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화
니키엘은 이 ‘몸’의 심각한 문제를 깨닫고 가장 중요 순위부터 나열해 보았다.
1. 넘치는 신성력으로 인한 잦은 각혈.
“전하! 피가 나는 것을 뱉지 않으시면 숨이 막혀 큰일이 나실 수 있다니까요!”
“아, 젠장. 피 뱉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귀찮아 죽겠네, 염병.”
“…입 험하셨던 건 기억을 찾으신 모양입니다?”
2. 수틀리면 밥을 굶어 버려 다 헐어 버린 위벽과 만성 위염.
“헬리코박터 파이로리 균이 문제인 것 같은데. 여기는 요구르트 아줌마도 안 오고….”
“네? 요구울 아줌마요? 구울이라면 시체 요괴가 아닙니까! 어디, 어디서 보셨어요! 전하 빨리 제 뒤로 숨으세요!”
“…장하다, 우리 폴. 말은 숨으라고 해 놓고 제일 먼저 줄행랑을 치는구나.”
3. 영양 불균형 섭취로 인한 만성 피로와 상당히 낮은 근력.
“아니, 화병 하나, 후욱, 드는데, 헉, 이렇게 힘이 든다고?”
“전하께서는 꽃보다 무거운 건 절대 들지 않으셨어요. 다시 말하자면 책도 드신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요.”
“뭐? 내가 그렇게 빡대가리라고?!”
그리고 가장 심각한 부분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이었다.
“하, 짜증 나네. 얼마나 거지 같이 살았길래 우울증이 이렇게 심한 거야.”
니키엘이 처음 우울증을 자각했을 때, 그는 자신이 갑작스레 이세계로 건너와 버리는 탓에 지금까지 쌓아 두었던 모든 커리어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울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싫은 것은 빨리 잊어버리는 니키엘의 성격 치고 우울이 오래간다 싶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니키엘은 제가 무기력증도 앓고 있는지를 자문했다. 대답은 ‘그렇다’였다.
니키엘의 신체가 갖고 있던 수많은 질병 중 하나인 것이다. 니키엘은 늘 그렇듯이 해답을 찾아냈다.
“아니…. 햇빛 쬐면 주근깨 생긴다고 태양은 주신께 예배드릴 때 외에는 절대 안 쬐셨잖아요. 아침부터 이게 무슨.”
“알고 있나, 폴? 건강한 신체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것을.”
“건, 뭐요?”
아침 산책을 나가자고 하니 투덜거리는 폴을 향해, 니키엘은 엄지를 추켜들며 씩, 웃었다. 폴이 화들짝 놀라 니키엘의 엄지를 가려 주었다.
“전하! 이제는 아예 이런 상식까지 잊으셨습니까? 이건 ‘네 애비를 내 노예로 부려 가장 먼저 요강 세척부터 시킬 것이다.’라는 뜻의 욕이라구요!”
“아니, 고작 엄지 하나 들어 올린 거에 그렇게 많은 뜻이 들어가 있다고…? 어쨌거나. 오늘부터 나는 새사람이 될 거란다, 폴아.”
문화권이 달라서 그런가 코리안 남바완, 하며 엄지를 추켜드는 것을 좋은 뜻으로 봐주는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크나큰 욕이 되는 듯했다. 그래도 그렇지, 애비를 뭐? 욕 한번 구체적이네.
어쨌거나 가벼운 차림새의 니키엘은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폴이, ‘아이고, 아이고, 오늘도 또 시종들이나 입을 법한 차림으로 밖을 나다니시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은 무시한 채로.
니키엘에게는 이 산책이 아주 중요했다. 일조량이 충분한 아침 7시 반부터 8시까지 가벼운 산책으로 세로토닌 생성을 유발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평생을 ‘진짜’ 니키엘 옆에서 그를 보필한 폴은 대경실색했다.
“전하, 진짜로 산책을 하시겠다구요? 마차를 타시는 게 아니라…? 기사에게 업힌 상태로 걸으시는 것도 아니고…?”
“어허, 나오거라. 두 발이 멀쩡한데 왜 유난이야.”
“전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기억이 돌아오신 뒤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되면 어쩌시려고 이러세요. 한 번 생긴 기미는 궁내 처장의 도망간 머리숱처럼 돌이킬 수가 없다고 그러셨잖아요!”
니키엘은 무시하고 걸었다. 어떻게든 이 우울증을 걷어 내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그 후로도 균형이 맞는 일정량의 식사를 제시간에 섭취하고 매일 같이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 동안 산책을 한 뒤 오수에 들었다.
운동을 충분히 하고 수분 섭취를 늘리며 직접 짠 운동 프로그램으로 근육량을 늘려나갔다.
연구소에서는 며칠 밤을 샐 때도 많았기 때문에 자투리 시간에는 운동을 꼭 해 줘야 몸이 아프지 않았었다.
다년간의 운동 경험은 따로 봐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최약체 니키엘을 약체 정도의 몸으로 탈바꿈시켜 주었다. 딱 한 달 만에 이룬 쾌거였다.
“전하, 오늘은 세신부터 하셔야겠습니다.”
“왜. 나 운동 전에는 안 씻는 거 알잖아. 두 번 씻어야 되어서 불편하다고. 자네가 그렇게 울부짖는 피부 미용에도 안 좋은 일이지.”
“그게 아니라, 본궁에서 폐하의 시종이 직접 왔습니다. 폐하께서 전하와 아침을 함께 하고자 하신답니다.”
“뭐?”
일어나 눈도 뜨기 전에 청동으로 된 거울 앞에서 제 몸을 비춰 보며 근육량이 얼마 증가했는지를 보고 있던 니키엘은 놀라 폴을 돌아보았다.
아니, 기억 상실 걸렸을 때도 괜찮냐, 발걸음 한 번 없던 사람이 웬일로? 평소 니키엘이 즐겨 먹던 술 한 병을 들고 시종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게다가 아픈 이에게 술이라니. 너 아파서 기쁘다고 팡파르를 울리는 것과 다름 없지 않은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이기에는 다소 냉정한 처사였다.
니키엘은 그래서 다소 안심한 상태였다. 소설 속 인물에 빙의되기는 했어도 다른 사람들이 다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니 ‘진짜’ 니키엘도 육신과 혼이 있는 보통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몸을 차지하고 앉아서 니키엘인 척 굴며 그의 아버지 앞에서까지 아들 행세를 해야 한다니.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근데, 진짜 니키엘은 어디를 간 걸까? 설마 이 자식 밤에 손톱 깎아서 아무 데나 버린 거 아니야? 내가 니키엘의 손톱을 먹은 쥐일 수도 있잖아?’
그럴 듯한 추론이었다. 진짜 니키엘은 손톱 잘못 깎은 죄로 제게 몸을 내주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어휴, 쓰레기 무단 투기하는 놈이 잘못이지. 그걸 먹은 쥐 잘못이냐?’
어느새 쥐의 입장이 되어 사람으로 둔갑한 요괴 쥐를 옹호하는 동안, 유능한 시종 폴은 지난 한달 간 자기 치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니키엘을 욕간통에 앉혀 두고는 갖은 짓을 일삼기 시작했다.
향유 병을 잔뜩 들고 와 니키엘이 들어가 있는 욕간 통에 들이붓기 시작한 것이다. 빠르게 퍼져나가는 꽃향기에 니키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나 너무 좋은 냄새 나는 거 아냐? 이게 무슨 꽃향기야.”
“이 꽃은 아노나닐랑이라고 하는 꽃이옵니다. 뭇 사람들을 매혹하는 힘이 있어 전하께서 즐겨 쓰시던 향유이옵니다.”
니키엘은 기가 막혔다. 아버지 뵈러 가는 길에 최음 효과가 있는 꽃의 향유를 들이붓다니.
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니키엘은 이것이 폴의 뜻이 아닌 니키엘의 평소 목욕 방법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된 놈이 제 아버지 뵈러 갈 때도 이렇게 유혹적인 향유를 쓰는 거야. 이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슬슬 피하지. 나 같아도 십 리 밖에서부터 줄행랑을 친다.
삼강오륜에 절여진 뇌로는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됐어. 이제 이 향유는 안 쓸 거야. 다른 향은 없어?”
“다른 향이라면…. 전하께서 한 번 쓴 뒤 찾지 않던 것이 남아 있기는 한데….”
“그건 무슨 향인데.”
“그저 연꽃 향이옵니다. 몹시 단조롭다하여 평소에는 쓰지 않으셨사옵니다.”
“그걸로 가져와.”
“헉, 하지만 연꽃 향은 누굴 유혹하기에는,”
“폴아, 미쳤느냐. 지금 뵈러 가는 게 아바마마 아니니? 아바마마를 유혹해서 대체 어디에 쓰라는 건데.”
“앗, 넵. 알겠습니다.”
평소에는 빠릿빠릿하게 말을 잘 들으면서도 이런 때의 폴은 묘하게 비상식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마 폴을 수족으로 다루는 니키엘이 다분히 비상식인이었기 때문이겠지.
‘손톱 깎아서 아무 데나 버릴 때부터 알아봤다.’
‘진짜’ 니키엘이 손톱을 깎아 함부로 버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는 확신했다.
왕자의 침실 바로 옆에 딸린 고급 욕실을 후다닥 뛰쳐나갔던 폴은 연꽃 향 향유를 들고 돌아왔다.
이미 물이 가득 찬 곳에 아노나닐랑 꽃 향유를 푼 터라 어쩔 수 없었지만 따뜻한 물에 향유를 개어 수건에 적신 뒤 몸을 닦게 했다.
니키엘이 그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말하자, 폴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때문에 니키엘은 제 손으로 몸을 닦는 일은 포기해 버렸다.
그동안의 목욕은 니키엘이 알아서 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등목에 가까운 물 뿌리기였기 때문에 간만에 목욕은 꽤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폴은 니키엘이 오랜만에 제게 목욕 시중을 들게 한 것이 서운한 듯했다. 투덜거리기는 해도 니키엘을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다. 아예 외 알 돋보기안경까지 쓴 채로 니키엘의 손톱을 깎아 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전하께서 천둥벌거숭이처럼 이렇게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다니실 줄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손톱은 아무 데나 버리지 말고 꼭 태워 버리렴.”
“그 정도는 아니라뇨. 거의 마구간지기와 다름이 없으셨습니다요.”
니키엘은 그저 아침이면 일어나 산책을 하고 대충 양치나 한 뒤 밥을 먹고, 이 세계의 역사서나 상식 책들을 읽은 뒤 서킷 트레이닝을 했을 뿐이었다.
정원에서 산책한다던 왕자가 1분가량 물병을 들었다 놓더니 또 옆으로 옮겨 줄넘기도 하고, 또 1분이 지나면 투명한 의자에 앉는 듯한 동작을 매번 해 대니 폴은 그것을 매일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는 동작들이 하나같이 해괴망측한 탓도 있지만, 제가 모시던 왕자는 본디 턱 근육을 움직이는 것도 싫어 포도알조차 즙만 쫍 빨아 먹고 알맹이는 퉤 뱉어 버리는 새침데기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모시는 분이 요즘 들어 전에 없이 안정되어 보이는 데다가 제게 물건을 집어 던지지도 않으니 좋은 게 좋은 건가 싶기도 했다.
게다가 목욕 시중을 들며 깨닫게 된 바로, 니키엘의 몸이 견습 기사처럼 탄탄해졌다는 것이었다.
“폐하가 오늘 전하를 뵈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래.”
연꽃 향유로 적신 뜨거운 수건으로 몸을 돌돌 말고 있는 니키엘의 등을 안마해 주며 폴은 히히 웃었다.
국왕 폐하뿐만 아니라 궁정의 모든 사람이 니키엘의 모습을 보면 너도나도 놀랄 것이었다.
니키엘은 아름다웠으나 꽃대가 얇고 연약한 꽃처럼 바람만 불어도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마물 토벌 대회에는 꼭 나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면서도 니키엘이 혹여나 야영지의 험난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열병이라도 얻어 오면 어쩌나 싶어 걱정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니키엘은 그때와는 딴판이었다. 아직 수여를 받은 기사들처럼 몸이 단단하고 울끈불끈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 견습 기사나 종자들처럼 햇빛 아래에서 잘 자란 건강한 느낌이 들었다.
달빛에 환하게 비춘 듯 특유의 하얀 피부가 갈색 암말의 갈기 색처럼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보다 훨씬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도 아름다운 얼굴에 건강미가 스며들자 광휘가 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전과 가장 다른 점은 니키엘의 태도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