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15)화 (15/130)

15화

레이먼은 솔직히 말해서 약간 얼이 나간 상태였다. 때마침 솔리우스의 권능을 벗어나 일탈을 일삼던 빛 한 줄기가 니키엘의 속눈썹을 사선으로 가로질러지나가 눈동자의 반절을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 물처럼 파랗게 비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광경은 아름답다기보다는 놀랄 만한 자연의 광경을 들여다본 것처럼 찬탄하게끔 만들었다.

저절로 넋을 놓은 레이먼은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니키엘에게서 옅은 연꽃의 향기를 느꼈다. 그 모든 것들이 시간을 늘려 놓은 듯 천천히 다가왔다.

‘연꽃? 매번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도 없는 애인들을 유혹한답시고 최음제에 쓰이는 아노나닐랑 꽃 향수를 사용할 때는 언제고….’

레이먼은 억울할 지경이었다. 사람이 기억을 잃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건가?

레이먼이 알던 그전의 니키엘은 천박하고 게으르며 동시에 옹졸하고 소인배였다. 그가 아무리 놀라운 외양을 하고 있든, 아름다운 도자기 안에 담긴 오물을 반기고 싶지 않은 것처럼 니키엘의 내면은 형편없었다. 그의 인간성에서는 악취가 났다.

그러나 기억 상실에 걸린 그는 푸른 호수처럼 맑은 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니키엘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잠잠해지던 짐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깊은 안정감이 레이먼의 폐부를 꽉 채웠다. 신선한 공기를 가득 마신 것처럼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확인차 손목을 붙잡아 보았을 때도 아무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상쾌한 기분이 든다면, 신성력과 접촉하면 더욱 강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레이먼은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니키엘의 느낌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

왜? 대체 왜?

폴락 백작의 말은 틀렸다. 니키엘이 마주친 것은 마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레이먼은 날 때부터 의심이 많은 사내였다.

사근한 겉껍질에 비하여 속이 음습하며 정치적 암투로 주적의 목을 조르는 것에 가차 없는 남자였다.

레이먼은 그 이후로 몇 번 더 니키엘을 만날 생각을 했다. 오늘 니키엘을 굳이 알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를 시험해 보듯 말을 던지기도 하며 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왕은 니키엘이 마귀와 마주쳐 신성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까 봐 그의 기억 상실증을 함구시킨 듯싶었다.

때문에 레이먼은 혹시나 싶어 지난 연회에서의 일을 떠보았다. 레이먼이 다리 사이에 말만 한 것을 두고 산다고 선언한 바로 그 사건에 대해 말이다.

니키엘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레이먼은 이미 그전부터 니키엘의 치한 같은 행동에 화가 났으며 니키엘은 그에 앙심을 품고 겨울 연회에서 그렇게 함성을 쳤다는 걸 바르게 지적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키엘이 보여 준 반응은 달랐다.

제 실수를 듣고는 입술을 말아 물며 레이먼의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니겠는가. 벌꿀에 적신 것 같은 속눈썹을 내리깔고선 백옥 같은 앞니 사이에 물렸다 풀린 입술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도 모르고.

레이먼은 그때 니키엘의 그 태도를 보며 문득 갈증이 일었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아 보아도 가시지 않는 갈증이 말이다.

물론 니키엘은 그전에도 종종 레이먼뿐만 아니라 수장들의 눈치를 살피고는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성격적 비굴함에 기인한 것이지, 자신이 한 실수가 면구스러워 실수를 한 당사자 앞에서 시선을 피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 전의 니키엘은 모든 인간을 살피면서도 동시에 안하무인으로 굴고는 했다. 그렇게 모순적이던 인간이 자신의 실수가 창피하여 레이먼 앞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니.

어쩐지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광경이었다. 목이 타는 동시에 눈앞에 바로 마실 수 있는 감로수를 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그때 그런 느낌이 들었지. 욕구 불만이었나.’

북부의 개새끼처럼 매일 같이 전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레이먼 역시 언제든 마물을 사냥하러 갈 채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신체 단련이 중요했다.

미치게 바쁘지 않은 이상 아침 수련은 거르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 수련과 볼트윅가의 기사단 훈련에도 직접 참여하다 보면 그럴 틈도 없어 보이지만 꽤 자주 욕구가 치솟기는 했다.

그것은 레이먼이 나시우의 저주를 받아 몸속에 짐승을 가둬 둔 덕분에 사시사철 온몸이 끓어오르는 쇳덩이처럼 뜨겁기 때문이다.

다른 수장들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모르나 레이먼은 귀부인들을 찾았다. 짧게 연애를 하기도 했다.

다정하게 나누는 사랑이 레이먼의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토벌 대회 준비로 바빠서 그나마도 상대하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느끼는 욕구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니키엘 앞에서 그럴 리가 없으니 말이다.

레이먼이 아무리 니키엘의 선택을 받아 혼례를 치른 후 저주를 해주 할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영 내키지 않았었다.

‘비쩍 곯은 약쟁이를 누가 먹고 싶겠어.’

남자는 안아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레이먼의 취향은 좀 더 육감적인 몸매의 연상이었다.

동대륙에서 건너온 꽃가루에 취해 헤롱거리거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니키엘을 안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근래의 니키엘은 뭔가 좀 달랐다. 체력이라도 가꾸는 것인지 몸이 다부져 보이는 데다가 모슬린 잠옷 아래로 드러난 탄탄한 허벅지라니.

소년기에만 머물고 싶다며 성인식날에도 온 궁이 떠나갈 정도로 엉엉 울던 니키엘은 혹여나 근육이 두꺼워질까 봐 부채나 샴페인 잔보다 무거운 것은 들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전까지의 행동들은 어디 가고 건강하게 살려고 다짐한 것처럼 몸을 단련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혈색까지 좋아져 뺨이 복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의 창백한 안색을 자랑삼아 떠들고 다니던 건 어쩌고.

기억 상실로 사람의 영혼까지 바뀔 수 있는 건가? 레이먼은 니키엘이 마주친 것이 마귀가 아니라 주신 그 자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각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레이먼의 상념을 깬 것은 그의 가신이자 백부인 다이머스 볼트윅이었다.

제야 레이먼은 그날 니키엘을 알현하고 그에 관한 생각만 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다이머스에게 제 생각을 들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이머스뿐만 아니라 눈이 파란 오입쟁이 생각을 하루 종일 하고 있다는 걸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들고 있던 깃펜을 자연스레 잉크병에 꽂아 두고 보고 있던 것 위에 양피지 몇 장을 생각 없이 올려 두듯 겹치며 일어섰다.

“언제 오셨습니까, 백부님.”

“각하께서 골몰하고 계신 것 같아 제가 알리지 말라 일렀습니다.”

“다음엔 바로 일러 주셨으면 합니다. 백부님을 세워 둔 모자란 조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레이먼은 웃으며 그의 백부를 소파로 이끌었다.

‘뭐 나올 구석이라면 거지새끼 뒷구멍이라도 핥을 노친네가 무슨 냄새를 맡고 왔을까.’

봄바람을 깨문 듯 사근한 얼굴로 어마어마한 욕을 떠올리며 말이다.

***

“염병.”

욕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니키엘은 모래를 가득 부어 넣은 돼지 오줌보를 양 끝에 매단 구리봉을 들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폴의 이야기를 들은 니키엘은 가벼운 충격에 휩싸였다.

‘마물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개중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마물들도 있습니다. 각각의 특징이 뚜렷하지만 공통점은 단 한 가지, 인간의 어두운 감정을 좋아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니키엘은 폴이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감정을 좋아해? 그게 무슨 영양분이 된다고?

탄소, 질소, 산소, 인과 황으로 이루어진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생물들만 사는 곳에서 온 니키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대부분은 무지성이지만 지적인 사고를 하는 마물들도 더러 있습니다.’

무리를 짓고 인가를 공격하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하기도 한다고 했다. 니키엘은 마물이라는 것들에 대해 더 알아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물들은 그림자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한낮의 숲으로 들어가 토벌을 벌이는데, 밤에는 마물들이 출몰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둠과 그림자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림자는 태양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기에 오시니스 사람들은 이를 마물도 원래는 태양신의 권속이었으나 광룡 나시우의 저주를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이상하지 않나? 마물들은 나시우의 뼈와 살, 피에서 태어났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러나 마물들이 그림자에서 태어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니키엘은 언제 한번 오시니스의 주신인 솔리우스 경전을 찾아봐야겠다.

신화와 실제 사실이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사람들은 이상한 걸 못 느끼나?’

니키엘은 양쪽 다리 번갈아 점프 런지를 하며 생각했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 감각이 근 증량에 좋다는 생각에 잠시 행복해졌다.

니키엘의 몸은 어지간하면 근육이 붙지 않는 체질이었다. 보기 싫게 마른 것은 아닌데 노력에 비해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가속을 위해 팔을 흔들며, 니키엘은 폴이 해 준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토벌 대회에는 네 가문의 수장들이 아니면 치룰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 이상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물에 대적할 수가 있는 겁니다. 평범한 기사들도 마물의 숲에서는 몰이꾼 역할밖에는 하지 못하는 거죠.’

마물이란 게 그렇게 세다고? 그래 봐야 동물들 아닌가? 니키엘은 흠, 하고 호흡을 울렸다. 근육을 수축시킬 때 날숨을 내뱉고 근육을 이완시킬 때 들숨을 들이 삼킨 뒤 천천히 복근에 힘을 줬다.

아무래도 마물들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 다짐하며 니키엘은 그날의 하체 운동을 마무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