 약 제조와 국내 암거래를 넘어 해외 수출 유통망까지 확보해 온 신전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것이었다. 사실상 내부 기밀문서나 다름없었다. 신전에 관한 각종 괴담이 뜬소문이 아닌 진실로 드러나자 검찰은 신전에 대해 압수 수색을 전격 진행했다.
이어 소환 조사가 시작되면서 불법 사채업자들과 손을 잡고 직원들을 착취하던 고위 관리직 라인이 하나둘 무너졌다. 사채업자와 연결되어 비자발적으로 일을 시작한 이들은 사정에 따라 형량이 감경되었다.
루머 유포자인 김채진은 초범임을 감안해 벌금형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있었으나, 신전 윗선과 내통하는 주요 브로커로서의 이력과 무고한 피해자를 다수 만든 것 등을 이유로 결국은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시간은 들겠으나 재발을 막기 위한 다양한 법안이 성립된다면 결국 부유층의 형질 놀이도 막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이어진 청건의 행보는 이례적이었다.
드라마 촬영 및 지연된 영화 개봉에 대한 손해를 전액 배상하기로 한 청건의 회사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고로 두 작품에 대한 수익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청건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 사건의 결과와 관계없이 이번 이슈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 그와 그의 회사의 입장이었다.
이번 일로 청건이 친모의 욕심으로 인해 박명한 어린 시절을 보낸 피해자라는 것, 그의 친부가 비운의 사고를 당했던 인기 배우 이화건이었다는 것, 화건이 그랬듯 습관적으로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던 청건의 선행 등이 모두 밝혀지면서 청건을 비난하는 무리는 아예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로 인해 이득 볼 생각이 없던 청건은 외려 이번 일로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러브 콜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채진이 청건을 돕게 된 셈이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악의적인 루머 하나로 냉온탕을 오가는 연예계를 몸소 겪고 나니 윤은 당사자가 아님에도 말도 못 하게 기진맥진해졌다. 그러나 청건은 지치긴 했어도 무너지기는커녕 회사와 지인, 대중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했다. 이런 시간을 함께 겪었으니 서로의 의미가 더욱 커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윤은 연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그를 더 존경하게 되었다.
윤은 전전 회사 측에 스카우트된 상황이었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고 나니 ‘이 바닥 좁은 거’ 잘 알고 계시던 김 편집장은 진작 사고 하나 크게 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다. 급변하는 상황에도 늘 용기를 주는 청건 덕에, 그리고 재편된 사원들의 따뜻한 인정 덕에 윤은 마음 편하게 현장에서 손을 풀 수 있었다.
청건의 연인으로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윤은 각종 중대형 소속사와 셀럽들에게 수시로 연락을 받았다. 사진 일을 하는 것을 밝힌 적도 없었는데 이미 윤에 대한 모든 정보를 꿰찬 그들은 지속적으로 협업 의사를 밝혔다.
사실 남의 밑에서 일을 하는 것보다 직접 작업을 도맡는 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좋으니 윤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윤은 제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면서 정중하게 그들의 청을 거절했다. 청건과 새미가 그런 결정을 두고 볼 위인들이 아니라는 게 변수였지만.
둘은 베타 파티-정확히는 ‘베타 알파 파티’- 여섯 명과 이번 사건에 도움을 준 지인들을 싹 끌어모아 윤에게 촬영을 하나씩 맡길 것을 부탁했다. 그들과의 협업을 이번 일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만 여기던 윤은 그들의 SNS에 동시에 올라온 촬영 사진을 뒤늦게 보곤 질겁했다.
결국 그 일을 시작으로 직장을 나와 조금씩 출사를 다니던 윤은 작업량이 많아지자 자연스레 팀을 꾸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고민에 케이 팝 러버 선현재, 소개팅으로 청건을 처음 인식하게 해 주었던 최현, 그리고 소라가 단박에 그의 팀원이 될 것을 자청했다. 그 후 매번 스튜디오를 빌려 콘셉트에 따라 꾸미고 철수하는 일련의 과정에 한계가 오자 윤은 서울에 직접 스튜디오를 차렸다.
윤의 촬영물은 각종 매체에서 극찬을 받았다. 윤의 작품을 찬미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당사자는 주변인에게 공로를 돌렸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그의 타고난 재능과 감각을. 번 돈의 일부를 보육원에 기부하며 어쩌다 보니 청건의 행보를 따라가게 된 윤은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의 과한 칭찬이나 이유 없는 비난 등에 무던해지고 단단해졌다.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작업했다.
피사체 본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줄 것.
“결과물 너무 기대되네요. 이런 촬영은 정말 처음이라. 이건 별건 아니고, 작가님 선물이에요.”
촬영 후 살짝 들뜬 분위기가 유지되는 중, 작업을 함께한 배우가 와서 윤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윤이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광고하는 브랜드니 부담 없이 받으라며 고가의 재킷을 선물했다.
“시간이 넉넉했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해서 어떡하죠.”
윤은 면목 없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다음에 또 저랑 작업하면 되죠? 얼른 가 보세요. 저 작가님 원망 듣기 싫어요.”
외려 윤을 재촉하는 모델에 난감해하던 윤은 결국 곁에 놓아둔 외출용 신발로 갈아 신었다.
“다들 미안해요.”
“윤 씨 이러고 있는 게 우린 더 불편하다니까?”
“늦겠어요, 빨리 가세요! 빨리!”
최현과 소라가 윤을 출입구 쪽으로 마구 밀었다.
“조심히 갔다 와, 우 실장. 제발 우리한테 신경 좀 끄고. 어련히 잘 할까.”
윤과 공동 대표인 현재가 외투와 가방을 챙겨 주며 출입문을 열었다. 그들에 의해 거의 떠밀리듯 밖으로 나가던 윤이 문손잡이를 잡으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음식 넉넉하게 시켰으니까 꼭 다들 식사 마치고 가세요. 아시겠죠?”
“우리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요. 알아서.”
그들은 거듭 당부하는 윤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며 문을 닫았다. 얇은 코트를 입은 윤은 유리문 안에서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마주 인사하고는 얼른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정신없이 내려가다가 잠깐 발목을 삐끗했지만 금세 중심을 잡고 1층 건물 문을 젖혔다.
윤은 건물 앞 횡단보도 앞에 서서 불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지구가 열심히 돌아가는 손목시계가 촉박한 시간을 알렸다. 택시 정류장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는 중 그가 선 곳 주변으로 차 한 대가 급히 정차했다. 종영의 개인 차량이었다.
“형 빨리 타요!”
조수석 창문을 열고 소리치는 종영은 혼종에 가깝던 말투가 싹 고쳐져 있었다. 윤은 안도의 숨을 터뜨리며 차 문을 열었다. 별로 뛰지도 않았는데 헐떡이던 윤이 차에 올라타며 침을 꼴깍 삼켰다.
어느새 눈썹 밑까지 앞머리가 자란 종영이 새 물병을 까선 그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물병을 잡고 마구 들이켜던 윤이 바뀐 신호를 보며 팔을 쭉 뻗었다.
종영아, 신호 바뀌었어!
공항으로 가는 내내 초조해하던 윤은 도착지에 오자마자 차에서 급히 내렸다. 종영에게 짧은 인사를 하고 공항에 들어왔다. 그의 베이지빛 트렌치코트가 바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결을 그리며 팔락였다.
마침내 북적이는 사람들 끝에 선 윤은 기자들과 팬들로 둘러싸인 안쪽을 까치발로 확인했다. 청건과 대혁의 모습이 언뜻언뜻 스치는 듯했다. 비행시간이 다가와 이동하는 청건을 따라 인파가 우수수 쓸려 갔다. 윤은 뒤에서 더 붙어 오는 사람들에 밀려 휘청였다.
다시 초겨울이 왔다. 그리고 청건은 앞으로 10개월 동안 미국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보다 그를 배웅하는 인원이 많았다.
윤은 서서히 보폭을 줄였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 순간만큼은 청건의 팬들에게 그를 오롯이 배웅할 시간을 양보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내 멈춰 선 윤을 뒤에 두고, 모든 인원이 앞으로 나아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 윤은 코를 작게 훌쩍였다. 조금만 추운 기색을 보이면 자신의 맨손에 입김을 불어 넣어 주고, 손난로를 몇 개씩이나 챙겨 주던 청건이 당장 옆에 없으니 조금 더 추운 것도 같았다.
청건을 처음 본 후로, 어느덧 1년 반이란 시간이 지났다.
사실 불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멀리 떨어지고서도 우리는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음에도 똑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볼 수 있을까. 누군가 특별하다 여길 우리도 결국엔 보통의 인연일 텐데.
하지만 윤은 그와 만나는 내내 깨달은 것이 있었다. 어떤 파도에 휩쓸려도 결국 우리는 나아가야 할 곳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거. 또한 모두 사라지고 주변이 폐허가 되어도 제 옆에는 언제나 그가 남아 있을 거라는 것도. 그래서, 앞으로도 같을 것임을 안다. 원래 우리의 자리가 서로의 옆인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때, 고요에 싸여 있던 귓속으로 순식간에 세상의 소음이 밀려 들어왔다. 비명과 환호, 수십 대의 카메라가 뱉어 내는 셔터 소리. 윤은 살아 있는 듯한 소음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청건이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가로지른 길이 무너지지 않도록 경호원들이 일렬로 서서 인파를 버텨 냈다. 이내 윤에게 다가선 청건은 추위에 붉어진 볼을 향해 따뜻한 손을 뻗었다.
“왜 여기에 있어, 윤아.”
못 오는 줄 알았어.
분명 소음에 파묻힌 목소리인데, 이 시끄러운 곳에서도 윤은 그의 소리만이 가장 선명했다.
수백의 사람들이 빠짐없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모든 이의 시선이 쏠려 있는 이 순간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윤은 청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 비행기 타려 했어요. 내가 끼면 너무 복잡해질 테니까, 팀한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드라마에 가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청건과 함께하는 여배우가 아닌 제가 차지하는 상황을 윤이 달가워할 리 없었다. 청건은 그 마음을 다 아는 듯 윤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는 사뭇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너 내 애인이라 미국 가는 거야?”
“……아뇨.”
“그래. 퍼스트 어시로 가시는 거잖아요.”
“그래요. 이제 같이 동고동락할 사이에 민폐가 어딨어!”
그들 뒤에 있던 이가 얼굴을 불쑥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탈 많았던 초연 역을 맡게 된 표지연이었다. 멀리 서 있던 대혁도 윤이 부탁했던 캐리어를 공중에 번쩍 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리고 가까이 온 지편성 감독이 윤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보네요.”
“네, 안녕하세요.”
“퍼스트를 당일에 보는 건 처음인 거 알아요?”
“우윤 씨가 우리 중에 제일 바쁘시잖아요.”
지연의 말에 감독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 잊은 게 생각난 듯 박수를 한 번 쳤다.
“그건 그렇고 이러다 비행기 뜨겠어. 일단 얘기는 가서 하죠, 가서.”
헐레벌떡 뒤돈 편성이 들고 있는 종이를 허공에 크게 휘두르며 우글우글 모인 촬영진과 함께 움직였다. 우리 팀 시너지 기대되는데요? 함박웃음 지은 지연이 빨리 가자는 듯 손을 흔들곤 앞으로 걸었다.
사람들이 북적북적 소란스럽게 흩어지자 나직하게 웃던 청건이 말했다.
“나도 기대된다. 우리 두 번째 겨울은 어떨지.”
청건이 차게 언 손을 따뜻하게 잡아 왔다.
“돌아올 때면 세 번째 가을이겠네요.”
윤의 대답에 그는 잡은 손을 풀 수 없도록 깍지를 꼈다. 웃음 지은 윤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청건을 따라 갈채 같은 셔터음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보폭을 맞추는 둘 위로 반짝거리는 플래시가 쏟아졌다. 커다란 공항 벽을 이루는 유리창 밖으로 하얀 눈이 날렸다. 새로운 겨울을 맞이하는 첫눈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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