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81)화 (81/130)

81화

오시니스 수도에 거점을 둔 귀족, 프와스트 백작은 부채를 부치다 말고 그녀의 오랜 친우 중 하나인 루시 사피아 자작 부인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궁전의 꽃께서 근래 들어 꽤 영민해지셨다고…. 이제는 두 자리 숫자와 세 자리 숫자 중 무엇이 더 큰 것인지 정도는 구별하시나 봅니다.”

사피아 자작 부인이 대답했다.

“저런, 그런 말씀 마셔요. 잠자리에 들었던 이들의 숫자는 아직도 헷갈리고 계실 게 분명합니다.”

그녀들의 말을 가만히 엿듣고 있던 노신사, 비시니오 후작이 그의 측근에게 지나가듯 말했다. 과실주를 증류하여 만든 호박색 증류주가 담긴 은잔을 든 후작의 늙은 손이 세월을 피해 가지 못해 늘어진 입가를 가렸다. 그걸로 입으로 짓는 죄악은 면피할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근래 들어 네 가문의 수장들과 접촉이 잦으시다고. 전하께오서 색사에 욕심이 장대하시다는 건 안연 거리의 거렁뱅이들도 아는 일 아니겠는가.”

“짐승으로 태어난 것치고는 영 힘을 못 쓰는가 했더니, 수장들 역시 마냥 숙맥은 아니신 듯합니다.”

성기사단의 좌익이자 법황의 외질인 유리히 키슈친이 그 얘기를 듣고는 휘파람을 휙, 불며 오릭스 지멘츠 총장에게 속삭였다.

“그 백금발의 악명은 여전한가 봅니다. 이 육신이 신에게 영속된 것만 아니었다면 한 몸 바쳐 그 금발의 왕족을 즐겁게-.”

오릭스 지멘츠가 서늘한 눈으로 법황의 외질을 내려다보았다. 유리히는 뜨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오릭스는 꽉 막힌 인물이긴 했지만 성정이 다소 유약하고 신에게만 충성을 맹세한 탓에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이런 음담패설에는 면역이 없는 이였는데 쳐다보는 눈이 꽤 매서웠다. 유리히는 요즘따라 희한하게 오릭스를 대하기가 껄끄러워졌다. 특히 궁에 온 뒤로부터는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성기사단이 무도회장으로 완전히 입장하자, 공작새처럼 꾸민 수도의 귀족들이 술렁였다. 그들은 오늘 무척이나 바빴다. 마귀와 마주쳐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니키엘을 구경하랴, 평소 같았으면 축성을 들인 무기를 들고 오지도 않았을 성기사단을 구경하랴 눈이 네 개여도 모자란 참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아까 전부터 술렁거리는 이유가 있었다. 니키엘이 드디어 정신을 차려 수장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소문을 다 믿지는 맙시다. 어찌 되었건 전하는 전하시지 않습니까.”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주위 귀족들은 그의 말에 동조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회장의 미색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이의 모습을 본 귀족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세상에나….”

“어머….”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율란 발트였다. 그것도 너무나 멀쩡하게 성장을 하고 있는. 율란이 작년에 입었던 옷은 토벌 대회로 바로 떠난다고 해도 믿을 법한 흙 묻은 가죽 부츠에 옷감이 질긴 브레, 먼지 때문에 그것이 회색인지 검은색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망토였다.

그 전 해의 사정이라고 해서 나아질 것 없었다. 율란은 늘 그렇게 사냥터지기나 입을 법한 옷을 입은 채 무도회장에 들어와, 왕의 망토 자락 끄트머리에 입을 맞춘 뒤 출정했다.

그런데 오늘의 율란 발트는 달랐다. 그는 황금색 늑대가 양각으로 조각된 금단추가 달린 검은색 프록코트를 입고 있었다. 아신카산 실크 중 가장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든 듯한 공단 코트는 그의 너른 어깨에 감싸며 야성적인 면모를 억눌러 꼭 연미복을 입은 채 단정하게 서 있는 육식 짐승 같은 느낌을 주게 했다.

오시니스 남성들이 대부분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다니는 것에 반해, 율란 발트와 레이먼 볼트윅은 머리가 다소 짧은 편이었다. 기사단의 최전방에 서는 그들은 긴 머리를 거추장스러워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주는 야성적인 면모와 그걸 감싸고 있는 고급스러운 소재의 옷감들을 본 영애들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다, 그녀들과 동행한 샤프롱에게 들켜 눈총을 받았다.

알레윈은 주인의 뒤를 따라 들어오면서 부산스레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의 뒤편에 서 있던 베네딕이 혀를 찼다.

“뭘 하는 거야. 정신 사납게.”

“니키엘 전하께서 오셨나 확인하는 거야. 단장님이 올해는 꼭 전하와 춤을 추셔야 한다고.”

베네딕은 별 미친 소리를 다 하고 있다는 얼굴로 알레윈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최근에 니키엘이 전처럼 패악을 부리지도, 몰상식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아직도 그의 상관의 짝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동료이자 기사단의 우장군인 알레윈은 생각이 다른 듯했다. 몇 번 니키엘 전하의 검술 선생 노릇을 하더니 그새 정이라도 든 건 아닌가 싶어 수상했다. 하지만 알레윈이야말로 베네딕이 얼굴을 찌푸리든 자신을 니키엘에게 뇌물 먹은 뚜쟁이로 여기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알레윈이 생각하기에, 베네딕이야말로 눈치를 까마귀에게 던져 준 놈이었다.

‘단장님이 생전 관심도 없으시던 공단으로 만든 프록코트를 입고 계신 걸 봐라, 이 눈치 없는 놈아.’

어제저녁 율란은 급하게 수도에 있는 발트 대공 저택의 집사에게 말하여 자신의 사이즈에 맞는 프록코트를 구해 오라고 일렀다.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지만, 이테렌 본성의 집사 핀이 직접 교육시킨 수도 저택의 집사 제프콕은 그의 주인이 그것을 입든 말든 매년 이 시기만 되면 수도 양장점을 뒤져 가장 훌륭한 아신카산 공단으로 제작된 프록코트와 오시니스식 남성 연미복을 구입해 두었기 때문에 옷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꽤 빠른 일 처리에 눈썹을 살짝 올리는 것만으로 감탄을 대신한 율란은 연무장에서 먹고 자던 지난날과는 달리 꽤 오랜만에 수도 저택에 들러 향유를 푼 물로 세신한 뒤 치장을 하고 나섰다.

하루 종일 치장이나 하고 놀 수는 없는 일이라 오후에 자잘한 일 몇 개를 처리하긴 했지만, 율란치고는 드물게 조심히 움직이며 옷을 구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다.

‘단장님이 저렇게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건, 지지난해 토벌 대회에서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끼 슈피츠들 사이를 걸어 나오실 때뿐이었다고.’

거대한 새처럼 생긴 마물인 슈피츠는 알에서 처음 나와 마주한 이를 자신의 부모라고 여겼다. 괜히 처리해야 할 마물의 새끼들에게 자신을 부모라 인식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율란은 드물게 조심히 거대한 둥지를 기어 나와야 했고, 알레윈으로서는 그가 그렇게 신중한 움직임을 보이는 걸 그날 이후로 처음 보았다.

그렇게 애를 쓴 보람이 있게, 이테렌의 젊은 영주는 무척이나 빛나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알레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서 따로 파트너를 구하시지 않은 이상, 나머지 수장들 사이에서는 단장님이 제일 돋보이실 거야.’

알레윈이 생각하기에 레이먼은 아직도 니키엘만 보면 으르렁거리기 일쑤에다가, 루시안은 매일같이 처박혀 연구만 하고 있을 것이 뻔했고, 지카리는 애초에 수도에 잘 붙어 있는 새가,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왕자 전하의 첫 춤을 가져갈 상대로는 율란이 딱 아니겠는가.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가신이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볼트윅가의 가신이자 사냥부의 행정관인 미네르비나 바이스 남작이었다.

그녀는 무도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좌중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아직 니키엘은 당도하지 않은 듯했다. 예년과 같이 부왕과 함께 등장할 예정인 것 같았다. 파트너가 정해지지 않은 왕자 전하의 첫 춤 상대로 레이먼 볼트윅 정도면 우수하지 않은가.

바이스 남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옆에 선 레이먼을 바라보았다. 그는 며칠 새 열병이라도 앓은 듯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미남자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 때문에 오히려 분위기 있어 보이는 효과를 자아냈다.

지난 며칠간 바이스 남작이 생각하기에 레이먼은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레이먼은 젊은 수도 귀족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꾸미는 것에 매시간과 정력을 쏟아붓는 한량은 아니지만, 심미안이 있어 아무거나 걸치지 않았다.

넓은 어깨, 좁은 골반, 쭉 뻗은 다리와 남자답게 잘생긴 생김새 덕분에 걸친 옷들이 일정 부분 이상의 효과를 낸 탓에, 수도 남성 귀족들은 알음알음 블트윅 공작가가 의뢰하는 양장점에 줄을 대기 위해 웃돈을 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좋은 물건을 좋은 가격에 구매하여 걸치길 좋아하는 까탈스러운 순록이 어느 날, 평소보다 훨씬 꾀죄죄한 몰골로 돌아왔다. 프록코트를 걸쳐 원래 걸치던 옷들보다 낮은 품질의 튜닉과 브레를 가리려 해 봐도 안에 입은 옷들의 소재가 고품질인 프록코트의 옷감과 차이가 확연한 바람에 감출수록 더욱 대비가 선명했다.

미네르비나에게 그날의 기억이 유달리 선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돈 주고 입으래도 안 입을 거적때기를 걸친 채 돌아와서는 그다음 날부터 두문불출하여 칩거했기 때문이다.

유능한 부하인 미네르비나는 그가 칩거에 들어간 바로 그날, 사냥부 차관인 에블린 볼프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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