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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20)화 (20/130)

20화

또 그 꿈이구나. 하고 느낀 것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무척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자신이 기절과 동시에 예의 그 꿈으로 빨려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보고파하는 마음이 고작 물 한 잔이라 이거지. 그대의 애정은 늘 이렇게 척박하군.

꿈에서 깨는 즉시 잊어버리면서 다시 이 꿈을 꾸면 지난 꿈의 내용들이 연쇄적으로 기억나는 것이 이상했다.

니키엘은 그 목소리가 침대맡에 떠다 놓은 물의 양을 투덜거리는 이유를 아주 잘 알았다.

종내에는 그리움의 호수에 잠겨 죽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는데 그가 그리운 만큼 떠 온 물은 한 컵의 양밖에 되지 못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니키엘로서는 그 양이 최선이었다. 더 많은 양의 물을 떠다 둘 수는 없었다.

물의 양이 좀만 더 많아지면 모든 것을 말리는 햇빛이 금세 눈치를 챌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니키엘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달라붙은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쓰러지기는 왜 또 쓰러져. 하여간 한심해. 다정한 것도 병이라 그렇게 말했건만….

목소리는 한심하다는 투였으나 어쩐지 애상이 스며들어 있었다. 니키엘은 내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는 니키엘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굴었다.

미안하면 좀 쉬어 가면서 해. 죽이고 싶댔지 누가 죽는 꼴 보고 싶댔어?

그게 그거 아닌가. 니키엘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지만 누군가 제 뺨을 만지는 손길이 무척 기분 좋아 입을 다물었다.

…각혈을 멈추기 위해서는 신성력을 소모해야 해. 신성력을 소모하기 위해서는….

그것까지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진 않군. …난 여름이 싫어. 해가 기니까.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였지.

목소리는 미련이 철철 흐르는 어조였다. 니키엘은 그의 마음이 저와 같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다.

이제 그대의 사탕발림에는 속지 않아. …그냥 나를 기억해 내면 되잖아. 그러면 믿어 줄 테니까….

니키엘, 니키엘. 목소리의 주인은 니키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애원하듯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니키엘은 두 팔을 둘러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의 등 뒤에는 역린이 솟아 있기도 할 테지. 처음에는 그 부위를 건드는 걸 무척 싫어했던 그는 덩치 큰 개가 쓰다듬어 달라 투정하는 것처럼 큰 몸을 옹송그려 니키엘을 껴안고는 했다.

장대하게 큰 그가 저를 안을 때면 니키엘은 팔을 쭉 뻗어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그러면 그는 끙 하고 앓고는 했다. 광증에 괴롭혀지던 신경이 니키엘과의 접촉으로 인해 안정을 되찾듯이.

그래. 그 안정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을까.

그래. 어떻게 나를 잊을 수가 있어. 그대가, 어떻게 그대가.

그 순간, 무언가가 생각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꿈의 지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니키엘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둠에 반쯤 잠긴 얼굴로 니키엘을 향해 웃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안 돼. 가지 마. 니키엘은 팔을 뻗어 그의 등을 안아 주려 노력했다. 제발 가지 말라며 목 놓아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프시케가 제 얼굴을 볼까 두려운 에로스처럼 빠르게 등을 돌려 어둠 속을 향해 달아났다.

안 돼.

가지 마.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됩니까. 오늘은 꼭 침대에서 정양을 하셔야 합니다.”

니키엘은 숨을 헉 몰아쉬었다. 뭐였지? 무슨 꿈이었지? 눈꺼풀 안쪽에 고여 있던 눈물방울들은 니키엘이 눈을 뜨자 그대로 후드득 떨어져 침대보를 적셨다.

폴이 은으로 만든 수레 위에 베드 트레이를 얹은 것을 침대 근처로 가져오고 있었다. 니키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뭐였지…?”

“제철 과일과 한해살이콩 스프인데요? 어제저녁부터 쓰러져 아무것도 못 드셨으니 첫 음식은 부드러운 게 좋습니다.”

폴은 심드렁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아직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문질렀다.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처럼 아팠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또 꿈을 꾼 것 같은데 그런 느낌만 남아 있을 뿐 꿈의 기억은 전혀 없었다.

“또 실신한 거야?”

“네, 또. 그것 보십쇼. 제 말은 귓등으로 넘기시다가 기어코 이 사단을…. 대체 전하께서는, 아닙니다. 됐어요. 미천한 것 말은 듣지도 않으시는 분한테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얜 왜 삐졌어? 꿈자리가 뒤숭숭한데 기억이 나질 않아 혼란스러운 와중에 폴이 저 혼자 삐져 툴툴거리니 의아했다.

“왜 토라진 건데.”

“식사 좀 챙기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 쉬지도 않고 책만 읽으시고.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운동하시던 거 아니었습니까? 왜 또 그러시는데요!”

폴의 순한 눈은 울망거리고 있었다. 주인이 마음잡고 살아 제일 기쁜 것은 시종인 폴이었다.

전처럼 약에 취해 있을 때도 없고 금주 수준으로 술을 끊더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즐기시는 걸 보고 이제 됐다, 우리 전하 장가만 잘 가면 된다. 하고 얼마나 기뻤던가.

그런데 갑자기 손목 굵어진다고 들지도 않던 책을 냅다 파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로 웬 성벽 밖 거지들이나 먹을 만한 것들을 주워 먹으며 씻지도 않고 잠도 안 잤다.

꼭 약에 취한 것 같았다. 혹시 저 몰라 어디서 약을 주워 먹은 걸까 싶어 폴은 저의 주인을 유심히 살폈었다.

그러나 그도 아닌 듯했다. 그저 갑자기 책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미친 듯이 쓰기 시작한 것이다.

무얼 쓰나 보았더니 사각형과 세모, 동그라미로 만들어진 것 같은 글자들이었다. 오시니스에서 쓰는 글자들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글자냐 물어보니 한구울이라고 했다. 또 어떤 문자를 가리키고는 그건 또 영오라고 했다.

전혀 모르는 글자들이었다. 동대륙과 서대륙에서 쓰는 문자들 어디에도 저런 글자들은 없었다. 소수민족들이 쓰는 글자들 같았다.

저런 문자들은 언제 익히신 거지, 의문을 갖고 물어보려고 할 때쯤 니키엘이 별안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었다.

다행히, 의원의 말로는 그저 과로한 몸이 넘치는 신성력을 주체하지 못해 의식을 잃은 터라 자고 일어나면 될 것이다 했지만 폴은 정말로 놀랐었다.

“알겠어. 이제 이런 일 없을 거야.”

니키엘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아직도 저를 노려보는 폴을 향해 다독였다. 그동안 신성력을 어떻게 주체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왠지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네 가문의 수장들이 신성력을 필요로 한다고 했었지? 그러면 그 사람들한테 나눠 주면 되는 거 아니야.’

이렇게 간단한 해법을 왜 그동안 생각 못 하고 있었는지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율란이나 레이먼을 만났을 때도 몸이 살짝 이완되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그때는 그게 그냥 나른하고 졸려서인 줄 알았는데 용솟음치는 신성력이 안정을 찾아 갑작스레 신경이 이완된 덕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검독수리가 있을 때도 몸이 편했었는데…. 율란이나 레이먼 때보다 더 편안한 느낌이 들었었지…. 걔는 지금 뭐 하고 살까.’

수리와 함께 지낸 짧은 시간 동안도 몸이 무척 가벼운데다가, 각혈의 징후도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운동의 효과인 줄로만 알았다.

운동이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극명한 차이를 줄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니키엘로서는 각 수장들을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율란이나 레이먼과 낯을 텄으니 그들과 손이라도 잡으면 되겠지만 그러기 싫어. 그 자식들 하나같이 다 너무 툴툴거려서 귀가 따갑다고.’

니키엘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에다가 은근히 내향적이라 새로 사람을 사귀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니 이왕 손을 잡을 거면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이가 편하겠지만 그 두 사람은 니키엘만 만났다하면 으르렁거려 에너지 소모가 심했다.

‘왜들 그렇게 시비를 걸까. 사람이 싫으면 말을 안 걸면 되잖아.’

싫어하는 연구실 선배를 석사 과정 내내 무시했던 니키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였다.

사람이 싫으면 무시하면 그만이지, 왜 쫓아와서 시비를 걸고 말을 섞는지 니키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런 반응에 일일이 반응하고 손을 잡는 것보다 그냥 나머지 두 명을 찾아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마음이 급했던 니키엘은 아침 식사를 서둘러 끝내고 튀어 나가려다 그대로 붙잡혔다.

“세수도 안 하고 어딜 가셔요!”

“하, 일주일에 다섯 번만 해도 돼, 세수는.”

“꺄악!”

폴은 너무 놀라 소리를 꽥 지르며 솔리우스를 찾았다. 세수 좀 건너뛴다고 신을 찾다니. 니키엘은 폴의 잔소리에 질려 욕실로 방향을 돌려야 했다.

결국 니키엘이 방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세수는 물론이거니와 다섯 벌의 옷을 입어 본 뒤 그날 날씨에 가장 잘 맞는 비둘기색 블라우스와 짙은 남색의 여름용 비단 조끼를 걸친 후였다.

“아니, 대체 요 앞에 나가는데 왜 이렇게 차려입어야 하는 건데.”

니키엘은 투덜거리며 왕자궁을 벗어났다. 나머지 두 명을 찾기 전에 그들의 정보를 최대한 긁어모으는 것이 오늘 외출의 목적이었다.

폴에게 물을 수도 있지만 만약 니키엘이 제 신붓감 후보들에게 단 한 마디의 질문이라도 하는 즉시.

‘하, 드디어 우리 전하께서 장가가실 때가 다 되었군요. 시종 폴은 오늘 이날만을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눈물을 그렁거리는 폴의 극성을 마주할 것이다. 아예 한술 더 떠 얼른 결혼식에 입을 예복을 마련하자고 할 수도 있었다. 니키엘은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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