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39)화 (39/130)

39화

소 수레는 말 그대로 소들이 모는 수레였다. 비싼 철을 섞지는 않아도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 치고 제법 무게가 나가는 것들이었다.

소나 끌고 다니는 것을 인간에게 매게 하고는 연병장을 돌게 하라는 것이다. 약간은 잔인한 처사였다.

알레윈은 대공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정도로 완패했습니까?”

“그놈들이 백합의 웃통을 보았다. 그것도 옷을 입지 않은 맨몸의.”

“아, 백합의 벗은 상반신을…. 예?! 백합의 상반신이라뇨!”

백합이란 각 수장들이 니키엘을 부르는 은어였다.

청초한 꽃 주제에 줄기와 뿌리 부분에 독이 있는 백합은, 욕심 많은 부왕을 둔 니키엘을 부르는 멸칭이었다.

그런 니키엘의 상반신을 검은 가시 기사단 전원이 보았다니. 놀란 알레윈에게 율란은 가타부타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신장이 거대할 정도로 크고 옛 마법 문명이 만든 우수한 골렘처럼 골격이 장대한 율란이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깎아 만든 것 같은 눈썹뼈와 이어진 콧대가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그 상태로 인상을 찌푸리니 사람이 조각 같이 생긴 건 둘 째 치고 무척이나 흉흉해 보였다.

“아니 어쩌다 이 한낮에 웃통을 다 벗고…. 이번에는 집단 난교라도 벌이신답니까? 하여간 그분도….”

알레윈은 저절로 혀를 찼다.

지난번 니키엘을 왕자궁까지 배웅했을 때 느꼈던 침착함은 기우인 것 같았다. 그때의 니키엘은 아주 차분한 태도로 저를 모욕하던 가스파르 백작을 응징했다. 우아하고 군더더기 없는 처벌이었다.

니키엘에게 편견이 있던 알레윈은 그날 이후 니키엘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가스파르 백작에게 조곤조곤 잘못을 묻던 총명한 눈과 영민해 보이는 이마가 알레윈으로부터 호감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억양과 말투 또한 품위가 넘쳤었다.

발트가의 가신들 중 하나인 작센 백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알레윈은 선조서부터 늘 발트가를 모셨다. 그것도 발트가의 수장만을.

다른 세 가문이 그러하듯 발트가 역시 제 세력을 위하여 잔인하고 비열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지만, 대대로 수장이 된 이들만은 늘 고고한 성정을 갖고 태어났다. 진흙 속에 피어야 연꽃이라는 듯이 말이다.

때문에 그런 수장들을 옆에서 지밀하게 모시는 가신인 작센 백작가 역시 청렴하고 깨끗한 귀족인 반면 고지식한 부분이 있었다.

알레윈 역시 그러했다. 어느 정도 문란한 것을 귀족의 교양이라 여기는 수도 사교계와 달리 북부 사교계가 좀 더 폐쇄적인 데다가, 발트가의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보고 자란 반대급부로 점점 더 보수적으로 변한 것이다.

작센 백작가의 피를 타고 내려오는 고지식한 성품을 오히려 더 굳히는 꼴이 되었다.

때문에 알레윈은 니키엘의 난잡한 사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행실만 제대로 하셨다면 북부의 또 다른 주인이 되셨을 거다. 광룡의 저주에 걸린 각하를 위로해 주고 한평생 두 분이서 오순도순 살 수만 있다면 더러운 순록이나 뱀, 새 새끼한테 절대 빼앗기지 않게끔 북부 이테렌 전역이 니키엘 전하를 보호했을 텐데.’

알레윈은 늘 그 점을 아쉬워했다. 어렸을 때는 숫기 없이 하얗고 조용하기만 하던 니키엘은 어느샌가부터 성에 눈을 뜨더니 수도 사교계의 공식 걸레가 되었다.

그렇게 고귀하게 태어났으면서도, 그렇게 위대한 안식을 율란에게 제공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는 니키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날 마주한 니키엘은 전과는 달라 보였다. 전처럼 남을 유혹하는 향유를 뿌리지도 않고 건강한 장밋빛 뺨이 빛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머리 타래에서 은은하게 풍겨 오는 연꽃의 향기가 무척이나 좋았었다.

가스파르 백작을 혼내는 말투에서는 서릿발 같은 단호함이 느껴짐에도, 그이가 제 잘못을 뉘우치고 두려움에 떨 수 있도록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비난했다.

실로 ‘왕족’다운 처사였다. 알레윈은 달라진 니키엘을 보며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혹시나 니키엘이 멀쩡해졌다면, 왕의 핏줄이라면 치를 떠는 율란을 설득하여 해주의 기회를 잡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집단 난교라니. 제 버릇 개 못 준 꼴이었다. 알레윈이 혀를 쯧쯧 찬 순간이었다.

“시타타 시합을 하고 있더군.”

“네에?!”

알레윈은 그가 집단 난교를 했다고 착각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시타타 시합이라니. 그 연약한 왕자님이? 난교보다는 낫지만 그것도 나름으로 충격적이었다.

제가 서 있는 곳은 햇볕이 들지 못하게 하라며 오시니스 전통 양산보다 곱절은 큰 사이즈를 왕궁 대장장이들에게 직접 제작하게 했던 그 니키엘이? 무거운 청동으로 살을 만든 양산을 한 여름 뙤약볕에도 내내 들고 다니게 해 건강한 시종 열댓 명을 일사병에 걸리게 했던 그 니키엘이?

근육을 쓰는 일이라면 호흡근 운동도 싫어한다는 소문이 돌고, 팔뚝이 두꺼워질까 두렵다며 책 한 권 제 손으로 든 적이 없던 그 니키엘이 시타타 시합을 하다니. 알레윈은 믿을 수가 없었다.

시타타는 오시니스 남자들이라면 어릴 때건 커서건 반드시 한 번 이상은 해 봤을 정도로 대중적인 스포츠였다.

그것은 평민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즐기는 운동이라 새해를 맞이하여 상단들에 후원을 받는 시타타 선수들끼리 경합을 벌이는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가끔은 왕이 직접 경기를 개최하기도 했다. 민심이 안 좋을 때는 시타타 경기를 주최하라. 오시니스 태자들이 배우는 제왕학에 그런 말도 들어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오시니스 왕국민들 사이에서 시타타는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단 한 명, 냄새나고 불결하며 굳이 땀을 흘리는 경기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짜증을 내는 까탈이가 있었다. 바로 니키엘 오시니스였다.

그런데 그가 직접 나서 웃통을 벗고 시타타 시합에 임하다니. 알레윈은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분이 대체 어쩌다가…. 웬 놈에게 협박이라도 당하셨답니까?”

알레윈의 말에 율란은 피식 웃지도 않았다. 자신도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율란이 히오칸의 꼬리뼈를 상품으로 내걸고 시타타 시합을 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목을 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대는 사실상 왕궁에 사는 깡패 집단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은 왕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은 근위대로 하여금 낮에는 궁을 지키게 하고 밤에는 출궁시켜 고리대금업을 하게 했다.

사설 도박장을 운영하며 뒷돈을 벌어들이고 그것으로 제 개인 금고를 채웠다. 한 나라의 왕이, 그것도 오시니스 같은 강대국의 왕이 그런 짓을 벌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네 가문의 수장들은 모르는 사병을 키우기 위해서.’

왕족들은 사실상 네 가문의 수장들이 천부적으로 얻게 되는 광룡의 저주 때문에 그 명맥을 유지하고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왕족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 북부의 발트, 동부의 투르운, 서부의 그리프와 수도의 볼트윅을 이용하여 왕국민들을 다스리고 귀족들로부터 세금을 걷었다.

실제로 오시니스를 강대국답게 만드는 것은 위 네 가문인데도 불구하고, 왕족들은 광룡의 저주를 들먹여 그들을 지배함으로써 모든 것을 실상 오시니스 전국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일 붉은 꽃이란 없는 법. 어째선지 이유를 알 수 없이, 네 개의 가문 중 돌아가면서 딱 한 명의 저주 희생자가 나오던 때와는 달리 이번 세대에서는 네 명 모두 광룡의 저주를 앓게 되었다.

광룡의 저주는 수장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반면 강인한 힘을 주기도 했다. 집채만 한 짐승으로 변한 수장들은 젖은 종이 찢듯 마물을 해치웠고, 온 왕국민들이 그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수도 성안에 평민들이 모여 사는 키르니히 거리만 가 봐도 각 가문의 수장들을 상징하는 동물의 기념 단추가 불티난 듯 팔리기도 했다.

수장들 개개인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마물의 위협에서 지켜 주는 영웅들이 한 세대에 모두 태어났다는 사실이 왕국민들을 열광케한 것이다.

비열한 왕은 그를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포주처럼 아들을 팔아 영위한 권력을 수장들에게 빼앗기진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며, 독자적인 사병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왕의 사병이라니.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이 되지 않는 것들도 그냥 놔두면 후일 재앙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율란은 일단 근위대 대원들의 관심을 시타타 시합으로 돌려놓은 뒤 근위대장의 집무실로 숨어들어 그들이 궁 밖에서 어떤 건달짓을 하는지 뒤져 보았다.

서류를 훔쳐 갈 수는 없어 통째로 외운 뒤 유유히 빠져나오던 길이었다. 아무리 주위를 돌리려고 시작한 시합이래도 나사 빠진 근위대 놈들에게 지는 놈은 없겠지 싶어 경기장에 들린 것인데 웬 허연 놈이 목덜미가 새빨갛게 물든 사내의 허리춤을 잡고 있었다.

율란은 그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어떤 미친놈이 연병장으로 제 애인을 데리고 와 사람 많은 곳에 올라 살을 비비고 있는 줄 알았다.

그만큼 니키엘에게 샅바 잡힌 놈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갰다. 좌중도 조용한 것이 단체로 남의 애정 행각을 관람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매끈한 허리의 기립근 덕분에 가운데가 쏙 들어간 데다가 여신의 보조개로 불리는 흔적이 엉덩이 둔덕이 시작하는 허리 부근에 살짝 찍혀 있었다.

하의인 오시니스식 브레의 허리 부근에 묻은 오일과 잔뜩 젖은 상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말을 잃게 만들었다.

콜로세움처럼 복도가 경기장을 원형으로 둘러싼 터라, 율란은 복도를 걷는 동시에 경기장 단상 위에 올라간 니키엘을 둥글게 돌았다.

그의 매끈한 몸에 뿌려진 오일과 상아빛 피부, 산호처럼 붉게 빛나는 유실까지 젖어 있었다. 움푹 파인 쇄골에 작게 고인 황금빛 오일을 본 순간 율란은 제 안의 짐승이 날뛰는 기분을 느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