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세상에나….”
“오, 솔리우스시여….”
사람들의 탄성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들의 시선은 연회장 출입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훤칠한 미남자 두 명이 나란히 선 채로 회장 안을 굽어보았다.
귀부인들의 부채 부치는 소리가 거세지고 신사들은 저마다 은잔으로 입을 가린 채 소곤거렸다. 무척이나 시끄러운 침묵이 연회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광산의 노역을 감시하는 관리처럼 치밀하고도 매서운 눈으로 훤칠한 두 미남자를 살펴보았다.
“니키엘 전하께서는 또 새로운 방식의 머리치장을 선보이셨네요.”
“뿐만 아닙니다. 코트에 달린 저 파란 장미는 뭐죠?”
“투르운 공작 각하가 저렇게 화려한 치장을 하실 때도 있군요.”
귀족들은 두 남자의 차림새에 대해 면밀히 관찰했다. 이마를 넘긴 니키엘의 훤칠한 모습에 놀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난여름 동안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한 니키엘은 늘 지니고 있던 유약한 모습을 타파하고 생동감 있는 미인답게 반짝이는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선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꾸밈이 평소와 달랐던 것이다. 단정하기만 하면 치장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던 젊은 마법국 장관은 오늘따라 눈부신 생김을 자랑하고 있었다. 레이먼과 율란으로 눈요기했던 귀족들은 니키엘에 버금가는 미인인 루시안을 보며 그가 보여 준 의외의 모습에 놀라 웅성거렸다.
희한한 것은, 키가 크고 골격이 좋아 그렇지 선이 고운 미인의 얼굴이던 루시안이 니키엘 옆에 있자 놀랍도록 남성미가 빛난다는 사실이었다. 젊은 귀족들은 두 사람이 그린 듯 잘 어울리는 걸 보며 괜히 설레했다.
거기에 연회장에 있던 귀족들을 가장 흥분케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전하께서 지금 손에 착용하고 계신 것이….”
어느 후작의 말에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니키엘의 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니키엘이 손에 착용하고 있는 흰색 레이스로 만든 장갑을 말이다.
그것은 혼례 시 신부가 착용하는 예물 중 하나였다. 최고급 비단실로 직조한 레이스 장갑은 숙련된 장인도 모양 좋게 뜨기가 굉장히 어려웠기 때문에, 일생일대 중요한 순간인 결혼식에서만 쓰이고는 했다. 장갑의 품질이 그 결혼식의 급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니키엘이 착용 중인 장갑은 단연코 상등급품이었다.
“프랑수와 수입품 아니에요?”
한 귀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옆에 있던 후작 부인에게 속삭였다. 니키엘의 장갑은 레이스 생산지로 유명한 꽤 먼 나라, 프랑수와에서 온 상등급의 면사포로 만든 제품 같았다.
루시안이 장인의 실수로 신부의 예식용 장갑이 준비되었다 한 건 기가 막힌 거짓말인 셈이었지만, 귀부인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 니키엘은 영영 그 진실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니키엘은 여전히 그것을 착용한 손을 루시안에게 내밀고 있었다. 무도회의 파트너에게 에스코트를 허락하는 몸짓이었다.
모두 그들의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투르운 공작을 못내 사모하던 어떤 영애는 그대로 실신하고, 니키엘을 흠모하던 귀부인들과 젊은 영식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소란한 조용함 속에 율란과 레이먼이 있었다.
“지금 저게….”
알레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중압감에 입을 다물었다. 놀란 알레윈이 제 상관을 바라보았다. 악다문 턱 때문에 불툭 튀어나온 교근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였다. 확연한 분노에 무슨 일이라도 날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소드마스터의 살기를 주변 인물들이 버티지 못할까 봐 간신히 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회장 반대편에 있던 미네르비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화가 많이 났네.’
묵직한 짐승의 페로몬이 낮게 깔려 심약한 수도 귀족들은 차마 레이먼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미네르비나는 핏발이 올라붙은 레이먼의 녹안을 바라보았다.
‘이러다 일 치겠는데.’
불길한 예감이 강타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회장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백금발을 고스란히 쓸어 넘겨 평소와 달리 남성미를 강조한 니키엘과 청초하게 웃고 있는 루시안이 있었다.
외모의 합으로 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커플이었다. 게다가 니키엘의 손에 끼워진 것을 보면 신랑이 신부에게 결혼식 전에 선물하는 레이스 장갑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루시안이 니키엘에게 주었을 것이다. 결혼식에서나 쓰이는 장갑을 무도회 파트너에게 선물해 준다는 것은 거대한 뱀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과 같았다. 투르운 공작이 연회에 온 나머지 수장들에게 말하는 바가 명확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짐승들에게 영역 싸움에 돌입했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은어같이 끝이 쪽 빠진 하얗고 가느다란 손에 끼워진 장갑에 레이먼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듯했다. 미네르비나는 좆 됨을 느꼈다.
발트가와 볼트윅가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해 회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레 서로 멀어진 두 가문의 가신들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완전히 같은 감정을 공유 중이었다.
두 가신은 모시는 상관이 언제 일을 칠지 몰라 긴장된 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율란이었다. 그가 회장 한복판으로 걸어오려고 하는 니키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시종 하나가 배에 힘을 주고 크게 소리치듯 알린 것이다.
“6개 주의 주인이자, 오시니스의 지지 않는 태양이신 국왕 폐하 듭시오!”
그 소리에 회장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나 오른손을 왼 가슴팍에 대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연회장의 2층 문이 열리며 오시니스의 왕이 등장했다.
그는 붉은색 융 위에 일각수가 앞발을 추켜들고 있는 문양의 금색 방패 무늬가 수놓아진 망토를 입고 있었다. 연회 날인지라 더티 블론드의 머리카락 위에는 왕관이 얹어져 있었다.
왕은 다소 파리한 안색으로 1층 홀을 내려다본 뒤, 뒤에서 망토를 든 채 따라오는 시종들을 의식하지 않고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그는 꽤 많은 계단을 다 내려온 뒤에야 입을 열었다.
“오늘은 축복해야 마땅한 날이니 깊게 허리를 숙이지 말라. 모두 고개를 들어 그대들의 왕에게 봄 같은 얼굴을 보이라.”
그 말에 귀족들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회장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니키엘은 그제야 귀족들의 관심이 제게서 떠났음에 안도하며 부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째 볼 때마다 껄끄러운 영감탱이네.’
계단에서 내려올 때까지 허리도 못 들게 해 놓고는 예의 차릴 것 없다 떠들다니. 말이 되질 않았다. 니키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곁에 붙어 있던 루시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오. 그것보다 곧 부왕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 할 텐데 괜찮겠소?”
루시안과 함께 등장한 이상 부왕에게 함께 인사를 하러 나서기는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왕의 지대한 관심이 쏟아질 것이다. 귀족들의 무시가 듣고 싶지 않아 그와 동행했지만 루시안과의 관계를 짐작도 하지 못한 부왕에게 긁어 부스럼을 일으키는 일이 될까 봐 저어됐다.
루시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니키엘의 손을 조금 더 압력 있게 쥐어 왔다. 그는 손가락 끄트머리에 입을 맞추듯 맞잡은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며 니키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전하의 걱정을 사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입니다. 부디 당신의 종이 그 즐거움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도록 하십시오.”
아, 대박 간지럽게 말하네. 니키엘은 관자놀이 부근이 저절로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연회장에 오는 내내, 루시안은 니키엘을 아주 정중하게 모셨다. 불면 날아갈세라 조심스러운 행동거지로 저를 대하는데 기분이 오묘했다. 정확히는 나쁘지 않았다. 대접받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예비 약혼자를 대하듯 낯간지러운 구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다정하면서도 귀빈으로서 접대받는 기분을 들게 했다. 그의 가문 문양이 그려진 마차에 올라탄 뒤로부터 내내 그랬다.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게 해 주겠다며 마술까지 보여 주었다.
니키엘은 다소 황당했다. 루시안이 진지한 얼굴로 프록코트 자락 안쪽에서 토끼를 꺼냈기 때문이다.
‘…공은 여러 장기가 있군.’
‘긴장되어 몇 가지 순서를 놓쳤습니다. 원래는 볼거리를 보여 드리기 전에 인사말을 따로 준비했었는데….’
엉뚱한 반응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연회장에 도착할 때까지 니키엘은 신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루시안과는 유머 감각이 비슷한 것 같았다. 루시안은 대개 긴장한 얼굴과 표정 없는 얼굴로 몇 마디를 했고 니키엘은 그가 그런 표정을 하고서도 코트 안자락에서 비둘기며 토끼들을 꺼내다가 마차 밖에 놓아주는 걸 보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마법사의 재능 낭비인 것 같소.’
‘제 재능은 전하의 영민하심만큼이나 깊고 넓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아부와 칭찬 역시 꽤 즐거웠다. 결국 도착할 때쯤에는 계속 웃느라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렇게 너스레를 떨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이렇게 간지러운 어조로 제 손등에 키스할 것처럼 굴고 있다니.
니키엘은 자신이 순진한 마을 처녀였다면 여자답게 오늘 밤 루시안을 당장 쓰러트려 그를 쟁취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왕이 결혼을 밀어붙인다면, 이렇게 유머 감각이 잘 맞는 이와 평생 사이좋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니키엘은 자신이 졌다는 듯 피식 웃으며 루시안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럼 시아버지를 만나 뵈러 갈 준비가 되었소?”
제 딴에는 농담을 섞어 말한 것이었는데, 루시안의 얼굴이 삽시에 붉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능청맞게 농담하던 니키엘도 굳어 버렸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루시안이 여전히 붉은 눈을 한 채로 더듬더듬 말했다.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니…. 긴장이 되어….”
꼬실 땐 언제고 당기니 이렇게 수줍은 반응을 내보이는 게 어이가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루시안이 귀엽기도 했다.
‘루시안이 몇 살이더라.’
그래 봤자 자신의 비해서는 꽤 나이가 어릴 것이다. 첫인상은 데면데면했는데도 알아 갈수록 루시안이라는 사람이 매력적인 듯했다. 상대가 심하게 부끄러워하자, 니키엘은 오히려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부왕이 시집살이를 예고하거든 서러워서 못 살겠나이다, 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나를 차도 좋소. 부왕과 다르게 나는 이해심이 넓은 편이니까.”
“신이 어찌 전하를 마다하겠나이까.”
그가 농담을 하는 걸 알아챘는지, 루시안 역시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왕의 앞으로 향했다. 타오르는 금안과 녹안이 연회장 벽에 붙어 저를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