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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68)화 (68/130)

68화

그렇게 혼자 남겨진 레이먼은 헐벗고 있는 상태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살폈다.

“이건 뭐야….”

목에 질 좋은 천을 아무렇게나 찢어 만든 이상한 주머니 같은 게 매어져 있었다. 천 위를 더듬자 막대들이 느껴졌다. 꼭 목을 고정하기 위한 부목처럼 보였다.

레이먼은 그것을 풀다가 천에 고여 있는 연꽃 향을 맡았다.

“이게 대체 언제….”

니키엘이 매어 준 것일까? 그렇다면 언제 이것을 매어 준 걸까. 순록에서 다시 제 몸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 본 이는 니키엘이 아닌 율란이었다.

그리고 율란은 니키엘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었다. 레이먼은 다른 정보들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이성을 잃었던 순간이 명확하지 않았다.

율란이 사용하고 있는 근위 대장실을 나오면서 사고가 점점 흐려져 간다는 인식은 있었다.

루시안의 경우, 광증이 온몸을 좀먹으면 동면을 자는 뱀처럼 깊은 땅굴로 들어간다거나 거대한 호수 밑으로 가라앉아 광증을 견디려 노력한다.

이성이 완전히 소실되기 전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그것은 레이먼 또한 마찬가지였다. 광증의 기미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왕궁 숲으로 달려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새가 없었다. 광증의 징후가 레이먼을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 없는 변화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절대로 인명 피해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되뇌었던 것이다.

덕분에 순록으로 완전히 변태한 레이먼은 저도 모르게 사람들이 없는 숲으로 향했다. 그가 숲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니키엘 오시니스를 죽여라.

그 목소리는 어른의 것으로도 아이의 것으로도, 여자나 남자의 것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글자가 청각으로 들리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레이먼의 뇌리에 새겨져 순록으로 변한 그의 발굽을 움직이려 했다.

왕자궁으로 향하려는 걸 희미해진 이성을 붙잡아 겨우 숲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윽-!”

숲으로 가기 전 기억을 떠올리려 하자, 갑작스레 두통이 몰아쳤다. 그 이후의 기억이 희미했다.

그런데도 약간의 두통 외에는 기분이 상쾌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가뿐했다. 마치 광증을 앓은 적이 없다는 듯이.

이상한 일이었다. 광증에 휩싸여 순록으로 변하고 나면 여기저기 부딪혀 상처가 많은 것은 물론이고 근육이 부풀었다가 꺼진 탓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

지금의 레이먼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세포까지 차오른 충만함과 함께 맑은 물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가 나온 기분이었다.

“이상하네….”

레이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천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그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하늘 위를 올려다보자마자, 옷가지들이 레이먼의 얼굴 위로 투둑 떨어졌다. 얼굴을 덮은 것들을 걷어 내며 레이먼은 하늘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늘 위를 선회하던 지카리가 까마귀도 아니면서 까악-! 하고 신경질적인 울음을 내며 날아가 버렸다. 엄지를 치켜든 레이먼의 손가락 욕을 보고 짜증을 내는 듯했다.

새 새끼가 물어다 준 튜닉과 브레를 차례로 껴입은 레이먼은 그제야 신발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빌어먹을 새 새끼, 일부러 두고 온 게 틀림없어.”

물론이다. 지카리는 율란의 심부름이 귀찮아 레이먼의 부츠를 챙겨 오지 않았다.

그뿐 아니었다. 튜닉에서는 지푸라기 썩은 내가 나고 브레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어디 마구간지기나 대장간지기의 노동복을 그대로 가져온 듯했다. 입으니 쿰쿰한 땀 냄새까지 났다.

그러나 입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 억지로 껴입은 레이먼은 창공을 향해 다시 한번 욕하며 맨발로 숲을 나섰다.

레이먼은 걸으면 걸을수록 몸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뭐가 이상하냐면, 잘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더없이 상쾌하다는 게 이상했다.

푹 자 본 적이 언제더라. 레이먼은 다른 수장들보다 특히 불면증이 심했다. 늘 눈 밑에 기미를 달고 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숙면을 취했던 때처럼 개운하기만 했다.

어깨를 빙빙 돌려 풀면서 숲을 나선 레이먼은 숲 근처에 있는 마구간에서 누군가 걸어 둔 장화를 훔쳐 신고 사냥부 관청으로 향했다. 자신이 신던 것보다 현저히 작은 장화 때문에 걸음걸이가 괴상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냥부 직원들에게 오늘의 광증에 대해 말한 뒤 기록하게 할 생각이었다.

레이먼이 광증을 앓는 시기는 완벽히 일정하지 않아도 주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오늘 광증에서 벗어났으니 한동안은 광증을 앓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아직 마지막 광증의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광증을 일으킨 것이 의외긴 하지만 이런 날이 드문 것은 또 아니었다.

이번 증상이 여느 때와 다른 점은 광증의 지속 시간이다. 지난번과 비교해도 현저히 짧았다. 길게는 사흘에서 짧게는 하루 정도 지속되는 광증의 시간 동안 끝없이 고통받아 그 후유증이 무척 심했다.

계속해서 몸 상태를 살핀 레이먼은 관리부처 건물의 사냥부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냥부 차관인 에블린 볼프가 심드렁한 얼굴로 레이먼을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디서 망나니짓을 하다 오셨길래 꼬라지가 그러십니까.”

“그래, 백작도 좋은 오후 되시게.”

레이먼은 그녀의 망발을 가볍게 넘기고는 사냥부 사무실 안쪽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에블린이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똥 묻은 부츠를 신고 돌아다니지 말라며 잔소리했다.

사냥부 직원들 중 차관인 에블린 볼프 백작과 행정관인 미네르비나 바이스 남작은 레이먼의 진짜 성격을 알았다. 그가 포악한 순록이라는 것을 말이다.

다른 직원들 앞에서는 봄바람을 베어 문 듯 친절해도 그녀들 앞에서는 성격이 더러운 것을 숨길 생각 하지 않았다.

볼프 백작과 바이스 남작이 볼트윅 공작가의 가신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레이먼의 누이인 리아 볼트윅의 수하들이었다.

누이는 흙으로 돌아가며 레이먼에게 수하들까지 물려주었다. 누이의 놀이 동무로 자란 에블린과 미네르비나가 레이먼의 성격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대꾸 없이 문을 닫은 레이먼은 아까부터 이상한 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비용으로 가져다 둔 자신의 부츠를 꺼내어 신었다.

프록코트까지 걸친 후에야 제법 사람처럼 변한 몰골이 된 것을 청동 거울로 확인한 뒤 다시금 집무실을 나섰다. 코트의 주머니에 연꽃 향이 점점 옅어져 가는 천을 쑤셔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 거대 순록에게 피해 입은 사람이 없는지 알아봐.”

에블린이 외알 안경을 다시금 고정하며 레이먼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거대 순록이라면 친우분을 궁에 초대하셨습니까? 같이 이끼라도 뜯으셨나 봅니다.”

그녀의 말에 레이먼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래, 친우와 간만에 설원을 달리던 옛 추억을 되새기며 이끼를 뜯었지. 그게 경이 원하는 대답이야? 광증이 도진 시기가 일렀을 뿐이니까, 쉰 소리 그만하고 기록이나 해 둬.”

그 말에 에블린이 자리에서 펄쩍 일어나며 놀랐다.

“아니, 어쩌다가 광증이 도지신 겝니까?! 아직 시기도 이르다구요! 성질머리 더러운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새를 못 참으시고 또!”

레이먼은 살짝 질린 얼굴이 되었다. 에블린과 미네르비나를 볼 때마다 누이를 떠올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이처럼 잔소리하는 것까지 기껍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에블린에게 다시 말했다.

“피해나 알아봐. 일 없으면 퇴근하고.”

손을 휙 저으며 프록코트의 깃을 세운 레이먼이 다시금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에블린이 그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근데 어떻게 이다지도 빨리 광증에서 벗어나신 겝니까?”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나도 몰라.”

그렇다.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그러나 레이먼이 알아낼 수 있는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섰다. 관료들이 지나가며 짧게 인사하자 레이먼도 사근하게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그와 동시에 레이먼이 무언가를 떠올렸다.

‘연꽃 향유….’

목에 매어진 천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에도 미약하게나마 연꽃의 향이 묻어 있었다. 레이먼은 이 향유를 쓰는 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쓰러져 일어나자마자 궁 안을 돌아다니는 모양이군.’

전령이 니키엘의 의식 회복 소식을 들고 오자마자, 레이먼은 왕자궁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중간에 북쪽의 개자식이 수장들을 호출하지만 않았어도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벌 대회가 코앞인지라 모이라는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부족했다. 그렇게 수장들이 모인 곳으로 가는 도중 루시안을 만났다. 그것도 연꽃 향으로 범벅을 하여 나타난.

뱃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분노에 익숙한 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강렬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광증이 도진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저보다 먼저 루시안을 만나러 갔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빌어먹을 회의가 어이없이 파회되고, 광증을 겪지만 않았어도 바로 왕자궁으로 달려가 어째서 제가 병문안을 올 때까지 얌전히 있지 않았냐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의 기억이 뚝 끊겨 있다. 남은 것은 루시안의 어깨와 한쪽 허리춤에서 나던 향취처럼, 제 머리카락에 묻어 있는 연꽃의 향뿐.

‘백합이 나를 만났다? 그것도 내가 순록으로 변한 다음에?’

니키엘이 기억을 잃기 전과 다른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특별한 것을 느낄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레이먼은 이틀 전, 쓰러진 니키엘을 안아 올렸을 때 무언가 엄청난 느낌이 저를 관통할 거라 생각했다. 옛 가주들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지난번 손목을 잡았을 때 역시 아무런 느낌 없었지만, 안아 올린 것처럼 접촉이 진해진다면 또 다를 거라 추측했다.

한데, 신성력이 넘친다더니 그것도 다 거짓말인 듯했다. 그를 안아 올려도 별다른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 약간의 안정감과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져 잘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게다가 그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광증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니키엘이 신성력으로 충만하다면, 레이먼이 이렇게 평소보다 이르게 광증을 일으킬 일은 없었다.

니키엘의 신성력은 짐승으로 화하는 저주에 걸린 수장들을 구원하기 위해 갖춘 것이니까.

하지만 레이먼이 순록으로 화한 사이, 니키엘이 그의 머리를 만진 것은 틀림없었다.

후각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뺨을 문질러 보았다고. 그 백수정 같은 손가락으로 저의 얼굴을 만져 주고 목에 부목을 대 주었다고.

그렇다면 니키엘은 어떻게 자신을 만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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