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런 각오를 다졌지만, 충성스러운 폴의 귀금속 추천은 계속되었기에 니키엘은 질색한 얼굴로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나 금을 정교하게 세공하여 만든 팔찌 등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크라바트처럼 묶은 블라우스의 끈을 고정하는 작은 브로치 정도만 겨우 허락하자, 폴은 너무하단 얼굴을 하면서도 매일 칠락팔락 입고 다니던 니키엘의 간만에 성장한 모습에 감격한 것인지 두 손을 마주 잡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때, 다른 시종이 들어와 투르운 공작의 방문을 알렸다.
니키엘은 의아했다.
“무도회는 앞으로 시간이 꽤 남지 않았어? 이렇게 일찍 찾아온다고?”
폴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아무래도 무도회의 동행하시기로 언약된 분은 두 시간 전에 상대의 집에 찾아와 그 댁의 가주나 보호자와 차를 마시는 게 전통이라서요….”
뭐? 니키엘의 미간에 살짝 금이 패었다. 가주나 보호자와 차를 마신다니. 사교계에 막 데뷔한 어린 아가씨들을 존중하고자 하는 관습 아니던가. 육군 예비역에게는 알맞지 않은 전통이었다.
니키엘은 이마를 짚었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궁의 가주나 보호자라면 부왕이실 텐데 그분이 루시안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까지 행차하실 리는 없잖아. 대체 왜 일찍 온 거야.”
“음…. 가서 물어볼깝쇼?”
“깝쇼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얼른 준비나 마쳐. 내가 직접 맞이하게.”
그건 관습에 위배된다 하던 폴도, 고위 귀족을 두 시간이나 혼자 두게 할 수는 없는지 체념한 표정으로 니키엘의 치장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한나절 만에 풀려난 니키엘은 겨우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로 내려갈 수 있었다.
“투르운 공.”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서 루시안의 이름을 불렀다. 제자리에 앉아 있던 미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색의 거미줄같이 반짝거리는 백발을 한곳에 모아 묶어 그의 분위기 있는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크림색 튜닉은 실크로 직조한 듯 반짝거리고, 연한 하늘색 프록코트는 루시안의 흰 피부와 장밋빛 뺨, 루비같이 맑은 빨간색인 눈동자와 어울렸다. 자칫하면 그저 미형만 강조될 수 있는 차림새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눈썹뼈와 콧대, 장대하고 우람한 어깨 때문에 비현실적인 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니키엘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공은 오늘 정말 멋지군.”
“…….”
그러나 루시안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소 멍하게 풀린 눈으로 니키엘을 바라보기만 했다. 궁에 들어와 폴 이외의 니키엘의 유일한 인맥이라고 볼 수 있었던 루시안을 간만에 본 탓에 반가웠던 니키엘이 웃으며 다가가는데도 상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쯤 되자, 니키엘도 이상함을 느꼈다. 루시안이 너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루시안의 지척으로 다가가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공, 무슨 일이라도 있소?”
“…아, 별일 아닙니다.”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유전병 때문에 피부가 얇은 탓에 얼굴이 붉어진 것이 쉽게 눈에 띄었다. 루시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열이라도 나는 건 아닌가 싶어 한참 바라보았지만, 본인이 니키엘의 시선을 피했기 때문에 더 묻는 것은 실례겠다 싶어 대신 자리를 권했다.
“많이 기다렸을 텐데 앉으시오. 보다시피 공을 맞이할 만한 이는 나뿐이라, 결례가 되는 걸 알면서도 직접 나왔소.”
“괘념치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더 좋습니다. …오늘의 전하께서는 특히 더 멋지시니까요.”
루시안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쑥스러운 건지 여전히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인 채로 시선이 니키엘의 어깨쯤을 배회하는 것 같았다. 순진한 소년의 첫사랑 상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 니키엘 역시 괜히 민망해졌다. 타이밍을 아는 충실한 종인 폴이 마침 루시안의 식은 차를 바꿔 주기 위해 티 포트를 다시금 들고 들어왔다.
니키엘은 루시안에게 다시 한번 차를 권유했다. 그는 얌전한 얼굴로 앉아 차를 한 번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고는 소파 위에 올려져 있던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이것은, 전하와 동행하는 첫 무도회를 기념하기 위한 선물입니다.”
“선물이라니. 난 빈손인데.”
놀라 눈이 찻잔만큼 커진 니키엘을 바라보며, 루시안이 정말로 기분 좋다는 듯 하하, 웃으며 저는 괜찮다고 말했다. 아마 에스코트하는 상대를 위해 선물을 챙겨 오는 것 역시 전통인 것 같았다. 니키엘이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옆에 있던 폴이 다가와 그것의 포장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푸른 장미 다발과 흰색 면사포로 만든 레이스 장갑이 들어 있었다. 니키엘의 표정이 약간 애매해졌다. 장미와 장갑 모두 다, 자신이 생전 받을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던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정이 굳은 것은 루시안과 폴도 마찬가지였다. 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니키엘을 바라보았고, 루시안의 얼굴은 삽시에 붉어져 굳은 채였다.
니키엘은 선물한 뒤 제 표정이 좋지 않아 민망함에 그러는 줄 알고 일부러 미소 지으며 장갑을 꺼내어 꼈다. 폴의 눈썹이 한없이 처지며, 거름 뿌린 밭으로 뛰어가는 강아지를 바라보는 시골 할아버지처럼 ‘아이고, 저걸 어쩐디야.’ 하는 표정이 되었다.
‘쟨 또 표정이 왜 저래.’
충실한 시종이 보낸 텔레파시를 받지 못한 니키엘은 장갑을 마저 끼고는 루시안을 향해 씩 웃었다.
“사이즈가 딱 맞는군. 공께서 눈썰미가 좋은 듯하오.”
그 말에 루시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평소에는 좀 서늘한 인상이었는데, 웃으니 무척 사근사근해 보였다. 남자다운 생김과 어우러진 미형의 외모가 싱긋 웃자 <사랑에 빠진 순간>이라는 제목이 달린 어느 화가의 걸작처럼 느껴졌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루시안의 미소에 넋을 놓고 있다가, 폴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젓는 걸 보고 약간 정신을 차렸다. 쟤는 진짜 아까부터 왜 저래, 싶었던 것이다.
“다행입니다. 공방의 착오가 있었는지 남성용 가죽 장갑이 아닌 혼례에 쓰이는 신부용 레이스 장갑을 배달해 주었나 봅니다. 전하께서 결례라 생각하지 않으시고 직접 끼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뭬라?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장갑의 생김이 무척 수상하다 싶었는데 신부용 예식 장갑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받기로 한 데다가 손에 끼우기까지 했으니 이제야 이건 못 받겠네, 하며 빼 버리기에는 예의에 어긋났다.
이 세계의 매너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상대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선물로 준 물건을 착용하자마자 그 면전에 대고 장갑을 휙 빼 너나 끼라며 소리를 꿱 지르는 행동은 현대인의 눈에도 몰상식해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키엘은 얌전히 그 장갑을 끼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니키엘은 장미로 화제를 전환했다.
“푸른, 장미는 처음 보는군.”
“마법으로 물들인 장미입니다. 이는 제가 직접 준비한 겁니다.”
루시안은 또 한 번 수수한 청년처럼 사랑을 고백하듯 말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정말 이 장갑을 낀 채로 무도회에 나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니키엘은 장갑을 빼지 못한 채로 루시안과 차를 마셔야 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거웠다. 둘 다 연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자신이 마물에 대해 심취해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 생김이 귀여운 마물의 생활사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마물이 어떻게 생겼든 그들의 생김과 생활사가 연관되지 않는 이상 크게 관심 없는 니키엘로서 다분히 쓸모없는 일이었지만, 괜히 마물에 대한 호기심을 들켜 토벌 대회 때 참견을 듣기 싫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루시안에게는 그 거짓 취향이 설득력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생김이나 생활사가 아기자기한 마물들에 대해 소개하며 니키엘의 흥미를 채워 주었다. 반쯤은 책을 봐서 아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반은 루시안이 직접 보고 겪은 내용이라 흥미진진했다.
루시안의 설명은 일목요연했고 강의라도 하듯 주제와 그에 따른 항목들이 명확했기 때문에 듣는 재미가 있었다. 한 교수도 강의를 저만큼만 했으면 욕을 덜 먹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던 와중 루시안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회장으로 가실까요. 시간이 얼추 된 듯싶습니다.”
아무리 왕족이라 한들 부왕보다 늦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예년에는 부왕의 뒤를 따라 입장한 듯했지만 올해는 루시안과 파트너가 되었기 때문에 회장에 따로 들어가야만 했다. 니키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안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춤 연습을 많이 못 했는데, 공은 오늘 철로 된 구두를 신고 오지 그러셨소.”
“전하께서는 발을 밟은 만큼 제게 미안해하실 거고, 저는 어떻게든 전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작자이니 밟힐 기회를 철 구두에 내어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정한 말에 니키엘은 풋 웃음이 나왔다.
“공은 꽤 바람둥이시겠어.”
“무슨 말씀을. 이미 호수 같은 벽안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는걸요.”
루시안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같은 남성이 제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낯간지러우면서도, 니키엘은 못 말린다는 듯 웃고 말았다. 루시안이 따라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두 남자는 그대로 왕자 궁 뜰을 지나 문 위에 상아로 조각된 백사 문양이 새겨진 마차로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