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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88)화 (88/130)

88화

니키엘은 별안간 나타나 제 잔에 든 것을 홀랑 마셔 버린 뻔뻔한 제 검술 스승이자 북부의 영주를 올려다보았다.

“…공, 뭐 하는 게요?”

“보면 아시다시피 목을 축이고 있나이다, 나의 전하시여. 과실주라면 차고 넘치게 있을진데 제게 한 방울 양보한 것이 그리 서운하십니까.”

율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는 그의 말투와 똑같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히려 정색하고 이게 무슨 짓이냐 되묻는 니키엘을 한심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니키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이제는 시비를 걸다 걸다 이게 대체 무슨-. 이봐요, 대공.”

오늘은 기필코 한마디 해주겠다 싶어 입을 연 순간이었다. 니키엘은 율란의 눈동자가 풀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안색이 점점 흐려지는 게 육안으로도 확연했다. 니키엘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놀라 물었다.

“공, 어디 미령한 곳이라도 있는 게요?”

율란은 니키엘의 손에 자신이 먹은 잔을 툭 내밀었다. 다 먹었으니 빈 잔은 너 가져라, 하는 투라 어이가 없었다.

“오늘처럼 개운한 날이 또 없습니다. 신경 끄시고 파트너로 데려온 방울뱀한테나 가 보시지요.”

퉁명스럽게 내뱉더니, 율란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니키엘은 뭐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뭔가 싶어 율란이 건넨 잔을 보자 안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흰색 잔여물이 있었다. 가루로 된 약물이 덜 융해되어 잔 밑에 가라앉은 것처럼 말이다.

‘이게 뭐지…. 분명 다른 잔에는 없었는데.’

맑고 투명한 황금색의 사과주에 이런 불순물이 남을 리 없는데 이상했다.

니키엘이 잠시 잔 아래 가라앉은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 율란은 빠른 걸음으로 무도회장 밖을 나서고 있었다. 대체 그가 무슨 연유로 제게 권해진 잔을 다 비워 버렸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꺼림칙해서 먹기 싫었는데 말이야….’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입을 대기가 싫었던 잔에서 알 수 없는 흰색 가루가 보이자 혹시 율란이 이를 알고 제가 마신 건 아닌가 싶어졌다.

니키엘은 잔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가뜩이나 안 좋은 평판 한번 살려 보겠다고 파트너가 되겠다는 루시안의 청까지 수락하여 참석한 무도회가 아니었던가. 니키엘은 토벌대회를 앞두고 자신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다져 두고 싶었다.

사회생활에 있어 처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웬 수상한 놈이 건네는 수상한 잔을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갑자기 불쑥 나타난 율란이 그걸 낚아채 가더니 제 입에 털어 넣어 버리는 게 아니겠는가.

목이 말라 그랬다고는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바로 자리를 떠 버리니 이유를 알 수도 없고 답답했다.

‘쫓아가 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냇이 니키엘의 손을 붙잡아 손등에 키스하더니 속삭였다.

“생각하신 대로 행동하시면, 그것이 곧 기적이 될 겁니다. 나의 밤이시여.”

“그게 무슨….”

니키엘이 냇을 바라보았다. 그의 녹안은 여전히 푸르렀다. 전처럼 가넷 빛을 띠고 있던 적안은 어딜 간 건지 잠깐 궁금했다. 율란이 사라진 곳을 잠깐 쳐다보던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가라앉은 어조였다.

“그대는 그런 이였지. 그대의 종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

“공, 지금 내가 공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들어 줄 시간이-.”

그 순간, 니키엘은 공기가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주위의 소음이 그대로 멈춰 고요했다. 적막에 잠긴 정지(停止) 속에서, 니키엘은 멍한 두 눈을 깜빡이며 냇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걸 알고도 사랑했던 나야.”

“…….”

“안타깝게도, 그 점마저 사랑해 버린 것도 나지.”

니키엘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지난해 사교계에 데뷔한 남작 영애가 어머, 하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귓등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실수를 한 자신을 책망하듯이. 니키엘은 그제야 벼락같이 저를 휘감았던 정지가 깨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다시 막힘없이 흘렀다. 그는 냇이 제게 했던 말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가슴이 둔중하게 아파 올 뿐.

그때, 냇이 싱긋 웃으며 니키엘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어서 가 보세요. 당신의 짐승에게 말입니다.”

웃기게도, 니키엘의 두 다리는 냇이 그의 등을 밀어준 바로 그 순간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저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졌다. 연회장 바닥을 딛는 비단신이 힘차게 움직였다.

귀족들은 연회장 중앙에서 나온 니키엘이 저들을 향해 오는 줄 알고 작게 탄식하는 듯했다. 그러나 니키엘에게는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종내에, 니키엘은 자신이 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종들이 니키엘을 보고 회장의 문을 열어 주었다. 니키엘은 그 문이 어디로 통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튀어 나갔다.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문을 나서기 전,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냇은 없었다.

***

니키엘은 연회장을 나선 후에도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은 채로 다리를 움직였다. 그는 마치 길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뛰어갔다. 율란이 어디로 향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는 곧바로 궁을 나섰다. 이대로 달리면 왕이 후궁들을 위해 세운 별궁이 나오기 전, 이 계절에도 꽃이 잔뜩 핀 정원이 나올 것이다. 가을살이 꽃들이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총력을 다하여 제 몸을 피워 내고 있었다.

짙은 금불초 향 사이로 니키엘이 언젠가 맡아 본 냄새가 났다.

‘짐승의 페로몬….’

그렇다. 이것은 지난날 레이먼이 순록으로 변하기 전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싸하고 강한 향. 니키엘을 공격할 듯 날카로우면서도 정작 그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바로 그 향이었다.

“설마….”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율란이 짐승으로 화하고 있는 것일까. 정원 안으로 뛰어든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하프를 뜯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연회장에서 흘러들어온 음악 소리 외에, 가을의 정원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때, 쏴아아-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무언가 그르릉 울었다.

“대공…?”

소리가 나는 쪽으로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인지하기도 전에 걸음을 그쪽으로 옮긴 니키엘은 정원 한가운데에 세워진 석상에 기대어 있는 율란의 뒷모습을 마주했다.

“대공.”

니키엘은 한 번 더 율란을 불렀다. 그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로 제 이마를 석상에 박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태산 같은 등이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대공, 몸이 안 좋은 거면….”

“가까이 오지 마.”

율란이 그제야 목 긁는 소리를 냈다. 그에게로 다가가려던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가 그런 식으로 말을 짧게 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게 절박해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니키엘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석상에 이마를 박은 채 숨을 색색 고르고 있던 율란이 그런 니키엘을 돌아보았다. 금색 눈이 일렁이고 있었다. 니키엘은 그의 송곳니가 전보다 뾰족해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 초 후에…. 저는 괴물로 변할 겁니다. 이대로 도망치신 다음 사람들을 대피시키십시오, 전하.”

“대공.”

“제발 말 좀 들어.”

거친 숨을 내쉬며, 율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얼굴을 보자 니키엘의 생각은 명확해졌다. 도처에, 짐승의 페로몬이 떠돌았다. 니키엘은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뭐 하는-.”

율란이 그런 니키엘을 보며 놀라 말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커헉-!”

그가 허리를 푹 숙이더니 곱아진 등 부위의 프록코트 옷감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재봉선을 따라 터지는 천들의 소리가 고약했다.

“허억, 헉-!”

부츠를 뚫고 발톱이 자랐다. 브레를 찢고 허벅지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율란은 굴복하고 싶지 않은 듯 허리를 숙인 채로도 두 손으로 땅을 짚어 네발로 기지 않으려 했지만 소용없는 노력인 것 같았다. 그는 곧이어 발톱이 자란 손바닥을 땅에 붙인 채로 완벽히 네발로 설 수밖에 없었다.

“큭-!”

괴로운 듯 몸부림치던 율란의 귀가 뾰족하게 변해 짐승의 그것이 되었다. 갈가리 찢긴 천들 사이로 짐승의 터럭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니키엘은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북부 최후의 방어선, 이테렌의 젊은 영주는 네발로 기는 짐승으로 변한 것이다.

“보지, 마-. 윽, 허억-.”

아직 이지가 남아 있는 것인지, 율란이 애원하듯 말했다. 그르르 울던 늑대가 점점 몸집을 부풀렸다. 율란의 신장도 작은 편이 아니지만 초가집 한 채만 한 늑대는 더욱 컸다. 니키엘은 촛불을 켜 둔 정원에 선 거대한 짐승 때문에 제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그대로 놔두었다.

그때, 짐승이 변화를 마쳤다. 그는 검게 물든 눈동자로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집채만 한 늑대가 니키엘의 존재를 인식한 것 같았다.

크르르-. 크르르륵-. 늑대가 목을 울리며 자세를 낮췄다. 니키엘에게 달려들기 위한 준비 자세였다. 늑대의 사냥 습성에 대해 생각하던 니키엘은 한숨을 내뱉으며 두 팔을 벌렸다.

“오냐. 이리 온, 우리 강아지.”

그 말을 끝으로 검은 늑대가 공중을 향해 컹, 짖더니 바로 니키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뒷발로 정원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대로 뛰어오른 늑대가 니키엘의 목을 물어 부러트릴 듯이 아가리를 벌렸다.

니키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팔만 벌린 채로 늑대를 맞이했다.

이윽고, 늑대의 주둥이가 니키엘의 목덜미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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