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 그것이-. 저는 그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레이먼에게 멱살이 잡혀 있는 백작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어 대고 있었다.
“사주?”
니키엘의 술잔에 뭔가를 탄 게 사실인 듯했다. 레이먼이 다시 한번 더 백작을 다그치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온몸에 힘을 쭉 빼더니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레이먼은 황당한 얼굴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맥이 정상적으로 뛰고 있길래 그대로 바닥에 집어 던진 뒤, 뒤뜰을 오가던 경비원을 불러 지하 감옥으로 연행하라고 지시했다.
왕족을 향한 시해의 증언을 확보했으니 최소한 역모죄로 다스려야 맞을 것이다. 레이먼은 곧바로 연회장 안으로 복귀했다.
가는 길에, 늑대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곧이어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악다문 그의 하악 위로 교근이 도드라져 보였다.
***
“아, 간지러운데-.”
니키엘이 예상했던 것처럼, 늑대는 니키엘의 목덜미를 물지는 않았다. 대신, 니키엘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거릴 뿐이었다. 늑대의 덩치 자체가 집채만 했기 때문에 그의 들숨과 날숨만으로도 니키엘의 등에 닿아 있는 잔디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이성이 없는 건 확실한 것 같군. 그 대단하신 대공 각하께서 나의 곁에 이렇게 가까이 붙은 걸 보면.”
니키엘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율란을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레이먼 때보다 공포스럽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니키엘이 학사 시절 가장 사랑했던 동물이 식육목, 갯과, 개속의 늑대종이었으니 말이다. 니키엘이 볼 때 율란은 유라시아 늑대의 아종인 툰드라 늑대와 비슷한 것 같았다. 덩치는 제 몸 위에서 뻔뻔하게 킁킁거리고 있는 이 늑대가 훨씬 크지만 말이다.
두툼한 꼬리와 추위에 강해 보이는 털가죽이 그의 종을 짐작게 했다. 이 세계의 늑대들이 어떤 식으로 분류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니키엘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판별하기엔 그러했다. 검은 털로 뒤덮여 있지만 생김을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영민해 보이는 검은 눈이 니키엘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왜. 개껌이라도 주랴? 너 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사랑하는 짐승을 대하는 일임에도 니키엘의 말투는 약간 퉁명스러웠다. 율란을 향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검을 받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쫓아 나오지는 않았을 거야.’
사람이란 무릇 짚신 한 짝이라도 받았다면 보은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곤란해 보이는 율란을 쫓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보검을 선물한 게 꽤 의외였다. 니키엘은 율란이 자신을 굉장히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석이 잔뜩 박힌 귀한 철검을 선물해 주질 않나 가스파르가 건넨 수상한 술을 대신 마셔 주질 않나 근래에 율란은 조금 이상했다.
“이봐요, 바둑 각하. 뭐라고 말 좀 해 봐. 요즘 왜 그러는 건데.”
니키엘은 늑대가 저를 눕혀 둔 풀밭 위에 그대로 누워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늑대는 그런 니키엘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육고기를 먹는 맹수 주제에 검은 눈이 순해 보이기만 했다. 간혹 주둥이를 내려 니키엘의 머리 타래에 코를 묻고 킁킁거릴 뿐이었다. 숨소리가 크게 들리며 목 언저리가 간지러워졌다.
순록은 저를 향해 우다다 달려와서 그런가 정말 공포스러웠는데 늑대는 느낌이 좀 달랐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니키엘은 이 늑대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늑대의 본체가 율란이어서가 아니라, 늑대 그 자신이 니키엘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착각이라면 무지 쪽팔리겠지만, 어쩐지 네가 나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다는 말이야.’
니키엘은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식육목의 동물이 갖는 감정에 대해서 인간인 니키엘이 느낄 수 있는 바는 없겠지만, 늑대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해 단순히 저녁거리로 여기지 않고 계속 살려 두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때문에 니키엘은 점점 마음속에서 늑대와 율란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레이먼 때도 마찬가지였다. 순록이 아파하는 게 안쓰럽고 불쌍하여 손을 뻗어 만져 주자 그때부터 순록이 레이먼으로 다시금 변화했다.
그때의 생각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을 뻗는데, 이 늑대가 뭐라고 생각한 것인지 주둥이로 니키엘의 팔을 툭 쳐 치워 버렸다.
“이놈이-. 바둑아, 너 꽤 튕긴다?”
뺨을 만져 주려다 거절당한 것이 분해 중얼거리듯 내뱉자, 저를 빤히 보던 늑대가 콧바람을 휭 불더니 그대로 니키엘의 배 위에 주둥이를 턱 얹고는 앉아 버렸다. 앞발 하나를 니키엘의 몸 옆에 두고 끌어안은 듯한 형국이라, 무게에 짓눌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먹잇감이 된 느낌이었다.
“그만, 우리 이제 가 봐야 해.”
신성력으로 늑대를 다시 율란으로 돌려준 뒤, 연회장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첫 춤을 다른 이에게 줘 버린 것도 모자라 율란을 따라 연회장을 박차고 나섰으니 루시안을 볼 면목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니키엘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였다.
늑대가 니키엘의 배에 얹고 있던 주둥이에 힘을 줘 꾹 누르는 게 아닌가. 복근 운동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저를 깔고 있는 집채만 한 늑대의 무게를 이겨 내고 일어날 수 없었던 니키엘은 살짝 자괴감에 빠졌다.
‘내일부터 상복근 운동 조져 준다.’
늑대는 니키엘이 제 밑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싫은지, 제 밑에서 꼼지락거리는 니키엘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아예 그를 꼭 껴안다시피 했다.
“이놈, 바둑아!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 한다고!”
뉘 집 개인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늑대와 닿은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율란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니키엘은 살짝 패닉이 되었다. 괜히 따라왔나 싶기도 했다.
무언가 이상한 약물을 먹었다면 그것이 율란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평상시에는 잠들어 있던 광증을 밖으로 꺼내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레이먼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순록이 살짝 미쳐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늑대는 또렷한 인지를 가진 채 니키엘을 대하는 것 같았다.
“바둑이 좀 이상하네. 너 내가 누군지 아니?”
그저 니키엘이 움직이지 않게끔만 고정한 채 앞발에 턱을 얹고 눈을 감고 있던 늑대가 한쪽 눈을 떠 니키엘을 흘끗 본 뒤 다시금 눈을 감았다. 오수를 즐길 터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듯한 태도였다.
“이놈이, 어른 말씀하시는데 눈을 감아? 버르장머리가 영-. 이래서 개나 사람이나 유교를 알아야….”
니키엘이 어이가 없어 버둥거리자 그르렁거리기까지 했다. 기가 막혀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늑대의 귀가 쫑긋 서더니 턱을 들고 니키엘의 가슴 위를 앞발로 지그시 누른 채 어딘가를 주시했다.
그런 다음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으르렁거리기까지 했다. 거대한 늑대가 숨겨 두었던 발톱을 드러냈다. 니키엘은 뭔가 싶어 그쪽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늑대의 앞발에 몸이 눌린 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니키엘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니키, 어디에 있니.”
“…….”
니키엘은 가까스로 팔을 빼낸 다음 손을 뻗어 늑대의 주둥이 끝에 댔다. 꼭 조용히 하라는 듯이. 그런 다음 수풀 속을 응시했다.
“니키, 나의 동생아. 어디에 있어.”
아는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진짜 니키엘이 아는 목소리.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그걸 어떻게 느낀 것인지, 늑대가 주둥이를 내려 니키엘의 팔뚝을 코로 쓸어 주었다. 니키엘은 그런 늑대의 콧잔등을 긁어 주며 어둠 속을 다시 한번 주시했다.
“니키….”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니키엘은 소름이 끼쳐 온몸이 덜덜 떨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소름이 돋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진짜 니키엘은 자신의 이복형제를 무척이나 끔찍해 했던 것이 분명하다.
‘당연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그렇게 가둬 뒀는데.’
라피엘 오시니스가 어린 니키엘에게 했던 짓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이렇게 소름이 끼치는 것일까. 니키엘은 자신이 라피엘에 대해 공포마저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숨 한 번 편히 내뱉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때, 늑대가 조용히 콧잔등으로 니키엘의 팔을 툭 쳤다. 니키엘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야, 바둑이. 형 걱정해 주는 거야?”
늑대는 니키엘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먹음직스러운 걸 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니키엘은 그제야, 늑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보통은 광증을 겪어 괴로워한다고 알고 있는데 너는 약간 다른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니키엘에게 닿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니키엘은 자신의 가설을 입증해 보기 위해 늑대의 앞발을 제게서 살살 치워 보려고 노력했다. 무게가 상당하여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늑대는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식으로 니키엘이 하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는 듯했다. 니키엘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그 밑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늑대와 약간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섰다. 오늘 하루 폴이 공들여 만져 준 머리와 옷에 풀물이 들어 엉망이었지만 그런 걱정은 들지도 않았다. 니키엘은 늑대와 눈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고요하고도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때였다. 니키엘과 떨어진 늑대가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큭큭 거리더니 머리를 흔들며 괴로워하기 시작한 것은. 니키엘은 놀라 곧바로 늑대에게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