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2)화 (2/130)

02화

“니키엘, 얘야. 너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남편감을 골라야 할 것 아니니?”

“뭐요?”

궁중 예의는 물론이고 여염집 아들이 아비에게도 하지 않을 막돼먹은 언사에 시종들과 부왕이 헉, 하고 놀란 와중에도 니키엘은 제가 들은 말을 의심해야 했다. 시집이라니.

육군 병장 말기로 제대한 내가 이세계에서는 시집을 가야 한다? 그것도 남자 몸으로?

안 해, X발. 니키엘은 한 번 더 로그아웃을 시도했다. 대리석에 이마를 꽝 박고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효과는 굉장했다.

“즈언하, 다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요. 차라리 이놈을 죽이십쇼!”

시종 폴은 완강하게 말했다.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니키엘이 대리석 벽에 이마를 박고 기절한 탓에 보필하는 시종 주제에 왕자를 지키지 못했다고 호되게 문책당한 폴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전하의 몸은 전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상기하시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를 필사하십시오!”

폴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소설 속 왕국 오시니스의 주교, 태양신의 성전이었다.

소설 속으로 들어오기 전 불교 신자였던 니키엘은 저처럼 이마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폴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종교의 다양성을 주장하며 남의 집 종교 경전을 무시하기에는 폴의 얼굴이 험악했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연대 책임으로 나까지 얼차려받았잖아. 라고 말하는 내무반 후임의 비난을 무언으로 받고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흘, 아니 벽에 머리를 박고 일어나기까지 나흘이었으니 그 시간 동안 니키엘은 어느 정도 현실 부정을 마무리한 참이었다.

저 때문에 문책당하느라 덩달아 이마가 깨진 폴의 노고를 보며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현실 부정이나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헉, 쿨럭-!”

다시 한번 각혈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몸뚱어리인지 매번 피를 토하고는 했다.

폴은 안쓰럽지만 어쩔 수는 없다는 얼굴로 설명했다.

“전하께서 갖고 계신 신성력이 인간의 몸에 담기에는 너무도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주기적으로 외부로 배출하시는 것이 좋은데 지금은 혼례도 올리지 않으셨으니….”

신성력이랑 혼례랑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신성력을 왜 내 몸에 담아. 나는 불교 신자인데. 봉은사에서 받은 법명도 있다고!

니키엘은 따져 묻고 싶었으나 피를 튀기느라 바빠 묻지도 못했다.

기침이 잦아들었을 때는 기운이 빠져 신성력과 혼례의 상관성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저 소설과 제가 겪는 일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생각뿐이었다.

니키엘이 읽은 소설 <산스브리안의 금 가지>에서 니키엘은 이렇게까지 약하지 않았었다.

범인보다 강하지는 않았으나 병이 없는 평범한 몸으로 태어나 영웅들을 만나 신체를 단련하고 숨겨졌던 재능을 발견하는 전형적인 무협 소설이었으니까.

그러나 ‘진짜’ 니키엘의 몸은 달랐다. 참새랑 맞다이를 떠도 필패하여 참새를 형님으로 모셔야 할 정도로 허약했다.

‘그게 꿈이 아니었나?’

니키엘은 제가 꿨던 꿈에 대해 생각했다. 원작과는 미묘하게 다른 꿈에서, 니키엘은 저와 모험을 떠날 소설 속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꿈속에서 그들의 태도 자체가 주군을 모시는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살짝 이상하기는 했다. 그보다는 좀 더….

니키엘은 꿈을 떠올리다 말고 미간을 찌푸리며 폴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 바마마께서도 결혼 얘기를 하시던데 무슨 혼례를 말하는 거야.”

“오, 솔리우스시여! 전하께서는 대리석에 이마를 박고 기억 상실이라도 하신 겁니까. 왜 그런 질문을….”

니키엘의 기침을 멎게 하기 위해 화로에 물 주전자를 올려 두고 있던 폴이 심드렁하게 말하다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니키엘을 돌아보았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니키엘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채 폴을 본 순간이었다. 폴이 떨리는 목소리로 니키엘에게 물었다.

“설마 정말로 실성이라도 하신 겝니까?!”

미쳤냐고 대놓고 묻는군. 니키엘은 어이가 없어, 실성은 무슨…. 하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아니, 잠깐만. 차라리 실성해 그간 기억이 온전치 않다고 속이는 것이 이 멍청이 같은 세계 속에서 정보를 얻기에 빠르지 않을까?

니키엘은 잠깐 멈칫했다가 바로 이마에 손을 대고 쓰러지듯 침대 위에 손바닥을 짚었다.

은하수에 푹 절여 둔 실로 짜낸 것 같은 백금발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니키엘을 보다 가련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니키엘은 그저 아픈 척을 해 보려 한 것이지만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우수에 젖어 버리는 제 외모를 우습게 본 것이다.

“…드문드문 기억이 나지 않는군.”

제 외모가 주는 효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니키엘은 말을 내뱉고 나서도 이런 형편없는 연기가 다 있나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효과는 굉장했다.

“어쩐지! 평소처럼 저를 발로 차거나 말에 묶어 땅에 끌기는커녕 이마의 상처까지 걱정해 주시더니! 기억이 온전하지 않으셔서 그러셨군요!”

…뭐? 발로 차? 말에 묶고 땅에 끌려다니게 했다고? 얼마나 말종이었으면 기분 좀 나쁘다고 시종을 쁘띠 거열형에 처한단 말인가.

포더피플바이더피플오브더피플이 표방하는 민주주의에서 살아온 니키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들이었다.

어쩐지 폴이 저를 시험이라도 하듯이 시종이 왕자에게 하기에는 예의 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한다 했더니….

폴은 호들갑을 떨며 왕궁의를 데려왔고, 니키엘은 기억이 나지 않네, 기억이 없네, 기억이 희미하네. 와 같은 말로 돌려 막아 의사로부터 기억 장애를 겪고 있다는 진단을 이끌어 냈다.

“아마 이마를 부딪치셔서 그런 듯한데…. 이것에는 시간이 약인지라…. 다행인 점은 전하께서 모든 기억을 잃으신 것은 아니고 사람들의 얼굴이나 그에 대한 정보 중 일부분만 기억하고 계신 듯하니 금세 기억이 돌아오실 겁니다.”

왕궁의는 응, 너 또 망나니짓했구나, 하는 얼굴로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폴의 태도에서 언뜻 엿볼 수 있었던 니키엘은 궁의의 말과 행동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왕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구원자’라는 이름을 받기에 몸의 주인은 너무도 망나니처럼 살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한숨을 내쉰 니키엘은 궁의를 향해 말했다.

“자네는 지금 소견을 국왕 폐하께 소상히 알리도록 하게. 내 정신이 미령한 상태라고 말이야.”

“…….”

궁의는 너 또 무슨 망종 짓을 하려고. 하는 눈으로 흘끗 니키엘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는 꼴이 무례하기 그지없었으나 니키엘은 괘념치 않았다.

그보다 이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먼저였다. 정신이 미령한 핑계를 대고 니키엘은 칩거했다.

그동안 수집해 온 정보에 의하면 니키엘은 역시 원작과는 미묘하게 다른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이 세계는 원작 속 설정처럼 태양신을 모시는 것을 국교로 세운 채 흑마룡 ‘나시우’를 그들의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흑마룡 ‘나시우’는 초대 왕을 지키고자 출정한 네 가문, 발트, 볼트윅, 그리프, 투르운에 의해 처단되지만 태초의 밤에서 태어났다는 순수한 어둠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짐승으로 만드는 저주를 내린다.

이러한 저주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짐승으로 변하는 아이를 가문의 수장으로 내세우고는 했다.

그러나 초대 수장들을 제외하고는 당대에 네 가문 모두에서 짐승으로 변하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당대의 발트 가문에서 짐승으로 변하는 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머지 세 가문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짐승으로 변한 아이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초대왕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왕가의 아이, 초대 왕의 백금발과 청안이 그대로 유전된 아이였다.

때문에, 왕가의 아이가 여아건 남아건, 당대의 짐승으로 변한 이의 가문과 혼례를 맺어 흑마룡이 새긴 저주를 다스리는 온정을 베푸는 것이 가능했었다.

그렇게 오시니스를 지탱하는 네 기둥, 발트, 볼트윅, 그리프, 투르운은 가문의 수장들은 왕손과 결혼하여 오시니스 왕국에 절대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저 모험을 떠나는 소설이었던 <산스브리안의 금 가지>와는 전혀 다른 설정이 숨겨져 있었다.

니키엘은 부정했다.

“장난해? 남자가 어떻게 남자랑 결혼을 하냐고. 애는 안 낳아?”

“주신 솔리우스의 은혜로 전하께서는 수태하실 수 있는 옥체이시옵니다.”

뭐, X발? 육군 병장 제대에 이제 민방위만 남은 대한민국 건아가 웬 임신을 하는 건데.

니키엘은 부정했지만 설명하는 폴의 얼굴은 신을 향한 아가페적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망 나간 신 하나가 귀한 장손을 임신시키다니! 먼저 가신 부모님이 아셨으면 아이고, 하며 태양신인지 태양열 보일런지 하는 놈의 머리끄덩이를 잡을 일이었다.

하지만 니키엘은 간신히 수긍했다. 일단 제가 이 세계로 빨려 들어온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임신 정도야 가볍게 생각하려고 노력을.

“미친 거 아냐?! 임신이라니! 이 염병할 태양신!”

“허억! 니키엘 님! 그게 무슨 망언-!”

니키엘은 마인드 컨트롤에 실패했다. 분노한 니키엘은 침대 옆 콘솔 위에 있던 화병을 던지려다 참았다. 금박이 입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침대보를 찢으려다 참았다. 이 세계에서는 최고로 치는 아신카 누에나방의 고치로 짠 실크 침대보였기 때문이다.

의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아로 뼈대를 만든 의자는 니키엘의 석사 시절 월급 세 달치 보다 비싸 보였다.

“익-!”

소시민으로 살아온 탓에 던지거나 찢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니키엘은 결국 주먹으로 침대를 쳐 댔다. 급작스러운 분노에 유리 같은 몸이 놀란 것인지 또 한 번 각혈이 시작되었다.

“전하!”

폴이 그런 니키엘의 모습에 놀라 달려오던 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서릿발처럼 생긴 미남자가 니키엘의 방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온 것이었다.

니키엘은 놀란 눈을 크게 떴고 폴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좀 더 빠르게 정신을 차린 것은 시종의 쪽이었다.

“니키엘 님, 율란 발트 대공이십니다.”

폴은 피를 토한 나머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던 니키엘에게 속삭였다. 니키엘은 ‘쟤가?!’ 하는 눈으로 폴을 보았고, 폴은 ‘응, 쟤가.’ 하는 눈으로 화답했다. 주종 사이에 모자란 부분 없는 비언어적 의사소통이었다.

니키엘은 다시금 제게 걸어오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꼭 새벽 밤을 저며 놓은 것처럼 검디검어 도리어 청색으로 보이는 머리를 한 남자는 니키엘의 빈약한 덩치에 약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몸을 갖고 있었다.

왕을 알현할 때 입는 예복도 아니고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가 수놓아진 검은색 케이프만 입고 있는 차림이었지만 그이가 아니라면 누가 귀족이냐 물을 정도로 위엄 있는 생김새였다.

저 남자가 율란 발트라고? 니키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율란 발트에 대한 원작 묘사를 떠올렸다.

‘율란은 왕의 충직한 송곳니였다. 그는 한번 정해 둔 사냥감을 놓치는 일이 없었으며 밤하늘 같은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의 미남자로 그의 외모와는 동떨어진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고는 했다.’

…음, 이런 부분만 원작 설정을 따른다고?

니키엘은 제가 읽었던 구절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합하는 발트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길거리에서 연예인이라도 본 기분이었다.

눈이 맑게 개는 그런 느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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