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니키엘은 라피엘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서 집착적인 성향을 느낄 수 있었다. 남초 사회에서 생활하느라 쌓인 데이터들이 수많았기 때문에 성별이 남자인 인간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에는 자신 있었다.
니키엘이 보기에 라피엘은 오만, 자기애, 수장들을 향한 열등감, 신성력을 가진 동생을 향한 질투와 비뚤어진 형제애가 있었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진짜 니키엘을 통제하는 식으로 학대해 온 것 같았다.
물론 어릴 때도 못 돼먹기 그지없었다는 폴의 증언으로 보자면 진짜 니키엘의 성격은 원래도 좋은 편이 아닌 것 같지만,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그 성격이 더욱 부정적으로 형성되었음이 틀림없었다.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서 세상에 자기보다 잘난 건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각 가문의 수장들에 대한 열등감에 대가리가 돌아 버린 듯.’
속으로 신랄한 평을 내리고 있는 니키엘의 생각을 읽지 못한 라피엘은 아직도 니키엘이 자신의 말 한마디면 벌벌 떨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이복형을 무서워하던 진짜 니키엘이라면 표정을 굳히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냈을 때 그가 하라는 대로 얌전히 끌려다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슨 생각이 있어야만 기고만장해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없어야 이렇게 형님 전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법이지요. 한데, 형님. 몬스터 웨이브라는 말에 왜 그런 반응을 하셨습니까.”
“…뭐?”
라피엘이 희한한 말을 들었다는 양 되물었다. 니키엘은 폴이 잘 다듬어 준 손톱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꼭 그걸 예측하신 분처럼 보여서요. 놀라지도 않으신 데다가, 부왕 앞에서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시는 듯해 보였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니키야.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니.”
라피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기질적인 그 표정을 목도한 니키엘은, 정곡이 찔리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구나, 하고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그는 그저 벽과 라피엘 사이에 갇혀 있던 몸을 빼내려 애를 쓸 뿐이었다.
“어딜.”
라피엘이 그런 니키엘의 어깨를 틀어쥐어 다시금 벽에 밀쳤다. 표정이 사라진 라피엘의 얼굴은 무기질의 무언가와는 조금 다르게 이질적인 구석이 있었다. 라피엘이 니키엘의 얼굴을 시선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근래에 쥐새끼가 궁에 숨어들었다 싶더니 우리 니키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걸까? 루나만, 그 비열한 것이 끝내 대낮에 해를 가려 버리더니, 기어코 제 권속을 끌어들였구나.”
…루나만? 니키엘이 알기로 루나만은 동대륙의 여신이었다. 그쪽에서는 다르게 부르는 모양이지만 서대륙에서는 달의 여신을 루나만이라고 칭호하고 있었다. 니키엘은 라피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언뜻 알아듣지 못했지만, 중요한 말을 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라피엘은 쯧, 혀를 차며 니키엘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지금에야 루나만도, 루나만의 비호를 받는 그 쥐새끼도 활개를 치고 다니겠지만, 니키,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아. 이 형을 너무 열받게 만들지는 않는 게 좋을 거다.”
라피엘은 시종일관 어렴풋이 알 듯한, 그러나 깊게 생각해 보면 아리송한 말들만 늘어놓은 채로 시비를 걸다 떠난 불량배처럼 자리를 떠났다. 니키엘은 그의 등 뒤에 대고 엄지를 추켜들면서 루나만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수장들은 라피엘이 몬스터 웨이브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 다들 저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편이니 일단은 루시안에게 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일의 순서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레이먼이 복도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던 니키엘을 불렀다.
“전하.”
“아, 오셨소.”
…그러고 보니 얘가 있었네. 니키엘은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했다.
오늘 외출의 목적은 가스파르의 죽음과 제가 연결되었다는 부정적인 소문을 막기 위해서였다. 중간에 몬스터웨이브의 징후를 발견해 한시가 급한 일이라 판단하여 그것부터 왕에게 말했지만 그는 백성들이 입을 피해는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발생한 문제 때문에 머리가 딱 아프다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후계자라는 라피엘의 반응 역시 심상치 않았다. 대체 어떤 놈이 제가 물려받을 왕국에 몬스터 웨이브가 도래한다는데 글쿤, 하고 말아 버린다는 말인가. 저런 놈들은 다 군대 보내서 사상 교육부터 받게 해야 한다. 징병제 자체가 없는 오시니스임에도 니키엘은 라피엘을 병역 비리의 온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저, 신검 1급 나와도 아빠 백으로 공익 받을 놈.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그런 놈에 비하면 레이먼은 니키엘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판가름했다. 솔직히 아까 전만 해도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름을 불러 달라더니, 그게 나름의 화해 제스처였나?’
그동안의 망발을 뒤로하고 잘 지내 보자는 무언의 요구였나 싶어 헷갈렸다. 어쨌든, 외출의 목적이었던 가스파르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고자 같이 감옥에도 가 보기로 했으니, 레이먼을 조금쯤은 신뢰해도 될 것 같았다.
레이먼이라는 사람의 인간성보다는 그의 일 처리 능력을 신뢰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레이먼에 대한 평가를 상대할 가치 없는 놈에서 적대적 우호 관계 정도로 격상시킨 니키엘은 흠, 목을 울리고 입을 열었다.
“공, 왕태자 전하께서 몬스터 웨이브의 징후를 나보다 먼저 판가름하신 듯한데, 혹시 들은 바가 있소?”
대놓고, 저 새끼 수상해, 라고 말하는 것보다 에둘러 얘기하는 게 낫겠지 싶었다. 레이먼은 니키엘의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태자 전하께서 알고 계셨다고요?”
니키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먼은 이를 아득 갈더니, 짧게 침음 하고는 니키엘을 향해 말했다.
“…일단은 감옥 쪽으로 이동하시지요. 가스파르의 죽음에 대해 떠드는 입들이 많으니 전하께서 직접 잠재우실 필요가 있습니다.”
오, 그런 생각까지 했단 말야? 니키엘의 성격상 지난 언사들에 대해 잊지는 않겠지만 저쪽이 먼저 내민 화해의 제스처를 무시할 생각도 없었다.
‘뭐, 레이먼과 결혼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같이 토벌 대회 나갈 건데 수장들이랑 친해져 두는 게 좋으니까. 쟤랑 나랑 사귈 사이도 아닌데 대충 뭉개자.’
비즈니스 사이라고 생각하면 화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사적으로 얽히지만 않으면 되니까 말이다.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활기차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궁에 방문했던 것인데, 공께서 같이 가 준다 하시면 나야 좋지.”
레이먼은 니키엘의 웃음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이 잠긴 듯 흠, 헛기침을 했다.
“…네, 가시지요.”
“목감기라도 걸렸소? 조심해야지.”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직장 동료라고 생각하자 사회생활 하듯이 걱정이 나왔다. 아무래도 좋았던 니키엘이 빈말로 그를 걱정하자 레이먼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귓등이 붉어진 채로 대꾸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니키엘은 레이먼의 반응을 보고 의외다 싶었다. 세간의 평으로는 다정하지만 좀 느물거리고, 친절하지만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오늘 보니 걱정 한 줄에 감동하는 것이 애는 착하네, 하고 속으로 다시금 평가를 수정하는 중이었다.
‘진짜 니키엘이 어지간히 괴롭힌 모양이지. 이제는 꼬장 부리는 것도 안 할 것 같으니까 친하게 지내 두면 나쁘지 않을 것 같네.’
니키엘은 심드렁하게 평가하며 레이먼을 따라 걸었다. 그들은 아예 왕이 거주하는 궁을 떠나 왕족들을 가두거나 귀족 중 중대한 죄를 저지른 죄인을 하옥하는 왕궁의 감옥 탑으로 향했다.
원래 같았으면 역모죄이니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음습한 지하 감옥에 가둬야 맞건만 라피엘의 주장으로 해가 드는 지상 감옥에 옮겨졌던 가스파르는 황망하게도 햇빛에 타죽고야 말았다.
그게 니키엘 때문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고 있는 한, 직접 방문하여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말도 안 되는 루머가 잠재워질 듯했다. 그렇게 감옥으로 이동하는 동안, 많은 궁인들이 레이먼과 니키엘을 발견하고 인사를 해 왔다.
그때마다 레이먼은 가볍게 웃는 얼굴로 다정한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게 의외였다. 성격이 괴팍하다 싶었는데 그도 아닌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새끼, 나한테만 그랬던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니키엘은 갑자기 화해고 뭐고 미룬 채 등짝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현대인이 중세인에게 화낼 수는 없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감옥 탑에 도착했다.
“가스파르의 시신은 옮기지 않았습니다. 사인이 극명하여 따로 연구해 볼 것도 없다 해서 현장을 그대로 두는 걸 택했습니다.”
그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체를 장례 치르지 않고 방치하다가는 시체의 그림자에서 골이라는 마물이 태어난다.
이곳이 아무리 감옥이라 한들, 궁 안이기에 축성을 받은 건축 자재로 지어져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진작 마물이 태어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의 기미가 보이는 요즘은 골이 태어날 확률이 더 높았을 텐데 그냥 방치해 두다니 이상했다.
그 의문을 담아 레이먼을 보자, 그가 니키엘을 내려다보며 진중한 입술을 열었다.
“시체를 그냥 두어야만 전하께서 신성력을 발휘할 틈이 생깁니다. 얼토당토않은 모든 의문을 전하의 광휘로 가리소서.”
니키엘은 순간 그가 하는 말에 가슴이 둔중하게 내려앉았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의 무거운 정성을 받은 기분이었다. 놀라 바라본 레이먼의 눈빛에는 묵직한 것이 들어 있었다.
니키엘은 그것의 이름을 생각해 내기가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