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54)화 (54/130)

54화

‘광배 운동! 견갑골 안정화 운동!’

오늘 운동은 간단하게 하기를 잘했다 여기는 중이었다.

니키엘은 성실하게 400번을 시행했다. 검을 내려치며 견갑골 주변 근육에 집중하려 애를 쓰기도 했다.

대충 가르치지는 않을 거라 생각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계속 옆에 붙어서 봐주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율란은 니키엘이 목검을 400번 내려치는 동안 계속해서 자세를 봐주었다.

그것도 꽤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서 말이다.

“어깨 내리고. 다리 더 벌려. 어정쩡하잖아. 자세 낮추고, 아랫배에 힘줘, 흔들리지 않게.”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지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필라테스든 헬스든, 어디를 가서 운동을 수강하게 되면 듣는 말투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상관없었다.

실제로 니키엘을 담당했던 헬스 트레이너는 더욱 더 혹독하게 니키엘을 지도하는 편이었다.

‘회원늬임-! 지금 이게 자세입니까! 우리 할머니도 이렇게 대충 하진 않으십니다! 이게 스쾃입니까, 스탑입니까!’

그렇게 인격 모독을 살짝 곁들인 스파르타 형식으로 배우다 보면 오히려 율란의 목검 끝은 다정한 터치 같아 느껴지는 것이다. 니키엘은 별 말하지 않고 열심히 목검을 휘둘렀다.

남은 개수가 100번쯤 일 때, 율란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체력이 좋군.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헉, 힘들기는…, 허억-! 한데, 버틸 만하오.”

숨이 거칠어지고 얼굴에 땀이 맺혔지만 정말 할 만했다.

오히려 검을 내려칠수록 광배근과 등 근육에 힘이 들어와 어깨가 펴지고 자세가 곧아지는 기분이었다.

간만에 샘솟은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팽팽히 만들며 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운동 즐거워! 짜릿해!’

니키엘은 약간 맑은 눈으로 평범한 이라면 하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땀이 많이 나와 이마에서 흐른 것이 눈을 타고 흘러내릴 것 같았다.

니키엘은 잠시 쇄도하던 것을 멈추고 튜닉자락을 들어 올려 이마를 닦았다. 옷자락이 올라간 덕에 배가 드러나며 시원해지는 효과는 덤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때, 어느새 다가온 율란이 니키엘의 옷자락을 잡아 내렸다. 어찌나 강력하게 당겼는지 튜닉의 박음질 부분에서 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니키엘은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율란을 올려다보았다. 율란이 혀를 쯧 찼다.

운동으로 인해 상기된 뺨과 올라간 체온으로 인해 니키엘의 근처에선 체향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전처럼 독한 장미향이 아닌 한여름에 핀 연꽃의 향이었다. 풀 냄새에 섞여 나는 것 같기도 해 밝은 혈색을 하고있는 니키엘에게 참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수련이 가득 핀 호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향이 율란의 후각을 마비시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율란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니키엘은 동물들의 호감을 사는 체향을 갖고 있었다. 목덜미에 이를 박고 혀로 땀방울들을 핥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게 하는. 게다가 올라간 옷자락 사이로 보인 하얀 복근이 두 눈에 아른거렸다. 백옥 같은 피부색이었다.

율란은 뒤로 돌아섰다. 아랫배가 묵직해져 온 것이다. 니키엘이 의아한 듯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대공? 어디를 가는 것이오.”

“…오늘 훈련은 끝이야. 나머지는 내일 채우도록 해.”

거기까지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한계였다. 율란은 손바닥을 코와 입에 대어 호흡기를 틀어막고는 빠른 걸음으로 연무장을 떠났다.

덩그러니 남겨진 니키엘만 멍하게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뭐야…. 화장실이 급했나….”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말이다.

***

니키엘은 나름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왕자궁으로 돌아갔다. 400번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300번을 휘두르는 동안 자세 교정을 꾸준히 밟았기 때문에 차근차근 기초를 쌓는 느낌이었다.

‘무릇 학문이란 기초가 중요한 법이지.’

굳이 따지자면 검술은 학문이 아니었지만 니키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왕자궁으로 돌려보내진 피크닉 바구니를 벤디만 모르게 처리하면 될 것 같았다.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 탄 니키엘이 계속 그를 기다리고 있던 폴에게 물었다.

“마부에게도 음식을 좀 나눠 주지 그랬어. 우리도 가는 길에 먹자.”

“이 밤에는 뭐 드시는 거 끔찍해 하셨잖아요.”

그건 비단 진짜 니키엘뿐 아니라 지금의 니키엘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과식은 나트륨 과다로 인해 수분을 흡수한다.

그러면 다음 날 붓게 되고 좋지 못한 컨디션으로 아침 운동에 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오후 7시가 넘어간 시간에는 피치 못할 일이 아니라면 뭔가를 먹지 않았던 니키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유산소 많이 해서 하루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음식 남기면 안 된다고.”

정찬 자리에서 복스럽게 잘 먹고 있는 영식에게 ‘그렇게 처먹으니 그대의 부친께서 백작위를 돼지에게 내려야 할지 그대에게 내려야 할지 늘 고민하지.’ 하고 막말을 일삼았던 니키엘 답지 않은 소리였지만, 기억을 잃은 뒤 니키엘이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린 것이 마음에 들었던 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마차의 창문을 모두 열어 둔 채 밤공기를 마시며 다 뭉개진 빵 사이에 베이컨을 끼워 겨자씨와 마요네즈를 발라 먹으며 흥얼거렸다.

마차 앞좌석에 마부를 향해 말을 걸 수 있도록 나 있는 조그만 창을 통해 마부에게도 망가진 재료들을 대충 끼워 넣은 샌드위치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룰루랄라 초가을의 밤바람을 즐기며 왕자궁으로 돌아갔다.

그 밤을 꽤 기분 좋게 보냈기 때문에, 니키엘은 다음날부터 제 앞에 펼쳐진 지옥을 보고 비명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다 뭔데!”

“뭐긴요. 오늘부터는 정말로 무도회 준비를 하셔야 해요.”

폴이 바쁘게 왕궁 재단사를 따라 옷감들을 옮기며 대꾸했다. 어제 내려치기로 등 운동을 했으니 하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스쾃과 런지를 하고 왔더니 니키엘의 응접실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아신카산 실크부터 시작하여 동대륙에서 온 비단, 진주를 곱게 갈아 넣은 것을 풀로 먹인 천과 레이스들, 온갖 종류의 보석이 박힌 장신구와 비단신들이 차례대로 응접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행거에는 각기 다른 색으로 똑같은 디자인의 남성용 블라우스들이 채워지기도 했다. 니키엘은 약간 아찔해졌다. 그 사이 폴이 니키엘에게 잔소리를 했다.

“다 입어 보셔야 하니까 어서 목욕을 하고 오셔야 합니다! 오늘만큼은 간단한 샤워만 하셔도 될 것 같네요. 시간이 없거든요.”

향유를 듬뿍 뿌린 목욕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담기 전에는 목욕이 아니라고 했던 폴도 마음이 바쁜지 니키엘에게 등목만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니키엘은 살짝 질린 얼굴로 욕실로 들어가 군대에서처럼 3분 컷으로 샤워를 마친 뒤 나와 타월로 아무렇게나 몸을 닦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토끼면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니 그것이 가장 좋은 비책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니키엘은 폴이 가져다준 옷가지를 빠르게 갈아입은 뒤 내실에서나 신는 슬리퍼를 신은 채로 그대로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문 뒤에 살짝 숨어 있었다. 정확히 20초 뒤, 폴이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전하, 이제 그만 나오셔야…. 어? 어디 가셨지?”

문 뒤에 숨어 있던 니키엘을 발견하지 못한 폴이 그대로 욕실에서 나서자 숨죽이고 있던 니키엘이 그대로 폴을 따라 빠져나와 복도로 도망쳤다. 그러고는 혹시나 뛸 때마다 슬리퍼가 따각거리는 소리를 낼까 봐 벗어 품에 안고는 복도를 전속력으로 뛰어 도망쳤다.

응접실이 있는 밑의 층에는 폴이 있을 테니 시종들이 사용하는 계단을 통해 주방이 있는 1층으로 바로 내려간 니키엘이 그제야 품에 품어 둔 슬리퍼를 꿰어 신고는 주방 문을 열었다.

“전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늘도 검술 수업에 가시나요?”

주방장 벤디가 니키엘을 즐겁게 맞이했다. 니키엘은 곧은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는 쉿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벤디에게 윙크한 뒤 주방 쪽문을 통해 도주했다.

지난 번 주방을 들락거릴 때 봐 두었던 통로였다. 니키엘은 그대로 왕궁 정원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슬리퍼가 가을이라 억세진 잔디에 푹푹 박혀 뛰기 쉽지는 않았지만 도망칠 정도는 됐다. 그렇게 왕자궁 담벼락을 완전히 나선 니키엘은 갈 곳이 필요했다.

“왕궁 도서관에나 가야지.”

물론 생각해 둔 곳은 한정적이었다. 도서관에 가서 마물 관련 책이나 읽다가 늦은 밤 귀가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졌다.

오늘도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선 니키엘은 강아지풀 하나를 꺾어 휭휭 돌리며 걸었다. 그렇게 니키엘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 근처는 언제나처럼 휑하기만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니키엘은 몇 번 와 봐 익힌 내부 구조를 생각해 내며 벽면 책장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 보았던 거대한 뱀 가죽으로 양장한 책도 보였다. 그 표면을 조금 쓰다듬던 니키엘은 벽면 책장 뒤에 공간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책장을 툭 밀자 책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장이 문처럼 열렸다. 니키엘은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서고 안의 또 다른 서고가 있었다. 금서를 모아 놓은 걸까? 니키엘은 두근거렸다.

오시니스 왕궁 도서관이 모아 둔 금서라니. 대체 어떤 책들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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