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모레…? 그렇게 빨리?”
니키엘은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은으로 만든 고블릿을 입술에 가져다 대던 율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이렇게 일정이 당겨진 거요? 혹시…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율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니키엘은 향신료를 입혀 숯불에 구워 낸 청둥오리의 다리 살을 나이프로 썰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몬스터 웨이브가…. 서서히 북쪽으로 이동하는 모양이군.’
북쪽에서 시작되는 토벌 대회를 좀 더 빨리 시작하는 것을 보면, 마물들이 아예 군집을 이루기 전에 그 싹을 자를 계획인 듯싶었다. 마물 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알고리즘을 머릿속으로 만들어 보던 니키엘을 향해, 율란이 말했다.
“웬만해서는 제 옆이나 볼트윅 공작의 옆에 붙어 계십시오.”
그나마 마음이 제일 편한 루시안과 함께하려던 니키엘이 의아하듯 바라보자, 율란이 그 속을 알겠다는 듯 눈매가 가늘어졌다.
“루시안은 쉴드를 맡아야 하기 때문에 자리를 자주 비울 겁니다. 접근전에서는 롱소드를 사용하는 레이먼보다 제가 나을 테니 1순위로는 저를, 그다음은 레이먼, 그다음은 루시안을 호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군. 지금까지 대공에게 배운 검술로 나 혼자 어떻게 해 보겠다 호언장담하고 싶지만, 그런 말 하는 즉시 마물에 깔려 죽을까 무섭소. 옆에 딱 붙어 있을 테니, 너무 성가시게 여기진 마오.”
니키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처리할 업무가 산더미인데 웬 직장 상사의 중학생 아들 과외까지 해 줘야 한다고 하면 누군들 짜증이 나지 않을까. 지금의 자신이 그 성가신 직장 상사의 중학생 아들 역이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니키엘이 전력으로서 대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괜히 얼쩡거리다가 뭐 해 보겠답시고 기사들 열이나 흐트려 놓으면, 고스란히 마물이 공격할 부분을 만들어 주는 거라고. 그러다 인명 피해라도 생기면 그 원성은 누가 감당하겠어. 저도 군필이라 오와 열 정도는 압니다요, 대공 각하.’
속으로 빈정거리는 한이 있어도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니키엘이 이번 대회에 참여하는 목적은 분명했다. 마물 도감을 새로 편찬하는 것. 그러니 최대한 대열에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마물을 살피면 충분할 것이다.
이전에 알려진 마물에 대한 책들이 엉터리라 새로 쓰는 것이 아니라, 결과 논문을 집필하듯 산발적으로 퍼진 마물에 대한 정보를 재정립하고, 그들을 계-문-강-목-과-속 등의 단계로 나누고 싶은 것뿐이었다. 필요에 따라 더 잘게 나누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큰 가지로 나눠 놓는 일조차도 사실상 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니키엘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니키엘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돌아가 봤자 이미 내 몸은 화장당해서 아버지랑 어머니 납골당 사이에 안치되었을 텐데 미련도 없고…. 여기서 쭉 살 거면 연구나 해 보자 이거지.’
그렇게 연구한다고 해도 관련 기관이 없으니 연구비도 안 나올 테지만 다행히 니키엘은 일국의 왕자였다. 남자에게 장가들기 위해 길러졌지만, 왕자는 왕자인 것이다. 그러니 왕자궁 앞으로 들어오는 예산들을 끌어다 쓰면 충분할 것이다.
평생에 걸쳐 발품 팔아 연구한다고 생각하면 못 이룰 것도 없었다. 니키엘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편찬했을 때의 마음가짐으로 다가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짚신을 여러 켤레 짊어지고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던 조선 시대 사람들보다야, 마법이 되는 이 세계의 자신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를 이루려면 매번 열리는 토벌 대회에 꾸준히 참가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움직여 자신이 성가시지 않다는 걸 어필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매번 데려가 주지 않겠어?’
니키엘은 자신의 계획을 다시 더듬어 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을 마주한 율란의 관자놀이 부근이 붉어졌지만, 워낙 표정이 없는 탓에 그 정도의 홍조는 그저 식당이 덥나 보구나, 하고 넘길 정도로 사소한 일이었다.
기다란 테이블을 한가득 메웠던 접시들 위 음식을 한 입씩만 맛보았는데도 금세 배가 불렀다. 늦은 시간에 과식하지 않는 니키엘은 혀를 찼다.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소. 너무 많이 먹었는걸….”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오, 그래도 되오?”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당 스파이크를 예방하기 위하여 식후 30분 동안 걷는 걸 즐겨 하는 니키엘로서는, 객 주제에 괜히 그라실 성을 돌아다니다가 괜한 빈축을 살까 봐 말을 아낀 참이었다. 그런데 율란이 먼저 산책을 권해 주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니, 저 자식이 왜 갑자기 친절하지. 뭐, 일단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니키엘이 후식으로 나온 라즈베리 푸딩을 먹는 동안, 율란은 조용히 기립해 있던 제프콕을 불러 바깥 정원에 야광석을 켜 둘 것과 니키엘이 가을 밤바람에 춥지 않도록 옷가지를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니키엘은 마지막 한 입의 라즈베리 푸딩을 입에 넣고는 우물거려 삼킨 뒤 킥킥 웃었다.
“대공은 의외로 자상한 구석이 있으시군.”
“…….”
“…….”
그 말에, 율란과 제프콕 둘 모두 단번에 니키엘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모두 받게 된 니키엘이 놀라 물었다.
“무슨…. 내가 잘못 말한 것이라도 있소?”
“…아닙니다, 전하.”
율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프콕이 살짝 웃으며 니키엘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고는 율란이 지시한 사항에 대해 하인들에게 전하자 마침 발 빠른 하인 아이 하나가 가져온 외투를 율란에게 건네주었다.
“전하.”
제프콕에게서 코트를 받아 든 율란이 옷을 펼친 채 가만히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니키엘은 이게 뭔가 싶어 의아해하다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직접 입어도 된다고 겸양을 떠는 말은 왕자인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해 니키엘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약간 낯간지러운데.’
율란은 그런 니키엘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그가 다가오자 코트를 걸쳐 주고는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기 위함임을 깨달은 니키엘이 낯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율란은 묵직한 시선으로 니키엘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파티장도 아닌데 꼭 이럴 필요가….”
“야광석을 켜 두었지만 전하께오선 그라실이 처음이십니다. 과하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만한 배려를 보여 드리는 것뿐이니 가납하시지요.”
이쪽은 그럴 생각도 없는데 웬 유난이냐는 말투였다. 니키엘은 쩝, 입맛을 다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한 바퀴만 걷고 오면 될 것 같은데. 아직 아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오.”
그 순간 율란은, 아이라는 니키엘의 말에 그라실 후원을 함께 걷는 두 사람을 상상할 수 있었다. 백금발을 물려받은 아이가 노간주나무를 엮어 만든 아이용 침대에서 자는 동안, 두 사람은 후원을 걸으며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떠드는 것이다. 갑작스레 떠오른 상상 때문에 율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니키엘은 그가 인상을 쓰자,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산책하는 타입인가 보지? 형아가 닥쳐 준다. 나 원, 까다롭네.’
짧게 어깨를 으쓱인 니키엘이 입을 다물자, 율란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후원을 걷게 된 두 사람은, 유능한 집사인 제프콕이 그들의 산책을 예견이라도 한 듯 미리 정원사들을 진두지휘하여 켜 둔 야광석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
“음, 쉽지 않았어.”
인성이 나가리인 선배를 쌩무시 하고, 저를 갈구는 군대 선임을 자연스럽게 헌병대에 찔러 넣던 ‘내 인생 나대로’의 대표주자 니키엘도 버거울 만큼 부담스러운 산책이었다.
들어가자고 말도 못 하고 몇 바퀴 더 돈 까닭에 소화는 다 되었지만 오히려 얹힌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산책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율란 때문에 힘겨웠던 니키엘은 얼른 씻고 나와 다친 수리 옆에서 심신을 달랜 뒤 신성력이나 쏟아부어 주고 싶었다.
“나았으면 좋겠는데. 지난번에도 내 신성력 덕분에 날개뼈가 빨리 나았던 건 아닐까.”
지밀 시종이 없어 불편하단 이유로 혼자 씻게 해 달라고 제프콕에게 부탁했던 니키엘은 간만에 폴의 잔소리 없이 3분 군대 샤워를 선보여 기분이 나아진 참이었다.
향유를 부은 물에 몸을 적시는 것도 익숙해진 참이지만, 번거로운 걸 싫어하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니키엘에게 긴 목욕은 취향에 맞지 않았다.
‘비누 하나로 머리 감고 몸 닦고 세수하고 다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많은 향비누를 써야 하는 건데.’
운동이 취미라 땀을 많이 흘리니, 차라리 하루에 짧게 여러 번 씻는 게 더 청결했다. 그렇게 간만에 취향에 맞는 샤워를 마친 니키엘은 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막지 않았다.
이대로 검독수리와 함께 잠들면 나쁘지 않은 하루가 될 듯싶었다. 그 사이에 간간이 신성력을 건네준다면, 내일 아침쯤이면 검독수리도 완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손님용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나오던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으악!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대, 대공이 여긴 어쩐 일로…?”
바닥까지 펼쳐질 정도로 기다란 양피지 두루마리를 든 채 율란이 벽 쪽에 놓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먼저 손님방에 들어와 앉아 있던 주제에, 율란은 놀란 듯한 얼굴로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니키엘은 그제야 제 차림이 어떤지 깨달았다. 밑에는 얇은 모슬린으로 만든 하의만 입은 채 상의는 탈의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건…. 그러니까, 나는 당연히 방에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니키엘이 변명처럼 말을 주어 삼키고 있던 그때였다. 율란이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