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그렇게 그들이 연회를 열어 준 왕에 대해 형식적인 인사를 하러 가기도 전에, 각기 맞은편에 있던 두 짐승이 빠르게 걸어와 니키엘과 루시안의 걸음을 방해했다.
“즐거운 저녁입니다, 전하.”
전혀 즐겁지 않다는 얼굴로, 율란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니키엘은 성장을 한 율란은 처음 보는 터라 저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말쑥한 차림을 하고 늘 방만하게 흐트러져 있던 머리카락이 정돈된 모습을 보자 유독 냉엄해 보이면서도 조각 같은 생김새가 부각되어 보였다.
그 옆에 서 있는 레이먼 또한 마찬가지였다. 며칠 사이 날카로워진 듯한 인상과 딱 맞는 진녹색 프록코트가 그이의 생김을 보다 우수에 차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원래도 잘생긴 놈들이 꾸며 놓으니까 압살 수준인데.’
주위의 귀족 남성들이 왜 옆으로 오려 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의 생김을 너무 빤히 살펴보았다고 생각하며 니키엘은 율란의 인사에 화답했다.
“좋은 저녁입니다, 대공.”
그런 다음, 그 뒤에서 오고 있던 레이먼에게 인사를 건네려는데 율란이 슬쩍 몸을 움직여 시선을 가로막더니 루시안의 손을 잡고 있던 니키엘의 손을 부드럽게 빼내며 말했다.
“토벌 대회 일로 급히 나눌 말이 있는지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딱히 예의에 어긋나는 청도 아닌 데다가, 루시안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낸 유연한 행동거지에 놀라 있던 니키엘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율란이 루시안의 어깨를 툭 밀다시피 해 니키엘과의 거리를 넓혔다.
루시안은 짜증스러워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해 볼 테면 해 보란 식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레이먼과는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는데 세 명의 수장은 어느새 니키엘이 들을 수 없을 정도의 거리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뭐라고 말려 볼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약간 뻘쭘한 얼굴을 한 채 니키엘은 멀거니 연회장 정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제야, 귀족들의 소곤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니키엘이 루시안과 들어올 줄은 몰랐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니키엘은 쯧, 혀를 찼다. 수장들과 사이가 좋다는 걸 보이려고 루시안과 입장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니키엘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세 짐승들은 한곳에 모여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빠르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보이는데,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 거리였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거야…. 어…? 오, 싸운다, 싸워.”
레이먼이 루시안의 어깨를 밀치고 있었다. 루시안이 참지 않고 레이먼의 정강이를 후려 깠다. 두 사람은 똑같이 주고받은 주제에 서로를 노려보는 살기등등한 눈빛을 풀지 않고 있었다. 율란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매서운 표정으로 뭐라 말하고 있었다.
“왜들 저래….”
말이 들리지 않으니 궁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기다리고 있자 루시안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등을 돌려 니키엘에게로 걸어오려는 듯했다. 그때 그의 어깨를 율란이 잡았고, 루시안이 다시금 뿌리쳤다. 니키엘은 레이먼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약아 빠진, 뱀 새끼…?”
욕설인지라 무슨 말을 했는지 입 모양만으로 명확한 어림짐작이 가능했다. 루시안이 그런 레이먼을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 거침없는 행동에, 그들의 곁에 있던 귀부인들이 놀라 허억, 소리를 내는 것이 멀리서 들렸다.
“왜 싸우는 거야 갑자기.”
니키엘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갸웃거리다가, 혹시 자신이 루시안과 등장한 나머지 저들의 기운이 저리도 험악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장들 모두가 니키엘을 적대시하고 있었는데 나머지 한 명이 연회에도 같이 등장할 정도로 친해 보이자 단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추리했다.
“초딩들도 아니고…. 같이 좀 놀 수도 있지 야박하네….”
입을 삐죽이고 있는데,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루시안이 그 전까지 짓고 있던 험악한 표정은 어디에 둔 건지 다시금 사근거리는 웃음으로 니키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시지요, 전하.”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은 것 아니오?”
니키엘이 루시안의 등 뒤를 바라보며 고개를 빼꼼 돌렸지만, 루시안이 슬쩍 자리를 이동하여 가로막는 통에 뒤에 두 수장이 어쩌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루시안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 끝났습니다. 애초에 머리가 너무 텅텅 빈 자들과는 오래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요.”
드물게 날 선 기색에 니키엘은 ‘그렇소….’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안의 굳은 얼굴은 그를 처음 봤을 때의 서늘하던 시선을 떠올리게 했다.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부왕이 앉은 상석으로 걸어갔다. 빨간색 융이 깔린 길을 따라, 니키엘과 루시안은 어깨를 마주하고 걸었다. 니키엘의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은 아직 루시안에게 잡혀 있는 채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폐하께 인사를 올릴 거면 같이 가면 될 일인데, 오늘따라 마음이 급해 보이는 걸 보니 겨울잠 준비를 하는가 보군, 뱀 공작.”
니키엘은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제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 따라붙은 것인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율란이 니키엘의 오른편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터라 니키엘의 시야에서는 그의 날카로운 턱선만 보였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안의 왼편이었다.
“평소에는 느려 터져서 똬리만 틀고 있는 주제에,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향유까지 바른 게요, 투르운 공.”
“변태 새끼십니까? 남의 냄새는 왜 맡습니까. 저리 꺼지시지요.”
루시안이 경멸 담은 목소리로 레이먼에게 화답했다. 갑자기 모여들어 저들끼리 투닥거리는 걸 듣고 있자니 신기했다.
‘얘들은 원래…. 입이 험한 편이구나?’
나한테만 그러던 게 아니었나 본데…. 니키엘은 단순하게 생각하며 그냥 마저 걸었다. 키가 180cm 이상인 남성 네 명이 나란히 걷자, 주위의 귀족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야 했다. 연회장에서 왕에게 인사를 가기 위해선 이렇게 사열 종대로 걸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좀 서로 떨어져 걷자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 마침 그들은 왕이 앉은 상석에 도달했다. 니키엘은 부왕이 앉은 상석으로 가는 계단 아래, 예법상의 인사를 올리기 위해 멈춰 섰다.
때마침 왕이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루시안과 함께 있는 니키엘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자세를 바로 하여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기 때문이다.
“오, 나의 아들 니키엘아. 이리 가까이 오라.”
…거리 두기 언제 끝났지? 너무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던 니키엘은 입꼬리만 올린 상태로 왕에게로 다가갔다. 수장들도 그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서너 개밖에 되지 않았던 계단은 금세 끝이 났고, 니키엘은 폴과 함께 벼락치기로 외워 둔 연회장에서의 예법에 맞게끔 부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가 인사를 마치자, 수장들도 따라 인사했다.
왕은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니키엘의 미모가 훌륭한 만큼 젊었을 적엔 꽤 헌헌했을 법한 인상의 왕이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대들 모두가 우리 니키엘과 오늘 이 자리를 즐길 모양이지?”
성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왕은 매번 니키엘을 무시했던 수장들의 반응이 초조했던 듯싶었다. 그러니 이런 자리에서 이토록 아들 팔아 장사할 생각밖에 없는 장사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겠지. 니키엘은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표정 없이 서 있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몇 번 안 본 아저씨라고 해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 팔자가 된 니키엘이 왕의 환대에 뭐라고 화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바로 그때였다. 니키엘이 막 올라 온 계단 아래 흰색의 사제 옷을 입은 무리가 무릎을 꿇더니 그중 맨 앞에 나선 흑발의 남자가 담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신의 종, 오릭스 지멘츠가 6개 주의 평화를 수호하시는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왕은 그를 보며 반색했다.
“지멘츠 총장! 그대도 이리 오시오.”
늘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던 부왕은 오늘따라 꽤 들떠 보였다. 니키엘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 명의 수장이 모두 니키엘의 옆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왕의 적자로 태어났으면서도 발트, 볼트윅, 투르운과 그리프가에 권력을 나눠 줘야 했던 그의 열등감이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차남인 니키엘로 인해 빛을 보고 있는 중이니 오죽하랴.
게다가 올해의 토벌 대회를 맞이하여 신전에서 보낸 사절단은 그저 그런 직위의 보좌주교가 아닌 무려 성기사단이었다. 그동안 철을 거래하며 오시니스의 왕과 돈 놀음을 해 오던 것과 달리 콧대 높았던 법황이 올해는 웬일로 직접 성기사단을 보내온 것이다. 현 왕의 치세에는 처음 있는 일인지라, 그의 기분은 날아갈 듯 기뻐 보였다.
같이 돈 놀음을 하는 주제에 묘하게 콧대가 높았던 법황의 직속 병력인 성기사단과 늘 제 발아래 두려고 안간힘을 써 봐도 실패만 해 왔던 네 가문 중 세 가문의 수장들이 니키엘 옆을 맴돌자 이제야 제 세상이다 싶은 듯했다.
‘입 찢어지겠다. 폐하, 체통 플리즈….’
니키엘이 한심하단 표정을 숨기려 노력하고 있을 때, 계단 아래 무릎 꿇고 있던 성기사단 총장 오릭스가 계단 위로 올라왔다. 마지막 계단에 올라선 그가 율란과 마주 서며 씩 웃었다. 왕이 앉아 있는 상석 자리로 가는 길목에는 니키엘과 루시안, 레이먼과 율란이 서 있는 참이었다. 오릭스는 특히 율란을 특정하여 말했다.
“폐하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올라온지라, 대공께서는 자리를 조금 비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라 니키엘은 놀라 오릭스, 아니 냇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