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9)화 (9/130)

09화

“와,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시종이 열어 준 문을 통해 들어온 매지기는 꽤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평생 이런 곳에 불려 올지는 몰랐다는 양 더러운 모자를 벗고 며칠 안 감은 듯한 머리를 숙였다.

그것이 황송하고 감읍한 사람의 모양새라기보다는, ‘내게도 이런 기회가?’와 ‘까다로울 텐데 어떻게 만족시키지?’ 내지는, ‘드디어 내 실력을 보여 줄 때가 왔군. 힘내자, 똘똘아.’에 가까웠다.

머뭇거리는 모양새와 붉어진 얼굴에 니키엘이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릴 때였다. 가만히 누워 있던 새가 츠츠츠 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놀라 돌아보니 매 지기에게 달려들어 발톱으로 조각조각을 내고 싶은 것처럼 버둥거리고 있었다. 말 못하는 짐승의 눈치고는 무척이나 흉흉했다.

…가만히 있던 애가 왜 저래.

니키엘이 놀라 수리에게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종종 마구간지기와도 붙어먹었다고 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매지기가 침실로 불려 들어왔을 때의 생각이 짐작 간 것이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만족시켜야 할 이는 내가 아니라 저 새일세.”

“네? 아니, 그, 아이고, 이놈이 불경하게 감히….”

다행히, 매지기는 생각보다 분수를 아는 이였던 것인지 니키엘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닫고는 놀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왕자의 기둥서방이 되려던 꿈을 좌절당한 매지기는 곧이어 정신을 차리고 침대로 다가가 새를 살폈다.

위협적으로 매지기를 향해 츠츠츠 거리던 새는 저를 살피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금세 얌전해졌다.

그러나 매지기를 노려보는 눈빛만은 꽤 날카로웠다. 마치 니키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라도 하듯이 말이다.

‘똑똑하고 잘생긴 새가 은혜도 아는군.’

니키엘은 흡족했다. 은혜를 갚은 까치 얘기를 떠올릴 정도였다.

검독수리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니키엘의 연구는 포유류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옆 연구실에서는 조류의 번식 생태라든지 조류 및 소형 포유류 군집의 특성을 연구하기도 했다.

아예 모르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생리적인 기전이 아닌 생태학적 기전에 가까웠다. 새의 해부학 구조보다는 그 새가 어떻게 먹이를 잡고 어떻게 짝짓기를 하는가를 연구했던 것이다.

그래도 아예 문외한은 아니기에 새를 조심히 살펴본 매지기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는 수리의 등 뒤에 박힌 화살촉을 조심스럽게 뽑아내고는 상처를 살펴본 뒤, 폴이 준비해 둔 소독 술을 깨끗한 천에 묻혀 상처 부위를 닦아 냈다.

무척 아플 것인데 새는 가만히 니키엘만을 바라볼 뿐 울부짖거나 날아오르려 하지 않았다.

“날갯죽지가 다친 것은 맞지만 뼈가 손상된 것은 아닙니다요. 이 정도면 약초 물로 목욕을 시켜 주고 고약을 발라 주는 것을 며칠 반복하면 되겠습니다. 일주일 정도 후부터는 날갯짓을 몇 번 시켜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요.”

아직 전서구 감독관은 오지도 않았는데 매지기는 훌륭한 진단과 꼼꼼한 치료를 마무리했다.

들어와서 좀 넋을 놓고 불경한 생각을 해서 그렇지, 실력이 모자란 이는 아닌 듯했다. 니키엘은 성희롱범을 용서해 주기로 했다.

그가 치료를 끝내자 새는 쌀쌀맞게 매지기의 손에서 제 날개를 빼냈다. 그리고는 총총 걸어 니키엘 쪽으로 다가왔다. 침대 옆에 서 있던 니키엘을 빤히 보는 것이, 나를 안아. 하고 요구하는 것 같아 니키엘은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조심스레 새를 안아 들었다.

“이 새가 주인이 있는 새 같던가.”

“그건 아닐 겁니다. 매사냥에 쓰이는 종도 아니거니와 사람 손을 탄 흔적이 없습니다. 꽁지깃에 보통 파란색 안료 등을 염색시키는데 이 수리는 깨끗합니다요.”

매지기의 말에 품에 안겨 고로롱거리고 있는 수리의 꽁지깃을 보자 사실이었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 아니, 애초에 사람 손을 탔다고 해도 뜻을 잘 아는 건 아니지.

니키엘은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순진무구해 보이는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저를 빤히 바라보는 흑요석 눈동자에 아무려면 어떠하랴 싶어졌다.

새는 치료가 끝났고 매지기가 나머지 치료에 쓸 약초와 처방 등을 알려 주는 동안 니키엘은 폴에게 전서구 감독관까지는 올 것 없다고 지시한 뒤 매지기에게 포상으로 금화 네 닢을 내렸다.

“아이고, 지당한 일을 했을 뿐이온데…. 감사합니다, 전하.”

매지기는 감읍한 얼굴로 물러가려 했다. 니키엘은 “잠깐”, 하고 그를 다시금 불렀다.

“금화 한 닢은 반납하고 가게.”

“…네?”

“상상 속에서는 이미 나를 벗기고 멋대로 뒹군 듯하니 화대로 받아야겠네.”

“저, 전하-!”

놀란 폴과 매지기가 대경실색을 한 얼굴을 하는데도 니키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어코 매지기의 손안에서 금화 한 닢을 빼앗아 갔다.

품 안에서 새가 끼룩끼룩 거렸다. 꼭 웃는 것 같아 귀여웠다.

그날은 하루 종일 새와 놀았다. 다친 상태이니 소화 기관까지 무리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잘게 다진 염소 고기를 생것으로 주자 꽤 잘 먹었다.

“맛있니?”

새는 어린 참새처럼 또 한 번 구구구거렸다. 꽤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니키엘도 옆에서 식사를 했다. 폴은 어찌 짐승과 겸상을 하시냐며 폴짝폴짝 뛰었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다.

끓는 기름에 다진 마늘과 고추 씨앗을 넣어 만든 기름을 바른 밀전병을 화덕에 구운 것과 저 멀리 이국에서 들여왔다는 향신료로 끓인 스프를 찍어 먹었다.

이곳 음식은 맛있었고 니케일은 지난 시간 동안 원래 먹던 음식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혀와 뇌가 ‘진짜 니키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안동찜닭이나 닭볶음탕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는데 벌써 그 맛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니키엘은 그게 씁쓸하지는 않았다. 그저 먹거리로 고생은 안 하니 다행이군, 하는 짤막한 감상뿐이었다.

외국에라도 나가면 독특한 향신료들 때문에 과일만 먹다 오는 경험을 꽤 했던 니키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건강을 챙기며 살았지만 끼니만은 매일 같이 세끼를 꼬박꼬박 챙기는 것을 힘들어했었다. 바쁘게 지내다 시계를 보면 아침, 점심을 건너뛴 채로 오후 다섯 시가 넘고는 했었으니까.

이곳에서는 폴이 다 챙겨 줘서 좋았다. 밥이 훌륭한 것은 물론이고 후식까지 나오지 않은가. 이런 호사가 더 없었다.

레몬즙과 설탕을 넣고 졸인 사과 콩포트가 후식으로 나와 먹고 있는데 새끼 참새 같이 구구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길래 먹을 테냐 하고 들이밀었더니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이 귀여웠다.

“아이고, 귀여워라…. 다 나으면 형이랑 운동도 다니자.”

니키엘은 새가 놀랐던 것을 기억하며 부러 뺨에 입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턱을 검지로 쓰다듬어 주는 건 멈추지 않았다. 새는 골골거렸다.

그 상태로 저녁까지 새와 함께 놀다가 그날은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폴이 혹시나 싶어 새가 누울만한 바구니 위에 말랑한 쿠션을 얹어 가져다주었지만 새는 싫다는 듯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결국 니키엘은 새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꼭 강아지처럼 품 안을 파고들길래 웃으며 팔을 내주었다.

니키엘은 그대로 잠들었고 꽤 난잡한 꿈을 꾸었다.

***

아주 커다란 새가 제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잠이 덜 깬 니키엘은 버둥거리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가위눌리는 건가? 이세계에서는 귀신도 아니고 새가 나오는 악몽을 꾸는군.’

니키엘은 신음했지만 새는 비켜 주지 않았다. 그는 어떤 신화를 떠올렸다. 산 정상에 매달려 간이 쪼아 먹히게 된 어느 신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나 새는 니키엘의 간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가슴 위에 발톱을 숨긴 발을 올려 둔 채로 가만히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무거워….’

집요하고도 묵직한 시선이었다. 물리적으로는 저를 짓누르는 새의 무게가 무거웠지만 그보다 새의 시선이 더 무거웠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데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저런 눈을 봤더라. 잠결에 니키엘은 계속해서 그 눈빛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그만 내려왔으면 좋겠는데. 새의 원한 같은 건가? 난 오늘 검독수리 한 마리도 살려 줬는데 어째서 이런 원한을….’

니키엘은 억울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에서 깬 것도 그렇다고 잠든 것도 아닌 상태라 그런 것 같았다. 온몸이 축 늘어져 있는 상태에서 저를 짓누르는 거대한 새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니.

그 와중에 잠이 쏟아져 내렸다. 눈꺼풀은 가슴 위에 얹어진 무게만큼 무거웠다. 멍한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흐릿한 시야로 새가 보였다.

‘아니, 새가 아니라….’

새가 아니라 남자였다. 그것도 헐벗고 있는. 아니 이게 무슨…? 니키엘은 놀랐지만 그런 것 치고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점점 의식이 가늘어져 가고 있었다. 그대로 잠들 것 같았다. 저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당연한 것처럼 니키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저기, 선생님…. 덩치가 상당하신데 어째서 제 품으로…?’

또 한 명의 고목나무였다. 이곳 놈들은 왜 이렇게 다 큰 거야. 니키엘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파고들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팔을 뒤로 둘러 니키엘을 제 품 안에 넣었다.

니키엘은 당황스러웠다. 맨몸인 남자와 다리가 얽혀 들었기 때문이다.

‘어어, 이게 무슨….’

그러나 이렇다 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의식이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 몽마 같은 건가…? 근데 왜 남자가…. 나는 그런 취향 없단 말이야….’

생각이 툭툭 끊겼다. 남자의 품 안은 무척 따끈했다. 그는 축 늘어진 니키엘의 팔을 제 허리에 두르게 했다.

광배근이 무척 발달한 것처럼 다 안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손 끄트머리에 천 같은 것이 닿는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가 다친 걸까? 붕대를 두르고 있네….’

그것이 니키엘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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