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 시각 니키엘은 고로법에 참견한 기념으로 대장간과 무기고를 방문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기이면 철광석을 사용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직까지 무기들이 청동인 이유가 궁금했다.
문헌을 뒤져 보니 다른 나라들도 모두 청동을 사용한다고 했다. 철광석의 매립량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매장량은 많은데,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줄 모르는 느낌이었다.
“이 세계에는 석탄이 없어 그럴지도 몰라.”
목탄만으로는 순도 높은 철강을 뽑아낼 수 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목탄이든 석탄이든 일단은 용광로 자체가 없는 듯했다.
“이상하네. 왜일까.”
니키엘이 그렇게 대장간으로 향하고 있는 동안, 레이먼은 극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누군가 귓가에서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율란 발트가 네 것을 빼앗았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것이 언어인 것은 맞는데, 사람이 전달하는 목소리냐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레이먼은 관자놀이를 틀어쥐었다. 사냥부 관청으로 가는 길목이 코앞인데 두통이 몰아치며 두개골이 반으로 쩍 갈라질 것만 같았다.
율란 발트가 너의 것을 빼앗았다. 그에게 복수를, 그에게 피의 복수를.
목소리는 레이먼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이 바라는 점은 레이먼의 오랜 숙원과 일치했다.
레이먼은 제가 오랫동안 율란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의 누이에 대한 복수를 말이다.
어이없이 사냥개에 물려 죽은 거대한 순록의 시체가 볼트윅가의 저택으로 배달되던 순간 겪었던 황망함을 잊지 못한다.
레이먼은 복수를 해야 했다. 그와 그의 누이 리아 볼트윅은 냉랭한 볼트윅가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었다.
그는 율란에게 가족을 잃은 것이다.
그래, 너는 복수를 해야 해. 피의 복수를.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려면, 그러려면….
그러려면 니키엘 오시니스를 죽여야 했다. 니키엘 오시니스를 죽이고 이 땅에 구원이라고는 없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상심한 율란이 세계를 파괴하고, 그래야 빛을 잃은 짐승들이 날뛰어 종내에는 이 오시니스가 피의 바다처럼 변해 버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니키엘 오시니스를 죽여야 한다.”
그가 그렇게 내뱉은 순간이었다. 그의 발밑에서 검은 연기가 휘몰아치더니 수만 개의 넝쿨들이 뻗어 오듯 레이먼의 발목부터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레이먼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곳이 어디더라? 이곳은 아직 궁 안인데. 이곳에서 이렇게 광증을 내보일 수는 없는데.
그는 아직 궁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 조금만 걸으면 그가 관리하는 사냥부의 관청이 코앞이었다.
난리 통에 누군가 나와 보기라도 한다면 레이먼은 그가 얼굴을 알 수 없는 궁의 시종이든, 5년을 넘게 일한 동료든 상관없이 뿔로 들이받아 죽일 것이다.
거대한 발굽으로 내리눌러 죽일 수도 있었다. 살인을 한 순록은 그 영혼부터 더러워지고 오염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를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
그 처음이 바로 니키엘 오시니스였다.
레이먼은 이성과 혼돈의 경계 속에서 누굴 죽이고 누굴 죽이지 말아야 하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온몸의 세포가 그를 막고 있는데도 머릿속의 누군가 정을 대고 망치로 새기는 것처럼 어서 빨리 가서 니키엘을 죽이라는 메시지를 심고 있었다.
“으, 윽-.”
이래서는 안 됐다. 새 새끼든 뱀이든, 하다못해 커다란 개새끼라도 불러 저를 막게끔 해야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순록으로 변한 레이먼의 앞발에 눌려 비명횡사할 것이다.
그렇게 둘 수 없어 차라리 걸음을 옮겼다. 레이먼의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검은 연기는 넝쿨처럼 그를 휘어 감았고 벌써 하반신은 그 연기에 좀 먹힌 상태였다.
다른 시종들이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레이먼의 상태를 보고는 놀란 얼굴로 반대편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가 버려. 얼른 도망쳐. 레이먼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으로 그들을 멀리 보내려 했다. 그저 생각만으로 고함을 질러 궁에 있는 모든 이들을 내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
“으윽, 악, 아악-!”
투둑 거리는 소리가 나며 옷이 찢겼다. 레이먼은 자신의 척추가 하늘을 향해 곧게 설 수 없음을 직감했다.
상체가 내려가 결국엔 땅에 두 손바닥이 닿았다. 손바닥은 곧 발굽이 달린 순록의 것으로 변태하였다. 등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관자놀이에 누군가 말뚝을 박아 넣은 듯 괴롭더니 작은 뿔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것은 10년을 자란 사과나무의 가지보다 더욱 무럭무럭 커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레이먼의 이성이 중얼거렸다.
누굴 죽여야 한다고? 네가 죽여야 할 가장 첫 번째 사람이 대체 누구라고?
그 이성을 뚫고 누군가가 속삭였다. 도저히 사람의 것으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 언어가 그대로 가슴에 와 박히는 느낌이었다. 레이먼은 혼란스러웠다.
그때였다.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레이먼…?”
니키엘 오시니스였다. 레이먼은 뿔이 자라난 몰골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놀란 두 눈과 마주했다.
아직 변태가 덜 끝나 짐승으로도,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는 그를 보고 니키엘은 아연한 표정을 했다.
레이먼은 방금 전까지 제 안에서 속삭이던 것이 폭발할 정도로 외치는 걸 들었다.
그래, 저것이다! 저것을 죽여라! 저 빛나는 금빛을 내게 가져와! 저건 내 것이었어야 해!
레이먼은 아악, 하고 소리쳤지만, 그것은 순록의 포효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변화가 끝난 것이다.
“레이먼!”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집채만 한 순록이 달리는 소리에 땅이 울릴 정도였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달렸다. 거대한 순록의 뿔에 사람들이 걸리지 않도록 손사래 치며 말이다.
“비켜요! 뭘 멍청히 있어!”
바들바들 떨고 있던 시종에게 꽥 소리를 지르며 달렸다. 순록은 아마 왕궁 뒤쪽의 숲으로 가는 듯했다.
니키엘로서도 그게 나쁘지 않았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없을 테니 말이다.
니키엘은 전속력으로 순록을 뒤쫓았지만, 웬만한 집만큼 큰 순록이 최대의 속도로 달려가는 것을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이 씨, 안 되겠다.”
니키엘은 편법을 써 대각선으로 달려 나갔다. 순록과 같은 짐승들은 앞만 보고 뛰는 습관이 있다. 그들이 직선 코스로 가는 한 자신은 대각선으로 달려 숲으로 먼저 들어가 있으면 될 것 같았다.
숲에는 뿔에 걸릴 나무들이 많았다. 저 속도면 웬만한 나무들도 다 부서 가며 달리겠지만 어쨌든 속도는 줄 것이다.
다시 한 번 달려갔다. 솔직히 자신이 왜 달리는지도 몰랐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이걸 달리고 있지?’
지금이라도 율란이나 루시안, 아니면 근위대라도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닐까. 니키엘은 고민했으나 뛰는 걸 멈추지는 못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달린 덕분에 니키엘은 숲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따라 숲에서 날뛸 순록을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찾아간다 한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순록을 찾아봤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앞뒤 재지 않고 뛰어왔다. 무의식중에 말이다.
니키엘은 헉헉 숨을 내쉬며 저 멀리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향해 뛰었다. 숨이 너무 찰 때는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대부분 열심히 뛰었다.
누군가 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가, 멀리서 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리자 쪼르르 반대편을 향해 도망쳤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라 니키엘은 다시금 소리가 장대하게 들리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쿵, 쿠웅-. 이 정도 소리면 율란이나 다른 이들이 먼저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소드마스터면 달리기도 빠를 거 아냐.
욕을 짓씹은 니키엘은 쉬지 않고 걸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검은 순록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태라도 본 뒤 율란을 찾으러 숲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먼의 위치와 상태에 대해서 알려 주려면 일단 순록으로 변한 그를 만나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니키엘이 조금 더 걸었을 때였다.
우직끈, 쾅-.
말도 못 하게 삼엄한 소리를 내며 순록이 거대한 나무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족히 500년 이상은 되어 보이는 두꺼운 기둥의 나무였다.
왕궁의 숲에서 일정 부분 안쪽으로 들어오면 저처럼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다. 그 나무도 그런 종류 중 하나인 듯했다.
순록은 투레질 한 번 하지 않고 거친 숨을 내쉬며 나무를 머리로 들이박았다. 그의 온몸을 덮고 있는 검은 털, 검은 뿔이 숲에 가려진 햇빛 속에서도 차르르 빛나고 있었다.
니키엘은 상황도 잊은 채로 순록의 등을 한번 쓰다듬어 보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순록이 이쪽을 발견한 것이다.
니키엘과 검은 순록은 공중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두 눈은 그 자신의 터럭처럼 밤하늘보다 어두운 검은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