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애새끼 취급을 받았다.
지카리 그리프는 지금 굉장히 당황한 한편, 굴욕적이었다. 지카리는 그동안 니키엘을 자신의 짝 수리라고 여겼다.
근래 들어 뱀이 니키엘에게 페로몬을 묻혀 놓는 등 같잖은 짓을 많이 했지만, 하늘 위의 패권자인 자신에게는 대적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카리는 굉장히 멋진 검독수리였다. 꽁지에 윤기 나는 흰 깃털을 달고 있는 다른 수컷 수리들과는 달리, 지카리는 저주에 의해 온통 검은 깃털을 갖고 있었지만, 그런 작은 단점이 상쇄될 정도로 멋졌다. 지카리 본인의 평가가 아니었다. 그를 흠모하는 모든 암컷 수리들의 평이었지.
지카리는 자신이 있었다. 제가 구애한다면 니키엘도 당연히 받아 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게 웬걸. 곧 구애를 받아줄 것처럼 부리를 쓰다듬고 뺨을 비벼 올 때는 언제고,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니 저를 알아보기는커녕 애 취급을 하고 있지 않은가.
왜 취급이 다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인간과 수리는 교미가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주위 새들이 말하길, 짝짓기의 세계는 깊고도 오묘하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여름 새들의 짝짓기를 지켜볼 걸 그랬다.
니키엘은 정녕 검독수리의 모습을 해야지만 저를 반려로 생각해 주는 걸까? 니키엘에게 다소 실례되는 생각이었지만, 지카리는 그것 외에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면 혹시 자신이 아직 성장을 다 끝내지 못해서인 걸까.
물론 지카리의 성장이 어느 시점부터 멈추긴 했다. 그러나 지카리는 그것을 단 한 번도 안타깝게 여긴 적이 없었다. 자신은 아성체인 상태로도 충분히 멋진 수리였으니까! 저만큼 둥지를 잘 지킬 수컷은 또 없었다.
다른 수리과와는 달리 검독수리는 일부일처제를 지킨다. 지카리는 한평생 니키엘만 보고 살 자신이 있었다. 짝 수리로 그렇게 충실한 수컷을 들이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도 모르고, 저 금색의 반짝이는 인간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지카리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오늘 이곳에 온 것도 예년과는 다르게, 지적 생명체가 나타난 걸 수도 있다는 율란의 말 때문에 제가 먼저 정찰병으로 나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도 무도회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자신을 무도회 파트너로 기다렸을까 봐 갈 수 없다고 언질해 주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깃털을 뽐낸 채로 니키엘의 어깨에 앉아 무도회에 함께 들어가는 상상도 끝마쳤는데 일이 어그러진 것이다. 아직 인간의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설명하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니키엘은….
“예쁘다고 했다. 나에게.”
내가 제일 예쁜 수리라고 해 놓고. 어떻게 나를 잊을 수 있어! 지카리는 믿기지 않았다. 가능하면 오늘 얼굴을 밝히고 그동안 당신의 충실한 수리가 바로 나였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알아보지도 못하니 억울한 마음만 들었다. 거기에 더하여 애 취급이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둥지를 틀고 새끼와 짝 수리를 완벽하게 부양할 능력이 있는데. 비록 인간으로서는 아직 아성체이지만, 검독수리 세계에서는 지카리만 한 남편감은 둘 없었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지카리는 걸음을 멈추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어느덧, 그는 왕궁의 뒤편 숲으로 와 있었다. 뛰는 것보다 나는 게 익숙한 자신이 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왕자궁 근처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뜀박질을 한 걸 보면 어지간히 당황했나 보다.
지카리는 쯧, 혀를 찼다. 그는 아주 어릴 때 계모로부터 배신을 당했던 기억 때문에 성체로 완전하게 성장하지 못했다. 친형제들은 계모의 농간으로 인하여 모두 죽어 버리고, 계모는 자신과 정부 사이의 아이를 수장 자리에 앉혀 그리프 가문의 대를 끊어 버리려 했다. 지카리는 형제들의 원수를 갚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벌인 살인으로 인해 실어증을 앓고 숲에 숨어들어 새들 사이에서 살았다.
니키엘이 자신과 무도회에 가고 싶어 한다면, 율란에게 말해 정찰병으로 떠나는 걸 무도회가 끝난 뒤인 모레 새벽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지카리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바로 수도 외곽에 자리 잡은 후작저로 향했다. 서부 지역인 레달을 영지로 삼아도 그리프 후작가 정도 되는 대귀족이라면 수도에 저택 하나쯤은 있는 법이었다. 수도에 저택이 있다고 한들, 지카리 본인은 숲에 틀어 둔 둥지에서 지내는 게 좋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더 머뭇거려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지카리는 어떻게든 이번 토벌 대회에서 성장을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다면, 눈치 하나는 죽여주게 빠른 뱀 새끼에게 짝짓기의 순서를 빼앗기거나, 눈치는 둔치라도 감은 빨라 니키엘의 고귀한 향을 맡기 시작한 후각 예민한 네 발 달린 것들이 니키엘을 노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카리는 훌러덩 옷을 벗어 던지고 새로 화하여 그대로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시간이 촉박했다.
***
수도로 오는 강인 히피바울에서 나는 담수 진주로 만든 분을 보자, 니키엘은 끼약, 하고 소리 질렀다. 저도 모르게 그런 요상한 비명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돌았니? 무슨 화장이야! 고추 떨어져!”
“거츄? 가 뭡니까…?”
오시니스에서는 고추가 따로 없고 비슷한 식물인 칠리벨을 매운맛을 낼 때 쓰는 향신료로 사용했다는 걸 깜빡했던 니키엘은 그럼 이곳에서 국부(?)를 뜻하는 속된 말이 무엇인지 한참 생각했다. 폴이 그의 오묘한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아, 혹시 가지 말씀하시는 거예요?”
토종 한국인이었던 니키엘은 살짝 당황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남자들은 거기를 가지라고 부르는구나. 묘한 박탈감이 찾아왔으나 니키엘은 현재 오시니스의 국민 중 하나였다. 그는 잠시 자신의 원래 국적을 잊기로 했다.
아무튼, 얼굴 화장까지 하라니 싫어 미칠 지경이었다. 완강한 주인을 향해, 폴이 봐줬다는 듯 너그럽게 말했다.
“그럼 향유 목욕은 괜찮으신 거죠?”
향유 목욕은 평소에도 하는 거니 유난이 덜하겠다 싶어 니키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러자 폴이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그 뒤로 세 시간 뒤, 니키엘은 그것이 폴의 회유책임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더 안 좋은 선택지를 먼저 보여 준 뒤 차악을 고르게 했지만, 그 차악도 지옥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만, 그만해!”
“아직 멀었어요!”
무도회 날 아침, 니키엘은 전날 당했던 마사지와는 차원이 다른 빨래를 당했다. 그렇다. 니키엘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인간 빨래와 다름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쩜 이렇게 자신을 물에 담가 두고 불렸다가 흠씬 팼다가 다시 담갔다가 빼서 말린 뒤 향유를 뿌려 둘 수 있겠는가. 한낱 옷감이 된 한 나라의 왕자 팔자에 대해 생각해 볼 때쯤, 드디어 모든 꾸미기 일과가 끝난 것인지 폴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거울을 보세요! 오, 솔리우스시여! 당신의 피조물께서 이리도 완벽하시나이다!”
폴은 안 쓰던 말투까지 써 가며 감탄했다. 솔리우스의 피조물이라니. 직접 씻기고 입힌 건 본인이면서 그 실적을 신에게 넘기는 게 어이없었다. 어쨌든 그런 폴의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니키엘은 청동 거울 안의 자신을 째려봐 주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울 속 자신은 꼭….
‘시상식철의 아이돌 같네….’
그렇다. 화려한 조명 아래 선 아이돌처럼 반짝거렸다. 어깨를 조금 넘기는 장발을 자연스레 두지 않고, 아교를 섞은 끈적하고 투명한 왁스로 앞머리를 넘겨 고정하여 번듯한 이마를 드러나게 하니 꼭 귀부인을 꼬시러 온 젊은 제비처럼 자신만만해 보였다. 평소에는 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쁜 생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마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남성미가 더해졌다.
그러나 그렇게 이마를 야성적으로 드러나게 한 것과는 달리, 아주 얇은 모슬린천을 검은색으로 물들여 만든 블라우스에 작은 물방울 모양 다이아몬드들을 붙여 반짝거리게 만든 것을 입혔다.
블라우스는 꼭 크라바트처럼 모양을 냈는데, 앞이 부푼 것이 아니라 살짝 목의 옆으로 돌려 리본으로 맨 터라 남성적이기 보다는 아름다운 곡선의 미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위에 걸친 검은색 공단의 프록코트의 끝단에는 금색 잎사귀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금단추들 가운데는 새파랗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쨍한 초록색들이 눈부시게 빛나는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다. 신발은 아마빛 비단신이었는데, 블라우스와 조끼, 프록코트까지 검은색을 걸친 것에 비해 신발만은 아마빛 비단천으로 만든 동대륙 풍의 얇은 신발이라, 그 오묘함에서 오는 조화가 무척이나 멋졌다.
니키엘은 반쯤 질린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아 버렸다.
“…너무 과한 거 아니야?”
“무슨 말씀이세욧! 투르운 공작님은 이보다 훨씬 멋지게 하고 오실지도 모릅니다. 파트너의 미모에 전하의 훌륭한 분위기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고요!”
하긴, 루시안도 한 미모 하니, 이만큼 꾸미지 않으면 귀족들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건, 니키엘은 이번 무도회야말로 자신의 설욕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내 뒤에서 아가리 털고 다닌 것들, 반드시 복수한다.’
찾아가서 한 대씩 때려 줄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들 앞에 나서 자신이 왕족으로서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지난번 우연히 만난 가스파르인지 파스퇴르인지 하는 백작도 자신을 무시하지 않았던가.
니키엘은 귀족들 사이의 입지를 다져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나중에 혹시 몰라 수장 중 하나와 결혼하게 되더라도, 금세 이혼하여 제 살길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드물게 투지에 불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