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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42)화 (42/130)

42화

율란과의 대화에서 부정하기 힘든 몸의 변화를 알아차린 니키엘은 침통해졌다. 그런 뒤 대책을 강구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게 남은 건 운동뿐이다. 운동을 통해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거야.’

니키엘은 운동을 향한 투지를 더욱 불태웠다. 운동을 통해 근육이 생기면 테스토스테론도 활성화 될 것이다. 테스토스테론은 니키엘이 남자를 좋아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니케일은 호르몬을 믿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물 토벌 대회를 위한 호신술을 익혀야 했던 것이다.

청동으로 만든 커다란 구리 구슬을 들고 트위스트 런지를 하며, 니키엘은 과연 누구에게 부탁해야 제대로 된 호신술 선생을 만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여러 가지를 살펴보러 연무장으로 향했을 때, 율란에게 붙잡혀 한 차례 경고를 듣고 나니 다시 갈 마음도 들지 않았던 것이다.

‘레이먼 놈한테 부탁해 볼까…. 태도가 싸가지 없어도 저가 먼저 신탁 내용을 꺼냈으니 선생 정도는 붙여 줄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았다. 괜히 애먼 곳 쑤시고 다니느라 시간 낭비를 할 게 아니라 레이먼에게 부탁하여 호신술을 배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신탁을 들먹여 마물 토벌 대회에 참가하라고 강제한 만큼 니키엘 역시 레이먼에게 제 요구를 들어 달라 말하는 것이 수월해 보였다.

니키엘은 오전 운동을 짧게, 고강도로 끝낸 뒤 몸을 대충 닦았다. 향 비누 하나로 머리도 감고 몸도 닦는 것을 폴에게 들켰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았기 때문에 3분 만에 군대 샤워를 완료했다.

그러고는 영견을 들고 다가오는 시종들을 모두 물린 채 머리 타래의 물기를 대충 쭉 짜낸 뒤 레이먼을 찾아 나설 준비를 했다.

폴은 오늘 오시니스의 여러 아우 나라 중 하나인 아신카국에서 들어오는 최고급 실크를 배당받기 위해 궁내청 처장에게 갖은 로비를 하러 떠났다.

니키엘로서는 그 비단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진짜 니키엘은 아신카산 옷감이 아니라면 입지 않았을 정도라고 했다.

광택이 좋고 부드러우며 가벼운 아신카산 비단은 수년 전, 수교 사교계를 강타한 뒤로부터 단 한 번도 유행을 내주지 않은 옷감이었다.

어쩐지 시종들이 내오는 옷들이 하나같이 부들거리긴 했다.

괜히 꾸물거리다가 궁내처장에게 지문이 닳도록 사바사바하느라 신경이 예민해진 폴을 마주치기라도 했다가는 머리에 물기를 안 말렸다고 털릴 것이 뻔했기 때문에, 니키엘은 오늘도 여염집 어린아이처럼 왕자궁을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강아지풀 하나를 뜯어 휭휭 돌리며 본궁 쪽으로 걸어 나갔다.

마물 토벌 대회 전 수도로 모인 다른 네 명의 수장들과는 다르게 레이먼은 수도를 거점으로 하는 유일한 대귀족이었다.

레이먼의 직책은 사냥부 장관이었다. 왕궁을 둘러싼 숲은 웬만한 영지를 두 개 반 정도 합친 크기로, 숲이 울창하고 빽빽하여 길잡이 없이 들어갔다가는 영영 못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오시니스 왕국의 궁전은 숲이라는 천해의 요새를 갖게 되었다.

왕족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늦여름과 초가을에 사냥을 즐기고는 했다. 수도 사교계가 왕에게 요청하면 개방하여 사냥 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 사냥 대회는 가을이 끝나 갈 무렵 치러져 수많은 영애와 영식들을 이어 주는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다.

사냥부 장관은 이 숲을 통솔하고 나아가 오시니스 전역에서 나타나는 마물에 대한 토벌 대회를 주관한다.

꽤 높은 직책으로 궁내 관직 중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직급이었다. 레이먼이 숲을 담당하는 이유는 뻔했다. 그가 거대한 순록이기 때문이다.

레이먼은 왕궁 숲의 주인이었다. 거대한 순록이 지키는 한, 왕궁 숲에는 마물이 들어오지 못했다.

비록 광룡의 저주를 받아 순록으로 화하면 이성을 잃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욱 위험을 감지한 마물들이 왕궁 근처의 숲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신성력에 보호를 받는 수도 라시리스가 마물로부터 1차 방어선이 되면, 그 이후에는 레이먼이 왕궁의 2차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볼트윅가는 대대로 왕궁의 숲을 보호해 왔다.

‘원작 설정에서 레이먼은 광증에 미쳐 날뛸 낌새가 보이면, 제 발로 숲으로 들어가 거기서 순록으로 변한다고 했었지.’

그만큼 왕궁 숲은 드넓었다. 그런 숲을 관리하기 위해 레이먼은 매일 아침 일찍 왕궁에 있는 관리부처 건물로 출근했다.

연무장 옆에 있는 곳이라 니키엘은 익숙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몇 발자국 더 걸었을 무렵이다.

어디서 삐로로-. 소리가 들리더니 비둘기보다 약간 큰 새 한 마리가 니키엘의 머리 위를 선회하는 것이 아닌가.

니키엘은 반가워 소리쳤다.

“너구나!”

새가 크게 날더니 곧장 떨어지지 않고 소용돌이 모양으로 원을 점점 작게 그리며 내려와 니키엘의 품 안으로 날아들었다.

진작에 팔을 벌리고 있던 니키엘은 하하, 웃으며 새를 껴안았다. 새가 완전히 날개를 접을 때까지 꼭 껴안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새 역시 니키엘이 반가운지 삐로로거렸다.

“너 오늘 나랑 놀지 않을래? 지금 성격 나쁜 놈 하나 만나러 갈 거긴 한데 그다음에는 나랑 궁으로 가자. 양고기 줄게.”

새가 알아듣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계속해서 말을 시켰다. 동그란 동공에 회색 눈을 한 검독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척 귀여워 씩 웃자 새가 그 모양을 빤히 보더니 제 머리로 니키엘의 가슴팍을 지그시 밀었다.

작은 주제에 힘이 꽤 센 것인지 가슴팍이 묵직하게 눌렸다. 니키엘은 의아한 얼굴로 품에 안겨 있던 검독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어, 왜?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저쪽 풀숲 가자고?”

새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길의 가장자리에 있는 풀숲으로 저를 미는 것 같아 니키엘은 말없이 따라 주었다.

무척 똑똑한 새인 것이 틀림없었다. 은근슬쩍 미는 것만으로 제 의사를 표현하다니. 풀숲에 사냥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니키엘은 순순히 새가 원하는 대로 풀숲을 헤쳤다.

그렇게 스무 걸음 정도 걸었을까. 니키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새를 향해 물었다.

“여기 오자고 한 거야? 무슨 일인데?”

새는 니키엘의 물음에 또 한 번 회색 눈동자로 빤히 보더니 그대로 니키엘의 목덜미에 제 고개를 비볐다.

“뭐야, 나랑 놀고 싶어서 그랬어?”

새가 애교 부리듯 고개를 비비적거리자 목덜미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올라왔다. 니키엘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도 어쩐지 간지러워 자꾸만 어깨를 움츠러들었다.

니키엘은 새가 고개를 비비는 동안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살짝 받쳐 안으면서도 간지러움에 움찔거렸다.

아니, 간지러움보다는 좀 더 묘한 감각이 들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새를 떼어 내려고 했다.

“그만….”

“…….”

그러나 새는 안겨 있는 자세에서 어떻게 한 것인지 날개를 펼쳐 니키엘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놀란 니키엘이 뒤로 넘어져야 했다.

“으악…!”

풀숲이 푹신하여 다친 곳은 없었지만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놀라고야 말았다.

그 와중에도 새가 다칠까 봐 꼭 껴안은 채 뒤로 넘어간 니키엘은 정신을 차리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한번 새의 지그시 누르는 힘에 반항하지 못하고 풀숲에 누워 버려야 했다.

“뭐 하는 거야. 가을철 풀숲에 잘못 누우면 쯔쯔가무시 옮는다고.”

니키엘이 새를 나무라듯 말한 순간이었다.

‘어라, 이 새가 이렇게 컸었나…?’

품 안에 들어와 있던 새가 날개를 펼치자 누워 있는 상태에서 하늘이 가려질 정도였다.

새는 그대로 또 한 번 고개를 내리더니 이제는 아예 느긋하게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니키엘의 목덜미에 부리를 비볐다.

부리에는 검독수리의 페로몬이 묻어 있을 것이다. 그걸 제게 묻히는 것 같았다.

‘난 제 암컷도 아닌데 얘가 왜 이래.’

니키엘은 다소 어리둥절한 태도로 검독수리를 제게서 떼어 내려 했다. 갑자기 불쑥 올라온 감각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읏….”

몸이 이상했다. 가슴이 간지럽고 아랫배가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니키엘은 제 얼굴에 열이 올랐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목덜미를 스치는 새의 부드러운 깃털이 못 견디게 간지러워졌다. 검독수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데다가 새는 밀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새가 제 상복부에 올라탄 상태라 그런가, 다른 때보다 유독 커 보이는 기분이었다. 비둘기보다 약간 큰 새가 이렇게 힘이 강할 리 없는데 이상했다.

“잠깐….”

니키엘은 이제 아예 입을 벌리면 비음이 튀어나올까 봐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새가 목덜미에 제 부리를 비볐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되다니.

‘이 미친 몸뚱어리. 이제는 새한테까지 발정을 해? 걸레걸레, 상걸레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네.’

부정하려고 해 봐도 아랫배가 묵직한 이 감각은 틀림없이 그것이었다. 백주 대낮에 귀여워하는 새에게 이런 느낌이 들다니. 니키엘은 패닉에 빠졌다.

사실 그것은 성적인 흥분이라기보다는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황홀감에 가까웠지만 늘 연구에 묻혀 사느라 제대로 된 연애도 하지 못했던 니키엘이 구분하기에는 너무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검독수리와 닿은 부분에서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것은 니키엘로 하여금 고양감을 들게 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성적인 흥분이 지속되는 기분과 비슷했고 니키엘은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만약 니키엘이 그 느낌의 정체를 진작 알았더라면, 이 수상한 새의 정체를 더 빨리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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