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그의 그런 반응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니키엘은 레이먼이 갖고 있다는 여행용품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대는 무얼 갖고 있는데? 투르운 공에게는 한없이 들어가는 마법 함이 있다 하였어. 그 속에 책을 한가득 실을 수도 있다 했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니키엘은 그 마법 함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그간 우마차 가득 책과 양피지들을 챙겨 가다가 기사들에게 눈총을 받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민폐 캐릭터로 찍히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도움이 되고 싶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폐나 끼치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물을 종과 속으로 나누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양피지만이라도 가져가 보자고 마음먹었던 참인데 물건이 끝도 없이 들어가는 함이라니. 루시안은 정말 좋은 남자였다.
니키엘이 루시안에 대한 신뢰를 더하고 있을 때, 그런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던 레이먼이 물었다.
“…그 뱀 새끼가, 아니 투르운 공이 함을 내어 준 것 같은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빈손이십니까?”
“아, 이따 저녁에 왕자 궁에 직접 방문해 가져다준다고 하던걸. 함이 저택에 있어 사람을 시켜 가져와야겠다고 하길래 그러시라 했지.”
“저녁이요….”
레이먼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싱긋 웃었다. 여전히 사근한 미소였지만 이번엔 어쩐지 칼날을 품은 느낌이었다. 그의 귓등에 내내 머물던 홍조 역시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생각해 보니 전하, 제가 드리고 싶은, 전하께서 쓰실 만한 물건도 저택에 있군요. 저 역시 저녁에 왕자 궁으로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번거롭지 않겠어?”
니키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얘들이 왜 갑자기 다 우리 집으로 온다는 거야. 외출했으니 방에 처박혀 쉬고 싶은데 저녁 있는 삶에서 없는 삶으로 변해 버리자 의욕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 놈 정도는 괜찮지만 그 이상 만나는 건 기력이 달리는 일이었다. 일정 이상 말을 하게 되면 급격하게 체력이 깎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니키엘은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났다. 사실 많다 해 봐야 루시안과 레이먼 단둘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루시안은 되는데 넌 안 돼, 하고 친구 따돌리는 초등학생처럼 말하기에 니키엘은 너무나 고학력이었다.
“그래요…. 뭐, 그러도록 하시게.”
니키엘의 떨떠름한 승낙에도 일단은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낸 것이 기쁜지 레이먼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가, 니키엘이 그걸 빤히 바라보자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왠지 부끄러워하는 듯해,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레이먼을 슬쩍 놀렸다.
“왜. 웃는 얼굴이 더 보기 좋은데 가리고 그러시지.”
“…전하.”
그러자 레이먼의 목덜미부터 또 한 번 화르륵 달아올랐다. 니키엘은 멈칫했다.
‘아니 아까부터 뭔 스리라차 소스처럼 빨갰던 게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런 거였어? 뭐가 부끄럽길래 그렇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을까.’
의아함이 들어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자 레이먼이 읏,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니키엘을 에스코트하는 동작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길을 가다가 깨진 보도석이라도 발견하면 니키엘을 부드럽게 당겨 비켜 걷게 만들었다.
‘이야, 얼굴 참한 데다 키 크고 몸 좋은데 매너까지 완벽하니 인기 많을 만하구만.’
니키엘은 딱히 레이먼에게 도움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었다. 뭐 때문에 부끄러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태도가 웃겨 간간이 웃음이 나오던 참이었다.
그러다 니키엘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넌지시 물었다.
“그, 가스파르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데. 사교계 소문들이라든가….”
“아,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없습니다.”
빨갛게 변한 귓등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던 레이먼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가스파르의 일로 소문이 이상하게 나면 수습하려 했던 니키엘은 그가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먼의 어조에 확신이 차 있었기 때문이다.
말 몇 마디를 나누기 전까지는 레이먼에 대해 옅은 무관심과 함께 저이 역시 나를 탐탁지 않아 할 거란 생각을 하고 있던 니키엘은 그와 말 몇 마디를 나누자 레이먼이 저를 대하는 태도에 그렇게 악의가 넘쳐흐르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전에는 분명 자신을 대할 때마다 적의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어쩐 일인지 분위기가 말랑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고 존칭 역시 생략해 달라고 한 것이 율란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레이먼의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일이래. 성격 나쁘게 굴 때는 언제고.’
흥, 하고 콧바람이 나오는 일이었지만, 니키엘의 성격상 좋은 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내색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멀리 길을 나서야 하는데 사이가 나빠서 좋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길은 벌써 끝이 나 왕자 궁으로 가는 널따란 길목 앞이었다. 니키엘은 깔끔하게 말했다.
“더 바래다줄 필요는 없네. 세 살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 정도는 혼자 찾아갈 수 있어.”
“…오늘은 여기까지 허락하신다는 말씀이시군요.”
어조가 묘해 멈칫했던 니키엘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음에는 차 한잔 하고…. 아니지, 그대는 그런 걸 싫어하잖아.”
“그게 무슨….”
“왕자 궁에 찾아오는 건 다 해 놓고서 내가 하는 초대는 정숙하지 못하다, 함부로 산다 경멸하지 않았어.”
“전하, 그건-.”
레이먼의 낯빛이 금세 굳어졌다. 별 뜻 없이 말했던 니키엘은 걷다 말고 자신이 뱉은 말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아니, 비난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레이먼, 그대의 말처럼 조심할 필요가 있는 일임을 깨달은 거지.”
레이먼의 안색은 갈수록 안 좋아졌다. 니키엘은 그러거나 말거나 저 혼자 중얼거렸다.
“부러 초대할 만큼 친근한 사이도 아니고.”
덧붙인 말에 레이먼이 멍하게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은 또 처음 보는 터라 잠시 말을 멈추었던 니키엘은 어쨌든 이만 가 본다는 말과 함께 등을 돌리려 했다.
“…차를 마시자고 초대할 만큼 친근하게 지내는 이가 있으십니까?”
그 질문만 없었다면 말이다. 니키엘은 그 물음의 진의와 질문 그 자체의 답을 떠올리느라 잠시 멈칫했다.
‘초대할 만큼 친근한 사람? 그야….’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기도 전에, 레이먼이 싱긋 웃었다. 방금 전까지 짓던 웃음과 똑같은 사근한 미소임은 변함이 없는데, 어째 날이 선 것이 니키엘을 섬뜩하게 만들 정도였다.
“티 타임에 그 뱀 새끼를 초대하신 적이, 있군요.”
“응? 음….”
이걸 있다고 해야 해, 없다고 해야 해. 우리 집에서 차나 마시고 가, 라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그렇게 말해도 될 정도로 친근한 사이가 된 것은 맞았다. 실제로 루시안이 니키엘의 초대로 왕자 궁에 방문한 적은 드물지만, 니키엘은 벌써 몇 번이나 루시안의 연구실에 가 음식도 얻어먹고 춤 연습도 하는 등 꽤 친우다운 관계로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니키엘이 그를 생각하며 답하지 않자, 레이먼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아니…. 웃는 거 맞아? 압박감 미쳤는데?’
니키엘은 본능적으로 레이먼이 꽤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니키엘과 사이가 안 좋았을 때처럼 표정을 굳히고 으르렁거리는 것보다 더욱 압박감이 심했다.
그러나 루시안의 살기나 율란의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서 있다가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와서 뿔로 들이받을 느낌…?’
루시안이나 율란이 첨예하게 벼려진 날카로운 기색으로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을 것 같은 느낌이라면 레이먼이 주는 압박감은 태산처럼 묵직했다. 거대한 것에 이대로 짓눌릴 것 같은 느낌.
니키엘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자 그제야 기색이 삽시에 거둬지긴 했지만 말이다. 레이먼은 다시 한번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아까부터 뱀 냄새가 진동하셨군요, 전하.”
“아니, 무슨 냄새가 난다는….”
아직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니키엘이 멍하게 레이먼의 말에 대꾸하자 레이먼이 니키엘을 에스코트하고 있던 팔을 풀어 그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일단은 들어가시지요. 배웅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족하실 만한 걸 준비하려면 저도 바쁠 것 같아서요.”
“거창한 게 필요한 건 아닌데…. 난 그저 여행에 쓸 만한 물품 중 신기한 것들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는 거였어. 기사들에게 폐가 되면 안 되니 말이야.”
루시안의 함은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 온 니키엘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이 세계의 것은 마법과 기술이 합쳐진 신기한 것들이 많으니, 레이먼에게도 그런 것이 있나 관심을 보였던 것뿐이다.
‘아니, 멀쩡히 길 지나가다가 갑자기 웃으면서 사람을 뿔에 찔러 죽일 것 같이 굴질 않나. …역시 순록이야. 포악하기 그지없군.’
순록이 순한 성격의 초식동물이 아님을 알고 있는 니키엘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전하와의 동행을 폐라고 생각하는 기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먼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니키엘에게 말했다. 니키엘은 그 말을 반만 믿었다. 근래에는 사고 치지 않아 평판이 조금 좋아지긴 했어도 아직까지 토벌 대회를 떠나는 기사들 중 저를 반기는 이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러 그 말을 꺼내어 빈말일 뿐인 부정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니키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왕자 궁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자, 뒷짐을 지고 서서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던 레이먼이 다시 한번 싱긋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당최 성격이 왜 저렇게 꼬였는지 알 수가 없군.’
니키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마저 걸었다.