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각하께서 왜 저 지랄이시니.’
‘난들 알아? 광증에 시달린 뒤에는 늘 저러시잖아.’
아니. 미네르비나는 그 말에 부정했다. 광증을 겪은 뒤의 레이먼은 저렇게 제 발로 공작가에 찾아오지 않는다. 인간의 몸으로 변한 뒤에도 왕궁 뒤의 거대한 숲에 틀어박혀 한참을 헤매다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증에서 돌아온 시기도 빠를 뿐 아니라, 레이먼의 후유증도 적었다. 몸에 긁힌 상처도 없는 데다가 정신 또한 멀쩡해 보였다. 그래서 이상한 것이다. 그가 제 방에 틀어박힌 것이.
‘가장 바쁜 이 시기에 방 안에 있느라 나오지 않는다고? 말이 안 돼.’
토벌 대회가 대회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이 대회에서 가장 많은 마물을 처치한 가문의 수장은 니키엘의 입맞춤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입맞춤을 통해 광증을 해소하면 적어도 몇 개월에서 1년간은 광증 없이 몸이 편해지기 때문에 대회 형식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그럴 뿐이지, 사실 각 가문의 수장들은 서로 경쟁한다기보다는 서로 협력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 누구도 니키엘의 키스가 상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수장들을 휘두를 수 있는 니키엘과의 접촉을 왕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거대하고 위험한 마물들이 잔뜩인데 누구와 경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런고로 율란의 검은 가시 기사단은 전방을 맡고, 볼트윅 공작가의 백록 기사단이 후방을, 투르운 공작가의 마법사 부대가 좌익을, 그리프 후작가의 길드가 우익을 맡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전방을 담당하는 리더 격인 검은 가시 기사단이 가장 준비할 것이 많겠지만, 그래 봐야 똑같이 전투에 임하는 것인데 이쪽의 준비가 미흡할 수 없었다. 후방이 무너지면 다 죽는다고 봐야 했다.
올해는 준비를 일찍 시작하여 대부분의 여정을 꾸린 참이지만, 아직 레이먼이 승인해 줘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니. 아무리 광증에 시달리던 때도 이와 같지는 않았다. 미네르비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본인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녀는 몇 가지 소거법을 이용하여 레이먼의 그날 행적에 대해 조사했다.
그가 누구와 있었는지, 그 숲에서 누굴 만났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녀는 제일 먼저 볼트윅 공작가의 마구간에 나가 그가 귀가한 다음 마차를 끌고 나갔는지에 대해 알아본 뒤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니키엘 전하를 만나러 갔던 거였어.’
전하를 뵙고 온 바로 그날부터, 레이먼은 두문불출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체 거기서 뭘 겪었길래. 상대인 니키엘 전하는 그 이후로도 막힘없이 대외 활동을 계속하셨다.
주로 본인의 궁에서 운동을 하기는 했지만 신전에 나가 축성을 마친 무기를 구경하시기도 하고 검은 가시 기사단이 임시로 사용하던 근위대 연무장에 나가 훈련을 하시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전하께서 검술 훈련을 하시다니. 화병보다 무거운 걸 들었다가는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며 팔이 아프다고 엄살 부리던 위인이 아니었던가.
미네르비나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두 사람, 아니 레이먼 혼자서라도 니키엘에게 간직한 일방적인 무언가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또 다른 소거법으로 꽤 심도 있는 접근에 성공하여 레이먼의 현재 마음과 가장 가까운 가정을 세울 수 있었다.
‘우리 헛똑똑이 공작 각하께서 사랑을 시작하셨다!’
그게 아니라면 레이먼이 저렇게 애수가 가득 찬 얼굴에 맞지 않는 묘하게 힘을 준 차림으로 무도회장까지 올 리가 없었다.
‘제 마음을 부정해 봤지만 쉽지 않았나 보지? 남자들이란.’
미네르비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레이먼의 안색이 거칠기 그지없는 것으로 보아 니키엘에 대한 마음을 부정하다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얼굴이 저 상태면 행색도 그러해야 맞을진데, 입고 있는 것들은 전부 다 맞춘 지 얼마 안 된 연미복이 아니던가. 그의 진녹색 프록코트는 염색이 어려운 만큼 구하기 힘든 원단이었고, 더불어 레이먼의 녹안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얼굴을 보면 아직도 부정 중인 것 같은데. 바보 아냐?’
어깨를 으쓱인 미네르비나는, 이번이야말로 레이먼의 첫사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벼운 연애를 즐겨 왔지만 그녀가 보기에 그중 그 누구도 진정한 사랑으로 레이먼을 망가뜨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레이먼의 얼굴에 저렇게 먹구름이 낀 걸 보면, 그의 마음이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딱히 조언해 주지 않았다.
‘다 크다 못해 징그럽게 커다란 남동생의 연애 사정에 끼어드는 귀찮은 짓을 누가 하고 싶겠어.’
친우인 리아 볼트윅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미네르비나와 에블린 볼프 백작은 레이먼을 친동생으로 여겼다. 먼저 가 버린 친구를 대신하여 말이다. 그러니까 대체 어떤 누나가 남동생의 연애에 끼어들고 싶겠는가. 도와주려다가도 토가 쏠려 참을 수 없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미네르비나는 괜히 참견하여 어제 먹은 미트파이를 확인하기 전에 손을 떼려고 했다. 레이먼의 한심한 낯짝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한숨을 쉬며 공작의 옆구리를 찌르다시피 누른 채 말했다.
“얼굴 좀 펴세요, 공작 각하.”
“…….”
레이먼은 그녀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누가 봐도 우환이 있는 얼굴로 연신 출입문 쪽을 흘끔거렸다. 미네르비나가 보기에는 도박 빚으로 영지의 1/3을 날린 젊은 놈팡이 귀족의 얼굴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주위의 영애들과 영식들은 대체 눈이 어떻게 된 것인지 레이먼이 우수에 찬 것 같다며 저들끼리 뺨을 붉힌 채로 소곤거렸다.
두 사람의 만남 이후 니키엘의 행보를 보면 레이먼 혼자 헛물을 켜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도 특이했다. 니키엘 전하께서는 원래 얼굴을 보시지 않던가? 그렇다면 레이먼 볼트윅이 저렇게 마음 졸일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같은 시각, 이테렌 출신의 작센 백작, 알레윈 역시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 명의 부관은 자신이 모시는 수장이 얼굴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때문에 부관들은 서로의 상관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단장님, 오늘 정말 눈이 부시십니다. 춤 연습은 해 두셨습니까?”
알레윈이 율란에게 폭이 좁은 은잔을 내밀며 말했다. 율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춤.”
“그야, 전하의 첫 곡 상대를 하셔야 하니까요. 아무래도 첫 곡은 왈츠가 아니겠습니까.”
오시니스식 왈츠는 템포가 조금 빠른 편이었다. 니키엘은 무도회에 참석해도 귀부인과만 춤을 추었기 때문에 율란이 여성 스텝을 밟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 점을 말하자 율란은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알레윈은 그 표정을 보며 잔소리하듯 말했다.
“전하께오서 남성 스텝만 알고 계시면 어쩌려고 여성 스텝을 연습하지 않으셨습니까.”
베네딕은 옆에서 알레윈을 보며 그의 친우에 대한 평가를 번복했다. ‘저게 미쳤나.’에서 ‘저게 진짜 미쳤구나.’로 말이다. 그러나 율란이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꺼낸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연습은 했어. 자세가 이상해서 그렇지.”
뭐…? 베네딕은 자신이 들은 말이 무엇인지 해석할 수가 없어 그 둘을 돌아보았다. 알레윈은 기쁜 듯 박수를 짝 쳤고 율란은 쑥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베네딕은 고심 끝에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단장님은 무도를 훈련하신 분이니 자세도 금세 좋아지실 겁니다.”
“…….”
율란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고, 베네딕은 쥐고 있던 은잔 안에 든 증류주를 마셔 없애는 걸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싶었다. 여성 스텝을 밟느라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있는 태산만 한 상관의 등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유난인 부관은 회장 반대편에도 존재했다.
“니키엘 전하에게 첫 춤곡을 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각하?”
“…뭐?”
종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주제에, 레이먼은 미네르비나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와중에 무슨 상상을 한 것인지 목덜미와 손등까지 붉어져 있었다. 얼굴은 말할 것도 아니었다.
꼴사나운 공작이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기억해 내며, 미네르비나는 무표정으로 능청을 떨었다.
“여성 스텝도 죽여주게 밟지 않으십니까. 전하와 상대해도 부족함이 없으실 겁니다.”
“…좀 조용히 해.”
레이먼은 그녀에게 낮게 뇌까리듯 대답했지만, 미네르비나는 알 수 있었다. 니키엘이 무도회장으로 돌아오면, 레이먼이 반드시 그에게 첫 춤을 청할 거라는 것을 말이다.
알레윈과 미네르비나는 제 상관이 거절당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오늘처럼 멀끔히 꾸민 상태의 율란, 또는 레이먼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니키엘이 아니라 니키엘 할아버지가 와도 그 얼굴에 반할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늘 이변과 함께하는 법.
“니키엘 왕자 전하와 동행이신 루시안 투르운 공작이 입장하십니다.”
회장의 문을 여는 시종의 소개에,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그것은 율란 발트와 레이먼 볼트윅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