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몬스터 웨이브라 함은….”
왕의 안색이 흐려졌다. 니키엘은 심약하고 비열한 중년 남자의 안색을 살피는 따분한 일보다, 그의 곁에 선 똑 닮은 남자의 얼굴을 봐 두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시선을 돌렸다.
라피엘의 표정은 확연했다. 니키엘은 눈매를 좁힌 채, 그의 얼굴을 살폈다.
‘…곤란해하는군. 곤란해한다, 라….’
곁에 선 부왕처럼 공포에 빠진 것도 아니고 꼭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곤란한 얼굴이었다. 니키엘은 라피엘이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기 전에 눈을 내리깔고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몬스터 웨이브가 도래할 것이라는 여러 징후들이 있습니다. 이 징후들의 신빙성은 사냥국 장관인 레이먼 볼트윅 공작이 판별해 줄 것입니다.”
“그럼 그 징후라는 게….”
왕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니키엘은 아까부터 이쪽을 내내 주시하고 있던 레이먼에게 둥지를 버린 여왕 닉시와 독성 없는 점액질을 분비하는 상파스, 슈피츠의 북녘 이동에 대해 나열했다. 레이먼은 잠시 심각한 얼굴로 니키엘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이것은 확실히 몬스터 웨이브의 징후가 될 수 있습니다.”
레이먼은 도대체 니키엘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전과 다른 점은, 그 얼굴에 깃든 게 니키엘이 쉽게 알아낼 수 없는 몬스터 웨이브의 징후들을 알아낸 것에 대한 경악이 아닌 감탄이라는 것이다. 레이먼이 놀랍다는 얼굴로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스리슬쩍 시선을 피했다.
“확실히 따로 떼어 놓고 보자면 사소한 것들이지만 겹쳐 놓고 보자면 그런 징후가 될 수 있습니다. 여왕 닉시가 둥지를 버리는 일은 심히 드뭅니다. 게다가 상파스가 독성이 없는 점액질을 분비하여 체내에 독성 물질을 응축시키고 있는 점, 슈피츠가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 등을 보았을 때 니키엘 전하의 말씀처럼 북녘에서 몬스터 웨이브, 즉 마물의 기하급수적인 개체 증가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버렸다.
몬스터 웨이브. 그것은 왕의 치세에는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네 명의 수장들이 토벌 대회를 도맡기 전에, 그랬지만, 그들이 수장 자리에 올라간 뒤로는 해가 바뀔수록 마물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대공국으로 독립해도 될 정도의 군사력을 갖춘 율란 발트가 총독이 되어 이끈 토벌 대회는 오시니스 국민들로 하여금 늘 겪어야 했던 마물에 대한 공포심을 낮춰 주었다. 그것은 곧이어 왕을 찬양하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그렇게 매번 마물의 개체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는데, 몬스터 웨이브라니. 마물들은 같은 종끼리는 짝짓기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원에 풀어 둔 토끼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그림자에서 탄생한 마물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림자에서 탄생한 마물들은 보통 왕의 책임이 된다. 태양신의 가호를 받는 성군이 이끄는 오시니스의 땅에는 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생길 틈도 없이 환하게만 빛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근 몇 년간 태평성대를 이룬 만큼, 왕국민들은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말을 듣자마자 혼비백산할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때문에 왕은 일단 니키엘의 말을 부정하고 보았다.
“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네가 뭘 알겠느냐. 궁 안에만 살아 무지한 네가 어디서 본 내용을 사실인 양 떠드는구나!”
레이먼이 니키엘의 주장을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라고 증명해 주었음에도, 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니키엘의 말을 폭도의 주장처럼 무시하려 했다. 왕이 저런 식으로 부정할 것을 짐작했다. 일단은 눈 가리고 아웅 해 보겠다는 속셈이겠지. 니키엘은 별 얘길 다 듣겠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부왕께서도 딱히 궁 밖을 나가시진 않잖습니까.”
“말이면 다인 줄 아느냐!”
왕은 역정을 냈다. 마치 니키엘을 공격하면 몬스터 웨이브의 모든 징후를 부정할 수 있을 것처럼. 딱히 감흥 없는 얼굴로, 니키엘은 레이먼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일단은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사항을 나머지 수장들에게 전달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왕이 단번에 믿어 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완강하게 나올 줄이야. 니키엘은 한발 물러나 가스파르에 대한 것을 물어봐야겠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때, 내도록 가만히 있던 왕가의 장남이 입을 열었다.
“부왕께 이 무슨 무례냐, 니키엘. 어서 사과드리도록 해라.”
“무슨 사과를…. 몬스터 웨이브가 온 것을 소상히 알리고자 한 저의 충절을 사과드리라는 말씀입니까.”
“니키엘.”
단조롭게 말하는 니키엘을 두고, 라피엘이 한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그가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례한 아이를 꾸짖는 듯한 집요한 응시였다. 그러나, 그 시선도 곧 차단되었다. 레이먼이 라피엘과 저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레이먼이 라피엘을 향해 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니키엘 전하에게 역적 가스파르에 대한 일을 알리지 못했군요. 감옥에 가 보려던 참이었으니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레이먼이 유려한 발음으로 뱉은 역적이라는 단어에는 가시가 숨어 있는 것 같은데, 봄바람 같은 말투와 다정한 얼굴에 의해 날카로운 느낌이 가려져 보는 이로 하여금 긴가민가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라피엘은 행간에 숨겨진 정확한 칼날을 찾아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이보시오, 볼트윅 공. 나와 니키엘이 나눌 얘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되었다. 니키엘, 너도 그 백작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알아 둘 필요가 있겠지. 가 보거라.”
그러나 왕은 니키엘을 눈앞에서 치워 버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물리려는 걸 거절하지 않은 니키엘이 짧게 절하고는 레이먼을 따라 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등 뒤로 라피엘의 진득한 시선이 느껴져, 니키엘은 몇 걸음 더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진작 걸음을 옮기고 있던 부왕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인지 라피엘과 왕은 니키엘과는 반대 방향으로 복도를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를 흘끗 본 니키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공, 몬스터 웨이브가….”
“레이먼이라 불러 주시기로 한 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호칭이 아니라-. 아니, 레이먼 지금 몬스터 웨이브의 조짐이 보인다고 말했지 않소.”
“일의 경중을 두고 싶지는 않지만 제게는 호칭 문제도 꽤 큰 의미가 있어서요. 전하의 하해와 같은 아량을 바랍니다.”
“말씀은 퍽 잘하시는군.”
니키엘은 어이가 없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저만 보면 으르렁거리던 레이먼답지 않았다. 지난 무도회 이후로 슬쩍 달라진 태도가 나쁜 징조는 아닌 것 같아, 니키엘은 부러 그에게 왜 태도를 바꿨냐 묻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건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있나 싶어서였다. 그것보다, 니키엘은 아까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가스파르 백작은 사고사가 확실하오?”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외부에 힘이 개입된 정황이 없으니까요.”
레이먼의 대답에 니키엘은 침음을 삼켰다. 저에 대한 소문들이 이상하게 돌고 있는 와중에 이것이 토벌 대회에 대한 것까지 이어진다면 심약한 부왕이 저를 토벌 대회 명단에서 빼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총독인 율란이 처음부터 니키엘의 토벌대 합류를 반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점은 둘이서 짝짜꿍이 잘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복도 끄트머리에서 은발의 미인이 황급히 다가왔다. 키는 니키엘보다 비등하거나 살짝 작았는데 어깨가 단단하고 골격이 상당한 것이 무예를 익힌 지 꽤 오래된 이 같았다. 그들의 지척으로 다가온 그녀는 곧장 니키엘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신 미네르비나 바이스, 신성한 빛의 대리자이신 니키엘 전하를 뵙나이다.”
엄숙한 인사라 니키엘이 쑥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저 정도로 경칭을 듣는 것은 드문 일이라 니키엘이 흠,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껏 니키엘을 마주한 이들은 냇을 제외하고 전부 다 니키엘을 살피거나 아니면 비웃는 태도였는데 미네르비나는 그런 것이 없었다. 왕가를 향한 충성심과 신성력을 두른 니키엘을 향한 존경이 느껴지는 인사라 못내 부끄러웠다.
“음, 반갑소 경.”
“제 일행입니다, 전하.”
레이먼이 옆에서 덧붙였다. 꼭 친구의 가족을 소개받은 느낌이라 절로 고개가 숙어지는 것을 멈추려 노력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니키엘은 그녀가 레이먼의 가신인 바이스 남작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누이와 함께 자란 가신이자 소꿉친구라고 했었지.’
니키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끔 한 발자국 떨어져 주었다. 미네르비나가 감사를 표하며 레이먼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레이먼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니키엘을 향해 말했다.
“전하, 죄송하지만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레이먼이 꽤 정중하게 부탁했기 때문에 니키엘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미네르비나가 제게서 레이먼을 빼앗아 가 심하게 죄송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잠시 의아했지만 복도에 잠깐 서 있는 걸로 불평할 일은 아닌지라 니키엘은 그들이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며 흠, 목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누군가 니키엘의 팔뚝을 붙잡더니 벽에 밀어붙인 것이다.
“윽-!”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나의 어여쁜 아우야.”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니키엘은 저를 벽에 밀어붙인 것이 라피엘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간을 찌푸리자, 라피엘의 흐릿한 갈색 눈이 묘한 열기를 띠고 니키엘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뭐 하는 짓거리십니까, 형님 전하.”
짓씹듯 말하자 의외라는 듯이 피식 웃기까지 한다.
“부왕 앞에서만 겁을 잃은 줄 알았는데 말하는 걸 보아 하니 그도 아니구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기고만장한 것이니.”
라피엘의 교근이 도드라졌다. 웃고 있는데 적잖이 분노한 것이 보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