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레이먼이 그런 식으로 제게 잘해 주는 건 또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음…. 고맙소. 공이 나를 그리 생각해 주는지는 몰랐는걸….”
살짝 쑥스러워진 니키엘은 더듬더듬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레이먼은 입을 다문 채로 앞장섰다. 그의 뒤를 따르자, 귓등이 붉어진 걸 볼 수 있었다.
‘짜식…. 막상 말하고 나니 민망한가 보지?’
그렇게 생각하는 제 얼굴도 붉어져 있다는 걸 모르는 니키엘은 픽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탑을 올라갔다. 계단이 나선형으로 되어 있는 전형적인 중세 시대 건축물이었다. 어느 층의 복도에나 창이 드물고 그나마도 크기가 작아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벽돌은 돌로 만들어져 있어 습기가 강했다.
뚜렷한 악취와 곰팡이 냄새에 니키엘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열심히 레이먼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가스파르가 있던 층에 다다르자, 미네르비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니키엘에게 인사했다. 복도를 가득 메운 탄내 사이로, 은발의 미인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다시 뵙습니다, 전하.”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상관이 옆에 서 있는데도 그녀는 니키엘에게 사근거리는 태도로 설명했다. 꼭 최고 결정권자는 니키엘이므로, 잘 보여야 할 사람 역시 니키엘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시체 냄새가 역하실 수 있으니 귀에 이 천을 두르시면 되겠습니다.”
“안 그래도 온통 탄내가 진동했는데 고맙소, 경.”
“별말씀을요. 그리고, 저자는 저희가 일부러 부른 자가 맞습니다.”
미네르비나가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니키엘에게만 들리게끔 말했다. 니키엘은 그녀가 말한 이를 바라보았다.
문이 열린 감옥 앞에 서서 코를 막고 있는 자는 입이 가벼운 걸로 유명한 의상부장, 빈체 로이스 자작이었다.
왕이 쓰는 물품 등의 구입 및 관리를 담당하는 직책을 가진 자작은 역적이 의문사를 당한 장소에 올 만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레이먼과 미네르비나는 따로 계획이 있는 듯했다. 아까 전, 복도에서 둘이 밀담을 나누던 게 이걸 준비하려고 했나 싶기도 했다.
그때, 레이먼이 미간을 좁히며 미네르비나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밀어냈다.
“떨어져, 바이스 남작.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아니, 공! 여성분께 공이야말로 뭐 하는 겁니까?”
그의 막힘 없는 행동에 놀란 니키엘이 미네르비나 대신 소리쳤다. 레이먼은 쯧, 혀를 찼다. 나쁜 짓을 하다 걸렸는데, 반성이라고는 하고 싶지 않은 태도였다. 미네르비나가 빈정거리듯이 레이먼을 향해 씩 웃는 얼굴이 니키엘이 선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하, 일단은 감옥으로 이동하셔서 시체를 살펴보시지요.”
미네르비나가 저는 괜찮다는 듯 말했다. 니키엘은 레이먼을 한 번 쓰레기 쳐다보듯 본 뒤 그녀의 말을 따라 이동했다. 레이먼이 제 뒷덜미를 문지르며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은 사람처럼 낮게 탄식하는 것은 듣지 못한 채로 말이다.
“아, 니키엘 전하….”
감옥 앞에 서 있던 의상부장이 파리한 얼굴로 니키엘을 돌아보았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봐서는 그저 남의 말이나 옮기기 좋아하는 촉새에 걸맞은 심약한 성격인데 불에 탄 시체를 보고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미네르비나에게 말했다.
“저, 바이스 남작…. 이제 나는 가 보면 안 되겠는가.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도통 욕지기가 가라앉지를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작님. 저자가 폐하의 침전에서 금 촛대를 훔쳤다는 제보가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품을 뒤져 촛대를 찾으면, 자작님께서 그것이 정녕 폐하의 물건인지, 그게 아니면 그저 불경한 무언가인지 제대로 판가름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아니…. 그깟 촛대가 뭐라고….”
왕의 궁에 있는 모든 물건을 관리하는 직책답지 않은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니키엘은 그것이 자작의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끌고 와 집에 가지 못하게 협박하고 있는 미네르비나 쪽이 조금 더 불량배 같기도 했다.
니키엘은 자작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뭔가를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 안으로 발을 내딛자 심약한 자작이 “힉! 전하! 그 불경한 곳을!” 하고 놀라는 걸 보니 더욱 그러했다.
불에 탄 가스파르 시체가 누워 있는 바닥은 그을음에 검기만 했고 시체는 인간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없게 형체가 무너진 상태였다. 하얗게 빛나야 할 치아까지 모두 숯처럼 검게 물든 가스파르의 시체는 햇빛에 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그저 재와 같아 보였다.
“전하께서는 이 방에 끼쳐 있는 삿된 것들을 눌러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미네르비나가 간단한 걸 주문하듯 말했다. 현대인인 니키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삿된 것이 뭔데. 나는 정초에 은행 사이트에서 생년월일 치면 알려 주는 신년 운세도 재미로만 보는 사람이란 말이야. 이런 오컬트적인 문제를 해결하러 온 건 아닌데….’
시체를 살펴보고,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어, ‘이놈이 죽은 이유는 태양광에 의한 자연 발화가 틀림없다! 놈의 옷감을 조사해 보라!’ 하고 대충 중세인들은 모를 법한 과학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작정이었던 니키엘은 대뜸 신성력을 주문받자 당황스러워졌다. 다시 생각해 보니 니키엘이 아무리 자연 발화에 대해 말해 봤자, 어쩐지 현대의 것은 발음 그대로 듣는 오시니스 사람들은 니키엘의 설명을 들어도 ‘좌욘 봐롸?’ 하며 의아해할 것 같기도 했다.
레이먼이 니키엘의 생각을 읽은 듯, 니키엘에게 말했다.
“보통 이런 일에는 신관을 파견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궁 내인 만큼 신성력으로 혹시나 남아 있을 저주의 편린을 빠르게 지우고자 부탁드린 것인데, 전하께서 하해와 같은 포용으로 직접 나서 주신다 하여 감읍할 따름입니다.”
레이먼은 정말 감동한 얼굴로 니키엘을 향해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 냈다. 니키엘은 그 반응에 레이먼이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가스파르 백작이 저주로 인해 죽었다는 진단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대뜸 불러 신성력으로 눌러 달라고 하는 말 자체가 이상했지만, 공포와 역겨움에 질려 있던 의상부장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번도 신성력으로 무언가를 축성해 본 적은 없었던 니키엘은 제 몸에 저절로 흐르는 탓에 늘 각혈을 유발했던 신성력을 밖으로 빼내기 위해 노력했다.
‘…책에서 보니까 무슨 몸에서 열을 발산하듯이 하라던데…. 순 사이비 같은 말만 하고…. 내가 원적외선 내뿜는 돌도 아닌데 말이야. 종교 맞냐?’
혹시 싶어 읽어 둔 신성력에 관한 책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 해 봤지만 이게 되는 건가 하는 의심만 들었다. 그때였다.
“오, 오오-!”
내내 헛구역질이나 해 대고 있던 의상부장이 시끄럽게 감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아저씨,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하던 니키엘은 쯧, 혀를 차고 그를 보던 고개를 돌리자마자 의상부장처럼 턱을 벌리고 놀랐다.
“이게, 이게 무슨….”
제 손에서 빛이 나오고 있던 것이다. 금색으로 찰랑이는 빛이 니키엘의 손에서 빠져나와 정말로 바닥에 묻은 그을음을 지우고 있었다. 니키엘이 제가 일으킨 기적에 지레 놀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하고 시끄럽게 중얼거리자, 곁에 서 있던 미네르비나가 박수를 짝짝 치며 그 소리를 덮었다.
“세에상에! 역시 우리의 니키엘 전하! 신성력으로 말미암아 사특한 저주를 지워 내셨군요!”
그저 바닥에 그을음이 벗겨진 정도라 신성력이란 사실 물걸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니키엘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아직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의상부장 쪽으로 고갯짓했다. 어서 빨리 이 사기극에 동참하라는 듯한 태도였다.
니키엘은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말했다.
“…내, 내 신성력이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다행이오…. 이자는 왕족인 나의 안전을 위협한 역적이지만, 그래도 가는 길은 편안했으면 하오.”
한 교수에게 갖은 아부를 떨어 대었던 석박사 시절의 실력이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인지, 니키엘은 제법 그럴듯하게 성자처럼 말했다.
말투와 대사가 약간 어색하긴 했으나 경악에 잠긴 의상부장의 눈에는 주신이 내려 준 선구자처럼 보인 듯했다. 그는 흡사 바닥에 머리를 박고 절할 기세로 감동한 눈을 하고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하하, 하고 그 시선에 어색하게 웃을 때였다. 레이먼이 니키엘의 손을 내려 주었다.
“그만. 전하께오서 피곤하실까 저어됩니다. 이제 축성은 되었으니 궁으로 가시지요.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니키엘은 아직 거뭇한 바닥을 바라보았지만 레이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니키엘의 어깨를 감싼 채 감옥을 빠져나왔다. 뒤에서는 미네르비나가 열심히 영업하는 사이비 종교의 집사처럼 의상부장에게 입을 털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보셨지요? 원래 이런 광경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자작님께서 운이 좋으셨습니다요. 니키엘 전하의 신성력에 광명이 넘쳐흐른다는 걸 수도 사람 모두가 알아야 할 텐데….”
“내 말이 그 말이오! 어떻게 이런 은총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을 여태껏 모두가 음해하고….”
“그러게 말입니다. 니키엘 전하의 능력을 시기한 누군가가 낸 헛소문이 아닐까요?”
실로 웃기는 소리였다. 진짜 니키엘이 귀부인의 치마폭을 뒤지고 영식들의 브레의 끈을 풀어 가며 방탕하게 살아온 것은 사실인데 순식간에 누군가의 음해에 의한 헛소문으로 평이 바뀐 것이다. 게다가 니키엘의 신성력을 질투하는 다른 누군가라니.
그럴 사람이라고는 라피엘 오시니스, 이 나라의 왕태자밖에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