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24)화 (24/130)

24화

창백했던 혈색이 소동에 의해 살짝 제 색을 찾은 터라 루시안은 처음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잘생겨 보였다.

그러나 니키엘은 저를 바라보지 않고 있는 루시안의 옆모습에서 당혹과 초조를 읽을 수 있었다.

‘당황한 건 그렇다 치고 표정이 너무 안 좋네.’

아무래도 평소 혐오하던 니키엘과 악수와 같은 가벼운 스킨십을 뛰어넘어 아예 껴안고 탱고 쌈바까지 춘 것 때문에 짜증이 난 듯했다.

저럴 때는 원흉인 제가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솔직히 말하자면 니키엘로서도 쪽팔린 상태에서 그와 오래 이곳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민망한 것으로 치면 제가 더했기 때문이다.

‘악수나 해서 신성력을 보여 주려고 했는데 별안간 치한이 되어 버렸잖아.’

이래서야 원래 계획했던 대로 악수를 조르는 것이 100배는 나아 보였다.

나머지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저에 대한 악감정을 조금도 타개하지 못한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작전상 후퇴라고 자신을 다독여 보았지만, 그 외의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니키엘은 마물을 공부하며 토벌 대회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전에는 가지 말라는 율란의 말에, ‘그래. 내가 거길 가서 뭐 하겠어.’ 하며 쾌재를 불렀었다.

하지만 지금의 니키엘은 토벌 대회에서 마물이라는 생명체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들의 군집 생태학을 정리하고 싶었다.

연구원들은 늘 성현이 해 온 주제에 대해 마르고 닳도록 다시 한번 연구할 수밖에 없다. 신박한 주제는 돈이 안 되고 돈이 된다면 말이 안 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토X의 망치에서 일어나는 번개의 실용 실험에 관하여: 1000가구가 한 달 동안 살 수 있는 전력량과 연관 지은 연구 논문.’

위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주제로 연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시니스의 마물들은 동물 생태학을 전공한 니키엘에게는 노다지 밭이었다.

아무도 연구하지 않은 순백의 연구 주제들. 생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니키엘로서는 피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토벌 대회에 꼭 가야 해.’

니키엘은 전에 없이 열정에 불탔다. 마물을 연구하여 해가 되는 마물과 해가 되지 않는 마물 등을 분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연구 주제까지 잡아 둔 마당이다.

그런데 네 명의 수장 중 한 놈은 코빼기도 뵈지를 않고 나머지 두 명은 니키엘만 보면 잡아먹을 듯 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 루시안 조차 이제는 니키엘을 변태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니키엘로서는 억울한 얘기였다.

‘근데 너무 싫어서 죽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다행히도 루시안은 니키엘과의 접촉에서 신성력을 느낀 듯했다. 애니멀 테라피로 새를 껴안자마자 꽤 숨 쉴 만해졌던 니키엘은 루시안에게 껴안긴 후로 온몸의 신경계가 더욱 느슨해진 걸 느꼈다.

그것은 루시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파리하던 안색에 혈색이 돌며 루시안은 크림색 장미꽃의 중심부로 갈수록 옅게 분홍색이 퍼져 있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율란이나 레이먼이 남성성이 뚜렷한 미남이라면 루시안은 넓은 어깨와 큰 키, 두터운 흉근이 옷 위로 도드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선이 가는 미인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미남보다는 미인형 외모였던 것이다.

니키엘만큼 낭창한 느낌을 주지는 않지만 청순한 분위기의 미인인 것은 맞았다. 그런 외모에 화색이 돌자 꽃이 개화한 듯 사람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접촉으로 인해 안색이 한결 편해진 것 같아 니키엘은 루시안의 눈치를 봤다. 루시안도 니키엘과의 제대로 된 접촉은 처음일 것이다.

왕은 니키엘이 그의 신성력으로 네 명의 수장을 억압하기를 원했다. 니키엘이 생각보다 소인배에 비겁했기 때문에 실패한 계획이지만, 어찌 되었건 왕의 그런 생각은 수장들과 니키엘 사이의 벽을 만들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접촉은 루시안에게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 자식들이 지금은 나를 싫어하지만 그래도 이게 우리 사이의 윈윈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우호적 동맹의 비슷한 관계라도 취할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된다면, 보다 편하게 마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떨어진 니키엘은 앓느니 죽는다는 심정으로 일단 몸부터 가꿔 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친숙하고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밥 한번 먹는 것도 꼭 왕자궁 내에 식당으로 옮겨야 하는 등 실속 있는 현대인으로 살아온 니키엘에게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전기와 인터넷이 없는 것도 불편했다.

‘중세 귀족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현대의 불가촉천민이라는 대학원생으로 지내는 게 더 간편하다니.’

옷은 무겁지, 여름은 덥지, 에어컨도 없지, 왕자궁 같은 경우에는 저녁에도 마법석이 빛나 등을 켜 주지만 현대의 전등에 비하면 밝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가격이 비싼지 밤새워 책이라도 볼라치면 왕자궁 내 살림을 도맡아 하는 폴이 득달같이 달려와 은근한 짜증을 냈다.

마법석이라고 해도 영원히 빛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왕궁에서 왕자궁으로 지급되는 마법석의 총량이 정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폴은 은근슬쩍 니키엘에게 눈치를 줬다.

새벽 내내 게임만 하는 아들에게 전기세 아깝다며 짜증을 내는 자린고비 아버지처럼 말이다.

어딜 가나 시종들이 따라와 먹여 줘, 입혀 줘, 재워 줘, 생활에 있어 귀찮은 것들을 모두 대신해 준다고 해도 적당히 돈 많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군 싶었다.

그러니 니키엘로서는 갑자기 오게 된 이곳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물이라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생물들을 조우하게 된 것이다.

니키엘은 그만큼 토벌 대회가 절실했다. 뭐라고 꼬셔야 루시안에게 신성력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그의 이득임을 더 확실히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니키엘이 다음에는 왕자궁으로 방문하여 같이 크니스나 한 판 치자고 루시안을 꼬시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왕궁의 서쪽 숲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대지가 흔들리고 지척에 벼락이 떨어진 듯 엄청난 소리였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도 엄청 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대로 무릎을 꿇을 뻔한 니키엘의 허리를 잡아 끌어 제 품에 숨긴 루시안이 제 여름용 프록코트의 옷깃을 벌려 니키엘에게 올 바람을 막아 주었다.

“지키!”

새가 다치지 않게 보호하듯 껴안고 있던 니키엘의 품 안에서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니키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제 품 안에 쏙 들어와 있던 새의 크기가 살짝 줄어들어 쑥 빠지는 것 같더니 새를 놓치고 만 것이다.

“안, 돼-!”

놀란 니키엘이 소리쳤다. 그러나 새는 쉭,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더니 금세 하늘 위로 비상해 버렸다. 니키엘의 품에 얌전히 있던 검독수리는 돌풍이 크게 인 쪽을 향해 빠르게 날갯짓하고 있었다.

헉, 하고 놀란 니키엘이 벌써 저 멀리 점이 되어 버린 새를 향해 외쳤다.

“어디 가!”

“전하, 저 새는 괜찮습니다. 정찰병 역할도 하는 새라 지금은 그를 보내 주셔야 합니다.”

“애기가 무슨 정찰병을 해!”

니키엘은 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루시안은 굳은 얼굴로 서쪽 숲을 바라보다가 니키엘의 그 말에 자신이 무엇을 들은 건지 의심 간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저를 어떤 얼굴로 바라보든, 니키엘은 검독수리 걱정에 그가 날아간 하늘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번에도 날개를 다쳐 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 상처가 아물어도 날개 근육 같이 섬세한 곳에 난 상처는 오래도록 비행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니키엘은 검독수리를 향해 돌아오라고 소리쳤지만 새는 이미 멀리 날아가 점으로도 안 보이는 수준이었다.

루시안이 쯧, 혀를 차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빠르게 읊조렸다.

“전하, 망극하겠습니다.”

망, 뭐를 하겠다고? 니키엘이 되묻기도 전이었다. 루시안이 니키엘의 허리를 낚아채 어깨에 짐을 얹듯 둘러메고는 왕자궁을 향해 튀어 나갔다.

“이, 무슨-! 공, 이게 무슨 짓이오!”

니키엘이 놀라 소리를 치는데도 그는 대꾸 없이 그대로 달렸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귓가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심했다.

뛰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 어깨에 소금 자루처럼 얹어진 니키엘은 내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침 먹은 거 다 올라오겠다!’

니키엘의 얼굴이 허옇게 질릴 무렵이었다. 꽤 먼 거리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느새 왕자궁 뜰 안에 들어와 있었다.

니키엘은 저를 어깨에 얹고도 굉장한 속도로 달린 루시안에 대한 감탄과 구토가 동시에 들었다. 멀미가 장엄하게 뇌를 울려 댄 것이다.

니키엘이 정신 못 차리고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동안 그를 바닥에 내려놓은 루시안이 경비병을 소리쳐 불렀다.

“전하를 부축하게. 서쪽 숲에 마물이 나온 듯하니 왕자궁을 봉쇄하고 신호가 오를 때까지 전하를 보호할 수 있도록.”

“예, 각하!”

갑자기 어깨에 메여 온 궁의 주인을 보고 놀랐던 경비병들이 루시안의 말에 군기가 바짝 들어 니키엘을 부축했다.

멀미에 머리가 웅웅거리는 와중에도 니키엘은 그게 괘씸했다.

‘이 자식들 군기가 빠져 가지고, 지금 공작이 왕자님을 어깨에 메고 왔는데 무엄하다고 하진 못할망정….’

그러나 뭐라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루시안은 굳은 표정으로 서쪽 숲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속도가 사람의 것 같지 않게 빨라 멀미에 구역질이 나오는 와중에도 감탄스러웠다. 병약하고 허약하다고 한들 루시안 역시 투르운가의 수장으로서 인간 이상의 힘을 갖고 있던 것이다.

니키엘은 두통에 인상을 찌푸린 상태로도 루시안이 향한 서쪽 숲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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