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새가 없어졌지 않소! 대공은 아까부터 내가 그 새를 걱정하는 걸 보지 못했어? 사람이 어쩜 그렇게 야박해!”
니키엘은 자신이 대공에게 반말하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소리치는데도 율란은 창문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와 문단속을 할 뿐이었다. 걸쇠를 꼼꼼히 걸어 잠근 뒤, 다른 창문 역시 단단하게 잠겨 있는지를 확인한 율란이 그제야 니키엘을 돌아보았다.
“새는 아까 전 그놈이 날려 보냈습니다.”
“뭐…?”
“다행히 다 나았는지 날갯짓이 힘차더군요. 그러니 새에 대한 것은 더 걱정 마시고 방금 전 그 금발 놈이나 조심하십시오.”
율란이 짓씹듯 말했다. 니키엘은 멍하니 율란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물었다.
“그러니까, 새는 무사하단 거지…?”
“그렇습니다.”
니키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음, 그럼 됐소.”
무사히 잘 날아갔다니 다행이었다. 인간의 손을 탔는지 니키엘을 잘 따르긴 했어도 사실 주인이 있는 새가 아닌 이상 빨리 날려 보내 야생성을 회복시켜 주는 게 맞다. 그리고 부상을 잊은 듯 힘차게 날아올랐다는 건 니키엘의 신성력이 새에게도 효과가 있었다는 뜻이었기에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걸리는 것 없다는 얼굴로 수긍하는 니키엘을 바라보던 율란이 미간에 살짝 금을 그은 채 말했다.
“…그럼, 남은 밤은 편하게 보내시지요. 침략자는 더 이상 들어오진 못할 겁니다.”
“고맙소, 대공. 그런데 그 남자의 정체는 무엇이오?”
율란은 니키엘의 말에 등을 돌려 침실을 나서며 대답했다.
“치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하의 침실로 숨어들기에 쫓아낸 것뿐.”
“뭐?”
니키엘이 놀라 되묻는데도 율란은 등을 완전히 돌린 채 가 버렸다. 그의 등 뒤로 침실의 문이 닫혔고, 니키엘은 멀뚱하게 서 있다가 모자란 잠에 하품을 내뱉으며 침대로 향했다.
새가 누워 있던 부분을 쓸자 온기 없이 차갑기만 했다. 창밖을 한 번 바라보던 니키엘은 침대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전에도 이렇게 불쑥 사라졌으니까.”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하며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 니키엘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
아침에 일어난 니키엘은 문을 두드리는 하인의 아침 단장을 돕겠다는 말을 거절했다. 간만에 폴이 들들 볶지 않아 편하다고 생각하는 참이었다.
전기만 있다면 뭐든지 혼자의 힘으로 해내는 현대인인 니키엘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시중든답시고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 더 불편했다. 그렇게 하인을 물린 니키엘이 세수를 간단히 마친 후 침실로 나오니, 못 보던 트립티크가 세워져 있었다.
“전하, 혹시 몰라 새 옷을 준비했습니다. 살펴보시고 괜찮으시다면 입어 주길 바란다는 대공 각하의 전언입니다.”
트립티크에 걸린 옷을 정돈하던 제프콕이 인기척에 니키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단정하게 고개를 숙인 제프콕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그는 돕겠다는 말 없이 침실을 나섰다. 짧은 사이에 니키엘이 어떤 걸 불편해하고 어떤 걸 편해하는지 다 파악한 듯싶었다.
유능한 집사라고 생각하며, 니키엘은 제프콕이 두고 나간 옷을 살폈다. 옷은 폴이 니키엘에게 늘 권하는 옷보다 조금 더 얌전한 방식의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프록코트와 브레가 금색인 데다 아마 빛으로 보이는 금사로 여러 무늬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어 결코 수수해 보이진 않았다.
“어엉, 율란 취향이 이랬다고…?”
니키엘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옷을 입었다. 브레는 보이는 것과 다르게 통기성이 우수하고 신축성이 뛰어난 것이 견사에 면을 섞은 것 같았다. 이런 방직 기술이 있나 싶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름 왕자에 패션에 일가견이 있던 과거의 영광 때문에 좋은 옷을 많이 걸쳐 보았다고 생각한 니키엘에게도 율란이 구해 온 옷은 활동하기가 편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안 거야?”
한 가지 의문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니키엘은 의문을 거기서 접은 채 손님용 침실을 나섰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하인이 식당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그이를 따라가자, 어제와는 다른 홀이 열렸다. 유리로 된 창이 무척 커다래 전면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방으로, 창밖의 정원이 한눈에 보여 꼭 유리온실 같았다.
“기침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홀 한가운데에 놓인 식탁에 앉아 있던 율란이 니키엘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아침이요, 대공.”
율란은 웃지도, 그렇다고 무표정도 아닌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니키엘은 어쩐지 그가 민망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느낌뿐인 데다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지 않는 니키엘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며 이번에도 율란이 빼내 준 의자에 앉았다.
‘대공저에선 대공이 손님의 의자를 빼 주는 게 예의인가…? 보통 하인이 할 일 아닌가 이 말이야.’
니키엘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사용인들이 차례로 들어와 니키엘이 앉은 테이블 위로 접시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아침이라 전날 만찬보다는 간단한 메뉴들이었는데 모양새가 아기자기하고 어여뻐 먹기엔 아까운 것들이 많았다.
니키엘은 자신의 앞에 놓인 호박스프를 내려다보며 의자에 막 앉고 있던 율란을 향해 말했다.
“대접이 이렇게 융숭하면 또 찾아오라는 말로 들리는데.”
“바로 아셨습니다.”
인사치레처럼 건넨 농담이 되돌아왔다. 웬일로 농담을 받아 줘? 놀란 니키엘이 스프를 바라보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리자, 율란은 이미 시선을 피한 뒤였다. 그는 하인에게 유렌지 즙으로 만든 주스를 더 가져오라고 말했다.
니키엘은 피식 웃으며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두 사람이 앉기에는 넉넉하지만 전날 만찬장에 있던 것보다 훨씬 작고 좁은 식탁이어선지 아침 햇살을 받은 율란의 금안이 잘 보였다.
“살쪄서 돌아가겠어. 어제도 양보다 많이 먹은 참인데.”
“전하는 좀 더 드셔야 합니다. 어제저녁도 말로만 많이 드셨지 실제 양은 갓 태어난 늑대 새끼보다 적게 드셨으니까요.”
보통 새모이라고 하지 않나? 갓 태어난 늑대 새끼에게 비교당한 니키엘이 피식 웃자, 율란이 왜 웃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니키엘은 때마침 유렌지 주스를 내온 하인에게 잔을 받아 들며 입가를 가렸다.
“오늘은 그럼 내일 있을 출정식을 준비해야겠군.”
“출정식이래 봤자 폐하께선 참석하지 않으실 테니 간략할 겁니다.”
“부왕께서 참석하지 않으신다고?”
권력욕이 넘치는 왕이 마물 토벌 출정식처럼 정치적으로 좋은 패를 놓칠 리가 없는데 희한했다. 니키엘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율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해 니키엘 역시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짐을 챙겨 두긴 했으나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 같소.”
“웬만한 것은 대공가에서 준비할 것입니다. 전하께 불편 없도록 할 것이니 간략하게 챙기시면 됩니다.”
니키엘은 그 말을, 괜히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 들고 와 보부상의 핏줄임을 뽐내지 말라는 말로 들었다. 짐이 많으면 거슬리니 말이다.
행군 떠날 때 짐이란 가벼울수록 좋다는 걸 아는 군필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율란은 그런 니키엘의 표정을 보며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니키엘이 더 입을 열지 않자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다물어 버렸다.
따끈한 가을 햇살이 창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오고 바깥 정원의 전경은 훌륭했으며, 아침 식사도 입에 맞았던 니키엘은 만족한 부분에 집중하며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율란은 그런 니키엘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몇 번 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두 사람이 그 테이블 위에서 유의미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 채 식사는 끝이 났다. 니키엘이 왕자 궁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
궁으로 돌아온 니키엘은 폴에게 토벌 대회 출정식이 앞당겨졌다고 말하며 자신도 짐을 꾸렸다.
“세상에! 그걸 전날, 그것도 해가 태양신 배꼽에 떴을 때 말씀해 주시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폴은 기겁했다. 이사 가자는 것도 아닌데 이것저것 분주하길래 아까 전 율란의 충고를 떠올린 니키엘은 하는 일 없이 잔소리만 하는 영감처럼 휘휘 손을 내저었다.
“에헤이, 그런 걸 뭘 가져가. 됐어. 두고 가. 에헤이, 그건 또 왜 챙겨. 가져가면 다 짐이야. 두고 가.”
“다 필요하다구요!”
폴은 말리는 니키엘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니키엘이 보았을 때 폴이 챙긴 짐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뿐이었다. 대체 마물 잡으러 가는데 머릿결을 좋게 만드는 보나나 크림은 왜 가져간다는 말인가.
“이런 거 챙겨 갔다가 수장들한테 욕만 먹어. 민폐 끼친다니까?”
민폐 금지의 나라에서 온 니키엘로서는 짐을 간략하게 줄이고만 싶은데 충성심이 이상한 쪽으로 발달된 폴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니키엘이 몇 번이고 말려 봐도 계속해서 짐이 늘어만 가길래 나중에는 니키엘도 포기했다.
“그래, 우리 세간 살림 다 싸 짊어지고 갔다가, 여차하면 헨젤과 그레텔처럼 하나씩 버리고 오자고.”
“휀줼? 그뤠퉬?”
“오, 발음 죽이네.”
한국어는 외국인처럼 발음하면서, 헨젤과 그레텔 발음은 잘하는 것이 신기해 킥킥 웃다가 정신 사납다며 쫓겨났다.
쫓겨난 김에 연구 자료를 위한 도구들을 챙기기로 한 니키엘은, 혹시 루시안에게 서적이나 양피지, 펜과 잉크들을 챙길 수 있는 함이 따로 있나 싶어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루시안 역시 연구를 좋아하니 아주 편리한 함을 따로 갖추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방탕하게 놀기만 한 니키엘의 물건에는 금값보다 비싼 향유는 있어도 그런 편리한 물품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