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74)화 (74/130)

74화

신전은 온통 하얀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신인 태양신의 성체를 두른 것이 구름으로 직조한 흰옷이라는 경전을 따라, 오시니스 전역의 모든 신전은 하얀색 대리석으로 건설되었다.

문제는 이 흰 대리석이 오시니스에는 잘 나지 않는 희귀품인 데다가 결정이 작고 혼합물이 없는 양질의 것이라 체취가 쉽지 않아 그 값이 금과 같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모든 신전은 흰색의 대리석만을 고집했다. 그것이 정말로 양민을 개선시킬 종교였다면, 그토록 사치스러울 일이 있었을까.

니키엘은 신전의 앞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축성을 들여 앞마당에 깔아 둔 대리석 디딤돌들을 밟았다.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신전 앞에 흰 갑주를 입은 성기사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은 현대에서 살다 온 니키엘에게 신의 위대함보다는 너무 종교를 신성시하는 건 아닌가 하는 위화감을 줄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축성을 끝낸 철기를 살펴보고 싶은 것이지 성기사단과 안면을 트고 싶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폴의 말로는 성기사단이 직접 철기를 왕궁까지 운반하는 일은 드문 일이라고 했다. 드물게 벌어지는 일을 심심해 구경 나온 동네 아저씨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어쨌든 니키엘을 향한 여론은 아직까지도 그를 철부지 망나니의 백금발 왕족으로 보고 있으니 말이다.

니키엘이 걸음을 잠시 주춤한 사이, 율란이 그를 지나쳐 성기사단을 향해 걸어갔다. 성기사단은 다 같은 머리색을 하고 있었다. 유전 형질로 결정되어 태어났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본래의 머리색은 입단과 동시에 은발로 변하게 된다. 눈동자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물들게 된다.

때문에 니키엘은 그들의 획일적인 모습이 신기했다. 흑발에 흑안을 갖고 있는 한민족으로 태어나 생활했지만, 이곳에 와서 다양한 머리색과 안구색을 보았기 때문인지 이렇게 통일된 생김을 한 집단을 보니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니키엘은 베네딕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성기사단은 다 은발에 흑안인 건가?”

“예, 그렇습니다. 전하.”

베네딕은 짧게 긍정했다. 상식인데 별걸 다 물어본다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는 심심치 않게 보는 표정이라 감흥도 없었다. 나는 여기 국민도 아닌데 상식이 없는 건 당연하지. 그러는 너희야 말로 늑대의 학명을 알기나 해?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성기사단의 외모를 계속해서 살피는 중이었다. 왜 그들의 눈과 머리색이 획일적인지 이유를 알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베네딕이 온순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성기사단은 입단하여 기사 서임식을 한 순간부터 머리와 눈의 색이 변합니다. 종자 시절에는 물려받은 눈과 머리색을 하고 있지만, 기사 서약을 한 순간부터 주신의 은총이 내리는 것이지요.”

꽤 자세한 설명에 니키엘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얼라리도 그렇고 베네딕도 그렇고 니키엘이 원작을 읽었을 때부터 의리 있고 총명한 캐릭터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율란의 좌장군과 우장군인 그들의 활약은 감초 캐릭터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는 했다. 이렇게 실물로 보니 또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성격이 나쁜 것은 그들의 상사뿐인 듯싶었다. 조연 캐릭터들이라 이름 외우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아직도 니키엘은 얼라리의 본명이 뭔지 헷갈렸다.

아무튼 베네닉의 친절한 설명을 들은 터라 니키엘은 만족스러워졌다.

“설명 고맙네, 경.”

“제 즐거움입니다. 무기가 궁금하셔서 오신 거라면 이쪽으로 오시지요. 기사단 총장 예하와 인사한 뒤 마음껏 구경하셔도 될 겁니다.”

축성된 어떠한 물건을 구경하는 것은 크게 흠 잡을 일이 아니었다. 오시니스 사람들은 모두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법황이 대리인으로 축성한 솔리우스의 무기를 보고 싶은 것은 오시니스에서 태어난 남아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호기심이었다.

물론 ‘그’ 니키엘이 무기류에 관심이 있다는 건 뜻밖이었지만, 베네딕은 먼저 가 버린 단장을 대신하여 그의 예비 약혼자인 왕자를 에스코트했다.

“지금은 단장님이 먼저 예하를 만나 뵈어야 해서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전하.”

“그러겠네. 경도 바쁘면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니키엘은 합리의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베네딕이 저를 영전하느라 할 일을 못 하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너무 무시해도 빡치지만 할 일까지 미뤄 두고 제 옆에 붙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네딕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실례하겠다 말한 뒤 단장과 기사단 총장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덕분에 니키엘은 멀리서나마 기사단 총장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거대한 순록인지라 인간의 몸으로도 키가 장대한 레이먼보다 살짝 커 보였다. 이상한 점은, 성기사단의 총장이라고 했으면서 은발의 흑안이 아닌, 흑발의 적안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성기사는 서임받으면 은발에 흑안으로 변한다고 하지 않았나?’

총장이라는 작자는 주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걸까? 의문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그의 생김을 뚫어지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니키엘은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장은 툭 튀어나온 눈썹뼈와 그 밑으로 남자답게 불거진 콧대를 산맥처럼 우뚝 세우고 있었다. 깊은 인중 밑으로 떨어진 육감적인 입술과 밀빛의 깨끗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굵은 눈썹 역시 흑색이었다. 그러나 니키엘은 총장의 생김새가 오시니스 왕국민의 평균적 외모와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들과는 인종이 다른 것 같았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한국인과 유럽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같은 느낌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생활한 니키엘에게 완전히 이국적인 생김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곳에서 더 이질적인 얼굴이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했다. 게다가 그 낯익은 얼굴이라니. 잘생긴 남자라고는 이세계로 떨어진 다음에야 겨우 볼 수 있었는데 어떻게 익숙한 느낌이 나는 걸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기사단 총장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칠 줄 몰랐던 니키엘은 살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총장이 니키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그의 앞에 서 있던 율란 역시 고개를 돌렸다가, 그들이 눈을 마주치고 있는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인사를 해야 하는 타이밍인가 싶어 니키엘은 주춤거리다가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율란에게 다소 뻔뻔하게 말했다.

“친절한 대공께서 총장께 내 소개를 해 줄 때를 기다리고 있었소.”

“…전하, 이쪽은 오릭스 지멘츠 성기사단 총장입니다. 총장, 이쪽은-.”

“니키엘 전하.”

오릭스가 먼저 활짝 웃으며 니키엘에게 인사했다. 무표정할 때는 다소 날카로운 인상이었던 미남자가 구김살 없이 웃자 주위가 환해졌다. 니키엘은 도리어 흠칫 놀랐다.

이세계에 와서 저를 처음부터 반겨 준 이는 오릭스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완전 충성맨이 된 폴조차 처음 마주한 순간은 니키엘을 반기지 않았었다.

니키엘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반겨 주니 일단 마주 인사하긴 했지만 의심스럽다는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이들과는 반응이 확연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반갑소. 니키엘 오시니스요.”

니키엘이 그렇게 인사하자마자, 오릭스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뜻 같아 미심쩍은 얼굴로 손을 뻗는데 율란이 그를 가로막고는 니키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축성을 마친 철검이 궁금하진 않으십니까, 전하.”

“궁금하오.”

오, 웬일로 먼저 이런 말을? 니키엘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 총장과 악수를 못 한 것이 걸리긴 했지만 율란이 보여 준다고 할 때 얼른 보고 왕자궁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율란이 자연스레 니키엘을 성기사단이 가져온 무기 앞으로 인도했다. 니키엘은 뒤를 흘끔 바라보았다. 오릭스는 여전히 미소 지은 채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오릭스가 제게 호의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주치면 일단 경멸하고 보는 여러 놈들과는 다른 노선으로 니키엘을 무시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오시니스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니키엘은 웃으면서 엿을 먹이는 상대를 구분할 능력이 부족했다. 감이 좋은 편이라 가스파르 백작과 같은 하수들은 금세 판별이 가능했지만, 기사단 총장은 그렇게 속을 다 들킬 만큼 만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차라리 대놓고 으르렁거리는 놈들이 속 편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은 성기사단이 끌고 온 커다란 흰색 수레 앞에 섰다. 그런 수레가 족히 20대 넘게 늘어서 있었다.

율란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니키엘에게 설명했다.

“무기는 일단 신전에 안치되었다가 토벌 대회 이틀 전에 각 기사단들에게 배포될 예정입니다.”

일단 그를 무기 앞으로 끌고 왔으니 뭐라도 설명해야겠다는 듯한 의무감에 찬 말투였다.

“오, 그렇소? 각 기사단이라 함은….”

“검은 가시 기사단과 볼트윅 공작가의 가신들, 투르운 공작가의 마법사들과 그리프 후작가의 길드원들입니다.”

레이먼의 공작가에도 기사단이 있다. 공작가의 사병들을 말하는 듯했다. 루시안은 자신의 공작가 사병들을 기사가 아닌 마법사들로 채웠다. 지카리 그리프의 정보 길드에는 무력을 쓸 줄 아는 길드원들이 속해 있다.

니키엘은 가만히 수레들을 살펴보았다. 흰 수레에 담긴 상자들에는 못해도 150자루가 넘는 철검이 들어 있을 것이다. 다섯 대 정도의 수레에 담긴 것들이 모두 활과 쇠뇌를 위한 화살이라고 한들 검의 수량은 족히 2000자루가 넘을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