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12)화 (12/130)

12화

니키엘의 잠옷은 특이하게도 치마 형태였는데 이세계 남자들이 모두 이런 잠옷을 입는 것은 아니고 어린 남자아이나 노인들이 주로 입는 듯했다.

성인 남성용 잠옷이 따로 있지만, 오시니스국은 남성에게 성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는 편이라 부인이나 애인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잘 때도 상반신 근육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얇은 소재의 상의와 꽉 조여 오는 실크 바지 혹은 달라붙는 반바지 같은 것을 입었다.

그러나 니키엘이 정신을 잃은 뒤에는 몸이 편안하게끔 긴 원피스 형식의 모슬린 잠옷을 입힌 듯했다.

철저히 기능에만 치우친 편안한 잠옷을 입고 있던 터라 아무 생각 없었던 니키엘은 치마 자락이 말아 올라가는 바람에 하얀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던 것도 몰랐다.

“공도 보았겠지만, 저쪽에 소파가 있네.”

“…이런 파렴치한.”

“뭐?”

소파를 권유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파렴치하다는 소리였다.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진짜 병상에서 막 일어난 사람한테 욕을 퍼부어? 폴을 내보낸 것이 문제였을까. 레이먼은 둘만 남으면 평소의 다정스러워 보이는 낯짝을 집어 치운 채 무시무시한 얼굴로 니키엘을 야려 보기 바빴다.

“공은 내가 왕족이라는 자각은 있는 건가?”

기가 막혀 물어보자 레이먼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려한 미간이 움찔 움직이는 것이 무척 잘생겨 보였다.

‘자식이, 잘생기면 다냐.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도 너무 없어요.’

동시대에 태어난 것도 아니라 요즘 애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니키엘은 레이먼이 탐탁지 않았다.

그가 경멸스럽다는 듯이 니키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 귓등이 붉은 것이 꼭 열받아 안색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복장을 단정히 좀 하십시오. 왕족이라는 자각은 저만 없는 게 아닌가 봅니다.”

“공이 내 침실에 먼저 쳐들어왔거든? 그리고 난 환자야.”

“네, 건강해 보이십니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레이먼은 어느새 그린 듯한 미소를 다시금 짓고 있었다.

말 한마디를 안 지네, 떼잉 쯧. 니키엘은 짜증을 내며 일어나 소파로 가 먼저 앉았다.

“앉든지.”

라는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레이먼은 긴 다리로 척척 걸어와 먼저 앉아 버렸다. 한 대만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율란도 제게 마땅찮은 기색을 내보이기는 했지만 레이먼은 뭔가 조금 달랐다. 태도는 사근거리고 말투도 온화하지만 니키엘을 경멸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시니스는 왕권이 약한 나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흑마룡을 물리친 네 개의 가문이 워낙 그 기세가 등등하기는 했다.

때문에 선대왕들은 백금발에 벽안을 갖고 태어나는 왕족을 이용하여 네 개의 가문을 통솔했다.

한 대의 한 명씩, 각 가문에서 태어나는 저주받은 핏줄을 통솔함으로써 네 개 가문이 왕에게 충성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크나큰 힘을 가지고도 왕에게 복종을 맹세해야 하는 네 가문이 왕족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저에게 뭘 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불쾌한 기색이라니.

…아니, 내가 정말 레이먼에게 뭔 짓을 했었나?

니키엘은 눈을 데룩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내가 열병을 앓고 난 뒤로는 옛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말이야. …혹시 내가 공에게 뭐 실수한 것이라도 있소?”

그 말에 레이먼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곧이어 표정을 풀고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전하와 좋은 추억밖에 없는걸요.”

“그럼 왜….”

“하오나 전하께서 지난겨울에 제게 말씀하셨던 걸 까마득하게 잊은 모습을 뵈오니 다소간 울적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네가 방금 좋은 추억밖에 없다며. 니키엘은 레이먼의 사근거리는 미소를 보고 억울해졌다.

“아니…. 내가 기억이 안 나니까 공에게 묻고 있지 않소. 뭔 짓을 했는데, 내가.”

“레이먼 자지는 말자지라고 궁중 연회 한복판에서 복창하신 뒤 저를 잡고 쓰러지셨죠.”

“어…. 내가…?”

“덕분에 저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말자지로도 전하를 만족시키지 못해 연회 한복판에서 술주정을 부리게 했다는 불충의 누명을 쓰고 있기는 합니다.”

“그건, 그건 내가 미안하네.”

“다른 일들도 해변의 모래처럼 널리듯 있으나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듯하군요. 다 전하와 저의 추억인데 말입니다.”

기억이 날 리가 있나. 니키엘은 입술을 말아 물고 유구무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먼은 그런 니키엘을 잠깐 보더니 빙긋 웃었다. 입매는 분명 웃고 있는데 기색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연기를 하는 거야, 뭐야.”

“뭐라고 하셨나, 공. 못 들었네만.”

“아닙니다. 정신이 미령하신 덕에 훨씬 더 뫼시기 편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뭬야? 180도 돌아 있다가 다시 180도 돌아 버린 탓에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소리잖아, 그거. 니키엘은 레이먼의 말본새에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 연회 한복판에서 그의 고간을 가리키며 말 땡땡이다! 하고 소리쳤던 과거가 있는 한, 레이먼의 말이 싸가지 없다며 쏘아붙일 계제가 되지 못했다.

본인이 한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같은 몸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니키엘은 머쓱한 태도로 모른 척하기로 했다.

“어쩌다 병문안까지 오게 된 건지 이제 말해 보시오.”

“발트 대공에게 토벌 대회에는 참석하지 말라는 권유를 들으셨습니까?”

엉? 이건 또 새로운 물음인데.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데룩 굴리려다가 참았다. 마침 타이밍 좋게 폴이 찻잔과 가볍게 집어 먹을 만한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폴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두는 동안 말을 멈췄다. 폴은 은쟁반을 든 채로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폴? 왜 서 있어. 나가서 기다려.”

“하, 하지만 전하.”

“공과 나는 나눌 말이 있다니까.”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이 어이가 없어 바라보자 폴이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하더니 이내 니키엘의 침실을 나섰다.

그런 폴을 흘끗 본 레이먼이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니키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살짝 웃고 있는 입매가 어딘지 비틀려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음탕한 구석은 아직 버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전하.”

“…뭐요?”

“배우자 후보감과 둘만 남길 원하시다니요.”

“아니, 뭐라고?”

한국인처럼 말 앞에 ‘아니’를 붙이고 물어봐도 레이먼은 차나 홀짝일 뿐이었다.

이세계의 문화에 대해 전혀 알지를 못하니 같은 남성끼리 남아 있는 게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레이먼은 니키엘의 배우자 후보감이다. 니키엘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니키엘은 갑자기 짜증이 났다. 죽자마자 이곳에서 눈 뜬 것도 어이가 없는 일인데 갑자기 남자 신부를 들이라니.

게다가 후보감들이 하나같이 다 덩치가 산 만 했다. 이미 밀린 남성성에서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차이가 압도적이니 짜증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이게 정말 실화인가 싶기만 했다. 니키엘은 불뚝 올라오는 이마의 혈관을 억누르며 말했다.

“됐고. 공께서 그 귀한 발걸음으로 왕자궁까지 오신 연유나 말씀하시게. 이쯤 시간을 끌었으면 됐어.”

“…발트 대공이 마물 토벌 대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말에 뭐라 답하셨습니까.”

“그야, 내가 가면 폐가 될 듯하여 그러겠노라 했소.”

니키엘의 말에 레이먼이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손이 무척이나 커다랗지만, 찻잔을 잡은 손가락이 길고 곧아 우아해 보였다. 그는 잠시 니키엘을 응시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다짐하신 걸 번복해 주셨으면 합니다.”

번복해 달라고? 토벌 대회에 참가하라는 말인가?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율란이 니키엘에게 토벌 대회에 참가하지 말아 달라는 이유는 명확했다.

짐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니키엘의 몸은 최악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문란하게 살아왔던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허약하기만 했다.

그런 상태에서 마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사냥터로 가 봤자 사냥당하는 것은 니키엘일 것이다.

니키엘이 죽으면 왕가가 물을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그 저주인지 뭔지를 해주할 수도 없게 된다.

현 왕족들 중 니키엘만이 백금발에 벽안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예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토벌 대회에 참가하는 즉시 신붓감 후보들 속에 내던져질 니키엘의 처지와 그런 니키엘을 보호하며 마물들을 사냥해야 할 율란 발트의 짜증스러움이 합을 맞춘 일이었다.

그런데, 말을 번복하라니.

“어찌한 연유로?”

니키엘은 찻잔으로 입을 가리며 물었다. 레이먼이 그런 니키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 있으면 신탁이 내려올 것입니다.”

신탁?

그러고 보니 이곳은 신의 지배를 받는 땅이었다. 주신 솔리우스는 태양신으로 오시니스 왕국 전역에 태양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게 하겠다는 말로 곳곳에 신전을 세우게 하였다.

네 명의 영웅들은 흑마룡을 처치하러 가기 전 주신인 솔리우스의 신전을 간략하게 세운 뒤 소 다섯 마리, 양 세 마리, 포도주 두 부대를 바친 뒤 승전하여 돌아오면 순백색의 결정질 석회암으로 신전을 만들어 바치겠노라 맹세하였다.

그들은 정말로 승전하여 귀환하였고, 신전은 이듬해 오시니스 전역에 세워졌다. 이 땅에 어둠을 몰아내고 낮을 가져온 만큼, 주신인 솔리우스에 대한 오시니스 국민들의 사랑은 지극했다.

신탁이 내려왔다는 하나만으로 토벌 대회에 니키엘을 데려가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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