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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56)화 (56/130)

56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인간과 다른 종족이라 여기는 율란과 레이먼, 의식적으로도 자신을 그냥 새라고 생각하는 지카리와 달리 루시안은 꽤 인간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데다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그러했다.

미쳐 버린 전대 투르운 공작이 마법과 연금술을 통해 인형을 만들어 내듯 공작 부인에게 아이를 임신시켰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루시안은 날 때부터 피부와 머리카락이 백설과 같고 그 눈동자가 루비처럼 빨간 덕분에 투르운 공작 가문의 가신들로 부터 정통성을 의심받았다.

투르운 가문 사람들은 그 유전병을 축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대 공작 자체가 투르운가의 적통이 아닌 방계 혈족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동대륙에서는 영생을 의미하는 뱀이 가문의 상징인 투르운가는 역설적이게도 각 대의 명들이 유독 짧았다.

방년 40을 넘긴 가주가 역대에 드물기까지 했다. 루시안의 부친도 일찍 타계한 소공작을 대신하여 방계의 아이를 선대 공작의 양자로 들인 경우였다.

문제는 방계라고 해도 너무 먼 방계였다는 것에 있었다. 투르운가의 가신들은 저들보다 한미했던 가문의 소생이 저들의 머리 위에 오른 것을 심히 못마땅해했다.

때문에 모친을 폐렴에 떠나보낸 젖도 못 땐 당시의 루시안 소공작은 이듬해 가을, 사냥터에서 석궁을 맞은 채 발견된 부친의 사체를 관에 눕혀 두고 공작으로서의 계승식을 준비하게 된다.

암살당한 것과 마찬가지인 부친 때문에 루시안의 목숨도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광룡의 저주가 발현된 탓에 어린 뱀은 집사인 졸탄의 주머니에 숨어들어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역심을 품은 가신들에 의해 보호자를 잃은 루시안은 어린 나이에 잃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미암아 타인에게 희미하게나마 기대가 있는 편이었다.

어린 나이에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증명하여 자질성 논란을 잠재우고 가신들에게 위신을 세운 소공작은 누이처럼 따르던 하녀가 저를 위해 보내진 암살자였다는 걸 알았을 때도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날, 루시안이 니키엘을 처음으로 만났던 그때는 달랐다. 루시안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것은 가짜다.’

저보다 한참 작은 아이를 보고도 맹렬한 분노가 차오를 정도였다.

제 주인의 껍데기를 쓴 누군가가 그 자리에 남아 주인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신실한 종처럼 분노했다.

루시안은 그날로 니키엘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광룡의 저주가 해주될 것이라는 희망도 버렸다. 가짜에게 받을 수 있는 기적이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루시안은 깊이 침잠했다. 그러고도 벌써 몇 년이 흐른 것이다.

때문에 루시안은 니키엘이 분노한 부왕에 의해 폐옥되거나 성 밖에 효시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며칠 전 왕궁에 마물이 나타난 날 니키엘은 무언가 달랐다.

그와의 접촉에서 믿을 수 없는 황홀감을 느꼈던 루시안으로서는 금서고 안에 들어가 있는 니키엘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루시안은 니키엘에게 말을 건 것이다. 그러니 그가 숨기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리 내십시오, 전하.”

반면 니키엘은 왜 수장이란 것들은 다 이렇게 강압적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끄트머리에 전하라는 호칭만 붙이면 다인 줄 아는지, 이거해라 저거해라 명령하는 꼴이 짜증나기 시작했다.

니키엘은 표정을 굳힌 채 루시안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 나가려 했다. 루시안은 한숨을 쉬며 그 앞을 막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뭐? 잠깐-.”

니키엘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가온 루시안이 생각보다 훨씬 큰 손아귀 안에 니키엘의 두 손목을 그러쥔 채 품안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놀란 니키엘의 두 눈이 커졌다. 아니, 이게 무슨…? 레이먼과 율란이 니키엘과의 접촉을 병적으로 피해 왔기 때문에 니키엘은 루시안이 제게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하지 않았었다.

마물이 궁을 공격했을 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닿은 것뿐이지, 기본적으로 수장들이 저와의 접촉을 꺼린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니키엘은 루시안의 커다란 손아귀에 저항할 수도 없이 꽉 잡혀 버린 두 손목이 어이없었다.

원래도 나약한 몸이긴 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운동한 가락으로 그래도 근력이 좋아짐을 느끼고 있었는데 루시안은 어린아이를 제압하듯 손쉽게 니키엘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짜증이 치솟은 니키엘이 버둥거렸다.

“이거 못 놔?! 무례하오!”

“실례를 먼저 청하였으니 무례함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전하.”

루시안은 담백하게 말하며 니키엘의 등 뒤에 있는 것을 빼내기 위해 더욱 그를 제 품 안으로 넣었다.

니키엘의 뺨에 부드러운 아신카산 실크로 만든 프록코트에 감싸인 단단한 가슴팍이 비벼졌다. 그의 품 안에서는 옅은 카라꽃의 향이 났다. 니키엘의 얼굴이 삽시에 붉어졌다.

‘왜, 왜…! 왜 흥분되는 건데!’

니키엘은 점점 단단해지는 자신의 아랫배를 믿을 수가 없었다. 분노해야 마땅한 상황에 열이 받아 단단해지는 것이 제 심장이 아닌 아랫배 언저리라니.

나름 생불이라고 생각하는 니키엘도 열이 받는 상황은 많았다. 한 교수가 논문 리서치를 시켜 놓은 뒤 밤을 새서 완료해 가면 ‘그 쓸모없는 건 왜 모아 놨어! 갖고 꺼져!’ 하며 막말을 할 때나, 자주 개기던 후배 놈이 과내의 여학생을 희롱해놓고 모르쇠로 굴던 순간이나, 당첨금 3만원이던 로또 영수증을 잃어버렸던 일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 분노의 순간들 중 단 한 번도 아랫배가 단단해지거나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당연하지! 난 이상 성벽 같은 건 없다고!’

그렇다. 변태가 아닌 이상, 분노한 순간에 흥분하는 일은 없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다른 것일까.

루시안은 분명 니키엘의 말을 무시한 채로 그를 강제 진압 후 품으로 끌어당겼다. 원치 않은 신체 접촉인데다가 등 뒤에 숨겨 둔 흥미진진한 책을 빼앗길 절체절명의 때인데 왜 자신은 빌어먹을 카라꽃 향이나 맡고 있는 것일까.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루시안의 향을 들이마시려던 것을 멈추었다.

이 남자는 대체 왜 품에서 꽃향기가 나는 거야. 루시안이 저처럼 유난인 폴을 시종으로 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라 할지라도 니키엘은 등 뒤에 숨겨 둔 책을 빼앗길 수 없었다. ‘나시우 오시니스’라니. 안 그래도 광룡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관련 서적이 없던 참이었다.

야화를 모아 둔 서적이 궁에 있을 리도 만무하고 종교 관련 서적을 뒤져 보아도 광룡 나시우에 대한 구절은 왕가에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 외에는 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우연하게 찾은 책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니키엘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니키엘이 최선을 다해 반항하는 통에 두 사람의 신체는 접촉이 깊어졌다.

버둥거리는 니키엘을 지탱하기 위해 어깨 너비로 벌린 채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루시안의 다리 사이에 니키엘의 허벅지가 마구 비벼졌다.

상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품으로 파고들 듯 몸부림치는 바람에 루시안의 쇄골과 가슴팍에 니키엘의 이마와 뺨이 연신 비비적거렸다.

루시안의 눈앞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전하, 가만히…. 읏-.”

품안으로 파고드는 몸은 유연했다. 니키엘 본인은 자신이 꽤 근육이 붙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적당히 근육이 붙은 몸은 니키엘을 늘씬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양질의 운동을 한 근육들이 그러하듯 탄력이 좋고 말랑거렸다. 니키엘은 그 말랑거리며 낭창한 몸을 루시안에게 부비고 있었다.

서로의 사이에 옷감이 가로막혀 있었지만 루시안은 니키엘의 육체를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루시안이 더 참지 못하고 니키엘의 어깨를 잡아 때어 냈다. 그 때문에 잡고 있던 손목을 풀 수밖에 없었다.

니키엘은 갑작스레 떼어 내진 탓에 두 눈을 깜빡이다가 곧 승리한 사람처럼 씨익 웃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루시안이 니키엘에게 접촉하는 것이 손해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럼 그렇지. 나머지 놈들도 다 내게 닿는 걸 기피 했었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루시안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잡힌 어깨가 아플 정도로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있는 루시안은 니키엘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프록코트와 실크 블라우스에 감싸인 흉곽이 크게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있었다. 부푼 가슴팍이 씨근덕거리는 게 육안으로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섬세하게 생긴 미인형 얼굴에 비해 굵은 목줄기에 달린 호두알만 한 목울대가 연신 꿀렁거렸다. 마른침을 쉼 없이 삼키는 듯했다.

그의 목덜미에서는 연신 짐승의 페로몬이 나오고 있었다. 니키엘은 가까이에서 그걸 느끼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붉은 눈동자를 감싸고 있던 흰나비 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가가 꼭 그의 루비 같은 눈동자처럼 빨개져 있었다.

피부가 얇은 탓에 혈색이 그대로 드러난 루시안의 두 뺨은 오월의 장미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쯤 되자 니키엘은 루시안의 반응을 살필 수밖에 없어졌다.

‘아니, 왜 저래…? 어디 아픈가?’

루시안의 반응이 생각보다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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