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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4)화 (14/130)

14화

사탕을 깨문 듯한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미소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생김새지만, 그는 사실 성격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는 지금 무척이나 짜증이 난 상태였다. 레이먼은 딱 세 가지를 혐오했다.

첫째. 저의 얼굴만 보고 들이대는 인간.

둘째. 저의 가문만 보고 껄떡거리는 인간.

셋째. 니키엘 오시니스.

단언컨대, 니키엘 오시니스는 이 세 가지 인간형을 모두 충족하는 혐오의 집약체였다.

‘천하의 음탕한 왕자께서 자꾸 수작질을 하시는 게 몹시 거슬리는데.’

레이먼은 근래에 궁정에서 도는 소문에 대해서 생각했다. 왕의 마지막 아들인 니키엘 오시니스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을 말이다.

그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 레이먼은 궁정 연회 한복판에 있었다. 샴페인 잔을 부딪히며 귀부인 중 하나가 레이먼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자유연애를 한답시고 기사 하나를 꼬셔 남편을 독살시킨 채 그의 작위와 재산을 제 것으로 만든 수완가, 드레스트 폴락 백작 부인, 아니 폴락 백작이었다.

‘각하,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레이먼은 그녀의 은방울꽃 향수 냄새를 참으며 싱긋 웃었다.

무슨 소문인지 모르겠다는 뜻과 함께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지만 폴락 백작은 레이먼의 뜻을 알면서도 모른 척 의뭉스레 굴었다.

‘니키엘 전하께서 마귀와 마주쳐 기억 상실증에 걸리셨다는군요.’

오시니스 왕국민들은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마귀와 마주쳐 몽땅 기억을 잃었다고 여겼다.

외상이나 정신적 스트레스에 의한 증상이 아닌 무언가 잘못하여 주신의 안배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마귀와 눈이 마주쳐 그 충격에 기억을 잃었다고 여겼다.

기억 상실증 전에 머리를 부딪혔다면 그 또한 마귀가 뒤통수를 때리고 갔다고 생각했다.

‘주신께서는 전하를 다른 자식들처럼 사랑하시지는 않나 봅니다.’

폴락 백작이 키득거렸다. 그 말인즉슨 니키엘의 신성력이 약한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신성력이 약할 만도 하지 그 오입쟁이 새끼.’

타고난 신성력을 위해 정숙하게 지내도 모자랄망정, 허구한 날 귀부인들 치마 아래로 기어들어 가거나 남자에게 뒤를 대주느라 바쁘니 있던 신성력도 도망가게 생긴 상황이었다.

속세인이니 사제들만큼 금욕하지는 않더라도 있는 신성력을 지키기 위해 몸을 정갈히 함이 마땅한데 동네 축제에 신난 들개처럼 여기저기 껄떡거리는 모양새가 심히 추잡스러웠다.

레이먼은 그런 니키엘이 자신의 저주를 해주시킬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니키엘은 자신이 수장들에게 어떤 안정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무기로 같잖은 요구를 할 때마다 레이먼의 인내심은 쉽게 끊어질 것만 같았다.

지난겨울, 술에 취한 니키엘이 자신의 중요 부위에 대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그 연회 전에도 그러했다.

당시의 그는 레이먼과의 독대를 원했다. 누이에게서 작위는 물론이고 저주까지 승계된 이후 한시도 편할 날 없이 지내던 레이먼에게는 니키엘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속에서 내내 들끓고 있던 짐승이 가라앉는 느낌이 나고는 했다.

그래서 니키엘의 독대 요청을 수용했다. 니키엘과 네 가문의 수장들은 미혼남녀, 그러니까 결혼 적령기에 오른 이성이 샤프론이나 시종 없이 만나는 것만큼 그 사적인 만남이 금지되어 있었다.

니키엘은 주신의 은혜를 받아 수태가 가능한 유일한 남성이었다. 게다가 백금발과 벽안을 타고난 이상 그의 혼례처는 네 가문 외에는 어떤 곳도 없었다.

저주를 해주 하려면 스킨십이 필요했고 그런 스킨십에는 혼인이라는 제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사실은 인사를 위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몸속 짐승의 기운이 쉽게 가라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가는 이를 이용해 네 가문의 수장들이 자신의 권력 아래 고여 있게 만든 것이다.

역대의 모든 왕들은 제 딸이자, 아들이자, 누이이자, 형제를 통하여 네 가문을 통솔해 왔다. 그들에게 단 한 순간의 접촉도 허하지 않음으로써 수장이 갖고 있는 모든 권력을 왕가의 것으로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니키엘은 국왕의 허락 아래 무척이나 오만방자해져만 갔다. 작년 연회 전 독대에서도 니키엘은 레이먼의 허벅지를 허락 없이 더듬었다.

안쪽까지 파고든 손이 오른쪽 허벅지 쪽으로 갈무리해 둔 것을 움켜쥐듯이 쓸어 올리고는 분노에 눈이 벌게진 레이먼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결혼 전에 확인 절차가 필요했을 뿐이오. 공이 꽤 비싸게 굴질 않소. 혼례 전에도 해주할 방법이 있다는데 내 말은 들어 보지도 않고…. 쯧.’

그 음탕한 무뢰배가 혀를 차며 공작새 깃으로 만든 부채를 부치는 걸 본 순간 레이먼은 분노에 의해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인사도 없이 왕자궁 응접실을 나섰었다.

푼돈 5킬리에 몸을 파는 남창 취급을 당한 것이 오시니스의 단둘뿐인 공작, 레이먼 볼트윅이라니.

선조께서 이 땅을 지키고자 용을 처단하셨을 때도 후손에게 이런 모욕이 있을 줄 아셨을까.

아셨다면 오시니스 그 개같은 땅 버러지들의 목을 직접 꺾겠다며 석회관을 뚫고 무덤에서 튀어나오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시니스의 제1방어선인 군사 총독 율란은 같은 일을 겪었다면 앞뒤 재지 않고 바로 니키엘의 손목을 꺾었을 것이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북부의 깡패 개자식에게는 그 문란한 손길을 뻗지도 않으면서 볼트윅가를 만만하게 여기는 것처럼 저에게만 그런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뭐? 이제는 또 기억 상실 흉내를 내?

레이먼은 그 애정 결핍에 절절거리는 걸레 왕자가 부왕이나 다른 이의 이목을 끌고 싶어 기억 상실 흉내를 냈다는 것에 여름 별장을 걸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자 왕을 알현했던 것이다. 부른 지 한참이 되어서야 왕의 식당 중 하나인 백화관에 나타난 니키엘은 처음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니, 묘하게….’

그렇다. 묘하게 다른 인상을 품기는 했었다.

동대륙에서 들여온 빨간 꽃을 달이면 나오는 하얀 가루에 중독된 사람들 특유의 몽롱한 눈빛은 어디 가고 또렷하고 명료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다소 시큰둥하고 어느 일에도 관심이 없어 보여 그렇지 전처럼 동공이 풀려 겔겔 거리는 눈빛이 아니었다.

의자에 앉았을 때 역시 허리를 바로 세운 채 어깨를 피고는 정면을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비록 시선이 그 테이블에 있는 그 누구도 관심 없다는 것처럼 맞은편에 앉은 레이먼의 팔 옆쪽을 응시하며 초점이 나가 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의 정신 나간 인사까지 이상했다.

‘강녕하시었습니까.’

예법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인사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니키엘은 멋대로 살기는 했어도 부왕 앞에서는 깍듯이 예법을 지켰다.

그것은 그가 부왕의 사랑을 갈구하는 몸만 큰 어린아이기 때문이다. 왕은 니키엘이 태어나자마자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확인 후, 아이를 길들이기 위해 갓 출산한 니키엘의 친모에게 극약을 내렸다.

이는 네 수장과 왕, 왕의 제1시종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미 없이 자라게 된 왕자는 비정상적으로 부왕이 가끔 던져 주는 애정에 집착했다.

그러기 위해서 니키엘의 모친을 없앤 걸 알고 있는 레이먼으로서는 저보다 나이가 어린 니키엘이 가끔 안타깝기는 했으나 그뿐.

어미 없이 자란 모든 인간이 쓰레기로 크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날의 니키엘은 어딘지 이상했다. 왕은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니키엘은 곧이어 레이먼을 곧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전처럼 끈적거리는 시선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눈빛이 전과 같이 불쾌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겼었다.

곧이어 니키엘은 레이먼 따위는 바라보지도 않았다는 듯 시선을 곧바로 흐려 버렸다. 저를 곧게 바라보던 시선이 제게서 빗겨 나가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레이먼은 그것이 니키엘을 향한 씻을 수 없는 불쾌함이라고 생각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단지 아바마마께서 저 훌륭한 꽃을 제게 하사해 주시진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태도 자체도 무척이나 짜증 났었다. 그러나 가장 거슬렸던 것은 레이먼이 배우자 후보 중 하나이니 단란하게 식사나 하자는 왕의 말에 니키엘이 보여 준 행동이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태도로 들어와 어깨를 곧게 펴고 시선을 바르게 응시하던 것은 어디에 던져 줬는지 니키엘은 그때부터 저잣거리에서 동냥을 하는 거지를 앉혀 둔 것처럼 아직 나르지도 않은 접시에서 음식을 퍼먹기 시작했다.

레이먼은 빠르게 왕의 표정을 살폈고 왕 역시 황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폴락 백작이 전해 준 소문이 사실일지라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니키엘은 그렇게 접시를 단숨에 비우더니 왕의 윤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재빠르게 백화관을 떠나 버렸었다.

레이먼은 왕에게 니키엘이 걱정되니 먼저 일어나 보겠다 양해를 구하고는 그를 따라나섰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그에게 무례한 태도로 말 몇 마디를 지껄였었다. 니키엘이 보여 준 대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물으니 하는 말인데, 솔직히 불량배로 보입니다, 공. 내가 그렇게 좋으면 알현 신청하세요. 가는 사람 손목 붙잡지 말고.’

‘…….’

‘그러면 또 압니까. 내가 공이랑 놀아 주기라도 할지.’

그렇게 말한 니키엘은 레이먼의 어깨를 툭 치고 백화관을 들어왔던 것처럼 곧은 자세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레이먼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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