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5)화 (5/130)

05화

‘아이고, 한번 아팠다 일어나시더니 그 이후로는 어쩜 저렇게 늠름하고 헌헌하실까.’

폴은 속으로나마 감탄했다. 전에도 지금도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금의 니키엘은 어딘지 달라 보였다.

다소 신경질적인 표정과 사기그릇처럼 푸를 정도로 창백하던 병약한 낯은 근래에 생기가 돌아 옅은 장밋빛으로 물든 뺨을 하고는 했다.

몸이 원채 미령하고 기운이 없어 내내 굽어지던 허리가 자연스레 펴지고 앞으로 쳐지던 어깨 역시 당겨져 자세가 곧고 당당해 보이기도 했다.

또한 태도 역시 그 전까지의 신경질적인 기색 없이 무덤덤하고 큰물이 동요치 않는 듯 대범해진 구석이 있었다.

며칠 전 일이었다. 사람을 가리는 니키엘 때문에, 또 왕의 마지막 아들이자 ‘구원자’로 점 찍고 태어난 덕분에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부리는 시종이 폴밖에 없었다.

왕자궁 전체로 보면 배속된 궁인들이 많은 편인데 지밀하게 두는 것은 폴뿐이었다. 때문에 폴은 따로 식사 시간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그냥 니키엘의 수발을 들다가 요기를 하거나 가뭄에 콩나듯 비번을 맞이하면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기만 할 뿐이었다.

‘근데 자네는 대체 언제 자고 밥은 언제 먹는 거지?’

‘네?’

‘늘 내 곁에 있는데 식사는 언제 하냐고 묻는 거야.’

폴은 니키엘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나 싶어 그의 안색을 세밀하게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니키엘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폴은 제가 모시는 왕자 전하께서 제 끼니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부리는 시종의 끼니를 살피다니. 기억을 잃기 전의 니키엘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앓아누워 정신을 잃기 전, 니키엘은 저보다 신분이 낮은 이에게 패악 부리는 것을 하루의 낙으로 여기며 살았었다. 몸이 약하고 늘 아프니 짜증이 많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니키엘은 정도가 심했었다.

시종 견습의 견습도 못 되는 어린 종 하나가 향유를 잘못 가져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물볼기 마흔 대를 내리지 않았었나.

그뿐이랴, 패악이 그저 궁인들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서 어느 집 영식은 니키엘에게 이유도 없이 따귀를 맞았다더라, 어느 집 레이디는 욕설과 함께 드레스 뒷단에 달린 리본이 뜯겼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고는 했다.

소문은 무슨. 그건 다 사실이었다. 그때마다 폴이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해 그저 소문일 뿐이다, 하며 위장하지만 않았어도 니키엘의 평판은 지금보다 30배는 더 나락 행일 것이었다.

달라진 점은 또 있었다.

“뭐 하는…? 아, 됐어. 안 입어. 왜 이렇게 하나같이 화려해. 난 폴이 지금 입고 있는 옷 같은 걸로 입을래.”

“…이건 시종 옷입니다요, 전하.”

세상 공작새처럼 화려한 깃털 뽐내기에만 열을 올리던 사람이 옷을 다 마다하고 궁인들에게 보급되는 시종 옷이나 입겠다는 것이 아닌가.

폴은 황당했다. 니키엘이 침실로 쓰는 옆방은 그의 드레스 룸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시종 열 명 정도가 붙어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들을 잔뜩 들고 와 일렬로 선 채로, 니키엘에게 보여 주고는 허락의 말이 내려질 때까지 패션쇼라도 하듯 빙글빙글 돌지 않았던가.

지밀 시종은 저 하나로 제한했으면서도 옷 담당 시종들은 열 명을 부리는 것이 니키엘이었다. 그런데 뭐? 화려한 건 못 입겠다고? 폴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현기증이 오는 기분이었다.

니키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폴의 심장이 뚝 떨어질 말만 했다.

“어휴, 눈 아파. 왜 이렇게 휘황찬란해. 이러고 폐하를 어떻게 뵈러 가. 다들 내가 왕인 줄 알겠다.”

“전하…!”

폴은 니키엘의 불경한 말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머리를 만져 주는 폴의 손길에 아마빛 백금발을 맡긴 채로 꾸벅꾸벅 졸기 바빴다.

평소 단장을 할 적에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해 폴을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시키던 전하가 아니시던가. 폴은 기함했다. 무례도 잊은 채, 님은 대체 누구신가요, 하고 물을 뻔했다.

“그만해. 무슨 머리를 하루 종일 만져. 나중에 다 싹둑 잘라 버릴 거야. 남자가 머리카락이 왜 이렇게 길어.”

“저, 전하, 머, 머리카락은 전하의 생명과도 같은…!”

게다가 머리까지 자르시겠단다. 폴은 기절할 것같이 놀라 숨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쩌다가 머리카락 한 올의 끄트머리가 갈라지기라도 하면 벌꿀과 계란 흰자, 열대 과일인 보나나를 으깬 것과 향신료의 일종인 귀한 계핏가루를 섞어 만든 냄새 고약한 죽을 머리에 바른 채 두세 시간을 말린 뒤 감지 않았던가.

머릿결이 좋아진다는 그 특유의 고약한 죽은 이미 왕궁 밖에까지 유명해져 귀부인들이 모조리 따라한다는 그것이었다.

그런데 뭐…? 머리를 자른다고? 기억을 잃었지 눈을 잃은 것은 아닐 텐데 저 멀리서도 맑게 빛나는 황홀한 백금발을 자른다니….

“그, 그럼 자른 머리 저 주세요, 가발로 팔면 수억 킬리를 벌 수 있…. 아니, 이게 아니고, 아니 되옵니다, 전하-! 그게 어떤 머리카락인데요…!”

잠시 이성을 잃었던 충직한 시종 폴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아니 된다고 했지만 니키엘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대로 거울 앞에서 일어나 어디 처박혀 있던 건지도 모를 검은색의 수수한 옷을 꺼낸 것이다.

“이거 입고 갈래.”

“허억-!”

오늘은 폴의 턱이 시시각각으로 헐거워지는 날인 듯했다.

물론 안목 높고 사치를 밥 먹듯 일삼았던 니키엘의 옷이니 수수하다고 한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신카산 비단으로 만든 검은색 드레스 셔츠는 직물이 아주 얇고도 옷감이 성겨 입은 사람의 속 안이 비쳐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했다.

역시 같은 아신카산 실로 짠 레이스가 셔츠의 어깨 부분에 아름답게 직조되어 늘어져 있었고 단추는 오시니스의 가장 큰 강인 히피바울에서만 나는 담수 진주로 되어 있었다.

바지 역시 같은 색이긴 했지만, 옷감이 성겨 속 안이 비칠 듯한 상의와는 다르게 매끈하고 광택이 돌아 근육이 많은 허벅지를 감싸면 찰랑거리며 빛날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입던 옷에 비하면 누군가의 장례식에라도 가는 듯한 옷이었다. 그만큼 평소 입고 다니던 것이 놀랍도록 화려했다는 뜻이었다.

니키엘은 폴이 놀라거나 말거나 트립티크까지 가지도 않고 방 한가운데서 입고 있던 실내복을 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저, 전하 뭐 하시는-!”

“옷 갈아입잖아. 구두도 아무거나 검은색으로 줘.”

심드렁하게 대답한 니키엘이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바지를 입었다. 광택이 나는 비단 천이 한 달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근육을 조금이나마 키운 니키엘의 늘씬한 다리를 알맞게 감쌌다.

분명 남성복인데도 귀부인의 것보다 훨씬 야하면서도 격조 높게 보이게 했다. 그 모습을 본 폴은 안심했다.

‘아직 눈이 삐신 건 아니었구나.’

다소 불경한 생각을 한 니키엘의 종은 그가 말한 구두를 얼른 가져왔다.

이국풍의 구두는 저 멀리 동방에서 온 것으로 구두 등에 에메랄드와 여러 흑요석의 작은 비즈들을 실로 꿰매어 동대륙에서 유행하는 무늬를 낸 비단 천 구두였다.

밑창만 구두 굽일뿐, 말랑한 신발이라 칼 발인 니키엘에게는 무척 잘 어울리는 데다가 오늘 입은 셔츠의 담수 진주와 어우러져 그를 절세가인으로 보이게 했다.

평소의 신경질적인 기색은 어디 가고 청순을 넘어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누군가의 장례식이 아니라 제 배우자의 장례식에 온 젊은 미망인처럼 처연하고 또 유혹적으로 보였다.

근래에 운동을 열심히 하시더니 꼿꼿해진 자세 덕분에 우아한 인상까지 주었다.

폴이, ‘우리 전하께서는 어찌 저리 아름다우실까.’ 하고 감탄할 때쯤이었다.

“뭐 해. 나 길 몰라.”

“아, 그러셨죠.”

폴은 기분 좋게 앞장섰다.

니키엘은 조금 긴장이 되는 기분이라 호흡과 함께 고개를 모로 젖혀 승모근을 이완시켰다.

‘왕이라….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왕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원작에서 왕이 등장할 때는 니키엘이 모험을 떠날 때나, 모험을 다녀온 뒤 니키엘의 공덕을 치하할 때뿐이었다.

‘그냥 조연인 것 같은데 신경 쓸 필요는 없나.’

니키엘은 목 안으로, ‘흠.’ 하고 울리는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니키엘이라고 이세계에 갑자기 떨어져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니키엘은 열심히 살았던 것치고 원래 세계에 그다지 큰 미련이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더 그랬지.’

나이가 많아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고아가 된다. 이렇다 할 친척도 없던 니키엘은 부모님을 잃고 난 뒤 자신이 부초처럼 떠돈다고 생각했다.

마냥 슬퍼하지는 않았지만, 또 아무렇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가 망가진 채로 그냥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니키엘의 정신은 건강한 편이었고 부모님은 살아 계신 동안 그를 충분히 아껴 주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남들도 다 그만치는 아플 거야, 하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렇게 내면의 상처는 니키엘을 견고하게 만드는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아스라한 물안개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미련이랄 것이 없는 사람도 생존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반응하게 되는 편이다.

‘어차피 죽지 못하고 살아갈 편이라면, 잘은 살아 봐야지 않겠어.’

그것이 현대인 주제에 갑작스러운 세계에 떨어진 니키엘이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이었다.

그러니 왕과의 첫 조우는 중요했다. 왕이 원작에서처럼 그저 조연으로 끝날지, 아니면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서 니키엘의 결혼을 끝까지 밀어붙일 인물인지를 파악해야 했다.

‘결혼을 하라니. 말도 안 되지.’

딱히 비혼주의자인 것은 아니었지만 모르는 사람, 그것도 같은 남자랑 혼인을 하라고 했을 때 ‘암요, 그러겠습니다요.’라고 대답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니키엘은 왕의 의중을 떠보겠다고 생각하며 폴이 열어 준 문을 통해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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