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72)화 (72/130)

72화

“뭘 하는 거야?”

니키엘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운 왕자궁이 이상하여 폴을 불러 물었다.

오늘은 가볍게 유산소로 하루를 시작했다. 샤워나 등목만으로는 체취가 가시지 않는 듯하여 꽤 공들여 목욕을 끝냈다.

가벼운 조깅을 끝마친 뒤 그냥 들어갈까 하다가 구리봉을 잡고 무게를 치다 보니 손에 금속의 냄새와 함께 푸른 녹이 묻었는데, 시종 아이 하나가 그걸 닦는다고 애를 쓰는 걸 보니 미안해졌다.

다음부터는 수건으로 감싼 다음 무게를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동하지 않을 생각은 전혀 없는 니키엘이었다.

그 이후에는 벤디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제 방 소파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는데 폴이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복도에서 퍼진 소음이 방안까지 밀려들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시끄럽지 않아 무슨 일인가 싶었다. 무도회 준비로 바쁜가 하고 목을 쭉 빼내어 살펴봤지만, 그도 아닌 듯했다.

폴은 니키엘의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오늘 신전에서 철로 된 집기들이 들어와서요. 축성을 마친 철기들이라 조심히 다뤄야 합니다.”

그러니까 철에 무슨 축성을 하는 건데. 축성으로 철이 녹슬지 않게 빌어 주는 걸까? 무슨 그런 쓸데없는 짓을? 니키엘은 기가 막혔다.

성스러워진 철이라니.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해 못 할 일이었다. 축성을 받아 홀리 해진 아이언은 뭔가 더 특별한 일을 하나? 그래 봤자 Fe, 원자번호 26에 전자 배열 [Ar] 3d64s2 인 금속 아니겠는가. 축성한다고 해서 철이 티타늄으로 바뀔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축성으로 인해 녹이 스는 것이 덜하다 해도, 산화된 철은 약산성의 성질을 띠는 물질로 닦아 주면 된다. 산화-환원 반응을 모르는 중세인들이 괜히 신전에 돈을 퍼 주고 애먼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니키엘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며칠 전 루시안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고로법을 건드리는 것은 역모죄와 맞닿아 있다고 했다.

대통령이 부패하면 촛불을 들고 일어서는 민주화의 나라에서 자란 니키엘은 역모죄가 피부에 바로 와닿는 편은 아니었지만, 중세 시대의 역모란 삼족이 멸하는 가장 큰 범죄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니키엘은 루시안이 해 준 말들과 신전과 왕가의 교착 관계에 대해 떠올린 뒤,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들이 고로법을 몰라서 철기를 생산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신전이 무기부터 시작해 모든 잡기에 대한 생산권을 쥐고 있고, 그걸 묵인하는 게 왕이라는 거 같은데.’

별안간 육군 병장 말기 제대한 건아에게 시집가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노망난 아저씨. 니키엘은 다시금 무언가를 생각해 보다가, 조심스레 폴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신전에서 사람들이 와 있는 거야?”

“네. 신관님들께서 방문하셨죠.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신관님들이 축성이 완료된 무기와 함께 궁으로 오신 다음, 토벌 대회를 위한 무도회까지 참석하고 가세요.”

폴은 들뜬 얼굴로 덧붙였다.

“올해는 기사단 총장 예하께서 직접 방문하셨답니다!”

예하고 예상이고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 니키엘이 뚱한 얼굴을 하고 있자 폴이 아차 싶은 얼굴로 덧붙였다.

“전하께서 재작년 축일에 총장 예하가 무척이나 잘생기셨다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은 기억나시지 않겠지만, 예하께서는 무척이나 헌헌장부이시니 전하께오서도 다시 뵈면 좋아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남성에 대한 성적 관심이 0에 수렴하는 니키엘은 글쿤.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폴이 했던 말들에 대해 다시금 헤아렸다.

니키엘은 그 이후로도 홀리 아이언에 대해 전혀 관심 없는 척 책을 뒤적거리다가, 폴이 무도회 의상의 마흔네 번째 가봉을 맞추러 가자고 하기 전에 또 한 번 왕자궁에서 도망쳤다. 도망치는 것에 요령이 붙어 이제는 숨 쉬듯 도주할 수 있게 되었다.

궁에서 몰래 빠져나온 니키엘은 신관들이 있을 만한 곳을 예측해 보았다. 왕궁 안에도 왕족들을 위한 솔리우스의 신전이 있으니, 아마 그 옆에 지어진 숙소나 강당에 있지 않을까 했다. 니키엘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

“신전 기사단 총장이 왔다고?”

율란의 미간 사이에 골이 패었다. 베네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년과는 달라 이상합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신전의 기사단은 오로지 솔리우스의 은총 아래에서만 검을 든다는 미명으로 이교도와의 전쟁을 통한 포교 활동에만 총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마물 토벌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많은 민초들이 마물에 의해 짓밟혀 죽고, 매년 그에 따른 피해에 의해 왕국민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솔리우스와 상관없다고 못 박았다. 네 명의 수장들은 단 한 번도 신전에서 보낸 지원군과 함께 마물 토벌에 나선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기사단 총장이 직접 오다니.

예년 같았으면 주교급 인사나 보좌주교를 보내어 축성을 끝마친 무기들과 집기들을 왕궁으로 들인 뒤 무도회에 참가했다가 신전으로 귀순했을 것이다. 기사단 총장은 그들이 매년 보내던 보좌주교보다 지위가 월등히 높았다. 굳이 이런 뒤치다꺼리에 낄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신전에서 마물 토벌 대회를 기념하여 왕궁에 방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21년 전, 오시니스 왕국의 동부 직역인 울루킨 지방의 근처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인적이 드문 데다가 지방 귀족의 영지도 아닌 터라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거대한 소리와 함께 산 하나가 무너졌다. 산사태가 일어나자, 왕국의 초창기에 멸문당한 어느 귀족이 개인 금고로 쓰던 작은 동굴이 드러났다.

동굴에는 호화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세월이 오래되었는지 비단 등은 공기에 닿자마자 스러져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번쩍이는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부의 울루킨을 거점으로 두고 있던 그리프 후작가의 당시 가주는 이 동굴을 통째로 지금의 왕에게 바쳤다.

태자로 책봉되자마자 부왕이 붕어하는 바람에 왕위를 막 물려받은 젊은 왕은 이 동굴에서 경전 하나를 발견했다. 흑마룡이 처치되었을 때, 그의 피와 살에서 태어난 마물들로부터 약 300명의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순직한 수도사, 이카임이 집필한 경전이었다.

성 이카임이 친필로 쓴 경전이라니. 종교학적 가치가 어마어마했다. 젊은 왕은 이 경전을 바로 신전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경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둠이 일어남에, 모든 쇠에 독이 슬었다. 태양께서 그것을 안타깝게 여겨 물러가라 말씀하시니, 쇠를 뒤덮은 삿된 것들이 종적을 감추었다.

신전에서는 이 구절을 빌미로 고로법을 독점했다. 물론 그냥 독점은 아니었다. 쇠붙이 축성에 쓰이는 기부금을 나라의 예산으로 측정한 다음, 왕에게 그중 일부를 뒷구멍으로 찔러 주었다.

그렇게 나라의 살림에 쓰일 세금들이 왕의 사유 재산이 된 것이다. 신성권으로 보호받는 신전의 고로법 독점은 왕과 신전의 합작품이었다.

덕분에 멀쩡하게 명맥을 유지하던 고로법이 모두 폐기되고, 수백 명의 대장장이가 목숨을 잃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오시니스의 눈치를 보며 고로법을 폐지시키는 듯했다. 뒤로는 철기를 생산해도 대놓고는 대장장이들을 옹호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전이 일어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왕이 신전을 통하여 쇠붙이를 장악하려는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수장들의 무력이 두려운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나약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소인배였다. 때문에 왕은 무기에 대한 독점권을 간접적으로 쥐고 수장들이 마물 토벌 외에 무력을 쓸 수 없게끔 했다.

그로 인해 파생할 왕국민들의 불편함은 생각하지 않았다. 축성을 들인 철이 비싼 나머지 청동으로 만든 농기구로 밭을 갈아야 하는 농민들은 배로 일해야 했던 것이다.

“…신탁 때문에 방문했을 수도 있다.”

율란은 니키엘이 기억을 잃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왔던 신탁을 기억해 냈다. 당시의 율란은 당연하게도 니키엘을 토벌 대회에서 배제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탁이 내려온 것이다. 율란은 사실 그 신탁이라는 것도 신전의 정치적인 장치라고 여겼다. 저주 때문에 신성력에 대한 예민성을 지니고 태어난 율란은 매년마다 법황의 신성력이 줄어들어 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물줄기처럼 쏟아지는 황금의 성력은 해를 거듭할수록 바다에서 강으로, 강에서 냇물로 세력이 좁아져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법황이 그 정도면 나머지 추기경들과 대주교, 또 그 밑의 사제들은 말할 것 없었다. 작금의 신전에는 신이 불러일으킨 성력이 말라 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신탁은 니키엘을 통한 신성력의 존재 유무 입증을 위한 정지척인 장치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기사단 총장이 직접 방문한 것도 그런 속셈의 일환일 것이다. 율란의 말에 베네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덧붙였다.

“그런데…. 볼트윅 공작이 며칠 전부터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총장 일행을 맞이할 이가 없다고 합니다. 각하께서 직접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율란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솟았다. 두문불출이라니. 활동량이 많은 숫사슴놈(레이먼은 순록이다.)은 웬만해서 집에 틀어박혀 있는 일이 적었다.

굴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한 달이고 나오지 않는 뱀이나 날아가 버리면 종적을 알 수가 없는 새를 대신하여 대외의 일들을 처리하는 건 보통 레이먼이었다.

정쟁에 능한 것도 레이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이먼이 두문불출하다니. 며칠 전 광증으로 인해 숲으로 달려가 나무에 머리라도 처박고 어디가 미쳐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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