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히오칸의 꼬리는 관절염에 특효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책들에 나온 정보를 통합한 결과, 복용 시 환각 작용을 초래하는 것 같았다.
복용 시 작용에 대한 정보들이 아주 짧게 여러 문헌에 퍼지듯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히오칸의 꼬리뼈는 주로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노인들에게 진상되고는 했는데, 때문에 그들이 환각 작용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치매 증상으로만 생각했다.
젊은이가 관절염을 앓는 경우는 몇 없고, 있다고 해도 귀한 히오칸의 꼬리뼈는 노인에게 진상되는 것이 오시니스의 국민 정서와 알맞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부작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마물 토벌 대회가 코앞인데 괜히 관절 생각해서 환각을 일으키는 뼈를 고아 먹는 멍청이가 나오기 전에 내가 저걸 가져야겠다. 겸사겸사 연구 시료로 써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니키엘은 자신도 이 멍청한 시합에 참가하기로 했다. 게다가 부상은 체력 증진이 되는 물약이었다. 마법으로 만든 물약이라는데 왕궁에서 상품으로 거래될 정도면 효능이 확실할 것 같았다.
언제나 체력 증진만을 목표로 생각하고 사는 니키엘에게는 최고의 상품인 셈이었다.
지금이라도 신분을 밝히고 저건 왕자인 내게 달라며 명령한다면 쉽게 얻을 수는 있겠지만, 검은 가시 기사단은 토벌 대회에서도 마주칠 수 있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들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리저리 미운털이 박혀 있는데 굳이 나서서 분란을 일으키는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니키엘은 천천히 둘러보다가 참가 인원을 받고 있는 자를 발견했다.
검은 가시 기사단의 검은색 튜닉을 입고 있는 회색 머리의 남자는 자리에 앉아 천 조각에 목탄으로 이름을 써 놓고 있었다. 참가자들의 이름을 적어, 이긴 사람의 천 조각만 남기고 나머지는 물에 담가 목탄을 제거하는 식이었다. 종이가 귀하니 무명천에 쓰는 듯했다.
니키엘은 그에게 다가가기 전 시합에 열중해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는 웬 기사의 허리춤에 매달린 약간 더럽고 꼬질 거리는 수건을 빼내어 두건처럼 둘렀다.
냄새가 좀 나기는 했지만 백금발인 것만 가리면 신분이 들통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접수를 위한 테이블 앞에 앉은 남자는 검은 가시 기사단이었으니 저는 근위대 소속이라고 속인 채 시합 참가 접수를 하면 될 듯싶었다. 니키엘은 대충 지어내서 말했다.
“근위대 소속 니…. 벤디요. 나도 시합에 참가하겠소.”
왕자궁 주방장의 이름을 댄 니키엘이 참가 의사를 밝히자, 천 쪼가리에 걸린 킬리 주화를 세고 있던 검은 기사단의 기사가 니키엘을 흘끔 보고 말했다.
“괜히 다치지 말고 돌아가라, 꼬마야. 시타타가 험한 운동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대체 네 후견 기사가 누구길래 너 같은 야들거리는 애를 시합에 내보내는 거야.”
…야들거린다니. 니키엘은 잠깐 열이 받았다. 가뜩이나 근 증량을 위해 갖은 운동법을 도입해 봐도 쉽게 증량이 되지 않아 화가 나 있던 찰나인데 저런 모욕 발언을 들으니 참을 수가 없어졌다.
니키엘은 두 눈을 번뜩였다.
‘이것들이 감히 나를 무시해?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는 씨름부였다고.’
중학생이 된 후에는 공부에 취미를 붙여 부 활동을 할 시간이 없어 그만두었지만, 니키엘은 걸쭉한 씨름 선수들을 배출해 낸 초등학교의 씨름부 출신이었다.
감독님이 부모님께 니키엘의 칭찬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진짜 니키엘의 몸이 운동 신경이 발달되지 않는 편이라고 해도, 씨름만은 자신 있었다.
씨름은 무게 싸움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력이었다. 상대의 기술이 잘 먹히지 않기 위해 살을 찌우는 것이지, 무게가 무거워야 씨름을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다른 기사들보다 검을 잘 휘두르지는 못해도 씨름에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니키엘은 미간을 좁히고 목탄을 쥐고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잔말 말고 이름이나 얹으시오. 기사가 웬 혓바닥이 이렇게 길어?”
“뭐? 이 자식이 근데-.”
회색 머리의 남자가 니키엘의 이죽거림을 듣고 열이 받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이었다.
“거기, 무슨 일이야. 단장님이 괜히 싸우지 말라고 하신 건 못 들었어?”
경기장 한편의 단상 위에 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입고 있는 튜닉과 브레를 봐서는 검은 기사단 내에서 꽤 직책이 높은 자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얼릭 님. 이 자식이 하도 건방져서….”
“소란 피우지 말고 시합이나 잘 접수해. 단장님 명령이 우선이다.”
“예, 알겠습니다….”
남자는 웅얼웅얼거리며 그쪽으로 변명하듯 말했다. 그쪽도 딱히 크게 나무랄 생각은 없었는지 이내 관심을 끄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모르는 얼굴인 것으로 봐서 니키엘을 궁까지 데려다주었던 얼라리요, 알레윈 우장군이나 베네딕 좌장군은 아닌 듯했다.
니키엘은 그쪽을 흘끔 보다가 머리에 덮은 수건을 풀어 아예 얼굴까지 반쯤 가린 채 입을 열었다.
“봤지. 그쪽네 단장이 나랑 싸우지 말라잖아. 얼른 접수나 해 달라고.”
“이런 건방진…. 됐고, 네놈 차례는 여섯 번째니까 준비나 하고 있어. 검은 가시 기사단이 네놈 콧대를 눌러 주지.”
남자는 얼릭이라 불린 자 쪽을 흘끔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니키엘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든가. 아참, 우승하면 정말로 히오칸의 꼬리뼈를 주는 건 맞지?”
“그렇다, 이 의심 많은 꼬맹아. 썩 꺼져 있어. 차례 되면 부를 테니까.”
남자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걸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니키엘은 얌전히 대기자석으로 향했다.
원형의 경기장 위에서는 시타타 시합이 한참이었다. 오일을 바른 남자 두 명이 벗은 상박을 부딪힌 채로 서로를 넘기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니키엘은 혹시 몰라 옆에 사람에게 룰을 물었다. 이번에도 검은 가시 기사단의 일원 중 하나였다.
“이보시오. 내가 잠깐 시합 규칙이 헷갈려서 그러는데, 시타타라는 게 일단 상대를 넘어트리면 이기는 것 아니요?”
“뭐야,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는 놈이 대기석에 앉아 있어.”
근위대와 사이가 안 좋은 건 사실인지 이번에도 상대는 니키엘의 말에 고깝게 대답했다.
남자는 니키엘보다 키는 작았지만 꽤 다부진 체격을 갖고 있었다. 시타타를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겠지만 상대의 샅바를 쥐느라 엄지와 검지가 이어진 부위에 굳은살이 배긴 씨름 선수들 같은 흔적은 없었다.
귀도 만두 귀가 아니었다. 밥만 먹고 시타타만 하는 놈이 아니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니키엘은 남자를 좀 더 도발해 보고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기요, 아니요. 그것만 말하면 되지 뭐 그렇게 말이 많소.”
“이 어린놈의 자식이…. 그래, 맞다. 너는 특별히 내가 상대해,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몸을 일으켜 접수를 위한 테이블 앞에 앉은 아까 그 회색 머리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니키엘 쪽을 가리키며 뭐라 뭐라 험악하게 말했다. 회색 머리의 남자가 니키엘을 바라보더니 씩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대전 상대로 니키엘을 원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첫판은 좀 쉬운 상대로 가고 싶었던 니키엘은 팔짱을 낀 채 보일 듯 말 듯 씩 웃고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씨름이나 레슬링은 힘이 중요한 경기이긴 하지만 그것은 기술력이 갖춰진 상대끼리의 싸움에서나 그러했다. 기술력이 팽팽한 상대와의 시합부터는 체급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쪽의 기술력이 훌륭하다면, 적은 힘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경기를 하는 꼴을 보아하니 시타타를 전문 선수급으로 수행한 자는 없는 듯했다. 아마추어끼리의 싸움이니 니키엘의 적당한 근력과 꽤 훌륭한 기술력으로 상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간에 각혈만 조심하면 돼.’
별안간 피를 토하는 일만 없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나저나…. 어떤 미친놈이 히오칸의 꼬리를 상품으로 걸고 시합을 시키나 했더니, 율란 발트였잖아.’
검은 가시 기사단의 단장이라면 율란 발트 대공이 확실했다. 히오칸의 꼬리뼈는 고가에 거래되니 시합을 열기에 좋은 상품이기는 했다.
문제는 이런 쓸모없는 시합을 열게 한 이유였다.
니키엘이 보기에 율란 발트라는 남자는 이런 시시콜콜한 대회를 부러 주최할 정도로 세상사에 관심이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필시 시합으로 근위대의 시선을 돌려 궁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교대로 진행되는 왕궁 순찰을 나간 근위대는 시합이 열리고 있는 경기장 쪽으로 집중을 빼앗길 것이고, 세 번 돌아야 완벽한 순찰을 두 번만 돌고는 바로 교대하러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뭘까.’
니키엘은 율란이 이런 시합을 연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니키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열이 받아 있던 옆자리 남자가 순서까지 바꾼 것인지 니키엘의 가명이 호명되었다.
“검은 가시 기사단의 톰 슈렉츠와 근위대의 니…. 벤디? 사람 이름이 니벤디가 뭐야!”
니키엘은 수건을 머리에 단단히 둘러맨 뒤 얼른 상의를 벗었다. 신고 있던 양말도 벗어 던졌다.
아닌 척했지만 니키엘도 사실은 투지가 끓고 있었다. 그동안 혼자서만 운동을 해 왔는데 이 김에 근력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면 될 것 같았다.
니키엘이 상의를 벗자 눈처럼 희고 고운 상체가 드러났다. 잠시 주변 소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