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아직 아무도 전하의 왼쪽에 설 영광을 얻지 못했다면.”
그가 눈처럼 하얀 속눈썹을 잠시 깜빡이더니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새빨간 루비와 같은 눈동자를 들어 니키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음파라는 성질 외에 아무런 물리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귓가와 뺨에 달라붙듯 간지러운 무언가가 있었다.
상대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그의 시선에 진득하게 고여 니키엘을 향하고 있었다.
“그 영광을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 당장 가자.
라고 대답할 뻔했던 니키엘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외관에 홀려 예쁜 쓰레기를 사려다 정신 차렸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도회에 가기 위해 파트너가 필요하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루시안의 청을 수락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청을 하는 루시안의 태도가 전혀 가볍지 않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그날 누구 같이 갈 사람 있냐, 나랑 가는 건 어떻겠냐, 정도의 가벼운 청이었다면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물론 방금 전 루시안의 얼굴이 죽여주게 예뻤던 것은 인정한다.
‘아니, 사람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이곳에 와서 보게 된 제 얼굴도 물론 잘생기기는 했다. 그러나 청동 거울에 비쳐 본지라 상이 깨끗하지 않아 니키엘은 자신의 생김새가 뭇사람들로 하여금 찬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몰랐다.
때문에 미인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은 탓으로 루시안이 갖고 있는 미형의 생김을 보자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것이었다.
니키엘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루시안은 계속해서 니키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안은 다분히 충동적으로 니키엘에게 무도회의 에스코트를 청했지만, 말하고 나니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수장들이 니키엘의 옆에서 등장한 자신을 어떻게 볼지 불 보듯 훤하였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이 삐어 버려 원석을 발견하지 못한 게 어떻게 제 탓이 될 수 있겠는가. 자신은 그저 그 짐승 놈들이 그나마 멀쩡한 후각으로 니키엘의 진면모를 찾아내기 전에 빠르게 움직인 것뿐이었다. 선수필승. 언제나 승리하는 전략 아니던가.
제 안에 그런 뱀이 도사리고 있는지 몰랐던 루시안은 숨죽인 채 니키엘의 승낙만을 기대하는 눈을 했다. 루비처럼 붉은 눈에서 열망과 욕망을 걷어내고 순진한 척 그를 바라보며 말이다.
다행히 그런 정성들이 통했는지 잠깐 말이 없던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이 함께해 주면 나야 좋지. 안 그래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골머리를 앓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누군가를 구해서 가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니키엘은 절대 루시안의 외관에 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남자와 무도회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제게 이득인 쪽이 나았다.
게다가 폴의 잔소리가 더는 들어 주기 힘들었다. 또, 수도 귀족들이 단체로 니키엘을 무시하는 듯한데 무도회에 등장이라도 제대로 해 주면 평판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웬만해서는 누가 뭘 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니키엘은 점점 지내볼수록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모두 자신을 무시하기 시작하자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몰려 있는 무도회에서 또 한 번 얕보였다가는 앞으로 니키엘의 나날에는 시비와 멸시만 가득할 것 같았다.
무도회에서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춤을 출 수 있지만, 루시안이 말하는 것은 첫 춤의 상대일 것이다. 오시니스에서 첫 춤의 상대란 무도회의 파트너를 의미한다.
무도회 파트너가 정해지면 입장부터 파트너의 에스코트를 받게 된다. 루시안의 손을 잡고 입장하게 되면 적어도 다른 귀족들의 무시는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찌되었건 오시니스를 받치고 있는 네 기둥 중 한 사람이 아니던가.
여기저기 얕보는 시선 때문에 피곤하던 찰나에 꽤 좋은 제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겠는 이유가 있었다.
루시안의 청이 너무도 정중한데다가 어딘가 간지러운 구석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청을 거절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꼭 데이트 신청하는 것 같아 걸리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다른 놈들이랑 입장하는 것도 싫고.’
레이먼이나 율란더러 저와 같이 무도회에 가자고 하면 들을 말이 뻔했다. 걸레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는 둥 저를 비난할 것이다.
정말 걸레짓이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이곳에 와서는 얌전히 운동만 했던 니키엘로서는 억울해서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키엘이 승낙하자 루시안은 안심이 되었다는 듯 살짝 웃었다. 많이 웃지도 않았는데 기뻐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조금 쑥스러워져 흠, 목을 울리며 뺨을 긁적였다.
“그, 무도회를 가려면 춤을 배워야 할 텐데…. 내가 몸치라.”
“지금 해 보시겠습니까?”
루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니키엘은 저절로 붉어지려는 얼굴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뇌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루시안이 무슨 말만 하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기분이었다.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나직이 뱉으며 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바로 춤 연습을 해 보자고?”
“네. 거리끼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그러더니 그는 시동어를 내뱉지도 않고 공중에서 손을 휙 쥐었다가 펴는 것만으로 소파와 주위에 어지럽게 되어있던 것들을 벽 쪽으로 밀어냈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가구들을 보며 니키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치우는 방법을 몰라 안 치우는 건 아니었군?”
“…네. 좀 지저분하죠. 오실 줄 몰라 정리를 못해, 전하가 보시기엔 방이 어지러우셨을 겁니다.”
루시안은 딱히 대수로울 것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니키엘은 말 몇 마디를 통해 루시안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본인이 중요하다 여기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 타입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스튜 끓어오르는 맛있는 냄새가 연구실에 차오를 때까지 오시니스 전통 왈츠를 췄다.
그는 니키엘을 안아 들어 올릴 때처럼 팔 전체로 아래에서 위로 등을 받쳐 주었다.
단단하게 지지한 느낌이라 안정감이 드는 것과 별개로 두 사람의 몸이 살짝 떨어질 듯 달라붙어 있어 신경 쓰이긴 했다.
“팔을 이쪽으로.”
루시안은 물 흐르듯 니키엘의 손을 가져가 제 어깨 위에 얹었다.
“이 얹은 팔은 온전히 저에게 주신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야? 내 팔은 왜 가져가겠다는 것이오. 돌려주시게.”
루시안이 풋 웃는 것이 느껴졌다. 니키엘은 농담을 성공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헤실 풀어졌다.
살짝 웃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니키엘의 눈썹뼈와 시린 벽안, 얌전한 콧날 등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아예 초보 같은 상태에서 시작한 것인데도 니키엘의 몸이 왈츠의 스텝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제법 루시안의 리드에 따라가고 있었다.
음악 없이 스튜 끓는 소리에 맞춰 추는 왈츠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아예 초보티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루시안이 스텝을 알려 주었기 때문에 주로 발이 밟히는 이도 루시안이었다.
“미안하오, 공…. 내가 계속해서….”
“깃털 같으신 건 아니지만 밟힐 만합니다. 고의만 아니시라면 괜찮습니다.”
루시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가 제법 유한 것이 다른 수장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만나는 이가 폴밖에 없던 니키엘은 간만에 다른 이와 가까워진 기분이라 즐거웠다.
왈츠는 스텝을 밟으면 밟을수록 그 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몇 번의 턴만으로, 니키엘은 근육과 신경에 잠들어 있던 기억을 회복할 수 있었다.
루시안은 곧 돌던 스텝을 천천히 진행시켰다. 춤을 그만 추자는 것 같길래 그의 어깨에 얹어져 있던 손을 내렸는데 루시안은 여전히 니키엘의 등을 끌어안고 있는 채라 약간 어색하긴 했다.
그런 니키엘의 심정 따위는 모르겠다는 양, 루시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훌륭하십니다. 이제 스튜도 다 되었을 것 같은데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전하.”
“그렇소. 공복에 유산소는 근 손실을 일으키는데, 스튜가 다 되었으면 신세 좀 질 수 있겠소?”
루시안은 유스완쇼? 쿤숑쉴? 하며 갸웃거리더니 화롯가로 가 그릇에 스튜를 담은 뒤 정사각형의 천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검지를 공중에 두어 번 휘젓는 것만으로 니키엘의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대령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온 니키엘은 여전히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루시안이 스튜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삐익-. 하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새가 창공 위에서 우는 소리 같았다. 루시안이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연구실에는 창문이 없는데도 말이다.
“…식사는 혼자 하셔야겠습니다, 전하.”
“아, 바쁜 일이 생기신 것이오?”
스푼을 들어 올리려던 니키엘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한참 허공을 보고 있던 루시안이 이내 니키엘에게로 다가와 그의 손을 쥐고는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다 드시고 편하실 때 가시면 되겠습니다. 곧 찾아뵐 테니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 정중한 청에 하체 해야 되어 바쁘오, 할 수 없었던 니키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시안이 곧 물러나 연구실을 나섰다.
오늘 처음 와 본 타인의 연구실에 스튜와 함께 남겨진 니키엘은 약간 뻘쭘한 얼굴로 식사를 속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