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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78)화 (78/130)

78화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알레윈이 율란을 향해 물었다.

“…무도회의 파트너 자리를 청하려 했던 게 아니십니까?”

“뭐?”

율란이 되물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생각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알레윈은 직감했다.

‘…아, 대단하신 분. 또 무도회 따위는 까맣게 잊으셨겠지.’

그도 그럴 게 율란은 그런 행사에는 당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토벌 대회를 위한 무도회 때마다 연미복을 맞추기 귀찮다며 그냥 무복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왕에게 핀잔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율란은 꾸준히 무복을 입고 등장했다. 춤을 추지 않을 것인데 대체 왜 연미복을 입어야 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알레윈은 혹시 몰라 물었다.

“춤추시기가 싫어 일부러 파트너 신청을 하지 않으신 건 아니실 텐데….”

“…그건 아니다.”

율란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대답했지만, 그를 곁에서 오래 모신 알레윈은 율란이 지금 무척이나 당황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고, 어쩌다가!’

알레윈은 저도 모르게 이테렌에 계신 외할머니 같은 추임새로 상관을 안타까워했다. 보검을 준비하는 과정이 촉박하길래, 알레윈은 당연히 그것이 니키엘을 위한 무도회 프러포즈용 선물일 거라 여겼다. 그래서 따로 묻지도 않았다.

다 큰 상관의 연애 사정에 끼어들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최근에는 니키엘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여 알레윈은 기대했었다.

‘니키엘 전하께서 근래 들어는 패악도 부리지 않으시고, 검술을 대하는 자세가 올곧기만 하셨지. 무도를 아는 자들은 다 착해. 수행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이 악할 리 없잖아. 드디어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세우시고 수장님들을 살피려고 하시는 게 틀림없었는데….’

물론 검술 좀 한다고 다 선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알레윈도 검사였기 때문에 검술을 열심히 연마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편견에서 시작되었지만, 어쨌든 알레윈의 니키엘 재평가는 꽤 맞는 구석이 있었다.

율란 역시 그런 것 같았다. 알레윈이 아는 율란은 증오하는 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 남자였다. 그가 선대 대공을 처리했을 때도 과할 정도로 고문하지 않았었다. 복수를 위해 상대의 손톱 밑을 바늘로 쑤시거나, 산채로 간을 꺼내는 무도한 짓을 하지도 않고 그냥 죽이기만 하다니.

율란의 뒤끝 없는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알레윈은 율란이 니키엘에게 으르렁거릴 때마다 원래 싫으면 무시하는 분인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으로는 으르렁거리면서도 뒤로는 치밀하게 니키엘의 보검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었나. 보검 손잡이에 박을 에메랄드를 구하기 위해 직접 파발마를 보냈던 알레윈이 정확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알레윈은 자신의 희망을 담아 말했다.

“다, 다른 수장들께서도 청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상대가 없이 입장하시는 모양새가 안 되었긴 하지만 무도회가 시작한 뒤로도 춤을 청하실 수 있으니….”

율란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알레윈은 어쩐지 율란이 안도한 기색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데다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왕자궁으로 쫓아가 파트너 신청을 다시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알레윈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토벌 대회의 준비 막바지를 위해 결재받아야 할 것들을 율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도 방심해서 터졌다는 걸 이테렌 출신의 기사들이 알 리 없었다.

***

무도회가 하루 앞인지라 폴은 오늘도 니키엘을 때 빼고 광낼 작정인 듯했다. 오전 일찍부터 깨워 운동도 못 가게 마사지다 뭐다 하며 괴롭히더니 오후에도 그럴 것 같길래 제발 산책만 다녀오게 해 달라고 졸랐다.

오늘 같은 날 그대로 도주해 버리면 탈출 전문가를 주인으로 두고 있는 폴이라 해도 폭발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냥 산책 정도로만 타협 봤던 것이다. 그렇게 빠져나온 니키엘이 한 일이라곤 왕자궁과 본궁 사이에 있는 숲길에서 새의 깃털을 모으는 일이었다.

‘지금도 검집이 멋지지만, 뭔가 더 화려했으면 좋겠어.’

율란이 준 검은 손잡이가 무척 화려한 반면, 검집이 약간 수수했다. 검은 신전 대장장이의 화려한 취향이 반영되었지만, 검집은 율란의 고루한 입맛에 맞춰 제작된 듯했다. 깃털 몇 개를 구해다가 폴에게 건네주면 비단실로 예쁘게 묶어 장식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니키엘이 숲을 거닐며 깃털을 찾고 있을 때였다. 인기척이 들려온 것이다. 니키엘은 뭔가 싶어 고개를 들었고, 그곳에는 웬 남성이 니키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 누구?”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낯을 가리는 니키엘이 처음 보는 이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이 그냥 지나치기에는 범상치 않았다.

황금을 녹인 듯한 화려한 금발은 이세계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의 잿빛 눈이 니키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차림이 희한했다. 궁에 상주하는 이들은 보통 세 가지의 경우였다. 왕족이거나, 귀족이거나 시종일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 아니 소년은 옷차림만으로 그 태생이 짐작 가지 않았다. 가을이 깊어져 가고 있는 와중에도 얇은 튜닉 한 장에 브레, 가죽 부츠를 입은 차림이었는데, 그렇게 간단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옷의 소재가 무척 좋아 보였다.

튜닉과 브레는 니키엘의 그것처럼 아신카산 실크실로 직조해 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옷감은 구겨져 있었고, 튜닉 위에 입는 간단한 오시니스식 조끼나 프록코트를 걸치지 않는 차림이었다.

니키엘도 비슷하긴 했으나, 최근 들어 폴의 잔소리 때문에 비단 조끼를 걸치고 다녔기 때문에 저쪽보다는 행색이 조금 나아 보였다.

하지만 니키엘에게는 이곳이 집이었다. 집에서 편한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저쪽이 왕족이지 않는 이상 저렇게 간단한 차림을 하고 돌아다닐 수 없는데 희한했다.

시종이나 궁에서 일하는 인력으로 보기엔 또 옷의 소재가 고급이니 더욱 정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니키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금 물었다.

“길을 잃었니?”

궁에서 일하는 관료 귀족인 부친을 따라왔다가 길을 잃은 소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는 니키엘과 비슷했지만 앳된 생김새와 순순한 눈빛 때문에 니키엘은 그의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소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니키엘은 그를 향해 조심히 다가갔다. 야생 동물에게 접근하는 것처럼 자신이 경계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는 걸 알리듯이 말이다.

길을 잃었다면 안내해 주고 싶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멈춰 선 니키엘이 다시금 물었다.

“누굴 따라 궁에 들어온 거야?”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니키엘을 빤히 보기만 했다. 황금색 속눈썹이 일렁이며 잿빛 눈동자를 감싸고 있었다. 문득, 니키엘은 소년이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와 비슷한 키임에도 앳되어 보이는 소년은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귀한 생김이었다. 사실 니키엘보다 다부진 체형인데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니키엘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금색 실로 엮은 듯한 속눈썹이 떨리더니 소년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어린데 혼자 온 게 아니라면 보호자한테 돌아가렴. 궁은 혼자 다닐 만한 곳이 아니야.”

저는 혼자서 잘만 다니는 주제에, 니키엘은 괜히 궁에 대해서 잘 아는 척을 했다. 소년은 고급 소재로 만든 튜닉을 걸치고 있었지만, 프록코트 없이 돌아다니는 걸로 보아 출신이 한미한 귀족 자제인 듯했다. 괜히 오가다가 예전에 니키엘에게 시비를 걸었던 백작같이 한심한 작자라도 만나는 날에는 쓸데없이 시비 붙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보호자에게 인도해 줄까 싶어 말을 걸려던 때였다. 소년이 등 돌리더니 니키엘의 반대편으로 빠르게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엇, 얘야!”

그를 다시금 불러 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고, 소년은 곧이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겨진 니키엘은 황당한 기분이었다. 아이가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아 말을 건 것뿐인데 갑자기 사라지다니. 혹시 제 말이 기분 나빴던 걸까.

“에이 뭐, 볼일이 급했는가 보지.”

남의 생각에는 그다지 관심 없는 니키엘은 곧이어 땅을 훑으며 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쓸 만한 깃털을 주울 수 있었다.

니키엘이 좋아하는 검독수리의 깃털처럼 매끈하고 흑단처럼 고운 검은 깃털이었다. 나쁘지 않은 수확이라고 생각하며, 니키엘은 궁으로 복귀하여 폴에게 그걸 건네주고는, 비단실로 어여쁘게 검집에 매달아 달라 말했다.

폴은 솜씨 좋게 실로 매듭을 지어 검집에 끄트머리에 구멍을 뚫은 뒤, 매듭을 연결하여 깃털을 장식했다.

술처럼 늘어진 깃털이 예뻐 몇 번 건드려 보다가, 무도회 날은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야 하니 어서 잠자리에 들라는 폴의 잔소리에 의해 침대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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