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105)화 (105/130)

105화

“수리야!”

니키엘이 놀라 일어나는 바람에 굴러떨어진 찻잔이 깨지자, 율란은 긴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니키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율란은 지카리에게 집중하고 있는 니키엘의 옆얼굴과 제프콕의 품에 안겨 있는 지카리를 번갈아 응시했다.

“대체 어디서 다친 거야!”

니키엘은 놀라 제프콕에게로 달려갔다. 매사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밍숭맹숭한 표정이던 사람이 경악에 물들어 달려 나가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율란은 제 눈빛이 어떤지도 모르고 지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첨예한 살기에 의식을 잃었던 지카리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 움직임에 지카리가 의식을 찾은 줄 알고 놀란 니키엘이 검독수리를 살폈다.

“깨, 깨어난 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주인의 살벌한 기색을 먼저 눈치챈 제프콕이 식은땀을 비질 흘리며 대꾸했다.

“이럴 게 아니라, 눕혀서 얼른 치료하는 게 나을 듯하네. 대공, 혹시 내빈용 침실을 따로 쓸 수 있소?”

마지막 말은 율란에게 묻는 것이었다. 상처 입어 돌아오더니 니키엘의 관심을 독차지한 정찰병에게 저도 모르게 살기를 품고 있던 율란이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프콕이 상처 입은 검독수리를 품에 안은 채로도 유려한 몸짓을 보이며 니키엘을 내빈용 침실로 인도했다. 그 사이, 새를 치료하기 위한 도구함을 들고 온 새지기가 따라붙었다.

율란은 정신없어 보이는 니키엘의 정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새를 많이 아끼는군.’

숲속에서 작은 동물들과 소통하던 니키엘을 알고 있는 율란은 니키엘이 동물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목덜미에 와 닿던 니키엘의 물망초 줄기 같던 손가락이 생각났다.

“…….”

그러니까 율란은, 그런 자신이 제일 어이가 없었다. 정찰로 내보냈던 지카리가 다쳐서 돌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드물고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고작 니키엘의 손가락이 와 닿던 감촉이라니.

미간을 찌푸린 율란은 새지기에게 물었다.

“…어디서 발견됐나.”

“그, 그것이 갑작스레 전서구 우리의 지붕에 날아와 박으시더니 그대로 미끄러지시길래 제가 천을 펼쳐 얼른 받아 냈습죠. 날개가 꺾이진 않아서 회복은 문제없으시겠지만 복부에 꽤 큰 창상이 있으십니다요.”

지카리의 성장이 아직 덜 끝난 상태이긴 해도, 웬만해서는 저런 식으로 다치진 않는다. 애초에, 이 대륙에서 지카리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마물은 없었다.

여름쯤에 날개뼈 부위가 다치긴 했지만 그건 저 혼자 새들의 짝짓기 시기에 열이 받아 날뛰다가 다친 것으로 회복은 빨랐으니까.

그런데 지금 지카리의 상처 부위에서 나오는 끈적한 검붉은 피가 이상했다.

그 사이, 제프콕은 빠르게 내빈용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 조심히 지카리를 올려 두었다. 새지기가 침대 옆 콘솔 위에 치료 도구함을 올려놓는 걸 보던 니키엘이 침실을 나서 하인 하나에게 끓인 물과 깨끗한 천, 독한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지. 이 아이는 내가 아는 아인데…. 안쓰러워라….”

그러고는 침대 옆에 달라붙어 다시금 검독수리를 살폈다. 제프콕은 빠른 눈치로 니키엘이 그 검독수리가 지카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 더하여, 제 주인이 니키엘에게 검독수리의 정체에 대해서 숨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빠른 깨달음 덕에, 제프콕은 쓸데없는 말을 하려는 새지기의 입을 적당한 때에 막을 수 있었다.

“아이…? 저, 이분은 그러니까 지카…. 읍-?!”

“음, 자네는 얼른 검독수리를 치료하시게. 다른 부상이 없나 잘 살펴야 하네.”

“엇…. 네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높은 분들끼리 오간 얘기가 있나 싶었던 새지기는 입을 다문 채 제프콕에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소독약을 꺼냈다. 그사이 하인이 가져온 독한 술에 손을 닦은 니키엘이 끓인 물에 깨끗한 천을 적셔 검독수리의 상처 부위를 닦아 냈다.

새지기가 황송하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전하, 이런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두게. 어디서 이렇게 다쳐 왔는지 모르겠으니 내가 할 일이라곤 이것뿐이야.”

니키엘이 사뭇 안타깝다는 얼굴로 핏물이 말라붙은 깃털을 천으로 조심조심 닦아 냈다. 제프콕은 그런 니키엘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제 주인 때문에 등 뒤로 식은땀이 났다.

‘살기가 첨예하게 그리프 후작께만 꽂히는구나. 이대로는 부상당한 후작께 좋지 못할 텐데…. 아니, 아예 본인이 살기를 품고 있다는 걸 모르시는 걸까?’

합당한 의심이었다. 제프콕은 의식을 차리지 못했는데도 제게 쏟아지는 살기가 불편한지 날개를 움찔거리는 지카리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살기를 천천히 거둔 율란이 제프콕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장들에게 다녀올 테니 깨어나면 알려.”

“예, 주인님.”

율란은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는 침실을 완전히 나서기 전, 니키엘을 한 번 돌아보았지만 니키엘은 의식을 잃은 새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시선을 돌린 율란은 그 후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사이, 새지기는 능숙한 솜씨로 새의 상처부를 치료했다. 니키엘은 그런 검독수리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제프콕이 니키엘에게 거듭 권한 뒤에야 저녁 식사를 했는데, 그나마도 저택의 식당이 아닌 새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서 빵 사이에 고기를 끼운 것으로 간단히 해치웠다.

제프콕은 그라실에 처음 방문한 니키엘의 첫 식사가 고작 그런 간단한 요리라는 게 황송하면서도 율란이 왜 니키엘에게 그 새가 지카리라는 걸 숨겼는지 알 것 같았다.

‘…다른 분들도 결국엔 경쟁자시다. 우리가 더 잘해야 해. 주인님의 괴팍한 성질머리는 얼굴로 상쇄한다 해도 그건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다들 헌헌장부이시기 때문에 니키엘 전하께서는 취향에 맞는 분을 고르실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우리는 아직 전하의 취향을 모른다.’

아마, 율란은 무의식중에 그 새가 지카리라는 걸 숨겼을 것이다. 그리고 제프콕은 주인의 그 감을 믿었다. 지금 새가 지카리라는 걸 알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최소한 후작께서 다 회복하신 뒤, 전하의 동정을 사지 않는 상태에서 알려져야 한다.’

그렇게 제프콕 이하, 발트 대공가가 나아갈 비전이 제시되었다. 제프콕은 니키엘의 새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지카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오래 머물렀네. 이제 슬슬 가 봐야 할 텐데 마음이 쓰여 자리를 뜰 수 없군.”

그때, 니키엘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전하, 혹 그러하시다면 마차는 먼저 돌려보내심이 어떠실까요?”

“마차…? 아아, 그 말이군.”

니키엘은 제프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제프콕은, 마차를 먼저 돌려보내 니키엘이 왕자 궁으로 돌아간 것처럼 꾸며 구설수를 피하고 오늘 밤 아예 그라실 저택에서 묵고 가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까지 얻어먹었는데 하룻밤 신세를 지는 게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율란은 내가 찾아온 것을 성가셔하는 듯했는데 말이야….’

망설이던 니키엘이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께서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좋네. 자네의 주인이 귀가하면 한번 물어봐 줄 수 있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율란의 승낙은 당연한 얘기였다. 때마침 주인의 귀가를 알리는 종이 울리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제프콕은 묵례 후 내실을 나선 다음 빠르게 계단을 내려와 현관으로 향했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율란이 들어왔다. 제프콕은 주인에게 니키엘에게 했던 제안과 함께 그의 대답을 고했다.

“…하룻밤 머물고 가신다고?”

현관문 앞에 있던 하인에게 프록코트를 건네주던 율란의 한쪽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양 광대뼈를 짚은 다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제프콕은 주인의 귓등이 붉어진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 저녁이라도 함께….”

“무언가에 열중하신 분을 불러내셨다가는 성가심만 사실 수 있습니다, 주인님.”

제프콕은 빠르게 조언했다. 그 말에 멈칫한 율란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위 마나가 일렁이는 게 마력이 없는 제프콕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충언을 한 자신에게 보내는 살기가 아님을 아는 제프콕이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것을 참으며 주인에게 알맞은 충고를 권했다.

“대신 전하께 ‘검독수리’가 걱정되신다고 말씀해 보십시오, 주인님.”

“…….”

율란은 그리프 후작이라고 말하지 않고, ‘검독수리’라고 말하는 제프콕을 빤히 보다가 이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자 제프콕이 빠르게 따라붙어 율란에게 말했다.

“옷을 한 번 더 갈아입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까 갈아입었잖나.”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주인님.”

어이가 없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율란에게 다시금 조언한 제프콕이 빠르게 율란의 지밀 하인들에게 실내복을 준비해 놓으라 지시했다. 율란은 됐다고 말하려다가 쯧, 혀를 차고 계단을 올라 손님용 객실이 아닌 대공 침실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기 전, 제프콕은 하인에게 니키엘에게 말했던 것처럼 사람을 태워 마차를 왕자 궁으로 돌려보내되, 그이에게 마차에 쳐진 커튼을 절대 열어 보지 말고 조용히 몰래 내린 다음 왕자 궁의 시종인 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게끔 하라 명했다.

먼저 계단을 올라가던 율란이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제프콕에게 말했다.

“귀한 분이 머무시는 동안 불편 없도록…. 해 주게.”

“그럼요, 주인님.”

제프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