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까슬거리면서도 묘하게 부드러운 늑대의 털이 손에 닿았지만, 니키엘은 그 감촉을 느낄 새가 없었다. 커다란 몸이 등을 둥글게 말고 컥컥거리며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바둑아-!”
어딘가 꽤나 아픈지, 늑대는 낑낑거리기도 하고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픈 와중에 그의 옆에 니키엘이 있다는 걸 경계하는 듯했으나, 곧이어 니키엘이 저를 걱정하듯 쓰다듬어 줄 때면 다시금 병든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왜 그러는 거야.”
연구에 자부심이 있던 니키엘은 생전 처음 수의예과에 갈 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늑대의 소화 기관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대략 적으로 알고 있지만, 이런 때에 늑대가 왜 괴로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진심으로 늑대를 걱정했다. 부들부들 떠는 늑대가 혹여나 가을바람에 추워할까 봐, 다 끌어안아지지도 않는 굵은 목덜미를 껴안기도 했다. 그때였다. 살짝 야릇한 느낌과 함께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언제 느껴도 기분이 조금 그렇단 말이야….’
그래도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걸 보면 괴로워하는 늑대에게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대로 늑대를 끌어안고 토닥이는데, 떨림이 잦아드는 것 같던 늑대가 다시 한번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또 달랐다. 어딘가 괴로워 자기방어적으로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적의 출현에 사납게 그르렁거리는 것과 같았다. 니키엘은 놀라 뒤편을 바라보았다. 키가 큰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접니다, 전하.”
담백한 어조로 이름을 밝힌 이는 루시안이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놀란 나머지 치솟았던 어깨를 가라앉히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신성력은 그대로 늑대에게로 향하여, 집채만 했던 늑대의 크기가 점점 줄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던 늑대의 눈도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대공의 옷가지를 가져왔으니 그에게 입힐 동안 전하께오선 물러나 계시지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지만 니키엘은 어쩐지 루시안이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니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번거롭게 그럴 것이 아니라 내가 공의 일을 돕는 편이….”
그렇게 말한 순간, 니키엘의 팔 안에 묵직하게 담겨 오는 것이 있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것은 누군가의 매끈한 등이었다. 루시안을 바라보고 있던 니키엘은 설마 싶어 시선을 내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
거대한 늑대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율란이 벗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손 아래 느껴지는 피부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대로 대공을 내동댕이, 아니 풀밭에 내려놓으시고 이쪽으로 오시지요.”
루시안은 당황한 니키엘을 흘끗 보더니 다시 한번 점잖게 말했다. 니키엘은 하는 수 없이 그의 지시에 따랐다. 레이먼 때 역시 그의 헐벗은 몸을 보았고 또 그걸 율란이 목격하여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음에도 이처럼 민망하지 않았는데 관자놀이가 저절로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흡사, 교제 중인 상대 앞에서 다른 이의 신발 끈을 묶어 주다가 걸린 느낌이 들었다. 파트너를 잊은 채 타인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고 있는 기분이 니키엘을 강타했다.
뜨끔한 니키엘의 표정을 본 것인지, 루시안이 설핏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제게 맡기세요.”
“그, 공-. 내가 이러고 있는 건 보다시피 발트 대공이 늑대로 화하여….”
“저를 위한 변명임을 압니다, 다정하신 분. 아직 무도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얼른 대공을 수습한 뒤, 제게 전하와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히 줄 수 있지! 니키엘은 루시안의 그 말에 벌떡 일어나려다 그만, 제게 반쯤 안겨 있던 정신 잃은 율란을 내동댕이칠 뻔했다. 루시안은 여전히 꽃처럼 웃고 있었다. 니키엘은 그제야 이성을 차리고 율란을 조심스레 제 품에서 떼어 냈다.
정신을 잃은 기사단장은 정말 무거웠다. 골격근량이 상당하여 젖은 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알몸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아니 정확하게는 제가 율란의 알몸을 보지 않고 있다는 걸 루시안에게 피력하려 애쓰며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니키엘이 풀밭에 누운 장신의 사내가 육감적인 몸을 갖고 있는 것을 외면하려 애쓰는 동안, 루시안은 싸늘한 눈으로 율란에게 다가가 가져온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입히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뺨을 몇 대 후려친 뒤 네가 직접 입어라, 하고 싶었지만 루시안은 니키엘이 자신의 다정한 면모에 끌린다는 걸 다소 동물적인 감각으로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티가 날 만한 행동은 자제하려 노력해야 했다. 때문에 다소 손길이 거친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의 헐벗은 하반신에 브레를 입혀야 하는 순서가 도래하자 심한 짜증까지 났다.
‘…갯과도 꽤 크군.’
그런 감상이 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루시안은 괜히 오릭스에게 제 영역을 넘보지 말라며 쉭쉭거리다가 웬 놈이 니키엘에게 이상한 것을 먹이려는 걸 놓치고야 말았다. 일이 다 벌어진 후에는 이미, 니키엘이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율란을 뒤따라 나간 지 오래였다.
루시안은 레이먼이 니키엘에게 이상한 술잔을 건넨 수상한 놈을 따라 나가는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 늑대의 페로몬을 쫓아 연회장 뒤쪽 정원으로 향했다. 율란의 부관인 알레윈에게 예비로 갖고 있던 옷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가 만약 늑대로 변했다면, 수장들 외에는 말릴 이가 없으니 아무리 부관이라 해도 루시안을 쫓아오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건, 네 가문에서 일하는 이라면 견습 하인까지 알고 있는 사실이라 알레윈은 뒤따라가겠느니 하는 멍청한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곧바로 예비 옷가지를 꺼냈다.
광증의 징후를 비칠 때나 챙기는 옷가지들이었는데 율란의 부관은 준비성이 좋은 편인지 마침 갖고 있던 게 있었다. 루시안은 그걸 받아 들고 뒤뜰로 향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그가 늑대로 변했다기에는 궁이 너무도 조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루시안은 라피엘이 멍한 눈으로 뒤뜰의 정원 입구에서 헤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니키, 어디에 있니.’
‘니키, 나의 동생아. 어디에 있어.’
그는 흡사 궁전을 헤매는 유령과도 같이 핏기 없는 생김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멍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며 성인인 니키엘의 몸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덤불 밑 작은 구멍들을 검집으로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루시안은 그제야, 왕태자를 주목하라는 오릭스의 말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유령처럼 떠돌던 라피엘이 뒤뜰을 떠난 순간, 루시안 역시 빠르게 정원 입구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제야 제게 으르렁거리는 버릇없는 개새끼와 그의 목덜미를 꼭 껴안고 있는 니키엘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루시안이 느낀 감정은 보다 원초적이었다.
제 영역을 침범한 저 수컷의 경정맥에 날카로운 독니를 박아 물어 죽인 뒤, 니키엘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다는 욕구였다. 그러나 니키엘이 있는 곳에서 살기를 내뱉을 수는 없는 일이라, 목덜미에 돋아나려는 비늘을 꾹꾹 내리누르며 상냥한 목소리로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루시안은 제가 뱀의 핏줄이긴 한가 보다, 라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가을 날씨에 튜닉만 입혀 둔 율란을 니키엘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발로 툭 차 버리며 일어났다.
“전하, 대공은 곧 그의 충성스러운 부관이 데리러 올 것입니다. 이제 그만 저의 파트너로 돌아와 주시겠습니까.”
니키엘이 좋아할 법한 사근한 미소를 짓자, 심성이 올곧은 니키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무도회의 파트너랍시고 함께 입장한 뒤로 그를 챙기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뱃속에 구렁이가 들었다는 관용적 어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인이 뱀 그 자체인 남자는 니키엘의 그런 표정을 보고 입고 있던 브레의 한쪽 허벅지 부근이 팽팽해지는 걸 느꼈다. 니키엘이 저의 음험한 속을 알 수 없도록 눈부신 쪽색의 프록코트 자락으로 능숙히 아래를 가린 뱀은, 아니 루시안은 니키엘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쓰러진 대공을 이렇게 두고 가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멍청할 만큼 건강하여 감기 따위는 걸리지 않을 만큼 튼튼하신 분입니다.”
니키엘은 루시안의 그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아리송하다는 생각을 하며 루시안의 손을 맞잡았다. 그가 곧이어 제 허리를 살짝 당겨 옆구리에 붙인 뒤 빙글 돌려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길을 부드럽게 인도했다. 어딘지 마음에 걸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루시안이 두른 팔이 생각보다 단단했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몇 걸음 더 걸어가는데, 다행히도 율란의 부관인 얼라리가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니키엘은 그를 불렀다.
“이보게, 얼라리! 대공께선 정원에 계시네.”
“전하-!”
얼라리는 황급하게 니키엘에게 예를 갖추고는 루시안에게는 하는 둥 마는 둥 인사한 뒤 자초지종을 물었다. 얼라리의 충성심을 익히 알고 있는 니키엘은 본인이 아는 한에서 최대한 대답했다.
“내게 건네진 잔에 든 것을 마신 뒤, 대공의 상태가 좀 이상했네. 그다음 홀로 연회장을 떠나기에 따라와 본 것이야.”
“그럼 각하께선 지금…. 혹시 광증에 괴로워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루시안이 싱긋 웃으며 니키엘의 허리를 살짝 틀어 알레윈과의 대화를 가로막은 뒤 대신 대답했다.
“조용히 풀숲에 누워 계시네. 근래 피곤했던 모양이지? 깊게 잠들어 부러 방해하지 않았으니 가 보시게.”
아니, 그냥 낮잠 자는 사람 만든 거 아니야…? 율란은 분명 니키엘에게 건네진 수상한 술을 대신 마신 뒤 늑대로 변했는데 그렇게 말해도 되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알레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루시안을 흘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니키엘에게 자리를 떠남을 청했다. 니키엘 역시 얼른 가 보라고 황급히 그를 허락했다.
알레윈은 곧이어 그들을 지나쳤고, 니키엘은 뭐가 찝찝한지 알 수 없어 이내 루시안의 에스코트를 따라 연회장으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