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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34)화 (34/130)

34화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지금 뤼민 자작과 의논 중인 사업 나부랭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 전하…. 오해가 있으신 듯하옵니다.”

가스파르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일단 살살 달래 제 선량한 뜻이 니키엘을 조롱하려던 것이 아님을 밝히고 이 자리를 모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따라 웬일인지 니키엘이 만만치 않았다.

“오해? 무슨 오해가 있다는 말인가. 그대가 그 희한한 콧수염이 주는 불쾌함만을 믿고 내 기억에 그대의 콧수염만 남아 있을 것이라 여겼던 그 오만함이 오해인가, 아니면 백주 대낮에 궁 한복판에서 왕족을 능멸한 것이 오해란 말인가.”

“와, 왕족 능…. 저, 전하, 통촉….”

가스파르는 니키엘의 입에서 왕족 능멸이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오장육부가 떨리기 시작했다.

백작이 예상하기로는 ‘오해가 있었다. 내 뜻은 그게 아니었다. 네가 예민한 거다. 다음에는 우리 쿨하게 만나자. 오늘 일은 잊는 거다?’ 하는 말을 굽신거리는 태도로 흘려 넣으면, 행동거지로 사람을 판단하는 니키엘의 특성상 크게 문책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돌아온 니키엘의 반응은 예상과는 한참이 달랐다. 율란 발트 대공의 오른팔, 검은 가시 기사단의 우장군을 증인으로 둔 채 그의 앞에서 왕족 능멸의 죄를 입 밖으로 꺼냈다는 것은 가스파르를 당장 추포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왕족이 직접 내뱉은 왕족 능멸죄의 무게는 크나컸다.

왕족 능멸죄는 국가보안법인 대역죄와 맞물려 가장 무거운 죄악 중 하나였다.

왕족 능멸죄를 선고받는다면, 최소 형벌이 작위와 영지 몰수였다. 아침에 입궁할 때는 귀족이오, 저녁에 퇴궁할 때는 평민 나부랭이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가스파르는 이제 정말 심장이 발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뤼민 자작이고 자작나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심정이었다.

“저, 전하, 제 뜻은 그것이 아니오라….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푸셔서….”

모든 변명과 용서를 구하는 말들이 툭툭 잘려 있었다. 사고 회로가 짧은 용서를 구하는 말조차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희한한 콧수염마저 부들부들 떨리는 중이었다.

제 뜻은 그것이 아니오라, 근데 진짜 좆 됐다. 나 평민 되면 집에 있는 마나님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푸셔서, 아니 니키엘 이 망할 것은 왜 갑자기 똑똑해지고 지랄이야. 암튼 난 좆 됐다.

가스파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위 문장이 다였다. 그중 괜찮은 사과만 골라서 내뱉어 봤자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때, 하얀 손이 기적처럼 가스파르의 살찐 어깨에 툭 얹어졌다가 빠르게 물러났다.

“농일세.”

“저, 전하….”

파랗게 질려 있던 가스파르의 얼굴이 이내 붉어졌다. 조롱을 당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얼굴이 빨개진 가스파르를 바라보며 니키엘이 피식 웃었다.

“뭐야. 백작께선 농을 농으로 여기지 못하는 성격인가?”

“…아닙니다.”

“아니지? 그래.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네. 가자, 얼라리.”

니키엘은 산뜻하게 돌아섰다. 뒤에 남겨진 백작과 자작만이 태풍처럼 지나간 니키엘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이후, 궁에는 소문이 돌았다. 백치 왕자님이 가스파르 백작을 한 방 먹였다는 소문이었다.

***

때아닌 마물의 공격으로 궁은 며칠간 제법 어수선했다. 폴은 이때다 싶어 니키엘의 야외 운동을 금지하고 싶어 했지만 이른 아침마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니키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하! 제발! 햇빛이 따가우니 모자라도 쓰고 나가시라니까요!”

“너나 많이 쓰렴!”

거추장스럽게 챙이 긴 모자를 쓰라며 쫓아오기까지 했지만, 폴은 그동안 근지구력을 열심히 기른 니키엘의 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니키엘은 그런 폴을 놀리며 빠르게 도주하고는 했다.

모자나 찾아 쓸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궁 안이 어수선한 틈을 타 토벌 대회를 준비하고 싶었다.

욕심에 아무런 준비 없이 따라나섰다가 괜히 위험에 빠지게 된다면 민폐 캐릭터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곳이 <산스브리안의 금 가지> 속이 맞다면, 대개 소설들은 그런 전개 양상을 보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마물을 직접 사냥할 수는 없더라도 호신술 정도는 익히고 싶었다. 때문에 니키엘은 아침 운동을 끝마친 뒤 금위군들의 연무장을 기습 방문했다.

무기 상태를 살펴본 후, 제가 쓸 만한 것을 고르고 그것을 주된 무기로 삼는 병사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근육량을 증량시키는 거랑 실제 무술을 연마하는 건 다르지만 일단 해 보지 뭐.’

니키엘은 간단하게 생각한 뒤 연무장을 슬렁슬렁 걸었다. 무기를 두는 창고가 어디인지 찾으면서 말이다.

연무장 건물 안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원래 이런 곳은 보안이 삼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니키엘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종인 폴을 내내 떼어 놓고 다니는 니키엘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백금발에 벽안밖에 없었다. 백금발인 사람은 많고 벽안인 사람 역시 많아도 백금발에 벽안인 사람은 니키엘뿐이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처음 마주한 병사들은 이곳에 돌아다니는 저를 수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니키엘이 누군지 모르고 심문할 경우도 생길 수 있었다. 그런 경우를 대비하며 이곳에 온 것인데 지나가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찾기가 어려웠다. 다들 휴가를 갔나 싶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함성이 들린 것이다. , 하고 크게 터진 함성이 지척이었다. 니키엘은 놀라 중얼거렸다.

“뭐야, 나 어슬렁거리던 거 들켰나?”

혹시나 저를 잡으러 온 건가 싶어 약간 얼떨떨한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세히 들어 보니 소리는 건물 안쪽에서 들리는 듯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사람들의 목소리가 격해지는 것이 콜로세움 형태로 생긴 연무장 건물 특성상 가운데 원형 경기장으로 다가갈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 같았다.

니키엘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역시나 건물에 정중앙인 원형의 경기장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무슨 재미있는 짓들을 하길래 저렇게 시끄러운 걸까 싶었다. 함성이 제법 컸기 때문이다. 돔 형태로 벽돌을 쌓은 입구를 지나자 소리가 더 요란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와아-! 이겨라!”

“지지 마라, 검은 가시!”

“근위대 이겨라-! 지는 새끼가 사과주 열 부대 쏘기!”

“열 부대를 누구 코에 붙이냐!”

그리고, 기둥 뒤를 돌자마자 대체 사람들이 무엇에 그렇게 함성을 질러 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왕국군 소속 근위대와 검은 가시 기사단이 시합을 벌이고 있는 듯했다.

정식 무도 경합은 아니고, 오시니스의 스포츠 중 하나인 것 같았는데 원형의 경기장 위에 올라 서로의 허리춤을 붙잡은 채 애를 쓰고 있는 걸 보아하니 꼭 씨름 경기 같았다. 레슬링 같기도 했다.

상의를 벗은 채, 올리브 오일을 바른 두 사람이 경기장 위에서 서로의 간을 보고 있었다. 시합 흐름을 보니 유도와 씨름의 중간 형태인 맨몸 스포츠인 것 같았다.

니키엘은 경기장에 가득 찬 열기에 약간 흥미가 돋았다. 그래서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몸을 떼어 내고는 경기장 주위를 둥글게 늘어선 응원객 중 하나에게 물었다.

“저 시합의 이름이 뭐지?”

“뭐? 시타타도 모르는 놈이 있어?”

니키엘의 물음에 대답한 이는 검은 가시 기사단인지 검은색 얇은 튜닉과 같은 색 브레를 입고 있었다. 간단한 금사 자수가 가슴팍에 박혀 있는 베이지색 튜닉과 브레를 입은 근위대와 구분이 쉬웠다.

니키엘 역시 아침 운동 겸 폴의 감시를 피해 도망친 덕분에 상아색 튜닉과 브레를 입고 있었다.

금사로 장식된 부분은 없었지만, 최고급 비단 소재인 아신카 비단실과 면사를 섞어 직조한 옷이기 때문에 근위대의 활동 복장보다는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경기에 대한 열기로 구분하지 못한 채, 니키엘을 그저 근위대의 일원 중 하나로 여기는 듯했다.

어쨌든 답을 들은 니키엘은 다시금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원작에서는 검은 가시 기사단과 근위대는 앙숙이라는 설정이 있었다.

니키엘은 그들이 모여 시타타 경기를 벌이는 이유가 그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이가 나쁜데 굳이 친선을 도모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과열된 기사단원들과 근위군들을 살펴보던 니키엘은 다시금 제 옆에 있던 검은 가시 기사단 일원에게 물었다.

“경기에 걸린 상품이라도 있나? 잠깐 심부름 다녀온 사이에 경기가 시작되어서 앞의 말을 듣지 못했어.”

니키엘의 물음에 그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다른 이들과는 약간 복장이 다른 것이 기사단의 종자인 듯했다.

니키엘 역시 근위대와 복장이 약간 다른 걸 저와 같은 종자로 여긴 것인지, 그는 여전히 니키엘에게 반말로 대답했다.

“어제 잡은 히오칸의 꼬리뼈가 부상이라잖아. 니들은 종자한테 그런 것도 안 알려 주냐? 근위군은 역시 부하를 생각하지 않는 졸렬한 자식들이군.”

저에게 하는 욕도 아니라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니키엘은 그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상품이 올려진 경기장 한쪽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히오칸의 꼬리였다.

‘경기 상품으로 히오칸의 꼬리를 주다니. 도대체 어떤 또라이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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