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28)화 (28/130)

28화

“끼에에-!”

거대한 히오칸이 하얀 배를 뒤집어 까며 괴로워했다.

공중에서 뛰어내린 레이먼이 칼을 꽂아 넣는 동시에 작두 썰듯 아래로 내린 탓에 몸의 3할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히오칸의 피는 푸른색이었다. 인간과는 다르게 적혈구가 철이 아닌 구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곤충과 흡사했다.

실제로 히오칸은 곤충형 마물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히오칸의 푸른 피가 레이먼의 얼굴로 튀어 올랐다.

무기 같은 어깨를 휘둘러 히오칸을 끊임없이 베어 내면서도, 레이먼은 제 뺨에 피가 튀긴 것이 역겨운 듯했다.

“어둠에서 태어났다는 것들이 왜 피가 있는 거야. 그냥 죽으면 먼지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레이먼에게 달려든 히오칸의 길이는 약 15m로 성체였다.

죽은 것이 어미 히오칸이었는지 뒤따라오던 새끼들이 끼익-. 하고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울어 댔다.

루시안은 채찍을 슬렁슬렁 휘둘러 새끼들의 허리를 끊어 놓으며 레이먼의 말에 속으로나마 동조했다.

마물을 사냥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시우의 피와 살에서 태어나거나 어둠에서 태어났다는 말과는 달리 각자의 생활사가 뚜렷했다.

광룡에게서 태어난 것치고 용을 닮은 생김새를 찾을 수도 없었고 용의 습성을 지닌 개체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둠에서 태어났다고 보기에는 이것들은 너무도 생물 같았다.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좀 거대하고 포악한 짐승에 가까웠다는 말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레이먼과 루시안이 대충 움직인 여파로 히오칸의 새끼들도 어미처럼 하얀 배를 뒤집고 죄다 죽어 버렸다.

그들의 푸른 피가 숲에 스며들자 독성분이 있던 것인지 풀들이 삽시간에 말라붙었다.

그 독성이 가득한 피를 뒤집어쓰고도 레이먼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저 멀리 하늘에서는 지카리가 물 만난 것처럼 날아오르며 욜록 여러 마리를 발톱으로 들어 올린 뒤 하늘 위에서 떨어트려 죽이고 있었다.

“…새 새끼 왜 저래. 뭘 잘못 먹였소?”

“…….”

제가 뭘 먹인다고 먹을 새도 아니지만, 루시안은 차마 지카리가 저렇게 팔팔 나는 이유가 니키엘의 신성력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네 명의 수장들은 서로 친한 건 아니지만 동지애를 갖고 있다. 빌어먹을 광증과 거지 같은 각자의 가문에서 기어코 살아남아야 하는 운명을 지닌 그런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사이가 나쁜 율란과 레이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니키엘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해주를 진작 포기했다.

니키엘에게는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네 수장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놓아 못 박은 적 없지만, 그것은 묵언의 약속과 같았다.

그런데 대뜸 그걸 무시하고 니키엘과 닿았는데 심상치 않은 신성력이었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광증 따위는 앓은 적도 없다는 듯 하늘을 누비고 있는 지카리 역시 니키엘의 품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노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들 네 명 중 레이먼과 율란이 니키엘을 가장 경멸했다. 영혼이 썩어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때문에 루시안은 그저 채찍에 묻은 히오칸의 피를 털어 내며 꽥꽥거리며 물 만난 듯 날아오르는 지카리를 못 본 척했다.

레이먼은 손날을 눈썹뼈에 붙여 손차양을 만들고는 날뛰는 지카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저 닭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루시안은 약간 뜨끔한 마음으로 슬그머니 화제를 전환했다.

“그것보다, 이것들이 어떻게 수도까지 왔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겠소. 먹이가 부족해 히오칸이 땅을 파고 수도로 오니 욜록이 그 뒤를 따라 땅굴을 내며 왔을 수도 있고.”

욜록은 히오칸이 파 놓은 땅굴을 다져 지하 도시로 통하는 통로로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옛 문명이 지하에 만들어 둔 곳에서 인간 흉내를 내며 살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특별히 지성이 있어서도, 이성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흉내 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욜록은 원래 이렇게 소수 개체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 많은 군집을 이루어 하나의 사회 형태로 존재해 살고는 했다.

지카리의 손에 죽은 욜록의 수는 체 스물이 되지 않았다. 호기심이 든 상대적으로 어린 욜록들이 제 멋대로 무리에서 따로 떨어져 히오칸의 뒤를 따라왔다는 얘기다.

레이먼은 칼을 땅에 꽂아 놓고는 그 손잡이에 손을, 그리고 그 손등 위에 턱을 괴어 놓은 뒤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 레이먼은 무척 예의 바르고 곰살맞은 청년인 척하지만 다른 수장들을 비롯해 제 성격을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인간 혐오에 걸린 사람처럼 늘 인상을 찌푸리고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것은 레이먼이 율란 외의 다른 수장들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레이먼의 본모습이기 때문이다.

루시안은 히오칸의 거대한 시체를 질질 끌어 한쪽으로 치워 두며 레이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히오칸은 새끼든 성체든 웬만한 성벽처럼 거대했지만 루시안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옷에 오물이 묻는 것이 싫어 느릿느릿 움직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레이먼이 말을 시작했을 때, 두 가지 이유라고 했으니 나머지 한 가지 이유는 곧 나올 듯했다.

“나머지 한 가지는 마물들 사이에서 지적 생명체가 나왔다는 것 아니겠소. 흩어져 있던 마물들을 모아 인간에게 대항할 만한 그런 생명체가 말이야.”

레이먼의 생각은 타당했다.

마물들이라고 해서 히오칸처럼 곤충 뇌를 갖고 있거나 욜록처럼 어린 강아지의 지능과 비슷한 마물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주 드문 확률로 마물들 사이에서는 지능을 지닌 개체가 나오고는 한다.

그러나 따로 지적인 생각을 하는 개체군이 있는 것은 아니고 마물의 여러 종들 중 가끔 지적인 생각을 하는 개체가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지능이 높아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생명체가 히오칸 사이에서도, 욜록 사이에서도, 개미와 비슷한 지능을 지닌 닉시들 사이에서도 나올 수가 있었다.

마물들은 이를 어떻게 아는 것인지 그런 개체가 탄생하면 바로 그 밑에 뭉쳐 하나의 집단처럼 행동했다.

평소에는 약한 마물을 사냥하여 저들끼리 배를 채우면서도 그런 지적인 생명체의 등장 하나만으로 마치 한 종처럼 뭉쳐 동족상잔을 금지하는 것처럼 싸우지 않는 것이다.

꼭 피를 타고 내려오는 절대적인 명령을 받은 것처럼. 그럴 때의 마물들은 조금 더 끈질기고 귀찮아진다.

더욱이, 그런 상황이 되면 먹이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진다. 큰 마물이 작은 마물을 잡아먹지 않으면 작은 마물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작은 마물과 큰 마물들이 동시에 굶게 되기 때문이다.

먹이가 부족해진 마물들은 자연스레 민가를 노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지적 생명체를 경계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히오칸과 욜록을 정찰병으로 보냈을 수도 있지. 수도를 공격한 이유는 가장 땅 울음이 많이 이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레이먼이 덧붙이는 말에 루시안은 말없이 동조했다.

사람들이 많을수록 걸음을 걸을 때 땅이 울리는 소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땅속에 사는 히오칸으로서는 땅 위를 걷는 생명체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했다.

그 밑으로 땅굴을 파고 기어가 아가리를 쩍 벌리기만 해도 손쉽게 사냥에 성공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니 만약 마물들 사이에 지적 생명체가 태어났다면 정찰병으로는 히오칸이나 욜록이 딱이었다.

하늘은 지카리의 비호를 받는다. 지카리는 모든 새와 소통할 수 있고 그것은 즉 지카리가 펼쳐 둔 창공 감시망을 뚫을 수 없다는 얘기다.

날개가 달린 마물은 많지만 수많은 새의 눈을 피해 비행할 수 있는 마물은 없을 것이다.

투명화를 일으키는 마물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땅 위를 기어 움직이거나 나뭇가지를 타고 이동한다. 지카리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는 땅속을 통해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았다.

“우리도 정찰병을 보내 봐야겠는데요.”

루시안이 공중에 손가락을 튕기자 불꽃이 일었다. 그것은 그대로 루시안의 검지 끄트머리에서 튕겨 나가 한쪽에 쌓아 둔 히오칸을 뒤덮었다.

화마가 삽시에 히오칸들의 사체를 덮었다. 숲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불임에도 불구하고 화마는 집요할 정도로 히오칸의 사체들만 태우고 있었다.

레이먼이 짜증을 냈다.

“냄새 고약하다고. 꼭 여기서 태워야겠소?”

“이걸 또 어디까지 들고 가서 태웁니까. 들고 가다가 옷 버리기도 싫습니다.”

“좆같은 냄새가 난다니까.”

레이먼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유려한 생김새에는 구김이 가도 그저 얼굴을 찌푸린 미남 같아 보일 뿐이었다.

루시안은 그런 레이먼을 무시했다. 햇빛이 쨍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참이었다. 시력이 약한 루시안은 이렇게 한낮에 밖에 서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부터 또 새 새끼가 연구실 창문을 쪼아 대며 지랄을 해 대길래 짜증이 치밀어 올랐었다.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참새처럼 짹짹거릴 걸 아는 루시안은 새를 데리고 밖을 나와 후원을 걷던 참이었다.

왕자궁에 뭐가 있다느니 하는 말에는 심드렁했었다. 가다가 중간에 니키엘을 마주쳤을 때는 아뿔싸 싶기도 했다.

여태껏 잘 피해 다닌 망나니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간만에 본 니키엘은 전과는 달랐다.

‘좋은 냄새가 났지.’

건강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늘 약에 취해 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눈이었다. 누군가는 니키엘의 그 창백한 안색조차 미의 절정이라고 말했지만 루시안이 보기에 그것은 그냥 약에 절은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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