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71)화 (71/130)

71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로법을 고안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분명 루시안의 책상에 있던 메모들은 고로법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니키엘이 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알레윈은 니키엘이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왕국민들은 신전에 축성을 입은 철기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기가 되었든 식기가 되었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저희도 평소에는 청동으로 수련하지만, 이 시기가 되면 축성을 마친 철로 된 무기들이 신전에서 도착합니다.”

그 말인즉 신전이 오시니스의 군권과 생활 전반에 걸친 모든 걸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기사들의 무기도 장악하고 있다면, 철이 필요한 다른 물품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얘기였다.

니키엘은 그제야 레이먼이 신탁이 내려온 것을 말하며 토벌 대회에 참여해 달라고 말을 바꿨던 때를 떠올렸다. 레이먼은 나름으로 신전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오시니스 전반에 걸친 신전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서대륙의 다른 나라들도 청동을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뭘까 싶어진 것이다.

솔리우스를 섬겨도 아예 국교로 삼는 나라는 별로 없어 오시니스가 유일하다고 봐야 한다는 구절도 읽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폴이 챙겨 준 비단 손수건으로 땀을 닦은 니키엘은 목검을 알레윈에게 넘기며 살짝 웃었다.

“음, 배가 갑자기 아프네? 얼라리 공,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해도 괜찮겠는가?”

“헉, 배가 아프시옵니까, 전하! 어서 의원을…!”

“아니야, 어제 배를 내놓고 잤더니 배탈이 났나 보네. 요즘 쌀쌀하지 않는가.”

“배를 내놓고….”

뭔가를 생각하던 알레윈의 얼굴이 삽시에 붉어졌지만, 니키엘은 신경 쓰지 않고 그를 지나쳐 훈련 용 튜닉 위에 자수가 화려하게 수놓인 비단 조끼를 걸쳤다.

하도 튜닉 차림으로 돌아다녔더니 제발 이거라도 걸치라고 폴이 챙겨 준 것이었다. 그것을 다 입은 니키엘이 알레윈에게 빠르게 인사한 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전하…!”

뒤에서 알레윈이 저를 부르든 말든 상관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니키엘은 그다음 곧장 루시안을 찾아 나섰다. 설명을 들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무장에서 루시안이 있는 마법국, 즉 마법부 건물은 가깝지는 않았으나 멀지도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남의 눈에 띄기 싫어 한적한 길로만 다녔을 텐데 마음이 바빠 최소한 숨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바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저를 보고 허리를 숙이는 궁인들이 보였지만, 마주 인사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루시안이 있을 법한 곳에 도달한 니키엘은 여전히 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에게 말했다.

“투르운 공작에게 내가 왔다 고하게.”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누군가 부드럽게 니키엘의 손을 가져가 손등 위에 키스하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직접 뫼시러 나왔습니다.”

니키엘은 눈을 반짝였다. 아니, 내가 온 건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에 총명하게 반짝이는 두 눈을 바라보며 루시안이 웃었다.

“전 개는 아니지만 후각이 무척 좋습니다.”

그제야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뱀인데다가 루시안 그 자신이 밝은 곳을 싫어하니 후각이 더욱 발달 되었을 것이다. 니키엘은 뺨을 긁적였다.

‘진짜 냄새 대박 나나 본데. 폴 말대로 샤워가 아니라 목욕을 해야겠어. 그냥 1, 20분 후딱 샤워하는 거로는 냄새가 안 가시나 봐.’

하필 검술 수업을 듣고 온 참이라 땀 냄새가 신경 쓰였던 니키엘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루시안이 다시금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와, 또 자이로드롭 타나 본데. 지난번 루시안에게 안겨 최상층의 창문까지 올라갔던 것이 생각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안은 계단 따위는 무용하다는 듯 탑처럼 생긴 건물의 꼭대기 창에 올라 안전하게 니키엘을 내려 주었다.

성인 남자가 고개만 살짝 숙이면 들어갈 수 있는 창 안으로 들어간 니키엘이 복도 바닥에 두 다리를 내리자, 루시안 역시 따라 들어왔다.

니키엘은 마치 제집처럼 전에 와 봤던 데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루시안이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왜 웃는지 궁금했지만 급한 건 그게 아닌지라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시 한번 루시안의 연구실로 함께 걸어 들어갔다.

공작의 등 뒤로 문이 닫히자, 니키엘은 제 목소리가 다소 성급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어 물어봤다.

“신전이 고로법을 독점하고 있는가?”

“…전하.”

루시안의 얼굴이 살며시 굳었다. 그러나 그것은 니키엘이 황당한 소리를 한다는 데에서 오는 피로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들어가선 안 될 곳으로 향한 아이를 본 안타까움과 걱정에 가까웠다.

그 표정을 본 니키엘은 자신이 정답을 맞혔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쉽게 속을 내비치지 않았다.

“지난번 제 연구에 메모를 남기고 가신 분도 역시 전하가 맞군요.”

니키엘은 뜨끔했다. 사실 들키지 않을 리가 없는데 자신이 지금 기억 상실증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걸 살짝 까먹은 탓에 환원 반응식을 적어 놓았던 걸 떠올린 것이다.

이곳에 온 뒤, 웬 문짝만 한 남자 네 명과 결혼할 운명에 처해진 것을 빼면 모두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웬만해서 현대인이 다른 세계로 떨어진 다음에는 ‘아, 책에 빙의됐나 봐. 글도 모르는 무지렁이로 살걸. 괜히 독서했네.’ 하고 상황에 대한 원망부터 할 텐데 니키엘은 운동부터 했다. 물론 정상적인 생각을 하기 힘들 만큼 몸이 쓰레기였던 상태라 운동부터 하여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깃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있지만, 솔직히 중간부터는 그냥 운동만 열심히 했다.

그 빠른 적응력 때문에 자신이 기억 상실증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걸 약간 까먹었던 것이다. 니키엘은 헛기침을 하며 일단 모른 척했다.

“그으거는 그냥 낙서요. 뭐 의미도 없는 건데….”

루시안은 일단 넘어가 주겠다는 듯이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니키엘은 순순한 웃음을 짓고는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말 좀 해 보오. 정말 신전이 고로법을 독점하고 있소?”

루시안은 침음을 삼키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전에서는 기부금을 내야지만 축성이 완료된 철기를 내줍니다. 그러나 그 만용을 허용하는 건 국왕 폐하십니다.”

뭐? 니키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이 놀랍기도 했지만, 루시안이 그런 식으로 비난하는 이는 어쨌거나 니키엘의 부왕이니 말이다. 당황하여 더듬더듬 물었다.

“그, 자식 앞에서 부친의 욕을 한다는 것은….”

“수장들이 폐하에게 불충하다는 건 안연 거리의 아이들도 압니다.”

그거야 그렇겠지만…. 니키엘은 고개를 슬슬 끄덕였다. 루시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게다가 전하의 역모 증좌를 제가 갖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하였소?”

그가 전하라 말할 수 있는 이는 자신 밖에 없는데 역모의 증좌라니. 놀란 니키엘이 찻잔만 해진 눈으로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루시안이 그런 그를 흘끗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에처럼 순순한 청년이라는 생각이 쉬 들지 않을 만큼 다소 비열한 표정이었는데, 그것이 몹시 잘 어울렸다.

‘어라…? 착하고 바른 청년 아니었던가.’

병약한 몸으로 마법과 연금술을 연구하며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던 캐릭터였던 것 같은데 저런 비릿한 웃음도 지을 줄 안다는 것이 놀라운 데다가, 또 그것이 본인에게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게 신기했다.

니키엘이 루시안의 그런 웃음에 잠깐 넋을 놓은 사이,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은발처럼 보이는 거미줄 같은 머리카락들이 쏟아져 내렸다. 좋은 향이 났다. 살짝 섞여 있는 뱀의 페로몬이 이상하게 고혹적이었다.

“고로법을 연구하는 것은 현재의 국법상 대역죄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니 고로법에 핵심 실마리를 주신 전하께오서도 역모에 가담하신 게 됩니다.”

“그게 왜 그렇게 돼!”

루시안에게서 나는 향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뒤늦게 놀란 니키엘이 꽥 소리를 질렀다. 역모라니. 자신은 왕의 자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근래 들어 흥미라고는 마물과 검술 수업밖에 없는 건전하고 바른 사람인데 역모라니.

모함에 놀란 니키엘이 소리치자 루시안이 눈을 접으며 웃기 시작했다. 저도 웃음을 참고 싶은데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공, 지금 나를 놀린 게요?”

“아닙니다, 전하. 어찌 미천한 짐승이 감히 전하를 놀리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짐승이라 자칭한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니키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대는 나를 기억해 내야 해. 그대의 기억까지 모조리 껴안고 사는 가련한 짐승을 동정하여.’

불현듯 떠올린 그 목소리는 빠르게 니키엘을 지나쳤다. 니키엘은 잠깐 멍해져 있다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투덜거렸다.

“말은 잘하시는군. 그런데 공, 말 돌리는 것에 애를 쓴 모양인데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소. 신전이 왜 고로법을 독점하는지 말해 달라니까.”

루시안은 니키엘의 그 말에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니키엘의 귓가에 대고 비밀을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때는 제가 직접 전하를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전하께 말씀드릴 그 기회를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뱀의 혓바닥처럼 부드러운 청유였다. 니키엘은 끙, 하고 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완고한데 더 알아내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니키엘은 그날 루시안으로부터 알아낸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며칠 뒤, 니키엘은 그가 대답을 유보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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