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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1)화 (11/130)

11화

어찌된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니키엘은 자신이 산책을 나갔던 그대로 쓰러져 나흘 만에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분명히 마법학 책을 읽으며 킬킬거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눈 떠 보니 침실, 그것도 나흘이 지난 뒤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폴이 득달같이 달려와 비명을 질렀다.

“즈언하아-!”

“아, 귀 따가. 뭔데?”

뭔 일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려 그를 보자, 폴이 부은 눈으로 니키엘의 무릎에 엎드린 채 울기 시작했다.

무슨 영문이냐 물었더니 글쎄 갑자기 쓰러진 것을 왕궁 경비원들이 발견 후 데려왔다고 한다. 니키엘은 황당했다. 내가 쓰러져? 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엉엉, 저는 전하가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잘 살아 있는데 무슨 말이야.”

“얼굴도 창백하시고 나흘 동안 의식 회복도 못 하시고…!”

“알겠어. 그만 울어.”

“전하 죽으면 저는 어떻게 해요…! 안 그래도 성격 나쁜 전하 수발든답시고 궁인들이 저 왕따시키는데!”

“아, 다 네 걱정이었구나.”

니키엘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폴 역시 다정한 성격이라 진심으로 걱정했던 것인지 나흘 만에 사람이 퀭해 보였다.

그 때문에 괜찮다는 니키엘의 항변은 먹히지 않았고 그는 또 이틀을 침대에서만 보내야 했다.

“근데 이거 무슨 물이야?”

그동안 니키엘은 시종 폴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얼마나 극진했냐면 물 한 잔도 들지 못하게끔 하는 왕극진 간호였다. 지금도 폴은 니키엘의 입술 앞에 잔 주둥이를 대접하고 있었다.

제 손으로 먹을 수 있다고 해 봐도 폴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폴이 먹여 주는 대로 먹고 재워 주는 대로 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마시던 이 물만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결국 니키엘은 대체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폴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폴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장미수입니다, 전하.”

“아, 어쩐지 화장품 냄새가 난다 했다.”

석사 1년 후배 나영이가 미스트인지 비스트인지를 뿌리고 나면 나는 냄새와 비슷했다. 그렇다면 이건 화장수 아닌가? 이걸 왜 주는 거야?

니키엘은 폴을 의심했다. 나를 암살하려고? 성격 나쁠 때 쌓아 둔 원한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니, 환자한테 화장품을 먹이면 어떡해.”

“화장품이라뇨. 장미에 고인 새벽이슬만 모아 받아 놓은 건데! 모으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까!”

니키엘이 알 리 없었다. 왜 그런 짓을 일부러 하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왜 정신을 잃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것과 시간이 나흘이나 흘렀다는 것. 그게 다였다.

니키엘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자 폴이 짜증을 냈다.

“몸에서 장미 향이 나려면 마시는 물은 모두 장미수여야한다고 하셨잖습니까.”

“…하, 고작 그런 이유라고?”

기가 막혔다. 몸에서 장미 향이 나게 하려고 향유뿐만 아니라 먹는 물까지 모두 장미수로 바꾸게 하다니.

진짜 니키엘은 알면 알수록 또라이였다. 그것 때문에 왕자궁 시종들과 궁노비들이 잠도 자지 못한 채로 장미 잎에 고인 이슬을 받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이슬이라고 해도 흙먼지가 묻은 장미 꽃잎에 맺혀 있던 건데, 이곳 공기가 깨끗하다고는 하지만 그냥 마셔도 되는 거야? 완전 비위생적인데.’

니키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부터 이런 물 다신 안 마실 거야. 차라리 장미차를 가져오든가. 아니, 장미로 된 건 안 마실 거니까 끓인 물이나 식혀서 가져와.”

“끓인 물을 왜 식혀서….”

폴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니키엘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럼 따로 정수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물은 어디서 퍼 왔던 거야? 궁내에 우물이 있을 리도 없었다.

이 나라는 마법 때문에 화학의 발전이 두드러지고 무기를 만들고 성을 쳐부수기 위해 물리학의 연구가 활발한 반면, 공중 보건학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서 알코올을 쓰면서 물은 끓여 마시지 않다니. 어느 것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데 어느 부분은 또 청동기인들의 생활사를 보이고는 했다.

‘이거 내가 원인 모를 이유로 쓰러진 것도 다 이 비위생적인 세계에서 알 수 없는 비위생적인 것을 먹고 탈이 난 거 아냐?’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산책 중에 갑자기 쓰러질 일은 없지 않겠는가.

어쨌든 니키엘은 이틀이나 더 침대 신세를 지었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이제 일어나 슬슬 아침 일과를 시작해 볼까 싶었는데 폴로부터 청천벽력의 소식이 들려왔다.

“볼트윅 공작이 병문안을 오셨습니다, 전하!”

“뭐? 레이먼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좀이 쑤셔 이세계의 마법이나 더 공부해 볼까 하고 기초 마법학 책을 보며 아침을 먹은 뒤 산책을 가려던 계획은 도루묵이 되었다. 니키엘은 약간 짜증이 났다.

레이먼을 마주하는 것은 지난번, 왕과의 알현 이후 복도에서 서로 으르렁거렸던 이후 처음이었다.

왕족 능멸죄로 처형당해도 모자란 말만 할 때는 언제고 웬일로 병문안을 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싫은 사람은 어떻게든 쫓아가서 괴롭히려는 성격인가? 병문안은 핑계고, 내가 아픈 틈을 타 복장을 뒤집어 놓아 암살하려고?’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이놈의 궁전에는 암살 의심 세력이 너무도 많았다.

니키엘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생각해 보다가 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령하여 침실에서 맞이하는 수밖에 없으니, 괘념치 않는다면 드시라 해라.”

“예, 전하.”

니키엘이 오만 사람을 다 꼬시고 다니는 것을 경멸하는 듯했으니 응접실이 아닌 침실로 불렀다 하면 수작이 더럽다고 치를 떨며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니키엘의 예상은 완전히 틀려 버렸다. 폴이 니키엘의 말을 전달하러 간 후 채 몇 초 되지 않아 레이먼이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니, 볼트윅 경….”

오늘따라 너무 귀찮아서 질색하는 폴을 무시한 채 세수도 하지 않고 있던 니키엘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레이먼이 너무도 빨리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막내 왕자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온 레이먼이 들어왔다. 시원한 생김새의 미남은 곧은 다리를 뻗어 금세 캐노피가 걷어진 침대 근처로 다가왔다.

발걸음도 당당하여 꼭 객이 니키엘이고 주인이 레이먼인 것 같은 태도였다.

그 전도된 상황에 니키엘이 당황하고 있을 무렵, 레이먼은 침실을 한번 휙 둘러보더니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니키엘 전하를 뵈옵니다.”

꼭 봄바람을 입에 문 것처럼 레이먼이 니키엘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어투는 공손한데 하는 행동이 무뢰배와 다를 것이 없었다.

허리를 살짝 숙여 오른손은 왼쪽 가슴팍에 가져다 대는 궁중식 남성 인사는 어딜 간 건지 해사한 미소와 함께 말로만 인사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 후에는 가만히 있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이제는 저딴 것도 인사랍시고 건네는 구나. 기가 막힌 니키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안녕하오. 경도 그렇겠지?”

“사경을 헤매셨다 들었는데.”

헤맸다 들었는데 왜, 뭐. 너무 멀쩡하다 이거야? 니키엘은 기가 막힌 얼굴을 했지만 레이먼의 유려한 낯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싱긋 웃은 채로 니키엘의 침대가에 서 있었다.

그가 침실 안으로 들어오자, 그 넓던 침실이 꽉 차 보였다. 원작 속 설정으로는 레이먼이 가장 장신이라고 했었던 것 같다.

니키엘 역시 꽤 장신이라 단위를 환산해 보면 180cm 정도는 되는 것 같았는데 레이먼은 훨씬 더 컸다.

‘원작 설정이 어땠더라.’

제일 큰 레이먼이 194cm, 율란이 191cm로 190cm인 루시안과 비슷하고 지카리가 그나마 188cm였지만 딱 180cm인 저보다는 컸다.

‘아니, 여기 애들은 왜 이렇게 다 큰 거야. 니키엘도 옛날의 나에 비하면 5cm 정도는 큰데….’

발육이 남다른 것이 서양인은 서양인이구나 싶었다. 물론 <산스브리안의 금 가지>에 나오는 설정에 의하면 오시니스 왕국은 오히려 동쪽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시니스 왕국 사람들이 다 길쭉한 것은 아니었다. 폴만 해도 니키엘의 어깨 근처에 왔으니까.

무턱대고 크기만 한 사람들은 무게 중심이 너무 위에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해 보이게 한다. 그러나 레이먼은 그런 것이 없었다.

잘 다져진 근육에 감싸인 신체는 위협적으로 보였다. 유순하고 선한 미남의 인상이 신체의 야생성을 억누르고 있어서 그렇지, 따로 떼어 보면 무시무시한 몸이었다.

생김이 워낙 섬세하여 다들 그가 주먹 하나만으로도 머리통을 부셔 놓을 만큼 강인한 손아귀와 무기 같은 전완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체육인의 눈은 속일 수 없지.’

저 근육들은 찐이었다. 헬스와 단백질 셰이크로 키운 물 근육도 아니었던 것이다.

니키엘 눈에는 약간 낯간지러운 오시니스식 귀족 남성 복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야성이 두꺼운 어깨를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프릴과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셔츠를 입고도 신체가 주는 위협적인 느낌을 전혀 중화시켜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주 얇은 세필 붓으로 공들여 그린 듯한 얼굴만 아니었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테다

니키엘이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잘 세공한 에메랄드빛 녹안이 서늘하게 니키엘의 얼굴을 훑었다.

눈빛이 꽤 무엄하길래 왜 저러는가 생각해 보니, 쓰러졌다는 소문을 확인하러 온 듯했다.

‘이유를 알 수가 없네….’

니키엘은 속으로만 갸웃거렸다. 며칠 전 복도에서는 저를 상대로 날카롭게 응수할 때는 언제고 죽었나 살았나 확인까지 하러 오다니.

게다가 꽃을 베어 문 미소가 한층 짙어진 것을 볼 때, 레이먼은 니키엘과 마주한 지금이 무척이나 불쾌한 것 같았다.

저렇게 불쾌해할 거면 얼른 용건을 말하고 자리를 뜨면 되는 일일 텐데 입을 열지 않은 채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레이먼이 저의 쓸모를 고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쓸 곳이 있는데 니키엘 자체는 마땅치 않아 짜증이 나면서도 그가 그대로 죽어 버리면 곤란한 그런 애매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싫어 죽겠는데 이용할 가치는 있어서 봐주는 모양이지? 니키엘은 흠, 하고 목 울림을 냈다가 확인해 볼까 싶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살날이 길게는 안 남은 듯하오.”

니키엘의 말에 옆에 있던 폴이 ‘님이요?’ 하며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윗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껴들지는 못하지만 내가 뭘 들은 거지, 하는 얼굴이었다.

‘저, 저 도움 안 되는….’

니키엘은 쯧, 혀를 찼다.

“폴아. 차를 내오거라.”

“네, 전하.”

폴은 냉큼 고개를 숙이고는 침실을 떠났다.

니키엘은 레이먼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꿍꿍이 없이 정말 생사가 궁금해서 온 것이라면 차 얘기에 봤으니 됐다고 거절한 뒤 나갔을 텐데 엷게 미소 지은 얼굴로 서 있기만 했다.

방금 니키엘의 말이 진실인지 고민하는 것 같은 낯짝이었다. 니키엘은 이불을 걷었다. 객께서 노인네 머리맡 저승사자처럼 우뚝 서 계시니 직접 자리를 안내할 요량이었다.

니키엘이 이불을 걷자 실내에서 입는 얇은 모슬린 잠옷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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