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좀만 걸어도 피 맛이 날 정도로 헉헉거리는 쓸모없는 심폐 기능과 다리가 후들거리는 형편없는 근력까지.
총체적 난국에서 니키엘의 컨디션을 이 정도까지 끌어올린 것은 바로.
‘감사합니다. 김영무 원장님, 그리고 왕자궁 전담 요리사 벤디.’
니키엘의 애독서, ‘몸을 가꿔야 정신이 맑아진다’의 저자이자 김재활 병원의 원장 김영무 원장과 어떤 단백질 식단이든 막힘없이 요리해 주는 왕자궁 전담 요리사 벤디가 아니었다면 이 쓰레기 같은 신체를 여기까지 끌어올리는 일은 무리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딴 쓰레기 몸으로 할 짓은 다 하고 살았는지 알코올 중독 증상도 있었지.’
갑자기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리길래 뭔가 했더니 알코올 중독 증세였다.
가뜩이나 쓰레기 같은 몸에 술까지 들이부으니 몸이 안 상할 수가 없던 것이다.
‘이런 몸을 갖고도 바람둥이 짓은 다 하고 돌아다니다니. 그러니 매사 짜증이 심하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몸이 약하니 신경질이 심했을 것이다. 그런 니키엘에게 괜히 얻어맞은 폴을 생각하면 진짜 니키엘의 머리를 콱 쥐어박고 싶어졌다.
‘체력 늘리는 데에는 유산소 운동이 효과가 좋으니까 아침 산책할 때 슬슬 뛰어 봐야겠어.’
심폐 기능이 좋지 못해 근력부터 늘렸으니 유산소 운동으로 심폐 기능 역시 끌어올릴 차례였다.
니키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장서관을 뒤졌다. 마물과 역사를 함께해 온 왕국답게 장서관의 한쪽 벽면 전체가 마물에 대한 내용이었다.
책 수레를 직접 끌고 온 니키엘은 장서관을 두리번거렸다. 사서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괜히 사람을 만나 뭘 보는지 들킬 바에야 아무도 없는 것이 나았지만 꽤 넓은 서고에 아무도 없으니 이상하기는 했다.
니키엘은 수레에 책을 담으며 혹시나 싶어 구석 책상에 자리 잡았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깔끔하게 마물의 정의에 대해서만 정리해 볼까.’
검색 기능 따위는 없으니 책을 다 뒤져야 했지만 책들의 목차가 제법 잘 정리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가죽 커버를 씌운 책들이 조금 무겁기는 해도, 오히려 볼 내용이 많다는 것에 두근거렸다.
“근데 이건 무슨 가죽이야….”
책 커버를 가죽으로 만든 것 같았는데 비늘이 촘촘한 것이 꼭 뱀 비늘 같기도 했다.
“구렁이 비늘도 이렇게 크지는 않은데.”
그러나 비늘의 크기가 무척 커다랬기 때문에 꼭 아나콘다보다 더 큰 뱀의 비늘 같았다.
“아니면 다른 파충류인가….”
오시니스에서 나고 자라는 것들은 니키엘이 원래 살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다.
식자재나 식물, 꽃들도 그러할진데 생명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새들이나 짐승 역시 같았지만 간혹 이질적인 생물들이 있었다.
꼭 이 책의 겉면을 감싸고 있는 비늘들처럼 말이다.
“이렇게 크려면 몸길이가 10m 이상이라는 얘기인데….”
니키엘은 중얼거리며 책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암전이 찾아왔다.
대낮에 맞이한 일식처럼 말이다.
10m?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성채만 한 뱀의 피부에서 온 것이다. 나와는 사이가 좋았지. 그러나 그도 곧 떠났다. 그대가 떠났듯이, 이 영생에는 나만이 남겨졌다.
그 말은 니키엘의 심중에서 들렸다. 꼭 머리를 관통하듯이 안에서부터 공명하는 목소리였다.
분명히 처음 듣는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니키엘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꼴을 보아하니 나를 또 잊었군.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목소리는 불쑥 치솟아 니키엘의 근간을 흔들었다. 니키엘은 절규하고 싶었다. 뼈에 사무치는 미안함에 대하여 말이다.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니키엘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됐어. 나는 이곳에서 이 개 같은 영생을 천천히 견디고 있으니, 그대도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
그 목소리는 깊게 침잠해 있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말하는 어투에서 니키엘은 죄책감이 들었다.
당장 미안하다고 소리치고 싶은데 목구멍이 오그라든 듯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나는 낮에 나타날 수가 없는 존재인데 그대의 밤에는 침입이 너무도 힘들어.
목소리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니키엘은 산 채로 목이 뜯겨 나갈 정도로 고갯짓을 해 주고 싶었다.
네 말을 듣고 있노라, 네 말만이 내게 중요하노라 몸소 보여 주고 싶었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어쩜 이렇게 그리운 걸까. 니키엘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가끔 그대의 침대맡에서 그 빌어먹을 아마 빛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싶으니 제발 침대 옆에 물을 떠다 두도록 해.
니키엘은 그러겠노라 소리치고 싶었다. 목청이 터지도록. 그러나 오그라든 목구멍 사이로는 쇳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크기가 클수록 나를 그리워한다고 여길 거야.
그리하여 언젠가는 그대를 그리움의 호수에 잠겨 죽일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나 니키엘은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 털끝 하나 다치는 것이 두려워 오늘도 이렇게 지척을 맴돌며 제게 닿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니키엘은 그의 마음에 줄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리고.
“전하!”
누군가 니키엘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니키엘의 고개는 책상에 처박힌 채였다. 그는 자신이 언제 잠에 빠졌는지도 몰랐다.
‘뭐였지…?’
무슨 꿈을 꿨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옆에서 계속해서 장서고 사서로 보이는 이가 니키엘의 어깨를 뒤흔들고 있었다.
니키엘은 약간 짜증이 난 상태로 천천히 그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자꾸 흔들지 말게. 어찌 이러는 것이냐.”
“하오나 전하….”
사서는 머뭇거렸다. 그는 펼쳐진 책을 흘끔거리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니키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지금 울고 계십니다.”
뭐?
니키엘은 사서의 걱정이 스민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다 제 뺨을 문질렀다. 그리고 손이 척척히 젖어 가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내가 왜 운 거지….’
왜 울었더라…. 니키엘은 멍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일정한 습도에서 책을 유지하기 위해 쳐 놓은 창문의 태피스트리 사이로 햇빛이 끼쳐 와 니키엘의 얼굴을 딱 절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니키엘은 손을 들어 그 빛을 가렸다. 꼭 개기일식 같은 모양새로 빛이 가려질 때까지 말이다.
***
장서고에서 도서 대출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사서는 깡통으로 유명하던 왕자가 책을 빌려 가자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책 수레를 빌려주었다. 그 수레 가득 책을 끌고 나가자 사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즈언하! 어찌 손수 수레를 끄시옵니까!’
‘그럼 발수 끌까. 손으로 수레를 끄는 게 뭐가 문제더냐.’
니키엘의 심드렁한 말에 사서의 얼굴이 또 한 번 하얗게 질렸다. 더듬더듬, ‘불, 불경을 저질렀으니 주, 주겨 주시옵소서.’ 하며 발음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덜덜 떠는 꼴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 사서를 그대로 두고 수레로 문을 밀어 나왔다.
육중한 문이 등 뒤에서 쿵 닫히는 건 바라보지도 않고 니키엘은 곧바로 왕자궁으로 돌아왔다.
매번 돼지 오줌보로 만든 아령이나 구리 봉들을 직접 들고 다닌다는 걸 아는 왕자궁 시종들은 니키엘을 슥, 한번 보고는 또 증량이라는 것을 하시나 보다, 이번에는 들지도 못할 엄청나게 무거운 책으로 하시나 보다 하는 얼굴로 인사를 건성건성 건넸다.
“다녀오시었습니까, 전하.”
“응. 폴 좀 잡아 둬. 귀찮으니까. 그리고 침대맡에 자리끼 좀 가져다 두련? 밤사이에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구나.”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니키엘의 명을 따르기 위해 총총 걸어 나갔다.
수레를 마저 끌던 니키엘의 한쪽 눈썹이 솟아올랐다. 폴 좀 잡아 두라는 말은 진심이었는데 침대맡에 자리끼를 두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는 밤사이에 목이 마르기는커녕 한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잠 귀신이었다.
목이 말라 깨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목이 마르다는 것은 저녁 식사 중 나트륨의 섭취율이 높았다는 뜻이고, 수분 고갈은 근육의 주적이다.
니키엘은 저탄수 고단백 저염 식단을 고수했다. 이는 왕자궁 주방장인 벤디가 놀랍도록 훌륭하게 지켜 주고 있는 바였다.
근데 목이 말라 깨다니. 니키엘 사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왜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니키엘은 제 방에 딸린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안은 깨끗했다. 물론 전에도 깨끗하기는 했다.
‘진짜 니키엘’ 시절에는 말이다.
그때는 서재가 다른 의미로 깨끗했다. 손에 잡히는 책이라고는 춘화집뿐이었으니 말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좌우명으로 따르는 니키엘은 건강한 신체를 갖추는 한편 정신까지 건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전의 기억을 갖고 있는 몸뚱어리가 간혹 꾸게 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장성한 그것이 빼꼼 치켜들고 있는 광경이 어색했다.
팔다리는 매번 보니 제 것 같아도 다리 사이에 달린 것은 볼일을 볼 때도 왠지 죄스러울 만큼 원래 자신의 것과 달랐다.
‘왜 이렇게 분홍색이냐고.’
그렇다. 일단은 색이 달랐다. 그래서 제 것이 아닌 것 같고 어색한 마음만 들었다. 그러니 아침에 그렇게 건강하다 못해 실례까지 한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왜 하필 남자랑 몸을 비비는 꿈을 꾸는 건데.’
항상 그렇게 실례한 아침에 지난밤 꿈을 떠올려 보면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뒹굴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니키엘은 그것이 ‘진짜 니키엘’의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건강한 신체에 음탕한 정신이 머무를 수 없으니 니키엘은 뇌를 혹사시켜 이전 기억을 몰아내고자 지난 한 달간 엄청난 수의 글자들을 읽어 댔다.
폴은 처음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왕자궁에 있는 책을 전부 긁어모아 오라고 하셨습니까…? 춘화집만 빼고요…? 그러니까, 춘화집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춘화집만 빼라는 말씀이십니까?’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인지 몇 번이고 질문했다.
니키엘은 성의 있게 물음을 들을 때마다 그렇노라 대답했다. 원체 빡대가리였던 진짜 니키엘을 생각하면 폴의 반응이 과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