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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04)화 (104/130)

104화

불행하게도, 율란의 그런 부정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못하신 건가? 왜 가만히 서서 그러고 있는 건지….”

너무 뚫어지게 본 탓에 니키엘이 저를 이상하게 보는 듯했다. 율란은 귓가에 바유바(마물로 작은 산만 한 덩치를 갖고 있다)의 발걸음 소리처럼 크게 울리는 제 심장을 무시하려 애쓰며 니키엘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침, 늦은 오후의 햇살이 응접실에 들이치며 니키엘의 백금발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금관을 쓴 듯 반짝이는,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눈동자 색이….’

율란은 니키엘의 벽안이 빛에 따라 색이 깊어진 걸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자연의 경이로운 경관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빠듯하게 조여 오는 흉통은 율란이 생전 처음 겪는 종류의 통증이었다. 수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데도, 생경한 아픔이었다. 도대체 이 통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율란은 답을 찾는 얼굴로 제 앞에 앉아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

“…….”

니키엘은 그저 지그시 율란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장미 꽃잎을 살짝 머금은 뒤 뱉은 것처럼 옅은 분홍색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지도, 그렇다고 그 입을 열어 안에 든 산호색 혀를 보여 주지도 않았다.

웃긴 점은 율란은 현재,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단 거였다. 자신이 니키엘의 미소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의 입술을 열어 산호 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도 모른 채 멍하니 니키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율란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테렌의 모든 이가 그를 흠모했지만, 그것은 젊은 영주를 향한 존경과 애정이지 율란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사랑은 아니었다.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제 안에서 생성되고 있는 것의 이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무지가 가장 큰 죄악이라는 어느 경전의 말처럼 율란은 한동안 더 고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는 걸 율란도, 그리고 맞은편 소파에 앉아,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하고 심드렁하게 생각 중인 율란의 심장도 모르는 내용이지만 말이다.

율란이 어떤 생각에 빠져 밤하늘을 헤매는 사람처럼 넋을 잃었는지 모르는 니키엘은 오늘 그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참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끝내주게 차려입고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오기에 정체불명의 약을 마신 후유증은 없나 했더니 말도 안 하고 제 얼굴만 뚫어지게 보는 게 아닌가.

응접실에 들어와 인사를 나눈 후, 제 말에는 대답도 없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끈질기게 저만 응시하고 있는 율란이 이상했다.

‘왜 저래…. 쉬고 있는데 찾아왔다고 눈치 주는 건가…?’

그래도 저 때문에 왕궁 한복판에서 늑대로 변한 것이 미안해 찾아온 것인데 약간 민망해졌다.

‘괜히 오버했나…. 그냥 쉬게 둘걸.’

쩝, 입맛을 다신 니키엘이 찻잔을 내려놓고 뺨을 긁적였다. 얼른 나가 주는 게 맞을 듯해 입을 열었다.

“그, 공이 지난번 나를 위해 술잔을 비워 준 덕분에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었소. 인사 없이 넘어가기엔 마음이 석연치 않아 방문한 것인데…. 아무래도 너무 늦은 시간에 방문하여 대공에게 피로감만 심어 준 듯하군.”

니키엘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대답이 없는 율란에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야겠다 싶어졌다. 대충 선물을 건네주고 자리를 뜨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애초에 서로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지 않나. 궁의 경비에 신경을 써야 하는 입장인데 멍청한 막내 왕자가 수상한 놈이 내민 술을 넙죽 받아먹고 쓰러져 죽기라도 하면 그게 더 손해라 앓느니 죽는다는 심정으로 대신 마신 것일 수도 있다.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광증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 넙죽 찾아와, 고마워요! 하고 귀찮게 굴면 없던 짜증이 샘솟지 않을까 싶어졌다.

‘하루 더 있다가 와 볼 걸 그랬나…. 그래도, 뭐 나는 할 만큼은 했어. 선물이나 두고 가야지.’

니키엘은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였다.

“어디를, 가려 하십니까.”

“어…? 아니, 나는 그저…. 대공의 몸이 아직 미령한데 시기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하여 가 보려고….”

“앉아서 차 마실 정도의 체력은 됩니다. 고작 며칠 검을 잡으신 걸로 검술 스승의 체력을 우습게 보시는군요.”

“뭐?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음…. 근데 지금 농담을 한 게요?”

당황하여 아니라고 말하려던 니키엘이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물었는데도, 율란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 뿐이었다. 그의 손이 무척 커다래, 아이들의 소꿉놀이 장난감 찻잔을 들어 올린 어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자리에 다시금 엉덩이를 붙였다.

“대공에게는 찻잔이 좀 작은 편이군.”

“…그렇습니까. 다음에는 좀 더 큰 찻잔을 준비하겠습니다.”

다음? 무슨 다음? 니키엘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신경을 껐다. 그냥 인사치레의 말로 생각하기로 했다.

갑자기 율란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부드러워진 것이 이상하기도 하고, 오늘은 웬일로 툭툭 반말을 지껄이지는 않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니키엘은 관심 없는 이에게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닌지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겨 버렸다.

대신 니키엘은 가져온 바구니에 대해 말했다.

“고맙기도 하고 대공이 오늘은 외출을 않고 집에만 있다길래 걱정이 되어 문안 선물을 가져와 봤소.”

“…선물을, 말씀이십니까?”

율란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찻잔을 든 채로 굳은 얼굴이 처음 보는 표정인지라 니키엘은 오늘따라 저 싸가지가 참 희한하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물…. 꼭 저같이 아기자기한 짓만 하는군….”

때문에 율란이 중얼거리는 말은 잘 듣지 못했다.

“음? 뭐라 하였소, 대공.”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무엇을 가져오셨습니까.”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제프콕이 응접실 벽면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바구니를 들고 왔다. 니키엘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대공의 아름다운 얼굴을 고려하면 병문안 선물로는 꽃이 제격이겠지만 나는 본디 실용적이지 않은 선물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하는 편이라…. 고맙네, 제프콕.”

아름답다는 말을 하자마자, 율란이 작게 헛기침하며 찻잔을 내려 두었다. 니키엘은 제프콕이 가져온 선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느라 보지 못했다. 주먹으로 입을 가린 율란이 흠, 하고 목을 울리고는 붉어진 귓등을 한 채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고맙네, 제프콕.”

그러나 니키엘은 시기적절하게 바구니를 들고 와 티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제프콕을 향해 고맙다 인사하느라 율란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율란이 제프콕을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제프콕은 경력이 오래된 만큼 노련한 눈치로 제 주인의 심기를 정확히 읽었다.

‘아이고, 주인님. 지금 전하께서 제 이름 한 번 불러 주셨다고 저를 노려보실 때가 아닙니다. 손님으로 온 분에게 말 한마디 친절하게 건네질 않으셔 놓고 무슨…. 아니, 얼굴이 잘생기시면 무얼 하나. 활용을 못 하고 계신데!’

사실 제프콕은 아까부터 속이 체한 듯 답답했다. 율란이 응접실로 들어와 한 일이라고는 니키엘을 너무 빤히 쳐다봐 민망함을 끌어낸 게 다였다. 제프콕이 듣던 대로 니키엘은 무척 상냥한 사람이라 면전에서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뿐이지, 니키엘 역시 율란의 집요한 시선이 불편해 보였다.

그런데 저 잘못한 건 생각도 않고 니키엘이 제 이름을 기억해 주었단 사실만으로 충실한 가신에게 살기를 쏘기 바쁘다니. 제프콕은 이 일을 어떡해야 하나 머리가 아파졌다.

그 사이, 니키엘은 바구니 안의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육포요. 나 사는 궁의 주방장 솜씨가 꽤 훌륭해 대공의 입에도 잘 맞을 것 같아 챙겨 왔소. 아무래도 육포는 전투 식량이기도 하고, 또 이 정도로 상품의 육포는 잘 없는 편이니까.”

얼굴에 화색이 돌고 미소가 명랑한 것이, 선물을 준비해 준 이와의 유대 관계가 깊어 보였으며, 또 저 바구니를 준비해 올 때 나름에 정성을 쏟은 듯했다. 제발 율란이 눈치라도 있으면 그 점을 깨닫고 니키엘에게 칭찬을 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잘 먹겠습니다.”

…그게 정말 최선이신가요, 주인님. 제프콕은 기절하고 싶어졌다. 제프콕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두 고귀한 분에게 차를 다시 올리겠다는 핑계를 대고 응접실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얼른 이테렌의 핀에게 전서구를 보내어 니키엘을 맞이할 준비를 성대히 하라 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나가던 하녀 아이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고 이른 제프콕은 아이가 명령한 것을 가져다주자마자 빠르게 글씨를 휘갈겼다.

전서구로 보낼 내용인지라 길게 풀어 설명할 시간이 없어, 그저 니키엘 전하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충고만 담은 채 그대로 전서구들을 관리하는 새지기에게 가는데, 어떻게 안 것인지 새지기가 품에 검은 깃털 뭉치를 안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때맞춰 이쪽으로 오는 새지기가 반가웠던 제프콕은 그의 품 안에 안긴 것이 심상치 않자 큰 소리로 물었다.

“자네! 그게 무엇인가?”

“집사님! 큰일 났습니다요! 이 검독수리가 혹시…. 그리프 후작이 아니십니까요?!”

“뭐?!”

새지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검독수리는 크기가 작았지만 분명 지카리 그리프 후작이었다. 제프콕은 놀라 새지기의 품에서 수리를 안아 들었다. 수리는 여기저기 다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프콕은 새를 조심히 안아 든 채 응접실로 뛰어갔다. 한시가 급했기 때문이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여전히 차에 설탕 대신 침묵을 타 들이켜고 있었다. 그것도 갑갑한 상황이긴 했지만 보다 긴박한 것이 있어 제프콕은 빠르게 말했다.

“각하! 그리프 후작께서!”

그리고 그 순간, 니키엘이 쥐고 있던 찻잔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도자기의 소리가 크게 응접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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