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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11)화 (111/130)

111화

“어…. 아니….”

방금 전까지 루시안의 살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낀 탓에 충분히 놀라 있던 니키엘은 루시안이 태도를 바꿔 짐승의 페로몬을 흘려 가며 다가오자 이성이 뿌리채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충동이 몰아쳤다. 충동이 강렬한데, 그 충동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알 수 없어 목이 마를 지경이었다. 니키엘은 마른침을 삼키느라 목울대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루시안의 목덜미나 장밋빛 뺨, 아몬드 형태로 아름답게 조각해 놓은 듯한 눈매 등을 하염없이 시선으로 훑었다.

‘아니, 미친 내가 왜 이러지…. 개변태 한 교수 새끼처럼 눈깔 관리를 못 하겠네….’

빨리 정신 차리라고 저를 다그쳐 봐도 니키엘의 시선은 아예 루시안의 입술 선을 훑고 있었다.

니키엘이 자신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았는지, 루시안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혹 발트 대공의 공작저를 찾으셨습니까.”

“…그건 맞소만….”

거기까지 대답한 니키엘은 아까부터 자신이 왜 이렇게 넋을 놓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기 핑계를 대었지만, 루시안이 제 주변에 살기를 흘린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움직이지 않는 머리를 굴려, 니키엘은 간신히 질문을 짜내었다.

“나는 공께서 왜 이렇게 적대적인 기운을 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러나 니키엘의 그 추궁에도, 루시안은 딱히 미안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탑 아래서 자신을 껴안는 손에 움찔하고 놀란 기색에 대해 사과할 때가 더 진심 같았다.

“별것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저?”

친근하고 사근한 남자로만 알고 있던 루시안이 살짝 시큰둥한 얼굴로 별거 아니라는 말과 함께 포문을 열자, 니키엘은 저절로 한쪽 눈썹이 솟았다. 루시안이 그런 니키엘을 보며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저 다른 수놈의 냄새가 전하께 묻어 있는 것이 뱀 껍질을 벗겨 내는 것만큼 고통스러워 그렇습니다.”

예…? 뭘 벗겨 내요…?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혹시…! 지금 탈피가 시작되는 건가…? 뱀의 탈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루시안이 광증으로 인해 뱀으로 화한 모습은 본 적 없지만 분명 거대한 이무기 같을 것이다.

그만한 뱀이 탈피한다면 마땅한 크기의 뱀 동굴이 있어야 할 텐데 수도 근처에 그런 큰 동굴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루시안처럼 커다란 개체들은 탈피를 위해 시간을 얼마나 소요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소요 시간이나 탈피 방법에 따라 루시안이 어느 종의 뱀인지를 확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하다고 들었는데 타이판인지 아니면 보아뱀 종인지 궁금해.’

그러나 니키엘의 학문적 호기심은 허리에 둘러진 팔 때문에 점점 스러져 갔다. 니키엘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이 뱀처럼 조여 오기 시작한 것이다. 니키엘은 당황스러웠다.

“그, 공…. 우리 사이가 너무 가깝지 싶은데.”

“그렇습니까? 전하께서 주신 해 가리개 안경을 저택에 두고 온 터라 오늘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거리감이 명료하지 않군요.”

…뭔 소리야. 여긴 햇빛도 잘 들지 않는데.

알비노라 햇빛에 약한 루시안 때문에 그의 연구실은 창이 막혀 있었다. 빛이 들어올 구석도 없는데 앞이 흐릴 정도로 눈이 보이지 않는다니. 그래 놓고 남의 눈동자는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는 저 발칙한 적안은 무엇일까.

니키엘은 기가 막히다는 듯 비키라고 강경하게 대꾸했다.

“잠깐…. 읏, 나와, 나와 보시오….”

아니, 강경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루시안의 목덜미에서 풍겨 오는 짙은 페로몬 향 때문에 점점 더 옅어지는 중이었다. 오히려 루시안의 목덜미에 코를 박아 넣은 채 숨을 몰아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니키엘은 옮겨붙듯이 제 뺨에 옅은 장밋빛 홍조가 생긴 것을 알지 못했다. 사실, 루시안이 특별히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가슴팍에 니키엘의 상박이 붙어 있을 뿐이며, 그의 고개가 니키엘의 목덜미를 향해 기울어져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서로의 목빗근에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일 뿐.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니키엘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미친! 요 며칠 운동을 좀 게을리했더니!’

그렇게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니키엘은 지금 당장 핑계 댈 것이 필요했다. 그 핑계가 제법 먹힌 것인지 니키엘은 다리 사이에 괜스레 힘이 가는 걸 무시하며 루시안의 가슴팍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루시안은 그런 니키엘을 눈만 내리깐 채로 바라보며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불에 달궈 이글거리는 홍옥 같은 적안을 숨긴 채로, 뱀은 천천히 물러나 주었다. 아직은 다정한 친구로 남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멍청한 네발짐승들에 대한 경계도 중요했지만, 너무 조급하게 다가서면 사냥감들이란 으레 눈치를 채기 마련이다.

옅은 새 냄새도 함께 느껴지는 걸 보아 하니, 니키엘이 그라실 저택에 방문한 동안 지카리 역시 그곳에 있던 건가 싶었다.

‘씹새끼들끼리 전하를 중간에 두고 싸운 모양인데.’

나름 점잖은 구석이 있던 루시안이었지만 연적들을 떠올리자 혈류에 뱀의 독액이 도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가을이 깊은데 더우신가 봅니다.”

때문에 루시안은 싱긋 웃으며 그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니키엘은 자신에게서 물러나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루시안의 아름다운 얼굴을 살짝 풀린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방금 전 루시안이 했던 수작을 알고 있다는 양 어이없어 보였다.

루시안이 그런 니키엘을 보며 너무했나, 하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기분 풀리셨소?”

척추가 노곤하게 풀린 탓인지, 니키엘이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젖히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안은 대답 없이 그의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에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다정하던 이가 이렇게 화를 내니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전하.”

“기분 풀렸으면 됐소.”

니키엘이 피식 웃으며 말을 마쳤다. 아랫배가 단단해지고 허벅지 안쪽의 근육들이 잔뜩 조여 온 상태에 이르렀다가 긴장이 탁 풀어지자 노곤한 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니키엘은 끙, 하고 앓으며 등받이에 기대어 젖힌 목을 몇 번 움직였다. 빳빳하게 힘을 받고 있던 목 근육이 뭉근하게 이완되자 그제야 멍한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루시안은 아직도 니키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것이 이상하여 니키엘이 그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니키엘은 루비같이 맑게 반짝이던 루시안의 눈동자가 오늘은 핏방울처럼 검붉은 색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보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루시안은 눈을 내리깐 상태로 니키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은실을 엮어 건 듯한 속눈썹에 가려진 깊은 색을 띠고 있는 적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침묵 속에서, 루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니키엘의 어깨 위로 제 이마를 톡, 내려놓았다.

차르륵, 소리가 들릴 것같이 결 좋은 그의 머리카락이 니키엘의 어깨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에 간지러움을 느끼던 찰나였다.

“…저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없으셨다는 게 잔인하십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핀잔을 들은 니키엘이 상황도 잊고 살짝 퉁명하게 말했다. 루시안에게 마음을 많이 연 탓에 이런 식으로 투덜거림이 나오기도 했다. 루시안은 한동안 대답 없이 숨을 깊게 몰아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주신 이유를 들어야겠습니다. 혹 이유가 대수롭지 않다면 그저 오롯이 저를 위해 방문해 주셨다는 착각에 이 땅이 마물에 의해 망하든 말든 상관없어질 것 같으니 말입니다.”

***

그리하여 대수롭지 않게 함이나 빌리러 한창 바쁜 마법국에 방문했었던 니키엘은 애매한 표정으로 왕자 궁을 향해 걷는 중이었다.

“그래서 오시니스를 망하게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루시안이 뜻한 바가 헷갈려,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걸었다. 함을 빌리러 왔다는 니키엘의 말에, 루시안은 마법국에 있는 것들은 왕궁의 궁무원들이 쓰는지라 모양이 투박하고 무거우니, 아예 저녁에 함을 따로 준비해 저택에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럴 필요가 있어…? 그냥 아무거나 빌려주면 좋겠는데….’

니키엘이 미안한 낯을 숨기지 않으며 말하자, 루시안은 그것이 제 기쁨이라며 니키엘의 손을 가져가 손등 위에 짧게 키스했다.

“손등 키스 정도야 여기서는 그냥 인사라고 해도….”

니키엘은 아까 전 루시안을 떠올려 보자 손등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귓등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라 왕자 궁까지 뛰어갈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마법국 역시 궁의 관료들이 일하는 관료청 주위에 있는지라 사냥부 건물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가스파르 백작 건은 어떻게 되었지?’

마물 토벌 대회의 시작이 앞당겨진 탓에 경황이 없어 백작에 관한 소문들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니키엘의 소식통이야 폴이 다였으니 레이먼이나 유능해 보이던 그의 부관에게 넌지시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 자식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라 괜히 물어봤다가 싸움이나 나지 않을까 싶은데….’

얼마 전, 그의 희한한 부탁을 수락하여 레이먼을 이름 석 자로 부르기로 하였지만 그건 또 무슨 변덕인지 니키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수장 나으리들께서 원체 감정적이시니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나.’

학문적 고민 외에는 깊게 고민하지 않는 니키엘에게 그들은 버거운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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