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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02)화 (102/130)

102화

알레윈은 일단 빠르게 2층 계단을 올랐다.

“무도회 때도 훌륭하게 성장 차림을 하셨으니까 이번에도 설명드리면 무리 없이 단장 하시겠지, 뭐.”

율란의 성격상 워낙 꾸미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설득이 안 되면 어쩌나 싶었다. 최대한 빨리 옷을 갈아입힌 뒤 니키엘을 맞이해야 하는데 말이다.

사실 알레윈은 무도회 날, 율란이 그렇게 단장을 하고 연회장으로 향한 것도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같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대공의 침실 앞에 선 알레윈은 흠, 목을 가다듬고 노크했다.

“각하, 알레윈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단체 생활을 중시하는 전장에서 매일같이 함께 구른 탓에 상관의 사생활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알레윈이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공의 침실 안은 조용했다. 뭔가 싶었는데 작게 물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그라실 저택에는 욕탕이 따로 있었다. 이테렌의 이테니움 성에 있는 옥으로 만든 거대한 욕조가 놓인 욕탕만큼은 아니라도 충분히 사치스러운 곳인데 율란은 단 한 번도 그곳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는 늘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씻었다. 마법을 원동력으로 하는 기계가 끌어 올린 물이 수도관을 타고 욕조를 채우기 때문에 사시사철 뜨거운 물로 호화롭게 목욕을 할 수 있지만 거대하고 호화로운 욕탕에 비해서 시설과 규모가 간략한 편인데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욕실 문이 열리고 율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목화로 짜 낸 목욕용 가운을 입은 채 앞섶을 여미지 않은 상태였다. 그 범인의 경계를 넘어선 후각에, 뛰어난 청각까지 갖췄는데 알레윈이 침실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으니 예의를 중시하는 귀족치고 다소 방만한 행태였다.

“제발 다 벗고 돌아다니지 좀 마십쇼.”

“가운 입었잖아.”

율란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다가 집 안의 기색이 다른 걸 느꼈는지 미간에 실금을 긋고는 알레윈에게 물었다.

“누가 왔나? 1층이 시끄럽군.”

“아!”

알레윈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율란은 그동안 트립티크 뒤로 돌아가 대충 옷을 입었다.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브레와 얇은 튜닉이었다. 알레윈은 “어어어!” 하며 먼저 소리를 치고는 율란이 그를 미친놈 보듯 흘끗 쳐다보자 그제야 입을 열어 설명했다.

“큰일 났습니다, 각하! 지금 아래 누가 와 계신 줄 아십니까?!”

“내가 먼저 물었는데.”

“니키엘 전하가 오셨습니다!”

알레윈의 말에 가만히 있던 트립티크가 촤륵 소리를 내며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 뒤에 서 있던 율란은 튜닉의 앞섶을 방만하게 풀어 헤친 그대로 알레윈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이렇다 할 표정이 별로 없는 율란에게 익숙한 알레윈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지금의 율란은 죽은 이가 살아 돌아와도 그것보다는 덜 놀라겠다 싶을 만큼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알레윈 역시 이 점에 놀란 참이었다.

“…뭐?”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제프콕이 이를 갈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도 그런 걸레짝 말고 다른 걸 입으셔야 합니다!”

평소 상관이 입은 걸 보며 걸레짝이라고 생각만 했지 입 밖으로 내뱉은 적 없었던 부관과, 부관이 제 평소 복장에 대해 무슨 모욕을 하는지 귀에 들리지도 않은 상관이 짧은 침묵을 공유했다.

그런 다음, 율란은 한 손은 허리에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막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분이 여기는 왜….”

“병문안을 오신 듯합니다. 각하께서 광증에 시달리는 걸 눈앞에서 목도하신 분 아니십니까.”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율란은 지난 며칠간의 일들을 떠올리며 괴로운 회상에 젖었다.

시작은 무도회 날 새벽이었을 것이다.

옆구리 터져 줄줄 새는 귀리 자루처럼 들것에 실려 가다시피 수도 저택으로 귀가하게 된 율란은 주인님을 이렇게 모시면 어떻게 하냐는 제프콕의 비명과, 기절한 율란은 장정 3명이 달라붙어도 옮기기 힘든 체구라 마차에 태우지 못했다고 변명하는 부관들의 웅얼거림을 들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각하!”

“각하, 괜찮으십니까!”

알레윈을 비롯한 부관들과 제프콕이 달려들어 율란을 부축하려 들었다. 광증에 예민해진 때에 저를 건드는 걸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저들이 왜 저러나 싶다가, 아무렇지 않은 기분에 의아했다.

확실히 다른 때의 광증과는 달리 꽤 몸이 쾌적했다. 여기저기 긁혔다고 해도 곧 나아 버리겠지만 일단 남아 있는 핏자국이 없을뿐더러 광증 후 겪는 후유증이 부재했다. 그러다가 떠올린 것이다.

‘이성이 없는 건 확실한 것 같군. 대공 각하께서 나에게 이렇게 가까이 붙은 걸 보면.’

괴물 늑대로 화한 제게 속삭이던 니키엘의 음성을.

그 말은 정확했다. 당시에 율란은 이성이 없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광증 후의 일들을 모두 잊었던 지난날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물론 모든 것이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율란이 기억하는 것은 니키엘이 그에게 해 준 말 몇 마디와 제 목덜미를 쓰다듬던 부드러운 손길….

잠깐, 손길?

율란은 당황스러웠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아랫배가 단단해지며 브레의 한쪽 허벅지 부분이 몹시 조여 왔다. 율란은 쯧, 혀를 차며 제가 입고 있던 옷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입힌 거지?”

“당연히 접니다, 각하.”

알레윈이 별걸 다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그제야 안도한 율란은 비척비척 수레에 가까운 마차에서 일어나 대공저 안으로 향했다.

뒤에서 제프콕과 알레윈, 다른 부관들과 사용인들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 귀찮아진 율란이 모두에게 물러가라 말하려는데, 알레윈이 먼저 선수를 쳤다.

“내일은 연무 없이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광증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고 또-.”

“알겠으니까, 가 봐.”

두말하는 것이 싫어 가 보라고 말했다. 인간의 몸에서 늑대로 변한 뒤 그다음 날은 늘 근육이 너덜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찢어져라 비명을 외쳐 대는 몸의 통곡도 없고 늘 깨질 것 같았던 두통 역시 조용했다.

율란은 바로 침실로 올라가 몸을 씻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머릿속에서 저도 모르게 떠올린 니키엘의 목소리 때문에 반응했던 몸의 변화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읏, 이게 왜-.”

물론 율란 역시 신체 건강한 남성이니 그런 경우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달한 터라 그 정도 욕구는 금세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애초에 정욕이라는 것 자체가 드물었다.

율란에게는 욕구라는 것이 부재했다. 수면욕, 성욕, 식욕. 몸을 움직이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 많이 먹고 마물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잠을 자 휴식을 취하는 것뿐, 뱃가죽이 들러붙을 정도로 굶주려도 평온하게 식사가 가능했다.

그것은 성욕의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조절하지 못하는 욕구는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율란은 혀를 찼다.

그러나 자신과 혼례도 올리지 않은 이를 상대로 저 혼자 욕구를 푸는 것은 도의적으로나 양심적으로나 부적절하기 그지없어 욕조에 차가운 물을 잔뜩 받아 두고 들어가 힘을 받은 것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배우자도 아니고 예비 약혼자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상의 끝자락만으로도 불경했다.

욕조에 고개부터 집어넣어 온몸을 처박은 덕분에 물이 흘러넘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숨이 모자랄 때쯤 고개를 밖으로 빼내어 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긴 채, 율란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도 몸을 이완시켰다. 수십 분이 흐르고 겨우 효과가 나타난 후에야 욕조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잠자리에 들었던 율란은 보름달이 서산에 걸리는 시간에 제 침대 곁으로 찾아온 발칙한 꿈에 저항하지 못했다.

‘율란.’

백금발의 그는 율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 또 냉수나 다름없는 물로 목욕을 했구나.’

상대는 율란이 목욕을 했던 차가운 물보다 더욱 시려 보이는 벽안이 얼마나 다정한 빛을 띨 수 있는지 보여 주겠다는 듯 사근하게 웃었다. 율란은 어린 짐승처럼 끙, 하고 앓았다가 그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세게 안지 말라니까. 당신한테나 작은 힘이지 아예 부러질 것 같다고.’

그래. 때로는 그의 뼈를 부러트려서라도 자신 옆에 묶어 두고 싶어졌다. 그럴 때마다 율란은 제게 치미는 낯선 욕망의 파도에 어쩔 줄을 몰랐다. 율란은 그이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늘 허둥거렸다.

어쩌면 처음부터였다. 상아를 깎아 조각한 것 같은 얇고도 기다란 목덜미를 보는 순간 이를 박아 넣고 싶었다. 그 욕구를 참아 내려 오히려 못된 남자애처럼 말을 험하게 하고 그를 깎아내리려 했다.

왜냐하면 닿을 수가 없어서. 도저히 지금 이대로는 저 혼자 그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율란 발트의 혈관 속에 도사리는 발트가의 추잡한 욕망과 음습한 욕구가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이다.

그렇게 온 생을 통해 부정해 왔던 주제에. 자신은 조부인 도미닉 발트,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개자식과 다르다고 수없이 외쳤던 주제에.

‘율란, 나를 좀 봐.’

아니. 율란 발트는 개새끼 그 자체였다. 특히 니키엘 오시니스에게는. 그를 살살 발라 먹고 싶어 송곳니를 숨긴 채 헥헥거리는 개새끼. 그리고 그 인정과 함께 혼몽에서 겨우 깨어날 수 있었다.

“허억-!”

율란 발트는 한창 키가 자라던 때에도 하지 않았던 첫 몽정을 그날에 와서야 치렀다. 상대는 니키엘 오시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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