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마호가니 원목으로 된 책장들에는 양장이 귀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가죽 커버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딱 봐도 솜씨 좋은 무두장이가 일일이 책의 크기에 맞게 재단하여 씌운 듯 탄탄한 느낌과 고급스러운 느낌을 동시에 주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가죽 커버의 색이었다. 책들의 두께와 높이가 각기 다른데 꼭 한 권의 책처럼 같은 가죽에 같은 색의 표지였다.
니키엘은 시험 삼아 몇 권을 뽑아 살펴본 뒤, 책들의 표지는 원래 따로 있고 가죽 표지를 따로 제작하여 덧씌웠음을 깨달았다.
“왜 이런 짓을 굳이…?”
의문이 들었지만 몇 권 더 훑어본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책등에 적혀 있는 제목 그대로 왕궁 서고에 꽂히기에는 무리가 있는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이 살펴본 책들만 봐도 하나같이 제목이 다 도발적이었다.
오시니스 왕국의 주교와 교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
연금술과 솔리우스
동대륙의 신화
신의 아이들
언뜻 보면 평범한 제목이지만 그 함의가 뚜렷했다.
첫째로, 오시니스에서는 솔리우스가 국교이자 단일교로 그 외의 것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시니스의 왕족은 그 자체로 신과 닿아 있기 때문에 주교의 법황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의 성격을 띠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왕과 법황이 대립각을 띄고 있지만, 사실 오시니스 왕족과 솔리우스교의 법황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어느 한쪽 없이는 다른 쪽의 유지가 힘든 전략적 동맹 관계였기 때문이다.
오시니스 왕국은 서대륙의 패권자로 네 명의 수장들을 필두로 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지만, 사실 솔리우스교는 서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종교는 아니었다.
다른 왕국들은 오시니스의 아우나라를 자처하면서도 솔리우스교를 국교로 삼지 않고 있었다. 국민의 대다수가 솔리우스교를 믿기는 하나, ‘우리의 국교는 솔리우스교다’라는 선언을 하지 않은 채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주었다.
때문에 솔리우스교의 법황은 오시니스의 눈치를 꽤 많이 보았다. 애초에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태양신을 서대륙의 대표 신으로 승격시킨 것이 오시니스 왕국이란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이러한 이유들로 오시니스의 왕은 법황의 대리인으로 불리면서도 그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그런데 ‘오시니스 왕국의 주교와 교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니. 왕이 대변하는 주교를 향한 고찰은 사실상 주교를 씹고 뜯고 재단해 보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이는 나아가 국가보안법을 위배하는 대역죄에 속할 수도 있는 일이다.
책을 빠르게 뒤져 본 결과 미묘한 차이로 반역의 기준에서 애매하게 어긋나고는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왕이 수틀리면 책의 저자를 당장이라도 하옥하여 고문한 뒤 성문에 목을 매달아 본보기로 효수할 수도 있는 서적이었다.
게다가 ‘연금술과 솔리우스’라니. 이세계의 연금술은 마법을 통하여 더욱 발전하였지만, 오시니스 왕국의 마법부에서는 여전히 마법이란 미천한 인간들이 솔리우스의 힘을 잠깐 빌려 온 것일 뿐 그 영광과 기적은 모두 주신 솔리우스에게 있다는 것을 공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금술과 솔리우스’에서는 마법학이 솔리우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세계에 퍼져 있는 마나라는 거대한 자연의 힘을 과학적으로 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파하고 있었다.
책의 여러 단락에 걸쳐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점이 주교의 입장에선 참으로 발칙한 서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니 제목들을 다 가려 놨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니키엘은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바닥에 대충 쪼그려 앉아 개 중 얇은 책들을 속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책장에 기댄 등에 유독 툭 튀어나온 책이 있어 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온한 서적들 중에서도 가장 아래 책장을 채우고 있는 책들에게 또 흥미가 생긴 것이다.
니키엘은 아예 몸을 돌리고 책장의 맨 아래 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제 등을 찔렀던 그 책을 꺼내어 똑같이 가죽으로 가려진 표지를 넘기고 제목을 읽어 보았다.
‘나시우 오시니스’
책의 제목은 간단했다. 그러나 니키엘은 이질감을 느꼈다.
“나시우…. 나시우라면 광룡이잖아. 근데 나시우 오시니스라니? 꼭 광룡의 성씨가 오시니스인 것처럼….”
오시니스 왕국의 모든 왕족들은 오시니스라는 성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오시니스 왕국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룡의 성에 오시니스라는 글자가 붙다니. 꼭 나시우가 오시니스 왕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니키엘은 바닥에 흐트려 놓았던 다른 어떠한 책들보다 지금 막 첫 장을 넘긴 책에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책은 여러 가지 것들을 다루고 있었다. 나시우의 탄생과 태초의 용들이 서대륙에 터전을 잡았던 일화들, 그들의 생태와 기적을 행하는 생명체들에 대한 경이로움, 그들의 생활사 등이 담겨 있었다.
“뭐야, 너무 재미있잖아….”
내용이 꽤 심도 있는데다가 아직 학문이 완전하지 않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생태학 범주에 꽤 닿은 상태에서 용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책이었기 때문에 속독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나머지 책들을 정리해 두고 그 책만 따로 꺼내어 공간 가운데에 있는 책상으로 걸어가려던 참이었다.
니키엘이 들어오며 닫아두었던 책장이 소리 없이 스륵 열린 것이다. 놀란 니키엘은 숨을 삼켰다.
“지금 여기서 무얼 하시는…. 나오십시오, 전하.”
눈처럼 하얀 머릿결에 붉은 눈, 루시안 투르운 공작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니키엘은 반사적으로 변명했다.
“안녕하시오, 공. 나는 그냥 이 공간이 열리길래 들어와 본 것뿐이오.”
뜨끔한 기색의 니키엘은 들고 있던 책을 뒤로 숨겨 브레에 꽂아 넣고 튜닉 자락으로 덮으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이 책을 읽고 있던 걸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얀색 실크 위 청색 비단실로 모란꽃을 수놓은 프록코트를 걸친 미남자는 아스라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골격이 장대하고 눈썹뼈와 콧대가 높아 남성성을 강조하지만 않았어도 니키엘처럼 한 떨기 꽃이라 부를 만한 외모였다.
그런 미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더없이 낮은 목소리로 니키엘을 다그치듯 말하자, 뻔뻔한 구석이 있는 니키엘조차 긴장이 되었다.
루시안은 니키엘이 숨기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정확히 물었다.
“실례지만 전하, 뒤에 숨기신 것은 무엇이옵니까.”
뜨끔한 니키엘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으응, 공께서 무얼 말씀하는지 모르겠군. 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이제 그만 가 봐야지. 저, 저녁으로 뭐가 나올까. 아, 궁금해.”
약간 어색한 연기였다. 양심 있는 삶이 모토인지라,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뻔뻔하게 굴 수 있는 니키엘은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되면 그때부터 능청스러운 연기가 잘 나오지 않는 타입이었다.
당연하게도, 루시안은 니키엘의 그 연기에 속아 주지 않았다. 니키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뒤에 숨긴 것,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러나 그런 양심적 머뭇거림조차 제한 시간이 있었다. 딱 한 번 어색하게 행동한 뒤에는 원래 하던 것처럼 뻔뻔하게 굴 수 있었다.
니키엘은 수려한 미간을 구긴 채 루시안을 향해 말했다.
“그러는 공은 왜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오. 이곳이 내게 금지된 구역이라면 공에게도 그러할 텐데.”
“…마법부 장관은 궁내의 모든 서고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니키엘은 그래서 뭐, 라는 눈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그런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막내 왕자가 대체 왜 이곳에 와있는 것인지 이해 가지 않았다. 루시안이 아는 니키엘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족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기본적인 교육 과정도 늦은 나이인 16세에 겨우 완료했다고 들었다.
그건 그의 머리가 유독 나쁜 편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평균보다 살짝 떨어지기는 하나 학업의 성취가 없을 정도는 아닌데 놀랍도록 게으르며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그러했다.
그런데 굳이 서고까지 찾아와 금서를 전시한 구역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루시안이 아는 니키엘답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던 니키엘보다 훨씬 더 눈빛이 반짝거리는 얼굴을.
아무리 금서를 모아 놨다고 한들, 이곳에 니키엘의 흥미를 유발힐 만한 책은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춘화집이나 연인들 사이의 은밀한 일들을 다룬 연애 소설을 찾으러 들어왔다고 한들 소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러 책을 숨기는 모양이 신기하기도 하고 수상하기도 했다. 니키엘이 흥미를 느끼고 숨길만 한 책이 단 한 권도 없을 텐데 대체 어떤 책이길래 저러나 싶어졌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나머지 수장들 중 가장 신사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이 뱀은, 원래 같았으면 니키엘을 못 본 척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니키엘이 금서를 읽고 그것의 위험한 사상에 물들어 왕 앞에서 어쭙잖은 사견을 말한 탓에 지하 감옥에 유폐된다고 한들 루시안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15세의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루시안은 니키엘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쓰레기임을 알 수 있었다.
찬란한 보석 같은 껍데기에 싸인 쓰레기를 본 순간 루시안이 느꼈던 절망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